멍청이의 포트폴리오
커트 보니것 지음, 이영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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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한 새해!


멍청이의 포트폴리오, 커트 보니것, 2017.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가는구나! 쓰레기 날의 다음날이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음에도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을 2018년엔 너무도 미안하게도 말이다. 그래서 소설 속 작가의 “쓰레기 날의 다음날이다”는 말은 빼고 싶었지만, 새해라고 다를리 없는 어제의 지속이기에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가는구나! 쓰레기 날의 다음날이다!”를 외친다. 더구나 책 제목은 『멍청이의 포트폴리오』다. 새해 인생의 포트폴리오를 잘 정리해보려는 생각은 이제까지 경험한 바 부질없다로 귀결되기에 작심삼일조차도 하지 않는 새해를 맞았다. 그냥 살아야지. 새삼스럽게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지 못해 씁쓸하고 자괴감에 빠지지 말고. 시니컬과 아이러니, 유머에 특출난 작가의 책을 보면 좀더 새해가 주는 무게감을 덜어낼 수 있을까.

  『멍청이의 포트폴리오』는 커트 보니것의 미발표작을 모은 책이다. 그동안 커트 보니것의 책속 인물들을 만날 수 있어 반갑기까지 했다. 생전에 발표하지 않은 책들이 세상에 나온 것을 보면 작가는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시니컬하고 유머러스한 말들을 내뱉었을 듯하지만 그건 뭐 알 수 없으므로.

  일곱 개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단편소설과 에세이다. 미발표작이라는 것이 너무 확연히 드러난 것은 마지막 SF소설로 접속사가 쓰여진 채 이어지지 않고 있다. 더 이상 그 말 뒤에 다른 말을 접속하지 않을 커트 보니것은 벌써 11년 전인 2007년에 사망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책을 읽을 때마다 이 작가는 아직 살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후세계에 관한 키보키언 박사의 이야기들을 많이 봐서 그런가. 단편 하나하나마다 아이러니가 가득 담겨 있다. 사망한 작가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건 그렇지만 왜인지 자살시도와 화재 사고 사망에 이르게 된 계단의 사고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닥터 키보키언 박사보다도 나이 든 데이비드 힌든이 생각나기도 하고.

 

시간에 사로잡히는 것은 거의 미친 짓이고 허우적대는 꼴이며 비극에 대한 반응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고요한 이 순간, 행복했던 시절로 가고 싶다는 소망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고 확신했다.

 -  「‘소심한’과 ‘멀리 떨어진 곳 사이에서」


  경험이니 시간에 관해서는 항상 과거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니 딱히 행복한 2017년이 아님에도 이미 경험했다는 이유로 2017년이 2018년보다 더 행복하게 느껴진다. 이런 비극이라니. 미래를 희망하는 일에 주저한다는 것만큼 서글픈 일이 있을까. 처음의 한탄은 결국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을 지 모르겠다. 젊은 화가 데이비드 힌든의 이유는 보다 확실하다. 2주전 사망한 아내와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리고 또한 제 눈앞에서 고기를 낚아 올리던 어부의 실족사를 경험하게 되는 순간 그는 완전한 분노에 휩싸일 정도다. 그렇게 시간이 인간을 가져가버린 것에 대해. 다행히 찰나의 순간 닥터 키보키언 박사의 도움으로 어부는 살아나고 죽음의 순간에 지난 시간을 경험했다는 말에 데이비드 힌든은 시간탐험을 하기로 결심한다. 어떻게? 키보키언 박사가 오는 순간에 맞추어, 잠시 숨을 넘어가는 순간을 만들어서, 그러니까 임사체험을 통해서 말이다.


그는 아주 잠깐 죽어서 영원을 탐험한 뒤 다시 살아나, 산 자들에게 그들이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가장 거대한 성운만큼이나 영원한 우주의 일부라고 말할 것이다. 시간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더 이상 살인자가 아니다.

 -  「‘소심한’과 ‘멀리 떨어진 곳 사이에서」


  그의 이 탐험은 위와 같은 말을 하기 위한 중대한 목적을 갖고 있다. 그는 이 시간여행, 참험을 위한 시간을, 타이밍을 만든다. 그러나 아니러니의 작가가 만든 결말은….

  「멍청이의 포트폴리오」는 양부모가 물려준 유산을 사기꾼들에게 뺏겨 탕진할 것 같은 청년을 쫓아다니며 가족과 명예를 위해서는 돈의 소중함을 알고 계획에 맞게 활용해야 한다며 가르치는 주식 포트폴리오 매니저의 이야기를 담았다. 다만 이 매니저는 그가 그토록 청년에게 돈을 소중히 투자해야 한다고 위치는 이유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청년은 매니저의 말에 따라 돈보다도 더 가족을 소중히 하고 있는 모습을 실천하고 있다. 주식 매니저가 실제로 원한 것은, 그것이 아닐 텐데도.


 “나의 행복을 이렇게 순순히 보내버릴 거라고 생각했나요?”

 “내가 당신의 행복이라고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뭐죠?” 

- 「스노우, 당신은 해고예요」


  참, 해고도 쉽고 사랑도 쉽다. 「스노우, 당신은 해고예요」에는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 일관하는 두 남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쁜 여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를 거라는 빠진 남자, 젊고 예쁜 여자라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집착하는 중년의 남자, 아내가 있는. 정말이지 예쁜 외모를 지녔기에 자신의 행복이라고 따를 것을 종용하는 남자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세상의 온갖 짜증을 끌어모아도 모자랄 듯하다. 이 편견 속에 휘둘리지 않은 알린 스노우에게 박수를!

  중년, 노년, 신혼의 미국인 세 커플이 파리를 여행하는 「프랑스 파리」 역시도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각각의 커플들이 마주치는 상황과 그들이 생각하는 삶의 순간들과 사랑이 펼쳐지는데 웃음과 페이소스가 묻어난다.

  이 감정은 아마도 작품마다마다 등장하는 어리숙한 멍청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분노와 적의보다 웃픈 느낌이 이 책 전체에서 느껴진다. 지독하게도 처참해 보이는 순간에도 연민,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니 적의와 악의가 가득한 사람들보다도 이들 소심하고 나약한 멍청이들이 있는 세상이 좀더 살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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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저넌에게 꽃을
대니얼 키스 지음, 구자언 옮김 / 황금부엉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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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쿤에게도 꽃을


앨저넌에게 꽃을-운명을 같이 했던 너 Flowers for Algernon (1959년)


http://www.hankookilbo.com/v/b414794e3315451d9cdd761f62ff3f94 


  모피가 될 운명의 라쿤이 제게 겨눠진 총을 잡는 장면은 인간 중심의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인간의 아래로 두어 인간생활의 필요품쯤으로 여기는 인간의 삶, 그러면서도 간혹 멸종동물을 거론하며 공존해야 인류가 생존한다 말하는 지극히 ‘인간적’ 삶. 라쿤을 걱정하는 마음 또한 인간중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을 지도 모른다. 라쿤이든 어떤 동물이든 잔혹하게 학대하다가 동물에게 행한 일이 인간에게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거라는 생각. 이미 그런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이 책은 일곱 살 아이의 일기장을 읽는 느낌으로 시작된다. 뭐가 잘못된 건가 싶어 다시 책을 뒤적이게 만든 맞춤법 틀린 노트는 32살의 찰리가 기록하는 자신의 삶이다. 누군가에는 경과보고서쯤으로 불린다. 과학소설, SF소설로 분류되는데 다소 예스럽게 느껴지는 소설 속 배경은 1959년 출간된 작품임을 알고난 후 이해되었다.

  어릴 적 앓은 병으로 지적장애를 안고 빵가게 점원으로 살고 있는 32살 찰리에게 변화가 찾아온 건 뇌수술과 약물치료로 지적장애를 고쳐보겠다는 교수진들의 제안이다. 지적장애로 친구들과 가족에게도 차별을 받으며 자란 찰리는 실험쥐 앨저넌처럼 임상실험에 참여하여 지적장애 치료에 들어간다. 찰리는 글을 배우며 수술과정과 이 변화들을 기록한다. 똑똑한 사람이 되고픈 찰리의 욕구는 엄마에게 사랑 받기 위한 열망이었다. 찰리의 엄마는 찰리가 저능아라는 것에 공포와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꼈고 동생을 낳은 뒤에야 자신이 정상적인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찰리를 바꾸려는 노력을 그만두었다.

  맞는 것 하나 없는 맞춤법으로 글을 채워가던 찰리의 노트의 변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찰리의 지능은 발달하여 아이큐 185로 치닫는다. 어떤 논문이든 척척 이해하는 찰리의 지적능력을 보건대 찰리의 뇌수술은, 교수들의 이 연구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지능이 발달하면서 찰리는 세상에 대해 알아가는 만큼 삶과 인간,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해나간다. 지능이 좋아지면 세상살이는 마냥 좋고 행복할까. 저능아로 살던 때와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 때 모두가 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찰리는 깨닫는다.


지능은 인간에게 주어진 뛰어난 능력들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지식을 추구하다가 사랑을 몰아내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제가 최근에 발견한 다른 사실이 있는데요. 가설로 제시하죠. 애정을 주고받을 줄 모른다면, 지능은 정신적이거나 도덕적인 붕괴로 이어지고, 신경증이나 정신병까지 낳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기적인 목표에 온 정신이 팔려 타인과의 관계를 배척하면, 분명 폭력과 고통만 남게 되겠죠.


  그렇다면 찰리의 부모는, 가족은 어떨까. 아빠는 아들의 머리를 깎으면서도 아들인지 모른다. 제 아들을 못 알아본 엄마는 아들임을 알자마자 폭언과 폭행을 가한다.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찰리의 소망은 가족에게서 완성되지 않는다. 절대 한발자욱도 나아가지 않는다. 다른 모두에게도 마찬가지다. 지능이 좋을 때에도 나쁠 때에서 찰리를 배척하는 동료들과 실험실 표본으로 대하는 교수들에 대한 배신감, 분노, 존재에 대한 허무 등 찰리는 인간적인 저항을 느껴간다. 그리고 앨저넌은 점차 퇴행을 보이고 마침내 찰리가 만들어준 무덤속에서 잠자고 있다.


나는 두렵다. 삶 혹은 죽음 혹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사실이 두려운 게 아니라, 세상에 나라는 존재가 전혀 없었던 것처럼 낭비되는 것이 두렵다. 그런데 입구를 지나가려 하자 내 주위에 압력이 느껴지면서, 동굴의 입구 쪽으로 거친 파도와 같은 움직임이 나를 밀어낸다.


  모든 라쿤에게 꽃이 필요하다. 뒷마당에 있는 앨저넌의 무덤에 꽃을 놓아 달라고 했던 찰리의 소원처럼. 찰리의 친구이자 찰리와 같았던 멋진 쥐 앨저넌에게 꽃을. 털은 솜처럼 부드럽고 눈동자는 검정색이고 둘레가 분홍색인 쥐, 앨저넌에게 꽃을. 그것은 제 무덤에도 꽃을 놓아달라는 찰리의 부탁으로 들린다. 모피가 아니라 한 마리 라쿤이라 말하는 듯한 라쿤의 총을 잡는 손짓이 똑똑하지 않을 때나 지금이나 한 인간이었다고, 감정을 지닌 인간이었다고 외치는 찰리의 절규같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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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씽 에브리씽 (예담)
니콜라 윤 지음, 노지양 옮김 / 예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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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아무도.


에브리씽 에브리씽 Everything, everything


 

 세상 밖은 위험해. 하지만 가장 위험한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세상 모든 것에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 있는 SCID라는 중증복합면역결핍증. 이 병을 앓고 있어서 17년 동안 집 밖으로 한 번도 나간 적 없는 매디는 다행히 의사인 엄마 덕분에 그리고 엄마가 돈이 많은 덕분에, 병원이 아닌 무균 처리된 집안에서 세상을 알아간다. 특정한 것에만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 만큼 매디에게는 정말로 세상밖은 위험할 지 몰랐다.

  책과 인터넷, 상상 속에서 세상을 알아가는 매디에게는 3D의 생생한 현실감이 필요했겠지만 매디의 현실은 어김없이 무균처리 되어 배달되는 2D의 세상이다. 옆집으로 이사 온 올리가 아니었다면. 17세 소녀가 가지는 자연스러운 반응일까. 창밖으로 훔쳐본 올리는 생생한 3D로 자리잡아가고 매디의 생각은 올리가 가득하다. 불치병에 걸린 소녀와 조숙하고 용감한 소년의 사랑과 우정. 소설 『에브리씽 에브리씽』은 이 흔한 이야기를 매우 경쾌하게 그리고 아주 재밌는 스타일과 일러스트로 표현하고 있다. 동화같은 느낌과 함께.

  왜 사춘기 소년소녀들은 그토록 부모들 말은 듣지 않으면서 이성의 말에는 맹목적인가. 또래 올리와 함께 균이 제거되지 않은 세상밖으로 나가고픈 매디의 의지는 강해지면서 누워만 있는 세상이 아니라 좀더 다른 세상을 갈구하게 된다. 처음엔 그저 아주 작은 정도의 바람을 가져보지만 점점 더 원하게 되는 세상. 그 세상에 바로 올리와 함께 하는 자연과 사랑이 있다. 결국 엄마가 보여주는 세상과 올리가 보여주는 세상에서 매디는 위험과 사랑을 선택했다. 엄마의 걱정과 눈물이 억압으로 느껴진다면야 더욱 더 불꽃같은 삶과 자유를 원하게 될 수밖에. 마침내 무균의 집을 탈출해 온갖 균들의 세상으로 나간다. 매디에게는 그것조차도 환상이었다. 다만, 그 온갖 균 하나로 인해 죽을 정도로 아프기 전까진.


이게 전부(everything)가 아니란 걸 알아.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보다는 낫잖아.


  『에브리씽 에브리씽』이 생각난 건 귀엽고 깜찍한 매디가 생각났다기 보다, 인터넷을 장식한 ‘세가와 병’ 때문이다. 세가와 병이란 도파 반응성 근육긴장 이상이라는 질환으로 뇌성마비와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고 한다.

  왼발목을 다쳤는데 오른발을 절단한 의사 얘기를 듣고 우리나라는 안 그러겠지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황당한 사건들은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기사화되지 않은 많은 오진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생명을 잃은 경우도 많았다. 며칠전만 해도 타인의 진료기록으로 멀쩡한 사람을 수술한 의사가 있었다. 이번 세가와 병 오진 기사는 한순간의 판단으로만 벌어진 일이 아니라 그 충격의 강도가 높다.

  서모씨는 3살 때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 때문에 병원에서 뇌성마비 판정을 받고 13년 동안 치료를 받았다. 상태가 악화되어 몸을 가눌 수도 없었던 서씨는 물리치료실에서 뇌성마비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듣게 되어 다시 찾은 병원에서 세가와 병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세가와 병 치료약을 먹은 지 이틀 만에 오래도록 누워있어야 했던 서씨는 걸을 수 있었다. 서씨는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군데의 병원을 다녔다고 했고 기간도 13년이었다. 한 곳에서 한 의사에게만 진료를 받은 거라면, 어쩌면 그 의사가 한번 내린 진단에 대해 재고할 여지없이 환자를, 병을 대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몇 년 동안 여러 곳의 병원에서 똑같이 오진을 한다는 사실이 쉽게 수긍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 이상을 감지한 것은 물리치료사라니…. 기사로는 알 수 없으니 마치 오진에 대해 일부러 의사들의 카르텔이 형성된 것은 아닌가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에브리씽 에브리씽』에서도 그랬듯.

  13년 세월 동안 뇌성마비로 살아야 했던 서씨가 뇌성마비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기뻤을까. 단 이틀이면 나을 수 있는 병을 13년 동안 투병해야 했던 아이를 본 부모들은 기뻤을까. 이 거짓말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의 서씨가, 그의 부모님의 표정이『에브리씽 에브리씽』에서의 매디의 모습을 생각나게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가장 고통스럽게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그 사람의 행복이었음을 알았을 때 매디의 기분을 상상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주는 비극. 그 비극의 최종이 죽음이라면 차라리 원하는 삶을 살고 최종을 맞이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 매디가 알게 되는 진실. 17년의 오진에 대해 안 순간 매디 역시 기뻐하지 않았다. 기뻐할 수 없었다. 매디의 오진은 명백히 의도적인 오진이었기에 그것이 주는 충격은 헤아릴 수 없다. 상실과 충격이 인간의 마음에서 일으키는 폭력의 강도를 가늠하게 한다. 그러나 사랑이란 이름이 가하는 폭력 또한 만만치 않다. 사랑의 눈으로만 세상을 읽고 보게 되는 일도 많다. 매디 또한 사랑쪽으로 기울어 올리의 말에 행동에 더욱 이끌리게 되어 그뜻을 따르는 것처럼. 사랑이란 누구를 향해 있든 파괴력을 지닌다는, 행동력을 폭발시킨다는 생각이 언뜻 든다. 그리하여 사랑, 마냥 달콤하고 아름답기보다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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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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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달러에 팔렸습니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The Underground Railroad    


  “400달러에 팔렸습니다.”

  그냥 생각해도 많지 않은 돈인데 싶어 현재 환율을 확인해본다. 43만4,800원. 유럽으로 가려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리비아 노예시장에서 팔려 나간다는 CNN 뉴스 보도는 우리나라의 염전노예, 축사노예, 장애인 착취 사건과는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인종’ 때문이다. 염전 노예, 축사 노예 같은 일들이 잊을 만하면 나타나긴 했다. 그때마다 착취한 ‘인간’들의 잔인성과 무개념, 형언할 수 없는 인간성에 대해 비난했고 그들의 죄에 대한 처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종이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거기엔 “왜 뭐가 잘못됐는데”란 버팅김과 그것을 타당하게 받아들이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하긴, 세계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국가의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인종차별을 조장하고 지지하는 상황 아니던가.

  이런 기막힌 인식을 한번에 설명해주는 말이 콜슨 화이트헤드의 소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속에 있다.

  

“어딘지 모르겠는데, 사람을 훔쳐다가 파는 사람은 죽음에 처해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코라가 말했다. “그런데 뒤에서는 노예는 뭐든지 주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그리고 그걸 만족스러워해야 한다고요.” 다른 사람을 재산으로 갖고 있는 것은 죄이기도, 혹은 하느님의 축복이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만족스러워하기까지 해야 한다고? 노예 상인이 인쇄소로 숨어들어 가 그 구절을 쓴 게 틀림없었다.


“그 말 뜻 그대로다.” 에설이 말했다. “히브리인은 히브리인을 노예로 쓸 수 없다는 뜻이야. 그러나 함족의 자손은 해당되지 않지. 그들은 검은 피부와 꼬리로 저주를 받았어. 성경이 노예제를 비난하는 부분은 니그로 노예제를 말하는 게 전혀 아니다.”


“저는 피부가 검지만, 꼬리는 없어요. 제가 아는 바로는요―확인해볼 생각은 못했네요.” 코라가 말했다. “노예제가 저주이긴 하네요. 그건 맞네요.” 노예제는 백인들이 그 멍에를 메고 있을 때나 죄이지, 아프리카인들일 때에는 죄가 아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람이 아니라고 규정하지 않는 이상.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노예소녀 코라의 탈출기다. 19세기 미국은 노예제를 두고 남북간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지하철도’라는 흑인 노예 탈출 비밀 조직이 존재했고 작가는 이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여 지하를 운행하는 지하철도의 모습을 그려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잡혀온 할머니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대대로 노예가 된 코라가 어떤 계기로 탈출을 결심하고 탈출과정은 어떻게 전개되는지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한 사람의 필사적인 탈출기에 ‘흥미진진’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민망스럽지만, 코라의 탈출을 응원하는 입장에서 떨리는 심장을 좀더 객관화시킨다면 그말이 적당할 듯하다.

  레미제라블에서처럼 탈출자에 대한 긴장감을 촉발시키는 것은 뒤를 쫓는 자이다. 그가 얼마나 집착적이며 악랄한가가 얘기의 방향을 달리한다. 수많은 악랄한 인간들이 있음에도 20년 가까이 장발장만을 쫓는 자베르 경감 역할은 이 책속에서 노예사냥꾼 리지웨이로 나타난다. 이 노예사냥꾼은 노예사냥을 통해 ‘돈을 얻는다’라는 것 외에도 업무에 대한 신념을 품고 있다. 도망간 노예를 끝까지 쫓아 제 위신을 세우는 것과 절대로 탈출이라는 마음을 먹지 않는 공고함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신념이란 인생을 살아가는데 방향을 설정해주는 소중한 것이긴 하지만, 신념의 ‘내용’이 중요함을 자베르와 리지웨이를 통해서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노예사냥꾼 리지웨이의 신념은 농장에서 유일하게 탈출한 노예인 메이블, 코라의 엄마를 잡는 것이다. 당연히 메이블의 딸이 또다시 노예 농장을 탈출하여 자유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 

  자유의 땅인 북부 또는 캐나다로 가는 여정은 험난한 과정이다. 정착하는 역, 도시는 노예제에 대한 그 도시의 찬성여부에 따라 코라에 대한, 노예에 대한 다른 분위기를 전한다. 그렇기에 어느 도시에서든 코라는 자신의 의지 외에 타인,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백인들이 모두 노예제에 찬성하지는 않는 것처럼 흑인이라서 모두 노예제를 반대하고 탈출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노예가 처한 위험한 상황에 손을 내밀고 연대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고, 노예제에 찬성하거나 우호적인 행동을 보인 백인에게 잔인하게 대하는 백인도 있다. 이런 백인의 행동은 개개인의 인식에 따라 나타나겠지만 그 인식을 타당하게 만드는 것은 그 도시의 분위기이다. 집단이 정의하는 당연함과 타당함의 정도가 인간에 대한 잔인한 행동을 허용하는 근거가 된다. 

  자유와 생존, 인간 존엄을 찾아 농장을 탈출한 코라와 메이블, 그리고 수많은 노예들의 치열한 탈출기도 탈출할 꿈조차 꾸지 못한 채 비참한 생애를 사는데 머물렀어야 하는 수많은 노예들도 이 책속에 있다. 노예제를 다룬 무수한 이야기속의 내용과 같은데도 무엇이 이 책을 특별하게 만드는 걸까. 많지 않은 페이지 속에 작가는 이 모든 이야기를 녹여냈는데 속도감과 문장과 캐릭터가 그 시대를 풍부하게 상상해낼 수 있도록 해준다. 물론 코라에 대한 연민과 응원까지. 코라만큼 마음을 휘어잡는 메이블까지.

  실제로 미국의 지하를 달리는 지하철도는 없었지만 목숨을 걸고서 노예들의 탈출을 돕는 지하철도는 존재했다. 그 지하철도를 운행하는 이들은 모든 인간존엄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었다. 아니 신념까지는 아닐 지도 모른다. 당연한 인식에 대해서 특별한 신념으로 행해야 하는 시대라니, 생각할 지도. 어쨌든 그 시대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노예사냥꾼으로 살아간 리지웨이의 신념과 지하철도 요원들의 신념은 얼마나 다른가.

  “400달러에 팔렸습니다.”

  19세기에 일어난 일이 현재에 재현되는 이 상황, 개인의 잘못된 신념이 아니라 시대와 그 도시, 나라가 그것을 타당하게 만들어버리고 있다. 성경에서 따라야 할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가치는 눈감고 한문장, 한구절을 제 이기심과 제 이익에 맞추어 해석하는 것처럼, 누가 무엇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 가치를 제 본위로 해석하고 퍼뜨리고 있는지 참으로 경악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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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 제155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김난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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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세월이 가면 다 잊혀지겠죠.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오기와라 히로시, 2017-05-19.


  수채화같은 표지가 예뻤다. 이런 느낌의 책표지가 대체로 일본 소설이나 에세이에 자주 쓰이는 터라 예쁘네하고 오래도록 그냥 넘겼는데, 바다가 보고 싶을 때가 있고 바다에 가고 싶을 때가 있는 것처럼 이 책을 읽고 싶을 때였나 생각해본다.

  마침 이 그림이 가을이 들어서는 길목에 바라본 풍경과 닮아보였다. 그곳은 바다는 아니었고 강이었지만, 쌀랑한 가을풍경의 잔상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바다가, 강이 보이는 언덕, 그런 장소에 그런 공간에 아직 머물러 있고 싶은 마음 탓이다.

  단편집인 이 책엔 여섯 개의 이야기가 있다. 여섯 개의 이야기는 가벼웁게 잔잔히 흐르는 물처럼 흘렀다. 크게 출렁이지도 다른 것이 끼어들지도 않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그 물이 나를 흘러갔구나 싶은 느낌이 드는 책이었다. 가족과 상실, 그리고 시간이란 단어도 흘러갔다.

  첫 번째 단편 「성인식」은 딸의 죽음으로 깊은 우울 속에서 살다가 딸의 성인식에 참가하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억 속의 딸은 잊을 수 없어서 잊지 못해 방황하는 두 부부의 성인식에 참가하기 위한 고군분투가 참으로 애잔하게 다가오며 그들을 응원하게 된다.


지금 돌아가면 또 한탄과 회한의 날들이 시작될 것이다. 오늘로 끝내고 싶었다. 스즈네를 위해서기보다 자신들을 위해서였다. 우리는 늘 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슬픔을 어느 시점에서는 과감하게 떨쳐내야 한다. 나와 미에코에게도 성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언젠가 왔던 길」은 어릴 적부터 엄마의 억압에 갑갑해 하던 딸이 취업하면서 엄마로부터 독립해 살다가 16년이나 지나서 치매에 걸린 도움이 필요한 엄마를 만나는 이야기다. 지난날 자신을 힘들게 하던 엄마가 아니라 기억도 없이 아픈 엄마를 보면서 마음이 변화해 가는 딸의 이야기, 어쩌면 예상가능한 방향으로 흐르는 이야기다.  「멀리서 온 편지」는 일만 하는 남편 때문에 친정에 갔다가 남편이 보내는 거라 생각한 메일을 받으면서 점차로 남편과 그리고 조부모의 삶에 대해 이해해 가는 내용을 담았다. 「하늘은 오늘도 스카이」는 집을 나와 바다를 찾아 가는 소녀의 이야기다. 이럴 때면 늘 길에서 누군가를 동행하게 되는데 소녀의 동행인은 비닐봉투를 쓴 소년이다. 둘의 대화가, 재미있다. 「때가 없는 시계」는 아버지의 유품인 손목시계를 수리맡기면서 시계방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버지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책의 표제작인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한때는 아주 ‘잘 나갔던’ 이발소 주인. 유명인들이 드나들던 이발소는 망해서, 바다가 보이는 한적한 곳에서 운영된다. 멀리까지 찾아온 손님에게 이런 저런 자신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발소 주인. 오랜 전문가의 손길은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은데, 그의 이야기는 길고 여운도 길다.

 단편 하나하나가 가만 보면 가족 관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의 가족. 인생이란 가족이 기본적인 관계이고 또한 가장 큰 애증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이 속에서 겪는 갈등과 상처와 그리고 애정들이 작가의 담백한 문체로 흩어져 있다.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에서 떠올리는 것은 한편으로는 ‘바다가 보이는’이라는 구절이다. ‘바다가 보이는, 바다가 보이는’ 이라는 이 말은 오래도록 다른 의미로 기억될 것 같다. 오랫동안 바다가 보이는 곳을 바라볼 사람들이 생각나는 말이다. 딸을 잃은 부부의 말에 누군가에게 위로랍시고 건네는 저 말 하나가 위로일 수 있는지 거듭 생각하게 된다.


마음의 아픔은 시간이 해결해준다. 흔히들 하는 말이다.

    그 말이 맞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으로 몇 년이 지나야 해결될 수 있을까. - 성인식 中


  2017년 11월 16일, 3년 7개월이 흘렀고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온 지 8개월이 흘렀다. 미수습자 5명의 가족이 목포 신항을 떠나기로 발표했다. 이제는 정말로 미수습자 수색이 종료될 모양이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3년 7개월이라니. 목포를 떠나기로 하면서 미수습자 가족 중 어느 분이 이렇게 말을 했다.


“세월이 가면 다 잊혀져요. 온 국민이 다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이 세월호를.

 세월이 가면 다 잊혀지겠죠.”

  

  쓰러지며 오열하는 다섯 가족을 보는 것도 아렸지만 저 말을 하는 분의 표정과 말이, 거듭 거듭 떠올려졌다. 성인식 속에서 딸을 잃은 부모의 말과 오버랩됐다.

  가족. 삶이란 그런 것일 게다. 서로 다툼이 있더라도 그리워하고 결국은 그들에게서 위안을 얻으며 살아가는. 세월호 그 많은 이들이 가족들과 싸우며 화해하며 애증을 반복하면서, 자기들만의 삶을 흘러갔을 텐데. 잊지 말아주십시오는 당부이고 다 잊혀질 것이라는 건 체념일까. 이렇듯 기사, 뉴스 한줄 접하면 마음 아리더라도 소식없으면 잊어먹을 나일 것이다. 가족이 아니기에. 세월이 가면 다 잊혀질 것이다. 언젠가는. 그런데 아직까지는, 몇 년은 더 걸릴 것 같다. 잊혀지는데 몇 년은 걸릴 것 같다. 바다가 보이는, 바다가 보이는 그곳에 서면 계속 생각날 것이다. 

  내게도 성인식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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