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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비포 선셋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 에단 호크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전화 번호를 받아뒀어야 했는데..."
"맙소사. 내가 정말 멍청했어."
"난 자기 성도 몰랐어. 우린 두려웠던 거야. 맨날 연락하다가 서서히 식어갈까 봐."
"식을 틈이 없었지."
비포 선라이즈에서 책이 단골로 등장했다면 비포 선셋에서는 노래가 단골로 등장한다. Nina Simone의 곡 중에서 나는 I Put A Spell On You가 좋다. 영화 줄거리를 보니 가사로는 Feeling Good이지만.
꿈만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첫사랑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썼더니 작가로 데뷔하여,
프랑스로 진출하고 저자와의 대화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9년 전 그녀가 꿈처럼 서 있다.
표정과 연기만으로 모든 걸 나타내는 이 배우들이 새삼 정말로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 하루도 아니고 반나절 동안 나누는 그들의 대화는 머뭇거림이 전혀 없었다.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다 내뱉으려는 듯 엄청난 속도로 버벅거리면서 질주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사랑을 좀 거치고 지나가서 그런지 섹스 이야기에도 거침이 없다. 어디서부터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이고 어디서부터가 미화된 이야기인지 전혀 힌트를 주질 않는 영화이기 때문에 더욱 상상의 여지를 준다. 예를 들어 이렇다. 집안 배경도 가치관도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지만, 딱 세 가지가 같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대화는 술술 풀려간다. '그날' 전화번호를 서로 나누지 못한 걸 후회하면서도 내심으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서로 욕구 불만이다. (사실 이 점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욕구에 충실한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로 그런 삶을 살고 있을까?
비행기가 출발할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의무감은 점점 더 가까워지며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남자의 미간에는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상처로 인해 사람이 성숙해질까? 그것은 아마 성숙보다는 '늙어감'에 가깝지 않을까? 두려움은 결국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결국 두려움의 색을 바라게 한다. 더 이상 희망을 가지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람은 그날 그 장소에서 기다린 사람이 아니라 기다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결국 예전에 만나서 사랑한 적이 있던 사람과의 재회는 낭만적이다.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복잡하기도 하다. 상대방의 불행에 슬프기도 하다. 혹은 상대방이 새로운 사랑을 하고 결실을 맺었다는 게 기쁘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상대방이 나보다 더 불행하다는 데에 위안을 느끼기도 한다. 혹은 상대방의 행복이 깨지길 내심 바라며 더할 나위 없는 분노와 질투를 느끼기도 한다. 사실 기다렸다고 그 사람을 더 사랑한 것도 아니고 기다리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을 더 사랑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옛 애인이 침대에서 기타를 치고 차를 타 주면서 춤을 춘다.
문득 곁눈질로 '자기, 비행기 놓치겠어.'라고 이야기한다.
단호히 일어나 돌아갈까, 그 집에 남아있을까, 내부의 격한 갈등과 선택의 순간.
그 누구도 그 상황이 오지 않고선 단호히 이쪽을 택하겠다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