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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빈리 일기
박용하 지음 / 사문난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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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접하면 문득 겸허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스토리가 엉망이네 반전이 없네 번역이 이따구네 제법 깐깐한 필자마저도 우연히 시집을 잡으면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 절절맨다. 그런 내 모양새를 보면 겸허가 아닌 당혹이라고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기 형식의 글들은 자주 봤다. 어른이 썼던 아이가 썼던 출판된 일기는 닥치는대로 읽어봤던 기억이 있다. 타인과 잘 섞이기 싫어하지만 역시 남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이 사그라들진 않았나보다. '시인의 일기'라는 소개내용을 보자마자 문득 시집을 읽고 싶었고, 속초에 있는 부모님댁으로 가고 싶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시인의 고향도 강원도였다. 게다가 카페 '소설'은 바로 우리 집 앞에 있는 카페다!) 아무튼 생각이 난 바로 그 날 박용하 시인이 1999년에 쓴 '영혼의 북쪽' 시집을 빌렸고, 토요일날 속초로 향했다. 이 책의 반 정도는 서울과 속초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읽었고, 나머지 반은 한밤중에 집에서 읽었다. 시집은 아닐지라도 시인이 쓴 일기의 서평을 쓴다는 사실이 부담감으로 자리잡아서, 그렇게나 유난을 떨었던 것 같다. 

 조촐한 시집을 연상시키는 일기였다. 간혹 시가 드문드문 쓰여져 있기도 했지만 글 하나하나 감탄사 하나하나가 소박한 시처럼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그 드문드문 쓰여진 시들 중에서 '구름'이라는 시와, 마지막에 쓰여진 제목없는 시가 참 좋았다. 역시 본인은 산문시보다는 운율이 있는 짧은 시가 취향이다. 특히 술 마시는 이야기와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가 소박하게 느껴졌다. 그는 글을 맛깔스럽게 쓰는 방식을 알고 있었다. 땅 위에서 몇몇 과일과 채소들을 기르고, 수확물들은 친척들에게 부치거나 가족끼리 맛있게 먹는 일상. 논과 무덤과 사람들에 대한 소소한 잡담마저도 읽는 동안 군침이 돌았다. '자연과 인간이 고픈' 사람이 쓸 만한 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모든 걸 담으려고 기를 쓰며 부호같은 단어들이 빼곡히 쓰여진 책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시인은 하물며 보잘 것 없어보이는 일기에 모든 걸 담아내지 않았는가. 이 일기는 시집이자 음악추천글이자 도서평론이자 반성문이자 사회풍자글이자 자연예찬론이다. 지식인들이여, 본받으시오. 

 그러나 저 모든 것들을 압도하는 주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분노였다. 자신의 시집에다 '호수에 가기 위해선 마음이 호수 같아야 한다'라는 시를 씀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기 속에 '분노가 끓어오른다'라는 구절을 자주 쓴다.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10캔 넘게 마시지를 않나, 부부싸움을 한 후 어머니에게 전화하지를 않나, 아이가 집벌레라고 구박하질 않나. 우리 아버지 혹은 옆 동네 아저씨와 전혀 뒤지지 않는 친숙함이 느껴져 일순간 멍해졌다. 소설을 써야 한다고 걱정하는 시인의 어머님, 살구를 매실이라고 하는 딸아이 이야기 뒤에 'ㅎㅎㅎ'라는 유행어(?)가 유달리 씁쓸해 보였다.

 인간 싫으면 그게 곧 지옥! 인간 싫은 건 성인군자도 어쩌지 못했으리.
 원수를 사랑하는 일 따위는 접어두고 대체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 이 졸렬한 인간사에서 과연 가능하기는 한 걸까. - P. 111 


 시인이 어떤 삶을 살았던간에 시란 순수의 문학이라 생각한다. 세속에서 숨어버린 은둔자로서의 분노는 나를 포함하여 몇몇 사람들이 보기엔 언뜻 정당하지 않아 보인다. (나는 특히 국가가 시민의 삶에 최소한으로 간섭해야 한다는 그의 의견에 동조하지 못했다. 그래도 시민과 타협할 수 있는 국가는 존재한다고 생각하기에. 시인이 너무 부정적인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 긍정적인 걸까?)  그러나 시인 혹은 지식인으로서 그의 분노는 '인간적'이고 정당해 보인다. 우리나라가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한, 유배당한 지식인과 빗물 새는 집에서 사는 선비에 대한 환상이 머릿 속을 스친다. 이 환상은 애들을 먹이기 위해 밤늦게까지 허리가 부러져라 일하고 온 아내의 쓴소리마저 문학을 위협하는 잔소리처럼 느껴지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분노하지 않고서 인간의 부패를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또한 인간의 부패 덕분에 순수는 확연한 백색을 드러낸다. 까마귀들 사이에서 유난히 희게 보이는 백로처럼 말이다. 혹은 택배포장에서 눈부실 정도로 흰 색을 드러내던 '오빈리일기'의 겉표지처럼 말이다. 이 책은 어느 베테랑 시골 농부의 글처럼 농사에 대한 지식이라거나 음식을 자연답게 만드는 비법은 들어있지 않다. (개인적으로 양미리를 조리는 방법을 썼으면 인기를 더 누리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다만 시인이 사회에 대한 분노를 삭히며 이제 막 생리를 시작한 딸아이의 팬티를 빨아주는 이야기가 들어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기록은 '절박하고 끔찍하고 속절없고 부질없고 손쓸 수 없고 아름답다.' 

 이 서평을 쓰고 있는 본인도 스트레스가 끓어오름을 자주 느낀다. 그러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서 인생의 고난을 알 수 없다. 인간들의 미숙함 사이에서 앎은 확연한 차이가 난다. 그 앎을 위해 필자도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일하고, 음악을 듣는다. 여전히 시는 한 줄도 못 쓴다. 어렸을 땐 분명 시를 쓰며 동시를 쓰며 지냈던 기억이 있는데 말이다.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말했던가? 앎이란 순수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고. 그러나 순수의 문학인인 박용하 씨는 분노로 끓어오르는 머리를 쥐어짜고 계시고, 나도 늘어가는 건 질투와 차곡차곡 쌓이는 묵직한 분노뿐이다. 아이러니는 언제쯤 풀릴지, 그 숙제를 남긴 채 이 서평을 끝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예수전' 등등 시인이 읽었다는 책들 중에서 한 번 들춰보고 싶어 끄적거린 목록들도 핸드폰 메모장에 남기고. 시인들이 본 자연 풍경도 상상 속에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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