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12월 6일)에 충청남도 서천에 다녀왔다. 12월 6일에서 7일까지 서천군귀농인협의회에서 주관하는 16차 귀농투어에 참가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2개월간 정읍에서 8주간 깊이 있는 귀농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귀농귀촌에 대해서는 가능한 여러 지역을 답사해보고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섰던지라, 망설임 없이 참가 신청서를 내고 서천으로 갔다.


   용산을 출발한 무궁화호 열차는 천안을 분기점으로 경부선과 장항선으로 갈라졌다. 열차는 장항선의 끝자락에 걸쳐있는 서천으로 향했다. 충청남도 서천은 충청남도 최남단에 위치한 지역으로 서쪽으로는 서해바다를 끼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보령, 동쪽으로는 부여와 인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금강을 기준으로 전라북도 군산과 익산을 마주하고 있다. 인구는 2012년 기준으로 6만 명이 채 안 되며, 행정구역은 2개의 읍과 11개의 면으로 나뉘어 있다. 전체 면적 중 41%가 농경지인데, 그 중 70%가 벼농사를 행하고 있다. 바다가 인접해 있어, 신선한 해산물과 갓 수확한 농산물이 한 데 모이는 재래시장이 있다. 이것이 서천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관련 사항들이다.



   1박 2일의 시간 동안 서천에 있으면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컸던 것은 귀농과 귀촌에 대한 개념이 분리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귀농이란 농촌으로 와서 농사를 짓는 직업을 가지는 것을 말하고, 귀촌이란, 농촌에서 살지만 직업은 꼭 농사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귀농귀촌의 전제조건은 농촌에서 거주하는 것이지만, 선택하는 직업에 따라 귀농과 귀촌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귀농을 선택할 것인가, 귀촌을 선택할 것인가는 단순한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선택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귀농은 사업을 하는 것이고, 귀촌은 은퇴 후의 노후를 보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귀농이 처절하고 다급하고 불안하고 절박한 느낌이라면, 귀촌은 여유롭고 행복하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물론 더 깊게 들어가면 이 분류는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이렇게 보인다.


   은퇴 후 퇴직 연금과 국민 연금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귀촌을 택하면 되겠지만, 농촌 생활을 꿈꾸는 대다수의 (젊은) 사람들은 농촌에서도 돈을 벌어야 한다. 귀농을 하건 귀촌을 하건 결국에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현실에 놓이게 된다. 농사로 돈을 벌겠다면 공격적인 귀농이 맞을 것이고, 그에 맞게 지원하는 지역으로 옮기면 될 것이다. 농사를 짓지 않고 다른 일로 농촌 생활을 영위하려면 안정적인 귀촌 또한 맞을 것이다. 농촌에서의 삶은 생활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는 것이기도 하지만, 귀농을 선택할지, 귀촌을 선택할지에 따라 또 다른 삶이 갈라지는 것이다. 열차는 서울에서 출발하지만, 목적지가 어디냐에 따라 경부선, 호남선, 장항선 등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그래서 궁금해졌다. 농촌으로 이주를 한다면, 농촌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면, 귀농이 적절할까, 귀촌이 적절할까. 농사로 밥을 벌어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인 것인가, 농촌에 성공적인 정착이 우선인 것인가. 둘 다 우선되어야 하지만, 그래도 우선시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선택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 이 질문들을 해결하는 것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 그 해답을 위해 움직일 것이고.


   쓰다보니 계획과 다짐만 남았다. 어찌됐든 시작은 했다는 사실에 위안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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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네 번째 시험관시술을 위해 강남 차병원에 다녀왔다. '강남 차병원 불임시술연구소'였던가... 근 1년 6개월이라는 기간에 걸쳐 역삼동에 위치한 병원에 다녔지만, 정확한 명칭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동안 달라진 것이라고는 9호선 공사로 인해 고갯길에 위치해있던 횡단보도가 제 자리로 환원된 것 정도? 그리고는 달라진 게 없다. 우리 부부는 아직 애가 없는, 뭐 그런 것.


   처음 시술을 할 때는 직장에 다니느라 아내가 어떤 시술을 받는지 몰랐었다. 뭐 어쩌다 한 번 나와 포르노를 틀어주는 작고 어두컴컴한 방에 들어가 수정을 위한 정액을 빼는, 그 정도의 수고,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첫 번째 시술에 실패하고, 두 번째 시술을 했던 올해 초에는 처음부터 함께 다녔다. 그리고 그때 처음 알았다. 시험관 시술이라는 게 정말 힘든 일이었다는 것을.


   우선 난포를 키우기 위해 배란 유도제를 맞았다. 하루에 두 번 -마치 당뇨병 환자처럼- 스스로 배주사를 직접 맞았다. 4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받고 난포가 적절하게 커졌으면 난자를 빼내는 수술을 한다. 이 때 한 6개인가 나왔던 것 같다. 하나도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에 맞춰 남편인 나는 정자를 뽑았고, 그 뽑은 결과물들로 수정을 시켰다. 운이 좋으면 다 수정되는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우리의 경우는 3개가 수정이 됐었다. 4일 후, 3개의 수정란을 자궁에 집어 넣었다. 아내 말로는 마치 실뱀이 기어들어오는 듯한 불유쾌한 경험이었다고 했었다. 수정이 다 되면 세쌍둥이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머지는 알려진 바와 같다. 피검사를 통해 임신 사실을 알게 되는데, 결과를 전해주는 간호사 선생의 목소리만으로도 임신 판정을 알 수 있다. 다행히 이 때는 하이톤의 밝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 이후 수정이 되기 위해 무려 6주간 매일 엉덩이 주사를 맞았는데, 나중에는 주사를 맞을 데가 없어서 굉장히 고생했었다. 그래도 병원에 가니 착상됐다고, 임신이라고 했었다. 이렇게도 애가 생기는구나. 가히 현대의학의 개가라 할 수 있구나.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좋아했었다. 그런데 10주차에 계류유산을 했다. 원인불명의 유산. 월급이 통장을 스치듯, 우리 아이도 그렇게 잠시 다녀갔다.


   7월 말에 3차 시술을 했다. 이번엔 그 결과를 아는데 짧았다. 이상하게도, 세 번째 시술 때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와도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마음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거의 무너진 것처럼 살고 있었으니까.


   딱 세 번만 하자고 아내하고 약속했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내가 깼다. 그렇게 육체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시술인데도, 굳이 한 번 더 하자고 했던 것은, 정부 지원이 세 번에서 네 번으로 바뀐 것도 있었지만(그래도 전체 진료비의 1/3수준이다...), 새로운 식구, 새끼 고양이 '양이'를 들인 것이 큰 이유가 됐다. 그 전까지의 아이가 추상적인 느낌이었다면, 양이를 통해, 이제 아이는 구체성을 띄게 되었다. 그래서 면목없이 아내에게 부탁을 했고, 아내는 고맙게도 이 힘든 일을 받아들였고.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내 욕심 혹은 내 욕망으로 누군가의 삶을 힘들게 할 줄은 정말로 몰랐었는데... 미안하고 고맙고. 술도 안마셨는데 그냥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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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주간 교육을 받았던 (구)산성초등학교에서.



  이번 주말이면, 이제 정읍에 내려가는 것도 (공식적으로는) 마지막이 된다. 8주간의 귀농귀촌교육이 끝나는 시기, 그리고 연말이 다가오는 시기가 겹쳐서인지, 종강파티에 관한 들뜬 글들이 카톡 채팅방과 카페 게시판을 달구고 있다. 수료식이 끝나면, 누군가는 교육에서 얻은 응원과 지식으로 계속 농사를 지을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껴 다른 교육을 알아볼 것이며, 다른 누군가는 녹록치 않은 농촌 생활을 깨닫고 귀농을 포기할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건 그 선택의 결정은 옳고 틀림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에 방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아직 결정한 것은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귀농포털을 만들어 귀농인들의 농산물 직거래 창구를 만들고 싶다. 농업인들과 소비자들을 직거래로 연결시키는 농촌 브로커(broker), 뭔가 접시 냄새가 나는 게 멋들어져 보인다. :)


   이 농촌 브로커라는 발상은 내가 한 게 아니다. 교육 중 들었던 '지리산닷컴'의 '마을이장'이 이미 벌이고 있는 일이다. 지리산닷컴은 매일(은 아니고 그 자신의 표현대로 '가끔 생각날 때마다') 주변의 농부들을 편지 형태로 소개하고 그들의 농산물 직거래를 ‘연결’해준다. 이렇게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해 주지만, 수수료는 받지 않는다. 그냥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해 주는, 진정한 브로커이다.


   수수료가 없으면 어디서 수익을 내는지 궁금했는데, '지리산닷컴'이 수익을 내는 것은 펀드다. 일명 ‘맨땅에 펀드’라고 1,000개의 구좌를 개설, 펀드 투자금을 받아 농사를 짓고, 그 배당금을 농산물로 주는 형태이다. 올해에는 약 1억원을 굴려서 '남의 돈으로 잘 먹고 잘 놀았다'고 했지만, 말이 그렇지 쉽지 않은 일이다. 한 달에 100만원 정도 월급을 받으며 일한다는 생각으로 운영을 했는데 녹록지 않다고 했으니까. 쉽지 않은 일이고 안쓰러워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농촌을 생각하는 '태도(attitude)'에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 그는 농촌을 수익 대상이 아닌,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로 보는 것이다.


   지리산닷컴은 구례를 중심으로 여러 농업인들을 직거래로 묶(을 수 있)었다. 지역을 중심으로하는 소모임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시스템이 전국적으로 다양하게 생긴다면 농촌은 훨씬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농촌 모습은 어떠한가. 생산자로서의 농민은 눈치만을 보며 산다. 돈을 빌릴 때에는 농협의 눈치를 봐야 하고, 정부의 지원금을 받을 때는 시군청의 눈치를 봐야 하며, 직거래로 물건을 팔 때는 소비자의 눈치를 봐야 한다. 이 풀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지리산닷컴은 해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농사 짓는데 필요한 돈을 굽실거리면서 대출받은 게 아니라, 직접 당당하게 도시인들에게 받아왔으니까. 그 결과(수익)야 어떻든 간에 대단한 일이라 생각한다.


11월 초 밭에서 보았던 수박. 

여름에 수박은 인기 상품이지만, 제철을 벗어난 수박은 그저 구경거리밖에 되지 못했다.



   내가 꿈꾸는, 하고 싶은 일도 이와 비슷하다. 마음이 맞는 귀농인(혹은 농업인)들과 함께 지역내 소모임을 결성, 우리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라이브 중계 하듯, 글로 써서 알리는 것이다. 물론 결국에 최종 목표는 생산한 농산물 또는 가공식품을 파는 것이지만, 단순히 농산물을 파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골에서의 즐거운 생활’을 파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즐겁고 유쾌하고 행복한 일상이 결국엔 우리가 생산한 농산물에 대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규정지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생산한 농산물을 판매하기 위해 소비자들에게 이유 없이 굽실거리는 것이 아닌, 생산자로서의 농민이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주체"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장기적으로는 직거래 농산물을 구매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넘어서 농촌과 도시를 연결할 수 있는, 하나의 커다란 네트워크가 되기를 꿈꾼다.


   수익성을 기대할 수도 없고, 지나치게 뜬구름 잡는 이야기임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하고 싶은 것은, 교육 동안 '함께 일하는 즐거움'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생활할 수 있다면, 조금 부족하게 사는 것 정도는 감내할 수 있지 않을까.


   꿈이 없는 내가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 꿈이 그냥 일장춘몽으로 끝날지, 진짜 현실이 될지는 결국 내게 달린 일이다. 어떻게 되든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일이 지금 내 가슴을 뛰게 하고 있으니까.



11월 23일의 아침. 용이 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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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29 0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9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중고] 통 한글 2007 기본 + 활용 지대로 배우기 - 문서 작성부터 실무 활용까지
강성재 지음 / 웰북(WellBook)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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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은근히 모르는 게 많이 있었네. 사람은 언제나 겸손해야하고,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지침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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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토요일에 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이 나이에 아직도 결혼식이라니 조금은 쑥스러운 감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도 안 간 녀석들도 있으니, 40이 넘어서도 결혼식에 가서 사진을 찍을 일은 몇 번 더 남아 있을 것 같다. 결혼한 친구는, 나와는 초등학교 때 굉장히 친하게 지냈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왠지 모르게 연락이 멀어진 친구다. 내가 결혼할 때 청첩장도 보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와 축하를 해 준 것에 너무 마음이 쓰였었는데, 이렇게나마 축하를 해줄 기회를 주어서 고맙다고나 할까.


   10여 년 가까이 지내고 20여 년 멀리 지냈으니, 삶의 궤적도 멀어지고 친분을 가져온 친구들도 서로 달라졌다. 그래도 은둔형인 나보다는 쾌활하게 지내서인지, 초중등 동창들의 모습들을 많이 확인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옛 모습을 간직한 반가운 얼굴들.


   은 한 순간이고, 그 이후는 어떻게 이 자리를 벗어날까 하는 몸부림들의 연속이었다. 그냥 악수 하고 제 갈길가면 그만이지, 뭔 그리 핑계들이 많은지. 예전에 친구라는 이름으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었던 무례함들이 불쾌감으로 바뀌는 데는 한순간이었다.


   예전의 기억을 가지고 현재의 모습을 재단하려는 것은 커다란 오류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저지른다. 그게 편하니까. 그러한 오해를 이해라 생각하고, 사람들을 평가하고 끝. 자신의 상황에 비교해 손익분기점을 넘은 사람들만 새로 간직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예전에) 친구라고 불렀던 놈들이 이럴진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도 사람들은 겉모습에 신경을 쓰는 것일까. 눈에 보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관심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그저 지금의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혹은 손해가 되는지만 파악하려고 하는 마당에, 눈에 보이는 겉모습은 얼마나 중요한가. 


   축하의 자리에 않좋은 소리가 너무 많았다. 친구의 결혼은 진심으로 축하하지만, 그저 추억으로만 간직했으면 좋았을 많은 모습들을 이제는 지워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좀 착찹하다. 가끔씩 인간에게도 RESET 버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티븐 킹의 『셀』처럼, 아예 뇌를 포맷하는 한이 있더라도. 부팅이 되던 안되던, 포맷 하나는 확실하게 보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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