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회 - 현무문에서 태자가 변을 당하고 양의전에서 위징이 요괴를 쏘다

 


 


p.220

“현무문에서 양의전으로 향하려면 이 길목을 지날 거야. 저쪽 숲에 매복하자.”

 

 


p.258

“저쪽이다! 월화문月華門쪽으로 달아났다!”


 


 


圖 7 8 世紀前半的長安宮城、皇城에서 발췌

 

 


   위의 대화로 미루어볼 때, 『요원전』에서 ‘현무문의 쿠데타’는 현무문, 양의전, 월화문을 아우르는 지역인 산지원(山地院)과 남해지(南海地) 사이에서 벌어진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동쪽인 산수지각(山水地閣)근처에서 벌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자치통감』권191에서, “이건성과 이원길이 임호전(臨湖殿)에 도착하여 변고가 있음을 깨닫고 즉시 말을 돌려서 동쪽으로 가서 궁부(宮府)로 돌아갔다”고 했다. 즉, 이건성의 거처인 동궁(東宮)으로 가는 길에 변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역사서마다 그 기록이 다르기 때문에(달리 말하면, 황제가 되기 위해 형제들을 죽인 일을 그리 세세히 기록할 필요는 없을 것이기에) 엄격하게 적용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p.221

“아바마마께서는 세민이 놈에게 너무 무르십니다. 역시 우리 둘이서...”

“뒷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꾸나.”

 

 


   『요원전』에서 이원길은 틈만 나면 이세민을 죽이자고 이건성을 부추기지만 이건성은 반대한다. 이는 실제 역사에도 기록된 부분이다. 『자치통감』권 191에 기록된 부분을 옮겨 적는다.


애초에 제왕(齊王) 이원길이 태자 이건성에게 권고하여 진왕(秦王) 이세민을 제거하라고 하며 말하였다.

“마땅히 형님을 위하여 손수 칼을 쓰겠습니다.”

이세민이 황상을 좇아서 이원길의 집에 갔는데, 이원길이 호군 우문보(宇文寶)를 침실 안에 숨겨두고 이세민을 찌르게 하려고 하였는데, 이건성은 성격이 자못 인자하고 후덕하여 갑자기 이를 중지시켰다.

 

 


   두 형제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세민의 정통성을 확보시키기 위해서는 두 형제의 단점을 부각시켜야 하는데, 이건성의 경우에는 종종 장점을 기술한 부분이 보인다. 어찌보면 이건성은 ‘인자하고 후덕한’ 그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르겠다.



p.224

“사공 배적裴寂, 좌복사 소우蕭瑀...”

 

 


좌복사 → 좌복야

 


 

   『요원전』에서는 당고조 이연이 양의전에 있는 것으로 설정했지만, 역사에는 해지(海地, 어느 해지인지는 정확히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 위 범선에서 배적, 소우, 진숙(陳叔)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고 한다. 즉, 이연은 이세민의 상소를 공적인 일로 처리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형제들간의 해묵은 감정을 해소시키려는 자리로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부자지간, 형제지간의 정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 이세민이 영악(혹은 냉철)한 것이다.

   소우는 이세민이 이건성과 이원길을 죽였다는 말을 당고조 이연이 들었을 때 즉각 이세민의 편을 든 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것으로는 626년 4월, 태사령 부혁(傅弈)이 불교를 없애자고 탄원했을 때 소우가 불교를 옹호하며 서로 토론했으나 처절하게 발린 것이 있다. 이 때 대다수의 사찰과 도관이 철폐됐으나, 현무문의 정변 이후 다시 환원됐다.


 

 


 

p.231~232

이세민이 쏜 화살에 쓰러지는 이건성

 

 


   『자치통감』권 191에 기록된 ‘현무문의 정변’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건성과 이원길이 임호전(臨湖殿)에 도착하여 변고가 있음을 깨닫고 즉시 말을 돌려서 동쪽으로 가서 궁부(宮府)로 돌아갔다. 이세민이 좇으면서 그들을 부르니 이원길이 활을 당겨서 이세민을 쏘려는데 두 세 번이나 활이 당겨지지 않았으며, 이세민은 이건성을 쏘아서 그를 죽였다.

 


 

   『요원전』에서는 이건성이 부상만 당하고 다른 인물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역사에는 이세민이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p.241~242

울지경덕에게 목이 잘리는 이원길

 


 

   『자치통감』권 191에 기록된 ‘현무문의 정변’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울지경덕이 7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계속하여 도착하니 좌우에서 이원길을 쏘아서 말에서 떨어뜨렸다. 이세민의 말이 놀라서 숲속으로 달아나다가 말을 타고 있던 이세민이 나뭇가지에 걸리니, 떨어져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원길이 갑자기 도착하여 활을 빼앗고 그를 누르는데 울지경덕이 말을 달려오면서 그를 질책하였다. 이원길이 걸어서 무덕전으로 가려고하니 울지경덕이 쫓아가서 쏘아서 그를 죽였다.

 


 

   울지경덕이 이원길을 질책한 것과 이원길이 걸어서 무덕전으로 가려고 한다는 사실이 언뜻 연결이 되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울지경덕이 이원길을 죽인 것이다. 『자치통감』권 188에 기록된 것을 보면, 이원길과 울지경덕이 서로간에 자존심 대결을 벌이는 일화가 나온다. 이 대결에서 이원길은 울지경덕에게 완패해 여러 사람들 앞에서 큰 망신을 당한다.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은 말을 타고 삭(矟)을 잘 다룬다고 자부하였는데, 울지경덕이 능력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각기 칼날을 떼어내고 승부를 비교하자고 청하였다. 울지경덕이 말하였다.

“저 울지경덕은 삼가 이것을 떼어 버리겠지만 왕께서는 떼어버리지 마십시오.”

이미 그렇게 하고 이원길이 그를 찔렀지만 끝내 적중시킬 수가 없었다.

진왕 이세민이 울지경덕에게 물었다.

“삭을 빼앗는 것과 삭을 피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어렵소?”

울지경덕이 말하였다.

“삭을 빼앗는 것이 어렵습니다.”

마침내 울지경덕에게 이원길의 삭을 빼앗도록 명령하였다. 이원길이 삭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뛰어나가니 속으로는 그를 찌르려고 하였는데, 울지경덕이 잠깐 사이에 그의 삭을 세 번이나 빼앗으니, 이원길은 비록 얼굴을 대하고는 탁월함을 탄복하였지만 속으로는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이세민은 이미 자존심을 크게 상처 입은 이원길을 두 번 능욕하는 처사를 저질렀다. 평소에 이원길이 잘난 척하는 게 꼴사나워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아니면 이참에 기를 꺾어 고분고분하게 만들려는 처사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원길에게는 울지경덕과 이세민 둘 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 어쩌면 이때부터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이원길은, 이건성이 울지경덕을 자신의 도당으로 포섭하려 했으나 이를 거절하자 당고조에게 참소하여 울지경덕을 죽이려 했었다. 울지경덕은 이세민의 강력한 요청으로 죽음을 면했다.

   울지경덕은 선양(善陽, 산시성 숴저우시) 출신으로 역주(易州)의 도적 우두머리 송금강(宋金剛)의 장수였으나, 이세민에게 패해 포로가 됐다. 이 때 울지경덕을 눈여겨본 이세민이 바로 울지경덕을 우일부통군(右一府統軍)으로 임명했다. 이세민의 측근들은 울지경덕이 배반할 것이라 하며 죽일 것을 요구했지만, 이세민은 신의로써 그를 믿었고, 울지경덕은 그 믿음에 화답하듯 왕세충군을 격파했다. 신의로 충만하고 무예가 출중한 보기 드문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p.250

“잘했다, 위징!”

 


 

   『요원전』에서는 이건성이 위징에게 죽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건성은 이세민이 쏜 화살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원전』에서 위징의 모습은 기회에 따라 주인을 바꾸는 비열하고 저열한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역사에서는 다르다. 『자치통감』권 191에 기록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애초에 선마(洗馬) 위징(魏徵)은 항상 태자 이건성에게 일찍이 진왕(秦王)을 제거하라고 권고하였는데 이건성이 실패하고 나서 이세민이 위징을 불러서 말하였다.

“너는 어찌하여 우리 형제들을 이간질하였느냐?”

무리들은 이 때문에 위험스러워서 두려워하였지만 위징은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면서 대답하였다.

“먼저 돌아가신 태자가 일찍이 저 위징의 말을 쫓았더라면 반드시 오늘과 같은 화란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세민은 평소에 그의 재주를 중하게 생각하였던 터라 얼굴을 고치고 그에게 예의를 차리고 끌어서 첨사주부로 삼았다.

 


 

   자신의 친형제는 물론이고, 친형제와 직접적으로 관련한 일가친척 500여 명을 학살한 이세민이 자신의 숨통을 조인 위징을 살린 것은 지금 봐도 미스터리하다. 『요원전』에서처럼 정말로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세민의 냉혹하면서도 탁월한 정치 감각의 발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위징은 이세민에게 있어서, 그리고 당(唐)에 있어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p.268

“꼬마야, 내가 일찍이 도적 패거리에 투신했을 때도 딱 너 만한 나이였으나... 이 정도로 무모한 짓을 한 적은 없었다. 감히 궁성에 잠입할 줄이야...”

 


 

   이세적이 이야기하는 ‘도적 패거리’는 적양(翟讓)의 와강군(瓦崗軍)을 말한다. 와강군은 고기잡이 능수들이 주축이 된 농민군이다. 수 양제의 폭압으로 농민군의 봉기에 가담한 이세적이 지금은 그들을 ‘도적 패거리’라고 지칭하는 것을 보니 좀 씁쓸한 마음이 든다. 『자치통감』권 186에 기록된 서세적(이세적이 당고조 이연에게서 이 씨 성을 하사받기 전)에 대한 기록을 보면 상당히 어린 나이에 농민군에 가담한 것을 알 수 있다.


이호(離狐, 산둥성 허쩌시) 사람 서세적(徐世勣)은 집은 위남(衛南, 허난성 안양시 화현)에 있었고 나이는 열일곱이었으며 용기와 지략이 있었는데 적양(翟讓)에게 유세하였다.

 

 


 


p.275

“전하, 신이...”

“오, 위징인가.”

 

 


   『서유기』10회에서 위징은 당태종의 신하이면서 동시에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경하 용왕의 목을 베는 신묘한 인물로 묘사된다. 『요원전』에서 위징이 양의전 위에 올라간 ‘요물’을 죽이는 것은 『서유기』에 대한 해석으로 보인다.


 

 


 

p.282

“이 장안의 불교계를 보게. 섭론파 외에 북도파北道派, 남도파南道派... 종파마다 죄다 다른 소리를 하고 있어...”


   ‘미륵(彌勒, Maitreya, ?~?) → 무착(無着, Asaṅga, 300?~390?) → 세친(世親, Vasubandhu, 320?~400?)’의 기본 틀에서, 세친의 『십지경론(十地經論)』을 논서로 성립된 종파가 지론종이다. 이 지론종 성립 후 제8아리야식(第八阿梨耶識: ālaya vijñāna의 구역)에 대한 견해 차이로 상주남도파(相州南道派)와 상주북도파(相州北道派)로 분리되었는데, 약칭으로 남도파 · 북도파라 한다. 섭론종은 진제(眞諦, 499~569)가 번역한 무착의『섭대승론』을 논서로 성립된 종파이다.

   이렇게 종파가 나뉜 이유는 『요원전』24회와 25회에서도 다뤘듯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대한 해석에 대한 차이 때문이었다. 바로 이게 현장이 천축으로 가게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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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4-01-08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omek님의 서유요원전 주해는 참 재미있고 대단하네요.언젠가 책으로 나올듯 싶군요
그나저나 늦었지만 Tomek님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O^

Tomek 2014-01-09 10:14   좋아요 0 | URL
분에 넘치는 과분한 덕담, 정말 고맙습니다.
카스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
 

  요즘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황성근 선생님의 '자유기고가 과정' 수업을 듣고 있다. 저널리스트식 글쓰기, 간단히 말해 '기사' 쓰는 법을 배우는 수업이다. 물론, 글이라는 게 누군가에게 사사받는다 해서 필력이 갑자기 늘어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강의를 비싼 돈 내면서 듣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내 문체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픈 마음 때문이다. 그동안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다시 읽어봤다. 글의 내용도 재미없지만, 그 글을 구성하는 문장도 이런저런 수식어로 늘어붙고 둘러싸여 원뜻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내가 쓴 글에서 수식어를 지워봤다. 주어와 동사만 남은, 문장이라고 차마 말하기 쑥스러운 것들.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아마도 그게 나 자신일 것이다. 각 글에서 눈에 띄기 위해 화려한 미사여구로 치장했던 앙상한 문장은, 그나마 이 세상에서 뒤쳐져 보이지 않기 위해, 무시 당하지 않기 위해 여러 허장성세로 치장한 나 자신이다. 수식어구가 빠진 문장에는 글쓴이의 감상이 배제된다. 반면 그 자리는 읽는 이의 몫으로 남겨진다. '글은 쓰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말이 맞다면, 그래서 주어와 동사, 이 문장의 기본요소로만 글을 쓸 수 있다면, 적어도 이 세상에 나 자신을 나타내는데, 표현하는데 조금 더 당당할 수 있지 않을까.


   둘째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이 '기사'라는 글의 형식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전에도 언급했던 '농촌에서의 삶'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선, 다양한 취재와 수많은 인터뷰가 필요하다. 그러한 자료 수집을 통해 가공시킬 글의 형태는, 글쓴이의 어설픈 감상이 들어가기 보다는 읽는 이가 판단할 수 있는 '기사'라는 장르가 가장 이상적일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이론 강의는 어제부로 끝났고, 앞으로는 수강생들이 기사를 작성해서 제출하고 품평을 할 예정이다. 기사는 단신기사, 생활기사, 가이드기사, 인터뷰기사, 탐방기사, 총 다섯 편을 작성하는데, 욕심부리지 않고 선생님이 가이드하는 대로 따라가보려 한다. 장황하고 지리한 내 문체를 버려야 한다는 점이, 아마도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글을 쓰는 것과 같이 어설프고 이상해보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어설프고 이상해보이는 왼손 글쓰기도 익숙해지면 고유의 스타일을 가진다. 이제 오른손의 익숙함을 잠시 접어두고, 새로움을 맞이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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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 육건장은 심야에 우물로 숨어들고 삼태자는 지저에서 검을 휘두르다


p.186

*『중국의 과학과 문명』(J.니덤)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은 영국의 생화학자이자 과학사가인 조지프 니덤(Noel Joseph Terence Montgomery Needham, 중국 이름은 李約瑟, 1900~1995)이 지은 중국과학사 연구서로 1955년 1권 『서론(Introductory Orientations)』이 발간된 이후 2008년까지 총 24권이 나온, 한마디로 엄청난 책이다. 니덤 생전까지는 총 16권이 출판됐으며, 니덤 사후에는 니덤연구소(Needham Research Institute, NRI)에서 니덤의 연구를 바탕으로 계속 집필을 하고 있다.

   니덤은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총 7부로 구성했는데, 1부 『서론(Introductory Orientations)』, 2부 『과학사상사(History of Scientific Thought)』, 3부 『수학, 하늘과 땅의 과학(Mathematics and the Sciences of the Heavens and Earth)』까지는 단권으로 출간됐지만, 그 이후 4부 『물리학과 물리기술(Physics and Physical Technology)』, 5부 『화학과 화학기술(Chemistry and Chemical Technology)』, 6부 『생물학과 생물학기술(Biology and Biological Technology)』, 7부 『사회적 배경(The Social Background)』은 각 파트별로 책이 나눠지기 시작했다. 2013년 12월 현재, 5부 Part 8 & 10, 6부 Part 4가 저술 중이며, 언제 완간이 될지는 알지 못한다.

   이 책이 워낙에 방대하고 깊은 내용을 다루는 것이라, 일반 독자들을 위한 축약본이 나왔는데, 한국에 소개된 니덤의 책들은 바로 이것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을유문화사와 까치글방에서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나 현재는 모두 절판됐으며, 지금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조지프 니덤의 연구를 로버트 템플(Robert Temple)이 축약하고 도판을 넣은 『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The Genius of China: 3,000 Years of Science, Discovery and Invention)』이 유일하다.



   사족으로, 니덤연구소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진흥사업단의 지원 하에 『한국의 과학과 문명』을 총 10권의 분량으로 낼 계획을 발표했는데(2013년 11월 7일), 이는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사에서 출간한 비서구권 인문·과학 총서로는 두 번째라 한다.



p.197

“거령신! 거령신!”


   나타가 부르는 거령신(巨靈神)은 『서유기』에 등장하면서 동시에 중국의 창세 신화에도 모습을 보이는 신이다.

   『서유기』4회에서 거령신은 옥황상제가 하사한 필마온(弼馬溫)이라는 벼슬이 품계에도 없는 하찮은 것임을 알고 무단이탈한 죄를 묻고자 출동한 탁탑 이천왕과 나타삼태자의 선봉장으로 나온다. 『요원전』 p.201에 등장하는 거령신의 모습은 바로 『서유기』에 등장한 거령신의 모습을 그대로 차용했다.

   “이천왕은 양지바르고 평탄한 들판에 영채를 세우기가 무섭게 먼저 선봉장 거령신을 출동시켜 첫 싸움을 걸게 하였다. 출전 명령을 받은 거령신은 갑옷 투구를 단단히 고체 매고 선화부(宣花斧) 큰 도끼를 휘두르며 곧장 수렴동으로 쳐들어갔다.(選平陽處安了營寨,傳令教巨靈神挑戰。巨靈神得令,結束整齊,掄著宣花斧,到了水簾洞外。)”

   중국 신화에서도 거령신을 발견할 수 있다. 위앤커는 『노사(路史)』, 『문선(文選)』, 『수경주(水經注)』 등에서 거령신에 대한 기록을 발견했는데, 그의 저서 『중국신화전설Ⅰ』 「개벽편(開闢篇)」에 실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 비교적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은 다른 책에 기록되어 있는 거령(巨靈)이라는 천신에 관한 신화이다. 그는 원기(元氣)와 함께 태어났고 재주가 뛰어나 <산천을 만들어내고 강물을 흐르게 하였다>고 하니, 조물주의 자격을 갖고 있었다 하겠다. 그는 분수(汾水)의 하류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본래는 강물의 신으로 화산(華山)에서 자신의 능력을 한 번 과시하였었다. 즉, 황하를 가로막고 있는 화산을 <손을 흔들고 발로 밀어내어 두 조각을 내서> 황하가 곧바로 화산을 지나갈 수 있게 하였으니, 그 후로는 돌아서 흐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지금도 화산에는 거령이 산을 갈랐던 손과 발자국이 완연히 남아있다고 한다. 도가의 방사들은 아마도 이런 전설들에 의거해서 이 귀여운 강물의 신을 천지개벽의 조물주로 격상시켰을 것이다. 그리하여 본래의 소박한 신화는 이러한 조작과 수식을 거쳐 사라져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유년기를 겪었던 사람들이라면, ‘거령신’이라는 이름을 듣고 즉각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등장한 거신병(巨神兵)이 아닐까.




p.205~206

거령신과 싸우는 손오공


   『요원전』에서 손오공은 거령신과의 싸움에서 도망치지만, 『서유기』에서는 그 반대다. “거령신은 도무지 원숭이 임금의 적수가 아니었다(巨靈神抵敵他不住).” 거령신과 손오공의 싸움 장면을 묘사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棒名如意,斧號宣花。他兩個乍相逢,不知深淺,斧和棒,左右交加。一個暗藏神妙,一個大口稱誇。使動法,噴雲曖霧;展開手,播土揚沙。天將神通就有道,猴王變化實無涯。棒舉卻如龍戲水,斧來猶似鳳穿花。巨靈名望傳天下,原來本事不如他:大聖輕輕掄鐵棒,著頭一下滿身麻。

   철봉 이름은 여의금고봉이요 도끼는 선화부,

   둘이서 덥석 맞붙으니 강약을 알 도리가 없고,

   도끼와 철봉이 좌우로 얼기설기 마주칠 따름이다.

   한편은 신묘한 계략을 몰래 감추고,

   또 한편은 큰소리 뻥뻥 쳐서 상대방을 놀라게 만든다.

   이쪽저쪽 술법을 부려 구름을 토해내고 안개를 삼켜가며

   있는 솜씨 없는 솜씨 한껏 뽐낸다.

   허공에는 흙먼지 뽀얗게 일고, 모래 바람이 소용돌이치는데,

   하늘의 장수 신통력에는 도력(道力)이 깃들고,

   원숭이 임금의 술법은 변화무쌍하다.

   철봉을 치켜드니 흡사 용이 물장난하듯,

   도끼날이 찍어드니 마치 봉황이 꽃떨기를 꿰뚫는 듯 절묘하기 짝이 없다.

   거령신의 명망이 천하에 두루 떨친다지만, 근본 실력은 애당초 적수가 못 돼.

   제천대성이 철봉을 가볍게 돌리니, 첫 수부터 온 몸뚱이가 저려서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도 p.208~210에 걸쳐 묘사한 괴물 원숭이 육이(六耳, 소찬풍)와 거령신과의 사투를 보면, 어느 정도 원작인 『서유기』와 맞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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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는 자기 노래 제목대로 인생을 산다는데, 꼭 노래가 아니더라도, 정말 제목대로 인생은 살아가나 보다. 내가 카테고리명을 '난중일기'로 지은 것은 앞으로 안정적인 직업을 갖지 않아 펼쳐질 전쟁같은 삶을 살아갈 내 일상을 조금씩 기록하자는 취지에서, 아주 겉멋든 거창함으로 포장한 것이었는데, 요즘 내 삶이 진짜 전쟁터 한복판에 있는 것 같다. 단, 삶의 치열함이 아니라, 일상의 사건에서 비롯된다는 게 다르지만.


   병원에 갔다온 이후로 아내는 아침 저녁으로 집 근처의 산부인과에 가서 주사를 맞았다. 나 역시 의무감 혹은 당연함으로 같이 따라다녔는데, 아침 10시, 저녁 6시, 단 두 번 따라가는데도 체력이 방전이 되어버렸다. 일어나서 식사 준비하고 밥먹고, 병원 갔다 돌아오면 11시, 조금 있다 점심 차리고 먹고, 5시 30분쯤에 병원가고 다시 돌아오면 7시. 저녁 차리고 먹고 그러면 어느새 하루가 후딱 가버린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야말로 하루가 실종되는 느낌. "왜 사나?"하는 삶의 존재 가치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까지 떠오르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그 기간동안 아내는 아침에 두 대의 주사를 맞았는데, 근육주사로 폴리몬을 배주사로 유트로핀을 맞았다. 유트로핀은 성장호르몬제로 성장기의 어린 아이들도 맞는 주사라는데, 아마도 난포를 키우는 데 필요한 성분이 들었나보다. 그리고 저녁에는 IVFM이란 근육주사를 맞았다. 잘 모르겠지만, 곧 추출할 건강한 난자를 만드는데 필요한 주사였겠지.


   목요일(12월 12일)에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받고 의사 선생님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잘 컸으니까 이번 토요일(14일)에 추출을 하자고 했다. 처방전을 보니 주사가 달라졌다. 세트로타이드와 오비드렐. 세트로타이드는 조기배란억제제고 오비드렐은 난포터지는 주사란다. 세트로타이드는 13일 오전에 병원에 가서 맞고, 오비드렐은 시술 전 밤 10시에 꼭 시간 맞춰 맞아야 한다는 중요한 다짐을 받고 밤 10시에 맞았다. 지금까지 처방받은 약제품이 전부 LG생명과학에서 만든 제품이라는 사실을 아내가 넌지시 알려줬지만, 그냥 LG에서 나온 시약들이 아내에게 딱 맞는 제품이라 선생님께서 선택하신 것이라 생각했다. 난 '추적 60분'보다는 '육아일기'를 원하니까. 이날 서울에 엄청나게 눈이 내렸다. 큰맘먹고 택시를 탔는데, 30분 거리를 2시간이 넘도록 도로에 갇혀 있었다. 두눈 부릅 뜬채 하루를 빼았겼다.


   토요일에 시술을 했다. 오전 9시까지 수술실/시술실로 오라 했는데, 주말이라 도로에 차가 없어 30분 일찍 도착했다. 그래도 시술은 정시에 시작했다. 온갖 우울한 표정의, 시술실에 누워 추출을 하고 있을 누군가의 남편들과 대기실에 앉아 영혼 없이 TV를 봤다. 부인들의 이름과 남편들의 이름이 호명되고, 호명된 남편들은 번호표를 뽑고 정자 체취실로 들어갔다. 대기실 구조상 체취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이 남편들과 눈이 마주치게 되는데, 그때 그 마주침은 무언가 민망하고 안쓰러우면서 왠지모를 자괴감도 느끼게 된다. 이 대기실의 구조야말로 던적스럽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9시에 들어간 아내는 12시가 되어도 나오지 않았다. 수술 현황을 알려주는 모니터에는 대기중, 수술중, 회복중을 알리는 아내들의 이름이 빼곡히 차있었는데, 멍했있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내 이름밖에 있지 않았다. 무언가 불길한 기분이 느껴질 찰라, 간호사 선생님이 날 부르더니 "아내분 시술이 잘 끝났는데, 배가 아프시다고 해서 진통제 맞고 누워 계세요. 조금 기다리시면 나오실 거예요."라고 말을 했다. 물론 추가로 이런 말도 들었지만. "추가 수납이 있으신데 지금 하시겠어요, 아니면 다음에 오실 때 하시겠어요?"


   수술이란 게 여러 번 받는다고 숙련도나 경험치가 올라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매 수술은 매번 새로운 수술이고, 수술실에 들어갈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아내는 1시 즈음에 나왔다. 아무리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임했던 시술이지만, 이러다 진짜로 마지막이 되는 거 아닌가하는 경망스런 생각이 들 때 즈음이었다. 난포가 5개 추출됐다는 말을 듣고, 다음 화요일 8시 30분에 이식하겠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뼛속까지 시린 새벽바람을 뚫고 수술/시술실에 도착했고 아내는 들어갔다. 이식은 전신마취를 하지 않으니까 조금 편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다. 신문을 읽고 있던 그 때, 나를 부르는 간호사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네, 선생님. ... ○○씨요. 남편 분 앞에 계세요. 입원... 아니요. ... 수술... 네." 간호사 선생님이 전화를 끊고 내게 말했다. "담당 선생님께서 남편분게 말씀드릴 게 있다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짧은 순간이었는데, 정말 오만가지 망상들이 내 머릿속에서 지랄발광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시술실에서 나오더니 나를 부르고 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 이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 망상의 지랄 지수가 최고조를 향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들어가니 아내가 가운을 입고 앉아있었다.


   "다섯 개가 다 수정이 됐대요. 처음이지. 이식을 하려고 하는데, 수정이 정말 잘 되어서 한 이틀 더 배양시키자고 하네요. 그게 임신 확률이 더 높대요. 근데, 그럴 경우, 만에 하나 다 죽을 수도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지금 이식할 지, 이틀 더 배양시켜 그 때 이식할 지, 결정을 하라는데, 난 도저히 모르겠어서. 당신 생각은 어때요?"


   지금 이식이 문제냐. 저 대기실에서 지금 여기 수술실까지 10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걷는 동안 내 안에서는 처절한 아마겟돈을 벌였는데. 아무일 없으면 됐지. 아내와 약간의 대화를 하고, 이틀 후에 이식을 받는 것으로 했다. 기왕에 마지막이라 했으니 조금이라도 확률이 높은 쪽을 택했다. 모두 다 살아남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짜피 그럴 운명이었으면 이식했어도 임신이 안 될테니까.


   아내와 대화를 하면서 간호사 선생님의 저 말을 이야기해주니, 아내가 바로 복원을 해줬다. "네, 선생님. ... ○○씨요. 남편 분 앞에 계세요. 입원(은 안하셨어요.) 아니요. 수술(할지 미룰지요.) 네." 별 말 아니었는데. 얼마전에 다시 본 <올드보이>에서 박철웅(오달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이 왜 두려움을 느끼는 줄 알아? 상상력 때문이래. 그러니까 너도 상상력을 없애봐. 졸라 용감해질거야."


   아무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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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2-19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있으시길... ^^

Tomek 2013-12-19 16:21   좋아요 0 | URL
pek0501님~ :)
오늘 잘 이식하고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
 


제26회 - 손대성은 풍도酆都를 벗어나고 원수성은 팔괘八卦를 풀이하다


   풍도란 풍도옥(酆都獄)이라고도 하는데, 『요원전』에서 나타태자가 있는 곳이 삼라전, 곧 지옥이니, 풍도란 지옥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부터 중국에는 사방과 중앙에 귀를 지배하는 귀제(鬼帝)가 있었다고 한다. 이 중 북방의 귀제가 있는 곳이 나풍산(羅酆山)이라는 산인데, 이 산은 북방 귀제의 수도여서 산 이름에 ‘도(都)’라는 자를 붙여 풍도라고도 불렸다. 이 산 위에는 지옥에 해당하는 6개의 천궁(天宮)이 있어, 귀는 귀제의 재판에 의해 죄의 경중에 따라 보내질 천궁이 결정되며 그곳에서 죄를 갚게 된다. 도교에서는 이 귀제를 풍도북음대제(酆都北陰大帝)라고 불러, 귀가 가는 명계를 지배하는 신으로 여겼다. (시노다 고이치『중국환상세계(幻想世界のちゅうにんだち)』에서 인용)

   팔괘란 중국 삼황(三皇) 중 하나인 복희씨(伏羲氏)가 만들었다는 여덟 가지 괘로, 주역(周易)에서 세상의 모든 현상(現狀)을 음양(陰陽)을 겹치어 여덟 가지의 상으로 나타낸 것을 말한다.



p.140

“과인이 어마마마께 들은 진실... 지금 지상에는 두 명의 태자가 있지만, 결국 두 태자를 죽이고 황제도 죽여... 이 제삼태자, 나타가 황제가 될 거라 이 말이다! 과인은 비록 지금은 이곳 삼라전의 왕이지만 결국에는 지상의 황제가 되고... 언젠가는 천상의 옥제마저 될 삼계의 태자란 말이니라!”


   나타태자와 탁탑 이천왕의 이야기는 『서유기』와 『봉신연의』 두 군데에 나오는데, 큰 줄기는 같지만, 디테일이 조금씩 다르다. 여기서는 『서유기』의 판본을 따르는 것으로 한다. 탁탑 이천왕은 아들을 셋 두었는데, 첫째가 금타(金吒), 둘째가 목타(木吒), 그리고 셋째가 나타이다. 이중 목타는 남해의 관음보살에게 귀의, 혜안 행자(惠岸行者)로 불리고 있다.

   여기서 나타가 이야기하는 “지금 지상에는 두 명의 태자가 있지만”이라는 말이 조금 이상한데, 왜냐하면 당고조 이연의 아들은 이건성, 이세민, 이원길 이렇게 세 명이기 때문이다. 조금 짓궂은 상상을 해보자면, 당고조 이연의 후궁인 지용부인은 이연의 아들인 이원길과 동침했기에, 이원길을 남편의 아들이 아닌 자신의 샛서방 정도로 격상(?)됐기에 나타에게 증오하는 아버지들 중 한 명이기에 저 카운트에서 제외되어, 세 명의 태자가 아닌 ‘두 명의 태자’라고 지칭한 게 아닐까 감히 상상해본다. 실제 역사에 기록된 사실 또한, 이세민이 현무문의 쿠데타를 일으킬 때 올렸던 상소 내용을 보면, 이건성과 이원길이 지용부인과 음탕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었다.

   나타가 자신을 ‘제삼태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삼형제 중 셋째라서가 아니라, 황제와 두 명의 태자를 대신함과 동시에 이곳 저승과 인간세상, 그리고 천상의 삼계를 통치할 태자 이고픈 마음에 그렇게 자칭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p.141

“그리 놔둘 성 싶으냐! 이 참요검斬妖劍을 받아라!”


   나타태자에게는 여섯 가지 병기가 있는데,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卻是砍妖劍、斬妖刀、縛妖索、降魔杵、繡球、火輪兒。

요괴의 목을 치는 감요검(砍妖劍)와 참요도(斬妖刀), 요괴 마귀를 결박하는 박요삭(縛妖索), 절굿공이처럼 생긴 항요저(降魔杵), 둥근 공처럼 생긴 수구(繡球), 그리고 불길이 활활 솟구치는 수레바퀴 화륜아(火輪兒)가 그것들이다.


   『서유기』에서 참요검과 참요도가 번갈아가면서 쓰이기 때문에 같은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p.145

“타결鼉潔! 마앙摩昻! 죽여라! 언감생심 이 나타삼태자哪吒三太子의 자리를 노리던 놈이다!”


   나타태자가 부르는 타결과 마앙은 보다시피 악어인데, 손오공은 ‘용’이라며 놀란다. 이것은 손오공이 악어를 보지 못해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으나 실은 모로호시 선생이 교묘하게(혹은 절묘하게) 인용한 부분이다.

   『서유기』43회를 보면, 삼장법사가 흑수하(黑水河)를 건너다 요괴에게 사로잡히고 마는데, 그 요괴가 바로 서해 용왕 오순(敖順)의 조카 타결이다. “불초 생질(甥姪) 타결(鼉潔)은 돈수백배하옵고, 둘째 외숙 되시는 오씨(敖氏) 어른 좌하에 여쭙나이다.(愚甥鼉潔,頓首百拜,啟上二舅爺敖老大人臺下)” 이 사실을 알게 된 손오공은 오순을 찾아가 시비를 따지고, 오순은 태자를 불러 타결을 잡고 삼장법사를 구출하게 하는데, 그 태자가 바로 마앙이다. “오순은 즉시 태자 마앙(摩昻)을 불러들여 분부를 내렸다. 「어서 속히 건장한 하어(鰕漁) 장병 오백 명을 뽑아 거느리고 출동해서 타룡이란 놈을 잡아다가 죄를 묻도록 해라.」(敖順即喚太子摩昂:「快點五百蝦魚壯兵,將小鼉捉來問罪。」)”

   그리고 손오공과 타결, 마앙이 물속에서 엉키는 이 장면으로, 손오공이 빠진 물속은 흑수하로 볼 수도 있겠다. 『서유기』에서 흑수하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層層濃浪,疊疊渾波,層層濃浪翻烏潦,疊疊渾波捲黑油。近觀不照人身影,遠望難尋樹木形。滾滾一地墨,滔滔千里灰。水沫浮來如積炭,浪花飄起似翻煤。牛羊不飲,鴉鵲難飛。牛羊不飲嫌深黑,鴉鵲難飛怕渺瀰。只是岸上蘆蘋知節令,灘頭花草鬥青奇。湖泊江河天下有,溪源澤洞世間多。人生皆有相逢處,誰見西方黑水河?

   층층이 짙은 물결, 첩첩이 흐린 파도.

   층층이 짙은 물결은 시커먼 빗물을 뒤엎어놓은 듯하고, 첩첩이 흐린 파도는 검정 기름을 휘말아놓은 듯하다.

   가까이 보아도 사람의 그림자 비치지 않고, 멀리 떨어져 바라보아도 나무숲의 형체를 찾아보기 어렵다.

   대지는 온통 세차게 굽이쳐 흐르는 먹물로 뒤덮여, 천리 너비에 도도히 흘러 잿빛투성이로 만들었다.

   수면에 떠오른 물거품이 숯더미처럼 쌓이고, 흩날려 오른 물보라가 석탄 더미를 뒤엎어놓은 듯하다.

   소나 양도 마시지 않고, 까치 떼도 날기 어렵다.

   소나 양은 너무 깊고 검어서 마시기를 꺼리고, 갈가마귀 까치 떼는 너르디너른 강물 폭이 두려워 날지 못한다.

   강기슭 둔덕 위에 갈대와 네가래 수초만이 무성하게 푸르러 제철을 알리고, 여울목에 들꽃 나무숲만이 푸르름과 기이한 자태를 뽐낸다.

   호수와 늪, 장강 대하는 하늘 아래 어디에나 있으며, 골짜기 시내와 샘의 원천과 연못, 동굴은 인간 세상에 많고도 많다.

   사람이 한세상 태어나 어디인들 서로 만날 곳이 없으랴만, 서방 세계 흑수하(黑水河)를 어느 누가 보았으랴!



p.149

“영안거永安渠에 떠다니던 걸 이 사람이 건져왔다네.”



圖 6 8 世紀前半的長安宮城、皇城、外郭城 에서 발췌


   손오공이 지용부인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액정궁의 지하이고, 삼라전에 흐르는 지하수로가 영안거에 연결되어 있다는 설정이다. 영안거는 장안 도성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특히 황성과 궁성 옆을 흘러 저 멀리 금원(禁苑)까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육건장(六健將) 일행이 궁성을 침입하는 루트로 활용되었다.



p.152

“‘한 손님이 두 주인에게 신세지지 않는다’라는 말도 있건만, 기왕이면 좀 확실히 봐 줄 일이지 그게 뭐요?”


   『서유기』3회에서도 이 말이 사용되었는데, 손오공이 동해 용왕 오광(敖廣)에게 다짜고짜 찾아가 금고봉을 (거의)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갑옷투구를 내놓으라고 (거의) 협박하는 장면에서 쓰였다. 이 때 손오공이 한 말은 다음과 같다.


一客不煩二主。若沒有,我也定不出此門。

   속담에도 ‘손님이 한 주인집을 찾으면 다른 주인을 찾지 않는다’하지 않았소이까? 만약 없다고 뻗대신다면 나도 이 댁 문턱을 나서지 않을 테니까 알아서 하십쇼.


走三家不如坐一家。千萬告求一件。

   속담에 ‘세 집을 돌아다니기보다 차라리 한 집에 눌러앉아 버티는 것이 낫다’했소. 나는 여기서 꼭 한 벌 얻어가야 되겠는걸!


俗語謂『賒三不敵見二』,只望你隨高就低的送一副便了。

   속담에 ‘외상 돈 석 냥보다 맞돈 두 냥이 더 낫다’고 했으니, 적당히 알아서 한 벌 내어주시는 게 좋을 거외다.



p.154

“현장법사, 자네는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완전히 통달했네. 이미 이 노인네를 넘어섰구먼.”

“하지만 법상法常스님... 빈도의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습니다. 빈도는 이제껏 엄법사嚴法師, 도악법사道岳法師를 비롯하며 많은 대사님들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 어느 분의 풀이라 해도 음으로 양으로 어딘가 모르게 합치가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장의 학문 여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장은 13세에 낙양[東都]에서 경 법사(景法師)에게 『열반경(涅槃經)』을, 엄 법사(嚴法師)에게 『섭대승론(攝大乘論)』을 배웠다. 후에 면촉(綿蜀)에서 석도기(釋道基)와 보섬(寶暹) 법사에게 『섭론(攝論)』과 『비담(毘曇)』을, 도진(道震) 법사에게 『가연(迦延)』을 사사받았으며, 상주(相州)에서는 혜휴(慧休) 법사에게 의심나는 것을 질문했고, 조주(趙州)에서는 도심(道深) 법사에게 『성실론(成實論)』을 배웠다. 그리고 장안에 들어가서는 대각사(大覺寺)에 머물면서 도악(道岳) 법사에게서 『구사론(俱舍論)』을 배웠고 법상(法常)과 승변(僧辯)에게서 『섭대승론(攝大乘論)』을 배웠다. 지금 『요원전』에서 현장과 대화하고 있는 스님이 바로 이 법상 스님이다.

   법상 스님은 남양(南陽) 백수(白水) 사람으로 속성은 장(張)씨로,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역장(譯場)의 역경(譯經)에 참여했다. 현장이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공부하고 습득하는 모습을 보고 찬탄하며, “자네는 석문(釋門)의 천리마(千里馬)라 할 수 있으니, 다시 지혜의 해를 밝게 하는 일은 마땅히 그대에게 달려있을 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가 이미 늙어서 그날을 아마도 보지 못할 것이 두렵구나.(汝可謂釋門千里之駒,再明慧日當在爾躬,恨吾輩老朽恐不見也。)”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당시 중국과 해외에 명성이 널리 퍼져있었던 법상 스님에게 20대 중반의 젊은 승려가 이런 찬사를 받은 것을 보면, 현장이 얼마나 특출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 현장의 지식이 어느 정도였냐면, “배우는 것은 모두 단번에 그 뜻을 깨달아 경전의 조목조목을 마음에 새겨두니 비록 나이 많은 노승들이라 해도 그를 따를 수가 없었고, 학문이 깊고 원대하여 은미하게 숨은 뜻까지도 밝혀내므로 대중들이 따를 수가 없었다. 때로는 홀로 깊고 오묘한 뜻을 깨닫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皆一遍而盡其旨,經目而記於心,雖宿學耆年不能出也。至於鉤深致遠,開微發伏,眾所不至,獨悟於幽奧者,固非一義焉。)”



p.155

“빈도는... 이 이상 섭론攝論을 연구해 본들 계속 제자리만 빙빙 돌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빈도는... 빈도는 천축에 있다는 『십칠지론十七地論』의 원본을 보고 싶나이다...”


   바로 이것이 현장이 17년간 그 지난하고 위대한 구법여행을 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이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法師既遍謁眾師,備飡其說,詳考其理,各擅宗塗,驗之聖典,亦隱顯有異,莫知適從,乃誓遊西方以問所惑,并取《十七地論》以釋眾疑,即今之《瑜伽師地論》也。

   법사는 두루 다니면서 여러 스승을 뵙고 그 말씀을 자세히 경청하고서는 그 이치를 자세히 고찰해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제각기 종지(宗旨)를 멋대로 해석하고 있어서, 성전(聖典)에 징험해 봐도 또한 숨은 뜻과 나타난 뜻에 다른 곳이 있어서 어느 것을 따라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이에 법사는 서방(西方)으로 가서 의혹되는 것을 풀고, 아울러 『십칠지론(十七地論)』을 가지고 와서 모든 의심을 풀기로 맹세하였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이다.


   『유가사지론』이란, 미륵(彌勒)의 미륵보살이 무착(無着)을 위해 중천축(中天竺)의 아유사(阿踰闍) 대강당에서 4개월에 걸쳐 매일 밤 강설한 것으로 후에 현장(玄奘)이 번역한 것으로, 유가행자(瑜伽行者)의 경(境)‧행(行)‧과(果) 및 아뢰야식설, 삼성설(三性說), 삼무성설(三無性說), 유식설 등을 자세히 논하는 불전이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師論)』이 소승 불교의 사상을 대표하고, 『대지도론(大智度論)』이 대승 불교가 발흥하던 시 대의 사상을 대표함에 대해서, 대승 불교가 완성되고 있던 시대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유식 학파의 중도설과 연기론 및 3승교(乘敎)의 근거가 되는 불전이다. (더 자세한 것은 23회 p.89 주석 참조)



p.158

“그 지용부인이라는 여자는 정식으로 치면 윤덕비尹德妃라고 본래 양제의 후궁이었던 것을 호색한 이연이 눈독 들여 냉큼 자기 후궁으로 삼았다더군. 때문에 본래 황제의 비는 삼부인三夫人까지로 정해져 있던 규범마저 고쳐 사부인으로 만들었다는 말마저 있을 정도라지.”

“어흠~ 당 황제에게는 이 왼쪽에 보이는 것처럼 황후 아래로 백이십 명 이상의 여인들이 있었다고 합디다.”


   윤덕비가 원래 양제의 후궁이었다는 사실은 기록된 바 없다. 하지만, 삼부인이 사부인으로 늘어난 것은 당고조 이연 때가 맞다. 이런 역사의 빈틈을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결부시키는 모로호시 선생은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당대 후궁의 칭호와 위계는 다음과 같다.


▪황후(皇后)

▪4부인(四夫人) -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현비(賢妃) - 정1품

▪9빈(九殯) - 소의(昭儀), 소용(昭容), 소원(昭媛), 수의(修儀), 수용(修容), 수원(修媛), 충의(充儀), 충용(充容), 충원(充媛) - 정2품

▪27세부(二十七世婦) - 첩여(婕妤) 9명, 미인(美人) 9명, 재인(才人) 9명 - 정5품

▪81어처(八十一御妻) - 보림(寶林) 27명, 어녀(御女) 27명, 수녀(綏女) 27명 - 정8품



p.161

“전하, 그 일로 진왕이 폐하께 상소를 올린 모양이옵니다. 대명천지에 이런 변괴가 일어나는 까닭은 궐내에서 도의를 저버린 해괴망측한 행위가 벌어지기 때문이라며...”

“그것은 과인을 두고 하는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이정을 비롯한 진왕파들이 태자 전하와 제왕 전하께서 후궁 장이호張姨好, 윤덕비 등과 밀통한다며 중상모략을 일삼고 있나이다.”


   이 대화는 『요원전』 24회 p.85에서 이세민이 이정에게 은밀히 지시한 내용을 밝힌 것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한다면, 『구당서(舊唐書)』「은태자전(隱太子傳)」에, “건성과 원길은 또 밖으로 소인과 결탁하고, 안으로는 폐행(嬖幸, 황제의 총애를 받는 사람)과 관계하여, 고조가 사랑하는 장첩여(張婕妤)와 윤덕비(尹德妃)는 모두 이들과 음란했다.” 는 기록과, 『자치통감』권190에 “이건성과 이원길은 뜻을 굽혀서 여러 비빈들을 섬기고 아첨하고 뇌물을 보내지 않는 곳이 없게 하여 황상에게 좋게 보이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장첩여와 윤덕비에게 증(蒸, 이건성과 이원길이 아버지 이연의 처첩과 사통私通하는 관계를 가졌다는 말)하였다고 말하였지만 궁중 깊숙한 곳의 비밀을 밝힐 수는 없었다.”고 기록으로 보아, 이세민이 이런 내용의 상소를 실제로 올린 것은 역사에 기록된 것과 같다.

   하지만, 이는 이세민이 만들어낸 유언비어일 공산이 크다고 여겨지는데, 왜냐하면, 이세민이 이 내용으로 당고조에게 상소를 올려 이건성과 이원길을 입궐시켜, 죽여버리기 때문이다. 진순신 선생은 「은태자전」의 기록을 언급하면서, “건성과 원길의 이름을 나란히 적었는데, 음란한 상대가 어느 쪽인지 매우 모호하다”고 밝혀, 이 내용이 누군가의 조작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p.162

“오공, 소찬풍小鑽風녀석 못봤나?”


   소찬풍이란 『요원전』 23회부터 등장해 음으로 양으로 오공을 도와주는 원숭이다. 이 소찬풍이라는 이름 또한 『서유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74회에서 팔백 리 사타령(八百里獅駝嶺)이란 산을 지나던 중 만나는 요괴들의 수하가 바로 소찬풍이다. 손오공은 이들 요괴들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고 소찬풍에게 접근하지만, 소찬풍이 워낙에 눈썰미가 좋고 의심도 많아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그만큼 똑똑한 캐릭터인데, 『요원전』에서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속담을 직접 증명하는, 칠칠치 못한 원숭이로 나온다.

   소찬풍이란 이름이 지금 나오는 것으로 보아, 모로호시 선생은 아마도 「현무문의 장」을 그릴 당시, 53회에서 62회까지 이르는 「황풍대왕의 장」을 구상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황풍대왕의 자식과 수졸들의 이름이 모두 풍(風)자 돌림인데, 굳이 중요한 소찬풍을 이 장에서 소모시킬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p.168

“금원禁苑 서쪽 변두리에 조태천照胎泉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말이야, 그 인근 여자들은 회임 기가 들면 거기로 가 물에다 자기 그림자를 비춰본다지... 회임한 여자가 비추면 그림자가 둘로 보이기에 조태천이라 부른다나... 그 우물이 출입구일세.”


   『서유기』53회에서 삼장법사와 저팔계가 강을 건너다 강물을 잘못 마셔 잉태를 하는데, 그곳에 사는 노파가 그 사정에 대해 설명을 하는 말에 조태천에 대한 설명이 있다. 『요원전』에서 해놓은 설명과 거의 흡사하다.


我這裡乃是西梁女國。我們這一國盡是女人,更無男子,故此見了你們歡喜。你師父吃的那水不好了。那條河喚做子母河。我那國王城外,還有一座迎陽館驛,驛門外有一個照胎泉。我這裡人,但得年登二十歲以上,方敢去吃那河裡水。吃水之後,便覺腹痛有胎。至三日之後,到那迎陽館照胎水邊照去。若照得有了雙影,便就降生孩兒。你師吃了子母河水,以此成了胎氣,也不日要生孩子,熱湯怎麼治得?

   우리네가 사는 이곳은 바로 서량여국(西梁女國)이랍니다. 이 나라에는 모두 여자들뿐이고 남정네라곤 하나도 없지요. 그래서 여러분을 보자 반색했던 거라오. 당신네 사부님이 그 강물을 떠마신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었어요. 그 강은 자모하(子母河)라고 부른답니다. 우리 국왕님이 사시는 성문 밖에는 영양관(迎陽館)이란 역사(驛舍)가 있고, 그 아문 밖에 조태천(照胎泉)이란 샘이 하나 있소이다. 우리 고장 사람들은 나이 스무 살을 넘기면 비로소 자모하 강변에 나가서 물을 마시는데, 그 강물을 마신 다음에는 이내 복통을 일으켜 잉태한 것을 알게 되지요, 사흘이 지난 뒤에 영양관으로 나아가 조태천 샘물에 몸을 비쳐보는 관례가 있어서, 만약 수면에 비친 그림자가 한 쌍으로 보이면 곧 어린 아기를 낳게 된답니다. 당신네 사부님도 자모하의 강물을 마셨다니, 그 때문에 복통을 일으키셨다면 아마도 태기가 있으신 모양이고, 이제 며칠 안 있어 어린아이를 낳게 되실 겁니다. 형편이 이렇게 되셨는데, 더운물 한 두 모금 마신다고 산고(産苦)가 멎겠습니까?


   『서유기』에서 자모하가 아이를 잉태하게 한다면, 그 반대편에 태기를 풀게 하는 낙태천(落胎泉)이 있는데, 그 낙태천을 차지하고 독점하는자가 바로 우마왕의 아우이자 홍해아의 삼촌인 여의진선이 차지하고 있다. 『요원전』에서 여의진선이 하는 일이 아이를 떼게 하는 환단을 만들거나 불법 중절 수술을 하는 것을 보면 얼추 비슷한 캐릭터로 볼 수 있다.



p.170

“바보 같은 소리 마라. 법도가 있는데 어찌 대궐 안에서 그리 움직일 수 있겠느냐. 게다가 세민이한테는 이정李靖이나 위지경덕尉遲敬德 같은 자들도 붙어 있을 것인데.”


위지경덕尉遲敬德 → 울지경덕尉遲敬德


   지금까지 ‘울’지경덕이냐 ‘위’지경덕이냐, 많은 말이 있었는데,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울’이 맞다. ‘尉’자는 성으로 쓸 때 ‘울(於勿切, 音鬱)’로 읽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에 ‘울지’성에 대해 찾아보면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p.170

“그보다 원길아, 지용부인과의 관계는 사실이냐? 세민이의 중상모략으로 그저 흘려듣기에는 석연치가...”

“형님이야 말로...!”


   이세민이 올린 상소를 모로호시 선생은 전적으로 믿지 않는 대신 절반 정도는 ‘그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여지를 남겼는데, 그 여지가 바로 이원길이다. 『자치통감』권 187에 기록된 이원길의 성품을 조금 옮겨본다.


   이원길(李元吉)은 성격이 교만하고 사치하여, (...) 멋대로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풀어놓아 백성들의 물건을 빼앗게 하고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활을 쏘아 그들이 화살을 피하는 것을 보았다. 밤에는 부(府)의 문을 열어놓아 다른 방에서 간음(姦淫)하는 것을 드러냈다. (...) 이원길은 어리고 약하며 지금 해야 할 일을 익히지 못하였으니, (...) 진양에는 강한 군사가 수만이고 식량도 10년은 지탱할 곳이고 왕을 일으킨 터전인데 하루아침에 이를 버렸다.


   당태종의 정통성을 위해 어느 정도는 폄하되었을 게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원길은 정말 문제가 있어 보인다.(그에 반해 태자 이건성은 어느 정도 복권이 되었다.) 이런 사료를 토대로 모로호시 선생은 야사와 역사를 적절하게 섞어 절묘하게 풀어놓은 셈이다.



p.174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전하라면 이 나라 사직을 훌륭히 떠받치실 수 있을 터인데 말이지요. 무엇보다 전하의 함자에서 「원元」자와 「길吉」자를 하나로 합치면 「당唐」이 되지 않사옵니까.”

“과연, 확실히 그러하구나! 그렇다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천자가 될 운명을 타고 났음이 아닌가! 동궁을 치는 것쯤은 세민이 놈만 제거하고 나면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지.”


   이원길의 수하가 이렇게 흰소리를 하는 것도, 그리고 이원길이 이런 흰소리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유는 바로 수나라 말기에 유행한 ‘도참서(圖讖書)’ 때문이다. 『자치통감』권 183에 기록된 도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근래(수양제 대업 12년, 616년) 사람들 사이에 불리는 노래로 ‘도리장(桃李章)’이 있는데, ‘도리자(桃李子)여, 황후가 양주(揚州)를 두르고 화원 안에서 굽혀 구르네. 여러 말을 하지 말아요, 누가 허락하였는지.’라고 하였소. 도리자란 도망한[桃] 사람 이씨(李氏)의 아들을 말하며, 황(皇)과 후(后)는 모두 주군이고, ‘화원 안에서 굽혀 구른다’는 것은 천자가 양주(揚州)에 있고 돌아올 날이 없어서 장차 도랑에 구르게 된다는 것을 말하며, ‘여러 말을 말아요, 누가 허락하였는지’란 비밀이란 말이오.


   이것은 이현영(李玄英)이 이밀에게 한 것인데, 이 말을 들은 이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즉, 수나라가 멸하고, 이씨가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자신이 왕이 될 거라 생각했었던 것 같다. 이런 확인되지 않은 도참서로, 수많은 효웅들이 일어서는 명분이 됐으며, 그 효웅들이란 이런 하찮은 이원길 같은 무리들이 대다수였다는 사실을 은근히 알려주는,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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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은 2014-03-07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양제良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