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동력 1
주호민 글.그림 / 상상공방(동양문고)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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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한동력>은 녹록치 않은 우리네 현실을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담담히 그려낸 만화다. 때론 등장인물들이 찌질하고 궁상맞은 모습들을 보이지만, 그 또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기에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물론 극 사실주의로 풀어냈으면 가슴 먹먹한 이야기가 되었겠지만(영화에 비유하자면, <마이 제네레이션>이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와 비슷한 느낌이 되지 않았을까?) 인물들과 이야기에 유머와 따스함이 있어 충분히 읽을만하다. 

   대학을 졸업해서도 도대체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자신의 적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적 없는 우리 세대들에게 <무한동력>은 "꿈을 찾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야기의 마지막, 주인공 선재가 두화증권에 취업이 된 것인지 안 된 것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선재가 하숙집에 있었던 약 1년간의 기간에서 선재는 삶의 목적이 아닌, 삶의 태도를 배운 셈이니까. 선재, 기한, 솔, 하숙집 아저씨 등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자기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 같다. 취업대란, 금융위기 속에서 점점 삶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있는 이 때에 삶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을 참으로 값진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야후 연재 시에 있었던 2편의 무한동력 설정집 그리고 에필로그가 빠져있는 점이다. 작품의 연속성과는 관계 없는 에피소드이지만, 초기의 설정에서 등장인물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는지, 주제가 어떻가 변했는지에 대한 것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부분이 빠져서 아쉽다. 에필로그 부분 역시 아쉬운 것은 매한가지. 책에서는 이들 3가지를 한데 묶어 작가 후기를 구성했는데, 원래의 흥이 느껴지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동력>은 우리가 잠깐 잊고 있었던 "꿈"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준 고마운 책이다. 대기업에 시원한 연봉도 좋지만, 그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꿈을 향해 다가가는 것, 아니 꿈이라도 꿔본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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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짬』'군대'마저도 긍정하는 주호민의 힘
    from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2009-12-04 10:25 
       남자들에게 있어 군대는 폭력에 길들여지고, 그 길들여지는 것을 시스템으로 익히는 사회의 훈련장이다. 사회의 작동 원리는 직접적인 폭력은 없으나, 그보다 더 정교한 방법으로 시스템을 이루고 있다. 막내일때는 죽을듯한 폭력에 길들여지고, 그 폭력에 길들여진 막내가 고참이 되어서는 그 길들여진 폭력을 이용해 그 시스템을 존속시키는, 돌고 도는 영겁의 관계가 존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우리'가 군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내가
 
 
 

   독서란 한 권을 꾸준히 앉은 자리에서 진득하니 읽어야 하는 것인데, 난 애초에 습관이 좀 별나게 들어서인지 책을 여러권씩 조금씩 읽는다. 그러다보니 내용이 서로 엉키는 부분이 많아서 책을 읽을 때마다 복습을 하곤 한다. 제대로 책을 읽는지는 모르지만, 습관은 쉽게 잘 고쳐지지 않는 것 같다. 

 

1. 공무도하 

   작가 김훈의 자필 사인을 받고 싶어서 예약 기간에 냅다 주문해서 샀다. 처음엔 계속해서 벌어지는 사건과 인물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병렬식으로 전개되어서, 읽는 동안 좀 골탕을 먹었었는데, 중반부를 넘어서니 그간 벌여놓은 인물과 사건이 점차 문정수에게 집중되는 느낌이 든다. 그의 문체 또한 여전히 치열하고. 다음주에 있을 <작가와의 만남>에 꼭 갈 수 있으면 좋겠다. 

 

2.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예전부터 서간집은 잘 읽지 못하는 편이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편지, 그것도 발신인 것만 모아놓은 이야기는 그 윤곽이 잘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간집은 나름 '적극적인 독서'로서의 매력이 있는 것 같다. 특히 날짜와 날짜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고, 또 주인공이 어떤 심리상태인지에 대한 생각은 소설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껏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이 소설을 인용했는지도 알 수 있고...

 

3. DUNE 

   올 6월부터 읽고 있는데 아직 1/3 정도밖에 읽지 못했다. <DUNE>을 읽은 계기는 데이빗 린치의 영화 <DUNE> 때문이다. 2시간 분량의 영화에 소설의 모든 세계관을 넣어서 무슨 이야기인지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소설을 택했다. 한글판 말고 영문판을 읽는 이유는, 단어의 선택이 궁금해서이기도하지만, 4권으로 분권된 번역본보다 1권인 영문판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4. 창천항로

           

   이미 다 읽기도 했고 구입도 한 책이지만, 1~22권까지는 삭제본 구판으로 가지고 있어서 다시 구입하고 읽기 시작했다. 성인만화로 분류되었으면서 도대체 삭제는 왜 한 것인지... 휴...  

   이학인의 글도 뛰어나지만, 왕흔태의 그림 또한 굉장하다. 재미면에서도 뛰어나지만, 서기 3세기까지 지탱되어 온 중국 역사의 체제, 종교, 학문, 철학을 아우르는 대작이기도 하다. 다만 아쉬운점은 이학인의 죽음으로 30권 이후부터는 <찬천항로>만의 아우라가 사라진, 평범한 만화가 되었다는 점이다.  

   구판은 인명의 오역이 다수 있고(서황->서광, 장료->장량),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서 읽으면서 상당히 괴로웠는데, 이번 신판은 그런 점을 어느 정도 해소해 다행이다. 

 

5.  백야 

   언젠가 도스또예프스키를 읽으리라고 마음먹었던 지가 5년은 지난 것 같다. 이러다 읽지는 않고 다짐만 할까봐 구입해 읽기 시작했다. 일단 지금까지는 <백야>만 읽었는데, 지금의 현대 소설과는 많이 달라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석장쯤 읽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가고, 다시 석장쯤 읽다가 다시 돌아가고. 어느 정도 남자 주인공을 파악하고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서 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 태어났다면 아마도 '골방의 제왕'이 되었을 법한 독특한 사유와 글쓰기가 날 사로잡는다. 고전은 괜히 고전이 아닌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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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헤드 1
모치즈키 미네타로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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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갑작스레 눈을 뜬다. 주위는 어둡고 사물을 분별하기는 힘들다. 역한 비린내가 코를 쑤신다. 익숙치않은 어둠을 이기고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의 친구들이 끔찍한 상태로 죽어있다.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은 꿈이다. 꿈이다.. 꿈이다... 꿈.... 

   모치즈키 미네타로의 <드래곤헤드>는 이와 같은 황당함(혹은 상상하기 싫은 가장 끔찍한 공포)으로 시작한다. 불과 몇 분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일상이었다. 교토에서 도쿄로 돌아오는 수학여행 귀경길. 서로 CD를 바꿔들으면서 그리고 정말 재수 없는 선생(뭐 흔히들 게쉬타포라 불리는 선생은 어느 학교에든지 꼭 있지 않은가)을 씹으면서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레 '어떤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여기서 '어떤 사고'는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화산이 폭발했는지 아니면 핵전쟁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해답은 6권에서야 밝혀진다). 문제는 갑자기 어떤 충격으로 인해 정신을 잃고, 다시 정신을 차리니 살아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일이다. 나머지 생존자 두 명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믿기 힘든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나서 주인공인 테루가 정신을 수습하기에는 꽤 긴 시간이 흐른다. 신간선 열차의 유일한 생존자인(아직까지는) 테루가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자신은 이 열차의 유일한 생존자이며 이 열차에 타고 있던 승객 전원과 자신은 매몰된 터널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혹시나 하는 생존자를 찾던 도중 세토라는 여자아이와 노부오라는 남자아이를 발견한다. 더 이상의 생존자는 없으며 어둠과 죽음만이 존재하는 매몰된 터널 안에서 이들은 정신적 패닉상태에 빠진다. 이들 셋이 망가지는 과정은 이들의 현실에서의 삶과 연관되어 망가진다. 

  

테루와 세토 

   테루는 이들 셋 중 살아야 할 목적의식이 가장 투철하다. 자신이 매몰되었음을 가장 먼저 알아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구를 찾는데 가장 적극적이다(게다가 가장 덜 망가진다). 테루는 너무나 단란한 가정이 있고, 학교에서의 생활도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는 이 끔찍한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이 안에 있으면 그는 잃을 게 많기 때문이다. 

   반면에 노부오는 지옥과도 같은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곳은 말그대로 지옥이다. 친구들과 선생님의 시체는 이상열기로 부패하고 있는 상태고 음식물도 남은 게 거의 없는 상태다. 주위는 온통 어둠으로 둘러쌓여 있는데도 노부오는 붕괴된 터널 안에서 그보다 더 작은 공간인 시체들이 즐비한 객차 안으로 들어간다. 노부오는 왕따 학생이었(던 것 같)다. 그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선생님이건 학우들이건 그는 언제나 놀림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바꾸었다. 노부오를 놀리던 이들은 다 죽어버렸다. 이제 노부오만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을 우습게 봤던 모든 이들은 이제 노부오의 지배권 하에 있었다. 시체를 태우건 쑤시건간에 노부오 맘대로다. 단, 살아있는 두 사람만 빼고는... 

   이들 서로의 긴장 관계는 권력 쪽으로 흐른다. 남아있으려는 노부오와 탈출구를 찾으려는 테루 사이에서 세토는 갈등하게 된다. 세토는 이 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보인다. 단지,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세토는 테루처럼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그녀의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노부오는 점점 공포에 잠식된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들처럼)자신의 몸에 문양을 그려 자신을 숨기기 시작한다. 객차가 자신의 통제권 안에 있다 하더라도 그는 불과 17살(이 만화에서는 나이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수학여행은 대개 고 1때 갔다오니까 그쯤 되지 않았을까?)이다. 수많은 시체더미(게다가 이상열기로 부패가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는 상황)안에서 그는 방향을 상실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앞서 얘기했던 정말 재수 없던 선생('미니라'라는 '괴수'이름으로 불리는)의 시체를 끌고와 왕좌에 앉힌다. 그라면 이러한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것 같기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부오는 점점 더 공포에 잠식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 그 무엇이 자신을 조여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노부오  

"난 왕따여서 알 수 있어... 무서운 것은... 없애버리던지 아님 친구가 되어버리던지 둘 중 하나라는 거야." 

   결국 그는 어둠과 친구가 되는 조건으로 미니라를 제물로 바친다. 어둠은 그 댓가로 노부오를 어둠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존재다. 처음의 테루와 노부오도 그랬고, 나중에 테루와 세토가 동경으로 가는 까닭은 '자신의 눈으로 이 모든 소문의 진위를 확인해보고 싶어서'이다. 계속되는 공포를 피하고 싶어서 더 큰 공포를 만든다(이건 이토 준지의 만화에서도 다루고 있는 주제이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행동은 대개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한 무모한 행동이다. 우리는 공포영화에서 그런 것을 많이 보아왔다.(지하실에서 소리나는 그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 일행과 떨어지는 인물들같은 경우) 그들 모두가 죽는 것을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직접 확인한다. 이건 이성의 힘이 아니다. 그저 본능이다. 그렇다면 이성의 힘이 발휘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일까? 

   눈에 보이는 공포와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폴 바호벤이 감독한 <스타쉽 트루퍼즈>와 <할로우 맨>을 예로 들어보자. <스타쉽 트루퍼즈>는 벌레와 인간의 싸움이다. 엄청난 떼로 몰려드는 벌레에게 사지가 절단되고, 목이 날라가고 다리가 갉아먹히고 내장이 튀어나오고 피가 사방에 흩날리는 지옥도와 같은 풍경이 펼쳐지지만, 관객은 그것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짓이기 때문에. 분명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것은 허구이고 더구나 관객의 시선은 모든 것을 구경하는 구경꾼의 시선이기 때문에 공포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반면에 <할로우 맨>은 투명인간이라는 대상은 영화속 등장인물들뿐만 아니라 우리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 투명인간이 된 세바스찬이 그의 동료들을 죽일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맞서는 인물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과 같은 공포를 느끼게 된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존재니까. 

   투명인간은 영어로 'Invisible Man'이다. 그런데 폴 바호벤 감독은 왜 'Hallow(속이 텅 빈) man'이라 했을까. 플라톤은 <국가론> 2권에서 투명인간의 예를 들었다. 한 남자가 투명인간이 되는 반지를 줍자 그는 그 반지를 껴서 투명인간이 된 후 궁전에 들어가 왕비를 탐하고 왕을 죽이고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즉 인간이 내적인 도덕률 때문에 올바르고 겸손하게 사는게 아니라 사회의 구속력에 어쩔 수 없이 순종하기 때문에 그런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만일 그러한 구속력이 다 제거된다면 과연 인간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할로우 맨>은 이러한 물음에 끔찍하게 대답한다. 말 그대로 투명인간이 된 인간을 그 자신의 외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내면까지도 텅 비게 만든 것이다. 우리가 지금껏 배워오고 반복학습하며 믿고있는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것이 우리를 구속하는 그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전혀 쓸모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 그 자체가 공포가 아닐런지.  

   노부오는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것이 사라지자 인간이라고는 믿기 힘든 모습을 보여주었다.(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본 모습일지도 모른다) 친구와 선생님의 시체를 능욕하는 것과 죽음에 임박했다는 것을 느끼며 세토를 강간(성공은 못했지만)하는 것은 옳고 그른 잣대를 댈 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분별력으로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있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구속력은 사라져 버렸다. 

   터널 안은 이성은 사라지고 본능만이 남은 세계이다. 테루, 노부오, 세토 이들 셋은 각기 방법은 다르지만 서로 살려고 한다. 자신에게 방해가 되면 가차없이 죽이려 한다. 모든 것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려 한다. 이상한 소문은 믿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소문들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한다. 모든 것이 꿈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눈을 뜨면 여전히 끔찍한 현실이다. 이성은 꿈속에서만 발휘되고 현실에서는 본능만이 있다. 살아야 한다. 

   그 끔찍한 지옥에서 벗어난 테루와 세토는 여러가지 사건을 겪고 마침대 도쿄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이상한 집단과 마주치게 된다. 그들은 목이 (반쯤)베어져 있거나 팔 혹은 다리가 잘리거나 상처를 입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해한 집단이다. 언제부터 시작되어진지도 잊어버린 끔찍한 공포속에 머물러있다 보니 감각 자체를 잊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감각을 찾기 위해서 스스로를 자해한 것이다. 그리고 구조활동을 벌이는 구조대를 사냥(!)해서 목을 베고 불을 피우며 구조대를 공포에 떨게한다.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은 더 큰 공포뿐이라면서. 

   마침내 테루는 집에 도착한다. 자신의 눈으로, 파괴된 자신의 집을 확인한다. 결국 테루는 모든 것을 다 확인했다. 어쩌면 제일 무서운 상황은 이것이 아닐까. 모든 상황을 다 헤집고 결국 살아남아 확인했을 때, 그나마 어렴풋하게 가지고 있던 기대가 완전히 박살나는 상황. 만화나 영화야 이런 상황에서 THE END하면서 상황종료 하면 되지만, 그것이 만일 현실이라면 그 상황을 짊어매야하는 주인공의 심정은 '공포 그 자체'가  아닐까. 

   이 걸작이 절판인 상태로 머물러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그렇다고 애장판이나 완전판이 나오기에는 주제가 너무나 무겁고 심각해 잘 팔리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재판본으로 다시 감상할 수 있을 기회가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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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da 2009-11-07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제 책장에도 꽂혀있는데... 예전에 재밌게 봐서 헌책방에서 샀는데 다시 보진 않아서 글도 보진 않았어요~

Tomek 2009-11-07 12:01   좋아요 0 | URL
제 리뷰는 읽지 않으시더라도, 책은 꼭 다시 읽어 보세요. ^.^;
 
영구 평화론 - 하나의 철학적 기획, 개정판
임마누엘 칸트 지음, 이한구 옮김 / 서광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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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는 그의 저서 <영구 평화론>에서 제목 그대로 '영원한 평화'를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영구 평화론은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영구 평화론이란 분쟁과 다툼 그리고 전쟁이 없는, 유토피아와 같은 그러한 이상향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칸트의 그것은 '전쟁의 가능성'을 둔 세계를 그린 것이다. 모순적인 이야기라 생각되어지지만, 칸트가 이야기하는 '전쟁의 가능성이 있는 영구 평화론'은 모순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이상을 접고 현실에 맞는 '주장'이다.  

   일반적인 평화론이라면 전쟁의 가능성을 없애버리는 것이 평화를 위한 절대적인 것이라 생각할테지만, 칸트는 오히려 전쟁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전쟁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영구 평화론이란 말은 이상하게 들린다. 전쟁이란 상황은 인간의 이성으로 제어되고 측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서는 오직 죽고 죽이는 살육의 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칸트는 영구 평화론을 주장하면서 이런 전쟁의 가능성을 차단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칸트가 전쟁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직전의 긴장상태가 자유를 발생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추측해본 인류 역사의 기원]이라는 논문에서 "그래서 양 진영 사이에는 끊임없이 전쟁이 발생하거나 혹은 그러할 위험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 양 진영의 국민들은 내적으로는 최소한 매우 귀중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칸트는 전쟁이란 "문명화된 민족을 위협하는 최고의 악은 전쟁"이라고 이야기 함으로써 전쟁의 부당함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칸트가 이야기 하고자하는 것은 전쟁이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최고의 악이지만,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긴장상태에서 인간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이기고자 하려면 강대국이 되어야 하는데 강대국은 부를 필요로 한다. 부를 필요로 하려면 부를 생산할 수 있는 활동이 필요로 하는데 이것은 자유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쟁의 긴장관계속에서 자유는 인간에게 허용되어진다는 것이다. 

   즉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는 전쟁 직전까지의 국가간의 긴장관계가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전쟁의 발생은 원치 않고 전쟁의 긴장관계만을 위해서라면, 또 그것이 영원한 평화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누군가의 조정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어느 한 국가가 모든 전쟁을 승리하게되면, 그 나라에 의해 평화는 올지언정 인간의 자유는 허용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러한 상황을 [추측해본 인류 역사의 기원]에서 창세기를 빌어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조정은 각 국가들의 연합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칸트는 단순히 '영원한 평화'만을 위해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자유'또한 중시하였다. 만약 칸트가 말 그대로 '영원한 평화'만을 위해 글을 썼다면 먼 옛날의 로마시대처럼 초강대국에 의한 평화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영원한 평화를 바라면서 그와 함께 인간의 자유또한 추구하였다. 이것이 그가 영원한 평화를 바라면서 전쟁의 가능성을 필요로한 까닭일까?   

 

* 각주 

내가 이제 땅 위에 홍수를 일으켜서, 하늘 아래에서 살아 숨쉬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을 쓸어 없앨 터이니, 땅에 있는 것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표준새번역 창세기 6장 17절) 

   칸트는 이 구절을 두 민족(가인과 아벨의 자손)이 서로 융합함으로써 그럼으로써 전쟁의 위험이 사라지게 되어 모든 자유가 사리지고 강력한 전제군주가 시작되었고 그로인해 인류는 자연을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위엄을 잃게되었다고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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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날씨

   어제부로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영하권에 근접한 기온에 바람까지 부니 서늘한 가을 날씨에 만족해 있던 몸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어제의 추위를 반면교사 삼아 오늘은 때이른 겨울코트를 과감히 입어보았다. 기온은 어제보다 더 떨어진 영하권인데, 바람이 불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단단히 각오를 해서인지 등사이에 땀이 조금 찼다. 11월에 겨울코트라니...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 아니라(뭐 그런적도 없었지만.. -.-;;) 시기를 앞서가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헛생각을 잠깐 해봤다. 

 

2. 2200번 

   난 파주에서 일한다. 서울서 파주까지 가는 방법은 여러 방법이 있으나, 대부분은 2200번 버스를 이용한다. 통근 시간이 가장 짧은 교통수단이니 다른 선택이 없을 것이다.  

   가뜩이나 출근시간엔 사람들이 많아 앉아가기는 일찌감치 언감생신, 겨우겨우 타곤 했었는데, 어제 버스 한 대가 고장이 나서 배차시간이 늘어나 겨우 타는 수준이 아닌, 짐짝처럼 낑겨서 탔다. 출입문 하단에 몸이 딱 들러붙은채로 버스 안에 있으니, '이렇게 살아야 하나'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지만, 평소보다 낮은 위치에서 바라보는 자유로의 풍경이 새로와 머릿속에 들었던 생각은 금새 잊고 말았다.  

   매일 바라보는 똑같은 길인데도 높이가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니 새로왔다. 길은 항상 그대론데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서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면, 우리의 직관이나 인식은 얼마나 얄팍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봤다. 

 

3. 후루야 미노루   

   어제, 그동안 미루고 미뤘던 후루야 미노루의 <심해어>를 주문했다. <이나중 탁구부>에서는 정말이지 배꼽을 잡고 낄낄거렸었으나, <두더쥐>를 읽고 거의 경악을 했다. 도저히 같은 작가라고는 믿지 못할 정도로 작화와 내용이 거의 극단으로 치달았다. 그나마 <두더쥐>보다 조금 나았던 <시가테라>도 4권까지 읽고 더 이상 감당이 안돼서 아직까지도 읽지를 못하고 있다. 거의 잊어버린 이름이었었는데, 지난주 라디오 북클럽에서 유희열씨가 이 책을 소개해준 것이 계기가 됐다. 어떤 내용일지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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