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그런 책들이 있다. 읽기는 읽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읽었는지 잡히지 않는 책들. 

가슴에 무언가 벅차오르는 듯한 그런 '느낌'이 있는 책들. 

한번에 먹어버리기 보다 생각날 때마다 꺼내어 야금야금 베어먹는 그런 책들. 

느낀 감정을 개념화된 언어로 재구성하기 불가능한 책들. 아니, 그런 의미가 무의미한 책들.

요근래 석달간 짬짬히 읽은 김훈의 책들이 그러했다. 

그냥 홀로 이 감정, 이 느낌 간직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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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냉엄하고 엄정한 시선을 잠시 거둔, 미문의 소설
    from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2009-11-27 17:51 
       김훈의 문장은 냉엄하고 엄정하다. 1인칭 시점의 글이건, 3인칭 시점의 글이건 간에, 그는 냉엄하고 엄정한 관찰자의 시점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기본 조건이야말로 그가 기자시절부터 단련해 온,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일 것이다.     그런 그도 피곤했던 것일까? 늘 세상과의 거리를 두고 있던 그의 시선이 『개』에서는 더할나위 없이 아름답고 아련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인간이 아닌
  2. 발로 꾹꾹 밟어 쓴 풍경과 상처 그리고 아름다움
    from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2009-11-30 09:40 
       전작 『자전거 여행』이 한강 하류, 조강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을 멈추었다면, 이번 『자전거 여행 2』에서는 바로 그 조강에서 페달을 밝기 시작한다.      김훈의 기행문은 여타의 기행문과 다르다. 일반적인 기행문들이 그 지역의 정보와 풍경에 대해서 설명한다면, 김훈은 그가 바라본 풍경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말
 
 
 
Fantastic Mr. Fox (Paperback, 미국판) Roald Dahl 대표작시리즈 2
로알드 달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 Puffin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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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너무 길들여진 것인가, Roald Dahl이 진보한 것인가... 

   Roald Dahl을 처음 알게 된 것은 『Matilda』였다. 워킹홀리데이로 처음 호주를 갔을 때 영어도 배울겸 독서도 할겸 중고 서적을 뒤적거리다가 발견한 "보물" 중에 단연 으뜸이었다. 『Matilda』는 어린이 소재의 영화중 그 유명한 조니 뎁과 팀 버튼의 조합으로 이뤄진 영화 『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와 버금 갈 정도로 영화로도 제작- 대니 드 비토가 감독겸 사기꾼이나 다름없는 개념없는 아빠로 나왔고 총명한 초능력자 마틸다는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막내딸 마리 윌슨이 열연했다- 되었으며 Roald Dahl의 이름을 알리는 대표작 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그림이나 활자체로 미루어 볼때 아동 소설 중에서도 그의 대상은, 부모가 bedtime story로 읽어줄 수 있는 3살부터 인물의 어리석음과 바보 같음을 가리키는 각종 비속어가 출현하는 것을 감안할 때 그것을 소화해낼 수 있는 12살까지인 듯 싶다. 

   주인공 Mr. Fox는 family man, 즉 한 가정의 가장이다. 그 가정이라 함은 금쪽같이 소중한 새끼들과 너그럽고 이해심 많은 부인이 이루는 사랑이 충만한 인간의 그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Mr. Fox는 아주 소중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가장으로 충실히 남편과 아버지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살고 있다. 문제는 그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는 삶을 파괴하고 싶어 안달이나 달려드는 무리가 있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형편없이 우스꽝스럽고 불결하기 그지없는 외모에 기이하고 혐오스러운데다 편집적인 식성을 지닌 한마디로 Roald Dahl의 소설에 등장하는 소위 "나쁜 캐릭터"들이다. 전혀 매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꽝 그자체인 세명의 캐릭터들이 Mr. Fantastic Fox와 죄없는 그의 가족을 무자비하게 소탕하려는 작전을 펼칠 때 그들의 냉혹함과 모진 탐욕에 혀를 내두르며 분개를 느끼는 것은 비단 아이들만이 아닐 것이다. 

   또한 탐욕에 눈이 먼 포학한 그들의 빈틈을 노려 자신의 가족을 비롯하여 자기로 하여금 피해를 입은 다른 동굴 동물 가족들-오소리, 두더지, 토끼, 족제비-까지 헤아리며 전장의 한복판에서 나쁜 무리들의 소굴로 정면 돌파하여 음식을 훔쳐내고 모두를 위한 만찬을 벌이는 장면에서 의기양양한 승리감에 도취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단편적으로 봤을 때 Roald Dahl의 소설이 지향하는 바는 권선징악에 있다. 그러나 악을 징벌하는 방법에 있어선 권선징악의 사자성어처럼 관용적이지 않다는데 그의 소설이 갖는 창의적인 매력을 찾을 수 있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착한 캐릭터들은 결코 약하지 않다. 이분법적으로 흑과 백으로 나눈다면 천사의 날개처럼 혹은 겨울밤 눈처럼 순백으로 비쳐지기보다는 다소 불분명한 색채를 띤다고 볼수 있다. 순수히 악당에게 당하며 견디는 소극적인 기질의 소유자가 아니라 다소 부적절하고도 얄궂은 또는 파괴적인 방법으로 속 시원하게 악당들을 처단해버린다. 총명함과 선량함, 순수함을 가진 동시에 적잖은 잔임함을 겸비한 번뜩이는 기지로 나쁜 캐릭터들과 그 환경에 대항해 실랄한 유머를 선사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대비해 본다면, 주로 그릇된 부모나 어른, 기존의 제도권이나 기득권에 대한 부조리함에 대한 반골 기질과 상통된 맥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젠 내가 이제 나이가 든 것일까...  

   잔인한 농부들에도 불구하고 Mr. Fox가 그들의 선량한 수확을 훔치는 도둑이라는, 캐릭터가 도입부부터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결국 "도둑" 아닌가...  

   정당한 노력없이 남의 것을 습득하는 도둑놈을 과연 끝까지 긍정하며 읽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농부들로 인해 피해를 본 이웃 가족들에 대한 Mr. Fox의 선량함-특히, 육식을 하지 않는 토끼 가족을 위해 당근을 챙기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Mr. Fox가 도둑이라는 의식은 이야기가 전개될 수록 많은 것을 가진 지상의 강자인 농부들에 의해 자행된 지하의 약자들에 대한 몰인정한 약탈 장면-특히 트랙터로 멀쩡한 언덕을 끔찍하게 황폐화시키는 자연학살-에서 그 주체와 대상이 전이, 긍정의 힘을 끌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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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화] 『판타스틱 Mr. 폭스』 시사회 이벤트
    from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2009-11-27 09:14 
       『Fantastic Mr. Fox』 리뷰를 쓴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책이 언제 영화가 되었나요? 게다가 웨스 앤더슨 감독에 조지 클루니, 메릴 스트립, 빌 머레이(@.@)라니!!      도대체 어떤 영화가 나왔을지 궁금합니다. 예고편을 보니 책보다는 덜 위악적인 것 같아 다행입니다. 『찰리와 초콜렛 공장』이후로 그럴싸한 Roald Dahl원작의 영화가 나올 것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에는 영어 원서로 접했으나, 후에 『On Love』라는 딱딱할 수 있는 영문 제목이 서정적인 시구로 탈바꿈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우리글 개정판 제목에 이끌려 또다시 읽게 되었다.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화자인 "나"가 클로에 라는 여자를 만나면서 사랑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담아냈다. 

   소설의 구성 단계인 위기나 절정 부분을 쉽사리 감지할 수 없는 전개 방식으로 속도를 내어 한번에 끝까지 박차를 가해 읽기는 쉽지 않았으며, 책을 완전히 내려 놓고 나서 과연 이 책이 무엇을 얘기하려 했는가에 대해서 한마디로 개념화 시키기는 어려웠기에, 픽션이라기 보단 알랭드 보통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사랑에 대한 essay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집어들었던 책의 결말 부, 연인이었던 클로에가 자신의 직장 동료 윌에게로 떠났음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절망감과 모진 복수의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하려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서야 겨우 이게 "소설이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책은 essay와 novel의 위치를 오간다. 장르 상 소설의 형식을 빌려왔을 뿐 내용은 지금까지 읽었던 연애 소설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남녀간의 애절하고 격정적인 연애 이야기의 상당한 허울을 벗어버리고 온전히 인간이 인간에게 가질 수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그 열정을 주고 받는 "관계"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이 책에서 양적으로 우세하게 차지하고 있는, 화자가 끊임없이 이끌어내는 자신의 사랑, 그것이 미치는 감정과 정신 그리고 육체에 대한 성찰적인 분석이 인상적이다. 사랑이라는 '현상'에 대한 철학적 해부와 분석, 과연 사랑에 '구조'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나로서는 처음부터 시종일관 중심을 잃지않고 그것을 살펴보고 헤아려 짐작해가는 화자의 놀라운 탐구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른바 논문처럼 사랑과 그 관계에 관한 범위의 내용들을 전반적으로 다루어 산만할 수 있는 내용을 각 장마다 제목을 붙여 명료하고 깔끔하게 쓰여졌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현상에 대한 심층적 구조를 이해를 하기에는 어렵지 않았던게 아닐까 싶다. 그런면에서 사유하게 만드는, 의미있는 문장들은 심심찮게 발견되는 재미역시 소소했다.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운명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누구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에는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외에 아무런 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생기는 불안. 즉, 우리의 사랑이 보장 받지 못한다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낭만적 운명론 中)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 내부에서 찾을 수 없는 완벽함을 찾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을 통해 인간 종에 대한 불확실한 믿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이상화 中)

 
   
   
 

   우리는 타락한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사랑을 한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떤 면에서 나보다 낫다고 믿어야만 한다면, 상대가 나의 사랑에 보답을 할때 잔인한 역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묻게 된다. '그/ 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 주의 中)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다' 스탕달은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클로이의 얼굴은 내가 좋은 삶과 동일시하는 특질들을 암시했다.  그녀의 코에는 유머가 있었고, 주근깨는 순수를 이야기했고, 치아는 관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해버리는 당돌한 태도를 암시했다. 

(아름다움 中)

 
   
   
 

   나는 너를 마시멜로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평생 들어본 말 중 가장 달콤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사랑은 우리에게 단순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입에서 맛있게 녹는, 지름 몇밀리미터의 달콤하고 말캉말캉한 물체였다.  

(사랑 말하기 中)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은 달라진다.  우리는 조금씩 남들이 우리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자아는 아메바에 비유할 수 있다.  아메바의 외벽은 탄력이 있어 환경에 적응한다.  부조리한 사람은 나에게서 부조리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그러나 진지한 사람은 나의 진지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누가 나를 수줍어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아마 결국 수줍어하게 될 것 이다.  누가 나를 재미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계속 농담을 할 가능성이 높다.  

(나의 확인 中)

 
   
   
 

   사랑의 종말과 삶의 종말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후자의 경우에는 그래도 죽음 뒤에 우리가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위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의 끝이 반드시 사랑의 끝은 아니며, 더군다나 삶의 끝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아는 연인에게는 그런 위안이 없다.  

(행복에 대한 두려움 中)

 
   
   
 

   일은 희비극의 시나리오로 풀려나갔다. 한편에는 여자를 천사와 동일시하는 남자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사랑을 병과 거의 동일시하는 천사가 있었다.  

(수축 中)

 
   
   
 

   사랑의 거부가 종종 도덕적 언어, 옳고 그름의 언어, 선과 악의 언어의 틀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치 거부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것,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연히 윤리의 한 지류에 속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악하다는 딱지가 붙고, 거부를 당한 사람은 선의 화신이 되는 일이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중략)  사랑의 거부가 아무리 불행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을 이타성과 동일시하고 거부를 잔인성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정말로 사랑을 선과 동일시하고 무관심을 악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중략)  사랑의 종말은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도덕성과 비도덕성 사이의 충돌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두 충동 사이의 충돌로 나타난다.  

(선악을 넘어서 中)

 
   

 

   이런 글을 차근차근 곱씹어 되새기다 보면, 사랑에 한번쯤 빠져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회의와 의문에 대한 결코 의식하지 못했거나 언급되지 않는 그 복잡 미묘한 순리에 대한 근본적인 진리, 즉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하겠지만 현재 진행 중이거나 혹은 과거완료형 사랑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모순과 결점에 대한 강한 공감대로서 위안을 주는 '살펴보기'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에는 사랑했던 두 명의 남녀가 보인다. 지나간 사랑을 붙들려고 애쓰는 남자의 애원에 아무런 답도 없이 지겨운 얼굴을 보이며 시큰둥하게 떠나는 여자의 모습은 결코 우리에게 소원하거나 낯설지 않은 그림이다. 때로 붙들기도 하고 떠나기도 했던 주인공이 우리였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별다른 사건이나 큰 이유없이 우리에게 그 변덕스러움을 드러내고 마는것이다.

   그런 면에서 알랭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남녀의 격한 감정의 진이 묻어나는 질퍽하고 강렬한 여타의 로맨스 소설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우리가 하는 평범한 사랑에 가장 근접한 모습을 띄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비범하지 않은 우리들처럼 소설속 화자도 결국 달갑지 않지만 용인해야 하는 사랑의 시들음까지, 그 현상들의 모든 장점과 약점, 강점과 결점을 받아들이고 이내 낙천적인 마음으로 새로운 사랑을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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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집에 고사가 있다고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와서 고사 떡 좀 가져가라는 말씀이셨는데, 그 속에는 '떡 가져가는 김에 얼굴 좀 보자'는 성화가 숨어 있었다. 3하긴 30여년간 줄곧 같이 살다가 결혼이라는 핑계로 분가를 하게 되서 같이 지내지 않으니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클까 짐작은 해보지만 절실하게 와닿지는 않는다. 그건 아마도 내가 자식이 없어서겠지. 그리고 자식을 낳으면 어머니보다 더 큰 그리움에 전전긍긍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지만, 그 미래는 아직 내게 다가오지 않아 잘 모르겠다. 

   내가 사는 곳은 서울 마포고 집은 서울 정릉이다. 집에 갈 때는 항상 110번 버스를 타고 집에 갔었는데, 오늘은 왠지 지하철을 타고 싶었다. 아내가 지하철을 싫어해 항상 버스를 탔지만 오늘은 혼자 가는 것이기도 하고, 또 버스에선 책을 읽기 힘들지만 움직임이 적은 지하철에서는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아침 8시 10분 광흥창 역에서 봉화산행 지하철을 탔다. 보문역에서 내려 1014번 버스를 타고 가면 가장 최단 거리의 요금이 나온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평소 토요일 아침보다 차량에 사람이 많았다. 21일, 셋째주 토요일. 격주 근무를 하는 회사나 학교가 쉬는 날이 아닌것을 알기에 다른 놀토보다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것은 예상했었지만, 이정도로 많을줄은 몰랐다. 그냥 평소보다 많았겠거니 하고 사람들 틈에 비집어 섰다. 

   4호선 환승이 되는 삼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자리가 났다. 자리에 앉고 책을 읽는데,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내리는 사람은 없고 타는 사람만 늘어갔다. 지하철 차장이 평소에는 안하던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약수역 앞, 뒤쪽으로 많은 수험생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앞, 뒤 차량에 굉장히 많은 승객들이 승차할 것으로 예상되오니, 차량 앞, 뒤에 계신 승객분들 중, 바쁘지 않으신 분들은 차량 중간으로 이동하셔서 쾌적한 환경에서 목적지까지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객차에 있던 승객들이 웅성거리더니 누군가가 이야기 한다.  

"오늘 고대 논술고사 있잖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오늘, 그것도 이 시간대에, 고대를 경유하는 6호선을, 그것도 두 번째 객차를 택하다니...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앉아 있었지만, 아침 출근시간 신도림역 수원행 열차를 경험해본 나로선 전신이 저릿저릿하고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오늘같이 긴장이 풀어진 상태에서 이런 상황은 감당이 되지 않는데... 오늘은 어떤 지옥을 맛 볼 것인가... 

   열차가 약수역에 도착했다. 찢어진 샌드백에서 모래가 쏟아지듯 사람들이 들어왔다. 대부분 앳된 학생들과 어머니들이었다. 열차는 금방 차고 들어오지 못한 학생들은 다른 객차에 타려고 달리기 시작했다. 빨리 움직이라는 공익요원의 호루라기 소리, 그만 문을 닫겠다는 차장의 단호한 협박, 반대편 플랫폼에서 열차가 들어온다는 경고음, 그리고 그만좀 집어 넣으라는 객차 속 (열차를) 탄 자들의 절규가 한데 어우러진 풍경은 정말로 장관이었다. 

   더이상 탈 데가 없는 것 같은데도 사람들은 열차에 끊임없이 들어왔다. 가장 절정은 고려대역을 네 정거장 앞둔 동묘역에서였다. 한데 무리진 여학생들이 도저히 못참았는지, "이제 그만좀 태워요."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그 소리는 세상사에 익숙한 어른들이 내지르는 '짜증'과는 달랐다.  

   어른들의 짜증이 익숙한 사회생활에서 겪는 어쩔 수 없는, 받아들여야 함을 알지만 최소한 항변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라도 해야 자신이 그래도 살아있음을 느끼는 그런 것이라면, 아이들의 항변은 짜증과 '어떤 설렘'이 그들의 목소리에 배어있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설렘이란, 어른들이 지니고 있지 못한 삶의 긍정, 역동성인것 같았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오늘 시험을 본다는 사실 자체가 신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나도 그 때 시험이, 두려운 감정도 있었지만, 어떤 통과제의 같은, 어른이 된다는 설렘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익숙한 생활의 반복속에서 그런 설렘은 아득한 것이 되었다. 

   결국 보문역에서 내리지 못하고 이들과 함께 고려대역에서 내렸다. 엄청난 인파가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열과 줄을 맞춰 일사분란하게 올라가는 모습은 파도가 출렁이는 것처럼 보여졌다. 차마 저 인파에 끼지 못해 주저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음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꼬리에 꼬리를 문 인파속에 미아가 될까 두려워 마음을 다잡고 휩쓸려 들어갔다. 

   110번 버스를 타기 위해 4번출구로 나왔다. 안암오거리는 차와 사람으로 엉켜있었다. 길건너 고대 생활관 쪽으로 수많은 인파들이 줄을 지어 올라갔다. 1차선에 있던 차량에서 어머니와 수험생인 딸이 내려서 학교쪽으로 뛰어갔다. 오거리 가운데 있는 경찰은 확성기로 차량과 인파를 제어해보지만, 도로로서의 기능을 포기한 도로에서 꾸역꾸역 머리를 들이밀며 밀려드는 차량과 신호를 무시하며 차량속으로 길을 내는 인파속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버스를 타고 길 반대편을 보았다. 가방을 맨 앳된 학생들이 뛰는 모습이 보였다. 시계를 보니 8시 52분이었다. 9시까지 시험장에 들어가야 하니까, 움직이지도 못하는 차 안에서 내려 뛰기 시작한 것 같다. 그 뒤로 밍크코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중년의 어머니도 뛰는 모습이 보였다. 애끓는 모정은 추위와 하이힐 앞에서도 굴복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두 정거장을 지나가는데, 힘들게 힘들께 뛰다 서다를 반복하는 학생이 보였다. 시각은 8시 58분이었다. 저 학생이 2분안에 뛰어서 시험장에 도착할 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저 학생이 시험을 보지 못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성인으로서 첫 시작을 시도해보지도 못한 무력감에서 맞이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해서 고사떡을 맛봤다. 떡을 맛보며 이따 집에 갈 방법을 생각해봤다. 이런 글을 쓰고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어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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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가 드디어 제작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접했다.(기사 읽기 클릭) 그의 100번째 영화인 <천년학>도 제작이 엎어질 뻔한 일이 있었는데, 신작을 만들 수 있다니 정말 다행한 일이다.  

         

   캐스팅은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가장 놀랐던 것은 필름이 아니라 디지털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다. 이미 100편의 영화작업을 한 장인이, 그것도 필름으로만 영화를 찍어왔던 감독이, 영화 인생의 황혼기에 새로운 도구로 영화를 찍는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감독 스스로의 확고한 미학적 선택인지, 아니면 제작비 감소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타협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이번 영화는 현역 최고령 감독의 가장 새로운 영화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에 충분히 안주할 수 있으나, 항상 벗어나려 노력하고 늘 새로워지기를 원하는 임권택 감독의 행보는 나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21세기 들어 영화는 '디지털'이 화두가 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영화 제작자들에게 있어서는 혁명과도 같은 일이다. 필름은 한 번 찍으면 다시 쓸 수 없지만, 디지털은 이게 가능하다. 영화에서 필름은 24장의 사진을 이어붙여 1초를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필름이 소모된다. 게다가 촬영이 한번에 끝나지는 않는다. 항상 무언가 일이 발생하며 수 많은 테이크가 일어나고 수많은 필름도 소모된다. 하지만 디지털은 필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1번의 테이크로 영화를 완성할 수도 있고, NG에 대한 부담감도 적어지기 때문에 좀 더 자유로운 작업 환경을 만들 수 있다. 

   즉, 영화를 필름으로 찍을 것인가, 디지털로 찍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감독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필름은 필름을 아끼기 위해서(혹은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서. 이것은 같은 말이다) 모든 스태프, 연기자들의 높은 집중을 요한다. 조명, 미술, 야외라면 기후조건 등 수 많은 제약을 필름에 담기 위해서 노력한다. 현실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은 리허설 장면이 촬영본이 될 수 있다. 필름의 제약이 없고, 조명의 제약 또한 약하기 때문에 여러 방향에서 영화를 구성할 수 있다. 디지털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보다는 감독이 선택할 수 있다. 

   필름에서 디지털로 옮긴 감독은 여럿 있지만, 내가 관심있는(혹은 아는) 감독은 딱 2명이다. 데이빗 린치와 홍상수다.   

 

     

   데이빗 린치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이후 디지털에 심취해있다. 처음에 그는 디지털에 반대했으나, 몇 번의 디지털 작업을 한 후로 "다시는 필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 선언했다. <데이빗 린치의 빨간방>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작고 가벼운 디지털 장비를 이용해 촬영을 해보면 필름 촬영이 번거롭게 느껴진다. 내게 35밀리미터 필름카메라는 마치 공룡처럼 보인다. 그것은 크고 무게도 엄청나게 나간다. 그런 카메라를 이리저리 움직여야 한다. 여러 가지 작업을 해야 하는데 도대체 빨리할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필름카메라 작업에는 제약이 매우 많다. 반면 DV Digital Video촬영 시에는 모든 장비가 가벼워 이동성이 훨씬 좋고 매끄럽게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생각한 바를 곧바로 영상으로 잡아낼 수 있다.  

(데이빗 린치의 빨간방)

 
   

   그는 화가 출신이다. 화가는 혼자서 캔버스를 메운다. 그의 바람은 그림을 그리듯 혼자서 영화를 만들고 싶은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공동작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작업을 하고 싶은 것 같다. 필름과 디지털의 차이는 화질이다. 그는 HD 디지털 카메라를 선택하는 대신 화질이 떨어지는 'SONY PD150'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한다. 크기가 작아 운용하기가 쉽고 그가 좋아하는 1930년대의 필름과 비슷한 화질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란다. 미학적인 면에서 필름을 쫒아가는 것을 보면 그가 디지털을 선택한 것은 제작방식 때문인것 같다.   

 

       

   홍상수는 <해변의 여인>이후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첩첩산중>, <하.하.하>를 모두 디지털로 찍었다. 필름에서 디지털로 옮긴 이유가 궁금해서 <어떤 방문> 감독과의 대화에서 질문했었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필름은 제가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 그걸로 찍었기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해보진 않았습니다. 그러다 제작비 문제때문에 디지털을 택하게 됐는데, 필름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찍은 결과물을 보면 필름과 디지털의 차이는 제게 없습니다. 좀 있다면 디지털은 줄무늬 있는 옷이 떨린다는 것 정도? 그리고 저는 영화를 찍을 때 테이크를 많이 찍는데, 필름은 아무래도 부담이 가죠. 하지만 디지털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디지털을 택했습니다.  

(<첩첩산중> 감독과의 대화 中)

 
   

   홍상수에게는 필름과 디지털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제작상의 이유로 디지털을 택한 경우다. 

   임권택 감독의 경우는 어떨까? 디지털은 필름과 다른 질감을 가지고 있다. 디지털이 많이 따라잡았다 하더라도, 아직 필름의 그 질감을 따라잡지는 못한다. 임권택 감독이 어떤 결과물을 내밀지 벌써부터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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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트 2009-11-21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습니다. 임권택 감독 신작이 정말 궁금해지는군요.

Tomek 2009-11-23 09:38   좋아요 0 | URL
어떤 영화가 나올지 궁금합니다.

가르강튀아 2009-11-21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어떻게든 영화를 만들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Tomek 2009-11-23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다행한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