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 용녀는 무리를 이끌고 당군을 치고 오공은 아녀자를 업고 동굴로 돌아가다


p.013

“하북에는 기근이 들었다고 해도 다른 지방은 그렇지 않아. 특히 강남의 사정은 오히려 정반대라. 당군은 거기서 난 풍부한 양곡을 운하로 퍼 나르고 있단 말씀이야.”


   수나라 때 건설한 운하를 살펴보면, 우선 수문제가 584년에 광통거(廣通渠)를 개통해 황허[黃河]와 장안을 연결했고, 587년에 산양독(山陽瀆)을 열어 화이허[淮河, 淮水]와 창장[長江, 揚子江]을 연결했다. 그 후 수양제가 605년 통제거(通濟渠)를 완성해 화이허와 황허를 연결, 창장에서 장안까지 연결하는 수로가 개통되었다. 608년에는 황허와 탁군(涿郡, 베이징北京 부근)을 연결하는 영제거(永濟渠)를 건설했고, 611년에는 창장 남안으로부터 위항[余抗, 항저우抗洲]을 연결, 탁군, 장안, 위항을 물길로 이동할 수 있는 사통팔달의 수로가 완성이 되었다.



   수문제가 운하 공사에 착수한 것은, 수도 장안의 번영으로 인구가 증가해서,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광통거로 관동의 곡물을 관중으로 수송할 수 있었으며, 산양독으로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강북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수양제의 대운하 공사 역시 기본적으로 수문제와 같은 이유에서였지만, 너무나 무리한 공사 진행으로 엄청난 수의 백성들이 사역을 당해, 그 원한이 끊임이 없었다. 그런데 운하가 완성된 611년에, 수양제는 양주(揚州, 장쑤성江苏省)에서 탁군까지 용주(龍舟)로 행차를 했는데, 이 배는 높이가 45척, 길이가 200척, 총 4층 규모에 2층에만 120개의 방이 있고, 노를 젓는 데만 8만명의 인부가 필요했다니, 그 꼴을 봤던 민중들이 충분히 피를 토할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때문에 수양제의 대운하 사업은 자신의 유람 시설을 위한 공사라고 백성들에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영제거의 경우는 고구려 원정을 위해 개통한 것이었고, 이후 612년부터 3년간 고구려 원정에 나서니, 바로 이런 이유들로 민란이 봉기하여 수나라가 멸망하는 시작점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수양제의 대운하 사업의 진위야 어찌됐든, 이 대운하로 중국의 남북교류는 경제적인 것은 물론, 문화적인 것까지 활발하게 진행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요원전』에서는 멸망한 수에 이어 곧 통일을 눈앞에 둔 당이 이 운하를 십분 이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p.038

“이... 이만 돌아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더 이상 들어갔다간 오리무중에 빠질 걸세.”


   오리무중(五里霧中)이란 ‘짙은 안개가 5 리나 끼어 있는 속에 있다’는 뜻으로 ‘무슨 일에 대하여 방향이나 갈피를 잡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 권36 「장해전(張楷傳)」에 나오는 오리무(五里霧)에서 비롯된 고사성어다.

   장해(張楷)는 후한 순제(順帝)때 선비로, 학문이 뛰어나고 도술(道術)에도 조예가 깊었으나 벼슬에 관심이 없어 출사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명성이 높아져 그를 찾아온 문하생과 학자들이 얼마나 많던지 은둔한 곳 근처에 그의 자를 딴 공초(公超)라는 거리가 생길 정도였다. 게다가 장해를 찾는 사람 가운데는 학문을 숭상하는 부류만 있는 게 아니라 도술을 배우려는 무리도 많았다. 그 중 관서(關西) 출신의 배우(裴優)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삼 리를 안개로 덮을 수 있는(三里霧) 능력이 있었지만, 스스로 장해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 배우기를 청했다. 장해는 능히 오 리를 안개로 덮을 수 있었기(五里霧) 때문이다. 그러나 장해는 몸을 피해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 후 배우는 안개를 일으켜 도둑질을 하다가 잡혔는데, 안개를 일으키는 도술을 장해에게서 배웠다고 진술해 장해도 2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장해는 옥중에서도 고전을 읽고, 『상서(尚書)』의 주석을 달았는데, 배우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일흔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러니까 오리무중의 연원은 ‘(장해)는 성정이 도술을 좋아하여 능히 오 리를 안개로 덮을 수 있었다. (性好道術,能作五里霧。)’, 바로 이 말에서 비롯된 것인데, 왠지 느낌이 확 와 닿지 않는다. 오히려 진짜 ‘오리무중’에 가까운 이야기로는, 먼 옛날 신화의 시대에 치우(蚩尤)가 타 부족과의 전쟁 중에, 천지를 뒤덮는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 못하게 했다던 이야기가 어울리는 것 같다. (이 치우의 안개는 나중에 황제黃帝에게 깨지고 만다.) 고우영 선생께서도 그렇게 느끼셨는지 『십팔사략』 1권 「치우(蚩尤)」편에서 이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활용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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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원전』 의 번역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나,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잡지 못한 오류들이 조금씩 보인다. 1권에 대한 글도 끝냈고 해서, 그간에 썼던 글 중 오류라 생각하는 부분들만 모아서 따로 정리를 한다. 명시한 것들이, 확실하게 틀린 부분도 있지만 작가의 의도라 생각되는 부분도 있어서 조심스럽다. 다음에 재판을 하게 될 때 어떻게든 반영이 됐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에서 올린다.




p.004

등장인물


무지기無支奇 → 무지기無支祁 


   이유는 아래 p.078 무지기 항목에서 설명.




p.005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 이연의 넷째 아들.


넷째 아들 → 셋째 아들 


   1권 p.247 본문과 註에서 다루었으므로 셋째 아들로 통일해야 한다.




p.022

국원攫猨이구먼...” 확원攫猨이구먼... (p.023, p.024, p.029, p.030, p.031, p.035, p.052, p.054 모두 수정)


   확원(攫猨)이라 읽어야 한다. 확원이란 앞서 이야기한 가국을 나타내는 다른 말이다. 『포박자(抱朴子)・대속편(對俗篇)』에, “후(猴: 원숭이)는 나이가 팔백 살이 되면 원(猿: 원숭이)으로 변하고, 나이가 오백 살이 되면 확(攫: 큰 원숭이)으로 변한다”고 했다.




p.034

“평소라면 도저히 목으로 넘어가지 않은 음식이겠으나... 권세를 등지고 산야에서 풀을 뜯어 연명한 옛 성인 백이와 숙제의 덕을 기리기에는 좋은 기회일 게야.”


목으로 넘어가지 않은 →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




p.076

무지기無支奇... 그 이름은 이 노인네도 알고 있소. 먼 옛날 하夏를 개국했던 성국 우왕禹王께서 치수를 하실 깨 붙잡아 귀산龜山 아래 사슬로 꽁꽁 묶어 뒀다던 수괴水怪가 아니오? 『악독경』岳讀經이라 하는 책에서 본 적이 있소이다. 장강長江, 회수淮水의 물을 지배하며 온갖 들판의 넓이와 개울의 깊이에 통달했다던가...


무지기無支奇 무지기無支祁


   무지기(無支祁)는 巫支祁・无支祁・巫支祗 등으로 표기되는데, 『요원전』에서는 ‘기’자를 祁에서 奇로 바꾸었다. 『요원전』에는 차용한 캐릭터의 원래 이름을 살짝 바꾸는 경우가 가끔 보이는데, 그게 작가의 의도인지 아니면 실수인지는 잘 모르겠다. 예를 들어 『서유기』 47회와 99회에 나오는 일금(一金)은 『요원전』 74회부터 96회까지 등장하는 일금(一金)으로 글자가 바뀌었는데, 각 작품에서 칭秤과 승升이라는 단어에 맞게 이름을 해석하므로 작가의 의도로 볼 수 있겠다. 


   무지기에 대한 기록은 『고악독경(古岳讀經)』제 8권에 나오는데, 『고악독경』은 『태평광기(太平廣記)』 권467 「이탕(李湯)」에 실려 있다.


禹理水,三至桐柏山,惊風走雷,石號木鳴,五伯擁川,天老肅兵,功不能興。禹怒,召集百靈,授命夔龍,桐柏等山君長稽首請命。禹因囚鴻蒙氏、章商氏、兜盧氏、梨婁氏,乃獲准渦水神,名無支祁。善應對言語,辨江准之淺深,原隰之遠近。形若猿猴,縮鼻高額,青軀白首,金目雪牙,頸伸百尺,力逾九象,搏擊騰踔疾奔,輕利倏忽,聞視不可久。禹授之童律不能制;授之烏木由,不能制;授之庚辰,能制。鴟脾桓胡、木魅水靈、山襖石怪,奔號聚繞,以數千載,庚辰以戟逐去。頸鎖大索,鼻穿金鈴,徒准陰龜山之足下,俾准水永安流注海也。

우(禹)가 홍수를 다스릴 때 세 번 동백산(桐柏山)에 이르렀는데, 바람이 불고 번개가 치며 돌이 부르짖고 나무가 울었으며 오백(五伯)이 시내를 끌어안고 천로(天老)가 병사들을 모아도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우가 노하여 천하의 여러 신들을 불러 모으고 기룡에게 명하여 동백 등의 산군들이 머리를 수그리고 명령을 청했다. 우가 홍몽씨(鴻蒙氏)・장상씨(章商氏)・두호씨(兜盧氏)・이루씨(梨婁氏)를 가뒀기 때문에, 곧 회수(准水)와 와수(渦水) 사이에서 요물을 잡았는데 이름이 무지기(無支祁)라고 했다. (이 요괴는) 말을 잘하고 장강의 흐름과 회수의 흐름 가운데의 얕고 깊음을 가려낼 줄 알며, 벌판과 습지의 가깝고 먼 것을 가릴 줄 알았다. 생긴 것은 원숭이와 같은데 코가 움츠러들었고 높은 이마에 몸빛은 푸르고 머리는 희며 금처럼 반짝이는 눈에 눈처럼 하얀 이를 가졌다. 목을 길게 빼 늘이면 그 길이가 백 자는 되는데 힘은 코끼리 아홉 마리를 합친 것보다 더 세며 동작이 매우 빨라 잠깐 사이에 번득이며 듣고 보이는 것이 오래 가지 못했다. 우가 무지기를 동률(童律)에게 맡겼으나 다스리지 못했고, 조목유(烏木由)에게 맡겼으나 다스리지 못했고, 경진(庚辰)에게 맡겼더니 다스릴 수 있었다. (경진이 일을 시작하자) 치비・환호・나무 도깨비・물의 정령・산의 요괴・돌 요괴들이 달려와 모여들기를 수천 년 동안이나 했는데 경진이 갈래진 창으로 쫓아냈다. (경진은 무지기의) 목에 굵은 사슬을 메고 코에는 금방울을 닳아 회수 북쪽의 구산(龜山) 기슭에서 항복시키니 회수를 좇아 영안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갔다.


   모로호시 선생은 무지기의 奇를 『산해경・서산경(西山經)・해내북경(海內北經)』에 있는 ‘궁기(窮奇)’라는 짐승에서 가져온 것 같은데, 그 짐승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西山經」: 曰邽山。其上有獸焉,其狀如牛,蝟毛,名曰窮奇。

규산(邽山)이라는 곳에는, 그 위에 어떤 짐승이 사는데, 그 생김새가 소와 비슷하고, 고슴도치 털로 덮여 있으며, 이름은 궁기(窮奇)라 한다.


궁기(窮奇)


「海內北經」: 窮奇狀如虎,有翼,食人從首始,所食被髮,在蜪犬北。

궁기(窮奇)는 생김새가 호랑이와 비슷하고, 날개가 있으며, 사람을 잡아먹을 때 머리부터 먹기 시작하는데, 잡아먹히는 사람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으며, 도견(蜪犬)의 북쪽에 있다.


궁기(窮奇)




p.244

“당시 천하의 판도로 말할 것 같으면 열에 아홉은 거의 당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습니다만 고개도高開道, 서원랑徐円朗 등 아직도 당에 복속되지 않은 세력이 남아 있었지요. 그 중에서도 유흑달은 하북을 거점 삼아 당에게 마지막까지 완강히 저항한 군웅 중 마지막 한 사람이었답니다.”


서원랑徐円朗 서원랑徐圓朗 


   역사 속 인물, 고유명사이니 통자 대신 본자를 써야 한다.




p. 358

“잘 들어, 진秦 말엽에 난을 일으킨 진승陳勝・오광吳廣, 신新 시절 거병한 여모呂母, 녹림綠林의 난을 주도한 왕림王匡・왕봉王鳳, 적미군赤眉軍을 이끈 번숭樊崇, 후한後漢 말 황건군黃巾軍의 주모자 장각張角, 오두미도五斗米道의 교주 장노張魯, 북위北魏 시절 대승교大乘敎의 난을 일으킨 법경法慶...”


왕림王匡 → 왕광王匡

장노張魯 → 장로張魯 (p.359 장노 수정)




p.358

“* 다들 아시겠지만, 황소는 이 이야기로부터 수백 년 뒤 당 말기를 뒤흔든 ‘황소의 난’의 주모자, 그리고 송강은 북송 시절 그 이름도 유명한 양산박 108호걸의 두령으로서 조정에 맞선 급시우(及時雨) 송강을 뜻하는 것이올시다. (옮긴이 註)”


북송 시절 그 이름도 유명한 양산박 108호걸의 두령으로서 조정에 맞선 급시우(及時雨) 송강을 뜻하는 것이올시다.

→ 북송(北宋) 말기의 도적으로 약 1년간 관군과 대치해 싸웠으나 결국 사로잡혀 항복한 인물로, 『수호전』의 송강은 바로 이 송강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올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송강은 역사 속의 인물인데, 설명은 『수호전』의 송강과 섞여 있다. 송강은 북송(北宋) 시절의 도적으로 조정의 착취에 못 이겨 백성들과 하급 관리들과 함께 1119년 12월에 산동에서 반란을 일으켜 하삭을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산동 지방을 휩쓸고 다녀 그 세력이 청주, 제주, 복주를 아우를 정도였다고 한다. 1120년에 조정에서 투항을 권했지만 이를 거절하자, 이 때문에 조정에서 증효온에게 군을 이끌도록 해서 파견하니, 이를 피하면서 청주에서 남하해 기주(지금의 산동성 임기현)에서 약 1년 동안 관군과 대치했다. 1121년 2월에 회양군을 점령하고 술양을 거쳐서 해주로 갔다가 이듬해 5월에 상선 10여 척을 탈취하고 빼앗은 물품을 싣고 있던 도중에, 첩자를 통해 동향을 파악한 장숙야가 육지로 유인하자 배에서 내리는 틈에 공격을 받아 복병으로 포위되고 부장이 사로잡히자 항복했으며, 그 이후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행적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엔하위키 미러에서 인용)

   『송사(宋史)』에 “송강은 36인으로 제위를 횡행한다(言宋江以三十六人横行齐魏)”고 나와 있어 ‘양산박 108호걸’, ‘급시우’ 등은 사료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p.407

수말당초隋末唐初 군웅할거도群雄割據圖


서원랑徐円朗 → 서원랑徐圓朗

임자홍林子弘 → 임사홍林士弘

이자통李子通 아래 그림 밑에 심법흥(沈法興) 추가





p.408

623 유흑달, 이세민에게 패해 죽다


유흑달, 이세민에게 패해 죽다 → 유흑달, 제갈덕위(諸葛德威)의 배반으로 사로잡힘. 이건성, 유흑달을 참수.


   『자치통감』 권190을 보면, 당시 유흑달을 토벌하러 가는 것은 이세민이 아니라 태자 이건성이다. 이건성이 유흑달 토벌에 지원한 것은, 뛰어난 무공으로 당(唐)의 기반을 굳건하게 세운 이세민을 견제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짐작된다. 이런 가운데, 무덕(武德) 6년 (623년), 정월 기묘일(3일)에 유흑달이 임명한 요주(饒主, 허베이성河北省 헝수이시衡水市 라오양현饶阳县) 자사 제갈덕위가 유흑달을 배신해 생포한 후, 이건성에게 호송해갔다. 유흑달과, 함께 잡힌 유흑달의 동생 유십선(劉十善)은 유흑달의 도읍지였던 명주에서 목이 베어 죽었는데, 이런 정황으로 보아 당시 토벌군의 책임자였던 이건성이 유흑달의 참수를 지시했던 것으로 본다.

   『요원전』에서는 이세민이 유흑달을 죽인 것으로 설정이 되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3권 이후로 홍해아가 더 이상 나올 이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권말 부록 부분은 역사를 정리한 것이라 생각되어 일부러 오류를 적었다.




   이상 서유요원전西遊妖猿傳 대당편大唐篇 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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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08-05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처럼 상세히 해부하신 님이 참 대다하신듯 싶어요^^

Tomek 2013-08-06 09:46   좋아요 0 | URL
정말 재미있는 책인데, 별로 얘기가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에 홀로 몇 자 끼적여봤습니다.

고맙습니다. :)
 


제11회 - 선경仙境에서 처녀가 천의天意를 가늠하고 촌리村里에서 흉도凶盜가 양민을 괴롭히다


p.375

“이 오행산은 다섯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지. 동쪽에는 목봉木峯, 북쪽에는 수봉水峯... 그리고 토봉土峯, 금봉金峯, 화봉花峯, 이렇게 다섯 봉우리에 둘러싸인 골짜기 한복판에 바로 백운동이 있단 말씀이야.”


   『서유기』7회에 오행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好大聖,急縱身又要跳出。被佛祖翻掌一撲,把這猴王推出西天門外,將五指化作金、木、水、火、土五座聯山,喚名「五行山」

앙큼스런 손대성, 황급히 몸을 솟구쳐 다시 빠져나오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부처님의 손바닥이 훌떡 뒤집히면서 “탁!” 하고 한 대 후려치니, 이 분수 모르는 원숭이 임금은 서천문 바깥으로 튕겨 날아가고, 이어서 다섯 손가락이 금・목・수・화・토의 봉우리가 잇따른 산악으로 변하여 그를 꼼짝 못하게 눌러버리고 말았다. 이 다섯 산봉우리가 이름하여 ‘오행산’이다.



p.387

“내 봉은 은고봉銀箍棒, 아직 임자가 없는 그 봉은 금고봉金箍棒이라고 한다더라.”


   『요원전』의 금고봉은『서유기』의 여의금고봉에서 따온 것이다. 여의금고봉은 대개 줄여서 여의봉이라 하는데, 『요원전』에서는 아예 금고봉이라 이름을 정하고, 은고봉이란 자매까지 만들어놨다.

   손오공이 여의봉을 얻는 이야기는 『서유기』 3회에 나오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혼세마왕(混世魔王)을 물리친 손오공은 손에 맞는 병기를 구하기 위해 동해 용왕 오광(敖廣)을 찾아간다. 손오공이 하는 짓거리가 말만 얌전했지 거의 협박 수준이라, 용왕은 내키지 않지만 이런 저런 병기들을 손오공에게 보여주는데, 손오공은 가벼워서 쓸 수 없다 얘기하고 다른 것을 요구한다. 난감해하는 용왕에게 부인 용파(龍婆)와 딸 용녀(龍女)가 바다 창고에 비장해둔 큰 쇳덩어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용왕은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손오공에게 그 쇳덩어리를 준다. 그것은 굵기가 열 되들이 말[斗]만큼이나 되고 길이가 20척을 훨씬 넘게 기다란 쇠기둥이었는데, 손오공이 들어보니 무게는 적당하나, 너무 굵어서 사용하기에는 불편하더라. 그래서 손오공이 “조금만 가늘고 짧았으면 쓸 만하겠”다고 이야기하자, 손오공의 말대로 그 쇠기둥은 짧아지고 가늘어졌다. 말 한마디에 커지고 작아지기가 마음대로인, 이름하여 여의금고봉을 얻는 순간이었다.

   『서유기』에서 여의봉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原來兩頭是兩個金箍,中間乃一段烏鐵。緊挨箍有鐫成的一行字,喚做:「如意金箍棒,重一萬三千五百斤。」

철봉의 위아래 양 끝머리에는 금빛 테가 씌워져 있고 철봉대는 먹물보다 더 시커먼 오금(烏鐵)이다. 단단하게 조여진 금테 바로 밑에는 글씨 한 줄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여의금고봉(如意金箍棒), 무게 1만 3천 5백근.



p.388

“그걸 뽑을 수 있다면 네 것이 될 거야. 자, 뽑아보시지.”


   『요원전』에서 손오공이 금고봉을 얻는 이야기는, 아더왕 전설(Arthurian Legends)과 겹쳐진다. 가가미 다카코(鏡たか子)의 『영웅열전(英雄列傳)』서 묘사된, 소년 아더가 칼을 뽑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교회의 부지 안에는 대리석처럼 크고 네모난 바위가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두꺼운 철판이 얹혀 있었다. 이 바위와 철판은 크리스마스 날 갑자기 교회 부지 안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철판의 중앙에는 아름다운 검이 한 자루 꽂혀 있었는데, 이 검에는 ‘이 검을 뽑는 자야말로 잉글랜드의 왕이다’라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

   그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 검을 뽑기 위해 안간힘을 썼어도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검에 얽힌 사연은 전혀 모르는 아더가 칼자루를 잡았더니 검이 쑥 뽑혔다. 이 검도 명검이지만 그 유명한 엑스캘리버는 아니다. 아더는 나중에 이 검을 잃어버리고 엑스캘리버를 손에 넣게 된다.”

   후에 아더왕은 원탁의 기사단의 지도자가 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에 사용했다는 성배(聖杯)를 찾는 모험을 떠나기도 한다. 이는 신기하게도 『요원전』과 『서유기』에서 손오공의 행적과 유사하다.



p.394

“그렇게 되면 너도 이 봉에 담긴 힘을 깨닫게 될 걸. 천지의 영묘靈妙한 조화가 만들어낸 이 신진철神珍鐵의 힘을 말이야!”


   『서유기』에서 용파와 용녀가 용왕에게 얘기한 쇳덩이가 바로 신진철인데, 천하(天河)의 밑바닥을 다질 때 사용했으며, 우(禹) 임금이 황하의 홍수를 다스렸을 때 강물과 바다 밑바닥을 다지는 데 썼던 것이라 한다. 하늘의 강바닥을 다지고 황하의 홍수를 다스릴 수 있는 쇳덩이라면 정말 엄청날 것이다. 『요원전』에서 금고봉의 힘은 실로 엄청난데, 그 힘의 바탕은 바로 제천대성 무지기의 힘이다. 금고봉은 평상시에는 평범한 막대이지만, 제천대성의 힘을 끌어냈을 때 그 파괴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p.399

“그건 나도 모르겠어. 사부께서도 읽지 못하셨다지. 천축天竺문자가 아닐까 하시던데...”


   드디어 천축이 언급됐다. 천축은 인도를 가리키는데, 이 말의 어원은 인더스강의 옛 페르시아어인 ‘헨뚜(Henttu)’나, 아니면 미얀마어인 ‘턴뚜(Tenttu)’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대 이란 지방에서 침입한 아리안족이 최초로 자리 잡았던 곳이 Shindhu(지금의 인더스강) 강가라 그 지역과 사람들을 통칭하여 Shindhu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 명칭을 외국에서 인도를 부르는 데 주로 사용되어 왔다. Shindhu라는 말은 고대 이란어의 특성에 따라 Hindu로도 통용되었는데, 후일 페르시아인들로부터 이 Hindu가 그리스어에 전해졌으나, 그리스어에 H가 없었기 때문에 현재의 국명 India나 강 이름 Indus가 여기에서부터 유래하게 되었다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인도(印度)라는 명칭이 바로 현장 스님이 붙인 것이라는 점이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현장이 기록한 천축의 명칭과 인도의 연원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詳夫天竺之稱,異議糺紛,舊云身毒,或曰賢豆,今從正音,宜云印度。印度之人,隨地稱國,殊方異俗,遙舉總名,語其所美,謂之印度。印度者,唐言月。月有多名,斯其一稱。言諸群生輪迴不息,無明長夜莫有司晨,其猶白日既隱,宵燭斯繼,雖有星光之照,豈如朗月之明。苟緣斯致,因而譬月。良以其土聖E賢繼軌,導凡御物,如月照臨。由是義故,謂之印度。

천축(天竺)이라는 호칭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보면 의견이 갖가지로 분분하다. 구역(舊譯)에서는 신독(身毒)이라고 하였고 혹은 현두(賢豆)라고도 불렀는데, 이제는 정음(正音)을 따라서 인도(印度)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인도 사람은 지역에 따라서 나라를 부르는데, 다른 나라의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체로서의 이름을 들면서, 그 아름다움을 일컬어 인도라고 부르고 있다. 인도라는 말은 당나라에서는 달[月]을 의미한다. 달에는 많은 이름이 있는데 인도는 바로 그 명칭들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중생들은 쉬지 않고 윤회하며 무명(無明)의 밤은 길고 길어서 새벽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밝은 태양이 숨으면 달빛이 그 빛을 잇는 것과 같다. 비록 별빛이 빛난다고 하더라도 어찌 환한 달빛의 밝기만 하겠는가? 오직 이 같은 이치에 따라서 달에 비유하는 것이다. 실로 그 땅의 성현들이 궤적을 잇고 범부들을 이끌고 만물을 인도하는 것은 마치 달이 천지를 환히 비추는 것과 같으니 이런 뜻으로 말미암아 인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현장은 아마 Shindhu 혹은 Hindu라고 불리는 것을 Indu로 받아들여 천축을 인도라고 명명한 것 같다. (범어로 Indu는 달을 뜻한다.) 이 인도라는 명칭은, 당시에 잘못 받아들여졌던 불교의 용어를 바로잡고 반절법(反切法)을 사용해 원음에 가까운 발음을 기록한 현장의 (유일한) 실수이자 착오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나름 어원을 추리해서 명명한 것이라 하는데, 어쨌든 인도라는 단어는 그 후로 굳어져 오늘에까지 불리고 있다.

   1608년에 편찬된 『법계안립도(法界安立圖)』라는 3권짜리 지리책 상권에 수록되어 있는 남염부주도(南閻浮州圖, Jambudikā)를 보면 현장이 기록한 인도와 서역의 나라와 지명들이 자세하게 표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실크로드 고전총서 시리즈를 펴낸 다정 김규현 선생은 이 지도를 “7세기 중반의 중화권의 우주관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이른바 인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전도”라 정의했는데, 그 가르침에 십분 동의한다.


남염부주도(南閻浮州圖, Jambudikā)



p.407

수말당초隋末唐初 군웅할거도群雄割據圖


서원랑徐円朗 → 서원랑徐圓朗 으로 수정

임자홍林子弘 → 임사홍林士弘 으로 수정

이자통李子通 아래 그림 밑에 심법흥(沈法興) 추가




p.408

623 유흑달, 이세민에게 패해 죽다


유흑달, 이세민에게 패해 죽다 → 유흑달, 제갈덕위(諸葛德威)의 배반으로 사로잡힘. 이건성, 유흑달을 참수


   『자치통감』 권190을 보면, 당시 유흑달을 토벌하러 가는 것은 이세민이 아니라 태자 이건성이다. 이건성이 유흑달 토벌에 지원한 것은, 뛰어난 무공으로 당(唐)의 기반을 굳건하게 세운 이세민을 견제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짐작된다. 이런 가운데, 무덕(武德) 6년 (623년), 정월 기묘일(3일)에 유흑달이 임명한 요주(饒主, 허베이성河北省 헝수이시衡水市 라오양현饶阳县) 자사 제갈덕위가 유흑달을 배신해 생포한 후, 이건성에게 호송해갔다. 유흑달과, 함께 잡힌 유흑달의 동생 유십선(劉十善)은 유흑달의 도읍지였던 명주에서 목이 베어 죽었는데, 이런 정황으로 보아 당시 토벌군의 책임자였던 이건성이 유흑달의 참수를 지시했던 것으로 본다.

   『요원전』에서는 이세민이 유흑달을 죽인 것으로 설정이 되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3권 이후로 홍해아가 더 이상 나올 이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권말 부록 부분은 역사를 정리한 것이라 생각되어 일부러 오류를 잡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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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 용녀는 홀로 평정산을 제압하고 오공과 함께 오행산에 들어가다


p.337

“저 산채가 난공불락인 연유는 바로 배후에서 공격받을 염려가 없기 때문이지.”


   난공불락인 평정산의 산채는 『수호전(水滸傳)』에서 화화상(花和尚) 노지심(魯智深)과 청면수(青面獸) 양지(楊志)가 두령으로 있는 이룡산(二龍山)의 산채가 떠오른다. 『요원전』에서 금각・은각 형제가 산채를 차지하고 산적질을 하는 것처럼 『수호전』에서도 노지심과 양지도 (의형제를 맺고!) 이룡산에서 산적질을 한다. 『수호전』에서는 노지심과 양지가 이룡산을 차지하는 과정까지만 나오는데, 그 후의 이야기는 금각・은각의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수호전』 17회에서 이룡산에 대한 묘사가 나와 있는데 다음과 같다.


不若小人此間離不遠,卻是青州地面,有座山,喚做二龍山。山上有座寺,喚做寶珠寺。那座山生來卻好,裹著這座寺,只有一條路上的去。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소인이 사는, 청주에 이룡산이 있습니다. 산 위에는 보주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보주사는 이룡산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올라가는 길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若是端的閉了關時,休說道你二位,便有一萬軍馬,也上去不得。似此只可智取,不可力求。

만일 정말로 문을 걸어 잠근다면, 두 분은 말할 것도 없고, 1만 군마가 와도, 올라갈 수 없습니다. 오직 지혜로써 취해야지, 힘으로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난공불락인 요새는 없듯이, 이룡산의 산채도 관군에 깨질 위험에 처하는 것처럼, 평정산의 산채 역시 그런 상황에 직면한다. 이것은 곧 뒤에 벌어질 이야기이다.



p.342

“다 왔어. 이제 이 돌다리를 건너면 백운동白雲洞이야.”


   백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평요전』에도 나오지만, 『요원전』에서 다루는 내용은 『평요전』을 각색한 애니메이션 〈천서기담(天書奇譚)〉에 더 가까워 보인다. 〈천서기담〉에서 천궁의 비서각(秘書閣) 집사인 원공(袁公)이 옥황상제가 연회에 간 틈을 타 천서(天書)를 빼돌려 운몽산(雲夢山) 백운동(白雲洞) 석벽 위에 내용을 새겨 넣는 장면이 나오는데, 『요원전』은 바로 그 모티프를 차용한 것 같다. 『평요전』에서 백운동은, 『여의보책(如意寶冊)』이라는 신서(神書)가 있는 장소로 등장한다.


〈천서기담〉의 원공과 단생(蛋生)



p.351

“그... 그렇다고 그런 계집애랑 꼬맹이한테 이 산채를 내주실거요?”

“염려마라. 공손한 척해서 방심시킬 뿐이다. 어차피 지금 녀석들은 단 둘 아니냐. 결국 빈틈이 생길 거야. 그보다 나는 일단 용아녀의 힘을 이용해 볼까 한다.”


   『요원전』에서 은각은 감정적이고 무례한 난봉꾼 기질을 갖고 있는 반면, 금각은 진중한 성격으로 은각이 저지른 일을 뒷수습하는 모습을 보인다. 『서유기』에서 이 둘의 성격은 『요원전』과 다르게 묘사되어 있는데, 은각은 감정적이긴 하지만, 신중하고 꼼꼼한 성격인 반면, 금각은 진중하지만, 복지부동(伏地不動)의 성격이다. 어쨌든, 두 작품 모두 은각 때문에 사단이 발생하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p.356

“내 사부 진원대선鎭元大仙이라는 분이셨어.”


   진원대선은 『서유기』 24회~26회에 걸쳐 등장하는, 진원자(鎭元子) 또는 여세동군(與世同君)이라고 불리는 만수산(萬壽山) 오장관(五莊觀)에 사는 도사이다. 손오공 일행이 인삼과(人蔘果)를 훔쳐 먹고 도둑으로 몰리자, 홧김에 나무를 쓰러뜨리는 만행을 저지르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요원전』에서 63회~71회에 걸쳐 다루고 있다. 즉, 같은 인물이 둘로 나뉘어져 있는 셈이다. 이로보아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애초에 『요원전』의 이야기를 길게 다룰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과는 「대당편」만 4,000 여 페이지에 달하는 대작이 되어버렸다.



p.357

“그럴 리가! 이 고대 문자를 해서楷書로 번역해 놓은 건데.”


   해서란 한자 서체(書體)의 하나로 금예(今隷)·정서(正書)·진서(眞書)라고도 하며 후한(後漢) 말에 한례(韓隷)의 파책(波磔)을 고치고 꺾고 치침을 더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예서(隷書)와 해서(楷書)로 나누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해서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① 법도(法度)를 갖추어서 해모(楷模:模範)가 되는 서법이라는 뜻이고, ② 정서 혹은 진서로서 자체가 단정하고 용필(用筆)이 법에 맞는다는 것으로 행서(行書)·초서(草書)와 같이 흘리지 아니한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간단하게 영어로 표현하면 regular script가 된다.


唐‧禇遂良︰書倪寬傳贊


   『요원전』에서는 ②의 뜻을 사용한 것 같은데, p.356~p.360에 걸쳐 있는 것을 보면, 너무 흘려 써서 해서가 맞는지 모르겠다. 아마 의도적으로,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모로호시 선생이 일부러 흘려 쓴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미래의 일도 기록되어 있을 테니까.)



p.357

“그럼 설명해 주지. 동쪽 커다란 벽에는 일흔 두 명의 인물의 이름이 늘어서 있어. 사부께서 이들이 지살地煞 칠십이성七十二星에 해당하는 인물들이라 하시더군.”

“그럼 서쪽 벽에는?”

“천강天罡 삼십육성三十六星에 해당한다고 사부께서 말씀하셨는데... 이건 나도 속속들이 아는 건 아니야. 사부께서도 사 년 전에 돌아가셨으니...”


   천강성은 북극성을 가리킨다. 도교에서는 북두를 중심으로 한 별들 중 36개의 천강성과 72개의 지살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천강36성, 지살72성이라 불렀다. 이들은 별의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라 각각의 이름은 없지만, 『수호전』에서 천강36성, 지살72성의 이름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요원전』에서 천강성과 지살성을 구별/차별하듯이 『수호전』에서도, 천강성에 이름을 올린 자들은 각 회차별로 중심 이야기가 있는 반면, 지살성은 거의 이름만 올리는 경우가 많다.



p. 358

“잘 들어, 진秦 말엽에 난을 일으킨 진승陳勝・오광吳廣, 신新 시절 거병한 여모呂母, 녹림綠林의 난을 주도한 왕림王匡・왕봉王鳳, 적미군赤眉軍을 이끈 번숭樊崇, 후한後漢 말 황건군黃巾軍의 주모자 장각張角, 오두미도五斗米道의 교주 장노張魯, 북위北魏 시절 대승교大乘敎의 난을 일으킨 법경法慶...”


왕림王匡 → 왕광王匡

장노張魯 → 장로張魯 (p.359 장노 수정)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

   진승과 오광은 옛 초나라의 땅이었던 하남성 남부의 가난한 농민이었다. 이들은 기원전 209년 7월, 북쪽 변방 수비의 명을 받고 어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여름 장마가 닥쳐 길이 막혀서 도저히 기일 안에 당도할 수 없게 되었다. 진의 엄한 법률은 어떠한 사정도 용납하지 않았기에 기일이 늦어지면 참수형에 처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뜻을 모은 두 사람이 농민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미 기한에 늦어버렸다. 어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형, 비록 사형을 면한다 하더라도, 변경의 수비를 맡는다면 두 번 다시 고향 땅을 밟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왕후장상의 씨앗이 어찌 따로 있겠는가? 우리도 똑같은 인간이 아닌가?”

   농민들은 모두 함성을 지르며 이들을 따랐다. 진승의 예견대로 봉기의 소식을 접한 전국 각지의 백성들은 항쟁의 대열에 나섰다. 이미 백성들은 깃발만 오르면 반란에 동참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

   진승은 초나라의 수도였던 진(陣)을 함락하여 도읍으로 삼고, 국호를 장초(張楚)라 하여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실전경험이 없는 농민들의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했고 농민 주력군이 진의 장군 장감에게 패한 후에는 내부 동요까지 일어나 진승과 오광이 살해되기에 이르렀다. 사상 최초의 농민정권은 불과 6개월 만에 몰락했다. 봉기의 열매는 농민들의 손을 떠나 다른 이에게 돌아갔다.

   진나라는 진승 · 오광의 난 이후 전국에서 빗발치는 반란의 물결에 휩싸였고, 기원전 206년 그 최후를 맞이했다. 통일을 이룬 지 불과 15년 만의 일이었다. (안정애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에서 인용)


② 왕망(王莽)의 찬탈, 여모(呂母)의 복수, 번숭(樊崇)의 난, 왕광(王匡)・왕봉(王鳳)의 난

   한의 전성기였던 무제(武帝) 때에도 국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세력가가 있었다. 한편 궁정에서는 무제가 죽은 후 황후의 일족인 외척과 상궁을 관장하는 왕의 측근인 환관(宦官)이 일어나, 정치는 그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들 외척과 환관의 권력 다툼에다 더욱더 힘을 키우게 된 세력가 때문에 한의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가운데서 서기 8년, 외척 중 한 명인 왕망(王莽)이 선양(禪讓)이라는 형태로 황제가 되어, 새로운 국가 신(新, 8~23)을 건국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왕망은 토지의 국유령과 노비의 금지령을 내려 대토지 소유자인 세력가들을 단숨에 해체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를 실행할 만한 강대한 권력이 없었고, 법령은 세력가들의 반대에 부딪쳐 있으나 마나한 것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이 법령은 4년 만에 철회되었다.

   엎친 데 엎친 격으로 북방 흉노의 침입이 격화되었다. 왕망은 이를 단숨에 토벌하기 위해 30만 대군을 보냈으나, 흉노에게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하고, 막대한 국가재정만을 낭비해 재정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할 것이다. 어떤 빌미만 있으면 화약고에 불을 댕기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 뻔한 상황에서, 그 빌미를 만든 것이 여모(呂母)라는 양조장 주인이었다. 여모의 아들은 지방 관리로 있었는데, 과실을 저질러 현의 장관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양조장을 경영하던 여모는 젊은이가 오면 돈을 받지 않고 술을 주곤 하였다. 이런 마음씨 좋은 주인이 복수를 외치고 나서자 많은 젊은이들이 그 깃발 아래 모이게 되었다. 여모는 전재산을 털어 무기를 구입하였다. 이리하여 여모 일당은 해곡현(海曲縣, 현재의 산둥성)을 습격하여 현의 장관의 목을 잘라 그 목을 아들의 무덤 앞에 바쳤다.

   일당은 목적을 달성했으나 해산하지 않았다. 고용된 무장단은 곧 반란 집단으로 바뀌었다. 왕망 정권을 뒤흔든 '적미(赤眉)의 난'은 이렇게 해서 일어났다. 여모 일당은 적군 · 아군을 식별하기 위하여 벽에 바르는 붉은 물감을 자신들의 눈썹에 발랐다. '적미군'이라는 이름은 거기서 생겨난 것이다. 여모 다음으로 적미군을 지휘한 것은 번숭(樊崇)이라는 인물이었다.

   화북 일대를 무대로 활약한 적미군과는 별도로 후베이성 당양현(當陽縣)의 녹림산(綠林山)을 거점으로 하여 왕광(王匡) · 왕봉(王鳳) · 성단(成丹) · 마무(馬武) 등이 녹림단(綠林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 세력은 처음에 수백 명이었으나, 몇 달 새 8천 명에 이르렀고, 전성기에는 5만 명이나 되었다.

   왕망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수만 명의 군대를 보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정부군을 대파한 후 적미군의 수는 오히려 10만 명으로 불어났다. 그 위에 한의 일족인 유수(劉秀, 후의 광무제)가 세력가들을 결집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서울 장안은 유수 등 토벌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반란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왕망은 두오(杜吳)라는 상인의 손에 살해되어, 공빈취(公賓就)라는 자에 의해 목이 잘렸다. 이로써 왕망의 이상 국가는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전한에 이어 후한이 건국되기에 이른다. (김희보 『세계사 다이제스트 100』에서 인용)


황건군(黃巾軍)의 주모자 장각(張角)

   후한 중기에는 호족이 대토지 소유를 기반으로 촌락사회를 지배, 전통적인 촌락질서가 붕괴되었다. 천재와 기근도 빈발해서 궁핍해진 농민은 호족에 예속되거나 유망화에서 화북에는 방대한 몰락농민ㆍ유민이 발생하였다. 그때의 정권은 부패가 극도화하고 사태는 악화, 이에 저항한 유가ㆍ사대부의 운동도 금지당해서 좌절했다. 그 무렵 거록(하북성)의 장각(張角)이 '태평도(太平道)'를 창시, 죄의 참회에 의한 병이 칠와 윤리적인 삶을 주장, 열병의 만연에 괴로워하고, 촌락사회로부터 소외된 몰락농민ㆍ유민을 구제해서 수십 년에 수십만의 신도를 얻어서 각지에 교단을 조직하였다.

   184년 장각 등은 후한 왕조의 멸망과 새로운 사회인 '황천(黃天)'의 수립을 외치면서 일제히 봉기, 정부는 당금(黨禁)을 풀어 결속을 다져, 10개월 후에 진압하였다. 그렇지만 황건 여당이나 오두미도의 종교반란, 일반의 민중반란이 속발, 지방질서는 해체되어서 군웅 할거에 도래, 후한왕조는 멸망했다. (『종교학대사전』에서 인용)


④ 오두미도(五斗米道)의 교주 장로(張魯)

   장로는 후한 말기 패국(沛國) 풍현(豊縣) 사람이며 오두미도(五斗米道) 교주로, 익주목(益州牧) 유언지(劉彦之)의 독의사마(督義司馬)를 지냈다. 헌제(獻帝) 초평(初平) 2년(191) 한중(漢中)에 웅거하여 오두미도로 주민들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사군(師君)이라 불렀다. 좨주(祭酒)를 두어 지방 정권을 관장하면서 파한(巴漢)에서 30년 동안 지배하자 한나라에서 진민중랑장(鎭民中郞將)으로 삼아 한녕태수(漢寧太守)로 임명했다. 지역이 비교적 안정을 누려 귀의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건안(建安) 20년(215) 조조(曹操)가 공격하자 파중(巴中)으로 달아나고 얼마 뒤 항복했다. 진남장군(鎭南將軍)에 임명되고, 낭중후(閬中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원(原)이다. (『중국역대인명사전』에서 인용)


대승교大乘敎의 난을 일으킨 법경法慶

   법경은 북위(北魏) 때의 승려로 기주(冀州) 사람이다. 당시 조정에서 불교를 신봉해 사원마다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권력을 쥔 승인(僧人)들이 승려 지주가 되었다. 수많은 농민과 하층 승려들이 잔혹한 박해와 압박을 당하자 연창(延昌) 4년(515) 대승교(大乘敎)를 만들어 농민들을 불러 모아 “새로운 부처님이 세상에 나와 모든 마군(魔軍)들을 없앤다.(新佛出世 除去衆魔)”고 외치면서 그들의 수령이 되었다. 또 발해 사람 이귀백(李歸伯)을 십선보살(十善菩薩)로 삼고 5만여 명을 대중을 모아 가는 곳마다 사원과 불상에 불을 지르고 승려 지주들을 살해했다. 북위가 원료(元遙)에게 보기(步騎) 10만 명을 주어 진압하게 했다. 전쟁에 패한 뒤 포로가 되어 죽었다. (『중국역대불교인명사전』에서 인용)


⑥ 그 외 p.358의 석벽에서 보이는 이름들 - 장수(張脩)와 유경휘(劉景暉)

   장수는 동한 파군의 무당으로, 동한 초평 2년(191년)에 익주를 다스리는 (태수)유언의 별부사마였다. 유언이 독의사마 장로와 별부사마 장수를 보내 한중을 차지해 다스렸는데, 이 둘이 한중에서 오두미도를 창립했고, 장수는 부적 태운 물을 사용해 아픈 사람의 병을 낫게 했으며, 병이 나은 사람은 쌀 다섯 말을 내게 해서 “오두미사”라 불렸다. 후에 장수는 한중태수 소고를 죽였는데, 장로가 장수를 죽이고 그 무리를 거두었다. (張脩,東漢巴郡巫人,任益州牧(太守)劉焉的別部司馬,東漢初平二年,劉焉派督義司馬張魯與別部司馬張修攻佔漢中,兩人在漢中創立五斗米道,張脩用符水替人治病,痊癒者雇以白米五斗,故號曰“五斗米師”。後來張脩殺漢中太守蘇固,張魯殺張脩,奪其兵眾)

   유경휘에 대한 기록은 과문한 탓에 찾지 못했는데, 위에 기술한 법경이 난을 일으킨 바로 그 다음 해에 난을 일으킨 것만 확인했다. (독수리님의 블로그 중국전란戰亂연표 참조)



p.358

“* 다들 아시겠지만, 황소는 이 이야기로부터 수백 년 뒤 당 말기를 뒤흔든 ‘황소의 난’의 주모자, 그리고 송강은 북송 시절 그 이름도 유명한 양산박 108호걸의 두령으로서 조정에 맞선 급시우(及時雨) 송강을 뜻하는 것이올시다. (옮긴이 註)”


   북송 시절 그 이름도 유명한 양산박 108호걸의 두령으로서 조정에 맞선 급시우(及時雨) 송강을 뜻하는 것이올시다.

→ 북송(北宋) 말기의 도적으로 약 1년간 관군과 대치해 싸웠으나 결국 사로잡혀 항복한 인물로, 『수호전』의 송강은 바로 이 송강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올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송강은 역사 속의 인물인데, 설명은 『수호전』의 송강과 섞여 있다. 송강은 북송(北宋) 시절의 도적으로 조정의 착취에 못 이겨 백성들과 하급 관리들과 함께 1119년 12월에 산동에서 반란을 일으켜 하삭을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10여개의 도시를 함락하고 이렇게 산동 지방을 휩쓸고 다녀 그 세력이 청주, 제주, 복주를 아우를 정도였다고 한다. 1120년에 조정에서 투항을 권했지만 이를 거절하자 이 때문에 조정에서 증효온에게 군을 이끌도록 해서 파견하자 이를 피하면서 청주에서 남하해 기주(지금의 산동성 임기현)에서 약 1년 동안 관군과 대치했다. 1121년 2월에 회양군을 점령하고 술양을 거쳐서 해주로 갔다가 이듬해 5월에 상선 10여 척을 탈취하고 빼앗은 물품을 싣고 있던 도중에 첩자를 통해 동향을 파악한 장숙야가 육지로 유인하자 배에서 내리는 틈에 공격을 받아 복병으로 포위되고 부장이 사로잡히자 항복했으며, 그 이후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행적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엔하위키 미러에서 인용) 『송사(宋史)』에 “송강은 36인으로 제위를 횡행한다(言宋江以三十六人横行齐魏)”으로 나와있어 ‘양산박 108호걸’은 사료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황소(黄巢)는 중국 당(唐)나라 말기 반적의 우두머리로 875년에 일어났던 대농민 반란의 지도자이다. 처음에는 소금장사를 하여 큰돈을 벌다가 벼슬의 길에 올라갈 생각으로 여러 번 과거 시험을 쳤으나 번번이 떨어지기만 하였다. 875년에 왕선지(王仙之)의 난이 일어나자 산둥 서부에서 병사를 일으키고 왕선지가 죽은 뒤에는 그를 대신하여 수 천 명의 망명자 유민군을 지휘하여 거의 중국 땅 대부분을 휩쓸었다. 880년에는 장안에 들어가 휘종을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 이름을 제(齊)라 불렀는데 뒤에 이극용(李克用) 등의 관군에 반격을 받고 싸우다 패하여 진산(秦山)에서 사망했다. (『새로 나온 인명사전』에서 인용)



p.360

“봐라, 여기 손은孫恩이라는 이름이 보이지?”


   손은은 중국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 동진(東晉, 316~420)의 도사(道士)로 자(字)는 영수(靈秀)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 오(吳)의 손견(孫堅, 155~191)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낭야(琅琊, 지금의 山東省 膠南) 출신이다. 숙부(叔父)인 손태(孫泰, ?~398)가 두자공(杜子恭)에게 비술(秘術)을 배워 오두미도(五斗米道)의 교주(敎主)가 되자, 그를 도와 강남(江南) 지역에서 교세(敎勢)를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398년(晋 安帝 隆安 2년), 손태(孫泰)가 회계내사(會稽內史) 사유(謝輶)에게 모반(謀叛) 혐의로 고발(告發)되어 처형되자, 손은(孫恩)은 교도(敎徒)들을 이끌고 저장성[浙江省] 해역(海域)의 주산군도(舟山群島)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399년 봉기하여 협구(浹口, 지금의 鎭海口)를 거쳐 회계(會稽, 지금의 浙江省 紹興)를 공격해 점령했다. 회계(會稽)를 점령한 뒤에 손은은 스스로를 정동장군(征東將軍)이라고 칭했으며, 교도(敎徒)들은 그를 ‘장생인(長生人)’이라고 불렀다.

민란(民亂)은 옛 오(吳)의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곳곳에서 백성들의 봉기가 이어져 반군(叛軍)의 규모는 수십만에 이르렀다. 동진(東晉) 조정(朝廷)은 민란(民亂) 진압(鎭壓)을 위해 서주자사(徐州刺史) 사염(謝琰, ?~400)과 도독오군군사(都督吳郡軍事) 유뢰지(劉牢之, ?~402)를 파견하였다. 400년(隆安 4년), 손은(孫恩)의 반군(叛軍)은 여요(餘姚, 지금의 浙江省 余姚)와 상우(上虞, 지금의 浙江省 上虞)를 공격했으며, 산음(山陰, 지금의 山西省 朔州) 북쪽의 형포(邢浦)에서 진군(晉軍)을 기습하여 사염(謝琰)과 왕희지(王羲之, 303~361)의 아들인 회계내사(會稽內史) 왕응지(王凝之) 등을 죽였다. 그러나 유뢰지(劉牢之)가 이끈 진군(晉軍)에 패하여 해상(海上)의 섬으로 피신하였으나, 임해(臨海) 등 저장성[浙江省] 동부 해안 지역에서 전투를 계속하였다.

   402년(晋 安帝 元興 원년), 손은(孫恩)은 임해태수(臨海太守) 신경(辛景)에게 패하여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손은(孫恩)이 ‘수선(水仙)’이 되었다며 교도(敎徒) 100여명이 함께 죽었고, 손은(孫恩)의 매부(妹夫)인 노순(盧循, ?~411)과 서도복(徐道覆, ?~411)이 남은 무리를 이끌었다. 동진(東晋) 조정(朝廷)은 노순(盧循)과 서도복(徐道覆)을 회유하기 위해 광주자사(廣州刺史)와 시흥상(始興相)의 직위(職位)를 주기도 했지만, 민란(民亂)은 411년(義熙 7년)까지 지속되었다. (두피디아에서 인용)



p.361

“봐라, 여기 천강 목록 한참 아래쪽에 손문이라고 있지 않느냐. 이 자가 네 자손일 수도 있어.”


용아녀가 처음 언급했던 진승・오광의 난부터 통비공이 언급한 쑨원(孫文)까지의 연표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진(秦) BCE 209 진승・오광의 난

신(新) CE 17 여모의 난, 녹림군의 난

신(新) 18 적미의 난

동한(東漢) 184 황건의 난

동한(東漢) 215 장로 투항

5호16국(五胡十六國) 동진(東晋) 399 손은・노순의 난

북위(北魏) 량(粱) 515 법경의 난

북위(北魏) 량(粱) 516 유경휘의 난

당(唐) 875 황소의 난

북송(北宋) 1121년 송강 진압

청(淸) 1911 신해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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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 평정산平頂山에서 아녀兒女가 무리를 꾸짖고 취의청聚義廳에서 영웅英雄이 봉을 휘두르다



p.299

“군사를 몰고 온 것은 이건성이었어. 아군은 각지에서 패하고 영제거永濟渠쪽으로 피했지. 이건성도 수비 병력을 남긴 뒤 추격에 나섰고.”

“동쪽으로? 그럼 명주는 어떻게 됐지?”


   『자치통감』권190을 보면, 당시 유흑달을 공격한 것은 세자 이건성이 아니라 둘째 이세민이다.

   “(622년) 진왕 이세민의 군사가 획가(獲嘉)에 도착하자 유흑달은 상주(相州)를 버리고 물러나서 명주(洺州)를 지켰다. (정월) 병신일(14일)에 이세민은 다시 상주를 빼앗고 명수(洺水)의 위쪽에 군영을 늘어놓고 그들을 압박하였다.” 획가는 현재 허난성[河南省, 하남성] 신샹시[新乡市, 신향시]이고, 상주는 허난성 허난성 안양시(安阳市)이며, 명주는 당시 유흑달의 도읍지로 현재 허베이성[河北省, 하북성] 한단시(邯郸市) 융녠현[永年县, 영년현]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건성도 유흑달 토벌에 참가했지만, 그것은 622년 말의 일이며, 당시 태자를 따르던 왕규와 위징이 태자에게 유세, 이세민을 견제하고, 공로와 명성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영제거는 수나라 양제 때인 608년에 최초로 개통된 운하이다. 길이는 2,000km 정도고, 북쪽 허베이성 친수이[沁水, 심수]를 황허[黃河]까지 끌어 합치고, 허난성 우즈현[武陟縣, 무척현] 부근의 황허에서 갈라져 북동쪽으로 흐르다가 톈진[天津, 천진] 부근에 이른다.




p.302

“여기 산적 두목은 형제 둘이서 졸개들을 이끌고 있는데... 원래는 조무래기 산적에 지나지 않던 녀석들이 전란을 틈타 세력을 넓히더니... 지금은 자기들 멋대로 금각대왕金角大王이라느니 은각대왕銀角大王이라느니 임금 행세를 하고 있지.”


   금각대왕과 은각대왕은 『서유기』33회~35회에 걸쳐 등장하는 요마(妖魔)들이다. 33회부터 등장하는 요마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삼장법사의 고기를 먹으려고 대기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 이유는 삼장법사의 고기를 먹으면 불로장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암튼 이후로 삼장을 빼앗으려는 자들과 삼장을 지켜야 하는 자들과의 싸움이 벌어지는데 그 과정이 정말 재미있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요마들은 특별한 술법이나 신통한 보배들로 삼장법사 일행의 혼을 빼놓는데, 금각과 은각의 경우는 자금 홍호로(紫金紅葫蘆)와 양지옥 정병(羊脂玉淨甁), 그리고 칠성검(七星劍)과 파초선(芭蕉扇), 황금승(幌金繩)이 있다. 특히 자금 홍호로와 양지옥 정병이 독특한데, 『서유기』에서 묘사한 두 보배의 특별함은 다음과 같다.

   “이 보배의 밑바닥을 하늘로 향하고 아가리를 땅으로 향해 놓은 다음, 그놈의 이름을 불러서 응답하기만 하면 그대로 병 속에 빨려들어가게 됩니다. 그럼 즉시 태상노군의 ‘급급여율령봉칙’이라는 부적을 아가리에 붙여놓습니다. 그 상태로 한 시진 삼각이 지나면 그놈의 몸뚱이가 녹아서 고름이 되어버리고 만답니다. (把這寶貝的底兒朝天,口兒朝地,叫他一聲,他若應了,就裝在裡面;貼上一張『太上老君急急如律令奉敕』的帖子,他就一時三刻,化為膿了。)”



p.304

“나는 금각대왕의 제일가는 심복, 정세귀精細鬼 한당韓當이다. 단 둘이서 평정산을 찾다니 배짱이 두둑한 건가? 아니면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찾아온 얼간이들인지 모르겠구나?!”


   『서유기』에서 은각은 손오공을 삼장 일행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태산압정(泰山壓頂)’의 술법을 사용, 손오공을 수미산(須彌山), 아미산(蛾眉山), 태산으로 찍어 눌러 버렸다. 그 후 깔끔한 뒤처리를 위해 자금 홍호로와 양지옥 정병을 사용해 손오공을 녹여 없애려는 계획을 짜고 두 부하를 지명하는 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정세귀다. 제일가는 심복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수많은 부하들 중에서 믿을만한 구석이 있어서 호출됐을 텐데, 아쉽게도 손오공에게 완전히 속아 두 보배를 빼앗기고 만다.

   그래도 의리는 있어서, 손오공에게 속은 것을 깨달은 다른 요괴 영리충(伶俐蟲)이 달아나자고 하자, 정세귀는 “사실대로 얘기해서 변명이 통하면 목숨을 부지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맞아죽으면 그만”이라며 다시 소굴로 돌아간다.

   한당이라는 이름은 삼국 시대 오(吳)나라 장수인 한당과 같은데, 특히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한당은 황개(黃蓋), 정보(程普), 조무(祖茂)와 함께 사천왕급으로 등장하지만, 『요원전』에서는 그저 동명이인으로 취급하는 게 나을 것 같다.



p.305

“다 알고 왔다! 냉큼 너희 두목에게 전하거라! 오행산五行山의 용아녀가 금각・은각에게 볼일이 있노라고!”


   『서유기』에서 오행산은, 손오공이 천상에서 옥황상제의 자리를 요구하며 분탕질을 하고 있을 때 석가여래(釋迦如來)가 간단히 제압, 손바닥으로 눌러 만든 산이다. 석가여래의 다섯 손가락이 금・목・수・화・토의 봉우리가 잇따른 산악으로 변하여 손오공을 꼼짝 못하게 눌러버렸는데, 이 다섯 산봉우리를 이름하여 오행산이라고 한다.

   석가여래는 오행산을 떠나면서 그곳의 토지신을 불러 “그놈이 배고프다고 하거든 무쇠 알을 먹이고, 목마르다고 하거든 구리 녹인 물을 마시게 해주어라. (但他饑時,與他鐵丸子吃;渴時,與他溶化的銅汁飲。)”라고 했는데, 『업설 지장경(業說地藏經』제3품 관중생업연품(觀衆生業緣品)을 보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대한 설명 중 “생가죽으로 목을 조르고, 뜨거운 쇳물을 몸에 붓고, 배 고프면 쇠 구슬을 삼키게 하고, 목 마르면 쇳물 마시게 하기를 해가 다하고 겁이 다하여 한량 없는 나유타(那由他) 겁이 지나도록 고통이 잠시라도 끊일 사이가 없으므로”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손오공에게 있어 오행산은 무간지옥임에 다름없다.

   『요원전』에서 용아녀가 오행산에 있다는 것은 『서유기』의 손오공, 즉 제천대성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치임을 알 수 있다.



p.307

“그렇지, 파산호巴山虎! 네가 홀랑 벗겨버려라!”


   『서유기』에서 자금 홍호로와 양지옥 정병을 손오공에게 빼앗긴 은각은 자신의 곁에서 늘 시중을 드는 파산호와 의해룡(倚海龍)을 시켜서 압룡산(壓龍山) 압룡동(壓龍洞)에 사는 노모를 초청해 황금승을 빌려 손오공을 잡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들은 심부름 가는 길에, 손오공이 여의봉으로 이들의 뒤통수를 한 대씩 후려갈겨, 즉사하여 고기 떡이 되고 만다.



p.312

“여기는 지하 곳간이잖아!”


   『요원전』에서 은각과 부하들의 이 기막힌 속임수는 『서유기』의 자금 홍호로가 연상된다. 은각의 자금 홍호로는 이름에 응답하면 그대로 빨려들어가 빠져나올 수 없는 무시무시한 물건이다.



p.324

“어디 해볼 테냐, 은각! 제천현녀齊天玄女 용아녀를 얕보다간 매서운 맛을 보게 될 게다!!”


   비로소 제5회(p.179)에서 통비공이 말한 ‘현녀’는 제천현녀임이 밝혀졌다. 현녀와 통비공 그리고 백운동의 개념은 『평요전』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한데,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구천현녀를 제천현녀로 바꾸어 구천현녀와 원공의 관계를 제천현녀와 통비공 또는 제천현녀와 제천대성 무지기의 관계로 넓혀놓았다.

아무튼 용아녀가 자신을 제천현녀임을 밝힘으로써 왜 손오공을 위험에서 구해주고 같이 움직이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해결된 셈이다.



p.325

“하지만 용아녀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으니 함정을 빠져나와서는 은고봉銀箍棒을 종황무진 휘둘러 산적들을 차례차례 때려눕히지 뭐겠습니까. 그러자 분통이 터진 은각! 쌍수도雙手刀를 꼬나들고 그 수라장 한복판에 뛰어들어 칼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더니...”


   용아녀가 사용하는 은고봉은 (당연하게도)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사용하는 여의금고봉과 관련이 있다. 자세한 것은 금고봉이 등장하는 제11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한다.

   은각이 쌍수도를 사용한다고 했는데, 『요원전』에서 묘사한 것은 쌍수도가 아니라 국지창(菊池槍)에 가깝다. 국지창은 일본 남북조 시대에 규슈 일대에서 사용된 직창의 일종이다. 쌍수도의 원래 명칭은 장도(長刀)인데, 칼이 길어 두 손으로 잡아야 하기 때문에 쌍수도라 불린다고 한다. 뭐 어떠한 작품을 그려도 일본과 연관을 시키는 모로호시 선생이기 때문에 그다지 큰 이질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쌍수도


국지창


   『서유기』에서 은각이 사용하는 것은 칠성보검(七星寶劍)이다. 은각이 손오공과의 전투에 임하기 전의 모습을 묘사한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頭戴鳳盔欺臘雪,身披戰甲幌鑌鐵。

腰間帶是蟒龍觔,粉皮靴靿梅花摺。

顏如灌口活真君,貌比巨靈無二別。

七星寶劍手中擎,怒氣沖霄威烈烈。

   머리에는 봉황 장식 투구를 썼으니 그 빛깔이 섣달 보름 백설인가 속을 만하고, 몸에 걸친 전투용 갑옷은 빈철(鑌鐵)을 두드려 만들어 눈부시게 번쩍거린다.

   허리에 두른 것은 이무기의 힘줄로 엮은 망룡근(蟒龍觔)이요, 무두질한 가죽 장화에는 매화 꽃무늬로 테두리를 꾸몄다.

   얼굴 모습은 관강구에 살아 있는 현성 이랑진군을 빼어 닮았고, 생김새는 거령신(巨靈無)에 견주어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칠성보검을 손에 잡고 휘둘러가며, 노기 충천하여 내닫는 위엄이 늠름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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