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돌아왔다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 / 창비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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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김영하의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를 관통하는 열쇳말은 현실과 환상이다. 그는 늘 세상 한 구석에서 벌어질 법한 일을 쓰지만, 그 현실에 사는 주인공들을 감싸는 분위기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이사」의 내용은 이사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본 일들이다. 하지만 김영하는 주인공들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상황으로 밀어넣는다. 영화감독 테일러 헥포드는 만약 악마가 인간 세상에 산다면, 아마 변호사로 살 것이라고 이야기 했었는데(『데블스 애드버킷』), 김영하는 아마 이사짐센터 직원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이사 당일 새벽에 도착한 그는 마치 악마와도 같은 존재다. 그는 황사를 몰고 왔고, 엘리베이터를 고장냈으며, 이사짐센터의 전화마저 불통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그는 새끼 악마들을 데리고 주인공 부부를 압도하고 협박하며 이사짐을 나른다. 갑자기 현실감을 잃은 공간. 그 공간안에서 인간인 주인공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런 비현실성은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도 나온다. 조근조근 진행되는 이야기가 갑자기 '자연발화'라는 미스테리에 접근한다. 가장 비현실적인 이야기이지만, 현실의 이야기는 뭐 현실적인가? 현실적인 이야기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합쳐져서 슬픈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말도 안 돼'의 이야기를 그럴싸한 이야기로 만들어 내는 것은 김영하의 힘이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종교적 갱생담이다. 이 이야기는 세 수컷들이 '공유한' 한 여자의 추억을 살인사건과 미스터리 수법으로 풀어낸다. 그들에게 죄의식은 없다. 동물들에게 인간 수준의 것을 요구하는 것은 실례다. 주인공은 옛 여자를 만나고 탄식한다.  '이제 너랑 다시는 잘 수 없겠구나.' 하지만 그녀가 죽고나서 그는 죄책감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쁜 사람이 착하게 되는 것은 단순한 갱생담이 되지만, 짐승이 사람이 되는 것은 종교적인 갱생담이다. 그것도 그들이 죽인 순교자를 통한 이야기라니!! 살인사건이 해결되고 돌아오는 안도감. 하지만 그는 매 해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가 인간이 되게 해준 그 순교자를 향한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때 뿐일 것이다. 

   가장 짧지만 강렬한 「마지막 손님」은 울림이 크다. 2003년 12월 31일. 영화판에서 미술일을 하는 주인공 부부에게 일이 떨어졌다. 영화에 쓰일 여고생 시체를 만드는 것이다. 칼로 난자를 당한 피투성이의 여고생 모형을 거의 만들었을 때 일을 의뢰한 감독이 방문한다. 감독은 더미를 보고 장소가 없으니 여기에 며칠 남겨두자고 한다. 감독이 떠나고 두 부부와 죽은 소녀의 모형은 새해를 맞이한다. 어쩌면 창작자란, 이런 시체 모형을 만드는 일과 같지 않을까? 진짜같은 가짜. 그 가짜를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 하지만, 남겨진 것은 외로움이다. 사회에 속하지 못하고 골방에 틀어박혀 이상한 것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들의 모습. 김영하는 그 모습을 쓸쓸하게 바라본다. 

   이런 저런 말을 하더라도, 김영하의 소설은 '재미있다' 현실에 기반하면서 환상을 끌어대는 그의 이야기에 유쾌할 따름이다. 

  

 

*덧붙임 

   그 외 「오빠가 돌아왔다」, 「너를 사랑하고도」, 「너의 의미」,「보물선」까지 마저 이야기하려 했으나, 리뷰에서 다 밝혀버리면 안될 것 같아 남겨둡니다. 아마도 '재미'면에서 따지자면, 이 소설들이 정수라 할 수 있겠지요. 개인적으론 「너의 의미」가 최고라 생각합니다. "감독님, 왜 자학하세요?"는 정말 최고의 대사!!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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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우리 젊은날 - Our Joyful Young Day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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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상대 대학생인 영민(안성기)은  연극배우 지망생인 혜린(황신혜)을 짝사랑한다. 그는 그녀를 쫓아다니고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녀는 미국에서 곧 산부인과를 개업할 의사에게 시집을 간다. 그 후 3년 후, 아직도 혜린을 잊지 못하고 하루 하루를 외롭게 보내는 영민은 우연히 지하철안에서 혜린을 만난다. 그녀는 이혼을 하고 배우를 포기하고 출판사에서 번역일을 하고 있다. 적극적인 영민의 구애끝에 둘은 결혼을 한다. 혜린은 임신을 하고, 아버지가 될 기쁨에 영민은 들떠있다. 이런 행복한 생활속에서 영민은 혜린이 임신 중독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민은 아이를 포기하자고 하지만, 혜린은 불확실한 과학보다는 기적을 믿는다며 아이를 낳겠다고 한다. 그리고...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결국엔 비극으로 끝날 것이란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기쁜 우리 젊은날>이란 제목은 토셀리의 「세레나데」에서 인용한 제목이고, 그 내용은 지나간 사랑에 대한 회한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다. 이 제목만으로도 두 남녀 주인공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라는 것은 어느정도 예상이 된다. 위에 적은 내용만으로도 이 영화, 눈물 콧물 질질 흘리게 만들 신파인게 분명하다. 그런데 이 영화, 예상외로 담백하다.   

 

 

   이 영화가 신파가 아니라 담백한 것은 '사랑의 이별'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사랑의 순환'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영민과 혜린말고 다른 중요한 인물이 비중있게 등장한다. 바로 영민의 아버지(최불암)이다. 영민은 아버지와 함께 산다.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아마도 일찍 돌아가신 것 같다. 영화는 영민이 혜린에게 차이고 돌아와서 술을 못이겨 화장실에서 토사물을 쏟아낼 때, 말 없이 아들의 등을 두드려 주는 모습, 혜린이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소식에 병원에 입원한 아들을 간호하는 모습, 혜린을 잊지 못해 놀이터에서 우는 아들을 감싸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공들여 찍혀 있다. 어찌보면 영민이 혜린과 덕수궁 벤치에서 데이트를 하는 모습이나, 비오는 날 영민이 회사 앞에서 비를 맞고 혜린을 기다리는 모습보다 더 아름답게 찍혔다. 그 이유는 아내의 빈 자리를 아들인 영민이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마법과도 같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 혜린과 데이트를 했던 바로 그 덕수궁 벤치에서 영민은 딸 혜주에게 그때와 똑같이 삶은 계란과 사이다를 건네준다. 그러자 혜주는 엄마와 똑같이 말한다. "싫어, 나 그런 거 안먹어." 혜린은 죽었지만, 혜주가 그녀의 자리를 채워주고 있다. 딸을 바라보면서 지금은 없는 사랑을 떠올리고 그 무한한 사랑이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전이되는 과정. 혜주는 정확히 혜린의 자리에 앉아 혜린의 대사를 한다. 그리고 이 장면 때문에 앞에서 영민과 아버지의 장면이 생명을 얻는다. 영민의 아버지 또한 그런 영민을 바라보며 영민의 어머니를 추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 친구들에 따르면 영민 어머니의 이름은 '영숙'이다. '영'숙과 '영'민, '혜'린과 '혜'주. 순환되는 유교문화권의 사랑. 반복되는 사랑의 영겁회귀. 그래서 영민과 아버지는 외롭지 않다. 사랑해서 기뻤던 그들의 젊은날을 노래할 수 있다. 

 

          사랑의 노래 들려온다 
          옛날을 말하는가 
          기쁜 우리 젊은날  

          사랑의 노래 들려온다 
          옛날을 말하는가 
          기쁜 우리 젊은날  

          금 빛같은 달빛이 동산 위에 비취고 
          정답게 속삭이던 그때 그때가 
          재미로워라 꿈결과 같이 지나가건만 
          내 마음에 사모친 그님 그리워라  

          사랑의 노랫소리에 
          기쁜 우리 젊은날  

 - 토셀리, 「세레나데」 -   

  

 

*덧붙임 

1. 영민이 혜린에게 자기가 썼다는 희곡을 보여줍니다. 작품의 제목은 『나의 사랑 나의 신부』입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후에 이명세 감독이 연출합니다.  

2. 배창호 감독과 이명세 감독(당시엔 조감독)이 카메오로 나옵니다. 이 때의 열연(?)으로 배창호 감독은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 『개그맨』에서 배우(!)로 데뷔합니다. 

 

3. 캡쳐한 이미지는 태흥영화사/아인스엠앤엠에 귀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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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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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김영하의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그의 소설이 관통하는 어떤 공통점을 알아내기란 어렵지 않다. 그의 소설은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다. 그 뒤섞임은 혼란을 가져오기 보다는 주인공과 읽는이의 상태를 몽롱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이민수는 어려서부터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 아버지는 누군지도 모르고 어머니는 일찍 죽었다. 할머니마저 죽고 혼자 남은 민수는 할머니가 유산대신 남겨놓은 빚 때문에 집을 빼앗기고 작은 고시원에서 산다. 그 좁은 공간안에서 인터넷 채팅 퀴즈방에서 시간을 보내던 민수는 우연찮은 기회로 텔레비전 퀴즈쇼에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그는 새로운 세상과 조우하게 된다. 

   이 책은 수많은 알레고리가 들어있지만, 그것을 알레고리로 읽어야 할지 머뭇거리는 순간들이 많이 있다. 주인공 민수를 88만원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설정하면, 책을 읽기는 편하지만, 민수가 그 대표성을 지니고 있을지 잘 모르겠다. '지식 룸펜' 정도의 대표성을 지니고 있을까? 그런데 민수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어머니는 일찍 죽은 고아이자 사생아이다. 점점 더 위치시키기가 어렵다. 차라리 이 소설은 민수가 얘기한 대로 지금 2006년 한국의 '오뒷세이아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더 쉽게 읽힌다. 저 옛날의 오뒷세이아가 그리스로 돌아오기 위해 숱한 모험을 겪었듯이 민수 역시 지금껏 회피한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숱한 모험을 겪는다. 

   소설에서 민수는 다섯 명의 여자를 겪는다. 첫 번째, 외할머니는 민수의 어머니 역할을 한다. 후에 민수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는 '이모'라고 부르라 한다. 민수는 그녀를 '최여사'라 지칭한다. 최여사는 민수를 키워줌과 동시에 앞으로의 고난을 마련해준다. 그녀의 빚때문에 민수는 세상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절대 피할 수 없는 운명. 이 모든 사건, 아니 민수의 운명은 최여사가 직조한 것 처럼 보인다. 

   두 번째, '빛나'는 철저히 '현실세계'를 대변하는 여자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민수를 쥐락펴락 한다. 빛나의 사랑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철저한 계산이다. 민수의 현재 상태를 냉정하리만큼 평가한다. '최여사'의 장례식에 가서 민수의 뒷수발을 들기보다는 자신의 대학원 발표가 훨씬 그녀에게 크다. 빛나는 인정보다는 계산이 우선된, 현실세계의 여자다. 

   세 번째, 민수와 같은 고시원에서 지내는 '숙희'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삶의 밑바닥을 대변한다. 민수와 숙희의 만남은 많지 않다. 그는 그저 체한 그녀를 위해 약국에서 소화제를 사다주고, 답례로 고시원 옥상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고 그녀에게 이십만원의 돈을 빌렸을 뿐이다. 그녀가 도움을 요청할 때, 민수는 그런 그녀를 외면한다. 그에게는 그녀가 외면하고 싶은 자신의 현실이었을 것이다. 

   네 번째, '지원'은 '이상'이다. 그녀는 방송국의 구성 작가이자, 평창동의 '성'에서 살고 있다. 그녀의 '방' 안에(!)있는 '서고'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 쯤 꿈꾸었을' 곳이다. 그녀는 민수와 인터넷 퀴즈방에서 만났다. 그녀의 아이디는 '벽속의 요정'이다. ID는 이드, 즉 자아를 나타낸다. 그녀는 벽속에 갇혀있는 존재다. 그런 그녀를 현실로 이끌어줄 수 있는 사람은 현실에 살고 있는 민수뿐이다. '이상'은 현실에서 실현되어야 빛을 발한다. 하지만 민수는 그녀를 현실로 데려오기에 준비가 아직 안됐다. 

   다섯 번째, 퀴즈쇼에서 만난 이춘성의 소개로 그는 '회사'에 들어간다. 이 회사는 일반 회사가 아닌, 전국에서 불법으로 벌어지는 퀴즈쇼에 출연할 선수들을 키워내는 회사다. 그곳에서 민수는 '메두사'를 만난다. 장군, 메두사, 탱고, 유리라는 별명으로 불리워지는 이들은 유사 가족처럼 보인다. 민수는 '롱맨'이라는 이름으로 이들 유사 가족으로 편입된다. 회사에서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회성을 죽이고 지식, 아니 잡학으로 머리를 채운다. 지식의 늘어남과 승리의 쾌감, 이런 것들이 그들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그들을 파괴시키기도 한다. 민수가 현실에 두고 온 것들을 잃어버리고 '회사'에서의 생활이 현실이 되어갈 때 '메두사'는 유일하게 민수의 이야기를 듣는 존재다. 그러나 민수는 '어머니이자, 누이이자, 여자친구'인 메두사를 버리고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온 민수는 더이상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현실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가 새로 둥지를 튼 곳은 헌책방이다. 헌책방은 헌책을 파는 곳이다. 헌책은 제품의 기능이 멈춘, 지식의유통기한이 다 된 것이기도 하지만, 종류에 따라 보물이 될 수 있다. 주인은 옆 건물을 신간을 팔 서점으로 만들 계획을 짜고 있다. 앞으로 민수는 이곳에서 헌책과 새책을 팔기 시작할 것이다. 지식이 유희가 아닌, 삶이 되는 현실을 살 것이다. 그가 거쳐온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그의 '이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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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뮤지컬『퀴즈쇼』환상적 무대!!
    from 내가 읽은 책과 세상 2010-01-02 14:10 
       "근데 사실 세계의 어떤 작품이건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영화가 허술해 보여요. 왜냐하면 활자는 디테일을 꼼꼼히 담아낼 수 있는데, 영화는 뭉텅뭉텅 이미지로 보여주어야 하니까요. 거꾸로 영화를 보고 원작을 보면 굉장히 지루해요. 이미지를 보며 감정을 이미 느꼈는데 활자로 일일이 그걸 묘사하고 있으니까 뻔해 보이는 거죠. 장르별 특색이라고 봐야죠."       
 
 
 
김창완밴드 - The Happiest [EP]
김창완밴드 노래 / Kakao Entertainment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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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산울림이 결성한지 31년이 되던 2008년, 1월 29일 형제의 막내이자 밴드에선 드러머인 김창익이 죽었다. 캐나다에서 포크리프트를 몰던 중 사고로 자신이 몰던 포크리프트에 압사했다. 10년만에 준비하는 산울림의 정규앨범 14집을 기다리고 있던 산울림 팬들에게도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겠지만, 밴드의 일원이자 형제를 잃은 김창완과 김창훈에게도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결국 비틀즈와 같은 이유로 산울림은 해체되었고, 남은 두 형제는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둘째이자 보컬과 베이스를 맡았던 김창훈은 솔로 활동을 계획하고, 맏형이자 보컬과 기타를 맡았던 김창완은 산울림과는 다른 밴드를 결성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김창완밴드다. 

   이 앨범은 김창완밴드의 정규앨범이 아닌, EP앨범이다. EP는 보통 신인(개인이나 그룹 모두)이 정규 앨범을 내기 전, 자신을 소개하기 위한 홍보앨범의 경우로 쓰인다. 하지만 김창완밴드의 데뷔 EP는 김창완밴드의 소개 목적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그는 이번 앨범을 통해서 동생을 잃어버린 슬픔을 완전히 털어버리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다.  

 

   첫 번째 곡 「Girl Walking」은 연주곡이다. 드럼과 베이스, 키보드 등 각 파트는 각기 따로 노는 듯해 연주가 아닌 소음을 듣는 것 같다. 거기에 디스토션이 잔뜩 걸린 기타가 들어온다. 마치 도도한 여성이 자신의 젊음을 내뿜듯이 행진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 모습을 김창완은 부러움과 시샘을 잔뜩 머금은채로 연주를 한다. 젊음은 무질서해서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 곡은 도도함과 혼란스러움이 혼재되어 있는 세련된 연주곡이다. 

   두 번째 곡 「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는 예의 김창완의 노래답게 비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신의 나이를 인지하고 산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산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열두 살은 열두 살로 살고'라고 하지 않았다. 그가 이 가사에서 '-로'를 쓴 것은 딱 한구절이다. '어린애는 어린애로 살고 / 어른들은 어른들로 살지' 그의 노래에서 항상 나오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대상인 어린이와 환멸의 대상인 어른. 전자는 주체적일 필요가 없고 후자는 주체적이지 않는다. 그렇게 그는 그의 위치를 '어른'으로 옮긴다. 많은 것을 경험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쉽게 포기해버린 '잃어버린 꿈'에 대해 그는 쓸쓸히 노래한다. 

   세 번째 곡 「제발 제발(멀쩡한 사람들이 남모르게 부르는 이상한 노래)」에서는 혼자 남겨진 외로움을 절규하고, 네 번째 곡 「모자와 스파게티」에서는 헤어진 자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는 절규를 보여준다. 「제발 제발」이 시종일관 내지른다면 「모자와 스파게티」에서는 어느정도 체념의 느낌이 강하게 베어 있다. 

   그리고 다섯 번째 곡 「FORKLIFT」에서 그는 드디어 죽은 동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쩌면 앞의 곡들이 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모든 감정을 발산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차분하게 읖조린다.  

 

               Snow hides wihout a trace
               taking my brother my little brother away
               Even after a while I keep chasing
               and kicking any forklift that I see 

-「FORKLIFT」중에서-                

 

   이 노래는 (내가 알고 있기론) 김창완이 처음으로 영어로 만들고 부른 노래다. 그는 혈연의 죽음을 차마 모(母)국어로 부를 수 없었던 것일까? 가슴이 아픈 가사지만, 그의 노래는 너무 차분해서 오히려 관조적으로 들린다. 어쩌면 이런 게 작별일런지도...  

 

               I hate the forklift
               I don't like the machine
               I hate the forklift
               I don't like you forklift 

-「FORKLIFT」중에서-                 

 

   그리고 마지막 곡 『우두두다다』에서 그는 다시 원래의 김창완으로 돌아온다. 시샘하고 질투하고 분노하고 체념하고 동생을 떠나보낸 후, 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아름다운 법이니까. 우두두두다다두다다 떨리는 심장소리만큼.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동생과 작별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앞으로도 김창완은 계속 세상의 긍정을 노래할 것이다. 때론 쓸쓸하고 때론 가슴아프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부르는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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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자의 전성시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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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있어 70년대는 역사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다. 70년대에 태어났지만, 그 시대를 기억하기엔 너무 어렸다. 내 유년기는 80년대부터 시작했고, 경제개발, 유신, 독재로 점철된 70년대는 실체로 다가오지 못하는 간접 경험의 시대다. 

   민주주의의 시대에서 독재의 시대로,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 산업 중심의 사회로. 70년대는 지금 대한민국의 틀을 다져놓은 시대다. 오로지 '잘 먹고 사는 것' 이라는 생존에 목표를 둔 시대였다. 인간의 모든 가치들이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였다. 밥벌이를 책임져준 농촌에서는 더이상의 일이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어린 소년, 소녀들은 서울로 올라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들이 돈을 벌 길은 공장으로 대표되는 막노동과 식모나 술집밖에 없었다. 

   영화는 종삼(종로 3가) 588에서 시작한다. 호객행위를 하는 창부들이 단속으로 잡혀가 경찰서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폭행으로 끌려온 창수(송재호)가 영자(염복순)를 알아본다. 그리고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넘어간다.  

 

  

팔이 없어 괴물로 취급받는 영자와 팔이 없어 미인으로 추앙받는 밀로의 비너스, 그 극명한 대비

 

   영자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밥'이다. 아직 영자는 이 사회의 자본주의를 맛보지 않았다. 그녀는 시골에서 올라왔고, 그녀가 살아왔던 세상은 쌀이 중심인 농경사회다. 농경사회에서 쌀은 생존이지 탐욕은 아니다. 영자가 식모살이를 하는 그 집 아들에게 겁탈을 당했을 때에도 그녀는 그녀 입술에 묻어 있는 밥풀을 떼 먹는다. 아직까지 그녀에게 자본주의는 도착하지 않았다. 

   집에서 쫓겨난 후, 영자는 술집 작부 생활을 하는 '고향 언니'와 같이 산다. 그녀는 영자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돈. 돈. 돈. 돈이 문제야." 결국 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돈이고 그 돈을 버는 것만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영자는 겁탈을 당했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고향 언니는 여자로써 '쉽게' 그 문제되는 돈을 벌 방법을 가르쳐주지만, 영자는 기술을 배워,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고 싶어한다. 

   이 영화가 70년대 후반과 80년대에 유행한 '호스티스물'의 첫 효시와도 같은 작품이지만, 그 태생은 전혀 다르다. 당시 호스티스물이 믿었던 남자나 (혹은 애인) 사고와도 같은 강간을 당하고 삶을 포기한 채로 술집이나 588에 흘러 들어가는 이야기이지만, 이 영화에서 영자는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고작 그정도 이유로(!!)' 삶을 포기 하지 않는다. 영자는 돈을 벌기 위해서 고군분투하지만, 이 세상은 그런 영자에게 너무도 가혹하다. 

   열심히 시다일을 해서 돈을 벌어 보지만, 이것 저것 나가는 돈을 제하고 나면 손에 쥐는 것은 동전 몇 푼이다. 영자에게 돈은 쉽게 잡히지 않는다. 운전을 배워 택시를 몰고 싶은 영자는 버스 차장이 되지만, 그만 사고로 한쪽 팔을 잃고 만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괴하고 무서운 장면. 아스팔트를 뒹구는 영자가 하늘로 날아가는 자신의 왼팔을 본다. 그리고 그녀의 날아간 팔은 '삼십만원'의 가치로 환산되어 영자에게 지급된다. 그리고 고향 언니는 영자의 왼팔에 매겨진 돈으로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며 설레어한다. 등가법칙으로 영자는 자본주의를 온몸으로 깨달았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은 얼마나 잔혹한가!! 

   영자가 팔을 잃은 것은 그녀의 꿈을 잃은 것과 같다. 그리고 그 꿈은 삼십만원으로 환산되어졌다. 그리고 그 돈은 고향 언니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돈이다. 인성이 사라지고 돈만 남은 이 세상을 영자는 더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 그녀가 고향을 떠나온 기찻길. 고향으로 갈 수 있지만, 갈 수 없는 그 길 위에서 영자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기차는 그녀 앞에 선다. 오직 돈이 가치있고 숭배받는 사회에서 영자는 처음으로 외로움을 느끼고 그 외로움을 해결하고자 몸을 판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사랑이 아닌, 남자들의 욕망뿐이다. 그렇게 영자는 시나브로 오염한다. 

   그런 그녀에게 구원은 '사랑'이지만, 창수는 그녀를 '동정'한다. 작은 구원같아 보였던 화가와의 관계도, 팔이 없는 그녀를 보고 '밀로의 비너스'라고 운운하는 것도, 겉보기엔 그럴듯한 위로 같지만, 실은 하나마나한 말이다. 팔이 없는 사람에게 '비너스같이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말 위로일까? 경찰서에서 영자를 만난 이후로, 창수는 영자를 매일 찾아간다. 그녀가 병에 걸리자 그녀를 치유하고, 벌이가 없을 때 돈을 주고, 의수를 달아주고 그녀의 때까지 벗겨준다. 하지만 창수는 영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왜 그 애가 그렇게 됐는지 화가나요!"라고 말할 뿐. 창수는 영자를 그렇게 만든 그 근본적인 이유에 다가가기 보다는, 그저 그런 영자를 보살펴줄 뿐이다. 그런 창수와 그런 영자는 서로에게 '1'이란 존재가 아닌 '-1'일 뿐이다.   

 

 

더러운 세상의 묵은 때를 밀어주는 창수. 하지만 그런 그도 영자를 구원하지 못한다.

 

   영자는 결국 어떻게 됐을까? 조선작의 원작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것과 비슷할 것 같다. 아마도 영자는 죽었을 것이다. 영자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해피엔딩을 마련하고 있다. 결국 영자는 '사랑'을 찾고 구원을 받아 이 세상 변방에서 살아가고 있다. 처음엔 '의식적으로' 역겨운 결말이라 생각했으나,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해피엔딩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숨죽인' 그 70년대의 한복판에서 그런 '작은' 구원이라도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아가고 죽었을, 수많은 영자들, 우리 누이, 이모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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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io 2009-12-10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보니 안타까운 그 시절이 느껴집니다. 사실주의의 걸작인 '영자의 전성시대'란 영화를 꼭 보고 싶네요

Tomek 2009-12-10 09:41   좋아요 0 | URL
후회하지는 않으실 거에요~ 하지만 필름 상태가 좀 아쉽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