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콩을 들다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무리한 각본으로 관객의 감정을 역도 바벨인양 들었다 놨다... 눈에 힘을 주고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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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발 라운지에서 이별하는 아름다운 연인들의 모습과 콩코드 룸에서 엿본 신흥 자산가들과 그곳을 청소하는 필리핀 청소부 사이의 묘한 이질감, 우리가 비행기에서 맛보는 인공과 자연이 뒤섞인 기내식을 만드는 공장, 항공사 사무실에 있는 공항을 떠난 비행기들의 행적을 보여주는 거대한 세계지도, 문제가 생긴 비행기들이 수줍게 방문하는 격납고 등 그는 우리가 볼 수 없었던 공항의 다양하고 매력적인 면면들을 그 특유의 놀라운 위트와 통찰력을 섞어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공항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 알랭 드 보통 『공항에서 일주일을』 출판사 제공 책소개 중에서 - 

 

   '공항'이라는 공간은 확실히 특별한 곳이다. 공항은 수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곳이다. 물론 역이나 터미널 또한 그렇지만, 공항의 이미지는 그곳들과는 전혀 다른 중량감이 있다. 비행기를 타고 떠난 다는 것은 내가 발딛고 살고 있는 이 땅을 떠난다는 것이고, 그것은 관계의 정리, 새로운 시작을 내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차나 버스를 타고도 그런 것을 느낄 수 있겠지만, 3면이 바다이고 육로마저 막힌 대한민국에서는 육상수단으로 움직여봤자 거기서 거기일뿐이다) 

   그래서일까? 아직 사지도, 읽지도 않은 책을 보고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 것은. 알랭 드 보통의 새책을 보고서 바로 떠올린 것은 <마이 앤트 메리>의 「공항가는 길」이었다. '사쿠라 꽃 피면 여자 생각'나듯이 나 또한 '공항'하면 이노래 생각난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이 노래엔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고 있는 '공항'의 이미지 - 새벽, 불안, 설렘, 포기, 다른 길, 새로움, 뒷모습, 언젠가 등 - 가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파란 새벽에
          차가운 바람 스치는 얼굴
          불안한 마음과 설레임 까지
          포기한 만큼 넌 더 이상 쓰러지지 않도록
          또 다른 길을 가야겠지만 슬퍼하지는 않기를
          새로운 하늘 아래 서있을 너 웃을 수 있도록

          어색한 미소 너의 뒷모습
          처음 사랑이던 너의 얼굴
          이젠 익숙한 공항으로 가는 길

          불안한 마음과 설레임 까지
          포기한 만큼 넌 더 이상 쓰러지지 않도록
          또 다른 길을 가야겠지만 슬퍼하지는 않기를
          새로운 하늘 아래 서있을 너 웃을 수 있도록

          언젠가 우리가 얘기하던 그때가 그때가 오면
          어릴 적 우리 얘기하며 둘이 또 다시 만나길

                                                                                      - 마이 앤트 메리 「공항가는 길」 -

 

   그 다음 생각난 것은 커티스 핸슨의 『러브 액츄얼리』다. 솔직히 이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오프닝 만큼은 심금을 울리게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곳이 바로 공항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이 있으면 또 만남이 있다고 했다. 긴 헤어짐 후에 맞이하는, 가족, 연인들의 모습은 바라보기만해도 가슴이 뭉클하다. 그곳 공항의 입국장에는 영화 제목처럼 '사랑이 확실히' 우리 주위에 있다.  

 

   세상 돌아가는 꼴에 우울할 때마다, 전 히드로 공항의 입국장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증오와 탐욕의 세상을 살아간다고 대체로 확신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게는 온 세상에 사랑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종종 특별나게 고귀하다거나 기삿거리가 되지 않아서 그렇지, 사랑은 항상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부부, 남자친구들, 여자친구들, 옛 친구들. 911 테러 희생자들이 죽어가는 순간, 그들이 남긴 메시지는 모두 사랑의 메시지였습니다.
   사랑은 확실히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Whenever I get gloomy with the state of the worId, I think about the arrivals gate at Heathrow airport. General opinion's starting to make out that we live in a world of hatred and greed. But I don't see that. It seems to me that love is everywhere.
   Often it's not particularly dignified or newsworthy but it's always there. Fathers and sons, mothers and daughters, husbands and wives, boyfriends, girlfriends, old friends. When the planes hit the Twin Towers, as far as I know none of the phone calls from the people on board were messages of hate or revenge, they were all messages of love.
   If you look for it, I've got a sneaky feeIing you'll find that love actually is all around. 

                                                         - 『러브 액츄얼리』영국 수상(휴 그랜트)의 대사 중에서 - 

 

   내 삶에 있어서 앞으로 공항에 갈 일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본다. 이젠 누군가를 떠나보내거나 맞이하기엔 힘들지 않을까? 떠나는 것보다 머물러 있는 것이 더 익숙해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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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2010년 1월 1주 !

   겨울에 내리는 눈은 낭만적이고 서정적이다. 겨울의 눈은 아련한 첫사랑을 떠올리게도 하고, 유년시절을 떠올리게도 한다. 하얀 눈은 순결을 상징하기도 하고 속죄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때문에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길 그렇게 바라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것도 어느정도 '귀엽게' 내렸을 때 얘기다. 지난 1월 4일 월요일에 내린 눈은 귀엽기는 커녕 난생 처음으로 '고립'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정도로 쏟아내렸다. 서울에 살면서 눈때문에 고립감을 느낀 것은 거의 '처음'인 것 같다. 낭만과 서정도 지나치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지 쏟아진 눈 때문에 이웃끼리 주먹다짐을 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아마도 자연앞에서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함을 같은 무력한 인간에게 화풀이를 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낭만이 아닌 광기로 가득한 눈, 아니 폭설을 다룬 작품은 어떤 것이 있을까.   

 

        

   아무래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샤이닝(The Shining)』이다. 동절기면 문을 닫는 오버룩 호텔의 관리인으로 취직한 잭이 폭설과 호텔과 관련한 초자연현상으로 서서히 미쳐 가족들을 죽이려하는 내용이다. 스티븐 킹의 동명소설이 원작이지만, 잭 니콜슨의 광기와도 같은 연기와 등장인물의 등 뒤에 딱 달라붙어 따라다니는 듯한 카메라, 새하얀 설경의 이미지로 원작소설을 잡아먹은 괴물같은 영화다.(사족이지만, 'REDRUM'과 '해살'의 어감의 차이는 얼마나 큰가!! 황금가지의 '해살'번역은 번역과 언어의 한계를 느끼게 한 절망스런 '사건'이었다) 궁전과도 같이 큰 호텔안에서 느껴지는 폐쇄공포증은 무시무시하며, 마지막 아들 대니와 아버지 잭이 벌이는 눈밭 미로에서의 추격전은 소름을 돋게 만든다. 창백한 달빛 아래 하얗게 빛나는 눈은 마치 살인자의 칼날처럼 섬뜩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샤이닝』에서 눈은 광기의 눈이다.   

 

         

   눈하면 또 북반구를 빼놓을 수 없다. 흠뻑 쌓인 눈에 겨울이면 2개월씩 밤이 지속되는 곳을 영화가 가만 놔두었을리 없다. 알래스카에서 벌어지는 『써티데이즈 오브 나이트(30 Days of Night)』, 스웨덴에서 벌어지는 『프로스트바이텐(Frostbitten)』과 『렛미인(Låt den rätte komma in)』이 있지만, 하나만 꼽으라면 『프로스트바이텐』을 꼽겠다. 다른 두 영화는 지나치게 심각한 반면, 『프로스트바이텐』은 공포와 코미디가 오가는 정말 '골때리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1944년 동부전선, 독일군에 쫓기던 한 무리가 숲속의 어느 집에 숨게 되는데 그곳에서 뱀파이어에게 당하고 만다. 그리고 현재, 그 중 뱀파이어가 되어버린 한명이 병원에서 실험을 하게 되고 그 실험의 산물인 알약이 아이들에게 유통되면서 조용한 마을은 뱀파이어의 습격을 받게 된다.  

   솔직히 영화는 좀 어설픈 면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불안한 10대가 뱀파이어가 된다는 것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불안한 10대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오직 본성만으로 질주하는 모습은 얼마나 끔찍한가!!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파악하지 못해 허둥대는 10대 뱀파이어들의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귀엽다. 피보다 술과 마약을 더 탐닉하는 뱀파이어도, 절대절명의 순간에 농담을 건네는 뱀파이어들의 모습도 신선하다. 이 영화의 10대 뱀파이어들은 욕망을 따르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10대건 어른이건 뱀파이어는 뱀파이어. 이들은 작은 마을을 완전히 지옥으로 만들어버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눈덮인 하얀 설원에 불타는 마을. 그리고 그 위에 휘영청 떠있는 달. 술과 마약에 취한 뱀파이어가 말한다. "밤은 길어. 이제부터 두달간 밤이라고!" 낭만적인 북구의 설원과 밤은 악귀들이 날뛰는 지옥으로 변한다.   

 

    

   하지만 진짜 눈이라면 남극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남극에서 벌어지는 자멸극에 대한 이야기는 존 카펜터의 『괴물(The Thing)』과 임필성의 『남극일기』가 있다. 완성도로 따지자면 『괴물』이 더 낫지만, 이야기로는 『남극일기』가 더 끌린다. 『괴물』이 눈에 보이는 '괴물'을 상대한다면, 『남극일기』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과의 망령과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하 80도의 혹한, 낮과 밤이 6개월씩 지속되는 남극. 탐험대장 최도형(송강호)을 비롯한 6명의 탐험대원은 '도달불능점' 정복에 나선다. 그 와중에 막내 민재(유지태)가  80년전 영국탐험대의 「남극일기」를 발견하고 대원들은 점점 이상한 상황에 맞닥드리게 되고 하나 둘씩 남극에서 사라지기 시작한다.  

   거리감을 느낄 수 없는 새하얀 설원과 크레바스, 블리자드 등 자연재해가 발생되는 상황에서 이들은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서서히 미쳐버린다. 걸어서 도착할 수 없다는 '도달불능점' 정복이라는 목표는, 도형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속죄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으나, 결국엔 피로 물든 '고해성사'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 도달불능점을 통과하고 어딘가로 계속 행군하는 도형의 모습은 마치 지옥을 걷는 것 같다. 순백의 설원은 너무나 투명해서 그곳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죄가 비칠 정도이다. 눈을 바라보는 것과 직접 걷는 것은 그렇게 큰 차이가 있다. 

 

   가능하면 개봉 영화를 찾아보려 했으나, 신년 주초에 있었던 '눈사태'와 관련한 영화를 찾다보니 모두 구작이 되었다. 그저 다음주에도 '눈사태'와 관련한 영화를 뒤적거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덧붙임  

1. 『닥터 지바고』를 뺀 것은 정말 아쉬웠지만, 이 테마엔 도저히 넣을 수 없겠죠... 

2. 눈을 보고 광기만 생각하니 너무 살벌한 것 같군요. 노컷뉴스에서는 '폭설 연가' - 시인 10명의 폭설/눈 예찬기사를 실었습니다. 아직 읽지 못하셨으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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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01-06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샤이닝] 저도 보고 싶었는데, 봐야할지 아직도 망설이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겁이 많잖아요^^ 근데 왜 자꾸 공포물 연관 글에만 댓글을 다는지 모르겠군요;;;
2. [프로스트바이텐] 이거 재밌겠네요. 그냥 무서운 것 보다는 코믹, B급 호러들이 더 취향에 맞더라구요. ㅎㅎ 찍어두겠습니다!
3. [남극일기]는 저 진짜 무섭게 봤거든요. 진짜 무서워서 죽는줄 알았는데, 심리 공포물 중 제가 본것 중에는 가장 무서웠지 않나 싶어요. 하지만 평이 별로 안좋아서 씁쓸했는데 Tomek님이 추천해주시니 마음이 좀 나아지네요. ㅎㅎ 얼마 전에 심리공포물이라는 [파라노말 액티비티]를 봤는데 너무 별로였어요. 눈이 자극에만 익숙해진건지(2번 댓글과 연관이 되네요) 아니면 외국의 공포물이랑은 맞지 않는건지 모르겠어요 ㅎㅎ

Tomek 2010-01-06 16:14   좋아요 0 | URL
1. 『샤이닝』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미저리』가 작가의 악몽이라면 『샤이닝』은 작가를 가족으로 둔 사람들에게 악몽이겠죠. 전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라는 문장으로만 이루어진 원고를 봤을 때 정말 무서웠습니다. 저 당시엔 워드프로세스가 없었을테니, 누군가가 전부 직접 타자기로 쳤을텐데... 아마 저 원고 만드느라 여럿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군데군데 보이는 오타가 소름끼치게 했지요.
2. 『프로스트바이텐』은 부천영화제에서 봤었는데 아쉽게도 아직까지 수입이 안되고 있습니다. 그때 같이 봤던 『세브란스』는 개봉을 했건만.. ㅠㅠ 아무 정보없이 봤었는데 많은 관객들하고 낄낄거리며 봤었어요. 아마 어둠의 경로로는 보실 수 있으실 듯...
3. 『남극일기』는 저도 상당히 으스스하게 봤습니다. 그런데 다들 '저놈 죽여라'식의 평밖에 없어서... Forgettable님도 이 영화를 좋아하시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
4. 『파라노말 액티비티』정말 별로인가요? 전 시놉시스와 약간의 스샷만 보고 저혼자 상상해버려 악몽도 꾸고 그랬는데... ㅠㅠ 저혼자 영화를 꿈꾸었군요. 긴 댓글 고맙습니다. ^.^;
 

 
     도시에 전쟁처럼 눈이 내린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가로등 아래 모여서 눈을 털고 있다. 나는 어디로 가서 내 나이를 털어야 할까? 지나간 봄 화창한 기억의 꽃밭 가득 아직도 무꽃이 흔들리고 있을까? 사방으로 인적 끊어진 꽃밭, 새끼줄 따라 뛰어가며 썩은 꽃잎들끼리 모여 울고 있을까. 


     우리는 새벽 안개 속에 뜬 철교 위에 서 있다. 눈발은 수천 장 흰 손수건을 흔들며 河口로 뛰어가고 너는 말했다. 물이 보여. 얼음장 밑으로 수상한 푸른빛.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면 은빛으로 반짝이며 떨어지는 그대 소중한 웃음. 안개 속으로 물빛이 되어 새떼가 녹아드는 게 보여? 우리가.  


                                                                        - 기형도 「도시의 눈 - 겨울 版畵 2」전문 - 

 

   詩와 함께 한 오후.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낭만을 느끼기보다는 죽음을 꿈꾸었던 그가 너무도 안타깝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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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트 2010-01-06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젯밤에 맥주를 홀짝이며 <입 속의 검은 잎>을 읽었습니다. 잊고 있었는데, 시집 뒤에 김현이 시평겸 추모사를 썼군요. 김현은 끝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누가 기형도를 따라 그 길을 갈까봐 겁난다. 그 길은 너무 괴로운 길이다." 그러곤 '가장 좋은 선배' 였다는 김훈의 추모사를 언급합니다. "썩어 문드러져 공이 되어라..." 인상 깊더군요.
그리고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이십대에 쓴 기형도의 시들은 이상하게도 우리가 서른살이 넘어야 제대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기형도의 시대는 사람을 너무 빨리 늙게 만드는 시대 아니였을까. 우리 시대는 사람을 너무 느리게 성장시키는 시대 아닐까... 뭔, 소리인진 잘 모르겠지만^^ 살짝 그런 생각이...

Tomek 2010-01-07 10:51   좋아요 0 | URL
그가 생각하는 젊음은 '후회'로 가득찬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신이 세상에 편입하는 것이 '늙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가 생각하는 성장은 늙음이 아닐런지. 그리고 그 늙음을 그는 '추하다'고 했었죠. 늙는 것 보다 그는 정체를 택한 게 아닌가. 그런 멈춤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저 역시 무슨 소린지... ^.^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이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 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전문 - 

 

   기형도를 알게 된 것은 1999년 군대에서 읽던 한 스포츠 신문의 칼럼에서였다. 가수 조영남 씨가 쓴 칼럼이었었는데, 그는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맺었다. "기형도를 몰라주는 대한민국이 싫다!" 그 때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기형도'라는 이름의 울림때문이었다. 요절한 시인의 너무나 음악적인 그 이름. 그 노래를 잊지 못해 상병 휴가를 나갔던 그 해 서점에 들러 『기형도 전집』을 샀다. 그리고 그 시집을 들고 귀대했다. 

   처음 그의 시집을 읽었을 때 느낌은 실망감이었다. 그의 시는 연애편지에 넣을 만한 문구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예비하는 듯한 불길한 시어들을 사랑을 구걸하는 군바리의 연예편지에 넣을 수 있는 강심장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기형도는 내게 잊혀졌고, 그늘진 책장 한 구석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가 요절했던 그 나이를 몇 해 지나서야 그의 시를 다시 읽게 됐다. 죽음에 대한 예비, 어쩔 수 없어하는 허무함, 희망이 없는 세계에 희망 하기 등이 눈에 띈다. 세상에 들어가지 못하고, 세상을 겉돌며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너무 슬프다. 그는 정말 그의 죽음을 예견했던 것일까? 서른이 되기 며칠전에 맞이한 그의 죽음이 자연사라는 사실은 왠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시에는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2010년을 그의 시와 함께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올 한해는 '희망을 이야기하'는데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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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전집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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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10주기 전집. 그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유고 시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산문집 『기형도 산문집 - 짧은 여행의 기록』이 수록된 전집.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의 삶과 문학
박해현.성석제.이광호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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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20주기 추모 문집. 그의 지인과 문우들의 글과 다양한 해석이 담긴 비평가들의 비평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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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트 2010-01-05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읽는 기형도, 좋군요. 저도 오늘 책장을 뒤져 <입 속의 검은 잎>이나 들춰봐야 겠습니다.

Tomek 2010-01-05 12:52   좋아요 0 | URL
읽고 있는데, 느낌이 남다릅니다. 왠지 모를 스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