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9
M. C. 비턴 지음, 전행선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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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드렁한 게으름뱅이 해미시가 로흐두 마을 사람들을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드러난 에피소드이자, (독자들이) 해미시가 가장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아닐지. 암튼 여름에는 코지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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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대산세계문학총서 159
엔도 슈사쿠 지음, 김승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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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이 진짜 있을까 말도 안돼..하며 읽다가도 너무나 바보 같이 순수한 ‘가스통’의 삶에 나도 모르게 뭉클해진다. 나약한 인간에 대한 연민과 구원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엔도 슈사쿠의 세계관은 이 작품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무신론자인 나조차도 신을 믿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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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8-07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려고 사 놓았는데, 기대 만발입니다.

잠자냥 2020-08-07 13:58   좋아요 0 | URL
넵 역시 좋았습니다!
 
맥티그 을유세계문학전집 102
프랭크 노리스 지음, 김욱동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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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소설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한국인이라면 거의 알고 있을 김동인의 <감자>에서 그려지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돈과 성(性) 같은 욕망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다 마침내 타락하고 마는, 심지어는 살인도 주저하지 않는 타락의 끝판을 보여주는 인간군상들. 김동인이라는 작가 자체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이 짧은 단편의 자연주의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수작임에는 틀림없다. 자연주의의 대가인 에밀 졸라의 수많은 작품들, <루공마카르 총서> 시리즈의 내용들도 하나 같이 이야기를 달리 할뿐 주인공들은 환경이 나빠지거나 좋지 못한 유전적 기질, 지나친 탐욕과 성적 욕망 등으로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에밀 졸라를 매우 좋아했고, 그의 작품을 본보기처럼 삼았던, 그래서 미국의 에밀 졸라로 불리는 ‘프랭크 노리스’의 <맥티그>에는 이런 자연주의 모든 특성이 담겨 있다. 주인공 ‘맥티그’는 폴크 거리에 기거하는 가난하고 투박한 치과 의사로 아주 커다란(동물처럼 느껴질 정도의) 덩치에 아둔한 머리, 타인 앞에 내놓기도 부끄러운 천박한 취향 등등 도저히 매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다. 여성은 물론이려니와 남성 사이에서도 그다지 친구로 삼고 싶지 않은 그런 인간 유형이랄까. 그런데 그토록 아둔하다는 이 인간이 어쩌다 치과 의사가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는 정식으로 치의학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어릴 적에 어쩌다가 치과 일을 하는 사람과 가깝게 지냈고 그 곁에서 이른바 ‘야매’로 치과 일을 익혔을 뿐이다. 얼마나 무식한(?) 치료법인지, 짐승 같은 엄청난 힘을 자랑하면서 이를 손으로 뽑아내기도 한다.

어쨌든 야매일지언정 치과 의사 기술을 갖춘 그는 크게 부유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살아간다. 딱히 취향도 없어서 유일한 휴식이라는 게 그저 싸구려 음식을 먹고 스팀 맥주를 마시고 콘서티나를 연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뜻밖의 로맨스가 찾아온다. 친구 ‘마커스’가 이가 아픈 자기 사촌 ‘트리나’를 맥티그에게 보낸 것이다. 무엇에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이 아둔한 남자는 ‘트리나’라는 존재에도 처음에는 무덤덤하기 짝이 없다. 왠지 귀찮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치과 치료라는 것이 어찌 보면 은근히 남의 속살(?)을 보고 만지게 되는 작업이라 이런 일을 거듭하는 사이에 맥티그는 트리나의 여성적인 매력에 서서히 굴복해간다.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 트리나가 매력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맥티그를 도저히 좋아할 것 같지 않은데? 이 책을 읽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게다가 트리나와 마커스는 사촌이면서도 남들이 보기에는 공식적인 연인이나 마찬가지 사이다. 마커스도 트리나도 그걸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맥티그 같은 사람이 그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 있으랴. 그럼에도 사랑에 달뜬 맥티그는 마치 사자가 구석에 몰린 쥐 한 마리를 꿀꺽 집어 삼킬 듯한 태도로 트리나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 이 끔찍한 남자의 고백에 낭만은커녕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 트리나는 덜덜 떨면서 빨리 치과를 벗어날 생각만 한다. 그 이후로도 맥티그를 생각할 때면 큼직하고 각진 머리, 두드러진 턱, 금발 머리카락다발, 둔하고 느릿한 몸, 잘 돌아가지 않는 아둔한 지능만이 떠오를 뿐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치료를 하러 치과에 자주 찾아갈수록 그의 육체적인 힘에는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끌려가는 것이다. 정말 동물적인 본능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에 이르는데,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더욱이 결혼과 동시에 트리나는 놀랍게도 복권이 당첨되어 5천 달러라는 큰돈이 생긴다. 트리나 같은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은커녕 로맨스도 꿈꾸지 못했던 맥티그가 결혼에 이어 아내가 복권에 당첨되어 5천 달러라는 돈까지 생기게 된 것이다. 이제 이들 앞에 펼쳐질 인생은 탄탄대로일 것 같다. 그러나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자연주의’에 근거한 소설이다. 그들은 애초에 사랑이라기보다는 사랑으로 착각한 동물적 본능으로 결합한 부부이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생각지도 못한 큰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 이 두 가지 사실만 봐도 두 사람의 인생이 순탄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더라도 딱히 행복하지는 않을 것임을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게다가 여기에는 ‘마커스’라는 인물도 존재한다. 그는 트리나를 선뜻 맥티그에게 ‘양보’하지만 트리나가 복권에 당첨되어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속으로 자신의 그 양보의 미덕을 크게 후회한다. 트리나를 양보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저 5천 달러는 내 손에 있을 텐데!(대체 왜 부인의 돈을 자기 돈으로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하며 그 날아간 기회를 몹시 안타까워하고, 그런 질투와 시기는 급기야 맥티그를 향한 증오로 변한다. 맥티그가 마커스 그 자신이 누려 마땅했을 행운을 모두 빼앗아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뜻하지 않게 주어진 5천 달러에 맥티그-트리나-마커스라는 기묘한 삼각관계는 이 세 사람의 인생을 예상 밖으로 이끌어 간다.

이 두 남자 사이에서 트리나는 희생양인가 싶지만, 트리나라는 인물도 두 남자와 견주어 별다를 바 없는 인물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떤 면에서는 한결 더 기이하다. 5천 달러라는 돈이 생겼다면 마땅히 좀 더 누리고 살 것 같은데, 그녀는 도저히 그렇게 하지 못한다. 늘 돈을 아끼는 구두쇠이긴 했지만 복권에 당첨되고 나서는 특별히 더 인색해진다. 그녀는 그 엄청난 행운이 그들을 타락시키고 낭비벽에 빠지게 만들까봐 두려운 나머지 그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너무 멀리 가버린다. 5천 달러는 돈은 신탁으로 맡겨두고 이자만 받아서 살아가면서 전보다 더 전전긍긍하며 궁핍하게 살아간다. 그런 아내를 맥티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서서히 그녀에게 정나미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돈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트리나의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러할 거 같다.


"아, 사랑스러운 내 돈, 사랑스러운 내 돈!” 그녀가 속삭였다. “널 너무 사랑해! 모조리 내 것이야. 동전 한 푼까지. 그 누구도 절대로 네게 손댈 순 없어. 절대로. 내가 널 얻으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노예처럼 일해서 너를 모았는데! 더 모아야지, 더, 더, 더 많이 모을 거야. 매일매일 조금씩.” (354쪽)


여기에 또 다른 기이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는 ‘마리아’와 지독한 구두쇠인 유대인 노인 ‘저코우’ 커플이다. 이 두 사람은 처음에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는 조금 특이한 취미가 있었으니, 그녀는 늘 자신이 오래 전에 아주 호화롭게 살았으며 자기 집에는 황금 식기 세트가 있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다. 저코우 노인은 마리아에게 늘 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하더니 어느새 가까워져 마리아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그가 반한 것은 결코 마리아가 아니다. 그녀가 들려주는 황금 식기 세트에 홀딱 넘어간 것이다. 그러니 이 기괴한 부부의 인생도 그리 순탄하지는 않다. 어차피 그 두 사람은 있지도 않은 황금식기에 미쳐 있기 때문이다.

<맥티그>에는 “이 모든 사건이 있지도 않은 황금 식기 세트 때문에 일어났다니.”라며 트리나가 한탄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있지도 않은 마리아의 ‘황금 식기 세트’는 트리나, 맥티그 부부 사이에도 존재한다. 5천 달러를 가졌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 큰돈. 그 돈 앞에서 맥티그와 트리나, 마커스 이 세 사람은 서로의 욕망에 충실하며 파국으로 치달아 간다. 좋지 못한 유전적 기질, 그런 이들에게 주어진 뜻하지 않은 큰돈, 인간의 끝을 모르는 탐욕. 나날이 나빠지는 생활환경. 그런 상황 안에서 인간은 얼마나 밑바닥으로 타락해 갈 수 있는지 <맥티크>는 섬뜩하게 그려나간다. 프랭크 노리스는 서른둘이라는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만일 그가 한 삼십년만 더 살았더라도 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에 버금갈 작품을 여럿 남기지 않았을까 섣불리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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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8-05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멋진 리뷰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해 하는 책이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리뷰를 보고
나니 굳이 읽...

암튼 낭중에 중고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구요.

잠자냥 2020-08-05 14:15   좋아요 0 | URL
제 리뷰는 이야기 초반에 속할 뿐입니다~ ㅎㅎ
나중에 중고로 나오면 꼭 한 번 읽어보세요.
 
수용소 - 교도관의 수기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지음, 김현정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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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방>, <외국여자>의 세르게이 도블라토프가 이번에는 수용소 이야기로 찾아왔다. 도블라토프는 1959년 레닌국립대학교 핀란드어과에 입학했으나 학업 태도가 나빠 3학년 때 퇴학당한다. 얼마나 불성실하면 학교에서 쫓겨나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후 입대 통지서를 받는다. 그리하여 1962년부터 3년 동안 교도관으로 군 복무를 하게 되는데, 처음 열 달 동안 복무한 곳이 바로 이 책 <수용소>의 배경인 코미공화국이다. 레닌그라드 출신에 교양 있게 자란 대학생(이었던) 그에게 범죄자가 득시글한 수용소 생활은 말하지 않아도 꽤 끔찍했을 것이다. 도블라토프는 그런 곳에서 편지와 시(詩) 등 글을 쓰며 버텨나간다. 제대 후인 1960년대에 쓴 작품부터 미국 이민 후인 1980년대에 쓴 작품까지 집필 시기가 모두 다른 열네 편의 단편을 ‘편집장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묶은 것이 바로 이 책 <수용소-교도관의 수기>이다.

이쯤 이야기하니, 러시아 문학을 조금 아는 이들은 ‘또’ 수용소 이야기인가! 하고 혀를 찰 수도 있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나 <수용소군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이 기록> 등을 이미 머릿속에 떠올린 이들도 있으리라. 도플라토프도 그런 상황을 인식했던지, 이 책 시작 부분에서 그런 상황을 언급한다. 이 <수용소>를 책으로 내고 싶다는 제안을 이미 두 번이나 퇴짜를 맞았다면서 너스레를 떤다. 거절당한 이유는 도블라토프 그 자신에게는 비극(?)이겠지만, 이런 안타까운 상황을 담담히 털어놓는 그의 목소리는 독자에게 왠지 모르게 웃음을 유발한다. ‘수용소 주제는 고갈됨, 끝도 없는 감옥 회상록에 독자들은 신물 남, 솔제니친 이후로 이런 주제는 끝났어야 했음.’ 이런 이유로 <수용소>는 여러 차례 출판을 거절당한 것이다.

도블라토프는 항변한다. 자신의 책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솔제니친은 정치범 수용소를 묘사하지만 자신의 작품은 형사범 수용소가 배경이라는 점을 첫째 이유로 든다. 실제로 이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는 정치범이나 사상범처럼 대단한(?) 범죄자는 하나도 없다. 그저 그곳에는 밀수꾼, 절도범, 국고횡령범, 환투기로 수감 중인 자, 살인자, 성추행범 등 막장 중의 막장인 범죄자들만이 있을 뿐이다. 두 번째로, 솔제니친은 죄수였지만 도블라토프 자신은 교도관이었다는 점을 든다. 교도관의 눈으로 수용소 생활을 관찰하고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관찰자인 ‘보리스 알리하노프’ 사병이 도블라토프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도블라토프가 내세운 가장 큰 차이는 다음과 같다. 솔제니친에 따르면 수용소는 지옥 그 자체이다. 그러나 도블라토프는 이렇게 말한다. ‘제 생각에 지옥은 우리 자신들인데 말이죠.’ 그가 보기에 수용소에 갇힌 자들이나 교화하겠다는 일념 아래 그들을 관리하는 교도관이나 인간은 모두 ‘지옥’일 뿐이다.

인간 모두가 지옥이라면, 이 이야기는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그래서 읽기 고통스러운 작품이 아닐까, 게다가 살인자에 성추행범에 도둑 등등 밑바닥 인생을 살다 감옥에 갇힌 이들의 이야기니 얼마나 더 끔찍하랴 싶어서 굳이 이런 걸 읽고 싶지는 않아, 하고 꺼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추악하고 비루하고 저속한 속성도 분명 있지만 그런 이들 조차도 어떤 면에서 평범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인간의 모습은 지옥일지언정 그 개인 한 사람의 모습에는 때로 천국 같은 면도 종종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도블라토프는 이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범죄자들에게서 바로 그 ‘평범함’을 발견한다. 그에 비해 교도관들은 어떤 면에서는 범죄자들과 다를 바 없는, 때로는 그들보다 더 저속한 민낯을 보여주기도 한다. 도블라토프가 그리는 ‘수용소’는 말 그대로 ‘평범한’ 인간들이 모인 공간일 뿐이다.

도블라토프가 생각하기에 수용소는 삶과 동떨어진 특수 공간이 아니다. 단지 일상과 격리된 공간일 뿐, 그 안에서 생활하는 죄수들을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도블라토프는 말한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제 관심은 삶이지 감옥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이지, 괴물이 아니고요.” 바로 이런 관점 때문에 이 작품은 기존의 러시아 문학에서 다뤄진 수용소와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심각하고 암울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도블라토프 특유의 심드렁한 유머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미소 짓게 만든다. 특히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는 빵 터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럼, 넌? 이 새끼야.”
“결혼했지.” 비극적이라는 듯 마르코니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가 아는 여자야?”
“아니, 나도 거의 모르는 여자. 너 많이는 안 변했네....” (37쪽)


더욱이 도블라토프는 ‘지옥은 우리 자신’이라고 말하지만 인간을 끔찍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 ‘위태로운 상황에서 사람들은 변합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변하죠. 좋은 쪽에서 나쁜 쪽으로든 그 반대로든 말입니다.’ 말하며 인간이 악한 것이 아니라, 환경이 달라짐에 따라 사람은 변할 수밖에 주장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그 나약함을 이해하고 연민 어린 시선을 보낸다. 수용소에서 도블라토프, 즉 ‘보리스 알리하노프’는 인생의 깊이와 다양성에 경악한다. 사람이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를 보게 되고 처음으로 자유와 잔인함, 폭력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시(詩)와 같은 생각 없는 잔인함도. 습기와 같은 평범한 폭력도’ 목격한다. 그가 떨어진 세상은 끔찍하기 그지없다. 완전히 동물 같은 상태가 되어 버린 사람도 있고, 서슬 퍼런 줄칼로 싸워 댔고, 개를 먹고, 문신으로 얼굴을 덮었고, 염소를 강간한 이도 있다. 차 한 봉지 때문에 살인이 일어나기도 한다. 아내와 자식들을 나무 드럼통에 넣고 절여 버린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기도 한다. 그런데 그는 이 수용소에 갇힌 자들을 섣불리 재단하지 않는다.

도블라토프가 보기에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는 맹인인 경우도 많고, 그런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그는 ‘사람을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으로 나누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공산당원과 무정부주의자로 나누는 것도 그렇고. 악인과 의인으로 심지어 남자와 여자로 나누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사람은 사회의 영향 아래 부지불식간에 변하기 때문이다. 수용소와 자유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공통점이 있기도 하다. 수용소는 정부를 꼭 닮았다. 특히 소비에트 정부와 닮았다. 수용소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즉 규율)가 존재하며 국민(죄수)과 경찰(경비대)을 보유하고 있다. 정당에 문화 산업도 있고, 국가로 귀속될 수 있는 것은 다 있다. 심드렁한 웃음 속에 이렇게 소비에트 사회를 수용소에 빗대면서 자신이 속했던 체제에 대한 쓴소리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그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후에 이 작품을 발표했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갑자기 구린이 말했다.
“저들은 얼마나 많은 민중을 짓눌렀을까요?”
“누구 말입니까?” 나는 못 알아들었다.
“이 멍멍이들 말입니다…. 레닌과 제르진스키. 피도 회향도 없는 기사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구린을 신용할 수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대체적으로, 이 구린이란 자는 왜 이렇게 내게 솔직하게 구는 걸까…?
죄수는 진정하지 못했다.
“여기 나는, 예를 들자면, 절도로 살고 있죠. 모틸은, 가령, 몽둥이를 여기로 던진 게 아니고요. 게샤는 뭔가 여자 밀수꾼 정도고…. 보시다시피, 한 사람도 손에 피 묻히는 짓은 하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이들은 러시아를 피로 불바다를 만들었는데도, 그래도 괜찮다….”
“글쎄,” 내가 말한다. “이미 과하십니다….”
“거기에 뭐가 그렇게 과합니까? 그들이 바로 모든 걸 피바다로 만들었는데….” (265~266쪽)


도블라토프의 <수용소>에서 죄수와 교도관은 똑같이 쌍욕을 섞어서 말하고, 똑같이 감상적인 노래를 부른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없는 처지에 꾹 참았고 심지어 그들은 서로 매우 닮아 보인다. 빡빡 깎은 머리, 거무죽죽한 얼룩으로 뒤덮인 다 튼 몰골, 마구간 냄새가 나는 군화, 멀리서 보면 아무런 차이가 없는 죄수복과 군복. 그들은 어찌나 닮았는지 자리 교체가 있었나 싶을 정도이다. 거의 모든 죄수가 경비 역할을 할만 했고, 거의 모든 교도관이 감옥에 있을 법하다. 그래서 어느 죄수는 이렇게 묻기도 한다. “여보세요, 나리님! 우리 중 감옥에 있는 건 누굴까 너 아님 나?” (232쪽). 악인도 선인도 없다고, 그저 환경에 따라 인간은 변하기 쉬운 아주 나약한 존재라고, 이것이 수용소 삶의 핵심이라고 도블라토프는 쓸쓸한 유머와 연민어린 시선으로 담담하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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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8-03 1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양반 소설 정말 좋은데, 아쒸, 또 지만지! 책 구경하기가 겁나네요. 얼마나 비쌀지 말입니다.

˝얼마나 불성실하면 학교에서 쫓겨나는지 알 수 없지만˝.... 전 압니다. 연속해서 학사경고 두 번 먹으면 그냥 이해가 됩지요. 그래도, 제가 공부 하나는 잘 했던 것이, 그러고도 무려 8학기 만에 졸업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ㅋㅋㅋㅋㅋ
제 주변에 학사경고 두 번에 8학기 졸업은 저밖에 없거든요. 그러니 공부 잘 한 거 아녜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08-03 11:16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이 양반 책은 지만지에서만 출간할 모양인가 봐요. 전 그래서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었어요. ㅎㅎ

오, 폴스타프 님 공부잘한 모범생(?) ㅋㅋㅋ 전 대학 때 술쳐먹고 다니느라 학사 경고 즈음까지 간 성적을 1, 2학년 때 연달아 받았지요... ㅋㅋㅋㅋ 근데 폴스타프 님은 엄청나게 술 마셨을 거 같은데, 학사 경고를 두 번이나 받고도 8학기 만에 졸업하셨군요! ㅋㅋㅋㅋ

다락방 2020-08-10 09:35   좋아요 0 | URL
폴스타프 님... 우리 악수 한 번 하십시다. 제가 학사경고 한 번에 또 한 번은 간신히 학고를 피했는데, 저 역시 8학기만에 졸업했습니다. 졸업식날 친구들이 ‘너 무슨 빽으로 졸업하냐!‘ 고 했더랬지요. 저에게 빽은 없었습니다. 그저 노력, 노력....만이 살길이었습니다. 이상 학고 맞았지만 노력했다 말하는 1인 드림.

Falstaff 2020-08-10 10:11   좋아요 0 | URL
좋습니다. 저는 이렇게 위안합지요.
친구들은 다 취업 공부하는데 혼자 전공 책 꺼내놓고 기말고사 준비하는 비감을 겪지 않고 인생을 얘기하는 건 말도 안 되며,
수십년이 지나도 기말고사에서 장렬하게 F 맞는 악몽을 꾸는 경험이 없으면 삶을 모르는 거라고요.
아, 그 시절의 노력, 노력이여. 답안지 제일 끝에, ˝선생님, D도 좋습니다. F는 절대 안 됩니다.˝라고 써야 했던 비장하고 개같은 젊은 시절이여.....
근데 이거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모르겠습니다.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8-10 10:14   좋아요 0 | URL
저는 친구들 모두 일주일에 한 두번 학교 나와 몇시간만 머물다 집으로 돌아가던 4학년 시절에, 매일 학교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업을 들어야 했습니다. 1,2학년 수업을 같이 들어야 해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맨 뒤에 앉아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 하아-
어쩌다 한 번 수업 빠지면 과제를 물어보아야 하는데 차마 1,2학년 학생들에게 묻기 민망스러워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려 교수님께 달려가 물어야 했습니다... 아, 정말 힘든 시간이었어요. 4학년때 너무나 열심히 학교 다녔습니다. 그래봤자 졸업할 때 학점 평점은 2.0 이었습니다... 인생.....

잠자냥 2020-08-10 11:05   좋아요 0 | URL
아 이 사람들 증말 알라딘 서재에 쓰는 글만 보면 공부깨나 한 사람들 같은데 다 구라군요.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여기서 명함도 못 내밀겠습니다. 3,4학년 때 열심히 노력해서 졸업 평점 3.76까지는 끌어올렸는데 다락방 님 2.0 어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08-12 12:59   좋아요 1 | URL
아니.... 이 방 댓글 이거 어쩌면 좋아요. 정말 너무너무너무 재미지네요. 저처럼 한결같이 공부를 못하면서도 꾸준히 학교만 다닌 학생들에게는 완전 신세계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08-12 13:07   좋아요 0 | URL
어쩐지 단발머리 님은 모범생일 거 같았어요! (학교 잘가면 모범생ㅋㅋㅋㅋ) 이거 참 (남들 다 하는) 8학기 졸업모임이라도 만들어야 하는가. ㅋㅋㅋㅋㅋㅋㅋㅋ
 
끈이론 - 강박적이고 우울한 사람을 끌어당기는 가장 고독한 경기, 테니스 알마 인코그니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노승영 옮김 / 알마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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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좋아하고 테니스를 잘 했던 사람이 쓴 애정 넘치는 테니스 에세이. 특히 마지막 페더러에 관한 에세이는 테니스 에세이 고전 중 고전에 속하지 않을까. 테니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척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아, 테니스 치고 싶다. 팬데믹이라 요즘 하지 않는 테니스 경기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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