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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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엄청 좋아하는 여자가 어떤 남자랑 같이 살면서, 큰 맘을 먹고 책을 합치기로 한다. 겹치는 책도 많지만, 암튼 서로 책을 배열하는 방식때문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눈다는 이야기가 맨 처음 등장하는 수필집이다.

원 제목은 Ex Libris다. 책날개에 이 말은 책 소유자의 이름이나 문장을 넣어 책표지 안쪽에 붙이는 장서표라는 뜻이라는데, 그 책의 소장자를 지칭할 때 쓰기도 하는 라틴말이란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ex가 밖으로~ 이런 어근이고 libris는 책의 어근이니깐... 뭐, 책으로 부터~~ 이런 어감으로 해석해도 좋지 않겠나 싶다. 이 책은 책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담긴 열 여덟 편의 수필이지, <서재 결혼> 이야기는 그 중의 하나에 불과하니 말이다. (하긴, 그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의 제목을 책 제목으로 붙이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말이다. )

한 마디로, 책벌레라면, 이렇게 재생지를 써서 가볍고, 그래서 좀벌레도 잘 먹을 법 하고, 그러면서 정말 편집증적으로 글자를 읽어내는 이런 이야기들에서 묘한 일체감을 느낄 법도 한 그런 책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참 다르게도 책이란 도구를 개발했다. 도서관, 서재, 서가, 서고, 낡은 책냄새, 책갈피... 이런 말들은 추상 명사가 아니면서도, 독특한 추상성을 가진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고 싶을 때 내세울 수 있는 특성 중 하나가 책과 독서란 작업이 아닐까 한다.

독서 이야기를 책으로 내기도 쉽지 않지만, 앤 패디먼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기도 해서 재미있기도 하고, 어떤 수필은 영어를 전공하지 않은 이로서는 도통 무슨 말인지 구별하기가 어렵기도 한 책이다.

요즘 아내가 '내 남자의 여자'던가 뭔가 하는 드라마를 본다. 그러면 나는 좁은 집안 어디선가 그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거기 나오는 교수 애인을 보면 참 까칠하단 생각이 든다. 분위기 있는 음악과, 책읽은 이야기를 나눌 순 있어도 따끈한 해장국이나 칼칼한 된장찌개조차 끓일 줄 모르는 멋대가리 없는 맛없는 여자. 늘 있어서 귀한 줄 모르는 산소같은 아내 대신에 까칠한 여자를 찾아간 남자의 머릿속에선 얼마나 산소 생각이 날까... 숨이 컥컥 막히도록 숨이 막혀봐야 비로소 산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겠지.

난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박제화되는 거나 아닌지... 조금 걱정은 한다. 그래서 책에 파묻히지 않으려고 이런저런 연수도 받고, 음악 공부도 하고, 영화도 보고, 가족과 함께 놀기도 하려고 한다. 드라마의 김희애처럼 까칠한 인종은 재수없지 않은가 말이다. 수업 시간에도 까칠하기만 한 교사로 정감없는 사람이 되긴 싫지만, 본분상 읽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많이...

책을 읽으면서 좋은 구절이 나오면 밑줄도 치고, 접어도 두었다가 나중에 독서 노트나 이렇게 리뷰를 쓸 기회에 옮겨 두는 일은 책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것 중의 하나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빌린 책 같은 경우 좀 불편한 경우도 많다. 남을 배려하기 위해서는 마구 구기거나 접기도 어렵고, 밑줄을 좍~ 치기도 불편하다. 그렇지만 책에 견출지를 덕지덕지 붙이면서 읽을 수는 없는 일이니(난 이런 교수님 한 분을 보았는데 좀 보기 싫었다.) 가끔 책에게 미안하지만 귀퉁이를 접는 만행도 벌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제본한 풀이 너무 빡빡하면 읽기 불편해서 억지로 쫙~~ 잡아 펴는 일도 있지만, 나는 책을 공손하게 보는 편이라는 데 손을 들 수 있다.

독서하면서 <교열>을 보듯이 틀린 글자나 맞춤법이 눈에 '확' 들어오는 이야기를 읽을 때, 야, 이건 내 이야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맞춤법에 자신이 없어서 공부하려고 논문까지 쓰긴 했는데, 그 후유증으로 책을 읽으면서도 맞춤법에 틀린 구절들이 나오면 빌린 책이라도 고치고봐야 직성이 풀린다. 맞춤법이 많이 틀린 책은 신뢰도를 낮춰 잡는 단점도 생기게 된다.

요즘, 우방과 제국 - 한미관계를 다룬 책을 읽고 있는데, 저자가 역사학자인지라 '시점, 초점' 등(한자어끼리 묶인 말이라 사이시옷을 쓰면 맞춤법에 어긋난다.)을 '싯점, 촛점'으로 쓰고 있는 것을 읽으며 계속 불편하다. 더군다나 그 출판사가 창비처럼 유명한 곳이라면 더 심하기도 하다.

김용석의 '깊이와 넓이'를 읽고 있는데, 거기서도 나오는 손으로 쓰기(육필)와 컴퓨터로 쓰기의 장단점 이야기가 여기서도 중첩되는 걸 읽으면서 생각이 이리저리 넘나든다. 책읽는 즐거움은 이런 것이다. 나의 경험이 작가의 경험과 겹쳐지고, 다른 작가의 이야기들과 넘나들 때, 삶의 연대감 같은 것은 즐기게 되는 것이 독서의 간접 체험이라고나 하는 것이 아닐는지...

그의 현장 독서 이야기도 재미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곳에 직접 가서 읽는 재미.
헌 책방에서 9킬로그램(우엑이다. 도대체 몇 권일까?)이나 되는 책을 사서 1킬로의 캐비어보다 맛있다는 작가. 대단하다. "새로 책을 찾아 나서는 길은 언제나 인도 제도로 항해하는 것이며, 묻힌 보물을 찾아 나서는 것이며, 무지개의 끝으로 여행하는 것이다. 그 끝에 금이 든 단지가 있든 그저 즐거운 책 한 권이 있든, 거기까지 가는 길에는 늘 경이가 넘친다."는 말 이상의 책에 대한 찬사가 있을까?

집이 없는 책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집은 책을 읽는 사람의 체취와 호흡과 손때를 연결시킨다. 서가의 자리에 다소곳하게 자리잡은 책은 주변의 책들과 오묘한 아우라를 풍긴다. 서점의 신간 서적들이 빚어낼 수 없는 아우라를... 저자는 책을 영국 책과 미국 책으로 나누고, 다시 영국 책은 역사가 오래 되었으니 시대별로 나눈달 정도로 책을 사랑하는 사람인 데 비해, 내 서고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오래된 책들은 별로 인기가 없어 아직도 내 서고에 남은 것들이 많고, 몇 번의 이사를 통해 그 자리가 획획 뒤바뀌다 보니 5권짜리 한국문학 통사같은 시리즈도 짝달라 붙어 있지못하는 불운을 나날이 지키며 나를 기다리지만, 나는 대범하게 그들을 무시한다. 언젠가는 붙여 주리라 생각하면서...

작가 부모의 아래서 자랐고, 그래서 늘 책을 접할 수 있었던 저자의 환경은 다시 계속 대물림될는지는 알 수 없다. 너무도 비주얼 매체들이 발달하여 책처럼 눈을 고정시켜두고 두뇌의 신경 회전을 집중해야하는 작업에서 쾌감을 얻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임에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고, 텔레비전과 컴퓨터, 모바일 세상의 <네버랜드>는 책을 읽지 않고도 환상 속으로 여행하는 일을 가능한 것처럼 꾸며대고 유혹하기 때문이다.

우연히 랜덤하우스란 출판사의 한 편집자가 존 반빌의 'The sea'라는 소멸에 관한 소설을 보내 주었는데, 오늘 받은 그 책의 번역자와 오늘 읽은 이 책의 번역자가 같은 우연도 재미있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어찌 읽지 않을 수 있으리오... 이덕무 선생처럼 '책만 읽는 바보'라고 '간서치'라 놀림 받아도 이유가 있다면 유쾌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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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2007-05-16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남편이랑 결혼했을 때 겹치는 책이 많더군요.
만나기 전부터 뭔가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아 좋았어요.

향기로운 2007-05-16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의 리뷰가 참 맛이 있어요^^

알맹이 2007-05-16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제목이 딱입니다! 이 책 재밌게 봤어요~

글샘 2007-05-17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나무집님... 그러셨군요^^ 저는 딱 한 권 있었습니다. 보캐뷸러리 22000 ㅋㅋ
향기로운님... 최고의 찬사를 듣는군요^^
앤디뽕님... 이 책 재밌죠... 가끔 재미없는 부분도 있지만 ㅋ

프레이야 2007-06-01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리뷰 당선 축하합니다!!

글샘 2007-06-01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정말요? 확인해 봐야쥐~~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달팽이 2007-06-06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귀하게 대하는 마음은 저도 글샘님과 같아요.
그래서 꼭 사서 읽는 편이지요.
내 책이라 하더라도 특별하게 주석을 달거나 내 생각을 적어놓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책을 읽고 난 후에도 새 책인양 화장을 고치고 다시 서재의 자기 자리를 찾아 간답니다..ㅎㅎ

몽당연필 2007-06-08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서재를 결혼시키고 싶었는데...ㅠㅠ

글샘 2007-06-08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저는 요즘 돈이 없어서... 책을 별로 못 삽니다. 학교에 가득 사 두고 읽는 걸로 만족해야죠. 안 사니깐 또 거기 적응되네요.
몽당연필님... 결혼시키시지 그러셨어요^^

드팀전 2007-06-09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축하합니다.

글샘 2007-06-11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marine 2007-06-11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때 결혼까지 생각했었던 남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과 저는 겹치는 책이 오직 교과서 뿐이었습니다 (같은 과라서) 사실 그 사람은 교과서 말고는 책이 단 한 권도 없었죠 어쩌면 그런 것들 때문에 마지막 결심을 못했던 것 같기도 해요 나와 인생관이나 취향이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

misswon2002 2007-06-23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 꿈중 하나가 바로 서재 결혼시키기였는데..^^ 실현이 될는지 모르겠어요. 암튼, 윗분들 부럽습니다.

글샘 2007-06-24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rine님... 취향이란 바뀌고 그러잖아요^^ 서로 달라도 다른 걸 인정하면 되구요.
misswon2002... 부러운 사람들이죠. 저는 잘 사는 세상 사람들 저런 게 부러워요.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읽던 책을 읽었다... 뭐, 그런. 우리 아이들은 늘 컴터 앞에만 있어서 안됏구요.

빌보 2007-06-25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히려 결혼하고 나서 책 사서 보는 돈을 아끼고 생활비로...ㅡㅡ;
대신 도서관을 제 집처럼 드나듭니다..신랑도 억지로 도서관 회원증 만들게 해서..(이럼 안되는데..)혹시 제 책 연체 됐을때..신랑걸루 빌리기도 하죠..^^

글샘 2007-06-25 12:15   좋아요 0 | URL
저도 도서관을 열심히 이용하면서 책을 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이 책이나 사주고, 가끔 공짜책이나 얻어서 읽고... ㅎㅎㅎ
서재는 갈수록 허접한 책들로 넘쳐나는 듯...
 
북해의 별 8 (완결)
김혜린 지음 / 길찾기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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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북해 옆에 보드니아란 나라가 있었단다. 그 나라엔 멋쟁이 유리핀 멤피스가 있었고, 그는 역사를 읽을 줄 알고 민중을 사랑한 귀족이었다. 결국은 혁명에 성공하고 멋지게 은퇴하여 삶을 살아간다.

20년 전에 북해의 별을 읽을 때는 얼마나 가슴 졸이며 봤는지 모른다.
아마도 전두환 각하의 덕택이었을 게다.

무슨 집회만 잡히면 원천 봉쇄하던 무단 정치 시기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환상에도 잡혀있던 대학 새내기였으니...

이제 다시 김혜린을 읽는 일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을 갖게 한다.

혁명이 뒤집어진 시대, 제국주의의 엄포만 횡행하는 시대.
어두웠던 과거에는 <별>이나마 있었지만, 이젠 별도 잃어버린 중세와도 같은 암흑의 시대.
중세의 크리스트교란 독단과 21세기의 미국이란 독선은 맞먹을 만한 블랙홀이 아닐까 하는 생각.

유리핀처럼. 인간을 믿을 수 있을까?
김혜린 나이도 나랑 비슷할 텐데... 이제 그린다면 그런 격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사랑을 그릴 수 있을까...

고불고불 유려한 선들로 그려진 꽃들과 머리카락 선들 사이에 얽힌 뜨거운 인간의 감정과 혁명의 의지를 읽는 동안 나는 행복하였다. 비록 내가 나이를 먹어 순수함을 잃어가고 있거나 시대가 다시 암흑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이 있더라도, 김혜린을 읽을 수 있는 책벌레인 인간이란 존재로 사는 것이 즐거웠고, 그 즐거움에 이름붙일 <문학적 생산성>에 엔돌핀이 발생하여 즐거웠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이란 나라가 생길 무렵 유럽의 정치 상황을 세계사 책은 빼먹고 있다. 유럽에는 독일과 프랑스와 몇몇 공국들이 있었다고 나온다. 과연 그랬는가? 소련이 무너지고 독립국가 연합에 속한 숱한 나라들의 역사를 역사가들은 고의적으로 빼먹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역사의식의 방기라고 할 수 있겠다. 직무 유기랄까. 그렇게 생각하면 한국의 역사 따위야 세계사 책에 속하지도 못하리라. 그러니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세계사 책에 없더라도 뜨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존재 자체가 잊혀지고, 때론 부정당하더라도 뜨겁게 껴안고 사는 사람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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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7-05-15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영만의 식객과 더불어 제 가난한 서재에 꼭 소장하고픈 책입니다.
글샘님의 뽐뿌질로 또 가슴이 미어지는군요.

몽당연필 2007-05-15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글샘님이 만화, 것도 순정만화를????

글샘 2007-05-15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저는 서재에 책 모으는 거 진즉에 포기했습니다.^^ 학교 도서관에 적당히 사 두고 보고, 동네 도서관서 빌려보기로... 가끔 너무너무 심장이 쏠리는 책만 급하게 사 보려구요. 가슴을 미어지게 해서 죄송합니다. ^^
몽당연필님... 왜요, 순정만화 보면 안 되나요? ㅋㅋ 저는 만화 중에도 순정 만화가 젤로 재밌던데... 얼마전에 본 25권짜리 <대사 각하의 요리사>란 만화도 요리보단 로맨스에 더 관심이 가곤 했죠. ㅋㅋ 북해의 별은 순정 만화라기 보담은 역사관을 고민하게 해 주는 책이 아닐까 해요.

마노아 2007-05-16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해의 별이 데뷔작이라는 사실이 충격이었어요. 이후 테르미도르에서 혁명을 다시 한번 비추는데, 이 작가 너무 대단한 것 같아요. (>_<)

글샘 2007-05-16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이런 대작을 스무살 초반의 나이에 그것도 데뷔작으로 그려낼 수 있다니... 테르미도르도 재미있나요?^^

마노아 2007-05-16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지 심각한데, 그래도 재밌어요. 결말은 슬퍼요.ㅠ.ㅠ
 
길에서 만난 세상 - 대한민국 인권의 현주소를 찾아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박영희 외 지음, 김윤섭 사진 / 우리교육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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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덟 살부터 지금까지 삼십 사년간을 학교를 다니고 있다. 중간에 군대에 일년 반을 머물렀던 기간을 제외하면...

내가 사는 학교는 그래도 비교적 많이 민주화된 편이다. 교사들의 성별이 절반이상 여성으로 바뀌면서 윽박지르고 야단치기 보다는 꾸짖고 상담하는 쪽으로 변화된 면이 많다. 아이들의 용의 복장 등에 대한 규제도 많이 완화된 느낌이다. 그렇지만 학교 내에서 '인권'이 설 땅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학교는 미래를 준비하는 아이들이 있는 곳이고, 미래가 싹트는 희망의 공간이어야 하는데, 한국의 꼬마들은 오후가 되면 봉고차를 타고 특기적성을 기르러 부리나케 달린다. 자칫 놀다가는 제 밥벌이도 못할지 모른다는 강박 관념은 아이들을 공부하는 기계로 만들기를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0교시든 야간 보충이든 스스럼없이 교육이란 이름을 걸고 아이들의 생명력을 짓누른다. 각국의 입시 제도는 이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침몰하고 융화되어 새로운 억압의 기제로 태어나게 된다.

학교에서 짓눌린 탓일까...
아직도 못사는 나라인 탓일까...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이 사회에는 너무도 소외받는 이들이 많다.
인권의 사각지대...

이 책에선 외국인 이주 노동자, 어린 비혼모들, 코시안(아시아계 코리안)들의 삶, 도시의 노인들, 광부, 국보법에 물린 사람들, 무슬림들, 어부들, 농촌 청소년들, 한센인들, 일본인처와 동대문 미싱 노동자들을 발로 찾아가 이야기를 듣는다.

인권은 다만 머리카락을 잘리기 싫어하는 데서 비롯되지 않는다.
인권은 <인간>이 수단이 아닌 <목적>임을 알고, 공유하고, 실천하려 노력하는 <현상>이 있어야 인간의 기본권은 지켜질 수 있을 것이다.

코시안 이야기를 읽다가, <쌀 씻는 그릇이 쌀을 씻지 않는다. 쌀과 쌀이 서로 부딪히면서 씻긴다.>는 말을 만났다.

아, 쌀은 저희들끼리 서로 부딪히면서 서로를 씻는 것이었구나.
쌀씻는 손이나 쌀담긴 그릇은 보조 역할에 불과하구나...

인권이 자리잡기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구나...
그렇지만, 쌀끼리 가만히 두어서는 씻어지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쌀끼리의 부딪힘이지만, 살살 흔들어 주기라도 해야 부딪히고 정화될 일이다.

이주 노동자, 이주 신부들에 대한 신기한 감정은 많이 누그러 졌건만, 아직도 여수 출입국 관리소의 화재 현장의 불은 꺼질 생각도 않고 외국인 신분의 노동자들을, 우리 경제의 큰 받침돌인 그들을 위협하고 있다.

십시일반... 이후로 국가인권위원회가 멋진 책을 기획했다.
앞으로도 국가인권위원회의 고충스런 활동들은 더욱 활발해져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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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05-14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기관중에서 요즘 맘에 드는데 여기 한군데예요. 십시일반도 그렇고 이책 그리고 영화 여섯가지 시선도 그렇고....

향기로운 2007-05-14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두었던 책인데 먼지털어줄 시기가 온 것 같은데요.. 고맙습니다~

프레이야 2007-05-14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쌀과 쌀이 서로 부딪히며 쌀이 씻긴다는 말, 담아갑니다...

몽당연필 2007-05-14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과 사람도 서로 부딪히며 씻겨진다면 좋을텐데....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읽는 건 굼뱅인데 눈은 자꾸 높아가고....큰일입니다. ㅠㅠ

글샘 2007-05-15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맞아요. 국가란 것이 해야할 일이 뭔지를 생각해보는 이들이 있는 것 같더군요. 아직 힘이나 파급력은 모자라지만, 이런 공적 기관이 꾸준히 노력해야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애요. 오늘 뉴스에 보니깐, 교육부는 5.18을 폭도들의 저지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더라구요, 한심한 것들.
향기로운 님... 뽐뿌질을 했군요. ㅋㅋ';'
배혜경님, 책 안에 있던 말인데 참 인상적이어서 베껴 두었습니다. 제 리뷰의 목적은 주로 이런 거죠. ^^ 메모장 같은...
몽당연필님... 굼벵이도 눈 낮으란 법이야 있나요. 사람도 부딪다 보면 씻기기도 하고 닳기도 하고 하겠죠^^
 
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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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참는 것이 우리 의무라면, 아는 것은 우리의 권리!라는 생태학 연구의 어머니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지난 봄을 통해 읽었다.

반복되는 사례들을 읽어내는 일은, 이것이 1960년대의 일이라면 지금은 얼마나 더 두려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권리인데 그 중요한 권리가 짓밟히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와중에 한미 FTA는 영광스럽게 체결되었고, 오염덩어리 소고기가 상륙하게 되었다. 두려운 현실이다.

불길한 망령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그머니 찾아오며, 상상만 하던 비극은 너무나도 쉽게 적나라한 현실이 된다는 것을 카슨은 너무도 쉬운 문체로 풀어 준다.

과학자도 아닌 주제에, 그것도 여자가, 그것도 국가의 기간 산업을 망쳐 먹으려도 <살충제의 혜택과 도덕적 존엄성에 도전>한 취급을 받은 이 책, <침묵의 봄>으로 인해 출간 16개월만에 그녀는 암으로 사망한다.
무지하고 막지한 20세기와 21세기 미국과 권력자의 '힘 force'에 조의를 표하는 바이다.

대중과 소통하는 과학자는 그 당시 권위적인 남성 과학자를 모욕하는 일에 다름아닌 것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황우석의 잘난 얼굴이 떠오른다. 그 서울대와 과학의 아성에 도전한 아마추어리즘의 승리에 못이겨하며 식식거리던 관료와 남성 과학자들의 파렴치한 얼굴들이...

엘리어트는 그의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 (球根)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주었다 ....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 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나오는가?
사람들이여, 너는 말하기 커녕 짐작도 못하리라 /네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더미뿐
그곳엔 해가 쪼여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그늘로 들어오너라)
그러면 너에게 아침 네 뒤를 따른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맞으러 일어서는 네 그림자와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주리라 /한 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恐怖)를 보여주리라

대지가 봄이 되면 꾸물거리고 살아 움직이는데, 내가 숨을 곳은 붉은 바위 그늘 뿐이라는 절망감을 나타낸 시인데, 이제 그 대지조차도 봄이 되면 꿈틀거리고 생명을 움틔우지 못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장기적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수백만 파운드의 화학 살충제를 곳곳에 뿌려대는 사람들의 무책임함을 지적하는 그의 글은 <정부가 자신들을 보살펴 주리라 믿어선 안되고, 시민 개개인이 정부 정책의 실효성을 살피며, 자신을 잘못된 길로 이끌려는 의도에 도전해야>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인간의 오만함은 어디까지 달려갈 것인가... 인간은 정녕 겸손함을 배울 수 없는 '지구 생물의 말종'에 불과한 것일까?

자연을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생명체로 이해해는 대신 인간을 위한 일회용품으로 생각하는 문화적 경향은 그가 이 글을 쓴 50년 뒤에도 심각하게 심화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4월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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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7-05-14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이 체르니를 언제 띠실까 했더니 레이첼 카슨을 읽으셨군요 ㅋ

글샘 2007-05-15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르니도 종류가 많더군요.-_-;;b 간추린 체르니 100번은 다 했구요, 이제 체르니 30번인가를 치고 있답니다. ^^ 뭔가 새로 배우는 건 참으로 어렵단 생각을 해요...
 
씁쓸한 초콜릿
미리암 프레슬러 지음, 정지현 옮김 / 낭기열라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미리암 프레슬러의 '행복이 찾아오면 의자를 내 주세요.'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서 이 책을 도서관에 신청해 두었다가 반갑게 만났다.

비테 쇼콜라데... 달콤한 초콜릿이 씁쓸한 맛으로 느껴지도록 주인공 에바는 섭식 장애를 겪는 '뚱보'이다.

한국 사회에 뚱보 어린이가 문제시 된 것이 얼마나 되었으려나?
글쎄, 20년 전에 내가 학교를 처음 갔을 때만 해도 뚱보는 특별한 아이로 취급될 정도로 드문 일이었는데, 요즘 초등학생들을 보면 비만 문제가 사회 문제로 떠오를 만 하단 생각을 한다.

에바는 뚱보여서 매력도 없어 보이고, 매사에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
친구들이 당연히 편먹기 체육에서 꼴찌에 마지못해 깍두기로 들어가게 마련.

그러던 에바도 친구를 사귀고, 뚱보란 것은 별로 장애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는다.

섭식 장애는 심리적인 장애의 일종이다. 에바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정상을 되찾고, 친구를 되찾으면서 심리적 지지를 받고 다이어트의 용기를 낸다.

섭식 장애나 뚱보보다 그에게 더 씁쓸했던 것은 '인생' 그 자체였던 것이다.

새싹들의 인생이 시들지 않도록 배려가 필요하다.

청소년들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이런 글들을 많이 만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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