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 가디언 푸른도서관 44
백은영 지음 / 푸른책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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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시간은 늘 흐르고 있다고 느끼고 알고 있다.
지금은 곧 과거가 되고, 과거는 망각된다.
아직 오지 않은 순간은 확정되지 않은 것이라 미래라 부르지만, 그 미래는 곧 현재가 되고,
또 곧 과거로 흘러가서 망각의 강을 건너고 말지. 

공간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으로 느끼고 아는 인간에게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 공간에 머물고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은 지나간 시간에 움직인 내가 여기 도달했기 때문에 존재하며,
지금 내가 움직이는 곳을 향하여 미래에 나는 다른 공간에 있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나가버린 공간에 대한 기억 역시 과거가 되고 망각된다.
기억에 남는 것 역시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미래에 도래할 공간 역시 마음 속에 존재할 뿐이며, 마음 속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을 확률도 높다. 

시간을 되돌리고 공간을 복잡화할 수 있다면? 

타임머신이라는 둥,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둥,
인간의 상상은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으로 한순간에 빨려들어가는 상상을 늘 해왔다.
그러나, 거기서 벌어지는 사건과 거기서 만나는 인간들은 늘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나와는 무관한 일들이 벌어지거나 황당무계한 존재들이 거기선 일상이 된다.
아기공룡 둘리가 날아간 우주 공간도 그렇고, 해리포터가 들어선 마법의 공간도 그렇다.
현실감이 많이 떨어지는 곳이어서,
책을 놓는 순간, 시간과 공간은 금세 현실의 이 장소로 복귀한다.
복잡화된 시간과 공간은 한 순간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타임 가디언, 그들이 지키는 시공간은? 

조금 색다르다.
과거로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은 꼭 과거의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다.
자신이 미래의 한 시점에서 달려간 과거의 한 시점.
거기 존재하는 캐릭터들은 자신보다 훨씬 더 미래의 지점에서 달려온 존재들일 수도 있다는 상상력.
엄마는 남자가 되고, 자신이 엄마가 되는 혼돈은 작가가 저지르는 시공간의 여행의 의미를 증대시켜준다.
타임 가디언들이 지키려고 안간힘을 다 쓰는 시공간은,
바로 부처가 그토록 골똘히 찾아왔던 질문에 대한 해결 과정이다.
그대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길찾기의 시작 말이다. 

그래서, 만남은? 헤어짐은? 

시간과 공간의 좌표가 이뤄내는 한 지점에 두 존재가 놓일 때 그 현상을 우린 만남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이후
서로 다른 지점에 놓인 두 존재는 대뇌 피질의 지직거림의 전파를 따라 서로를 상상할 수 있다.
만나지 않은 지점에서 만남이 가능하게도 하고,
전혀 다른 지점에 놓인 두 존재는 인터넷 세상 속에서 아바타의 속성을 띠고 만날 수 있다.
그 만남은 만나지 않은 지점에서 마주치는 것인데,
의미가 발생하는 지점이라면 충분히 마주침 이상의 만남을 형성할 수 있다. 

헤어짐이란 

동일한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공유하던 존재들이,
공간을 달리하여 놓여있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시간과 공간은 하나의 시점에서 봤을 때 정해지는 그 지점으로만 존재하는 것인지,
좌표의 원점(0,0,...0,0)에 의문을 가지는 순간,
모든 존재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우리의 사고는 뒤틀린 형상으로 변질될 수 있는 것임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곡면 칠판에 그린 평면을 굳이 평면도형이라 우기는 수학선생님같은 시각을 가지고 사는 우리는,
점의 면적이 의미가 없다는 수학선생님이 피부과에 점을 빼러 가서도 같은 주장을 할 것인지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3만원 짜리 점 하나 빼면 그 주변의 점 세 개는 공짜로 빼 드린다는 원장님 말씀에,
점은 면적이 없으니 네 개 가격 12만원을 지불하고 나올 것인지를 말이다. 아니면 네 개를 공짜로 해달라고 우기든지... 

삶은 수학적이지만은 않다. 

충분히 시공간이 뒤틀릴 수 있어서,
나의 과거는 너의 미래가 될 수도 있고,
나와 너의 만남은 과거가 될 수도 미래가 될 수도 있다.
결국 더 우월한 존재인 내가 더 열등한 존재가 되는 것은 시공간이 뒤틀려버렸을 때 한 순간에 뒤바뀌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인간은 근원적으로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터이다. 

필연과 우연 

하나의 차원에서 절대적 원점을 상정한다면 시공간의 마주침은 필연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차원의 원점이 뒤틀릴 수 있음을 고려한다면,
모든 필연은 우연의 수준과 다를 바 없다. 

점쟁이와 의지 사이 

인생을 한 좌표 평면 위에 두고 콤마링을 해나가는 사람이라면 점쟁이를 의지하는 것도 좋으리라.
그러나 좌표 평면이 힘의 변동에 따라 충분히 일그러지고 다원화될 수 있음을 인지하는 삶이라면,
현재 자신이 유영하고 있는 우주의 별자리를 즐기는 마음으로,
아라란 이름의 '바다'를 서핑하는 여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사는 것도 충분히 즐거울 것이다. 

판타지 속의 시간과 공간 

결국 판타지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삶이 남기는 것도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과거의 특수한 시간과 공간 속에 남긴 삶의 이야기들은 모두 환상이며 그림자다.
금강경의 저 유명한 게송처럼,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꿈같과 환상같고 물거품같고 그림자같고, 이슬같고, 또한 번갯불같은.... 그런 것. 

나의 오늘도 판타지 

판타지 속의 한 좌표에서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해야할 일은?
이 순간의 풍요로움을 만끽할 것.
지나가버린 과거에 불평갖는 어리석음과,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는 어리석음은 모두 탐욕에서 오는 법.  

기적은 오로지 지금 숨쉬고 있는 내가 여기 있다는 그 사실.
확실한 일도 내가 여기 있다는 그것 하나. 

부활절, 삶은 = 달걀 

예수께서 선과 악을 가를 수 있다는 오만함에 빠진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희생한 것과,
모든 보속을 감당하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지나가버린 과거에 죄책감을 갖고 살지 말라는 말씀과,
어린아이처럼 미래의 두려움에 떨지 말고 살라는 말씀을 전해주심이리라. 

어린아이같이 살면, 천국에 간다고? 뷁! 

어린아이는 지금
이 시간과 공간에서 천국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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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린 시를 몇 편 보자.
우선, 이동순의 개밥풀을 한번 읽어 보렴.

아닌 밤중에 일어나
실눈을 뜨고 논귀에 킁킁거리며
맴도는 개밥풀
떠도는 발끝을 물밑에 닿으려 하나
미풍에도 저희끼리 밀고 밀리며
논귀에서 맴도는 개밥풀
방게 물 장군들이 지나가도
결코 스크럼을 푸는 일없이
오히려 그들의 등을 타고 앉아
휘파람 불며 불며 저어가노나
볏짚 사이로 빠지는 열기
음력 사월 무논의 개밥풀의 함성
논의 수확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함부로 버리며
우리의 자유를 소중히 간직하더니
어느날 큰비는 우리를 뿔뿔이 흩어 놓았다
개밥풀은 이리저리 전복되어
도처에서 그의 잎파랑이를 햇살에 널리우고
더러는 장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어디서나 휘몰 리고 부딪치며 부서지는
개밥풀 개밥풀 장마 끝에 개밥풀
자욱한 볏짚에 가려 하늘은 보이지 않고
논바닥을 파헤쳐도 우리에겐 그림자가 없다
추풍이 우는 달밤이면
우리는 숨죽이고 있다
옷깃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귀뚜라미 방울새의 비비는 바람
그 속에서 우리는 숨죽이고 있다
씨앗이 굵어도 개밥풀은 개밥풀
너희들 봄의 번성을 위하여
우리는 겨울 논바닥에 말라붙는다 <이동순, 개밥풀>

개밥풀은 '부평초. 개구리밥'을 일컫는 말이란다. 민중을 상징하는 말이라 보면 되겠지. 

화자는 개밥풀을 보고 있어.
물끄러미 바라보던 개밥풀.
개밥풀은 뿌리도 제대로 내려지지 않는, 
수면에 뜬채로 되는대로 떠다니다가 스러지는 볼품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 개밥풀을 관찰하노라니 화자의 머리를 찌릿하게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지. 

밤중에 일어나 논귀퉁이에 맴도는 개밥풀을 보고 있어.
가벼운 바람에도 밀리는 개밥풀은 방게 물장군같이 작은 생물들이 지나갈 때,
결코 굳게 겯은 어깨(스크럼)를 푸는 일 없이 적군을 타고 앉아 여유있게 휘파람도 부는 것처럼 보인대.
방게(민물게)나 물장군은 억압자겠지.
민중은 억압자가 짓밟으면 움츠러들고 꼼짝 못하지만,
개밥풀은 느긋한 걸 보고 <관조>의 마음을 찾는 거지. 

미약한 개밥풀은 강한 연대의식으로 어깨를 꽉 잡고 산단다.

음력 사월이면 양력으로 오월인데,
개밥풀은 몸을 <버리>고 <자유>를 소중히 여긴대.
민중의 희생 정신과 <자유>를 향한 의지가 드러나는 것 같구나. 

그러다 어느 날 큰비가 내린대. 이제 시간은 여름으로 흐른다.
이 시에서는 봄부터 계절이 변화하는 것이 보여.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보렴.
큰비와 장강은 험난한 세상살이를 뜻하겠지.
장마 끝에 개밥풀은 그림자도 없는 미약한 존재감으로 시련을 이겨낸단다.

가을이 되면 다시 추풍이란 시련이 닥치지.
숨죽이고 우는 개밥풀. 

결국 겨울 논바닥에 말라 붙는 개밥풀.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서 화자는 절망을 외치지는 않아.
오히려, <봄의 번성을 위하여>라는 구절 하나로,
개밥풀의 미약함과 시련의 고난함을 모두 감싸안아 준단다. 

억압당하는 삶은 늘 피곤하고 <상처받은 갈대>같은 존재가 되지.
그렇지만, 개밥풀, 곧 부평초처럼 가벼운 인생살이라도,
<봄의 번성>을 꿈꾸며 말라감을 슬퍼하지 말자는 주제를 담고 있는 시란다. 

이 시의 시점은 두 가지야.
앞부분에선 화자가 관찰하지만,
중간 부분부턴 개밥풀이 <우리>라는 말로 자신을 표현하지. 

그들은 단지 헌신과 희생의 속성만 연결되는 게 아니라
자잘한 생태적 순환들까지도  살펴보는 화자를 통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모두 긴밀하게 연결된 삶이라는 주제를 밀어내고 있는 거야.

관조란 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인생의 이치를 배우는 행위를 의미하는 거란다.
다음엔 또 나무를 관조하는 시를 한편 보자.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밴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신경림, 나목(裸木)>

나목은 발가벗은 나무, 겨울 나무를 뜻하는 말이야.
하늘을 향해 발가벗은 나무가 팔을 뻗고 서있어.
마치 밤에 별빛을 그 나뭇가지(나무의 손끝)로 받아서,
몸통과 뿌리까지 씻어내려는 듯이 말이야. 

때론 살갗이 터지는 시련도 겪게 돼.
나무 허리가 뒤틀리는 고달프고 구질구질한 삶이기도 하지만,
나무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대.
한밤에 눈이 몸을 덮으면 시원스레 털어내곤 한대.
감추는 걸 싫어하는 모양이지. 

마지막 부분이 화자가 찾아낸 삶의 이치야.
나무들이 때로 <깊은 울음>을 터뜨리며 오열할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나무들은 알고 있을까?
삶은 근원적으로 슬픈 것이지.
누구나 슬픈 법이야.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슬플 때,
세상의 슬픔은 자기 혼자 다 짊어진 것처럼 착각하곤 하거든.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거야.
세상의 슬픔은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음을 인식할 때, 위로받을 수도 있을 거란다. 

벌거숭이 나무를 보고,
외로운 사람과
또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을 상상한 시인의 마음을 생각해 보렴.
삶은 근원적으로 다 외롭다는 마음이 바탕에 깔린 것 같단다.
다음엔 박목월의 '나무'를 보자.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워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박목월, 나무>

화자는 유성에서 출발해, 조치원, 공주, 온양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여행길에서 계속 나무를 만난다.
한 그루 늙은 나무를 통해 묵중한 수도승을,
떼를 지어 선 나무들을 통해 어설픈 과객을,
멀리선 나무들을 통해 외로운 파수병을 떠올렸다.
그때만 해도 나무들은 멀리있는 타인이었다. 

그러나, 그 묵중하고 어설프며 외로운 나무들은
서울로 <회귀>한 화자의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본질적으로 인간의 외로움을 감출 수 없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겠지.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단다.
실존은 여기 살아있는 <나>를 뜻하고, 본질은 인간은 일반적으로 이러이러하다는 뜻이란다.
인간은 원래 이런 저런 존재다...하는 설명보다,
여기의 <나>의 삶이 어떤지가 중요하단 것이지.
인간은 원래 고독한 건지, 어울려 살면서 즐거운 건지,
인간은 이러이러하다는 일반론은 언제나 옳은 건 아니란다.
<나>의 현실을 살피는 일이 중요한 거지.  

다음엔 최두석의 <성에꽃>을 통해 독재시대의 민중과 저항 정신을 생각해 보자.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깁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가 금지된 친구여. <최두석, 성에꽃>

이 시는 앞부분에서 민중들의 모습을 형상화 하고 있어.
버스 차창에 성에가 끼어있는 모습을 <꽃>이라고 미화하여 표현하였지. 

엄동혹한일수록 성에꽃은 더 선명하게 핀다고 해서,
시련을 겪을수록 꿋꿋한 존재도 있음을 드러내고 있어. 

화자는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삶을 생각하면서,
자리를 옮겨다니며 성에꽃을 감상한단다. 

민중이 피워낸 아름다운 예술을 말이지.
버스는 민중의 발이잖아. 
<차가운 아름다움>은 역설적인 표현이겠다.
차가운 것, 엄동혹한에 피어난 시련의 꽃이면서
그 민중의 숨결이 피워낸 삶이 아름답다는 역설적 표현.

성에꽃은 <한숨>과 <열정>의 숨이 얼어붙은 것임을 생각하다가,
문득 유리창 너머로 한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가 금지된 친구. 

동지였던,
그러나 감옥에 가서 이젠 면회조차 금지된 친구.
독재 시대의 감옥행은 일상적인 일이었어.
대학생은 툭하면 감옥엘 가곤 했지. 

이 시는 암울하고 막막한 시대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각자의 일터나 집으로 가는
이름 없는 서민들의 숨결이
버스 유리창에 ‘성에꽃’으로 피어났다는 발상에서 씌어진 시란다.

그러나 그 성에꽃 핀 창 속에서 문득 발견하게 된
‘푸석한 얼굴’이 군사 독재 세력에 저항하다 옥에 갇힌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감성의 울림만이 아니라 지성의 울림까지 느끼게 해.

시대의 아픔은 1980년대의 광주에 이은 독재시대뿐 아니었단다.
조선 시대의 아픔도 한번 읽어 보렴.

말에 내려 인가를 찾아가 보니
아낙네 문간에 나와 맞이하네.
띠집 처마 아래 손을 앉게 하고
나를 위해 밥과 반찬 내어 오네.
남편은 어디에 나가 있냐 하니
아침에 따비를 메고 산에 올라
산밭을 일구느라 고생을 하며
저물도록 돌아오지 못한다네.
사방을 둘러봐도 이웃은 없고
개와 닭도 산기슭에 의지해 사네.
숲 속에는 사나운 호랑이 많아
나물도 마음대로 못 뜯는다네.
슬프다 외딴 살이 어찌 좋으리
험하고 험한 산골짝에서…….
평지에 살면 더없이 좋으련만
가고 싶어도 벼슬아치 두렵다네.
<김창협, 산민>

이 시에서의 ‘산민’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평지에서 살고 싶지만
벼슬아치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쩔 수 없이 험한 산골짝에서 살게 된 사람이야.
이런 점에서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라는 한자성어가 생각나지.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들이 정치를 잘못했을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백성들에게 돌아가곤 한단다. 

산골 사람들은 나물을 뜯어 연명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충분치 못해 가난함을 면하기도 어려워.
그래서 그들은 늘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면서
손님을 위한 대접도 쉽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이지. 

이 작품에서 ‘산’은 관리들의 횡포를 피할 수 있는 도피처로 그려져 있어.
시의 내용으로 보아
이웃도 없고 사나운 호랑이가 많은 산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지.  

당시 백성들의 힘든 삶이 가슴아프게 울려 온다.
이처럼 당시 관리들의 횡포가 산 속에까지 이를 정도로 가혹했음을 잘 보여주는 시야. 

내가 표시한 것처럼,
한시는 넉줄씩 읽어 나가면 뜻을 쉽게 풀 수 있단다. 

오늘은 민중의 삶을 이런저런 면에서 관조적으로 살펴본 시들을 다뤘다. 

요즘 나무들은 파릇파릇한 신록을 가득 피워내고 있어.
공부하러 다니면서도 나무의 새싹들을 한번씩 바라보렴.
그럼, 마음도 훨씬 시원해질 거야.
답답한 마음도 올해 지나면 사라질 거라 믿고 열심히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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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4-24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경림 님의 나목에 대해 말씀해주시는 부분에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혼자라서 고립된 존재지만, 다들 혼자이기에 그 슬픔을 알고 함께 울어줄 수 있다는 것을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 한 부분입니다. 그저 실존이란,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헤쳐나가는 것이지 라고 생각했지요.

뒤늦게 글샘님의 시 강의에 빠져있네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글샘 2011-04-24 22:55   좋아요 0 | URL
그렇죠. '갈대'의 실존이 '나목'에서 위로받을 수 있는 이유...
슬퍼 봐야 보이는 거죠. 타인의 슬픔이 말입니다. ^^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라 했지만, 같은 이유로 '타인은 천국'일 수도 있는 셈이죠.
나와 다른 타인은 지옥이지만, 나와 같은 타인은 반대인 것처럼 말입니다.
동병상련이란 한자 성어를 만든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길 위의 인문학 - 현장의 인문학, 생활 속의 인문학 캠페인
구효서 외 지음 / 경향미디어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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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문학 박물관에서 나온 책을 두 권 읽다 보니, 이 책에까지 마음이 뻗쳤다.
이 책은 답사를 위한 책이기도 한데,
꼭지마다 작가가 다르고, 기획자가 특별한 컨셉트를 마련하지 않은 듯,
글들의 흐름이 전혀 다르다. 

글들의 흐름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것은 장단점이 있는데,
작가의 특징적 문체를 만날 수 있는 점은 돋보일 수 있으나,
글들이 통일성을 잃고 있어 읽는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위험도 크다. 

마음이 닿는 데 부터 읽었다. 

지리산의 종소리, 남명 조식 선생의 발자국을 따라 읽노라니,
오로지 '입신 양명'만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차가운 죽비가 되셨던 이의 삶이 꼿꼿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내가 틈나는대로 들르는 양동마을과 향단.
말 물자 지형과 조붓한 평야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서 생각하는 회재 이언적의 삶,
향단의 여성 공간의 불편함과 갑갑함, 그리고 둥근 기둥의 사치를 읽는 일만으로도 향단의 용마루 너머 비추이는 들판이 눈앞에 선했다. 

구효서의 강화도 이야기는 구수했지만,
분단의 역사가 오롯이 살아 있었고,
남한산성 병자호란의 역사는 작금의 한국사 교육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한국사를 가르치는 일이 왜 중요한지는 방기한 채로,
가르치느냐 마느냐에 대하여 열을 올리는 것은 자칫 국수주의자의 모션에 박수를 보내는 일이 될 수도 있어 주의해야 한다.
역사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차라리 안 가르치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박정희가 그토록 주장했던 민족주의는 결국 국민의 눈을 가리기 위한 모션에 불과한 것이었잖은가.
과거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불행하다고 했거늘... 

정약용과 김정희, 남도 땅에서 펼쳐진 조선 후기의 자유로운 학풍은,
성리학이 무너진 현실에서도 화폐에 그들을 그려넣는 세력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돌아볼 필요를 느끼게 한다.  

다산은 4의재에서,
담백한 생각, 장중한 외모, 과묵한 말, 무거운 몸가짐
네 가지를 강조한다. 언제 읽어도 마땅한 가르침이다.
'자산어보'를 '현산어보'로 읽는 것이 옳다는 것이 114쪽에서 알게 되었다.

   
  흑산도...는 캄캄해서 이름이 무서웠다. 내가 차마 이렇게 부르지 못하고, 매번 편지를 쓸 때면 현산이라고 고쳐 썼다.
현이란 검다는 뜻이다.
 
   

그러나, 또한 성리학자였던 퇴계와 율곡의 정신이 가졌던 꼿꼿함과 올바름은,
위기지학이자 위인지학이었던 성리학이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가르침처럼 인간을 성숙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역설한 바였음을 돌아본다면,
조선 초기에 국시로 설정된 억불 숭유로서의 성리학의 수직적 질서의 강조가 낳은 폐해를 치유하려는 노력으로도 볼 수 있겠단 생각도 든다. 

강릉 넘어가는 대관령길과 금강 따라 흐르는 들판의 옛노래가 구비구비 눈물을 자아내기도 하는 여행길. 

아는 만큼 보이고, 더욱 사랑하게 되는 섭리를 길을 나서면 만나게 된다.
그렇지만, 길 위의 인문학이 융합되는 무지개를 만들기 위한 이 작업이,
조금 더 폭넓은 지식과 재미를 안은 책이었다면...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 

112쪽. 何處靑山可住를 可住로 적었다. 어느 곳 청산인들 못 살 데 있으리... 꼭 고쳐야 할 부분이다.

165쪽.  라고 적었어야 할 부분에서 '단지 부(瓿)'자를 한글로 표기했다. 좀 웃긴다.  그 외에도 이 책에선 한자를 병기해야 할 곳에서 빼먹은 부분이 많다. 166쪽처럼 누구는 한자를 쓰고 누구는 안 쓴 경우가 그렇다. 서양갑은 그냥 쓰고 이재영, 이정은 한자를 넣어준다. 서양갑(徐羊甲)이 삐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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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4-24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중한 외모 = 장엄하고 무게있는 외모. 그럼 뚱뚱? ㅋㅋ

길위의 인문학 공모하려고 하는데 이 책 도움되겠어요. 경기도 남양주 정약용 생가 방문하려고 하거든요.
늘 땡큐^*^

글샘 2011-04-24 21:55   좋아요 0 | URL
가벼운 외모를 경계한 것이겠죠.
저는 요즘 장중한 외모가 돼가서... 좀 굶어야 되는데... 바쁘면 자꾸 먹게 돼요. ㅠㅜ
길 위의 인문학까지... 세실님, 정말 에너자이저로 변모중이시군요. ㅎㅎ
잘 되길 빌게요.
 

비가 촉촉하게 내린다.
분위기 있는 봄빈데, 요즘엔 방사능이 어쩌고 황사가 어쩌고 해서 좀 찜찜하지.
사람의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시간은 흐른다.  

오늘도 엊그제 읽었던 이해인 수녀님 시를 한편 볼게.
한번 읽어 보렴.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면
말에 취해서 멀미가 나고

꽃들을 너무 많이 대하면
향기에 취해서 멀미가 나지
 
살아 있는 것은 아픈 것
아름다운 것은 어지러운 것

너무 많아도 싫지 않은 꽃을
보면서 나는 더욱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지

사람들에게도 꽃처럼 향기가
있다는 걸 새롭게 배우기 시작하지 (이해인, 꽃멀미) 

멀미는 보통 배를 탔을 때, 배가 앞뒤 방향으로 일렁거리고 흔들리면 속이 역겨워지는 현상을 말하지.
그런데 육지멀미라는 말도 있단다.
배타는 사람은 몸이 배의 일렁거림에 적응해 있기 때문에,
육지에 올라서면 땅이 흔들리는 것처럼 여겨진대. 

꽃멀미는... 꽃을 보면서 어떤 감각을 신체적으로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겠지. 

처음에 사람멀미를 이야기했어.
사람멀미.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나면 피곤하고 정신이 없대.
사람은 제각기 기준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게 마련인데,
또 자기 고집을 부리곤 하니까 사람멀미도 날 만 하지.  

2연에서 꽃처럼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라도
너무 흔하면 멀미가 난다는구나.
그렇겠지.
아무리 맛있는 진수성찬이 산처럼 쌓여있는 부페엘 가도,
어느 정도 배가 부르고 나면 음식이 당기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사람과 꽃에서 느낀 '멀미'란 의미를 이제 3연에서 확장시킨단다.
살면서 사람을 만나는 일처럼 좋은 일도 없고,
이쁜 꽃을 만나는 것처럼 좋은 일도 없어.
그런데, 그 일은 가끔 사람을 지치고 힘들게 한단다.  

불교에서 '인생은 고통'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수녀님은 '살아 있는 것은 아픈 것, 아름다운 것은 어지러운 것'이라고 표현했어. 

사노라면, 아픈 일을 당하게 마련이다.
좋아하는 사람은 못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좋아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지어 가지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런 불경 구절도 있지. 

그렇다고 수녀님의 시에선 '혼자서 가라', '혼자서 도를 닦아라'처럼 표현하지 않아.
꽃은 아무리 많아도 싫지 않은 것처럼,
사람들을 사랑하겠다는 긍정적 자세를 가지려 한단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멀미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경우도 있는 법임을,
사람을 만나면서 배워나가는 것이겠지. 

세상엔 자기 취향에 적합한 사람도 있지만,
정말 에너지가 상반되어서 툭하면 부딪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야.
그렇다고 사람을 미워하는 일에 마음을 쏟기 보다는,
사람의 향기를 찾는 일로,
마음의 긍정적 에너지를 쓰고 싶다는 소망으로 시를 맺는는구나. 

수녀님들끼리 생활한다고 갈등이 없겠니?
그렇지만, 인간을 밉다밉다하고 바라보면 정이 안 드는 법이니,
꽃의 향기에 취하듯, 인간의 향기에 취하는 일도 마음 먹기 달린 거라 생각하자는 이야기겠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말에 취해서 멀미가 나고>에 관심을 갖고 읽어 봤어.
사람이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고 했듯이,
꼭 필요한 말을 가려서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단다. 

중간고사를 준비하면서, 이렇게 4월도 가고있구나.
이 봄비가 그치면,
가로수들도 더 파랗게 싹에 힘이 돋아날거야.
민우도 힘차게 따뜻한 봄을 즐기는 마음을 갖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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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4-23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저는 정말 멀었나봐요.
마지막 구절인 사람에게서도 꽃처럼 향기가 난다는 부분에서,
저럴 수 있을까 라는 생각부터 했거든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글샘 2011-04-24 21:53   좋아요 0 | URL
수녀님도 첨엔 사람멀미가 난다고 했잖아요. ㅋ
이 시처럼 꽃을 보면서, 자연을 통해서 사람 멀미를 꽃향기로 바꿔나가는 마음가짐.
그런 게 바로 수도자의 마음일지도 몰라요.
우리같은 일반인은 모르고 살아가는...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 생태주의 작가 최성각의 독서잡설
최성각 지음 / 동녘 / 201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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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에 대해 성성하게 깨닫게 해주는 최성각의 독서잡설집...

옆자리 선생님이 표지가 인상적이라고 했다.
그렇다.
굵은 느티나무 허리참에 셔츠 풀어헤치고 슬리퍼 차림으로 기대 앉았고,
책을 펼쳐 머리말쯤 읽고 있고,
반백의 긴머리는 자연스레 늘어져있다.
배경으로는 푸르른 신록이 펼쳐진 계곡과 삽살개 한 마리 혀를 빼물고 그를 돌아본다. 

생태주의 작가 최성각의 독서잡설...이라고 그가 부제를 붙인 것처럼,
그의 이 책은 생태주의 독서의 이력을 총집대성한 것이다. 

그렇게 치면 생태주의 아닌 것이 없으렷다.
인간이 사는 데서부터 역사, 철학, 문학이 배출된 것이니 이것 역시 생태주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고,
인간을 못살게 구는 역사적 속박 역시도 환경을 해치는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1980년을 울던 시절부터 시작한다.
친구가 하나 그를 찾아온다.
그리고 그 친구와 잘 아는 신부님에게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돌아온다.
얼마 후, 친구의 부음을 듣는다.
아......
그 시대는 그랬다.
아니, 그랬나보다. 
그렇게 빗소리 하나에서도 슬픔의 한숨 소리 느끼지 않곤 살 수 없이 쓰라린 시대였나보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문고판 이야기가 참 간절하다.
내가 대학 다니던 1980년대 중후반은 말하자면 인문사회학의 르네상스였는데,
학문은 아니고 번역이 마구 되기 시작했던 시기고,
해금이 되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죽었던 중세에세 재생의 이미지를 가진 르네상스처럼,
해방 공간의 자유로운 토론이 죽었던 독재시대를 가로질러 재생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러다 신자유주의 물결을 타면서,
책은 내용이 아니라 상품과 디자인으로 승부하는 사물이 되어버린 느낌이 강해 그의 푸념도 수긍이 간다.  

스테판 츠바이크의 <폭력에 대항하는 양심 - 카스텔리오와 칼빈>을 읽고 싶었다. 

   
 

자유를 가장 신성한 인간의 자산으로 여기지 않고,
당연한 관습으로 여길 때 그 자유를 유린하는 비밀스러운 의지가 고개를 쳐든다.(120)

 
   

불관용의 장소 제네바에서 벌어졌던 칼빈(칼뱅이 어울리는데)의 우스운 모습이 그 당시엔 공포였겠다. 

인도의 헌법에서 불가촉 천민이 없도록 카스트 차별을 없앤 암베드카르 박사도 공부할 만 하겠다.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는
부유한 빈곤 국가 한국을 바라보면 가져야 할 화두가 아닐 수 없다. 

1970년대 말, 베이징 대 캠퍼스에서의 일...
시골에서 입학한 한 새내기가 고향에서 지고 온 허름한 가방을 메고 다니다
마침 길을 가던 허름한 노인에게 가방을 맡기고 돌아다니다 한나절을 보냈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그 가방이 생각난 학생은 그자리에 갔는데,
땡볕에 그 노인네는 아직도 가방을 지키고 서 있었단다.
이튿날 입학식때 그 노인이 주석단 자리에 앉아있더라는데, 그가 베이칭 대학의 부총장 지셴린이었단다. 
그의 <인생>도 읽을 만 하겠다.

그 뒤에서  '고대 나왔으면 벤츠 정도는 타 줘야' 하는 미친 교수나,
김용철이 '하버드 나온 훌륭한 분들' 지껄이는 내용은 참 한국의 쌍스러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무명 철학자 전시륜의 <유쾌한 행복론>도 읽을 기회를 만나고 싶다.
남이 책읽은 이야기를 늘어 놓는 이야길 읽노라면,
한없이 시간을 가지고 책을 읽고 싶지만,
그걸 만나는 걸로도 만족하자. 

최성각의 <달려라 냇물아>를 읽었던 참이라,
남들이 읽은 책 이야기를 읽을 염을 내지 않고 한 1년을 미뤘는데,
하루 밤을 설쳐가며 읽은 책은 감명 깊다. 

대통령이란 자가 돈독이 올라 강을 파헤치자고 난리를 떤 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임기를 생각하는지, 엄청 몰아친다는데,
매일 공사장에서 인부들이 죽어 나간다.
새로운 것도 없으니 <뉴스>에도 안 나오는 모양이다.
하긴, 이 나라에서 학생이 죽고, 노동자가 죽고, 공사 현장에서 건설 노동자가 죽는 일이야,
새로운 것도 하나 없는, 일상이지 않은가. 

그건, 노무현 때도 김대중 때도 여전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경향신문도 두려워한다던 삼성.
그런 것이 세상의 흐름이란 듯, 도저하게 서있는 높직한 성채를 바라보노라면...
새삼 한국에 사는 일은 두렵다. 

그러나, 또 죽음이 일상이 되어버린 나라에서
사는 일에 또 두려움이 무에 있으랴 싶기도 하다.
다만 태어나고 자라는 아이들이 고통스러워함이 같이 아플 따름이다. 

우리에겐 바로잡을 시간만 있다. 

시간이 없다는 말보다 더 처절하다.
남은 시간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데 쓰라는 강한 명령이겠다.
내가 선 자리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데 남은 힘을 쓰는 일.  

큰 과제를 하나 얻었다. 

-------------

21쪽. 대로는 大怒를 써야는데... 실수했다. 

52. 단재 신채효...? 호로 고쳐야 한다.

58. 피텔의 회고? 피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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