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때와 죽을 때 창비시선 372
황학주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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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오래 속마음이던 입술을 댔다

같은 괴로움이었기 때문이다

곡를 돌린 채 배 위에 손을 올린 상한 수다들, 피 섞인 폭설들

염치 불고하고 그 늪 만져보는 동안

얼얼해진 입술은 은사시나무 하나에 젖어든 빗물을 악물고

 

몸이란 캄캄하다는데 너, 몸 맞아?

말해버린 다음에는 소용이 없고

누구에게는 안 보이는 곳이지만

입술 안쪽에 깨물린 두근거림이 산다

둘도 하나도 아니며 그 중간도 그냥 둘을 합친 것도 아닌

 

아마도 생(生)이라는

 

입술에 대하여 입술로 우리는 지극하게

앓았다(입술, 전문)

 

 

입술은 두 쪽이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은 가지런히 마주하지만,

상하 대칭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아랫입술이 임맥이 멎는 마지막 지점이어서,

정적이고 여성적이면서 고집스런 심리의 표출로 도드라지는 것이라면,

윗입술은 독맥이 달리다 그친 마지막 지점이어서,

동적이고 남성적인 생동하는 화기의 표현으로 튀어 돋보이는 것일 만큼,

아랫입술과 윗입술은 서로 맞섬으로 상호 보완적이다.

 

포유류 어느 동물도 입 안부분이 뒤집어져 나와 입술이 된 놈 없다.

입술은 인체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으로 속살이 도드라진 점막에 가깝다.

색소도 없어 빨갛게 혈관이 내비치며,

입술의 움직임으로 온갖 비언어적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입술을 대는 순간, 상대의 들숨과 날숨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입술과 혀에는 언제나 찐득한 침이 가득 묻어 있지만,

사랑하는 입술과 혀를 갈망하는 마음이라면, 가히 '앓는 자의 수준'이 될 것이다.

 

입술은 두 쪽이면서, 하나다.

두 사람의 입술은 떨어져 있어서 오히려 서로를 갈망한다.

입을 맞추고 서로를 갈구하는 그 몸짓을 통하여 비로소 상대의 날숨을 내 들숨으로 받아들인다.

그 순간, 차마 눈을 뜨지 못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손으로 쥐고 입에 물 수 있는 노래를 원했으나

인생은 점점 희미해진다

입술은 제자리에 박혀있으나 식고

두 입술 중 하나는 온도 차가 있어 바람의 편도이다...

 

어느날 시간의 벽지에 눈보라로 찌힌 입맞춤을 가만히 닦아내야 한다

신의 입술을 향해 어머니의 입술이 포개지는 그런 날

이편 호흡이 저편 호흡으로 건너가는 것이리라

 

두 입술이 하나의 입술로

공평한 수평을 만들어간다(입술은 흐릿하게 그 저녁에, 부분)

 

신과 입술을 맞추는 순간,

호흡이 건너간다는 상상을 한다.

하긴, 호흡을 멎는 순간에 인간은 저편으로 건너가는 셈이니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태어남도 스러짐도,

한 호흡간에 있다는 가르침도 일리가 있다.

 

검지가 살며시 지문을 대는 듯한 입술이었다

검은 투명...... 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 얘야, 너무 아프면 그냥 집에 오면 된단다(암흑성, 투명, 부분)

 

그런 이야기가 있다.

신은 태어날 때 아이들에게,

저쪽 세상의 비밀을 말하지 말라고 입술 위쪽을 검지로 꾸욱~ 눌러 준다는...

그래서 윗입술과 인중에는 '큐피드의 활'이라는 부분이 있다 한다.

 

신의 세상에서 인간의  세상으로 건너오는 순간,

입술로 인하여 새로운 삶을 얻는 표지.

검은 데서 비추이는 투명한 지문.

그 표지를 얻는 이는 외로워할 필요 없다.

입술을 보면서, 늘 되새겨야 한다.

삶이 너무 아프면, 그냥 오면 된다는 사실을...

 

 

가끔은 서로의 문장들 팍삭 깨지기도 하는

동탑과 서탑

심장을 싸맨 채 우는 날도 있겠으나

견딜 의사가 있는 자세로

돌 안에 타인의 악기를 둔 마음으로

 

두 개의 탑 사이엔 여전히

한번도 가진 적 없는 문장이 놓여 있었다

행간, 이라는 말의 팽팽한 적요

문장 이전의 문 밖으로

맨발을 조금 보여줄 뿐인 (짝, 부분)

 

감은사지에 가면 동탑과 서탑이 있다.

몇 개의 야트막한 계단을 밟고 오르면,

두 탑은 서로 맞본 자세로 바라보고 섰다.

 

돌 안에 하나씩 악기 지녔다면,

우리가 들은 적 없는 소리로 문장을 나누었으리라.

문장이 아닌 문장으로...

발화되지 않은 언어로...

 

너와 나는

그저 맨발을 조금 보여줄 수 있을 뿐인 존재.

 

두 개의 탑이라는 실체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한 번도 나눌 수 없는 문장들로 가득하였던 것이 인생.

 

그 행간, 이라는 말의 팽팽한 적요를

어루만지고 사랑할 수 있어야,

그 조금의 맨발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조몰락조몰락 사랑을 깨달을 수 있어야,

비로소 짝.

 

 

황학주의 시집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뜬금없는 시들로 그득하다.

어차피, 태어남도, 사랑함도, 죽음도,

명징한 언어로 또렷이 색깔지어 설명할 수 없는 것,

검은 색에서 나온 투명의 언어로,

실상 발화된 언어와 언어의 행간을 통하여,

그저, 맨발을 조금 어루만질 수 있음을 통하여,

알 듯 모를 듯,

오늘을 사는 일일 따름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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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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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지각으로 말하자면 활화산이다.

계절로 말하자면 봄이고, 달로 말하면 4월이다.

그래서 4월은 잔인한 달인가.

 

땅 속에서 이유도 모른채 땅 위로 솟구치는 힘에 의하여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그런 애를 쓰는 시기,

남드리 보기에 푸르른 짙은 빛이 아름다웁고,

삶의 시기에 가장 샛노랗고 새빨갛게 빛내는 꽃들의 환상적 아름다움과

잔뜩 긴장해서 팽팽하게 솟구친 암술 머리와 수술대의 꽃가루들의 긴장감이 황홀한 허니가이드를

자외선 번득임과 함께 번쩍, 젊음의 한 순간을 도끼로 찍어내리는 순간들로 가득하던 시절.

 

그런데, 스스로 청춘일 때,

푸를 청, 봄 춘... 그 황홀한 간지러움을, 그 아름다운 게으름과 나른한 쾌감의 지속을

그 순간적인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이 많은 인생들의 삶의 흔적이다.

박민규가 그랬잖나.

한국인들은 청춘이 없다고...

시험 공부에 지치고, 취업 준비에 질리고,

결혼과 출산, 육아를 오로지 국가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힘겹고,

부모에게 같이 감당해 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아득한 그 젊음의 시절...

과연, 청춘은 있기나 했던가.

과거처럼 돌멩이 던지고, 날마다 죽어 나가는 친구들 이야기, 노동자 이야기가...

아직도 현재형으로 죽어나가고 있는데,

과연 청춘은 나른하고, 향긋하고, 가슴 두근두근하고, 짜릿한 쾌감으로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인가?

 

김연수의 이 책을 여러 번 들추었다가 말았다.

이번에 다시 '플러스'가 나와서 이참에 읽어보자고 했는데,

이젠 아슴하게 이 책을 읽기 힘들었던 이유를 알 듯 싶다.

 

이 책엔 청춘이 없다.

김연수의 청춘에서 읽은 이야기들을 쓰고 있지만, 그 글들은 뜨겁고 화사하고 짜릿한 것이 아니라,

밍밍하고 싱겁기 그지없는 한시의 세계다. 기대치와 전혀 다른 글을 만나서 덮곤했던 모양이다.

 

시의 원형이라는 게 있다면 바로 당시다.

시인들이란 모자란 것, 짧은 것, 작은 것들에 과심이 많은 자들이니

계절로는 덧없이 지나가는 봄과 가을을 지켜보는 눈이 남다르다.(35)

 

그가 청춘에 이 글들을 읽었다 하니 할 말은 없다만,

기대치와는 한참 엇나간다 싶다.

하긴, 제목만 보고 기대했던 내가 이상한지도 모르겠다.

 

몽골 시인의 시처럼, 그나 나나 수줍음 많고 세상에 나갈 준비 하나도 안 된 청년들이었다.

 

발바닥 아래서 나뭇잎이 바스락

가을 풀이 말랐다.

앞쪽 게르를 향해 가만 - 히 살핀다.

남몰래 정이 들었다.(190)

 

유목민들은 이웃이 유동적이었으리라.

앞쪽 게르의 사람들은 수시로 바뀌어으리라.

남몰래 정이 든 그 마음... 그렇게 밍밍하게 우린 청춘을 어리석게, 청춘인 줄도 모른 채, 보냈던 모양이다.

 

일본 시인 키타하라 하쿠슈의 '세월은 가네'라는 시를 읽으면

가끔 아무런 후회도 없이, 아쉬움도 없이 세월을 보내던 그 때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렇게 흘러가던 세월의 속도다.

그 시절이 결코 아니다.(212)

 

그래.

우린 모두,

그 시절이 결코 아니다, 라는 잔혹한 한 마디에 담긴 슬픈 서사들을 알고 있다.

 

이젠 청춘을 흘려보낸 나이에서,

그리워하는 것은

그 시절이 결코 아니다.

 

그렇게 흐르던 시절... 그래도 그 시절이 간혹 그립긴 하다.

남몰래 정이 들었던 무언가도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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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글쓰기
강원국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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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꼼수다를 통하여 가카의 하해와 같은 목소리를 정겹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가카는 '라디오 방송'이라는 특이한 매체를 통하여 일방통행의 연설을 했더랬다.

그것들은 다 자료로 남아 역사적인 매듭의 어느 곳에선가 쓰일 것이다.

지금은 자신의 생각이 전혀 없이 그저 읽기 연습 수준의 대통령이 앉아 있어 한심스럽다.

우는 것조차 타이밍을 미리 짜고 울어서 '줌 인' 내지 '31초'의 눈물 렙 타임 비디오를 관찰하게 만든다.

 

작금의 현실을 이야기하면 한숨만 나올 뿐,

이 책에서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의 연설담당 작가를 했던 강원국 씨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대부분 노무현 대통령 시절 이야기인데,

특이한 점은, 대통령으로 부터 배운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일은 전임 대통령의 책을 읽는 일보다 덜 마음아프고, 더 즐겁고 뿌듯하다.

 

청와대에서 나와 효성그룹 전경련 회장의 연설문 작성을 하러 갔단다.

 

내가 두 대통령을 모시며 그분들에게 배운 내용과

회장의 생각은 차이가 컸다.

내가 배운 것과 정반대되는 내용을 쓰는 것은 행복하지 않았다.

몹시 불편했다.

그래서 두 달 만에 사표를 냈다. 그 후로 6개월을 놀았다.(320)

 

아무리 긴장되고 힘든 일이라 하더라도,

진심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행복을 얻으면 힘들지 않다.

아무리 많은 보수를 받고 일이 적다 하여도,

생각이 정반대인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몹시 불편하다. 그런 법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름을 거론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또한 철저했다.

경찰, 군인, 소방관 등 평소 고생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자리에서는 특히 그랬다.(314)

 

이렇게 뒷담화로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려 온다.

그런 훌륭한 분을 대통령으로 두었던 시대가 있었는데 말이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응하면서 참으로 뒤늦은 뒷북으로 '담화문'(이건 지 애비가 잘 하던 것)을 낭독하면서,

눈물 철철 흘린 그네가 이름을 여럿 틀렸다고 한다. 가슴이 시리다.

 

故 최혜정, 정현선을 '최혜경', '정한선'으로 불러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7289

햇볕 정책은 미국의 성공에서 배운 것입니다.

미국의 데탕트 정책이 바로 그것입니다.

총 한 번 쏘지 않고 소련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반대로 미국이 쿠바를 40년동안 봉쇄하고 압박했지만 굴복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108)

 

연설의 힘은 이런 것이다.

미국 국빈방문 시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했던 말이란다.

미국을 추켜올리면서 디스한다. 그 속에 미국의 대북 정책의 기조 역시 방향성을 잡고 있다.

 

글을 쓰는 일이나 연설을 하는 일은 창작과는 다르다.

그러나 늘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두 대통령이 얼마나 늘 깨어있는 분들이었는지를 이 책을 읽으면 알게 된다.

 

참된 발견은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 - 마르셀 프루스트(119)

 

한국의 민주주의를 말하던 김 대통령이,

기적은 기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122)고 했다는 말은 신선하다.

기적처럼 보이는 한국의 현대사 아래에서는 물밀듯 천만변화하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반드시 인과응보임 차근차근 발전해 나가는 것이지, 기적적으로 민주주의를 얻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124)

 

악어의 눈물이 유행인 요즘,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영부인 앞에서 통곡하던 김 대통령이 떠오른다.

깨어있는 시민만이, 어둠 속에서 그래도 길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리라.

 

글의 종결에서 안정효 선생을 인용한 부분도 재밌다.

 

장황한 종결은 낭비다.

그것은 꽃상여와 비슷하다.

살아서는 뼈빠지게 가난하여 누더기만 걸치고 옹색하게 살았던 사람이,

죽은 다음 만장을 휘날리며 꽃상여를 타고 가서 어쩌겠다는 말인가.(130)

 

참 적확한 비유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좌절과 굴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했습니다.

참여정부에서는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들이 더이상 설 땅이 없을 것입니다.

오로지 성실하게 일하고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154)

 

결국 이렇게 3.1절 기념사로 출발한 노 대통령이지만

그 다음해 퇴출당하는 국개의원들이 발의한 탄핵부터 시작하여 수세에 몰린다.

기회주의는 아직도 이 땅을 딛고 서서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성공을 비웃는다.

슬프다.

 

글은 쉽게 써야 한다.

이것은 만고의 진리다.

쉽게 읽히는 글이 쓰기는 어렵다(헤밍웨이, 178)는 말.

 

그렇지만, 쉽게 써지지 않는 글이 더 많다. 그것은 생각이 올곧게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글을 이야기하는 대목을 보면,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체계적으로 살붙여 나가는 일을 즐기던 사람이었던가를 알게 된다.

 

두 대통령이 광복 이후 최고의 연설가라고 하는 데에 토를 달 사람은 없다.

또한 사후에까지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는 정치인이 됐다. 왜일까?

그 답은 정체성에서 찾아야 한다.

정체성은 행적으로부터 나온다.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중요하다.

이미지가 정수기를 거쳐 나온 물이라면,

정체성은 있는 그대로의 물이다.

그 사람 자체다.

두 대통령의 살아온 역정이 좋은 연설을 만드는 힘이었던 것이다.(230)

 

곁에서 날마다 글로나마 대통령을 만나면,

그 품성을 속속들이 알 수 있을 게다.

 

타고난 품성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눈물은 '악어의 눈물'로 비칠 수 있다.

진짜를 보여줘야 한다.

가짜는 금세 들통나게 되어 있다.

만들어낸 가짜는 반드시 실패한다.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그런 점에서 두 대통령은 좋은 진짜를 가졌다.(232)

 

훌륭한 이야기를 읽자니,

왜 그렇게 못난 것들에 대한 기억이 스멀거리며 기어올라와 욕지기가 나게 하는지...

왜 진짜를 진짜로 여길 시간을 느긋하게 가지지 못하고 잃게 되고 말았는지,

왜 한국의 현대사는 이렇게 굴곡과 파행으로 몰려가는 것인지...

 

어떤 책을 읽어도 마음이 아픈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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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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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 선생의 '고전 읽기' 강좌를 들은 적이 있다.

선생은 고전에 대하여 '다시 읽는 책'이라고 정의했다.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응,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읽고 있어."

이런 책을 고전이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 그럴듯하다고 여겼을 게다.

 

카뮈는 신화가 되었다.

그를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는 이제 별 의미가 없다.(롤랑 바르트)

 

이방인은 엄격한 질서를 갖춘 고전 작품으로,

부조리와 관련해서, 그리고 부조리에 맞서 쓰인 책이다.(장 폴 사르트르)

 

신화는 그 내용에 이러니 저러니 토를 달수 없는 이야기다.

곰에게 쑥과 마늘을 먹이면 과연 웅녀가 될는지 '스펀지'에 실험을 부탁할 수 없는 것처럼...

 

이미 '고전'이라고, '신화'가 되어버렸다고 말하는 카뮈를 '다시' 읽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든다.

먼젓번에 읽던 때와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오고, 다른 관점에서 부조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새움 출판사의 이방인을 읽었던 기억이나, 민음사판 책을 읽은 경우나,

읽으면서 별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다만, 몇 부분, 그러니까, '2시 버스' 같은 것들을 읽으면서, 번역 논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지난 번의 독서에서는 뫼르소의 재판 과정에서 '이방인'스러운 부조리에 대하여 느낀 점이 많았다면,

이번에는 레몽의 여자 친구라는 '무어인(스페인계 아랍인 혼혈)' 여인에 대한 뫼르소의 태도와,

노동자 옷을 입고 그들과 부딪치던 '아랍인' 청년들, 결국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살해를 저지르는 뫼르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뫼르소는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고 돌보지 못한다고 인정받을 정도로 넉넉하지 못하다.

그리고 뫼르소는 레몽같은 불량스런 청년들이 보기엔 화이트 칼라일 만큼 지적이다.

 

알제리라는 나라는 1830년 프랑스가 지배하여 1950년대 독립한다.

알제리는 프랑스인이 조금 살고 있고, 대부분이 아랍인, 일부가 베르베르인(아프리카 원주민)으로 이루어져 있다.

1942년 발표된 '이방인'의 시대에 프랑스 청년이 아랍인 한 명을 죽이는 일은

분명히 '살인'에 해당하는 심각한 죄로 처벌받는 것은 아니었을 게다.

 

한 발, 그리고 한참 기다렸다 발사한 네 발의 총성은

살육의 광기도, 분노의 표출도 아니었다.

정당방위로 보기엔 지나친 과잉행동이다.

다만, 자신의 존재와는 다른 어떤 존재(이방인)를 훼손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의 2부에서는 재판이 이루어지는데, 그 재판에 '아랍인 살해'에 대한 단죄는 거의 없다.

아랍인들은 증인으로 채택될 만큼 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다만, 그 법정은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불경한 인간 뫼르소를 단죄하는 데 노력한다.

 

부조리는 '나'와 '그들'이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비롯하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나'는 '그들'처럼 비루하지 않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비롯하는 것일까...

 

보잘것 없는 회사원에 불고한 뫼르소는 자신보다 못한 아랍인을 죽이고,

레몽이 두들겨팬 여자인 무어인에게 무고죄에 해당하는 있지도 않은 말을 증언하곤 한다.

 

그러나, 다른 세계에 들어간 뫼르소는 자신이 이방인으로 대접받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실존은 훼손당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것이 그 유명한 소설의 첫머리다.

어쩌면, 뫼르소가 어머니를 방기한 것은 '어제'라는 과거였을지 모르겠다.

뫼르소를 단죄하는 사람들은 뫼르소의 살인죄보다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보여준 냉혹함을 단죄하고 있은 말이다.

 

자신의 죽음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한 죽음을 맞겠다는 생각에는,

다른 이들이 자신을 단죄하는 그 가치의 무가치함을 역설하는 생각이 가득하다.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려고 한번 더 재심의 기회를 가지려고 상소의 기회를 가지려는 생각을 접는 것을 봐도 그렇다.

(삼심 제도인 요즈음 법으로 치자면 항소가 옳겠으나... 책에서는 상고...라고 표현하였다. 이런 것들을 통틀어 상소라고 한다.)

 

새움 출판사의 번역을 마치 '이방인'인양 비판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노이즈 마케팅이든, 도발적인 광고 문구든, 번역물 자체가 신화가 되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카뮈나 그의 이방인이 신화가 될수록, 시대에 맞는 어휘로 번역도 변화해 가야 하는 법일 게다.

 

고전은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카뮈의 이방인은 그래서 고전의 반열에 드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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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 '노을' 30주년 기념 <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에> 서평단 모집
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에 봄봄 아름다운 그림책 38
이동진 글.그림 / 봄봄출판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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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다 자라버려 군인 아저씨가 된 아들 녀석과

한 십 년 전만 해도 같이 노래방엘 자주 갔다.

 

초등학생이 열심히도 부르던 노래가 '노을'과 '아기 염소'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순수하던 시절이었단 생각이 든다.

그 녀석이 나이 들면 저절로 어른들 노래를 부를까 궁금했는데,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팝송도 배우고, 신세대들이 노래도 잘 부르곤 했다.

 

요즘 아이들도 동요를 부르는지 궁금하다.

워낙 초등생들도 섹시 댄스 같은 것이나

싸이의 저질 댄스 같은 것을 서슴지않고 춰대는 걸 보면서 그런 게 궁금하다.

 

벌써 '노을'이란 동요가 나온 것이 30년이란다.

그 시대에는 아이들이 나와서

고개를 까딱거리며 두 손을 마주잡고 동요를 부르는 대회도 있고,

주말마다 동요 자랑도 하고 그랬는데,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어느 시대나 아이들의 삶은 나름대로 양식을 가지리라.

꼭 가난하던 시절,

언니가 동생을 들쳐 업고 아버지를 맞으러 먼 길을 걸어가던,

그러면서 노을 지는 광경을 보고 갈대밭의 서걱거림을 느끼던 시절이

요즘처럼 부유한 시절보다 못한 것만은 아니었을 게다.

 

오히려 부족함 속에서 따뜻한 온기를 더 느끼려 필사적이었던지도 모르겠다.

기억이란 것은

그렇게 필사적으로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것인지도...

 

그림도 이야기도, 간단하지만

가만가만 발자국을 따라 걷다 보면,

옛 생각이 도란도란 나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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