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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글쓰기
강원국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꼼수다를 통하여 가카의 하해와 같은 목소리를 정겹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가카는 '라디오 방송'이라는 특이한 매체를 통하여 일방통행의 연설을 했더랬다.
그것들은 다 자료로 남아 역사적인 매듭의 어느 곳에선가 쓰일 것이다.
지금은 자신의 생각이 전혀 없이 그저 읽기 연습 수준의 대통령이 앉아 있어 한심스럽다.
우는 것조차 타이밍을 미리 짜고 울어서 '줌 인' 내지 '31초'의 눈물 렙 타임 비디오를 관찰하게 만든다.
작금의 현실을 이야기하면 한숨만 나올 뿐,
이 책에서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의 연설담당 작가를 했던 강원국 씨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대부분 노무현 대통령 시절 이야기인데,
특이한 점은, 대통령으로 부터 배운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일은 전임 대통령의 책을 읽는 일보다 덜 마음아프고, 더 즐겁고 뿌듯하다.
청와대에서 나와 효성그룹 전경련 회장의 연설문 작성을 하러 갔단다.
내가 두 대통령을 모시며 그분들에게 배운 내용과
회장의 생각은 차이가 컸다.
내가 배운 것과 정반대되는 내용을 쓰는 것은 행복하지 않았다.
몹시 불편했다.
그래서 두 달 만에 사표를 냈다. 그 후로 6개월을 놀았다.(320)
아무리 긴장되고 힘든 일이라 하더라도,
진심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행복을 얻으면 힘들지 않다.
아무리 많은 보수를 받고 일이 적다 하여도,
생각이 정반대인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몹시 불편하다. 그런 법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름을 거론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또한 철저했다.
경찰, 군인, 소방관 등 평소 고생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자리에서는 특히 그랬다.(314)
이렇게 뒷담화로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려 온다.
그런 훌륭한 분을 대통령으로 두었던 시대가 있었는데 말이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응하면서 참으로 뒤늦은 뒷북으로 '담화문'(이건 지 애비가 잘 하던 것)을 낭독하면서,
눈물 철철 흘린 그네가 이름을 여럿 틀렸다고 한다. 가슴이 시리다.
故 최혜정, 정현선을 '최혜경', '정한선'으로 불러
햇볕 정책은 미국의 성공에서 배운 것입니다.
미국의 데탕트 정책이 바로 그것입니다.
총 한 번 쏘지 않고 소련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반대로 미국이 쿠바를 40년동안 봉쇄하고 압박했지만 굴복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108)
연설의 힘은 이런 것이다.
미국 국빈방문 시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했던 말이란다.
미국을 추켜올리면서 디스한다. 그 속에 미국의 대북 정책의 기조 역시 방향성을 잡고 있다.
글을 쓰는 일이나 연설을 하는 일은 창작과는 다르다.
그러나 늘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두 대통령이 얼마나 늘 깨어있는 분들이었는지를 이 책을 읽으면 알게 된다.
참된 발견은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 - 마르셀 프루스트(119)
한국의 민주주의를 말하던 김 대통령이,
기적은 기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122)고 했다는 말은 신선하다.
기적처럼 보이는 한국의 현대사 아래에서는 물밀듯 천만변화하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반드시 인과응보임 차근차근 발전해 나가는 것이지, 기적적으로 민주주의를 얻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124)
악어의 눈물이 유행인 요즘,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영부인 앞에서 통곡하던 김 대통령이 떠오른다.
깨어있는 시민만이, 어둠 속에서 그래도 길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리라.
글의 종결에서 안정효 선생을 인용한 부분도 재밌다.
장황한 종결은 낭비다.
그것은 꽃상여와 비슷하다.
살아서는 뼈빠지게 가난하여 누더기만 걸치고 옹색하게 살았던 사람이,
죽은 다음 만장을 휘날리며 꽃상여를 타고 가서 어쩌겠다는 말인가.(130)
참 적확한 비유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좌절과 굴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했습니다.
참여정부에서는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들이 더이상 설 땅이 없을 것입니다.
오로지 성실하게 일하고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154)
결국 이렇게 3.1절 기념사로 출발한 노 대통령이지만
그 다음해 퇴출당하는 국개의원들이 발의한 탄핵부터 시작하여 수세에 몰린다.
기회주의는 아직도 이 땅을 딛고 서서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성공을 비웃는다.
슬프다.
글은 쉽게 써야 한다.
이것은 만고의 진리다.
쉽게 읽히는 글이 쓰기는 어렵다(헤밍웨이, 178)는 말.
그렇지만, 쉽게 써지지 않는 글이 더 많다. 그것은 생각이 올곧게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글을 이야기하는 대목을 보면,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체계적으로 살붙여 나가는 일을 즐기던 사람이었던가를 알게 된다.
두 대통령이 광복 이후 최고의 연설가라고 하는 데에 토를 달 사람은 없다.
또한 사후에까지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는 정치인이 됐다. 왜일까?
그 답은 정체성에서 찾아야 한다.
정체성은 행적으로부터 나온다.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중요하다.
이미지가 정수기를 거쳐 나온 물이라면,
정체성은 있는 그대로의 물이다.
그 사람 자체다.
두 대통령의 살아온 역정이 좋은 연설을 만드는 힘이었던 것이다.(230)
곁에서 날마다 글로나마 대통령을 만나면,
그 품성을 속속들이 알 수 있을 게다.
타고난 품성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눈물은 '악어의 눈물'로 비칠 수 있다.
진짜를 보여줘야 한다.
가짜는 금세 들통나게 되어 있다.
만들어낸 가짜는 반드시 실패한다.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그런 점에서 두 대통령은 좋은 진짜를 가졌다.(232)
훌륭한 이야기를 읽자니,
왜 그렇게 못난 것들에 대한 기억이 스멀거리며 기어올라와 욕지기가 나게 하는지...
왜 진짜를 진짜로 여길 시간을 느긋하게 가지지 못하고 잃게 되고 말았는지,
왜 한국의 현대사는 이렇게 굴곡과 파행으로 몰려가는 것인지...
어떤 책을 읽어도 마음이 아픈 나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