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여행
가쿠다 미츠요 지음, 김난주 옮김 / 해냄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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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처음 아빠를 만났을 때도 아마 저랬을 거야.

많은 사람들 속에서 혼자만 유독 반짝거렸겠지.

그 자리에 서서 언제까지고 바보처럼 손을 흔드는 그 남자가 나는 정말 좋았다.(164)

 

아빠도 한때는 그런 존재였음을 깨닫기 위해,

아빠와 딸은 납치여행을 떠난다.

 

그래 네 말대로 아빠는 형편없는 어른이다.

하지만 내가 형편없는 어른이 된 것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그러니까 네가 형편없는 인간이 된다면 그건 다 네 책임이고 네 발못이야.

아빠나 엄마 탓이 아니라구.

아빠가 아무리 무책임하고 쓸모없는 인간이라도,

네가 형편없는 어른이 되는 건 다른 사람 탓이 아니라구.(160)

 

아빠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대화를 얻게 되었다.

이해는 시간의 골을 타고 흐른다.

 

뎔들 사이에 떠있는 우리는 서로가 만나기 전의,

부모 자식도 아니고 아는 사이도 아닌

그저 뿔뿔이 흩어진 하나의 덩어리로 둥실 떠 있는...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채로...(134)

 

부모 자식간이라고 특별한 인연은 아니다.

우연히 이 행성에서 엮인 인연.

 

그 중요함의 없어짐에 대한 이야기.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짧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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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수록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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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작가들의 단편이 참 좋은 것들로 가득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요즘.

2015년의 황순원 문학상에는 당연히 2014년의 지옥도에서 시작한다.

 

소녀가 물 밖으로 걸어 나온다. 젖은 옷에서, 팔뚝과 종아리에서 쉬지 않고 물이 흘러내리는데, 머리 위에 쌓인 눈만은 아직도 녹지 않았다. 무대 앞 객석을 향해 한 발씩 다가오며 그녀가 말한다.

 

나는 잠을 잘 수 없어요. 당신은 잠들 수 있어요?

잠깐 잠들어도 꿈을 꿔요. 당신은 꿈을 꾸지 않아요?

 

언제나 같은 꿈이에요.

 

잃어버린 사람들.

 

영영 잃어버린 사람들 (한강,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44~45)

 

김애란의 '입동'에서는 아이를 잃어버린 젊은 부부의 도배하는 시간,

터져나오는 눈물에 대하여 썼고,

 

황정은의 '웃는 남자'에서는 잃어버린 여자대신 움켜쥐고 있었던 가방에 대해서 쓴다.

그의 아버지는 죽어가는 친구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했던 기억을 반추한다.

 

그해, 참혹했던 기억들이 문학으로 남았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의 이기호가 보여주는 온기와 딴판으로 돌아가는 인생사를,

손보미의 임시교사의 나이듦과 세상의 냉랭함이,

권여선의 '이모'가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손바닥을 지지기나 하던 뜨거운 화인이,

다들 가슴 속에 남았으리라.

 

영영 잃어버린 사람들,

그들도 잃기 전에는 모두 따스한 관계의 한 축이었을 것이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한다.

잃기 전에,

따스함이 날카로운 이론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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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나무 숲
권여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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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 기획, 참 좋다.

소설가는 글에 향기를 불어넣을 줄 아니까요.

직업으로써의 일과 외부자로서 보는 일은 상당히 다르지만,

또 팔도 기획, 을 읽으면서,

내가 하는 이 팍팍한 나날의 일들도, 외부자로서 꿈꾸는 이의 '꿈'의 관점에서 보면,

'향기를 불어넣을 줄 아는 사람'의 일일 수 있겠단 생각을 한다.

 

은반지, 가장 좋았다.

사람이 살아있었다.

두 할머니가 거기 오롯이 살아서 버스를 타고, 수다를 떨고,

악머구리처럼 치를 떨고 있었다.

다정히 나누어 낀 커플링이었는데,

차갑고 매정한 상징이 되어버린 것처럼,

삶은 그런 변화를 겪는 것이다.

 

비자나무 숲, 제주도의 비자림에서 영감을 얻은 듯 싶은데, 그저 그랬다.

 

길모퉁이,

그 모퉁이에 딸린 글자들과,

글자들의 쓰인 생김새와,

글자들의 소리와 의미까지,

각도까지가 길모퉁이에서 삶을 재단하고 평가한다.

참 재미있게 읽었다.

 

소녀의 기도, 무섭다.

사람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 무서웠고,

꽃잎 속 응달, 병신같았다.

가진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인 교수들의 속사정이 추악하게 비추인다.

 

진짜진짜 좋아해, 혜은이 노래 가사에서 따온 건데,

누가 너를 내게 보내주었지?로 마무리된다.

젊은 날의 아득한 증기같은 추억을 되돌아보는 소품.

 

최근작, '안녕, 주정뱅이'의 작품들이 아주 깊은 우물같은 속사정을 전해주는 책이었다면,

이 책에서는 그렇게 깊지는 않고,

이런저런 측면들이 비추이는 느낌이었다.

 

다만, '은반지'는 '이모'나 '봄밤'만큼의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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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브 디거 밀리언셀러 클럽 66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전새롬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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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

무엇보다, 야기미라는 인물, 매력적이다.

무식해서 컴퓨터 용어도 못 알아듣고,

기껏해야 사기나 쳐먹는 인물이지만,

아이들의 오디션 사기를 친 죄책감인지,

골수를 기증하기로 하여 '도너'가 되고, 마침 골수를 기증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데,

온갖 스펙터클 스릴이 시작된다.

 

악당이지만 참 이쁘다.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뺀들거리는 정치가들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현재 상황과 다르면 모조리 적,

바꿔 말하면 이단."

그 징후는 이미 지금의 사회에서 간파할 수 있다.

국정원이 극우나 극좌 등의 사상단체뿐 아니라 시민 옴부즈맨이나 언론 단체

나아가 교원 조합에까지 감시의 눈을 번득이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사형 폐지, 일장기 반대, 원자력 반대,

무엇이건간에 현실을 바꾸려는 자들을 모두 적으로 간주한다.

민주주의 국가의 그늘에서 꾸물대는 마녀재판의 논리,

현대 사회의 이단 심문 제도.(279)

 

권력의 부패라는 구조에서 비롯된 범죄라는 것도 섬뜩하다.

한국의 '내부자들'과 그 구조는 다르지 않다.

아주 기분나쁘다.

 

현 체제 속에서 권력자의 범죄행위에 가담한 경우,

이를 추궁하는 행위마저 반체제의 딱지가 붙어 조사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권력 기구는 비리를 추궁하는 손에서 벗어나

부패의 길을 곧장 달려간다.

구정물을 좋아하는 시궁쥐의 세계가 자연 정화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288)

 

인사 청문회마저 무시하는 장관 내정자나 여당의 행패를 보면,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권력자로 등장하는 어둠의 인물들이

누군가에 의하여 '급성 심부전'으로 제거되는 <구조>는 더 무섭다.

 

잡으면 놓을 수 없는 소설.

논스톱 서스펜스란 말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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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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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The elegy of whiteness...라고 되어있고, 흰, 이라 붙어있지만,

그리고 '한강 소설'이라지만, 이건 소설보단 수필이다.

흰, 것들에 바치는 글이지만, 종이가 그래선지 달떡같은 쌀가루 빛의 흰빛이지만,

11,500원은 너무 비싸다.

 

인물이나 배경,

그 배경에서 그 인물이 움직이며 엮어내는 주제의식이라기보다는,

한국이란 배경이 사라진 공간에서

한국어가 빚어내는 추억의 이미지,

그러니 수필에 가깝다.

 

어둑한 방에 누워 추위를 느끼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니가.

죽지마, 죽지마라 제발.(36)

 

엉망으로 넘어졌다가 얼어서 곱은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던 사람이,

여태 인생을 낭비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씨팔 그 끔찍하게 고독한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게 뭔가,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

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55)

 

그의 글을 읽노라면,

글만 아니라 삶도 다소 관념적이 된다.

하긴, 관념 속에서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 차가운 바닥을 짚고서야

생각이란 게 드는 순간도 있는 게다.

 

이 책에서 가장 맘에 드는 단어들이

아무리 희게 빛나도 그늘이 서늘한...이었다.

소금의 챕터에 있었다.

작가가 추구하는 '화이트니스'는 순수나 순정, 밝은 흰 빛보다는,

조금 젖어있는, 그러나 물 속에서 결정으로 빛나는

그런 소감같이 짠 맛나는 서늘한 흰빛의 그늘... 그런 것이란 느낌이 좋았다.

 

옛애인을,

완전히 늙어서,

그때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젊음도 육체도 없이,

열망할 시간이 더 남지 않았을 때,

만남 다음으로는 단 하나,

몸을 잃음으로써 완전해질 결별만 남아있을 때.(91)

 

이런 소설이 있다.

'이탈리아 구두'란 소설이다.

죽음을 앞두고 찾아온 그녀 이야기다.

1장만으로 멋진 소설인데,

2장 가면서 ㅋㅋ가 된다.

아무래도 한강은 초식녀다.

글은 그렇다.

 

이따금 각설탕이 쌓여있는 접시를 보면,

귀한 무엇인가를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83)

 

아니, 시간으로 인해 기억이 더 강화되는 것들도 많다.

각설탕,처럼,

가진자들의 '각'과 마주친 어린 시절의 경험은,

오래오래 뇌리에 새겨질 것이므로...

 

무슨 상을 받았다고,

그 작가의 책들이 팔리는 건, 좀 싸구려 세상같다.

여튼, 기분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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