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의 영감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이른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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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파니는 '주님의 공현'을 뜻하는 '나타남'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곧 풍경이 시선에 제공할 수 있는 엄청난 선물이다.(226)

 

누구나 자기가 살아온 자연의 풍경에서 얻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간다.

장 그르니에에게 그 에피파니는 곧 지중해였던 셈이다.

 

태양이 아프리카의 산 위로 다갈색 색조를 솟아오르게 하니

그 색조는 하루 종일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바닷물이 발이 잠길 정도로 기지개를 켜는 이 짐승을 쓰다듬어 주고만 싶어 진다.

빛은 아직 짙어지지 않았고

당신 뒤로 남아있던 빛의 자취는 즐겁게 조잘대다가 움츠러든다.

우리는 자신이 삶의 원천에,

샘솟는 맑은 물 가까이에 있음을 느낀다.(26)

 

아~ 바닷가에 사는 나로서는

바다가 없던 그 도시에서 살던 시절 생각이 난다.

방학이 되어 부산에 오면 늘 바닷가에서 친구를 만나고,

술을 마시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던 그 시간을...

 

쾌락에 달뜬 심장의 숨가쁜 고동소리가 사라지고

내 귀에 들리는 것은 숲이 넓고 깊게 숨쉬는 소리였다.

이처럼 음악은 가끔 우리를 느닷없이

스타카토에서 레가토로 데려간다.

우리의 생각은 처름엔 풀단처럼 묶여 있다가

스르르 풀어져 행복하게 피어난다.(28)

 

아, 순간을 이렇게 음악처럼 그리다니.

스스로 '나는 이런 음악적 순간을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말하다니.

 

사막에 간 그는 이렇게 쓴다.

 

인간에게 세계는 헛된 소란으로 가득한 무대.

그는 오직 그 무대에서 물러나고 싶을 뿐.

그는 무관심이라는 이름의

흐르는 모래(유사) 속에 파묻혀 타자들에게는

오로지 그의 진정한 자아의 환영만을 드러내 보일 뿐,

어느새 그 어떤 인간의 언어로도 표현할 길 없는 지극히 신비스러운 그 무엇.(44)

 

지중해는 찬란한 바다와 태양, 그리고 사막까지 아우르는 아름다운 곳이다.

프로방스의 열정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사실 열광적이다.

그 무엇도 그들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재화인,

태양에, 사랑에, 바다에, 도박에 그들은 열광한다.(110)

 

후반부의 그리스 기행 부분 같은 경우

큰 감흥이 없는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지중해에서 얻은 영감을 읽는 부분만으로도

이 책은 소리내어 읽고싶은 좋은 구절들을 만날 수 있어 좋다.

 

그런데, 프로방스 지방에 대해 쓴 역자의 '행복의 충격 - 지중해, 내 푸른 영혼'이란 책을 돌아보면,

장 그르니에에 대한 오마주이자 패러디였던 것 같아 감동이 좀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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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발자국 - 생각의 모험으로 지성의 숲으로 지도 밖의 세계로 이끄는 열두 번의 강의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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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미지의 숲으로, 탐험을 떠나요... 이런 문구가 간지에 인쇄되어있다.

 

 

동글동글 똑 자기 얼굴처럼 생긴 귀여운 글자체다.

나영석에게 포섭되어

과학 소매상으로 나선 적도 있던 사람인데,

 과학이란 것은 규칙을 찾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현상은 끝없이 설명할 수 없어 매력적인 것으로,

그의 탐험에 끝은 없다.

 

인생을 마라토너가 아니라

탐험가의 마음으로 살아가시길 기대합니다.(61)

 

탐험은 위험을 안고 있다.

그렇지만, 스릴을 만끽하는 것이 재미를 주기도 하는 요소다.

 

네잎 클로버(요츠바 크로바)란 이름을 가진 일본 캐릭터가 등장하는 '요츠바토!(한국제목 요츠바랑)'의 한 대목.

살아 있어서 괴로운 것이지만, 또 그 괴로움을 바라보는 것이 괴롭지만은 않다. 

 

뇌라든지, 미래 사회에 대한 규칙의 탐구는 흥미롭지만,

역시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 재미있다.

그의 글은 그 탐구의 과정을 가려 뽑은 것이다.

 

인간의 의사 결정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인간은 결코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그래서 궁금한 것이다.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드문 현상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저 존재할 따름.(126)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적어 두었다.

오늘 하루, 나는 살아냈느나, 그저 존재했느냐...

매일 물으면 피곤하겠지만,

탐험하는 사람으로서 재미있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일은 늘 의미있을 것이다.

 

행복은 예측할 수 없을 때 더 크게 다가오고,

불행은 예측할 수 없을 때 감당할 만하다.(179)

 

실험에서 이런 이야기를 얻는다.

수긍이 되기도 하지만, 또 우리가 행복을 대하는 자세를 생각해 보게도 한다.

인생의 기본값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인 측면이 많으리라.

인간은 기본적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동물이므로...

그러니, 행복을 예측하면 또 만족하지 못하는 것.

그렇지만 불행을 예측하면 인간은 견디지 못한다.

 

동양 사람에겐 눈의 형상이 중요하고,

서양 사람에겐 입이 중요하다는...(192)

 

한국 이모티콘은 @,@, 'ㅂ', ^^ 와 같은데, 영어권은 ;) ;(와 같다.

키티를 보면 입이 없는데, 서양사람들은 어색하게 여긴다 한다.

 

여러분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그런 발상의 기회를 가지세요.

그리고 그것들을 다른 곳에 가서 흉내내세요.

결과물이 아니라 사고방식을 흉내내세요.

똑같이 따라하진 마시고,

꾸준히 변형하세요.

그것이 창의적인 발상의 출발입니다.(208)

 

좋은 생각이다. 공감한다.

올 여름, 2박 3일간 수원까지 기차타고 가서

혹서기에 독서교육 연수를 들었다.

다 열정적으로 강의하고 토론하는 청춘들이었다.

그리고 새학기를 맞으니, 그들을 따라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방학 전에 지쳐있었는데, 개학하고 오히려 힘이 났다.

고마운 일이다.

 

이노베이션은 창의성 곱하기, 혹은 더하기 리스크 테이킹(위험 감수)라 여기는데,

실제 성취한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위험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었다는...(320)

 

노회찬 의원의 죽음으로 허무감을 느낄 때,

열정적으로 살던 한 교사가 자기 삶을 접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극반을 지도하면서 만났는데, 정말 치열하게 살았는데 말이다.

위험을 관리한다는 것은,

삶의 지침을 늘 살펴야 한다는 일이기도 하다.

 

삶의 지침이 일제 강점기처럼 흔들리지 않는 시절도 있고,

전두환 시절의 투쟁처럼 주적이 명확한 시절에는 혼란스럽지 않다.

그렇지만, 민주화된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

아직 삶을 껴안을 수준이 되지 못했을 때,

한 개인이 느끼는 고독과 비탄에 대해 많이 생각한 여름이었다.

 

노회찬 의원과 담론을 주고받던

황현산 선생 역시 세상을 떴다.

지병이 있었다 하지만, 더 충격이었으리라.

 

위험은 잘 관리되어야 한다.

이 불확실한 시대, 위험을 무릅쓰는 시대가 아닐수록,

위험을 잘 관리할 필요가 있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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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의 비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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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가 머리를 감기가 무서워진다.

 

'쾌적하게 사는 법'이란 책으로 돈을 좀 벌어 본 주인공 슈헤이는

아내 가나미와 행복하게 살 일만 꿈꾸는데...

아내의 임신은 뜻밖의 고민을 만들고, 낙태를 결심한다.

 

이때부터 아내에게 덥치는 엑소시스트의 공포...

 

낙태에 대해 사람마다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으나,

이 책은 공포물을 통해 생명에 대하여 소중한 마음을 먹어야 한다는 것과,

피임을 잘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이런 뻔한 목소리를 재미있는 호러물로 써낸 작가는 역시 굉장하다.

 

정신과와 부인과를 모두 경험하는 의사 이소가이의 고민과

남편 슈헤이,

그것~의 전 남친인 오카베까지 등장시켜

생명의 소중함과 피임 실천의 중요함.

그리고 낙태의 위험과 이에 따르는 고민들...

생명 현상의 고귀함을 깊이 가르치고 있다.

 

재미와 공포도 있으면서 사회적 문제를 잘 다룬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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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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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복된다.

2009.5.23일과 2018.7.23일... 두 '노'의 죽음은 오래 나를 힘들게 한다.

두 사람이 모두 조직을 지키기 위해 결행한 죽음이 아닌가 싶어 더 마음 아프다.

유시민은 두 죽음 앞에서

무참한 마음으로 조문을 했다.

마치 상주였다.

 

유시민이 이런 책을 쓴 이유는 복잡하고 단순하다.

그의 청년 시절과, 그의 정치가 시절, 그리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지식 소매상이자 유작가의 시절.

그렇지만 세상은 자꾸 그를 상주의 자리로 불러 낸다.

슬프다.

 

헤로도토스에게 역사 서술은 돈이 되는 사업이었고,

사마천에게는 실존적 인간의 존재 증명이었으며,

할둔에게는 학문 연구였다.

마르크스에게는 혁명의 무기를 제작하는 활동이었고,

박은식과 신채호에겐 민족 광복을 위한 투쟁이었다.

사피엔스의 뇌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지만

뇌에 자리집는 철학적 자아는 사회적 환경을 반영한다.

그들은 각자 다른 시대에 살면서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이야기를 남겼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는 이유는,

그들의 철학적 자아와 공명하기 때문이다.(213)

 

사람들이 유작가에 공명하는 이유도 같다.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 동조하든 비판하든, 공명할 수 있으므로 그는 가치 있는 지식인이다.

 

역사가 쓰는 사람의 철학과 연구 방법에 따라 얼마나 크게 달라질 수 있는지 절감하고,

절대적으로 옳은 역사,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보여주는 역사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도 확인.(202)

 

역사는 '사관'에 따라 달리 쓰인다.

객관주의를 표방하는 랑케 역시 시대의 산물이다.

 

19세기 중반, 유럽의 군주제는 바람앞의 등불.

공화제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과

계급혁명의 기치를 든 사회주의자들 앞에서

군주제를 옹호하는 저명 역사학자 랑케를 반기지 않을 권력자가 있겠는가.(129)

 

 Wie es eigentlich gewesen.

그것은 원래 어떠했는가를 밝힐 수 있다는 듯 패기 충만하던 그의 목소리는 매력적이다.

 

카의 말을 빌려 그는 할둔을 변명하지만,

모든 역사가의 처지에도 같이 적용된다.

 

"역사책을 집어들 때 책 표지에 있는 저자의 이름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출간 일자나 집필 일자가 때로는 훨씬 많은 것을 누설한다."

저자가 어떤 정치적 사회적 환경에서 살았는지 점검해 보라는 카의 말.(97)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는 유명하다.

그렇지만 유시민이 썰을 풀어주니 다이아몬드가 존경스러워진다.

 

"이 네 가지 환경 차이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으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

다이아몬드는 15세기 이후 세계를 정복한 유럽인들이

끈질기게 붙들고 있었던 인종적 우월감과

문화적 자아도취에 얼음물을 끼얹었다.

그는 도덕적 훈계나 연민의 감정 호소 대신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환경의 차이를 근거삼아 논증했다.(296)

 

이 책에 등장한 소재들은 역사서가 주가 되지만,

넓게 보면 인류사나 민족사 등 다양한 기록을 섭렵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서 유시민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생각이 있다면,

생각은 차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

그리고 환경에 따라 생각은 달라진다는 것.

고정 관념을 버리고, 유연한 사고를 가지지는 것,

이런 저런 것들이 그를 '거꾸로 읽는 세계사'라는 사건 요약 작가에서

다양한 역사적 관점의 차이를 기록하는 작가로 변하게 한 것이다.

 

그것은 70~80년대의 짱돌과 화염병 투쟁에서,

2016년 촛불과 2018년 선거의 투쟁으로 이어지는 다종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당연히 다종다양할 수밖에 없는 국가적 현실앞에서

지식을 소매점 형식으로 공유하고자 하는 사람의 최대한의 노력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 생각이 여러 번 났고,

그 와중에 고 노회찬 의원의 부고를 들었다.

 

슬픈 역사를 껴안고 가는 민중의 눈물이

언젠가 작은 역사로 남으리라.

 

작은 아픔까지도

모두 기록되어야 할 것이 미래의 사관일 것이므로...

 

 

고칠 곳 몇 군데...

122쪽 본문의 독일어 표기에 und를 and로 썼다. 오타다. 같은 책의 323쪽 참고문헌에서는 und로 옳게 썼다.

136쪽의 각주에 오타가 보인다. 독일어 인간은 Mann이다.

289쪽. 내가 알기로 과학 잡지의 이름은 <디스커버>가 아니라 <Discovery>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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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구멍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44
켄 폴릿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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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는 eye of the needle이지만, 우리말로는 바늘귀라 부른다.

당연히 바늘 구멍이라 불러도 말은 통하겠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스틸레토'에 굳이 구멍은 필요치 않다.

 

바늘은 스틸레토를 사용하는 스파이이다.

살인 전문가이며 어떤 역경도 헤쳐나간다.

그리고 그는 심리 전문가이기도 하다.

 

켄 폴릿이 27세에 이 소설을 썼다 한다.

스물 일곱의 나이에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으니,

이제 일흔의 나이에는 더 복잡한 세계의 역사를 머릿속에서 꾸며낼 수 있으리라.

 

나이가 드는 일은 서글프기도 하지만,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볼 수도 있고,

단순한 것들의 나열에서 의미를 찾을 수도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켄 폴릿이 관심을 가졌던 세계의 역사와 전쟁,

그리고 인간 하나하나가 그 흐름에 미치는 영향들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 소설이다.

 

페이버는 화가 났다.

다른 사람을 신뢰해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타인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모든 것을 운에 맡길 수는 없었다.(183)

 

스물 일곱의 나이에

그것도 3주만에 쓴 소설이라기엔 완성도가 높다.

영화로 만들어도 멋진 작품이 될 듯 싶다.

페이버라는 탁월한 인물과

사랑과 스파이라는 매력적인 사건과

세계대전이라는 배경이 그럴싸하니 말이다.

 

그가 영국인이라는 사실이 작품 전반에서 드러난다.

그렇지만 독일어에 대한 관찰 또한 뛰어나다.

 

이제 탈출이 얼마 안 남았다 생각하니...

얇게 저며도 될 만큼 기름진 소시지,

도로 오른쪽으로 달리는 자동차,

정말로 큰 나무, 그리고 무엇보다 모국어 - 직감적이고 정확한 단어,

단단한 자음과 순수한 모음, 문장 끝 마땅한 자리에 있는 동사,

그 절정의 말미에 있는 합목적성과 의미 - 를 생각했다.(307)

 

일흔이면 많은 나이지만, 요즘엔 아직...인 나이다.

켄 폴릿의 복잡한 두뇌 주름에서

더 재미있는 인물들과 사건들이 샘솟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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