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보통이 '불안'에 대해 쓴 에세이다. 많은 불량 자습서들이 에세이를 '수필'이라고 번역하는데, 에세이는 진한 논설문에 가깝다. 한국에 널리 알려진 수필은 에세이랑은 전혀 거리가 멀다. 요즘 대학에서 요구하는 논술이 아마도 에세이에 제일 가까울 것이다.
한국인들만큼 불안한 이들이 또 있을까?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그 일본놈들을 내보내고는 짐승같은 미국놈들의 군정을 지냈고,
다시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들이 참여한 한국 전쟁을 겪었고,
그 와중에 대통령에 의해 자행된 숱한 살상들과, 전쟁 이후의 핍박을 당했으며,
이승만부터 시작한 박, 전, 노통의 살인적 정치는 국민들을 정서적 공황으로 몰아 넣었다.
외국에 자유롭게 나다니게 된 것이 이제 20년.
그러니 한국인이 영어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렇지만, 요즘 아이들 영어 정말 잘 한다. 듣기도 잘 하고, 토익도 정말 잘 한다. 의사 소통에 문제가 있다지만, 토익 잘 하는 아이들이라면 실제 상황에서 금세 적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주, 미국 한 공대에서 희대의 총기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미군의 살상에 비하자면 사소한 일이었지만, 그 장본인이 한국계 미국인이어서 한국인들은 잠시 불안했다.
미국의 주변국가로 분류되는(촘스키나 하워드 진의 책들에 보면 그렇게 나온다.) 한국인이 미국인들을 서른 명 넘게 죽였으니 한국이나 한국계 미국인들이 피해를 입을까봐 지레 움츠러 든 것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런 것들을 냄비 근성이라는 둥, 불필요한 오버 액션이라는 둥, 비난하지만 한국인이라면 그 핏속에 '불안의 유전자'가 가득 떠다니고 있어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부자들은 한미 FTA가 체결된 지금 이런 일이 있어서 불안하다고 하지만, 일부 종교의 오버 액션을 보면서, 이건 한미 FTA 비준을 노린 꼼수에 불과한 헐리우드 액션 아닌가 싶기도 했다.
보통의 이 책은 관점이 조금 다르다.
제목이 status anxiety인 걸로 보아, 사회적 지위를 얻지 못하거나 유지하려고 애쓰는 불안을 이야기하려는 듯 하다. 그저 불안만은 아니다. anxiety는 도달하고자 하는 열망까지도 포함하는 우리말의 불안보다는 조금 포괄적인 단어인 듯 하다.
그의 분석에서 불안의 발생 원인을 사랑 결핍, 속물 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정성이라고 밝힌다.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서 늘 사랑이란 헬륨을 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도 취약(22)하다는 분석처럼 보통의 말들은 정말 재미있다.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 세상이 내리는 감정적 형벌(38)이란 말도 의미심장하고, 속물 근성snobbery을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 하는 것>이란 정의도 새롭다. 그는 역시 좀 천재인 근성이 있다.
자존심 = 이룬 것/ 내세운 것이란 공식도 볼 만 하다. 그래서 내세우는 것에 비해 이룬 것이 많으면 성인에 가깝고, 내세운 것이 아주 많다면 정치가나 스타에 가깝겠지. 스타들이 자살하는 이유를 이런 데서 찾는다면 너무 어거진가?(71)
자본주의 산업 발달은 더 많은 대가를 기대하지만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을 야기한단다.(82) 맞다. 발달은 욕심을 끝도없이 부풀리니깐...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한다는 말엔 전적으로 동감!(119)
그의 해법은 다소 막연하고 추상적이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안적 방향에서 해결책을 찾는다고 하는데, 그처럼 똑똑한 이라면 모르되, 그가 문제시했던 사회, 즉 자본이 우선되는 속물적 사회에서 늘 불확정한 미래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주변의 인물들과 비교당하는 이들에게 과연 철학이 어떤 힘을 줄는지... 그의 해결책에는 상당한 불만을 표하며 읽게 된다.
문제 제기에 비하여 해법에서는 상당히 횡설수설하면서 늘어 놓기에 바쁘다. 그의 독창적인 어법도 별로 구사하지 않고 있으며, 많은 철학자들의 이야기, 예술 이야기(소설, 비극 이야기와 그림 이야기), 성경 이야기와 보헤미안들의 이야기가 막연하게 즐비한 나열에 그치고 있다. 용두사미를 보통이 알아 먹을까? 보통씨, 용두사미 아쇼?ㅋㅋ
부르조아 개념에 드러맞지 않는 품위인 <보헤미안> 기질이나, 이미 무너져 버린 공동체에 대한 <기독교적 공동체 추구>도 해결책으론 부족해 보인다.
그렇지만 지위에서 오는 불안감이란 주제로 이렇게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 놓을 수 있는 보통의 말빨에는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지위 불안을 읽노라니 불현듯,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임시 야간 숙소>의 한 구절이 머리를 친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 놓지 마라...
그래... 책을 내려 놓지 말아야겠다. 해결책은 그 속에... 찾는 그 길 속에 있으리니...
임시야간숙소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무숙자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잠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