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콩의 슬픈 그림자 인도차이나 - 유재현의 역사문화기행
유재현 지음 / 창비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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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들을 인도차이나라고 부르기 시작했을까?
무식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원래 있던 대륙을 "발견"했다고 생쑈를 하더니, 거기 사는 사람들을 "인도인"으로 착각하고 '인디언' 부르는 것들이, 인도와 중국 언저리에 있다고 부른 이름이 인도차이나.

그 이름만큼 언저리의 역사를 지니고 살았으면 좀 좋았으랴만...

불운하게도 인도차이나는 슬픈 열대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많은 자원을 수탈하려고 달려드는 각다귀같은 서양 제국주의자들에 의하여, 그 후 전쟁에 나선 일본과 미국에 의하여 인도차이나의 역사는 누더기처럼 지배자가 번갈아 바뀌는 역사였다.

20세기 후반, 연쇄 공산화를 두려워한 도미노 이론의 저지를 위한 <최전방>으로 선택된 인도차이나는 반공 일색이었던 우리의 똥종이 윤리 교과서를 치장하곤 했다.

흔히들 베트남전쟁으로 알려진, 미국이 베트남전쟁으로 알리고 싶어한, 그 전쟁의 이면에는 공산화가 진행된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무차별 폭격도 포함하고 있는 인도차이나 전쟁이었다. 아, 전쟁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처참한 일방적 폭격이었다고 해야겠지. 그러나, 그러나, 1975년 베트남은 역사상 거두기 힘든 승리를 미국으로부터 빼앗아 내었다.

그렇지만, 유재현은 베트남의 호치민을 일방적으로 칭찬만하지 않는다.
베트남의 역사는 침략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숱한 지역 민족국가들을 유린한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국가라는 근대적 개념이 참으로 많은 민족을 분열시켰으며, 엄청 많은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정말 무정부주의자들이 생길 만도 하다. Imagine...에서 no countries...에 나도 얼마나 동감인지...

이 책에서 가장 땀흘리며 읽은 부분은 꾸찌터널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국인보다 체구가 작은 그들이기에, 미국인은 도저히 들어올 수 없는 작은 구멍(동굴이라기 보다는)을 파고, 그 속에서 벌레처럼 기어다녔던 터널. 그 터널은 인도차이나 전쟁의 <비인간적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제는 <미안해요, 베트남>이라고 말해야 하고, 한국이 베트남에 저지른 죗값을 치러야 한다.
일본놈들이 반성하지 않고 사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나쁜 것을 보고 배울 필요는 없지 않을까?
왜곡된 역사를 배운 후손들은 불행하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꼼꼼하게 읽어주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만큼 그가 가진 애정이 크다는 이야기겠다.

메콩강... 하면 왠지 목이 '메일 듯한' 슬픔이 어리는 듯 하다.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에서의 목이 조이는 듯한 어두운 긴장감이 그랬고,
숱한 베트남 전쟁을 묘사한 소설에서의 치사한 삶들이 그랬고,
오로지 돈을 바라고 몸을 파는 숱한 여성들이 가득하다는 아픈 이야기들도 그렇다.

유재현의 인도차이나에 대한 애정을 좀더 찾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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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6-07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

바람돌이 2007-06-07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으면서 꾸찌 터널에 대한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그들의 생존이 어떻게 위협받았는지, 얼마나 두려웠을지.... 이 책의 다른 내용은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져 가는데 그 부분만은 잊히지 않고 또렷이 남네요.

홍수맘 2007-06-08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 볼께요. ^ ^.

글샘 2007-06-0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오랜만에 아뒤를 바꾸셨군요.^^ 좋은 책입니다. 읽어 보세요.
바람돌이님... 그렇죠!! 꾸찌터널 읽으면서 참 가슴이 먹먹했답니다.
홍수맘님... 꼭 읽어 보세요^^
 

‘팬덤현상’ 나쁘게만 보지말자

 이경아 동서울대 교수
지난주 초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연예사건이 있었다.

바로 동방신기의 리더 유노윤호에게 본드를 넣은 음료수를 전달한 ‘안티팬 사건’ 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많은 사람들이 연예인 팬클럽과 안티팬들과의 상관관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과연 우리의 팬클럽 문화는 잘되고 있는지, 또 안티팬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들 팬클럽들은 우리 대중문화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 ‘갑론을박’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는 ‘팬덤’이라는 문화 현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일단 ‘팬덤’의 어원적 의미를 보자. ‘팬덤’이란 광신자를 뜻하는 ‘퍼내틱(fanatic)’의 팬(fan)과 영지·나라 등을 뜻하는 접미사 덤(-dom)의 합성어이다. 최근들어선 특정한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거나 몰입하여 그 속에 빠져드는 사람을 뜻하는 ‘부정적인 의미’로도 쓰인다. 연예계에선 대중적인 연예스타나 분야에 지나치게 편향된 사람들을 하나의 틀로 묶은 개념으로 쓰고 있다.

실제로 이번 사건도 연예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이나 몰입이 부른 ‘팬덤(fandom)’현상의 일그러진 일면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팬덤의 문화적인 의미를 내밀히 보면 그 생산성과 가능성이 그 어느 문화보다도 큰 것을 알수 있다.

그 근거로 우리는 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과 최근 요 몇년사이에 방영된 드라마 ‘다모’를 들 수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이후 10대를 중심으로 한 팬클럽들은 대중문화 시장의 거대한 소비자로 떠올랐다. 이들은 미디어와 연예기획사들을 중심으로 이뤄지던 대중문화 시스템에 함몰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미디어와 기획사가 중심이 된 연예산업에 저항하며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인터넷 소설’, ‘얼짱 문화’, ‘팬픽’ 등이다.

드라마 ‘다모’는 팬덤이 가질수 있는 생산성을 보여줬다.

드라마 초기 ‘다모’ 홈페이지에 의견을 올리고 동영상을 돌려보던 팬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모’ 관련 인터넷 신문을 자체로 만드는가 하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스토리를 가공,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팬덤형상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면서 ‘생산성’과 ‘능동적인 모습’까지 함께 보이기 시작한 것.

이 과정을 통해 팬들은 스타를 재해석하고, 스스로가 문화를 만들어가는 생산의 주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최근들어 이들은 문화운동 단체들과 결합해 대중문화 자체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고, 이를 개선하고자 하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이제 팬클럽들이 만들어내는 ‘팬덤 문화’는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문화의 주체로 성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10대의 팬덤 문화에 부정적인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극소수 팬들은 무리한 팬집착 현상을 보이며 맹목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래서 일종의 병리현상으로도 표현된다.

하지만 이같은 현상은 사회적인 정화작용을 거칠 것이다. 팬들 사이에서 일고 있는 또 다른 팬덤현상이 그들 스스로 복원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앞으로 이들에 대해 지속적 관심과 따뜻한 시선을 갖고, 그들이 생산해내는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면 ‘팬덤현상’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돼 나갈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팬클럽 활동속에 내재 되어있는 잠재력과 그 어떤 문화와도 비교되지 않는 역동성을 인정하여야만 할 것 같다.

이경아 동서울대 교수

 

슈퍼 주니언지 뭔지 하는 '을라들'이 텔레비전을 주름잡더니, 결국 아이 하나 잡았다.
스타킹에 나왔던 여고생 하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팬클럽의 세계... 그 네버랜드는 결코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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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7-06-07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기사 봤네요. 네xx 올라온 기사들을 보면 악플이 난무하던데 무슨 생각으로 그런 글들을 써대는지 원... 다른 사람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 조금이라도 생각을 해보는 자세가 필요한데 말여요...
 
쇼핑하기 위해 태어났다 - 텔레토비에서 해피밀까지, 키즈 산업은 어떻게 아이들을 지배하게 되었나
줄리엣 B. 쇼어 지음, 정준희 옮김 / 해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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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소비적인 나라 미국 안에서 그 '소비지향'에 대한 문제 제기, 그것도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판매전략, 즉 키즈 마케팅의 현실과 문제점을 밝히는 유익한 글이다. 아쉬움이라면, 대안이 별로 없다는 것.

돈 놓고 돈 먹기의 나라에서 이미 중독되어버린 아이들에게 텔레비전을 꺼라!, 게임을 덜 할 수 없겠니? 콜라나 과자를 끊자!고 하긴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나온 책이지만 단순히 미국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이 문제 제기의 유익함이 있다.

아이를 기르는 집에 가보면 집집마다 토이박스가 몇 개씩 된다. 그 안에는 한 번 갖고 놀다가 부숴버린 잡동사니들이 그득그득 들어있게 마련이다. 내가 어린 시절 장난감이 없어 빨래집게를 가지고 시뮬레이션 게임을 상상하며 놀던 시절에 비한다면 행복한 고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결과는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아이들은 종일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보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으며, 용돈이 있으면 써버릴 수 있는 정크 식품(패스트 푸드는 빨리 나오는 음식이란 의미가 그리 부정적이지 않으나, 정크는 쓰레기, 잡동사니 식품이란 의미가 강해 훨씬 자극적이다. 고칼로리에 영양가 없는 식품을 이렇게 이른다.)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다 보니 운동은 부족하고 비만은 심각하게 된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 아들의 이야기다.

어려서부터 토이 스토리를 여러 번 보고, 처키의 악마 시리즈도 자주 보았는데, 그만큼 상업적 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파트에서 무료로 틀어주는 투니버스를 종일 틀어놓고 있으며, 영양 상태는 늘 과체중과 경도 비만의 경계선을 줄타기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 아이들의 소비 문화가 한국 아이들의 그것과 많이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초등학교 앞이나 어린이 공원 같은 데 가보면, 비만 어린이들을 발견하기는 너무도 쉽다. 오히려 비만 어린이들을 만나지 않기가 더 어렵다.

아이들은 독서와 놀이 시간이 급격히 줄었고, 상업적 환경의 영향으로 부자가 되기를 늘 바라지만, 노력하는 훈련은 덜 되어 있어 불안증에 시달리기 쉽다. 특히 한국의 아이들은 학원에 가 있거나 아니면 투니버스 앞에 앉아 있어서 놀이터는 텅텅 비어있지 않은가.

아이들의 샴푸, 수저, 학용품, 먹을거리 등에서도 항상 장난감을 만날 수 있다. 영어로 Eater-tainment라고 한다는데, 굶어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먹을거리로 장난감을 만든다는 게 비도덕적이란 지적은 십분 동감이다.

탄산 음료, 초콜릿, 사탕, 스낵류 등이 비만 가능성을 50% 이상 증가시키며, 아이들을 중독시키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환경뿐 아니라 이런 식생활이 아이들의 아토피 피부염, 알러지 같은 질병들을 야기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성공적 마케팅을 위한 '바이러스적 요소' 탓으로 미래의 인류는 변종 바이러스에 의해 멸종하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긴, 그것이 신의 뜻일 수도...

적게 일하고 적게 쓰며 간편하게 생활하는, 의도적으로 소비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다운 시프터 downshifters>라고 한다는데, 그들을 관찰해 보면, 그들에겐 자녀를 키우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역으로 자녀를 키우면 다운 시프터가 될 수 없다는 슬픈 이야기...

아이들을 '생화학적 괴물'로 만드는 식품 문화와 소비 지향적 문화는 아이들에게 파괴적이고 고통받게 만드는 미래를 제공할 것이다.

어린이 대상의 광고가 과연 속이는 일인지, 결정권을 주는 것인지... 쉽지만은 않은 문제지만,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할 문제임엔 틀림없다.
어린이 산업이 어린이들을 탐욕적이고 폭력적이며 살찌게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되고, 어린이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가하는 정책 결정의 복지 정책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이론과는 정 반대로, 학교 앞 문구점에선 오늘도 아이들이 중국산의 정체 불명 100원짜리 제품을 빨면서 등하교를 한다.

독슬레이 지역의 비교적 우수한 공립 아이들과, 보스턴의 비교적 소득이 낮은 아이들을 비교해 보니,
보스턴 아이들이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많이 보며 게임에 많이 매달린다고 한다. 특히 미디어 사용과 용돈 사용에 부모와의 갈등이 적다는 '상관 관계'가 드러난 연구가 실려있다.

물론 이 상관관계 - 소득이 낮은 아이들이 소비 문화에 그대로 노출되기 쉽다는 - 가 소득이 낮은 부모의 자녀들이 실패한 인생을 살거나 건강을 해칠 확률이 높다는 인과관계로 이어질는지에 대한 결론은 뒤로 미루고 있지만, 상관관계가 고착화되면 곧 인과관계가 됨은 명약관화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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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의 성모마리아
데브라 딘 지음, 송정은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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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뻬쩨르부르그가 된 레닌그라드.
굳이 제목을 레닌그라드의 성모마리아라고 지은 것은, 공산주의 혁명의 영웅 레닌을 기릴 만큼 소련 제2의 도시에서 일어난 일에 무게 중심을 얹으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지어 본다.

이 책의 표지에 <미국 문단이 주목하는 신예 작가, 데브라 딘 감동 소설>이라고 작지만 잘 띄게 적어 두었다. 랜덤하우스란 출판사의 장삿속이 잘 보인다. 감동 소설이라는 분야가 요즘 생겼나? 감동의 프랜차이즈랄까? 그리고 소설의 맨 앞에 작가 서문이나 뭐, 한국의 독자를 만나 반갑다는 이런 글 대신, 나는 잘 모르는 어떤 아나운서의 애독일기를 하나 붙여 두었다. 그래도 어느 아나운서처럼 제가 번역했다고 안 하고 3번 열심히 읽었다고 했으니 조금 용서해 줄 수 있겠다. 정말 세 번 읽지 않았대도 말이다. 회사 욕은 나중에 또 하자.

이런 사소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 참 좋았다.

우선, 예술 작품을 설명하는 큐레이터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부분을 읽으면서는 마치 유럽의 궁전이나 박물관을 들렀을 때 가이드들이 열심히 주워 섬기던 목소리들과 오버랩되는 경험이 되살아나는 듯, 현장감있게 생생하게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달착지근한 초콜릿 하나를 시식 코너에서 나눠주고는, 그걸 살 여유도 주지 않고 재빨리 돌아서 사라진 여인의 향기처럼 또다른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밀어넣은 채로... 아, 빨리 큐레이터의 달콤하고 아름다운 설명을 더 듣고 싶은데...

이야기는 반전되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할머니 이야기로 이끌린다. 이 소설의 주축이 되는 이야기는 마리나의 치매 이야기다. 젊었을 때의 기억, 전쟁의 기억, 전쟁 속에서 미술관을 지키던 기억은 분명한데도 딸의 얼굴도, 딸의 이혼도, 손자의 결혼 사실도 갑자기 낯설어지는 삶이란... 전날 밤의 과음으로 기억이 끊겼다가 불현듯 소파에서 눈뜰 때의 기분과 같을까? 정신차리고 보니 갑자기 내가 있는 곳이 낯설고 주머니에 지갑도 휴대폰도 없어졌을 때의 황망함처럼...

소설은 총 10장으로 진행되는데, 그 1장이 상실이고, 9장이 실종이다. 기억의 상실과 함께 주인공의 인생이 실종되어버리는 과정 속에서 과거의 기억과 단속적이지만 현재의 상황들이 파편적으로 나열되고 있다. 그렇지만 작가는 '기억 상실'의 과정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 10장의 제목을 <초록의 세상>이라고 붙인 것으로 보아, 기억의 상실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우리가 정말 기억해야할 것이 얼마나 될까? 내 옆자리에 누워서 베개에 머리를 비비대며 숨을 고르고 잠들어있는 아내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날마다 만나고 인사하며 지내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생긴 '일들'이 과연 기억할 만한 가치들이 있는 것일까?

마리나가 잊지 않았던 미술관의 기억들, 남편이 된 드미트리와의 추억들, 영원히 각인되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미술품들의 생생한 모습들처럼, 그 '초록의 세상'이란 이름의 '절대 경지'를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런 주제에 헛소리를 지껄인다고 조롱의 대상으로 삼고 만다. 이런 시시한 것이 인생일는지도 모른다.

기억할 필요조차 없는 관계들의 집대성, 우리의 뇌는 말랑말랑한 젤 상태의 전해질이라 순간순간 찌릿찌릿하는 끝없는 전류의 흐름으로 '기억'이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기억이란 것이 전류의 작용이기때문에 절대적으로 완벽하게 인쇄된 고형물이 아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기억은 모두 착각일 수 있다. 착각이 무가치하듯이 모든 기억은 무가치할 수도 있겠지.

뭐, 이런 생각을 재미있게 쓴 소설이다.
전쟁 이야기가 지긋지긋하게 나오지 않아서 좋았고, 앞에서 쓴 대로 미술품을 설명하는 카랑카랑하면서도 온화한 목소리를, 그 뚜벅거리는 러시아어로 떠들어대는 듯한 느낌으로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가슴아픈 것은, 한반도에 남은 문화재의 부실함에 대한 것이었다. 유럽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모두 '장물 전시장'에 불과하기도 하지만, 암튼 그 궁궐이나 미술관, 박물관의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 될 법한 것들이었다. 러시아의 황제들 역시 그런 사치의 극을 달리며 살았으리라. 중국의 베이징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땅에 건조된 건물들은 그 숱한 전쟁의 참화에 남아난 것이 없다. 모두가 개발독재 시절에 지어진 것들이어서 시멘트 냄새가 풀풀 난다. 어느 구석인가는 늘 공사중이며, 박물관 안에 들어가서 돌아다니는 동선 자체가 관공서를 헤매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청원 경찰복같은 옷을 주워입은 관리인들의 모습은 아직도 문화에 대해서 깜깜한 모습들이다. 융단 폭격으로 초토가 된 북측의 건축물들, 그 '궁전'들이야말로 더욱 거대하고 웅장하기만한 돌덩이임은 한반도 문화 예술의 가장 큰 비극이 아닐까 싶다. 일제는 경복궁을 깨부수고, 다시 독립 정부는 총독부 건물을 깨부수는 역사의 악순환이 이 땅의 구석구석을 더럽히고 있다. 일본놈들은 산의 혈맥마다 쇠말뚝을 박았다더니, 미국놈들이 비켜준 군사 시설의 땅 속에는 온갖 오염물질들이 차고 넘치는 모양이다. 정말 <괴물>이 등장할 법한 무서운 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세계대전 중인데도, 더 안전한 곳으로 미술품을 옮기는 기차가 몇 차례나 오고간다는 이야기, 있지도 않은 미술품들을 '인민'을 위하여 풍부한 상상력으로 설명해주는 아름다운 큐레이터의 이야기, 오랜 역사를 가진 궁전이 미술관으로 쓰이게 되는 역사의 유전 등은, 아름다운 덕수궁의 아기자기한 돌담 안에 어색하기 그지없는 석조전으로 남은 한국의 건축물의 몰개성에 대하여 가슴아픈 회한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난 가끔 시립박물관과 유엔 공원, 문화회관을 잇는 동선으로 산책을 나가곤 하는데, 그 건물들의 네모 유전자와 직선 지향성에 대하여 매번 실망이다. 역사의 때가 좀 묻은 건물들을 한 100년 후의 아이들은 구경할 수 있으려나?

재미있는 소설을 읽으면서, 재미없는 생각들을 하는 게 내 특기인지도 모르겠다.^^
잘 쓴 소설을 <잘 못 만든> 출판사에 몇 마디 잔소리를 내두르며 리뷰를 마친다.
책을 좀더 뜸을 들여서 만들지 못한 흔적이 구석구석 남아있다. 한두 번만 더 교정을 꼼꼼하게 봤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랄까. 처음 한두 번은 그냥 스쳐지났는데, 나중엔 굳이 표시를 해 두면서 읽었다. 정신 좀 차리면 좋겠다.
8쪽 3째줄 : 윤기 흐르는 모을 드러냅니다.(모양, 모습인가본데, 말도 안 되는 글이 많이 등장한다.)
137쪽 아래서 5째줄 : 한눈에 부드러워지는 느낄 수 있었다. (부드러워지는 것을 이겠지?)
278쪽 아래서 2째줄 : 갈 증을 띄어서 썼다.(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신뢰성을 잃기로 들면 대책없는 게 인간 맘이다.) 띄어쓰기가 안 지켜진 곳은 제법 있는데 다 지적하진 못하겠다.(혹시 돈 준다고 찾아 달라면 꼼꼼하게 읽겠지만 ㅋㅋ)
285쪽 6째줄 : 아뇨.. 마침표가 두 개. (왜 그런 거만 보냐고 따지면 할 말 없다.)
333쪽 2째줄 : 폭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있기 위해... 보호하기 위해겠지...

그리고, 가운데 넉 장 들어있는 그림들의 인쇄상태가 깨끗하지 못하다.
내가 빌려본 책은 네 페이지는 글자가 선명하지만, 네 페이지는 글자가 흐려 읽기 힘들 지경이다.

랜덤 하우스! 제발 책을 띄엄띄엄 만들지 말 지어다.
random이 띄엄띄엄 되는대로여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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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06-03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문이 상아탑속에 갇히면 안된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곳이죠. 감사히 읽었습니다.

마노아 2007-06-04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피가 더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잘 보았어요. 자료 좀 담아갈게요.

글샘 2007-06-04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맞아요. 몸으로 하는 공부인거죠. 저도 우연히 이 자료를 보고 부지런히 복사해서 퍼날랐습니다. 저게 그림이 15장이나 되거든요.^^
마노아님... 피가 더워지셨다니... 다행인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