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소나무와 굴뚝새 동화가 좋은 친구들 3
권정생 외 지음, 김혜영 그림 / 여우오줌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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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소나무와 굴뚝새...라는 작품이 있다.
소나무를 둘러싸고, 조상님이 고집센 나무여서 가을이 돼도 시퍼렇다고 놀리는 나무들...
어느 날 굴뚝새가 날아와, 변함없는 소나무에 깃들인다.
권정생 님의 작품인데, 간결하지만, 고집스런 삶, 절개의 필요함을 큰 소리로 알려 주신다. 

이주홍의 '가자미와 복쟁이'는 가자미가 납작해진 이유와 복어 배가 볼록한 이유를 붙인 동화다.
중학교 책에 실렸던 '황새와 개미와 소새와...'를 쓴 채만식과 비슷하다.
두부장수 가자미와 기름장수 복쟁이는 욕심쟁이여서 서로의 물건을 훔쳐 간다.
욕심에 욕심을 내던 가자미는 기름틀에 눌려서 납작해지고, 복쟁이는 두부콩을 너무 먹다 배가 볼록해진 이야기.
일제시대 들어온 '가마니'란 말 대신에 '섬'이란 우리말을 쓰는 말투가 곱다. 

게가 되고 싶은 새우, 조장희
새우도 게도 아닌 어느 녀석이 '게새우, 게재우, 게재, 가재'가 된 이야기.
미운오리새끼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들국화와 반딧불이, 이준연...은 바위나리와 아기별...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금단추처럼 노란 얼굴을 한 들국화를 사랑하는 온갖 곤충에 치여서 반디는 외롭지만, 밤이 되면 반디는 금단추 같은 별을 닮은 들국화를 사랑하러 와 준다. 자신감이 없어 오지 못하는 반디의 이야기...
근데, 나는 이 아름다운 반디...를 '반딧불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간다.
반디와 반딧불... 얼마나 예쁘냐... 그걸 꼭 반딧불이라고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은 새해 복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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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1-29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마지막 문장에 추천입니다.
큰딸 중1때 어머니독서회를 '반딧불'이라고 명명했는데, 졸업시키고 둘째 2학년때 다시 갔더니 어느틈에 '반딧불이'로 둔갑시켰더라고요. 작년에도 시정을 요구했는데 안됐어요. 우린 개똥벌레 독서회가 아니고 개동벌레 똥꼬에서 나오는 불빛을 의미한다 해도 막무가내~ 독서회 이름 바꿀려면 회장을 해야 할까?ㅎㅎㅎ
 
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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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로 이 책은 시작한다. 

책을 읽는 행위는 인간이란 '종'이 동물이란 '유개념'의 다른 종들과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종차'로서 인간을 정의할 수 있는 특성이기도 한데... 그럼... 읽지 않는 인간은 무엇인가... 

한국이란 나라에서 사는 일도 피곤하지만,
한국이란 나라에서 팔리는 책들이란... 우스울 때도 많다.
어쩌면, 성경(이건 미친 일이다. 교회쟁이들은 툭하면 성경을 몇 권씩 사서 선물하고 하더라. 헐~)이 많이 팔린다고 하지만, 그건 편집광들이 벌이는 일종의 돌려막기니 그렇다 치고, 운전면허를 위한 크라운 출판사의 문제집이 2등을 차지하며... 그 외의 가장 큰 시장은 아마도... 고등학교 입시 문제집이 아닐까 싶다. 그 뒤로 만화책이나 어린아이들의 책, 교육청 지정 독서 경시대회 대상도서 같은 것... 

이번 겨울에 강유원과 책읽기란 강좌를 들으면서, 나처럼 닥치는 대로 독서하기가 좋지 못한 습관임을 많이 생각한다.
독서를 통하여 세계를 바라보는 <창>의 프레임을 만들고, 그 프레임이 제공하는 세계관으로 세상을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독서의 존재 목적이 되어야 하는데... 나의 책읽기는 그닥 목적적이진 않았다. 우선,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것들...(그것이 서양 편향적이든 아니든 간에)에 대해서 겁이 많았고, 사실 그런 것들을 읽으려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노력에 비해서 결실이 없었던 비극적 과거가 고전을 쉽게 손에 들어오게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번 연수를 통하여 고전에 대해 조금이라도 만만한 마음을 가졌으니 그건 좋은 일이다.
엊그제 부산시민도서관의 e-book을 검색하다가... 제법 쓸만한 책들이 많은 것을 발견했다.
전에 남구 도서관과 부전 도서관을 찾았을 때는 별로 볼 것이 없었는데 말이다.
전자책이 비주얼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손쉽게 볼 수 있고, 여러 번 찾아볼 수 있단 점에서 좋은 점도 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종이책을 넘기는 맛, 그리고 책꽂이에 꽂아두고 뿌듯해하는 맛은 떨어진다.  이 책은 전자책으로 보기엔 좀 아쉬운... 그러나 한번 읽는 책이지, 사기까지는 좀 그런... 책이다. 가치가 없단 얘긴 아니다. 연수도 듣고 했으니 한번 읽고 더 넓은 지평으로 독서의 눈을 넓혀야 하리란 이야기다. 

'작품 work'이란 용어가 'text'란 용어로 대체되어 쓰인 것이 제법 오래 되었다.
작품이라고 하면... 작가가 공들여 창작한 '물 자체'의 것이란 의미가 담겨있는데,
텍스트는 놓인 상황에 따라... 곧, context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가 있다. 

이 책에선 책을 컨텍스트에 따라 읽기...라는 강유원의 시점을 따라 여행하는 것이다.
좀 내용이 튼실해서 고전 읽기 특강 형식으로 300페이지 정도 되었으면 좋았겠는데, 93페이지로 끝나는... 용두사미 격의 책이어서 조금은 실망스럽다.  

길가메시서사시나 모세5경, 일리아스와 플라톤의 국가론 읽기는 고전을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하는지를 친절하게 읽어주는 글이다. 이런 글들을 좀더 세밀하게 적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 시대의 매체, 곧 진흙판과 파피루스 등에 대해서도 살피고 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그리고 중세의 신국, 신학대전, 미켈란젤로를 그야말로 간결하게 살피고 다시 중세의 출판 문화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다룬다. 

리바이어던과 국부론, 종의 기원으로 책은 마무리되는데... 마리앙투와네트와 결합된 포르노그라피를 읽으면서... 글자로 나타내어진 것과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를 제대로 읽는 일의 중요함과 어려움을 다시 생각한다.  

읽는 일은, 제대로 읽는 일을 배운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누군가는 자기 입장을 강변하려 거짓을 과장하여 적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일은 독서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용산 참사를 두고, 용역의 잘못이 있는지 조사한다는 둥, 다시 군포 살인 용의자를 엄청 강조하는 등 하면서 얄궂은 경찰청장 사퇴의 물타기를 조장하는 작금의 글자들을 보면... 읽지 않는 자 망할 것이 뻔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전을 열심히 읽으라고 해 놓고는... 고전 속을 헤엄친다고 올바른 눈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 아니라는 마지막 말들은... 그만큼 책읽기 작업의 어려움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겠다. 

이 척박한 땅에서 자기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바른 방향으로 지어 나갈 수 있도록, 철학적 바탕을 가진 독서를 강조하는 강유원 선생의 작업이 더욱 탄탄한 대중적 기반을 닦아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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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1-26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글샘님 강샘에게 단단히 빠지셨군요. 저도 한번 뵙고 싶네요.

순오기 2009-01-29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고전읽기~~~~ 어렵고 겁나지만 매력있는 독서!
내가 제대로 읽어내고 있다곤 생각되진 않지만 열심히 읽어내려고 노력은 한답니다.^^

marine 2009-02-24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인데 글샘님 서재에서 만나보니 반갑네요. 다시 읽어 봐야겠어요.
 
청소년을 위한 이기는 습관
전옥표 지음 / 쌤앤파커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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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처음에 표제로 위닝 해빗이라고 크게 적어 뒀기에, 외국 작가의 책을 번역한 건줄 알았다.
근데, 읽다 보니... 이거 원, 한국 작가의 책인데 원래 제목을 위닝 해빗이라 붙인 거였다. 헐~ 

청소년을 위해서...
이기는 습관을 들게 해 주는 것은... 물론, 들일 수 있다면 바람직할 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상황에 따라 윈윈 전략 구사가 가능하다면, 그렇게 해야겠지만, 
정말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정답은 끝도 없이 많아진다. 

청소년들에게 마시멜로의 유혹을 뿌리치라는 이야기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랑 다를 바가 없다.
꾸준히 노력하면 승리한다는 것.
그러나... 개미와 베짱이의 교훈이 뒤집어진 것이 예전 일이다.
요즘은... 5년 전의 메모리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변화의 시대다.
아이들에게 이기는 습관이란 어떤 것일까? 

이 책의 행복, 성취, 프로, 전략, 실행, 규범, 승리 등의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딱딱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요즘 아이들에겐 좀더 재미난 이야기로 들려줄 필요가 있지 않나 싶은데...
아이들에게까지 처세술 지름길을 가르친다는 것은...
토익과 컴퓨터로 대학생을 평가하는 것 이상으로 가엾은 일이다. 

아이들에게 콱, 막힌 미래를 들이대면서 무조건 이기라는 이야기는 너무 잔인하다.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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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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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몬드 카버의 전작들을 읽은 적은 없다.
그렇지만, 이런 멋진 소설들을, 아니, 이런 멋진 단편 소설들을 지을 줄 아는 작가를 만나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이 책을 읽어볼까? 하고 생각하게 해 준 것은 아...마...도...(점점 불확실해져가는 나의 기억이란...ㅠㅜ) 오즈마님 글이 아니었을까... 생각하지만, 그것이 확실하진 않다. ㅠㅜ 

지난 금요일, 고3 올라갈 아이 녀석이 몹시 속을 썩이고 있다는 오선생님과 평소 친하던 교감샘과 셋이서 술독에 빠졌다 나왔는데, 토요일에 몸과 마음이 몹시 허했다.
졸다 깨다 전날 시작하다 만 대성당을 펼쳐들었는데...
누워 읽다, 비스듬히 앉아 읽다, 결국 바로 앉아서 그자리에서 다 읽고 말았다. 

아, 단편이란 이런 것이다.
어느 날, 어떤 사람에게, 어떤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날이 그이에게는 인생에서 잊기 어려운 특별한 기억을 가져다 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특별할 것 하나도 없는 사람이고, 그 일은 그에게 즐거움보다는 당황스럽거나 다소 낯설면서 그를 절망하게 만들기 쉬운 그런 시츄에이션이기가 쉽다.
갈등은 생기지만, 그 갈등은 얼마나 해소되지도 않은 채, 소설은 마친다.
그러면서 말하는 것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라고...
빵집 아저씨와의 만남은, 살인이라도 저지를 듯이 흥분했던 세상의 막장까지 느끼는 듯하던 부부에게 빵을 몇 개나 먹게 만들고... 그것이 도움이 됨을 읽게 하는... 힘이 있다. 

체호프와도 비교된다고 하는데...
내 의견은, 음 체호프나 오 헨리에 비하자면 뭐랄까... 좀더 현실적인 리얼리즘에 가깝다고나 할까.
체호프의 작품이 전형적 인물에 가까운 단편이란다면,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들은 훨씬 단편화된 현대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쓸쓸함이 묻어있다.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묻어나는 낯선 곳의 어색함이 그의 글에도 있달까? 

현대인은 늘 낯선 곳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낯선 일들은 더욱 많이 닥치고...
그것이 미국이든 한국이든 공동체 생활을 잃어버린 곳이라면 변함없이 찾아드는 불청객이리라.
이 불청객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들을, 그런 상황을 불현듯, 만들어 내면 인물들과 상황이 서술의 힘을 생성해 낸다는 글쟁이의 이야기는 인생의 짠~한 면들을 가감없이 담고 있다. 

어느날 툭 불거진 사건에 낯설어하는 이들의 이야기들을 더 찾아서 읽고 싶다.  

아, 레이몬드 카버의 글쓰기 이야기를 하나 덧붙여 둔다.
그리고 '제로'라는 분의 글에서 작가에 관련된 부분이 있어서 옮겨 둔다. 하루키 글이라나...
혹시 글쓰기에 몰두하는 이가 이 글을 본다면, 도움이 되도록...
어느날, 우연히 툭, 하고 만나는 글에서 이 글을 보고 기분이 좋은 사람도 있도록...^^  

‘노동자 계급 집안에서 태어난 젊은 시절 여러 가지 가혹한 육체노동을 경험하였지만, 그 후 인생의 대부분을 그는 도시에서 문학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그는 천연덕스런 ’문단‘에는 친숙해질 수 없는 무엇을 느꼈고 주변 노동자들의 생활에서는 공감과 동정을 품었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는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갈 수 없다는 냉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나날의 육체노동이 얼마나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그는 자신의 체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인품이나 작품에는 그렇듯 앤비밸런트(Ambivalent)하고 떨쳐 버릴 수 없는 초라한 젊음 같은 것이 녹아 있다.’
- 책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은 브래지어 위를 흐른다.(무라카미 하루키)” 중에서.

http://cafe.daum.net/bwnovel/549M/15?docid=1Dg2J|549M|15|20080416062140&q=%B7%B9%C0%CC%B8%F3%B5%E5%20%C4%AB%B9%F6&srchid=CCB1Dg2J|549M|15|20080416062140 

글쓰기에 대하여

                                 레이몬드 카버 

 
1960년대 중반, 나는 긴 대화체의 소설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이 상당히 힘겹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소설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읽는 것조차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한 번에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바람에, 더 이상 소설을 쓸 정도의 인내심을 발휘할 수가 없게 되었다. 여기에는 얽힌 사연이 약간 있지만, 이 자리에서 모두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지겨울 것 같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내가 시나 단편 소설에 집착하게 된 이유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치고 빠지는 식의, 혹은 머뭇거림 없이 뛰쳐나가는 식의 방법만이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무렵, 그러니까 20대 후반의 나이에 원대한 야심을 잃어버린 것과 관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렇게 된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작가가 발전해 가기 위해서는 야심과 약간의 행운이 큰 도움으로 작용한다. 지나치게 큰 야심과 지나치게 더러운 운세는 치명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물론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떤 작가들은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작가들 중에서 전혀 재능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사물을 바라보는 정확하고 참신한 시선, 또한 그러한 시선을 표현하기 위해 적절하게 맥을 짚어내는 것 등은 재능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물론 ‘가프가 본 세상 The World According to Garp'은 존 어빙이 본 신비로운 세상에 다름 아니다. 그 밖에도 플래너리 오코너, 윌리엄 포크너, 어네스트 헤밍웨이 등이 바라본 또 다른 세상도 있다. 치버, 업다이크, 싱어, 스탠리 엘킨, 앤 비티, 신디아 오지크, 도널드 바셀미, 메리 로빈슨, 윌리엄 키트레지, 배리 한나, 워슐라 K. 르귄 등도 모두 특유의 독자적인 세상을 만들어 낸 작가들이다. 위대한 작가, 심지어는 아주 좋은 작가들도 모두 자신의 고유한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을 창출해 낸다.  

이것은 스타일하고도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스타일 하나만을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쓰는 모든 것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백한 서명이다. 그것은 오직 그 자신의 세계일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작가와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 주는 기준 가운데 하나이다. 다시 말하면 재능이 작가를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사물을 바라보는 특별한 방법을 가진 작가, 또한 그러한 방법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작가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삭 디네슨 Isak dinesen은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글을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언젠가 나는 조그만 카드에 그 말을 적어서 내 책상 옆 벽에 붙여 놓을 생각이다. 지금도 벽에는 그런 카드들이 몇 장 붙어 있다. ‘진술의 기본적인 정확성은 글쓰기의 유일한 도덕이다-에즈라 파운드 Ezra Pound' 물론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만약 한 작가가 ’진술의 기본적인 정확성‘을 확보하고 있다면 적어도 길은 제대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내 책상 맡에는 체홉의 단편에서 따온 문장 하나가 적힌 카드도 붙어 있다. “.... 갑자기 모든 것이 그에게 있어 명료해졌다.” 나는 몇 안되는 이 단어들이 경이와 가능성으로 채워져 있음을 발견한다. 나는 그 단순한 명징성을 사랑하고, 그것이 암시하고 있는 계시를 좋아한다. 거기에는 또 미스터리도 포함되어 있다. 그 전까지는 무엇이 그렇게 불명료했을까? 왜 그것이 지금에야 명료해졌을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한 갑작스런 깨달음으로 인해 초래되는 결과들이 있다. 나는 날카로운 안도감, 그리고 나름대로의 예감을 느낀다.  

작가 제프리 울프 Geoffrey Wolff가 문학도들을 향해 ‘값싼 트릭은 안된다’고 말하는 것을 얼핏 엿들은 적이 있다. 그 말 역시 카드에 적어서 붙여야 한다. 나 같으면 ‘값싼’이라는 단어 하나는 빼 버릴 생각이다. 그저 ‘트릭은 안된다’하고 마침표를 찍으면 그만이다. 트릭이란 결국에는 지겨운 것일 수 밖에 없다. 집중 시간이 짧은 것과도 관련이 되겠지만, 나는 원래 지겨운 것은 좀처럼 참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극도로 현란하게 기교를 부린 문장, 또는 시시한 농담 같은 글은 나를 금방 잠들게 만든다. 작가에게는 트릭이나 교묘한 잔머리가 필요 없다. 물론 작가가 반드시 그 지역 일대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작가라면 다소 멍청하게 보일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가끔은 절대적이면서도 소박한 경이로움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입을 쩍 벌리고 이런저런 사물-일출도 좋고 낡은 구두 한 짝도 좋다-을 멍하니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몇 달 전 존 바스John Barth는 ‘뉴욕 타임즈 북 리뷰’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소설 창작 세미나에 참석한 학생들 대부분이 ‘형식의 혁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즘은 별로 그런 분위기가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그는 1980년대의 작가들이 이른바 ‘구멍가게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약간의 우려를 표명했다. 그의 걱정은 실험 정신이 자유주의와 함께 그 기세를 잃어 가는 현상과도 관련이 있다. 나는 소설 창작에 있어 ‘형식의 혁신’이라는 우울한 논의를 접할 때마다 은근히 신경이 곤두서곤 한다. 글쓰기에 있어 ‘실험’이 경박함과 가소로움, 혹은 모방에 대한 면죄부로 기능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더욱 고약한 것은, 실험이란 미명 아래 독자를 잔혹하게 짓밟고 소외시키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대개의 경우 그런 글은 세상 소식을 전혀 전해 주지 못하며, 혹은 모래 언덕 몇 개와 도마뱀 몇 마리는 있으되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 사막 풍경의 묘사에 그치고 만다. 그런 곳은 인간이라고 할 만한 그 무엇도 살고 있지 않는, 그저 극소수의 과학 전문가들에게나 흥미있는 장소일 뿐이다.  

소설의 진정한 실험이란 원초적이고, 힘든 노력의 대가로 얻어지며, 기쁨의 원천이 되는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의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예를 들면 바셀미의 방식-을 다른 작가가 추구할 수는 없다. 그런 방법은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단 한 사람의 바셀미가 있을 뿐, 만약 다른 작가가 혁신이라는 이름 아래 바셀미 특유의 감수성이나 무대 장치를 도용하려 했다가는 혼란과 재앙, 최악의 경우에는 자기 기만을 초래할 수 있을 뿐이다. 참된 실험이란 파운드가 주장한 것처럼 ‘새롭게 만드는’ 과정이자 스스로의 히믕로 작가들이 멀쩡한 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들과의 접촉을 유지할 수 있기를 원할 것이고 자기네 세계에서 우리네 세계로 새로운 소식을 전달하기를 바랄 것이다.  

시나 단편 소설에서 지극히 상식적이면서도,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여 지극히 상식적인 사물을 글로 표현하는 것, 또한 그러한 사물-이를테면 의자나 창문의 커튼, 포크, 돌멩이, 여자의 귀걸이 등-들에 거대하고 놀라운 힘을 부여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또한 독이 없는 대화를 통해 읽는 이의 등공에 오싹한 한기를 전달하는 글을 쓰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이 예술적 기쁨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작가로는 나보코프 Nabokov를 들 수 있다. 내가 가장 흥미를 가지는 것이 이러한 종류의 글쓰기이다. 나는 실험이란 기치를 내걸건 혹은 애꿎은 리얼리즘을 내걸건 간에,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되는 대로 써내려가는 식의 글쓰기는 무척 싫어한다. 아이작 바벨 Issac Babel의 뛰어난 단편 ‘모파상의 친구’에서, 화자는 소설 쓰기에 대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긴다. “어떠한 무쇠라 할지라도 제자리에 찍힌 마침표만큼이나 강력한 힘으로 사람의 심장을 관통할 수는 없다.” 이것 역시 카드에 적어 붙일 만한 말이다.  

에반 코넬 Evan Connell은 자신이 쓴 단편을 쭉 읽어 내려가며 쉼표를 하나하나 지웠다가, 다시 한 번 읽으며 쉼표를 원래 있던 자리에 되살려 놓는 과정을 거치면 단편 하나가 완성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무엇을 하건 그런 식으로 일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자신이 해놓은 일에 대한 그 정도의 관심은 충분히 존경할 만하다. 어차피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은 단어들밖에 없으니, 이왕이면 구두점 하나라도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제자리에 가 박히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만약 단어들이 작가 자신의 억제되지 않는 감정으로 뒤죽박죽이 된다면, 혹은 기타 다른 이유 때문에 정확하지 못하거나 명확하지 못하게 된다면, 독자의 눈은 바로 그 단어 위에서 미끄러져 버리고 만다. 결국 작가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독자 자신의 미적 감각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헨리 제임스 Henry James는 이러한 종류의 불운한 글을 ‘허약한 설명서’라고 표현했다.  

나에게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혹은 편집자나 마누라의 성화 때문에 서둘러 책을 써야 한다고 털어놓는 친구들이 더러 있다. 말하자면 그것들이 아주 뛰어난 글을 쓰지 못하는 변명인 셈이다. “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좀더 좋아졌을 텐데.” 나는 소설 쓰는 친구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말문이 막혀 버렸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사실은 안하지만- 말문이 막힌다. 어차피 그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만약 작가가 자신의 모든 힘을 모조리 내어, 쓸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을 쓰지 못한다면 도대체 그 사람은 무엇 때문에 글을 쓰는가? 결국 우리가 무덤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과 그 힘들었던 노동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나는 그런 말을 한 내 친구에게, 제발 부탁이니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좀 더 쉽고도 정직한 방법이 반드시 있을 터이다. 그러기가 싫으면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글을 쓰고, 일단 쓴 다음에는 어떠한 정당화나 핑계도 내세워서는 안된다. 어떠한 불평도, 어떠한 설명도 필요치 않다.  

플래너리 오코너 Flannery O'Connor는 ‘단편 소설 쓰기’라는 소박한 제목이 붙은 에세이에서, 글쓰기란 발견의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는 단편 소설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자기가 어디로 가려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자기가 보기에는 과연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무언가를 쓰기 시작할 때 자신의 목적지를 알고 있을지 의심스럽다고도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착한 시골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예로 들었다. 작품이 끝나기 직전까지, 자기도 그것이 어떻게 끝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목발을 짚은 철학 박사가 이 작품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아침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두 여인에 대한 묘사 부분을 쓰고 있었는데,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 둘 가운데 한 여인에게 목발을 짚은 딸을 만들어 주고 말았다. 중간에 나는 성경책 판매원을 끼워 넣었는데, 나에게는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하려는 건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가 목발을 훔치는 장면의 10줄 위를 쓸 때만 해도, 나는 그가 목발을 훔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제서야 나는 이야기가 그렇게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 년 전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녀가 이런 식으로 소설을 쓴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것이 나만의 비밀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거기에 대해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편 소설을 쓸 때 이런 방법을 이용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나 자신의 결점이 드러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녀가 이 문제에 대해 털어놓은 글을 읽고 커다란 안도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비록 처음 쓰기 시작할 때는 첫 문장밖에 알고 있지 못한 상태였지만, 꽤 괜찮은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이는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았던 적이 있다. 그 며칠 전부터 내 머리 속에는 첫 문장이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그는 진공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다.’ (레이몬드 카버 전집 제 2권 ‘숏컷’에 수록된 ‘당신도 내 입장이 되어봐’의 첫문장이다; 옮긴이) 나는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또 내가 그 이야기를 쓰고 싶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그것을 쓸 시간만 낼 수 있으면, 반드시 그렇게 시작되는 작품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원래 시간을 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하루 종일-12시간, 심지어 15시간도 좋다-시간을 낸다. 그렇게 해서 나는 어느 날 아침 책상에 앉아 그 첫 문장을 썼다. 그러고 나니 금새 또 다른 문장이 그 뒤에 달라붙었다. 나는 시를 쓸 때처럼 그 작품을 썼다. 한 줄 쓰고, 또 한 줄, 그리고 또 한 줄을 써나가는 것이다. 머지 않아 나는 단편 하나를 볼 수 있었고, 그것이 내 작품, 내가 쓰고 싶었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단편 소설에 어떤 위협이나 협박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소설에는 약간의 협박이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그 작품이 널리 유포되는데도 도움이 된다. 긴장 역시 꼭 필요하다. 무언가 절박한 상황, 처절한 행동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소설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설 작품 속에서 긴장을 만들어 내는 것 가운데 하나는 가시적인 행동을 표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단어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나 다 털어놓지 않은 것, 그저 암시만 된 것, 사물의 평형한(때로는 망가지고 뒤집어진) 표면 아래 감춰진 풍경 등에서도 그런 긴장이 발생한다.  

프리체트 V.S.Pritchett는 단편 소설을 ‘눈꼬리로 힐끗 본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힐끗 본다’라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무언가를 힐끗 본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통해 생명력이 부여되고 그 순간을 조명하는 무언가가 탄생한다. 나아가 운이 좋으면-또 운을 들먹인다-보다 깊이 있는 결과와 의미에 도달할 수도 있다. 단편 작가의 임무는 자신의 모든 힘을 이‘힐끗 보는’데 투자하는 것이 균형 감각과 사물의 합당성에 대한 감각이 길러진다. 사물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도 감지할 수 있다. 또한 명쾌하고 구체적인 언어, 디테일한 부분에까지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런 숙제를 해결할 수 있다. 디테일은 구체적이고 의미를 전달해야 하므로, 언어는 정확하고 정밀하게 구사되어야 한다. 단어는 지극히 평범하게 들릴 정도로까지 정확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임무에는 변함이 없다. 제대로 사용된 단어는 모든 음계를 아우를 수 있는 힘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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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9-01-26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cafe.daum.net/morog
이런 레이몬드 카버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카페도 있습니다.

비로그인 2009-01-26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 님 <글쓰기에 대하여> 담아갈게요. 좋은 글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글샘 2009-01-26 21:40   좋아요 0 | URL
이 글 멋지죠? 기회가 되면 대성당도 함 읽어 보세요. ^^
저도 그 이전 소설집 한번 보려고 합니다.
 
리버 보이
팀 보울러 지음, 정해영 옮김 / 놀(다산북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설날이지만, 동생네가 결혼 5년 넘어서 이제 첫 아기를 가져 좀 쉬어야 한다고 안내려오는 바람에 조용한 설을 맞았다. 

명절이래야, 차례도 지내잖은 우리집은 동생 내려오면 같이 한 잔 하는 게 전부지만...
그러기 위해서 전도 좀 부치고 했지만...
올해는 정말 조용하게 쉰 기분이다. 

우연히 집어든 책인데...
며칠 전에 e-도서관에서도 본 책이다.
무슨 책이든 인연이 되면, 자꾸 내 눈앞에서 알짱거린다.  

강물 소년...
영국 작가가 쓴 청소년 소설인데...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 소녀의 눈으로 읽히기보다,
할아버지의 시선으로, 그의 마음이 되어 책을 보게 되었다. 

어려서 매력적인 강물에 빠져들어 살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는 온 가족을 잃는 화재사건 이후로 고향을 떠나 살았다.
이제 나이가 많이 들고,
건강도 거의 잃게 된 그의 눈엔 매일 고향의 푸른 강물이 잊히질 않는다.
차마 꿈엘들 잊히지 못하던 그 강을 향하여 아이들의 휴가를 빌미삼아 고향을 향해 가는데...
하필이면, 그날 몸도 안 좋아진다. 

손녀딸 제스는 그에겐 입안의 혀처럼 사근사근한 아이이며,
강물에 온 마음을 다 빼앗겨 버린 그처럼 손녀딸 제시도 수영을 몹시 좋아한다.
제스에게 다가온 물속의 소년... 리버 보이...
할아버지는 진즉에 그 본질을 알고 있었지만,
그림 속에 리버 보이를 남기고자하는 고집에 제스와 소통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결국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한 장의 그림을 손녀딸의 손을 빌려서 완성한다.
어릴 적 친구는 그 시커먼 추상화 속에서 할아비의 자화상을 읽어내고,
리버보이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제스는 강물을 따라 헤엄쳐 바다까지 이른다는 이야기. 

한편 환상적인 이야기지만, 한편 잔잔한 감동을 준다.
우리 삶은 결국 흐르는 강물과 같아서,
햇살 가득 비추이는 아름다움도 품고 있지만, 
구름 가득 낀 날, 우울한 흐름도 피할 수 없고,
빠르기도 하고 느리기도 한 굴곡을 겪으면서...
유유히 흘러 결국 바다에 이르는 그런 것이란 것을...
할아버지와 손녀딸의 교감을 통하여 이 이야기는 들려준다. 

청소년이 나오면서도 게임기가 등장하지 않아 좋았고,
휴가철이 나오면서도 술판에 고기 구워먹는 파티가 없어 좋았고,
노인들이 등장하는데도, 서글프게 소외당하지 않아 좋았다. 

짜릿함을 갈구하는 시대지만,
단출함 속에서 시원한 강물에 온몸을 맡기는 맛을 볼 수 있는 이런 소설은 드물다.
답답할 때 읽어 보면, 좋겠다.
공부하기 싫어 답답한 아이들... 아이가 공부 안 해서 답답한 엄마들...
나이 들어 삶이 막막한 사람들... 그리고, 삶이 죽지 못해 이어지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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