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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
마커스 주삭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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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소설이라기엔...
에드를 읽으면서 미치 앨봄의 <에디의 천국>이 자꾸 겹쳐졌다. 가면 갈수록 좀 그렇다. 

처음 100페이지를 읽으면서 환장했다.
우아, 뭐 이런 괴물이 다 있어?
새벽 5시가 되는데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8시엔 일어나 출장을 가야 하는데도... 

은행에서 강도를 우연히 잡아,
아니지, 멍청한 강도를 만나 우연히 유명인이 된 에드...
그에게 어느 날 카드 한 장이 배달된다.
그 카드는 메시지를 적는 우편엽서가 아니고, 그냥 트럼프 카드다.
거기 메시지가 적혀있고, 우연히 그 메시지를 따라간 에드는 거기서 세 가지 선행을 하게 된다. 

그렇게 다이아, 클럽, 스페이드, 하트가 배달되는 동안,
4*3 = 12,
너무 도식적이게도 선행이 이루어진다. 이런 대목에선 별 하나를 깎고 싶어진다.
미치 앨봄처럼, 지나치게 <윤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 아니냐... 뭐, 이런 걸 소설로 읽을 필요까지야... 하는... 그렇지만, 처음 100페이지의 감동을 아직 잊지 못하는 나로서는 별을 도저히 깎지 못한다. 에이, 그냥 주지 뭐~  

그렇지만, 역시 마녀의 한 다스는 12가 아니다. 13이다.
마녀는 자기 자신을 위한 1개를 얹는다.
빵집에 가서도 12개가 아니라 13개의 빵이 한 세트가 된다.
1+1의 욕망의 화신까지는 아니다.
12+1, 귀엽지 아니한가? ㅎㅎ  

잠자리에 들기 어려울 정도로 재미있는 책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시작해보기 바란다.
그렇다고 500페이지가 모두 재미있는 건 아니라는 것. 

알고 있니? 삶은 가슴 벅찬 의미들로 가득하다는 걸?
조금, 작위적이다. 뒤표지의 선전 문구.

앤지에게 속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앤지는 모든 것에 속해있다.(235)
아, 이럴 때, 삶은 참 피곤할 것이다. 휴 =3=3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해야할 일은 가득가득 돌아오는 하루를 앞에 둔 사람이라면...

전통은 지저분한 말이 될 수도 있다.
특히 크리스마스 무렵, 전 세계의 가족들이 모여 잘해야 몇 분 동안 함께 있는 시간을 즐긴다. 그 뒤로 한 시간 정도는 어쩔 수 없이 서로를 받아들인다. 그 시간이 지나고부터는 서로에 대한 화를 간신히 꾹꾹 누르게 된다.(373)

음, 전통에 대한 신랄한 비판,
'크리스마스 뛰어 넘기'란 소설도 있었지만, 인지상정인 모양이다. 
곧, 설이 다가온다.
설날, 가족들이 정말 화목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만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세뱃돈 두둑히 타서 피시방으로 나른 꼬마들 뿐일 것이다.

이봐, 이게 맞는 길인가?
이렇게 묻는 손님에게
모르겠는데요...
하는 택시 기사.
삶이란 그런 거다.
길을 안다고 믿는 그 작자(택시 기사나 신부나 부모나...)들도 뭘 알겠는가. 

결국 마커스 주삭이 남기고 싶었던 메시지. 

이 책을 넘어선 삶! 

이 한마디를 쓰기 위해서 달려온 작가 마커스 주삭. 귀엽다. 

윤리 교과서도 이 정도면, 미치 앨봄의 졸린 설교에 비해 맛있게 조린 과자같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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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해서 머나먼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72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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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하면,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이 구절이 떠오른다.
옛날에, 내가 한창 젊던 시절에도 영원한 루머라는 삶에 대해서 고민하던 때가 있었기때문에,
자의식과 마주치는 부끄러움, 치열하지 못함, 지혜롭지 못함과
날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둡기 그지없는 밝은 하늘을 우러러야 함에, 
삶을 영원한 루머라고 말한 사람의 '위악'이 가까워보인 듯 싶다. 


매독같은 가을, 

 

도 유명한 비애였다.
가을이 사람을 더욱 피폐하게 하는데,
온 세상은 마치 금세 망해버리기라도 할 듯 어둡던 때,
전혜린의 냉소적이고 왠지 조금 빛나는 글이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뭔지모를 향수를 길어올리던 시절.
가을을
매독, 이란 독설과 매치시킨 말발은 유명했던 것이다. 

최승자가 오랜만에 시집을 냈다.
이 새 시집에는...
온통 시간이 흘러가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 시간이 흐름은... 아픔이다. 

읽는 내가 이렇게 느릿느릿 아픈데, 그 아픔을 살아낸 그는 훨씬 더 아팠겠지. 

아파서,
아프면 마음도 약해진다던가...
그랜선지,
유독 중간 중간 괄호가 많이 보인다.
읽으면서 또 아프다. 

제목이 된 시, 맨 처음 나오는 쓸쓸해서 머나먼, 도
시간 이야기다.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 동방삭이 살던 세계... 시간이 끝도 없이 흐르는 세계...
쓸쓸해서 머나먼 시간에 대한, 그런 이야기 하나,
그런 이야기를 살고 있는 이 하나,
이 시집을 꿰뚫는다. 

하늘은 무너져 내리고, 다른 하늘이 열리고,
시간이 흐르고,
폴짝 건너뛰고,
시간들은, 미래의 시간들... 최승자가 살 수 없을 미래의 시간들은...
은가루처럼 쏟아져 내린다...  

 

황홀합니다
내가 시집을 쓰고 있다는
꿈을 꾸고 있는 중입니다...(바가지 이야기 중) 

마지막 구절 역시 시간에 대한 것이다.
최승자, 많이 늙었구나.  

옛날에 유명해서 가끔 만났던,
시 좋아하는 수정이가 가끔 조잘거렸을 법한 시구절들을 몇 개 찾아 보았다.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찌기 나는)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개 같은 가을이)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삼십세)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꾼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존재한다.

그는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

그리하여 시는 어떤 가난 혹은 빈곤의 상태로부터 출발한다.

없음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없음의 현실을 부정하는 힘 또는 없음에 대한

있음을 꿈꾸는 힘, 그것이 시이다.

그 부정이 아무리 난폭하고 파괴적인 형태를 띤다 할지라도

그것은 동시에 꿈구는 건강한 힘이다.

그리하여 가난과, 그 가난이 부정된 상태인 꿈 사이에서 시인은,

상처에 대한 응시의 결과인, 가장 지독한 리얼리즘의 산물인

상상력으로써 시를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로써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밥벌이를 할 수도 없고 이웃을 도울 수도 없고

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배고파 울 때에 같이 운다든가,

다른 사람들이 울지 않을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울어 버릴 수 있다는 것뿐이다.

시인이 할  수 있는 소위 가장 건설적인 일은

꿈꾸는 것이 고작이며, 그것도 아픔과 상처를 응시하는

<지극히 개인적인>부정의 거울을 통해 비추이는

꿈일뿐이다.([이 시대의 사랑]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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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0-01-27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접수하셨군요. 가까운 곳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보도를 통해 알고 있어요. 아직 시집 사지 못했는데, 이렇게 먼저 만나니 반갑네요.

글샘 2010-01-28 01:35   좋아요 0 | URL
포항인가 어디에 입원하셨다더군요.
하도 광고를 해서 읽었습니다. 한번 만나 보시면 좋아하실 듯...
 
조선의 글쟁이들 - 조선의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
문효 지음 / 왕의서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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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글쟁이라고 하면, 문인이라고 한문으로 쓰는 데 비해 저속해 보이기도 하지만, 치열한 프로 정신이 담긴 것처럼 읽을 수도 있다. 

이 책에는 그야말로, 조선에서 찾아낸 치열한 글쟁이들이 열 네명 소개되고 있다.
주로 내가 언어영역 가르치면서 많이 다루는 작가들이라 더 흥미로웠는지 모르지만, 블로그다 뭐다 해서 자기 의견을 남기기 쉬운 오늘날 글을 쓸 때 참고로 할 만 하다. 물론 누구나 이렇게 써야할 것은 아니지만, 무릇 작가라고 뻐기는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두고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1부. 살아있는 글을 써라.에서는 박지원, 정약용, 유몽인, 신숙주가
2부. 시대를 아파하라.에서는 이달, 허균, 허난설헌의 사제지간이
3부. 깊이 생각하고 실천하라. 에서는 이이, 이황, 김시습이
4부. 진실을 담아라. 에서는 정철, 김만중, 이익, 강희맹이 다루어진다.
글쎄, 파트별 제목과 서술된 사람들간에, 1,2부는 긴밀한 연관성이 드러나지만, 3,4부는 글쎄다. 

박지원의 글쓰는 법.
글을 잘 쓰는 사람이면 병서를 알 것이다.
글자는 비유하자면 사졸이고, 뜻은 비유하자면 장수이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이고, 고사라는 것은 전장이며, 성루다.
글자를 묶어서 구절을 만들고, 구절을 모아서 장을 이루는 것은 대오행진과 같다.
운은 소리를 내고 수식으로 빛을 내는 것은 금고 정기와 같다.
조응이라는 것은 봉화대이다. 비유라는 것은 유기 遊騎이다.
억양 반복은 서둘러 싸워 시살하는 방법이다.
쓰기 시작하고 끝을 맺음은 먼저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함축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머리가 흰 군졸은 잡지 않기 위함이다.
여음이 있는 것은 군대를 거느리고 개선하는 모습이다.(소당적치기, 25)
 

햐, 이 정도 비유라면, 누에고치에서 실이 술술 풀려나는 경지가 아닐까? 

학문이 귀한 것은 실용에 있으니, 부질없이 인간의 본성이니 운명이니 하고 떠들어대고 이과 기를 가지고 승강질하면서 제 고집만 부리는 것은 학문에 유해(27)하다는 평가는 '직지인심'의 경지다. 

정약용은 성리, 고증, 문장, 과거, 술수의 <학문>을 부정하는데,
나의 소망이 있다면 온 나라 안이 모두 양반이 되는 것이니, 곧 온 나라 안에 양반이 없어지는 것이다.(43)
아, 이런 아름다운 역설이라니... 마치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을 읽는 기분이다. 

유몽인은 '맹자, 장자, 사마천, 반고, 한유의 글을 두루 모은 다음 스스로 조화로움을 창조했다고 할 수 있다'는 평을 얻는다.(65) 그만큼 자유분방하고 또 그만큼 방황하였다는 증거겠다. 그의 글은 장자의 '차이' 속을 뒤집는 이야기와도 비슷하다.

아아, 덧없는 세상의 삶이 가련하구나.
항아리 속에서 태어났다가 거기서 죽는 초파리 무리를 장차 모두 쓸어 거두어도 한 움큼도 채우지 못 한다.
인간 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은데,
구구절절 자신만 내세우며 기쁘니 슬프니 야단법석이다.
어찌 크게 껄껄껄 웃을만한 일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내가 오늘 본 것으로 생각한다면 하늘과 땅 역시 손가락으로 가리킨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하물며 이 봉우리는 하늘 아래 작은 사물에 불과하다.
이곳에 올라 높다고 떠벌이는 것이 어찌 거듭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유두류산록, 73) 

신숙주. 그는 거의 옛 전적을 인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상소문에도 그 논지를 지킨다. 조선의 문인으로 자존감을 지키며 살았다.(89)고 평한다. 숙주나물처럼 금방 맛이 가는 지조없음의 대명사가 되어버렸지만, 그의 글을 보면 딱히 그렇다고 확신하기도 어렵다. 

99.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113. 성소복부고
122. 성소복부고
125. 성소부부고
130. 성소부부고
맨 앞의 것은 '이 달' 편에 있고, 나머지 넷은 '허 균'편에 실렸다.
학자에 따라 다르게 읽고 있기는 하나, 같은 논문 안에서도 앞의 둘은 복으로 읽고 뒤의 둘은 부로 읽었으니, 저자의 실수로는 제법 큰 것이다. 

이달의 시 중 가장 인상적인 시는 '불일안 인운'이다.
구름 속에 절이 있는데/ 구름이라 스님은 쓸지를 않아./ 손님이 와서 비로소 문 열어 보니,/ 골짜기의 송화가 이미 진 뒤더라.
여운이 남는 시로는 으뜸이다.
정민의 '한시 이야기'에 나오는 '제총요'도 유명하다.
임란으로 자식과 아비를 잃은 조손간. 아들의 무덤가에서 술 한 잔 한 것에 그만 취해 어린 손자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촌로의 짠한 모습.  

허균은 옥하가옥 屋下架屋 이란 표현을 쓴다. 남의 집 아래 다시 제 집을 짓고는 제가 제일 잘난 줄 안다는 것.  

뒷날에 지금의 글을 봄이 어찌 지금 우리가 앞의 몇 분의 글을 봄과 같지 않겠는가.
좌씨는 절로 좌씨가 되고, 장자는 절로 장자가 되겨,
사마천과 반고는 절로 사마천과 반고가 되고,
한유 유종원 구양수 소식은 또한 절로 한유 유종원 구양수 소식이 되어,
서로 답십치 않고 각기 일가를 이루었다.
내가 원하는 바는 이것을 배우자는 것이다.
남의 집 아래에다 집을 덧 짓고서 도둑질해 끌어낸다는 나무람을 답습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119, 문설)

허난설헌. 그의 이름은 초희였다. 조선시대에 여자가 이름을 가진 경우는 드문 일이다.
5만원권에 실린 사임당신씨도 성만 전해지잖는가. 그렇게 사랑받던 허초희가 말했다는 세 가지 한.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에 태어난 것.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아, 나는 이 대목에서 눈물이 나려 했다. 해마다 그의 규원가를 애써 가르쳤지만, 이런 한을 품었다 생각하니 그가 마음 저리게 아프다. 복도 없이 아이도 먼저 죽어버려 '곡자'를 썼다.
눈물을 가릴 수 없다. '피눈물로 울다가 목이 메도다.' 

이이는 조선의 천재였다고 한다.
젊은이는 건강했을 때 몸이 손상되어도 혈기왕성하여 나타나지 않지만, 만년에 이르면 해로운 독이 몸이 쇠약해진 틈을 타 한꺼번에 나타나듯, 지금 상황이 이와 같으니 10년을 지나지 않아서 큰 재화와 변란이 닥칠 것(166)이라고 상소도 올리고, 임금을 가르치는 '성학집요'도 올리지만 도루묵이 되었다. 안타까운 노릇. 

잘나갔던 이이에 비해, 배움이 보잘것 없던 이황. 그는 완전 노력파의 대표주자다.
그가 앞세웠던 것은 '경'인데,
번거로움을 바로잡는 데에는 고요만한 것이 없고, 졸렬한 것을 바로 잡는 데에는 부지런만 한 것이 없다.는 말에서 스스로를 다잡는 경건함이 읽힌다.(193)
젊은 고봉과의 서신에서 이기론에 대한 4단7정논쟁이 치열했지만, 학문적인 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비록 서신이었기에 뜬구름잡는 식의 주장들이 오고 가서 명확한 정리를 남긴 것은 아니었지만 중국의 성리학을 조선에서 집대성하려한 노력은 대단하였던 것 같다. 

마지막 챕터의 정철, 김만중, 이익, 강희맹은 앞서 치열했던 작가들에 비해 읽히기에 밍밍하다. 

이 책의 장점은 지루하지 않게 속도감을 내어 <하룻밤에 읽는 조선의 문인들>처럼 두어 시간이면 재미있게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재미있고, 유익한 책이다. 이런 책이 많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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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0-01-26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두어시간이면 돼요? 우아.
쓰신 서평을 보면 엄청 오랜 시간을~

글샘 2010-01-27 18:09   좋아요 0 | URL
저처럼 휘리릭 읽으면 두어 시간이면 읽습니다. ^^
아무래도 저는 국어가 전공이니 아는 체하고 대충 읽었겠지만요.
 
총각네 야채가게
김영한.이영석 지음 / 거름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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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바뀌어, '돈'이 최고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그 돈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인간이고, 쓰는 사람도 인간이라, 그저 돈만 밝히면 기분이 상하기 쉽다. 
인간적인 분위기가 가미되어야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는 법. 

인지상정이란 말이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마음이란 뜻인데, 누구나 맛있는 것 좋아하고 잘 생긴 것 좋아하는 법이다.
동가홍상이라고,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란 말도 같은 류다. 

예전엔 골목길마다 이발소가 하나씩 있었다.
나도 스물 예닐곱살까지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곤 했는데, 이발소란 곳이 거의 비슷하게 타일로 바닥 깔고, 난로 위에선 따뜻한 물이 끓는, 면도 거품 냄새가 살풋 나는 조금 촌스런 곳이었다.
언제부턴가 남자들도 미용실엘 가게 되었고, 이발소는 거의 말라 죽어버렸는데,
우리 동네에 '남성전용 미용실'이 생겨서 2년쯤 다니고 있다.
여성들의 미용실 가면 당황스러운 것이 몇 가지 있다.
아줌마들이 퍼머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수다떠는 소리도 짜증이지만, 남자가 앉아서 머리깎고 있으면 힐끔힐끔 쳐다보기도 하고, 미용사의 손길도 그렇고,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가 않다. 결정적으로 미용실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이라 여기저기 바꿔보기도 하지만... 별 수 없었다.
남성전용 미용실이 좋은 점은, 손님이 남자들 뿐이라, 조용조용히 깎고 나갈 뿐이라서 신경쓸 것이 없고, 미용사가 남자든 여자든 '깔끔하게 깎을까요?' 한 마디 물어보면, 나는 '네.'하고 나면 거기서 거기인 비슷한 제품이 금세 완성되는 것이다. 조금 짧게 자르고 싶을 때만 부탁하면 된다. 

오늘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는데, 총각네 야채가게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남성전용 미용실이나 총각네 야채가게의 장점은 바로 손님의 마음을 읽는 것에서 시작했다.
야채는 왠지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사는 것이 비싸고 그렇다고 맛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트럭을 몰고다니는 아저씨들의 물건은 가끔 너무 질이 떨어지기도 하고...
주부들이라면, 할머니들이 총총 모여앉은 재래시장의 깔끔한 야채를 원하기 쉬운데 그걸 만족시켜주는 야채장수는 드문 편이란 데 착안을 해서 발로 뛰면서 상품을 만들어냈다. 

억이 넘는 돈을 번다고 하지만, 주인공이 노력하는 것은 재기발랄함이다.
물론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라 고들프지만, 그의 철학은 앞으로의 세상에 어울리는 유목민적 발랄함이 들어있다. 

과거에 얽매여 미래가 안 보이는 사람들이 한번쯤 읽어보기 좋은 책이다.
머리를 깎고 나오는데 골목길에 트럭을 대놓고 '옛날과자 한 번 맛보고 가세요.'하는 총각을 만났다. 그 총각은 글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옛날과자를 사람들이 사먹고 그걸로 돈이 될거라고 생각하고 그 추운데서 노박이로 바람을 맞고 있는 것인지... 이 책을 권해주고픈 생각도 들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는,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볼 일이다.
발랄하게 살아움직이는 사람들을... 그들이 어떻게 하여 성공하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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