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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다는 것 ㅣ 창비시선 205
나희덕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평점 :
어두워진다는 것...은 시각 視覺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시간 時間의 문제이기도 하다.
날이 어두워지면, 심리적으로 우울해지거나 나약해지기도 하고,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어두워진다는 것은 삶의 시간으로 본다면 마흔 고비를 넘어 노화를 향해 가기 시작하는 고비가 될 수도 있다.
마음이 어두워진다는 것은 나이 듦의 드러남일 수도 있고...
나희덕의 2001년 시집을 읽으면서,
아, 나희덕이 30대 중반을 넘기면서,
이렇게 시간의 흐름과 심리적 흐름을 표현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오늘 밤 무슨 몰약처럼 밤비가 내려
시들어가는 몸을 씻어내리니
달게 와 닿는 빗방울마다
너무 많은 소리들이 숨쉬고 있다
내 눈에서 흘러내린 붉은 진물이
낮은 흙 속에 스며들었으니
한 삼일은 눈을 뜨고 있을 수 있겠다.(몰약처럼 비는 내리고, 부분)
비가 내리는 걸 두고 시들어가는 몸은 한 삼일 살 힘을 얻는다.
뿌리가 뽑혀, 몇줌 흙을 아직 움켜진 존재가 자꾸만 목이 말라와 화사한 한무더기 꽃을 피운 녀석을 보면서, 그것이 스스로를 위한 弔花인 줄도 모르고...
삶과 죽음의 시간에 대한 그의 상념은 비를 통해 더 어두워진다.
이만하면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
꼭 그런 때가 초록에게는 있다...
초록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나면
내 마음의 그늘도
꼭 이만하게는 드리워지는 때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
소만 지나
넘치는 것은 어둠뿐이라는 듯
이제 무성해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나무는 그늘로만 이야기하고...
누가 내 발등을 덮어다오.
이 부끄러운 발들을 좀 덮어다오.(소만, 부분)
한창때가 있고, 그 한창때가 지나면, 그늘과 어둠이 온다.
나희덕이 느끼는 시간의 어둠. 아직 싱그러운데, 그는 어두워진다는 것을 생각한다.
십 년이 지났는데, 나와 동갑인 그는 얼마나 어두워졌는가.
정말 하룻밤이었을까
그렇게 많은 물방울이 흘러내렸는데도
날개소리 그렇게 오래 들렸는데도
석순 1밀리미커가 채 자라기도 전에 우리 생은 끝나고
동굴 밖은 지금 몇 세기일까(돌로 된 잎사귀, 부분)
그의 삶은 반도 안 살았던 시점에서 벌써, '그리고 동굴 밖으로 걸어나가는 나는 누구?'냐고 묻는다.
석순 1밀리도 채 자라기 전에 끝날 생들 주제에,
그렇게 많은 물방울이 흘러내렸다고 느끼지만 정말 하룻밤같은 짧은 시간인데...
십년 후의 나에게, 라고 시작하는
편지는 그보다 조금 일찍 내게 닿았다
책갈피 같은 나날 속에서 떠올라
오늘이라는 해변에 다다른 유리병 편지
오래도록 잊고 있었지만
줄곧 이곳을 향해 온 편지...
누구에게 가 닿을지 알 수 없지만
줄곧 어딘가를 향해 있는 이 길고 긴 편지(다시, 십년 후의 나에게, 부분)
그가 십년 전에 쓴 편지를 보면서,
다시 십년 후까지 생각한다.
아, 그는 지금 이 시를 읽으면서 어떤 느낌일까.
어딘가를 향해 있는 이 길고 긴 길...이 삶의 길인데,
누구에게 가 닿을 지 알 수 없는 먼 길.
지금도 잊고 있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줄곧 어느 곳인가를 향해 가는 걸음걸이...
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보면,
삶은 참으로 통속하고 너절하거늘...
나희덕은 나비같은 언어를 채집하듯 시를 쓰고,
나풀거리며 떨어질 듯 날아가는 시간을 이렇게 잡아 챈다.
먼 길을 결코 직선으로 날지 않는 나비 같은 시간을...
피아노가 음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검은빛으로 빨아들인 몇개의 풍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반을 다시 울리기 위해
아이가 뒷문 계단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밖은 반음씩 어두워져갔다(음계와 계단, 부분)
이렇게 피아노 건반을 보면서도 반음씩 꺼져가는 어둠을 발견하는 날카로운 시인의 시선.
내게 없은 능력을 책으로 읽는 일은 짜릿한 일이 아닐 수 없다.
6층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아서
앞비탈에 자라는 벽오동을 잘 볼 수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오동꽃 사이로 벌들이 들락거리더니
벽오동의 풍경은 이미 단물이 많이 빠졌다...
꽃이 마악 떨어져나간 자리에는
...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풍경을 매일 꼭꼭 씹어서 키우고 있다
누구도 꽃을 잃고 완고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놀라운 것은 거칠고 딱딱한 열매도
저토록 환하고 부드러운 금빛에서 시작된다는 사실...
열매 사이로
말벌 몇 마리가 찾아들곤 하는 것도
그 금빛에 이끌려서...
그러나 말벌들은 모르리라...
캄캄한 씨방 속에 갇힌 꿈들이 어떻게 단단해지는가를
내 어금니에 물린 검은 씨가 어떻게 완고해지는가를(벽오동의 上部, 부분)
애늙은이가 따로 없다.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히는데, 그 씨가 여물어가는 과정을
또는 완고해져가는 과정을...
그렇지만, 그 완고한 어른들조차
원래는 환하고 부드러운 금빛이었음을...
나비처럼 가벼운 시선으로 그는 관조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벼운 언어로 들려준다.
봄이 가까워질수록
눈은 산꼭대기로 올라간다
햇빛이 시려워 시려워서...
시린 물
흘러내리는 이른봄마다 나는
눈 어두워 알지 못했네
그것이 한 은둔자의 피라는 것을(눈의 눈, 부분)
관찰자의 신선하고 날카로운, 시려워 시려워서 눈이 신 것 같은 시인의 시어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