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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ㅣ 창비시선 211
이면우 지음 / 창비 / 2001년 10월
평점 :
이면우.
보일러공이란 직업과 시인은, 누군가에게 한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는지 반성하라는 안도현에게,
그래.
대답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는 직업인지도 모른다. 일견 어울리지 않아 보일지라도.
이 시집의 시인은 40대다.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는 시집의 제목은,
누군가가 운다는 소리인데, 시인의 귀에 들리는 그 누군가의 울음소리는,
갈대처럼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 임을 깨닫는 나이가 40인지도 모른다. 는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에 붙인 '시인의 말'에서
생각하기보다 느끼기에 더 적당한 짐승으로서 고백하지만
나는 몸을 살았으므로 행복했다.
숲을 걷는 동안 자주 부추겨지는 그 느낌은 도시 한 가운데,
사람들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고맙다. 라고 썼다.
이 시집은, 생각보다 느낌으로 읽으라는 권유일 수도 있다.
그렇다
이스탄불, 베이징, 신의주, 상 파울로에도
잠 못 이루는 사내들이 있어 꺼진 불씨를 되살려내려 애쓰는 중일 거다
어둠 속에서 잠든 가족의 얼굴을 오래오래 응시할 거다
그렇다
나는 지금 세상의 북쪽이 아니라
생의 북쪽에 대해 말하는 중이다.
누구라도 자기 안에 북쪽을 지니고 간다
좀 더디지만 북쪽에 쌓인 눈도 때 되면 녹고
꽃은 한꺼번에 붉고 푸른 빛을 몰아 터뜨리기도 했다(생의 북쪽, 부분)
그래서, 누군가 우는 것이다. 세상의 북쪽에서는 신비한 오로라가 사람의 감각을 홀리지만,
생의 북쪽에서는 모진 바람과 눈보라가 분다. 그러나 생의 북쪽에서
꺼진 불씨를 되살려내려 애쓰는 사내들.
그들의 가슴은 보일러공의 그것처럼,
안도현의 연탄재처럼, 한때 뜨끈한 그것일 게다.
숲 속에 마른 우물 있어 그 깊이 열자 남짓
대지로부터 한뼘 위태로이 솟아올랐다
눈 속에 발목 잠그고 서서
서늘한 전율에 흠칫 떤다.
숲과 골짜기를 배회하던 겨울 아침
잠시 멈춰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작은 돌 하나 무겁게 들어올려 그 바닥에 던진다
아주 오래 묻어둔 슬픔처럼 어둠은
돌을 받아들이며 깊이 울었다.
여름 무성한 숲과 골짜기는 구멍을
덩굴 아래 숨기고 짐짓 모른 체한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 바닥까지 가닿는 통나무를
눈 속에서 찾아 밀어넣었다 아무리 외쳐 불러도
마을까지 가닿지 못할 여기, 끝내 혼자
되짚어 나와야 할 누군가를 떠올리며. <구멍, 전문>
삶의 비의는 어디에 있으며, 그 지도나 아리아드네의 실마리를 가진 자는 누구일지,
그렇지만, 그 실마리 대신, 비의의 기록 대신,
끝내, 혼자
되짚어 나와야 할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 구멍에 통나무 하나 밀어넣는 마음.
깊이 우는 구멍만큼이나 뜨끈한 시다.
언젠가 깜깜한 데서 내 손 툭 치며
요놈의 두더지 가만 못 있어 하던 아내 말이 귓전을 치고 와
앞산 울리도록 한번 웃어젖혔다 <두더지, 부분>
마흔이 넘은 사내의 웃음이 시원스럽다. ^^
나이 마흔 넘어 여자 눈 속을 정면으로 보게 되었다
비껴 선 건 아니나 무언가 쑥스러움 먼저
내달려와 멀리 산이나 나무를 함께 보고서야 담담해지던 거다.
한때는 선, 색, 몸집이 먼저 눈 속에 들어오더니 호숫가에 살며 만나는 이여 목소리, 미소가
깊이 와닿는다 이건 외로워진 탓일 게다 속짐작으로 덮고도 여인의 따뜻함 오래 남는다
또 하나, 밤낮없이 북대길 때 아내 얼굴 아슴푸레하더니 각방 쓰기 잦아지며 선연히 떠오른다
그래, 너로 하여 세상이 오래 뜨거웠구나 돌멩이마저 구르게 하는 힘이여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죄다 미인이다, 이 한구절을 쓰는 데 나는 꼬박 사십년이 더 걸렸다. (미인, 전문)
마흔은 불혹의 나이란 건, 마흔을 살아본 이나 안다.
육신의 정에 혹하지 않는다는 것은, 육신이 이미 죽어간다는 뜻이다. 노화를 급격히 느끼는 나이다.
그제서야, 욕정 버리고 여자 눈 속을 정면으로 본다는 이야기다. 담담하게.
그래서, 이제 모든 여자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나 아닌지...
발레리의 시, 한 구절,
바람이 분다, 다시 살아야겠다...를 인용한 '이천년 숲'이란 시를 만났다.
김광섭의 '생의 감각'을 찾아 읽고 싶게 만든다.
여명의 종이 울린다.
새벽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졌다.
깨진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른 빛은 장마에
넘쳐 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서 황야에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섰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 <김광섭, 생의 감각, 전문>
아마도, 김광섭이 이 시를 쓴 것도 마흔 무렵이었을까?
해설에선 보통 병든 몸을 이끌고 쓴 시라고 하는데, 꼭 병이란 육신에만 깃드는 것이 아님에랴.
아픔에 하늘이 무너지고,
그렇지만, 우리 가슴엔 뼈가 서지 못해서...
흐린 강물위에서 부유하는 부평초처럼... 외로운 것인지도 모르는데,
무너지는 둑에서지만,
뿌리도 얕은 그 작은 채송화들이 무더기로 피어서
삶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는 위로.
아, 얼마만한 위로이랴.
조지훈이 '민들레 꽃'에서 만난 위로를,
비슷한 키의 채송화에서도 만난다.
한 10cm 가량의 꽃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높이를 갖게 되는 것도 마흔 무렵인 모양이다.
집 가족 직업이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초원의 한 소녀, 카메라를 향해 말한다
그 다음 양떼를 찾아야 한다며 끝없이 펼쳐진 풀밭을 맨발로 걸어 들어갔다.
그래, 집과 가족과 직업이 있는 사내의 일요일 아침
창 밖 벚나무 가지에 새가 찾아와 울어주니 잠깐 행복했다
그러나 소녀여 너는 방금
지평선과 맞닿은 거대한 뗏장구름 쪽으로 갔다
발바닥 콕콕 찌르는 풀들을 하낫 둘, 하낫 둘, 밟고 갔다
달아난 양떼를 그 속에 감추고 있는
중앙아시아를 걸어갔다. <행복, 전문>
텔레비전을 보면서, 내가 있는 곳을 행복으로 생각하는 소녀와
그를 보고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나의 간극.
그가 밟는
발바닥 콕콕 찌르는 풀들의 감각을 부러워하고,
내가 사는 곳의 집과 가족, 직업을 부러워하고...
행복은 그렇게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마음과 현실 사이에서 부유하는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면우의 '거미'에서처럼,
마흔 아홉의 '깜냥'은 조금 외롭고, 높고, 쓸쓸하지만, 따스하고, 잔잔하다.
흐린 하늘 아래,
고소한 커피 한 잔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