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홍
노자와 히사시 지음, 신유희 옮김 / 예담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사기당한 한 남자가,
사기꾼 일가족을 처참하게 살해한다.
사기당한 남자는 일가족 살해범으로 사형언도를 받는데...

일순간에 네 명의 가족을 잃어버린 가나코란 여자아이.
고모집에서 외롭게 살던 아이는, 우연히 살해범에게도 자기와 같은 또래의 딸이 있음을 알게 되고...

살해범의 딸 미호와 일가족을 잃어버린 가나코,
불구 대천의 원수일 둘은, '우리'가 된다.

마지막에서, "우리, 살아갈 수 있는 거지?"하는 말을 주고받으며 눈길을 마주칠 때,
그들의 '우리'란 말에 눈물겹단 생각까지 들었다.

살다 보면, '우리'가 되기 힘든 관계도 많다.
그렇지만, 또 살다 보면, 그 대립되는 '우리'들이 부득불 친근한 '우리'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의 묘미다.

단맛이란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재발견할 수 있는 미각인지도 모른다.
쓰라린 인생 속에서 단맛을 이렇게 해석하는 가나코의 마음에 드리운 찬바람의 그늘은 상상하기 힘든 것이기도 하다.

죄는 인간의 혼을 들여다보는 잠망경이 된다.(427)
이런 이야기를 읽는 일은 스릴러를 읽는 것도 인생에 대한 성찰이 되기도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죄를 짓고,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있는지 자신도 모를 때,
죄의식은 자신을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눈으로 관찰하게 만든다.
그런 관찰이 곧 성찰이 되고, 통찰력을 발휘하게 하는 관조의 순간을 불러올 수도 있는 법이다.

마음 속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허전한 사람들에게, 너 나보다 허전해? 그럼 내 이야기 한번 들어볼래?
이렇게 가나코가 말을 거는 것같은 소설이다. 끔찍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맛이 숨어있다.

다만, 번역하는 과정에서 '심홍'처럼 한국어에서 부려쓰지 않는 말들을 쓰는 일이 간혹 있어서 아쉽다.
'심홍'은 짙은 빨강 scarlet... 정도인데, 글쎄, 이 소설의 피비린내와 청춘의 가나코의 슬픔을 드러내는 깊은 붉은빛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짙은 빨강이 가나코의 젊음을 어둡지만 경쾌하게 이끌어 나가는 힘을 주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영화 스틸컷을 찾아보니, 심홍이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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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0일, 하드코어 세계일주
고은초 글.사진 / 예담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스물 하나.
스물 다섯.
스물 아홉. 

이 나이들에 난 뭘 했는지...
스물 하나엔... 대학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했고,(학사경고 이후 급 소심 모드로...)
스물 다섯엔... 공산권이 무너지는 걸 외롭게 지켜보면서 군부대 안에 웅크리고 있었고...
스물 아홉엔... 이미 남편과 아버지가 되어버린 어린 남자가 삶의 부대낌에 상처받고 있었다. 

물론 시대가 그렇게 불편한 대학 생활과, 불쾌한 군대 생활과, 불안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게 만든 탓도 있지만,
어쩌다 결혼을 일찍한 우리 시대엔 이런 자유,를 꿈꿀 머릿속 자유도 없었다. 

올림픽 이후 여행 자유화 바람을 타고, 동굴 속에서 우상만을 바라보던 아이들은 드디어 햇빛을 본다.
그 이전까지 서울대라는 우상만을 바라보았고, 대기업이라는 안전망만 바라보았던 사람들에게,
더이상 우상은 서울대도 대기업도 아니었다.
그 우상을 깬 것은 서태지와 함께 왔고, 더이상 '아이돌'은 '우상'과 동의어가 아니었다.
우상은 꼰대들의 멋대가리 없는 구태의연함이고, 아이돌은 형체가 규정되지 않은 싱싱한 펄떡임이었다. 

운전과 '드라이브'도 동의어가 아닌 게 되어버렸고,
지식과 '지식 검색'은 지식의 개념 자체를 뒤바꿔 버렸다.
인터넷 하나만 있으면, 온갖 지식의 통로를 순식간에 헤집고 다닐 수 있게 되어버린 것. 

그 틈을 타서, 온 세상을 누빈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천으로 쏟아져 나왔지만,
고은초처럼, 이름은 은방울처럼 초롱초롱하지만, 대책없이 사고뭉치인 준비성 제로의 무대책 처자 이야기는 처음이다.
일단 저질러놓고 보는 이 꼬마는, 툭하면 사기를 당하고, 강도를 당하고, 도난을 당해서 주저앉아 운다.
그렇지만, 이 무대책 꼬꼬마는 울다가 금세 파란 하늘을 보고 뛰어나가고, 푸른 카리브의 바다만 보이면 모든 걸 잊는다.
인터넷에다가 '나 강도당했어염.'하고 올리면, 신기하게도 모르는 사람들이 입금을 해줘서 세계여행을 한다.
말도 안 되는 시츄에이션이지만,
'가상 현실'은 이미 '실제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시뮬라시옹' 세상이 도래해 버린 것을 부정할 순 없는 것이다.
고은초를 보면, 마치 게임 속 아바타가 온갖 대륙을 여행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있는 장면을 보고있는 것 같다. 

그의 이 책은, 한 마디로 '하드코어' 그 자체다.
하드코어는 음악에서 1980년대 나온 용어로, 극단적인 의사 표시를 드러내는 괴성과 굉음을 뜻했는데,
만화에서나 영화 등에서 피비린내나는 징그런 영상물을 나타내고, 에로물에서는 기존의 포르노처럼 달콤함을 뛰어넘는 극단적인 장르를 일컫기도 하는 용어가 되었다.
여행에서 하드코어는 이 이상 되기 어렵다.
여행에서 아프고 길을 잃는 귀여운 여인의 행태는 당연히 소지하고 계시면서,
돈이나 카드, 심지어는 강도와 함께 ATM 기계로 동행하셔서 카드를 손수 넣어주시는 과감함도 보여주신다. 으~~~ 미치도록 사랑하기엔 멍청해 보이지만, 뭐, 혼자 여행하는 여행자를 찍어서 달려든다면... 어쩔 수 없기도 하다.
그렇게 멍때리는 시츄에이션이 있기에, 그가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암튼, 여행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이 책처럼 용기를 주는 책은 없다.
아무 것도 없던 시대에, 혼자서 비행기표 구해 외국을 날아다니고,
다 털리고도 살아올 수 있는 방법을 전해주진 않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행간에서 그 비법을 전수받는 자도 있을지 모른다. 

가장 좋아하던 세계사 선생님이 말리는 바람에 고고학과에 진학하지 못한 여학생.
아, 그 세계사 선생님이 말리지만 않았더라도, 하드코어는 좀 더 소프트해졌을지 모른다. 

아무 생각없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는 무지막지함.
그러나, 아무 생각없는 그를 팔레스타인의 따스한 온기는 바로 '의식화'시키고 만다.
이것이 여행의 힘이다. 가보지 않고 말로만 떠드는 것은, 고집이고 가식일 수 있다.
그러나, 가보고 나면, 마음 속에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떡볶이 사먹고 민생 운운하는 양촌리 둘째아들이나 대통령은 결코, 그 떡볶이를 비빈 아주머니의 가난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없는 지경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북한과 수교가 맺어져 낯선 나라 시리아의 '팔미라'를 작은 사진으로 봤지만, 감동적이었다.
이런 무식한 여행객 덕분에 누리는 호사다. 팔미라를 알게 된 것은...  

<팔미라>

멕시코에서 만나는 비운의 화가 프리다 칼로를 만나는 일이나 콜롬비아의 옥색 해안을 보는 일... 여행객들의 이야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는 발에 물집 하나 없이 호사를 누린다.  

<프리다 칼로>

호주의 미션 비치, 터키의 카파도키아, 이집트의 다합을 '시간을 잊은 채 지낼 수 있는 곳'으로 꼽는다는데, 치명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끈다는 대체불가능한 분위기로는 '다합'을 꼽는단다.   

<미션비치> 

<카파도키아> 

<다합>

'대체불가능한 존재' 인 <나>에 대한 믿음 하나로...
온 세계를 누빈 그녀의 삶에도 온갖 고초들은 지나간다.
그렇지만, 대체불가능한 존재라는 믿음은 그 고초들을 헤치고, 좋은 직장도 제치고, 그를 다시 길 위에 서게 한다. 

작은 자유인.
비록 멋지기보다는 엽기적인 사건들로 점철된 그의 여행기였지만, 
그를 따라 우유니 사막의 하얀 소금바다를 보는 일이나, 잉카 트레일을 따라 걷는 무모함을 산소탱크 기다리며 읽는 일은 행복한 일이었다.  

<우유니 소금사막>

길을 나서기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이 무모한 도전기를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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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오페르 2010-09-08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네요,뭔가...
확실히 여행에서 중요,필요한 것은 돈,시간,건강등 많지만 용기가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아...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하다~

글샘 2010-09-16 12:39   좋아요 0 | URL
네이버에, 금초, 은초, 잡초... 사이트가 있더군요. 대단한 사람 맞아요. 은초씨... ㅎㅎ

루체오페르 2010-09-22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초 은초 잡초~ 멋지다~

글샘님 추석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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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크리스마스,란 영화도 있고,
10월, 이란 오세영의 시도 있다. 

9월,은 인생에서, 한여름이 갓 지난 그런 나이인데, 한 40대쯤 되려나.
1년에서 9월의 이틀은 참 짧은 것이다.
그렇지만, 1년이란 숱한 날들 속에서 9월의 이틀이란 '가장 빛나는 이틀'이란 이야기를,
류시화가 시에서 썼다. 그걸 장정일이 베껴왔다. 근데, 표절은 아니다. 허락받았다니까는...  

이 시와, 이 제목을 들으면서, 화양연화,란 영화가 생각났다.
화양 花樣...은 꽃처럼... 이런 뜻이고, 연화 年華...는 나이가 빛난다.. 이런 뜻이니,
황신혜와 안성기 주연의 <기쁜 우리 젊은 날> 정도 되겠다. <꽃처럼 빛나는 나이>라니...
그러고 화양연화...란 발음을 하니 반짝반짝 빛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도 생각난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그 날들에 그대 무엇을 하였는가?
이런 질문이, '금과 은'이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란 헤세의 소설 제목 카피한 것보다 좀 멋지다.
편집자와 제목 정하는 순간에 류시화씨 잘 만났다. ^^ 

장정일 소설의 성욕에 대한 발산은 좀 거슬려하는 편이다.
꽃미남 소설처럼 좀 유치하게 마흔 먹은 돈많은 여자가 이유도 없이 다가와서 들러붙고, 떨어지고...
금과 은은 합금이라도 되려는 듯, 사랑을 나누는 동성애자가 되고...
사랑한다는 말을 굳이 독일어로나 소리내는, 사랑에는 낯선 남자 장정일의 사랑이야기를 읽는 일은 아무래도 적응이 안 된다. 

적막을 채워주지 못하는 말을 그리워하며,
말의 속살을 파고들다가, 온갖 사이(間) 가운데, 부재한 말들을 찾고자 하는 노고를,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음절로 표현한 게 바로 '미' 였으며 '시'였다(44)
는 은의 말은 작가의 시론이 너무 튀어 보인다. 

주변인들은 주류의 기준이나 가치를 내면화한다.
그래서 주변인들은 주변인들을 누구보다 멸시한다
.(77)
이런 것이 우파의 분석인데, 장정일의 우파 이야기가 쩡쩡 울리는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것은,
결국 장정일의 우파 이야기가 시들해져 버리는 것은,
그 역시 우파의 갑옷으로 철저하게 무장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복은 지옥이다. 지옥은 반복이다. 반복과 지옥은 이음동의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이런 속담이 담고 있는 함의가 '반복과 지옥의 이음동의적 수사'다.
김명인의 '소금 바다로 가다'가 노래한 것이 그것이다. 반복과 지옥의 세상에서 본 소금의 의미. 

내 몸이 소금을 필요로 하니, 날마다 소금에 절어가며
먹장 매연(煤煙) 세월 썩는 육체를 안고 가는 여행 힘에 겹네
썩어서 부식토가 되는 나뭇잎이 자연을 이롭게 한다면
한줌 낙엽의 사유라도 길바닥에 떨구면 따뜻하리라
그러나 찌든 엽록의 세상 너덜토록
풍화시킨 쉰 살밖에 없어
후줄근한 퇴근길의 오늘 새삼 춥구나
저기, 사람이 있네, 염전에는 등만 보이고
모습을 볼 수 없는 소금 굽는 사람이 있네
짜디짠 땀방울로 온몸 적시며
저물도록 발틀 딛고 올라도 늘 자기 굴헝에 떨어지므로
꺼지지 않으려고 수차를 돌리는 사람, 저 무료한 노동
진종일 빈 허벅만 퍼올린 듯 소금 보이지 않네
하나, 구워진 소금 어느새 썩는 살마다 저며와 뿌옇게
흐린 눈으로 소금바다 바라보게 하네
그 눈물 다시 쓰린 눈금으로 뭉치려고
드넓은 바다로 돌아서게 하네 <김명인, 소금바다로 가다> 

'이런 일에는 공식이 있다'(217)
ㅋㅋ 소설에 등장하는 멘트 치곤, 지나치게 독자와 친근하다. 수다떠는 소설이란 느낌.
그 대목이 '금과 반고경'의 마지막 정사와 연결된 것이어서 좀더 친근하게 유치하고,
다시 화랑에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욕망이나 강박을 가득 껴안고, 연약한 자아의 보트가 침몰하는> 것을 바라볼 수 없는 존재, 인간에 대해 화가 '전하경'이 은에게 은근하게 이야기하는 대목 역시 마찬가지로 유치하게 유쾌하다.
부담은 없지만, 깊이 또한 없다.
하긴, 뭐, 이틀이니 깊이랄 것이야... 

작가가 된다는 것은 위조지폐범이 된다는 것(324)이라거나,
3류 작가는 어설퍼서, 좋은 아이디어도 어설프게 다룬다. 그래서 명민한 작가는 그걸 비트는 것. 진정한 영감은 그런 데서 얻는 것이지, 거장들 무릎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226)라는 그의 문학관은,
이 소설을 설명해 주는 '비상구'이기도 하면서, 호그와트 가는 기차역처럼 9와 3/4 승강장처럼 모호한 개념을 비춰주고 있다.
이런 언설들이 그의 소설을 충분히 설명하기엔, 아니, 내가 그의 소설을 그렇게 이해하기엔, 작가에 대한 이해가 너무 적다. 

후기에서 작가는 이 소설을 대놓고,
세태소설이자 지식인소설이면서 풍자소설과 예술가 소설을 아우르는 이 복합적인 소설을 성장소설로 읽어주도록 자연스레 유도한다...는 말과 함께, 헤세의 '지와 사랑'처럼 '금과 은'을 들이미는데,
아무래도 나는 이 소설에 대한 작가의 세태,지식인,풍자,예술가,성장 소설에 대해서 동의하기 어렵다는 척력이 마음 속에서 떠올랐다.
그나 나나 모두 <북극 N극>인 모양이다. 북극끼리 밀어내는 척력.
그의 이 소설은 '대학생의 정사'를 묘사한 통속 소설이고, 다만, 그 배경에 세태의 흐름이 은은하게 갈색 톤으로 깔렸을 뿐이란 게 나의 소감이라고 하면, 작가가 서운해 할까? 

----------- 오기 몇 개

21. 대노... 대로의 잘못 

144. 국어교육과 교수의 수업을 '금'이 듣는 좀 퐝돵한 시츄에이션... 

232. 이체유탈... 좀 이상타 했다. 遺體離脫 유체이탈...이겠지. 근데, 궁금해서 이체유탈을 찾아보니... 이렇게 쓴 블로거들이 상당히 등장한다. 틀린 말이지만 많이들 헷갈리는 말이다. 

251. 지혜가 부득이 카페를 찾아오리라고는... 부득이는 '마지못해 하는 수 없이'란 뜻이다. 좀 안 어울린다. '부득부득' 이런 뜻으로 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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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창비시선 211
이면우 지음 / 창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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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우.
보일러공이란 직업과 시인은, 누군가에게 한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는지 반성하라는 안도현에게,
그래.
대답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는 직업인지도 모른다. 일견 어울리지 않아 보일지라도. 

이 시집의 시인은 40대다.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는 시집의 제목은,
누군가가 운다는 소리인데, 시인의 귀에 들리는 그 누군가의 울음소리는,
갈대처럼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
, 임을 깨닫는 나이가 40인지도 모른다. 는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에 붙인 '시인의 말'에서
생각하기보다 느끼기에 더 적당한 짐승으로서 고백하지만
나는 몸을 살았으므로 행복했다.
숲을 걷는 동안 자주 부추겨지는 그 느낌은 도시 한 가운데,
사람들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고맙다.
라고 썼다. 

이 시집은, 생각보다 느낌으로 읽으라는 권유일 수도 있다. 

그렇다
이스탄불, 베이징, 신의주, 상 파울로에도
잠 못 이루는 사내들이 있어 꺼진 불씨를 되살려내려 애쓰는 중일 거다
어둠 속에서 잠든 가족의 얼굴을 오래오래 응시할 거다
그렇다
나는 지금 세상의 북쪽이 아니라
생의 북쪽에 대해 말하는 중이다.
누구라도 자기 안에 북쪽을 지니고 간다
좀 더디지만 북쪽에 쌓인 눈도 때 되면 녹고
꽃은 한꺼번에 붉고 푸른 빛을 몰아 터뜨리기도 했다(생의 북쪽, 부분) 

그래서, 누군가 우는 것이다. 세상의 북쪽에서는 신비한 오로라가 사람의 감각을 홀리지만,
생의 북쪽에서는 모진 바람과 눈보라가 분다. 그러나 생의 북쪽에서
꺼진 불씨를 되살려내려 애쓰는 사내들.
그들의 가슴은 보일러공의 그것처럼,
안도현의 연탄재처럼, 한때 뜨끈한 그것일 게다. 

숲 속에 마른 우물 있어 그 깊이 열자 남짓
대지로부터 한뼘 위태로이 솟아올랐다
눈 속에 발목 잠그고 서서
서늘한 전율에 흠칫 떤다.

숲과 골짜기를 배회하던 겨울 아침
잠시 멈춰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작은 돌 하나 무겁게 들어올려 그 바닥에 던진다
아주 오래 묻어둔 슬픔처럼 어둠은
돌을 받아들이며 깊이 울었다.

여름 무성한 숲과 골짜기는 구멍을
덩굴 아래 숨기고 짐짓 모른 체한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 바닥까지 가닿는 통나무를
눈 속에서 찾아 밀어넣었다 아무리 외쳐 불러도
마을까지 가닿지 못할 여기, 끝내 혼자
되짚어 나와야 할 누군가를 떠올리며. <구멍, 전문>

삶의 비의는 어디에 있으며, 그 지도나 아리아드네의 실마리를 가진 자는 누구일지,
그렇지만, 그 실마리 대신, 비의의 기록 대신,
끝내, 혼자
되짚어 나와야 할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 구멍에 통나무 하나 밀어넣는 마음.
깊이 우는 구멍만큼이나 뜨끈한 시다. 

언젠가 깜깜한 데서 내 손 툭 치며
요놈의 두더지 가만 못 있어 하던 아내 말이 귓전을 치고 와
앞산 울리도록 한번 웃어젖혔다 <두더지, 부분> 

마흔이 넘은 사내의 웃음이 시원스럽다. ^^  

나이 마흔 넘어 여자 눈 속을 정면으로 보게 되었다
비껴 선 건 아니나 무언가 쑥스러움 먼저 
내달려와 멀리 산이나 나무를 함께 보고서야 담담해지던 거다.

한때는 선, 색, 몸집이 먼저 눈 속에 들어오더니 호숫가에 살며 만나는 이여 목소리, 미소가 
깊이 와닿는다 이건 외로워진 탓일 게다 속짐작으로 덮고도 여인의 따뜻함 오래 남는다 

또 하나, 밤낮없이 북대길 때 아내 얼굴 아슴푸레하더니 각방 쓰기 잦아지며 선연히 떠오른다 
그래, 너로 하여 세상이 오래 뜨거웠구나 돌멩이마저 구르게 하는 힘이여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죄다 미인이다, 이 한구절을 쓰는 데 나는 꼬박 사십년이 더 걸렸다. (미인, 전문) 

마흔은 불혹의 나이란 건, 마흔을 살아본 이나 안다.
육신의 정에 혹하지 않는다는 것은, 육신이 이미 죽어간다는 뜻이다. 노화를 급격히 느끼는 나이다.
그제서야, 욕정 버리고 여자 눈 속을 정면으로 본다는 이야기다. 담담하게.
그래서, 이제 모든 여자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나 아닌지... 

발레리의 시, 한 구절,
바람이 분다, 다시 살아야겠다...를 인용한 '이천년 숲'이란 시를 만났다. 
김광섭의 '생의 감각'을 찾아 읽고 싶게 만든다. 

여명의 종이 울린다.
새벽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졌다.
깨진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른 빛은 장마에
넘쳐 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서 황야에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섰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 <김광섭, 생의 감각, 전문>

아마도, 김광섭이 이 시를 쓴 것도 마흔 무렵이었을까?
해설에선 보통 병든 몸을 이끌고 쓴 시라고 하는데, 꼭 병이란 육신에만 깃드는 것이 아님에랴.
아픔에 하늘이 무너지고,
그렇지만, 우리 가슴엔 뼈가 서지 못해서...
흐린 강물위에서 부유하는 부평초처럼... 외로운 것인지도 모르는데,
무너지는 둑에서지만,
뿌리도 얕은 그 작은 채송화들이 무더기로 피어서
삶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는 위로. 

아, 얼마만한 위로이랴.
조지훈이 '민들레 꽃'에서 만난 위로를,
비슷한 키의 채송화에서도 만난다.
한 10cm 가량의 꽃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높이를 갖게 되는 것도 마흔 무렵인 모양이다.

집 가족 직업이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초원의 한 소녀, 카메라를 향해 말한다
그 다음 양떼를 찾아야 한다며 끝없이 펼쳐진 풀밭을 맨발로 걸어 들어갔다.
그래, 집과 가족과 직업이 있는 사내의 일요일 아침
창 밖 벚나무 가지에 새가 찾아와 울어주니 잠깐 행복했다

그러나 소녀여 너는 방금
지평선과 맞닿은 거대한 뗏장구름 쪽으로 갔다
발바닥 콕콕 찌르는 풀들을 하낫 둘, 하낫 둘, 밟고 갔다
달아난 양떼를 그 속에 감추고 있는
중앙아시아를 걸어갔다. <행복, 전문> 

텔레비전을 보면서, 내가 있는 곳을 행복으로 생각하는 소녀와
그를 보고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나의 간극.
그가 밟는
발바닥 콕콕 찌르는 풀들의 감각을 부러워하고,
내가 사는 곳의 집과 가족, 직업을 부러워하고...
행복은 그렇게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마음과 현실 사이에서 부유하는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면우의 '거미'에서처럼,
마흔 아홉의 '깜냥'은 조금 외롭고, 높고, 쓸쓸하지만, 따스하고, 잔잔하다. 

흐린 하늘 아래,
고소한 커피 한 잔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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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09-03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기 흐르는 제 마음의 구들장에 보일러가 돌아가듯 훈훈해지는 시집이었어요. 시창작강의 끝나신건가요?

글샘 2010-09-03 15:26   좋아요 0 | URL
훈훈한 시집이죠. 보일러공이 제대로 보일러를 넣었네요.
시창작은 아니었구요. 그냥 강의였는데, 12월에 다시 시작할 겁니다.^^
 

친구하나 나 하나 마음에 시 한편,

그러나... 알라딘에서 검색이 되지 않는다는 거...
한국의 시인과 외국의 시인들의 연애시를 모아본 책이다.
애초에 선물용으로 만들었던 듯 싶은데, 좋은 시들이 제법 많다.
그렇지만, 역시 선물용으로도 시집은 아닌가 보다. 품절이라니...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의 끝구절은 언제나 쓰라리다.
이 시의 서술어만 모아 보면, 그의 삶이 투영된다.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스스로를 돌아본 시 중에선 백미로 꼽는다.

문정희의 ‘사랑은 불이 아님을’은 사랑의 흔적을 더듬는다. 

사랑은 불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불도 아닌/ 사랑이 화상을 남기었다...외롭고 깊은/ 강물 하나를...

이외수의 ‘저무는 바다를 머리맡에 걸어두고’는 참 외로운 사람을 잘 그리고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저물어간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랑은 자주 흔들린다
어떤 인연으로 노래가 되고
어떤 인연은 상처가 된다
하루에 한 번씩 바다는
저물고
노래도 상처도
무채색으로
흐리게 지워진다
나는 시린 무릎 감싸 안으며
나지막이그대 이름을 부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도
내가 혼자임을 아는 것이다

이외수 삘보다는, 신경림의 '갈대'에 어울리는 화답시 같은 느낌.

정현종의 ‘사랑의 꿈’은 삶에서 ‘사랑’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생 뒤에 온다.
그대는 살아보았는가. 그대의 사랑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일 뿐이다.
만일 타인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 뒤에 온다면 그리고 타인의 슬픔이 자기의 슬픔 뒤에 온다면
사랑은 항상 생 뒤에 온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그렇지만, 역시 연애시의 최고봉은 만해 스님이다.
스님의 ‘당신을 그렇게 사랑합니다’는 연애편지 끝구절에 적기 제일 좋은 시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합니다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않고
그의 기쁨이라 여겨 함께 기뻐할 줄 알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나 당신을 그렇게 사랑합니다

삶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요즈음, 프로스트의 ‘가지않은 길’은 새로운 감회로 읽힌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부세의 ‘행복’ 역시 나를 북돋운다.

사람들은 말하지. 산너머에 행복이 있다고./ 아아, 사람들은 서로를 찾아헤매다. 눈물을 훔치며 돌아온다
사람들은 말하지./ 산 너머에 행복이 있다고

칼릴 지브란의 ‘사랑은 아픔을 위해 존재합니다’는 삶에서 사랑의 의미를 위무해 준다.
삶은 그대를 속이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라는...

사랑은 아픔을 위해 존재합니다
사랑이 그대를 손짓하여 부르거든
따르십시오...
비록 그 길이 어렵고 험하다해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를 품을 때에는
몸을 맡기십시오...

그대에게 상처를 준다해도..
사랑이 그대에게 말하거든 그를
믿으십시오...
비록 사랑의 목소리가 그대의 꿈을
모조리 깨뜨려놓을지라도....
왜냐하면 사랑은 그대에게
영광의 왕관을 씌워주지만 또한
그대의 십자가에 못박는 일도
주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성숙을 위해 존재하지만
그대를 아프게 하기위해서도
존재한답니다...

사랑은 햇빛에 떨고있는 그대의
가장 연한 가지들을 어루만져주지만
또한 그대의 뿌리를 흔들어대기도
한답니다. 

그래. 존재의 뿌리를 흔들어 대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사랑이랴 싶기도 하지만, 사랑의 씨앗은 뿌리내리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세상의 사랑만큼이나 많은 사랑시가 널린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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