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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ㅣ 창비시선 91
정희성 지음 / 창비 / 1991년 4월
평점 :
마음도 한 자리 앉아있기 바쁠 때,
커피 한 잔 하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은 시집 뿐이다.
시집의 짧은 글 하나 마음에 품고,
커피 한 입 머금고 잠시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시간.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욱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전문)
정희성의 시집은 '길'로 기억나고 '길'로 이어진다.
그 '길'은 삶의 길이면서, 꼿꼿한 인간의 길이고, 머언 먼 희망에 대한 기다림의 길이다.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무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길, 전문)
이 시를 읽으면, 왈칵 눈물이 난다.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로부터 시작해서, 법관을 돌아,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도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
우리들의 시대가 한없이 노엽다.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아,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바람은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 돌리지 말겠다는 올곧은 마음을 지키는 것이 선생의 길이다.
민주화가 된다는데
이제는 무엇을 할거냐고
이형이 묻는 말을 귓전에 흘리며
나는 말없이 술잔을 건넬 뿐
더러운 시대의 누너기를 몸에 걸친 채
죽음 냄새 배어있는 이 거리...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되묻던 김수영 시인의 말이
눈물처럼
빗발치는 이 낯선 목로의 거리
민주주의여 너의 외로운 이름 위에
무슨 말을 덧붙이랴
한국적이라는 관형사가 그렇듯이
자유라는 말이 언젠가는
우리를 구속하겠지
무서운 예감이여
얼마나 외롭고 긴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만세후, 부분>
1987년 그 지루하던 여름, 그 시대에 나도 이런 생각을 했다. 희망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그 무서운 예감은 적중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외롭고 긴 싸움은, 투쟁가도 바래버린 황야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썩은 달이 떠 흐르는 노동자의 삽자루를 다시 씻게 하고,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게 할 뿐인 시대가 되어 버렸다.
무서운 예감은...
나는 왠지 잘 빚어진 항아리보다
좀 실수를 한 듯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내를 따라와 옹기를 고르면서
늘 느끼는 일이지만
몸소 질그릇을 굽는다는
옹기전 주인의 모습에도
어딘다 좀 빈데가 있어
그것이 그렇게 넉넉해 보였다
내가 골라놓은 질그릇을 보고
아내는 곧장 화를 내지만
뒷전을 돌아보면
그가 그냥 투박하게 웃고 섰다
가끔 생각해보곤 하는데
나는 어딘가 좀 모자라는 놈인가 싶다
질그릇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실수한 것보다는 차라리
실패한 것을 택하니 <옹기전에서, 전문>
실패한 것에 보내는 따스한 시선.
좀 모자라는 놈들끼리 나누는 넉넉한 웃음.
투박하게 웃을 수 있는 어딘가 빈데가 있어 보이는 옹기전 주인이 넉넉해 보이는 눈길.
가르쳐야 할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반들반들 윤기 흘려,
오로지 경쟁에서 승리하는 자만의 자뻑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오래된 시를 읽으면서, 오히려 젊어진다.
힘을 얻고, 척추를 올곧게 한번 쭉 펴볼 수 있어 오래된 시를 읽는 일도 마음이 우렁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