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비시선 91
정희성 지음 / 창비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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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도 한 자리 앉아있기 바쁠 때,
커피 한 잔 하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은 시집 뿐이다.
시집의 짧은 글 하나 마음에 품고,
커피 한 입 머금고 잠시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시간.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욱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전문)

정희성의 시집은 '길'로 기억나고 '길'로 이어진다.
그 '길'은 삶의 길이면서, 꼿꼿한 인간의 길이고, 머언 먼 희망에 대한 기다림의 길이다.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무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길, 전문) 

이 시를 읽으면, 왈칵 눈물이 난다.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로부터 시작해서, 법관을 돌아,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도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
우리들의 시대가 한없이 노엽다.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아,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바람은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 돌리지 말겠다는 올곧은 마음을 지키는 것이 선생의 길이다. 

민주화가 된다는데
이제는 무엇을 할거냐고
이형이 묻는 말을 귓전에 흘리며
나는 말없이 술잔을 건넬 뿐
더러운 시대의 누너기를 몸에 걸친 채
죽음 냄새 배어있는 이 거리...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되묻던 김수영 시인의 말이
눈물처럼
빗발치는 이 낯선 목로의 거리 

민주주의여 너의 외로운 이름 위에
무슨 말을 덧붙이랴
한국적이라는 관형사가 그렇듯이
자유라는 말이 언젠가는
우리를 구속하겠지 

무서운 예감이여
얼마나 외롭고 긴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만세후, 부분>

1987년 그 지루하던 여름, 그 시대에 나도 이런 생각을 했다. 희망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그 무서운 예감은 적중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외롭고 긴 싸움은, 투쟁가도 바래버린 황야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썩은 달이 떠 흐르는 노동자의 삽자루를 다시 씻게 하고,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게 할 뿐인 시대가 되어 버렸다.
무서운 예감은... 

나는 왠지 잘 빚어진 항아리보다
좀 실수를 한 듯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내를 따라와 옹기를 고르면서
늘 느끼는 일이지만
몸소 질그릇을 굽는다는
옹기전 주인의 모습에도
어딘다 좀 빈데가 있어
그것이 그렇게 넉넉해 보였다
내가 골라놓은 질그릇을 보고
아내는 곧장 화를 내지만
뒷전을 돌아보면
그가 그냥 투박하게 웃고 섰다
가끔 생각해보곤 하는데
나는 어딘가 좀 모자라는 놈인가 싶다
질그릇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실수한 것보다는 차라리
실패한 것을 택하니 <옹기전에서, 전문> 

실패한 것에 보내는 따스한 시선.
좀 모자라는 놈들끼리 나누는 넉넉한 웃음.
투박하게 웃을 수 있는 어딘가 빈데가 있어 보이는 옹기전 주인이 넉넉해 보이는 눈길.
가르쳐야 할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반들반들 윤기 흘려,
오로지 경쟁에서 승리하는 자만의 자뻑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오래된 시를 읽으면서, 오히려 젊어진다.
힘을 얻고, 척추를 올곧게 한번 쭉 펴볼 수 있어 오래된 시를 읽는 일도 마음이 우렁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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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시선 204
장석남 지음 / 창비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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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배를 밀며, 전문>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배를 매며, 전문>



마당에
綠陰 가득한
배를 매다

마당 밖으로 나가는 징검다리
끝에
몇 포기 저녁별
연필 깎는 소리처럼
떠서

이 世上에 온 모든 生들
측은히 내려보는 그 노래를
마당가의 풀들과 나와는 지금
가슴 속에 쌓고 있는가

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
영혼
혹은,
갈증

배를 풀어
쏟아지는 푸른 눈발 속을 떠갈 날이
곧 오리라

오, 사랑해야 하리
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
뒷모습들 <마당에 배를 매다, 전문> 

황동규의 '편지' 연작처럼, 장석남의 '배' 연작을 읽는 일은 행복한 경험이다.
이런 시인의 시들을 알고 있고, 그래서 틈틈이 탐내며 찾아 읽는 일은 사치스런 일이다.
그렇지만, 그 사치스러움은 '호사'에 속하지, 결코 지나쳐 욕들을 일쪽에 속하진 않을 듯 하다.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배를 밀며, 부분)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배를 매며, 부분) 

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
영혼
혹은,
갈증(마당에 배를 매다, 부분)

 그에게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부드럽게 떠나가는 손끝의 아스라함...도 알고,
어쩔 수 없이 던져져오는 밧줄을 운명처럼 매는 것임도 알고, 
영혼을 줄다리기하는 일, 또는 갈증의 하나임도 안다.
그에게서 '사랑'은 늘상 곁에서 허천스럽게 잡을 수 있는 것들이고,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다. 

알고 보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 거기에 사랑스런 눈길을 박는 행동에서 사랑은 시작되고 지속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몇 포기 저녁별
연필 깎는 소리처럼
떠서

이 世上에 온 모든 生들
측은히 내려보는 그 노래... 

이런 눈길을
이런 언어로 풀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나는 이렇게 그를 궁금해 하는데, 그는 언어로 다 펼치지 못한 것들을 아쉬워하면서, 노래나 춤을 추고 싶었다 한다.
욕심쟁이다. 갈증 많은 욕심쟁이. 

둥글게 휜 풀잎의 둥긂
둥긂 위에 앉은 잠자리의 투명
투명 위에 앉은 여름산...
둥글게 휜 풀잎의 둥긂
둥긂 위에 앉은
이슬과 해와,
발자국(여름산, 부분)

 

그걸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
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그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되나 <토란 잎에 궁구는 물방울 같이는, 전문> 
 
키크고
속눈썹 긴
보름달이다 <시월 보름, 부분>

 이런 표현도 어떠냐. 하늘 중천을 휘영청 가로지른 우뚝 솟은 보름달 보며,
키크고 속눈썹 긴... 정우성인가? 
우리말에 이렇게 귀여운 어휘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시는 드물다.
복효근의 <토란 잎에 궁구는 물방울 같이는>처럼 톡톡 튀는 둥근 단어들... 

시에도 자원이란 게 있다면 그건 갈증
그건 아무도 모르게 영혼을 찢어놓는,
남은 모르는 갈증
갈증

시에도 자원이란 게 있다면 그건 물
맛있는 물

이끼 낀 돌처럼 조용히,
한번 더 낮게
조용히

시에도…… <시법(詩法)-샘물이며 갈증인, 전문>

장석남의 '시론'은 잔잔한 물과 같다.
낮고, 고요하면서, 샘물이면서 갈증 그자체인... 시인
그래서 그는 '강1 -흘러감'에서  

어느 깨달음이 저보다 더 어여쁜 자세가 될 것인고 

이렇게 표현했다.
이것은 강의 흘러감에 대한 시이면서, 시에 대한 시일 것이고,
결국 시인에 대한 시이면서, 인간에 대한 탐구일 것이다.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수묵정원 9 - 번짐> 

내가 가장 애송하는 그의 시, 번짐...
번짐은, 
삶의 아침이 밝아오는 여명이기도 하고,
마음의 빛이 서로 비추이는 희망이기도 하다.
기쁨이 번져가고, 물감이 새초롬히 투명한 물 속을 번져가는 모습은
황홀을 번지게 한다. 

풀린

물결이여 네 고요 위에
봄비는 내려와
둥글게 둥그렇게
서로서로 몸을 감고 죽는다 <봄비, 부분> 

봄비의 번지는 모습을 보고 그 둥긂을 바라보고,
이런 죽음과 몸 감음을 보는 사람.
그런 눈을 가진 사람.
그는 천상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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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에 서쪽을 빛내다 창비시선 317
장석남 지음 / 창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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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

인제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殘像들
지나가는 바람이 잠시
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장석남,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장석남, 하면 이 작품이 생각난다. 
아, 아름다운 말소리다. 왼쪽 가슴 아래께...
그 통증 또한 아름답다. 그래서 이 시집도 빌려 두었다. 

묵을 먹다가, 젓가락 끝에서 미끈덩 놓치거나, 묵이 슬쩍 갈라져 버려서 간장 종지에 퐁당 빠뜨린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걸로 이런 시를 쓴다.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묵집의 표정들은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나는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고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상 위에 미끄러져 깨져버린 묵에서도 그만
지난 어느 사랑의 눈빛을 본다고
묵집의 표정은 그리하여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묵집에서, 전문>

  

바위 곁에 석류나무 심었더니
바위 그늘 나와서는 우두커니 
석류꽃 기다리네 

장마 지나 마당 골지고
목젖 붉은 석류꽃 피어나니
바위는 웃어
천년이나 만년이나 감춰둔 웃음 웃어
내외하며 서로를 웃어
수수만년이나 아낀 
웃음을 웃어 

그러니까
세상에 웃음이 생겨나기 훨씬 전부터
울음도 생겨나기 이미 전부터 

둘의 만남이 있었던 듯이
우리 만남도 있었던 듯이 < 바위그늘 나와서 석류꽃 기다리듯, 전문>

석류꽃을 본 사람은 그 소담한 자태에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능소화처럼 청승맞지 않으면서도 탄탄하게 붙매인 주황빛 꽃은
장래 다가설 열매의 농염함에 지레 부끄러워라도 하듯 새초롬히 고개를 숙이고 핀다.
그 석류꽃 피어나는 마당에서 바위는 웃음을 웃는구나.
꽃도 바위도 품위있어 멋지다. 

시집의 뒤페이지에 김민정 시인이 나즈막히 읊조린 말들은 그 앞의 열렬한 시평보다 다정하다.
진정으로 시인의 시를 감싸안으며 읽은 독자의 가슴이 오롯이 드러난다.
묵의 맛과 그의 붉은 뺨과 바위, 그리고 돌계단의 층계...
낙산사 새벽종 치는 일과 요를 펴는 시인의 손길까지...
시집을 읽고 마음에 그려진 도화지 한 장을 살포시 펼친다. 이런 글을 만나면 마음이 황홀해 진다.
홀과 황은, 희와 미 사이에서 온다. 아련하게 비치지만 정확히는 보이지 않는 황홀과 희미의 실루엣. 

이 문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자가 너무 많다
이 문으로 들어설 수 없는 자가 너무 많다
이 문으로 들어오고 싶지 않은 자가 너무 많다 < 대문, 부분 >

술에 취해 들어온 그에게 대문은 갑자기 이물감을 느끼게 하며 덤벼든다.
살아온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꽃같고, 연날리기같던 삶이 추레한 늙음과 오버랩되는 순간...
나는 이 문으로 들어선 것일까?
들어서고 싶기나 한 것일까?
대문을 바라보면서 무추름한 눈길을 던지는 마흔 넘은 사내의 마음이 축축하게 젖어, 함께 서러워진다. 

똥이 튀어 변기를 닦았다...
엿새째 이어지는 설사를 나는
논어를 공부하듯
복음서를 공부하듯 엄숙히
내면에 들여본다
속곳에 지린 것도 몰래 헹구어 내놓고는
윤리를 생각한다 

이슬비는 새벽 내내 처마 끝에 모여들어 한방울식 떨어진다 <변기를 닦다, 부분>

도를 닦는 일은, 사는 일이고,
사는 속에서 구질구질 떨어지는 설사 하나에서도 놓치지 않고 얻는 것이 있고 보는 것이 있는 시인.
그 마음 속을 시로나마 만나는 일은 반갑고 황감하다. 

시 속에 들어가 묵을 먹고,
시 속에 들어가 생활을 만나고...
장석남의 뺨에 손을 넣어, 그 사람을 만지노라면,
서쪽 창에서 비치는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햇살 속에서 시들어가는 사십대의 얼굴에서,
반짝,
빛나는 순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볼은 어린 아이의 그것이지만,
뺨은 나이든 이의 고집스런 부분이다.
그 뺨으로 손을 넣고,
뺨에 비친 빛살의 오후를 빨랫줄에 너는 시인을 들여다보는 나는
시를 통해 고집을 잊고, 잠시나마 나를 잊고,
반짝,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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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문학과지성 시인선 249
신대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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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랭기후... 툰드라에는 순록이 산다. 피하지방 많고 가죽 두껍고 털 북실거리는 넘이...
인간처럼 약한 동물은 툰드라에 살 수 없다.  

이 시집은 외롭다.
낯선 곳에서 시인은 외롭다.
그 낯선 곳이 춥기까지 하다면,
외로움은 더 커질 것이고,
그 외로움과 함께 어울릴 오로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툰드라의 매서운 공기를 폐가 이기기 힘들 때,
문득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를 만난다면,
나와 너는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인지... 

나는 내가 있는 곳에 없고
그대는 그대가 있는 곳에 없고 (아이오와 4,  부분) 

이 책을 읽기 전에 여행기를 읽어선지, 이 문맥이 눈에 확 끌렸다.
'나'는 내가 있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타인이 바라본 그 지점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은, 여기가 아니라, 여기 아닌 다른 지점이다.
여행을 다니면 그 사람을 바로 볼 수 있다던가.
객지 나가면 모두들 애국자가 된다고도 했던 그럼 말들이,
저 한마디에 엉겨붙었다.
나는 내가 있는 곳에 없다. 
그대는... 이하 동문. 

평지 끝에서 산속으로 쫓겨 들어온 그해 겨울, 물소리도 끊긴 옻샘에서 얼음 숨구멍을 쪼던 까만 물까마귀와 마주쳤네. 물가마귀는 나를 깊이 지켜보았고 나는 한눈 팔며 주춤거렸네. 더 쫓길 데 없어 아주 몸 속으로 기어들고 싶었네. 몸 속, 기어들면 영혼이 비치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었네. 

겨울 가고 겨울
바위틈에 물까마귀 언 발자국만 남기고
사람도 산도 잊고 한데에서
나는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 (나는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 전문) 

문득, 그럴 때가 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가고 싶은 때가.
딱히 세상 살기 싫은 것도 아닌데, 무작정 떠나고 싶을 때가 있는 거다.
그 사람의 마음이 그럴 거다.
자기가 있는 건지, 뭔지... 모를 때, 무작정 모든 관계에서 해방되어 길을 떠나고 싶은 그런 것. 

몸부림치면 칠수록, 조국과 멀어질수록
조국과 가장 가까워지는 곳. (Sam and Lee -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4, 부분) 

다른 길로 나가고 싶었습니다.
다르게 살아보려구요. (새, 부분) 

밖으로 나가서야 안이 보이는 역설.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는 역설. 

떠돌아 다니며 살 수밖에 없는 글로벌 시대의 '유목민'의 사고와 접속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나무처럼 정주한 존재보다는, 뿌리 줄기로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이러구러 뻗어나가는 그런 것이기도 하고... 

들뢰즈, 가타리 같은 이들이 유목민의 시대니, 리좀이니, 노마디즘이니 하기 전에도,
일제시대 이전에도... 약한자들은 떠돌며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을...
그런 존재들은 세계화 이전부터 세계 속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것을 시로 적으니...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쓴 편지가 되고 말았다. 

외로울 때,
이런 낯설지만,
또 엄청 외로워서 투박한 손길이나마 그리울 때, 두꺼운 장갑낀 그의 손이라도 잡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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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없음으로
오세영 / 좋은날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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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의 '사랑시'를 모았다고 하는데, 너무 기대하면 실망한다.
오세영의 사랑시는 거개가 '이별시'이며, 이별 후의 '아픔'에 대한 시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사랑이란 것이 존재를 보그르르 끓게 하는 것은 잠시이며,
애태우고 속끓이며 가슴 아파하고 그리움에 눈물짓는 '시간성의 문제'임을 생각한다면,
사랑노래를 오롯이 행복한 시간들에만 할애할 수는 없을 일이다. 

그렇지만, 이 시집에서 올곧게 행복으로 치닫는 시들을 찾아보는 일은 힘들다. 

당신을 만난 후
나는 어찌 이렇게 되었습니까,
아는 것을 모르는 것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깨닫습니다. (역설, 부분) 

이미 알게 된 것들이 눈에 밟힌다. 그 눈길에서 금이 쨍~하고 갈 것 같은 마음.
그 시린 마음은 아픔으로 사랑을 완성시키는 과정이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은 시간만 지나면 자연스럽지만,
아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돌릴 수는 없는 법. 사랑의 역설은 신산하다. 

사랑하는 이여, 그러므로
다시 만날 수 없거든 차라리
멀리 떠나갈지니
가까이 있으면서도 먼 것이
멀리 있으면서도 가까운 것보다 더
먼 까닭이니라. (멀리서, 부분)

<Smile Again>이란 영화가 있었다. 하키 선수가 해외로 시합을 다녀오는데, 사망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소식을 여자친구는 듣게 되고, 어찌어찌 하다 그 선수가 사고로 불구가 되어 차라리 죽었다고 소식을 전했다는 슬픈 이야기였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먼 것은, 멀리 있으면서도 가까운 것보다 더 먼 까닭.
이런 말을 쓰는 시인의 마음은 참으로 시린 것일까?
아니면, 그런 마음을 읽어내는 따스함일까...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다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원시 遠視, 전문)

나이먹어 아름다워지는 일에 대한 시는 많지만,
원시처럼 원숙함을 애절하고 슬프게 쓴 시는 많지 않다.
작가의 서러워하지 마라...는 말이 괜스레 더 서러워지는 것이,
거리가 멀어서가 아니라... 바라봄이 멀어지는 일 때문임을... 제목에서 드러낸다.
아름다움도 젊어서의 기준과 아주 다르게 되어가는 일임을... 

꽃씨를 떨구듯,
그렇게 떨궜다.
흙위에 눈물 한 방울,
돌아보면 이승은 메마른 갯벌,
목선 하나 삭고 있는데,
꽃씨를 날리듯
그렇게 날렸다
강변에 잿가루 한 줌, (꽃씨를 묻듯, 부분)

오세영에게 이별은 낯선 일이 아니다.
사랑의 다른 한 켠에 맞붙은 것의 이름이 이별이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에 아프게 붙어있는 이별은 끝이 아니라, 쉼표로 살아있다. 

강변에 잿가루 한 줌,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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