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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보 마음 - 시인 문태준 첫 산문집
문태준 지음 / 마음의숲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문체 Style란 것이 있다.
누구든 글을 쓰면, 그 사람의 성격이 보인다.
둥근 사람이 있고, 뾰중한 사람이 있고, 날카로운 사람이 있고, 시니컬한 사람도 있다.
물론 둥글면서도 날카로운 글맛을 느낄 수도 있고,
뾰족하게 찌르면서도 다사로운 정맛을 품고 있을 수도 있다.
시종일관 시니컬로 내지르는 글도 있지만,
세상 모든 어려움 다 품고 갈 법한 느릿하고 세심한 문체를 만나 정말 천천히 읽는 일도 즐거운 일이다.
가재미의 시인 문태준.
그의 산문집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내 마음은 몹시 분주했다.
아이들의 수능 원서를 작성하게 해야 했고, 대입 정원의 60%나 되는 수시모집에 지원해 보려는 아이들과 상담을 시작했는데, 대입 상담은 아이들의 상상과 학부모의 욕망과 담임의 현실 사이에서 삼각형이 그려지는 것을 뻔히 보고있는 일에 불과하다.
서로 다른 극점을 향해서 달리는 상상과, 욕망과, 현실은... 결국 슬프게 끝이 나게 마련인데...
객관적인 관점을 가진 것은 교사 뿐이지만, 실제 현실 속에 살 것은 학생과 학부모이기에, 그들의 욕망을 이길 수 없는 일이다.
분주한 마음 속에서, 느릿한 문태준의 글을 읽을 시간을 가끔 내는 일은,
명절 전날 다들 음식 준비로 바쁜 가운데, 조용히 목욕탕이라도 가는 기분이었다.
불교방송 pd로 일하는 그는 일 속에서 조용하게 삶을 관조하는 습관이 든 시인이다.
일과 시가 하나로 묶일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방송 일이란 것도 얼마나 분초를 다투는 일일지 생각해 보면,
바쁠 수록 느리게 가라~는 말이라도 던질 것 같은 느림보 마음,에 가서 눈이 머물면... 그의 마음이 읽힐 것 같기도 하다.
김천에서 살아 어린 시절의 고향은 시골인 그가 간직하고 있는 추억을 풀어낼 때, 그의 글은 가장 속도가 난다.
그렇다고 세상이 이렇게 획획 속도를 내며 돌아가는데, 문태준이라고 마음이 널뛰기에서 편할 수가 있겠는가?
그 마음을 지키려고 남들보더 더 노력했을 따름일 것이다.
정약용의 수오재기를 옮기는 것으로도 그의 마음 씀씀이가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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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나만은 지켜야 한다. 내 밭을 지고 달아날 자가 없으니 밭은 지킬 필요가 없다. 내 정원의 여러 가지 꽃나무와 과일 나무들 역시 그 뿌리를 땅 속에 깊이 박고 있으니 뽑아갈 자가 없다. 내 책을 훔쳐 없앨 자도 없다. 성현의 경전이 이 세상에 퍼져 물이나 불처럼 흔한데, 누가 능히 없앨 수 가 있겠는가. 내 옷이나 양식을 훔쳐서 나를 궁색하게 하겠는가. 천하에 있는 실이 모두 내가 입을 옷이며, 천하에 잇는 곡식이 모두 내가 먹을 양식이다. 도둑이 비록 훔쳐 간대야 한두 개에 지나지 않을 테니, 천하의 모든 옷과 곡식을 없앨 수 있으랴. 그러니 천하 만물은 모두 지킬 필요가 없다. 그런데 오직 '나'라는 것만은 잘 달아나서, 드나드는 데 일정한 법칙이 없다. 아주 친밀하게 붙어 있어서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다가도, 잠시 살피지 않으면 어디든지 못 가는 곳이 없다. 이익으로 꾀면 떠나가고, 위험과 재앙이 겁을 주어도 떠나간다. 마음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만 들어도 떠나가며, 눈썹이 새까맣고 이가 하얀 미인의 요염한 모습만 보아도 떠나간다. 한번 가면 돌아올 줄을 몰라서, 붙잡아 만류할 수가 없다. 그러니 천하에 '나'보다 더 잃어버리기 쉬운 것은 없다. 어찌 실과 끈으로 매고 빗장과 자물쇠로 잠가서 나를 굳게 지켜야 하지 않으리오.(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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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지키려고 매 순간 노력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중심으로부터 멀리 달아나 버리는 것이 자신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 중심을 지키려고 끝없이 마음을 벼리는 것이다.
그래서 곁에 두고 사랑했던 것들이 '사군자' 같은 것인데, 그의 '한난을 바라보는 시간'은 한 편의 시다.(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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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난잎은 나아가되 곧장 나아가지 않고 구부러지며 나아갑니다.
한난잎은 등이 휜 사람 같고, 하늘로 나아가는 언덕 같고,
발등 같고, 살짝 오므린 손 같고, 서글서글한 눈빛 같고,
기울어진 외벽 같고, 먼 바다로 날아갔다 돌아오는 갈매기의 선회 같고,
바다가 들어오는 해변같고, 초승달 같습니다.
한난잎은 둥글게 휩니다. 배척이 없습니다.
그 부드럽고 완만한 곡선이 한난잎의 모습입니다.
부드럽고 완만한 곡선은 은애 恩愛의 모습입니다.
한난잎은 공손하고 고요하고 깨끗합니다.
무턱대고 나서지 않아 요사스럽지도 않습니다.
곡 曲이 한난잎의 본성이지만
그렇다고 구부러지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지러워지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한난잎은 살처럼 물렁하지만 뼈처럼 단단합니다.
휘되 부러지지 않습니다.
무고집의 고집이 한난잎의 심성입니다.
그 심성으로 한난잎은 直 직을 완성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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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지켜야 하되, 한난잎을 바라보듯, 둥글면서도 곧은 '외유내강'을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 하다.
성철스님의 당부 다섯 가지.
손에는 일을 줄이고,
몸에는 소유를 줄이고,
입에는 말을 줄이고,
대화에는 시비를 줄이고,
위에는 밥을 줄여라.
참 줄이기 어려운 것들을, 욕심내기 좋은 것들을 다섯 가지나 늘어 놓았구나...
무사시귀인 無事是貴人
일을 벌이지 않고 사는 사람이 귀한 사람.
나서지 않고, 물러나 앉고, 잘난 체하지 않고, 겸손하라는...
석수화향 심강무성 石壽花香 深江無聲
돌처럼 흔들림 없고 꽃처럼 향기로우며, 깊은 강처럼 한결같이 소리없이 살아가는 경지
강은 곧바로 깊어지지 않는 법. 물이 쌓이고 쌓일 때 깊어지는 것.
릴케가 '명성은 새로운 이름의 주위로 모려드는 온갖 오해의 총칭'이라 했다는데,
그런 오해를 즐기다 보면,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일과 소유와 말과 시비와 밥그릇 싸움의 중심에서 이전투구하고 있는 자신을 보기 쉬운 것이 인간이다.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처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처 주는
그런 사람이 될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수 있을까
세상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이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주는
하얀 들꽃이 될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 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처다 보면
반짝이는 그 맑음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어 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이성선, 사랑하는 별 하나, 전문)
이성선의 이런 시를 통해 비추이는 그의 마음 한 켠을 들여다 보면,
완강한 삶의 고집과 함께 흔들대는 외로움이 평화 속에서 매 순간 흔들리는 모습도 보인다.
고집스런 뺨 서쪽으로 언뜻 저녁 노을지는 햇빛이 비추이는 시간이 누구에게나 있듯 말이다.
사랑하는 별 하나, 그것을 갖고 있는 <자신>을 또한 발견하는 것이 그의 문장이 평화로운 이유이지만,
사랑하는 별 하나, 그것은 누구도 가지기 힘든 것임을 그 역시 알기에, 부처님의 이야기들 속에서 진리를 찾아 헤맨다.
쓰다듬는 것 속에서 '열애'를 발견하는 그의 하루하루는 느릿해 보이지만
그 느림은 결코 게으름에 가까운 것은 아니다.
매 순간 살아서 시어를 조탁하고 선택하는 고심을 하는 그의 하루하루는 느림보지만 치열하다.
치열한 삶은 매 순간 쓰다듬는 속에서 뜨거운 사람을 만난다.
타샤 투더를 두고 그린 박라연의 시를 소개한 것도 그런 의도였을 것.
박라연의 <빛의 사서함>이란 말도 참 내가 좋아하는 말인데,
사서함은 우체국 한켠에 빌려둔 우편함인데, 거기에 빛을 보내려는 환한 마음이 이쁘기 그지없다.
수십 년을 하루같이 수십만 평의
자연을
밥벌이시키며 구십이 저무는 타샤 튜더
그녀는 이 세상을 벌면서
저 세상도 벌고 있었다는 것
너무 늦게 알아봤어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을 경계 없이 드나드는
심부름꾼인 양 그녀
저절로 조금씩 자연으로 바뀌어져서
장례도 필요 없다는 걸
우리는 생의 편이지만
생은
죽음의 편이라는 걸 (안경이 없어서, 박라연)
책을 다 읽고도,
마음에 잔잔한 울림이 남았을 때, 나는 제목 차례를 다시 들춰보는 습관이 있다.
제목들을 다시 고요하게 들여다 보면서, 나는 글쓴이의 마음 씀씀이를 들여다 보는 것인데,
이 책의 제목들에서 낚아 올린 언어들, 내 눈에 들어온 어족들을 적어 둔다.
그것이 가재미의 납작한 눈에 비추인 세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에...
느린
아름다운
시원하고 푸른
새롭게 기다리는
가을 과일이 익는 속도
따뜻한
움직이고 흘러가는
소리를 내지 않는
봄비처럼 통통한
한 생각 청정한
따뜻한 화로 같은
쓰다듬는
차츰, 조용히, 차근차근하게
강보처럼 감싸던
빛바랜
누나는 나를 업고
상여가 지나가는
걸음의 속도
당일과 공일
더듬대고 어슬렁거리고 깡마르게
작은
제목에서 걷어올린 이런 말들을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일요일 아침, 마음은 고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