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거울 창비시선 127
이가림 지음 / 창비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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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는 나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
무한한 반사의
환한 허공 속으로
뚫린 길 

없는 나를 찾아
그림자 하나
홀로 헤매고 있다 (순간의 거울 3, 전문) 

이가림, 1943년생치곤, 이름 참 예쁘다. 아니, 잘 생겼다. 

순간의 거울이란 시집 제목을 보고는,  이런 상상을 했다.
엘리베이터 양면에 붙은 거울들이 반사하고 반사하는 모습 속의 나,
또는 제주도 거울의 집 안에 비친 삼각형 거울들에 비치는 나의 옆모습 뒷모습들...
'없는 나'를 그 '숱한 나들'로부터 찾아내는 눈이 신선하다.

나는 지하철을 사랑한다 /2만5천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인천행 지하철에 흔들릴 때마다
2만5천 볼트의 사랑과 /2만5천 볼트의 고독이 /언제나 내 안에 안개처럼 /넘실거리기 때문이다  

징그러운 발을 감추고 /안 보이는 한쌍의 촉각을 세운 채 /음습한 곳에 묻혀 사는 벌레들을
마구 잡아먹는 /한 마리 길다란 지네

그 꿈틀거리는 몸뚱어리 마디마디 /환히 불 밝힌 방 안에서 /학생 공원 선생 군인 회사원
창녀 수녀 신문팔이 소매치기 /이 땅의 눈물겨운 살붙이들 모두가 /서로 뺨을 맞대고
서로 어깨를 비벼대고 /서로 밀치고 /서로 부추기고 /서로 껴안으며 /즐거운 지옥의 밧줄에 묶여 끌려간다

이리 부딪치고 저리 쓰러지는 /그 장삼이사의 물결 속에 /몸을 던져 /나 또한 즐거이 자맥질한다

너의 살결에 /나의 살결이 닿고 /너의 숨결에 /나의 숨결이 섞이는 /황홀한 세상

거대한 군중의 파도가 /물거품의 자취조차 없이 /나의 파도를 삼킨다.

나는 지하철을 사랑한다 /2만5천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인천행 지하철에 흔들릴 때마다
2만5천 볼트의 사랑과 /2만5천 볼트의 고독이 /언제나 내 안에 안개처럼 /넘실거리기 때문이다 (2만5천 볼트의 사랑, 전문)

그의 눈은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따뜻한 눈으로 지하철 안의 사람들을 응시하노라면, 모두가 뺨을 맞대고 즐겁게 지옥으로 간다.
지하철과 지옥과 지네의 혼성 화음 속에서 시인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민중과 지하철을 그는 사랑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 미안하다는 듯이 쪼그라진 늙은 짐승 한 마리가 길 모퉁이 응달 아래 주저앉아 굴을 까고 있다. 차갑게 소리내어 떨고 있는 카바이트 불을 향해 갈 곳 없는 성긴 눈송이들 몇 점 날파리떼인 양 날아와 치지직 타 죽는다. 새빨간 혈관의 네온사인이 도시의 피를 빨아들이는 밤이 깊어가도 주름살 깊게 파인 짐승은 곰팡이 핀 동굴로 쉬이 돌아갈 줄 모른다. 그의 그림자가 무지개빛 아롱진 개울까지 길게 뻗어 수륙 양서의 괴물처럼 웅크린 채 꿈꾸듯 꿈틀거린다. 아아, 아무도 보지 못했으리라. 카바이드 불 꺼진 길모퉁이에서 굴 까는 손이 시커먼 밤의 아가리에 물려 아귀아귀 뜯어먹히고 있음을 ! 구겨진 부대자루 하나가 쓰러지듯 그렇게 그는 쓰러졌다. (길 모퉁이의 생, 전문) 

하나님이나 되듯/ 양철 함지박을 이고 다니며/ 못생긴 꼴뚜기, 갈치 따위를 팔다가//
발바닥에 물집 생겨/ 물집 터져/ 쓰라림도 그 무엇도 아닐 때까지/ 팍팍한 하룻길 돌고 돌아/ 솔, 좀약, 양말, 고무줄, 수세미 따위/ 알록알록 잡동사니 팔다가 팔다가//
언제나 자정 넘어 돌아오는/ 그 몸뻬 입은 여자의 / 삐걱 소리 삐걱 소리 손수레의 삐걱 소리//
한마리 더러운 하마같은/ 그 여자가/ 돈을 속곳 깊숙이 감추어둔 그 여자가/ 오늘 마침내 시립병원에서/ 쓰러졌다고 한다/ 온르 마침내 장사를/ 마감해버렸다고 한다//
멀고 먼 어둠 저쪽에서/ 들려오는/ 삐걱 소리 삐걱 소리 손수레의 삐걱 소리 (귀가, 전문) 

죽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다 육신을 벗는 부처들의 모습을 그는 놓치지 않고 그린다.
며칠 전 인터넷을 울렸던 어느 용광로에서 산화해간 청년에게 부치는 글이라도 그는 썼을 것이다. 

광온(狂溫)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도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못을 만들지도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모두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인터넷 alfalfdlfkl) 

세상엔 언제나 낮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 낮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낮춰보는 일은 너무도 흔하다.
하는 일이 <낮아보이는 일>이고, 보수가 <낮은 일>일 뿐이지.
그 사람이 <낮은 사람>인 것은 아닌데... 그 사람을 <낮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더러운 세상이다. 
벽을 보고 욕이라도 하듯, 시에서라도 마음을 달구어야 하는 것이다. 

아아, 헛되고 헛되도다
새 한 마리 떨어뜨리지 못하는
미친 시인의
사격술이여 (헛수고, 부분) 

언어는 늘 핵심을 어느 정도 벗어난 곳에 가서 날아가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시인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 언저리를 벅벅 긁어봐도, 격화소양, 신발 신고 긁는 듯 시원하지 않으니, 미친 시인의 사격술은 무기력하다. 

하나뿐인 제 몸을 내던져
살갗과 살갗 서로 부비는
저 빛 머금은 눈물 같은
목숨들의 발걸음! (하나가 되기 위한 빗방울들의 운동, 부분) 

90년대의 시집에는 그래도 이런 연대감을 드러낸 시들이 많았다. 21세기와 함께 열에 녹아버린 한 점 눈처럼 사라져버린 그런 연대감이... 

그대가 밤마다
이곳 문전까지 왔다가 가는
그 엷은 발자국 소리를
내 어찌 모를 수 있으리

술 취하여
그대 무릎 베개 삼아
잠들고 싶은 날

꿈길 어디메쯤
마주칠 수도 있으련만
너무 눈부신 달빛 만리에 내려 쌓여
눈먼 그리움
저 혼자서 떠돌다가
돌아올뿐

그동안
돌길은 반쯤이나 모래가 되고
또 작은 모래가 되어
흔적조차 사라져

이젠 내 간절한 목마름
땅에 묻고
다시 목마름에 싹 돋아
꽃 필 날 기다려야 하리.(목마름, 옥봉 이씨에게 보내는 편지) 
近來安否問如何 (근래안부문여하)
月到紗窓妾恨多 (월도사창첩한다)
若使夢魂行有跡 (약사몽혼행유적)
門前石路半成沙 (문전석로반성사) (몽혼, 이옥봉)

요사이 어떠신지 안부를 전합니다. 달이 창가에 이르면 제 한이 많습니다.
만약 꿈속 혼이 다닌 자취 남긴다면, 문 앞 돌길은 반이나마 모래가 되었을 것을...

옥봉의 한시, 몽혼을 읽고 쓴 시 목마름도 아름답다. 

시인의 예민한 마음의 촉수를 적시는 세상의 기체들은 달콤한 것들만은 아니다.
시큼한 땀 냄새도 잡히고,
물큰한 비린내도 잡힌다.
알싸한 눈물 냄새도 잡히고,
처절한 피 냄새도 잡힌다. 

이가림은, 가리지 않고 촉수에 닿는 냄새들을 잡아 시로 옮기는 힘을 가진 시인이다.
권위주의와 상업주의를 싫어하여 과작의 시인임이 좀 아쉽지만, 이가림의 시들의 힘은 독자의 마음에도 굳게 전해지기도 해서 읽는 이를 고양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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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사전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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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속, 살과 뼈의 틈바구니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마음'이라는 것.
그 마음이란 것을 잡고자 하는 이는 많지만, 그 마음은 언어로는 휘어잡을 수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두뇌 속의 가녀린 전기 흐름으로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것이어서,
마음이라는 녀석은 항상 정해진 숫자로서가 아니라, 무엇과 무엇 사이라는 범위로 사로잡아야 하는 것들인데... 

김소연은 그 마음의 다양체들을 사로잡으려는 생각을 애초에 버렸고,
그래서 그 마음의 범위들을 틀에 가두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 마음이란 것을 이해하기 좋도록,
그것이 대조적이라면 대조적인 것들로, 비교할 것들이라면 비교하는 것들로,
같은 통사구조를 반복하는 쉬운 대구를 통해서 주루룩 풀어버리고 있다. 

이 책은 시집이라면 시집이고, 사전이라면 사전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김소연의 이 글들을 필사본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손으로 쓰는 일보다 타자가 쉽다면, 그렇게라도 그의 글들을 적고 싶었다. 

예를 들면,

이해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렇게, '이해'와 '오해'를 아래위로 나란히 두고 읽어보고 싶은 것이다. 이 사전에서는 그런 시도를 해주지 않았기에,
그래서 몇 가지를 시범적으로 두들겨 보았는데, 천천히 적게 된다.
그가 적은 글자들 사이에서 내 마음을 찾아보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그에게 들킨 내 마음을 금세 감춰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기심 : 자기애

‘이기심’은 타인에게 사랑받는 그 순간을 가장 기뻐한다면,
‘자기애’는 자신 바깥을 둘러볼 때에 스스로를 사랑할 힘이 생긴다.
     이기심은 상대적이고 동시에 타산적이며,
     자기애는 자기중심적이고 동시에 이타적이다.
이기심은 자기 함정에 빠져 있고,
자기애는 자기 사랑에 빠져 있다.
곤란한 상황에서, 이기심은 타인을 써먹고
                        자기애는 스스로를 사용한다.
이기심은 계산하고 시샘하느라 바빠서 자기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불친절하지만,
자기애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스스로를 사랑해줄 사람을 발굴해내느라 바빠서 계산하고 시샘하질 못한다.

이기심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모멸감을 느끼지만,
자기애는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에 다음 기회를 모색한다.
     이기심은 대로는 체면을 내동댕이치지만,
     자기애는 때로는 체면을 지키기 위해 손해마저 불사한다.
이기심은 칭찬을 이용할 줄 알고,
자기애는 칭찬에 고마워할 줄 안다.
     이기심은 조심성보다는 실천력을 내세우고,
     자기애는 실천력보다는 조심성을 내세운다.
이기심은 추진력에 관한 한 자기애를 언제나 이긴다.
     이기심은 그래서 성공을 보장하지만,
     자기애는 품위를 보장해준다.

이기심이 손을 뻗어 만들어내는 연대감은,
      연대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배타적이기 때문에 집단 이기주의로 성장해 나간다. 반면,
자기애가 손을 뻗어 만들어나가는 연대감은,
      정서적 교류를 함께 하는 공동체를 만들며, 자신이 지닌 인플루엔자로 주변을 정서적으로 감화시킨다.  
이기심이 원하는 것이 많아 관계에서 불만을 축적해가는 동안에,
자기애는 주고 싶은 것이 많아 관계에서 미안함을 축적해 간다.
     사랑에 빠졌을 때에, 이기심은 비로소 자기를 사랑해줄 사람을 얻은 것이지만,
                                 자기애는 자기가 사랑할 사람을 한 사람 더 얻은 것이 된다.

이기심은 스스로가 언제나 약자처럼 느껴져서 자신이 받은 상처만을 되뇌며 억울해하고 있다면,
자기애는 스스로가 언제나 강자처럼 착각돼서 자신이 줬을지도 모를 상처만을 상상하며 자책하고 있다.

 

질투와 시기

질투는 자기가 못 가진 것을 향해서만 생기는 감정이지만,
시기는 자기가 갖고 있으면서도 생기는 탐욕이다.
     질투는 시기보다는 깨끗한 감정이다.
질투 때문에는 잘될 수 있지만
시기 때문에는 망가지기 쉽다.
     스스로에게 질투는 힘이 되고
                     시기는 폭력이 된다.
그래서 질투는 예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시기는 예쁘지가 않다.
질투는 사랑과 동경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만,
시기는 반목과 질시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질투는 자기가 못 가진 것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시기는 남의 것을 뺏거나 얻으려던 것을 못 얻으면 자기 것마저 잃게 한다.


작가가 대조적으로 쓴 것들이 아래위로 가지런히 놓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뿌듯해 온다. 

이 책을 읽는 재미는 이런 것이다.
내 마음 나도 몰라~
이런 상태일 때,
이 책을 펼쳐 뒤척거리며 읽는다면,
얘, 네 마음을 요 페이지에 적은 이런 말이라면... 어때? 좀 근사치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니? 
이러면서, 작가가 말이라도 걸어올 것 같은 그런 책이다. 

깔끔하면서 멋진 책. 어떤 형용사나 관형어를 쓰더라도 정확하게 그 좋은 점을 드러내기 어려운 좋은 책, 을 한 권 읽었다. 

이탈리아 파르마 대학 생리학 연구소 소장인 자코모 리촐라티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타인의 행동을 비춰주는 신경 세포인 <거울 뉴런>이란 것이 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행동은, 관찰하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는데, 이것이 공명현상이고, 그 공명현상의 근저에 거울 뉴런이 있다는 것. 

김소연의 거울 뉴런은 일반인에 비하여 독특하게 발달하여 있는 듯 하다.
그래서 공명현상이 크게 울림을 주는 사람인지도... 

------------ 김소연의 실수 하나! 

단맛은 혀끝에서 짠맛은 혀 전체에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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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0-09-16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 사전 참 멋지네요

글샘 2010-09-17 23:03   좋아요 0 | URL
읽어보시면, 정말 멋진 줄 아실 걸요?
 
학벌사회 - 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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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교수가 2004년에 쓴 '한국 학벌 사회 문제'에 대한 쓴소리다. 

조선 말, 정조 임금이 죽은 후 순헌철 3대 임금 60년간, '벌열 정치'가 판을 치게 되었고,
그 뒤에 권세를 잡은 세력들 역시 자기 권력을 지키려 외세를 들여와 동학군을 죽이곤 했던 나라.
결국 식민지로, 전쟁터로, 군사 독재의 싸움터로 수 세기를 살아온 특이한 섬나라, 한국. 

세계에서 가장 급속하게 경제적 발전을 이룬 나라의 하나지만,
아이를 가장 적게 낳는 것으로 보아, 삶의 만족도가 가장 떨어지는 나라의 하나가 되었고,
세계적으로 공부를 잘 하는 나라 축에 들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교육비'로 성적을 무색케 하는 나라.
그 모순의 핵심에 들어앉은 문제로, <학벌 사회>를 들고 나섰다. 

학벌없는 사회... 만들기 운동을 펼친 김상봉 교수의 소회를 아주 두꺼운 책으로 써서, 강준만 교수보다는 좀 있어보이는 책이 되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도 개운하지 않은 것은 여전하다. 왜 그런 걸까? 

책을 읽고 난 소회는, 결국 역사의 더께 속에서 형성된 <학벌 사회>의 현실을 타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민중의 저항으로, 결국 <의식화된 민중>의 연대로 깨부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을 서로 주체성이란 용어를 써가면서 역설하고 있는 것인데, 권영길, 이정희, 심상정, 유시민 등 진보적 세력조차도 서울대 출신임을 고려한다면, 학벌 타파란 과제가 정말 장구한 세월을 필요로 하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이번 주는 대학 입시를 위한 수시모집 원서 접수로 혼이 나간 일주일이었다.
그렇지만, 상담을 하면서도 참담한 것은, 아이들이 원하는 대학은 '공부를 하는 학문의 요람'이 아니었다는 사실...
한국 대학의 존재 이유는 <배움을 통해 얻는 이익> 중에서도 '전문적 지식'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스펙(경력)'으로서의 그것이고, 졸업 후 헤쳐 모일 때, 좀더 튼튼한 동앗줄 역할을 할 '신식 카스트 내지 문벌 가족'의 하나로서 <대학의 이익>을 구하는 것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슬픈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 

학문의 구렁텅이 역시도 서울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몇 년 전의 <이명원이란 대학원생이 김윤식을 비판했다 매장당한 사건>에서도 학문의 내용보다 학벌은 우선됨을 보여주고 있다. 김윤식이란 대단한 존재가 길러낸 서울대 국문과 출신 교수들에게 김윤식 비판은 '사문난적'에 해당하는 괘씸죄였던 것이다.
교수 사회의 갑갑한 문벌 의식은 남다른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한국에서처럼 외국의 다양한 경험을 한 박사들을 개무시하는 풍토가 또 있을까? 그 대학의 학사, 석사, 박사를 주주룩 꿰어 차야만 그 대학의 교수 자리 하나 얻을지 말지라니...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 하나로 야만적 차별과 폭력에 시달리는 청소년들.
그리고 공부 하나 잘한다는 이유로 온갖 특권을 누리려는 1등병 아이들.
<학벌>은 불변성, 폐쇄성, 계급적 동질성으로 인해, 근대의 전통적 문벌 계급의 대체물이 되는 데 성공했다.
모든 아이들은 이 <학벌 사회>의 피해자가 되어버린 것인 바, 학벌의 타파가 한국 교육 개혁의 '화두'가 되어야 하고,
한국의 모든 정책은 그 개혁을 염두에 둔 것이어야 하는데,
<교육열>이란 이름으로 미화된 <제 새끼 학벌 사회에 편입시키기> 전략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편법과 불법을 동원하여 교육이란 이름으로 아이들을 망치고 있는 것이다. 

교육의 붕괴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제거해 버려서, 돌이켜 생각하거나 더불어 생각하는 힘을 거세했다.
무소유가 아닌, 무사유만이 살 길이고, 도덕성을 생각할 이유조차 파탄의 경지로 몰아버렸다.
사유와 도덕성이 붕괴된 것과 긴밀한 것이 예술 교육의 실종이다.
'개별적 경험'도 소중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일반적 특성'을 외워서 집어내는 시험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이다.
생각하는 힘, 도덕성, 예술적 감수성을 고려한 교육을 실시하면, 과연 교육이 실패할 것인지...
지금 이 땅을 휩쓸고 있는 자율형~ 광풍은, 음미체와 기술가정, 제2외국어 등의 과목뿐 아니라, 사회 과학 등도 퇴출해야 할 대상으로 삼고 있다. 오로지 국영수만이 살 길인 모양이다.
나도 몽둥이로 무장하고 아이들에게 언수외만을 열공하라고 강요하는 간수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한 현실을 슬퍼하면서도,
또 몽둥이를 들고 뺑뺑이를 돌아야 한다. 

전문대에서 학생 모집의 일환으로 고교를 방문했는데,
일본인 원어민 교수도 한 분 같이 왔다. 교무실 탁자 위의 몽둥이를 잡더니 이게 뭐냐고 묻는다.
사랑의 회초리라고 옆자리 교수가 알려주자, 자기 남편도 좀 때려야 겠다고 농담을 한다.
하긴, 한국인 남편이라면 좀 맞아도 되겠지만... 일본에선 때리는 교사는 있을 수 없단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이라면, 예술, 기술, 학술... 같은 것인데,
한국 교육에선 이런 것들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 도대체 뭘 하자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로 앞차 꽁무니만 물고 달린다.
어디로 달리는지, 앞차의 미래가 어떤 것인지, 좌고우면하며 고심할 틈이 없다.
오로지 위로, 위로 올라가던 애벌레처럼, 고민하면 뒤처질 뿐인 사회. 

예술, 기술, 학술 같은 활동을 통하여 <종합> Synthesis에 도달하는 것이 인간 정신의 고양인데,
이런 종합이 인간 정신의 자발성과 능동성의 산물인데, 한국 학교에서 자발성, 능동성을 통한 종합적 발현은 학교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도, 입학사정관 제도는 이 종합적 활동을 판단의 근거로 삼겠다고 하고, 실적도 없는 학생들이 오로지 경쟁률이 낮다는 이유로 원서 접수를 하고, 실적을 만들어 내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다. 

대학의 서열화, 학벌이 인생의 큰 부분을 좌우하는 사회에서 사교육 문제는 해결책이 없다.
어느 정부나 '사교육 안정'을 정책으로 내세웠지만, 결국 학벌 사회와 서울대 연고대의 서열이 튼튼하게 존재하는 한, 끝없는 제 살 뜯기는 반복된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대학의 평준화, 서울대 학부의 폐지 등을 해결책의 하나로 제시하지만, 이것을 정책적으로 밀어붙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소요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며, 또한 많은 반대자들과 대화와 설득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또 정권이 바뀌고, 아이들만 혼란스런 사회가 반복될 것이 불 보듯 뻔 하여 답답하기만 하다. 

전교조 같은 진보적 성향의 집단과 깨어있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기도 하지만,
대안을 내세울 수 있는 집단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의견에 충분히 경청할 수 있는 귀를 가진 정치가가 없기에 이 일은 앞날이 암담하기만 한 것이다. 

무슨 경찰이나 교도관도 아닌데, 매일 밤 10시까지 시간외 수당을 타는 나는 엄청 월급이 많다.
한 달에 시간외 수당으로 5,60만원을 더 받는다.
학부모들은 제 자식의 카스트를 결정지을 대입 사업에 제각기 골몰하는 상황이다.
학벌 없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읽으면서, 노력은 가상치만,
그들의 노력이, 정말 '가상 현실'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수당만 타먹는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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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 시선 16
김경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김경주 시를 읽는 일은, 당황스러움에 직면하는 일이다.
여느 시인들의 시집을 펼쳐들면,
그 시인들의 언어들이 전개하는 삶의 결들이
나의 삶과 어떤 점에서 교차하는지를 탐색하면서 읽게 된다.
그 탐색의 항로에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고, 정말 기막힌 표현을 얻으면
시집 갈피 사이에 손가락 하나 꽂아 두고 먼산 바라기를 하게도 되는 것인데... 

김경주 류의 시들을 읽노라면, 도무지 언어들 사이로 나의 의지로는 의식이 침투되지 못하고,
눈동자는 글들을 따라가지만, 머릿속에서는 온갖 환상이 환장할 지경으로 떠돌아 다닌다.
그의 정신 분열을 독자의 뇌가 따라가야 하는 건지, 이쯤에서 놓아버려야 하는 건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로,
질질 끌려가는 사태의 당황스러움이란... 

그렇지만, 그의 시를 읽으면서, 간혹 기막힌 표현에 직면하기도 한다.
그러면, 앞의 불편함들을 또 잊고서 그냥저냥 읽을 만 하네~ 이러면서 또 평행선을 그리는 독서에 빠져들게 되는데... 

시집의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라니...
자신을 ~~이다. 라고 정의한다면, 피정의항 = 종차 + 유개념이란 공식에 따라, 다른 부류들과 차이나는 말을 앞에 제시하고, 뒤에선 자신이 포함되는 집단을 들이밀어야 할 것인데, '나는 계절'이란 비유도 낯설거니와,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란 표현이 무얼 뜻하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일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
그럴 때, 풀리지 않는 문제는 곰곰 생각하기보다는 정답을 참고하는 방식의 학습법도 있듯이, '표제시'를 찾아 읽어 보면, 도대체 작자가 주장하는 바가 뭔지 알 수 있겠다, 해서 그런 제목의 시를 찾아보면, 어디에도 없다. 속았다. 

그래, 하는 수 없이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라... 나의 존재적 물질성보다는 내 존재의 시간성에 초점을 맞춘 표현인 듯 하다.
나는 계절이니까.
그런데, 봄이나 가을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계절이 아니라,
이용의 노래처럼, 시월의 마지막 밤은 '잊혀진 계절'이 아니었던가.
시인은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없는... 현재형이니... 과거에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현재는 없는, 계절.
자신은 도대체 무엇인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표현이나 아닐지... 혼자 생각해 볼 따름이다. 

'어머니의 없었던 연애같은 것'이 서러워진다는 시나, '없는 내 아이'가 가위로 햇빛을 자른다는 시가 있음을 볼 때,
그에게 '없었던'과 '없는'은 시를 쓰는 하나의 모티프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부재, 상실감... 이런 것에 대해서는 나도 일가견이 있지만,
그이게는 부재와 상실감, 없었음과 없음이 '일상'이었고, '인생'이었던 것이 아닐까?
삶의 <존재감>이 활동적으로 넘쳐나지 못하고, 그저 어떤 약한 <기미>로만 느낄 수 있었던 약한 존재감은,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증명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재함에 가깝게 느끼며 살아온 것이란 표현 같다는... 

내 몸의 이역(異域)들은 울음들이었다고 쓰고 싶어지는 생이 있다
눈물은 눈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었다 (내 워크맨 속 갠지즈, 부분)

자신의 몸은 이역에 살고 있는 이방인이며, 생은 울음들이었는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처럼 부박하고 누추한...
그래서 울음들로 넘쳐난 눈물들이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의 그 미약한 <기미>가 자신의 존재 증명에 불과한... 

황혼에 대한 안목은 내 눈의 무늬로 이야기하겠다 당신이 가진 사이와 당신을 가진 사이의 무늬라고 이야기하겠다 (기미, 부분)

'당신이 가진 사이'와 '당신을 가진 사이'의 무늬라...
사이는 어느 지점과 어느 지점의 가운데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삶도 하나의 사이가 될 수 있다.
당신이 가진 사이는, 당신의 삶이 될는지...
그러면, 당신을 가진 사이란? 글쎄다. 삶을 주관하는 조물주 정도 되겠지.
삶과 운명의 '무늬'를 바라보는 안목.
제게 주어진 운명의 실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외디푸스는 운명의 실을 끊으려 온갖 애를 다 쓰지만 결국 애비를 죽이고 에미와 결혼하게 된다. 당신이 가진 사이와 당신을 가진 사이의 무늬를 바라보는 황혼녁에 대한 안목.
그런 안목을 갖춘 이라면, 삶의 약한 기미에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섬세함이 살아있을 것 같아 눈길조차 쓰라리다. 

어쩌면 벽에 박혀있는 저 못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이쪽에서 보면 못은
그냥 벽에 박혀 있는 것이지만
벽 뒤 어둠의 한가운데서 보면
내가 몇 세기가 지나도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못은
허공에 조용히 떠 있는 것이리라.... 

못은 밤에 몰래 휜다는 것을 안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부분)

못을 바라본다.
못은 대상이 되고, 시인은 못을 바라본다.
그러자니, 못은 그냥 박힌 것이 아니라, 허공에 떠있는 존재이며, 영원히 만질 수 없는 존재로 새로이 인식된다.
내가 보는 못이 전부가 아니다.
내가 못이 되어 보아도, 내가 못을 그저 바라 보아도,
사람은 울음 속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자기가 기르는 짐승으로) 비로소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겠다.  

신경림이 '갈대'에서 이야기한 바로 그것. 

산다는 것은 속으로 /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그에게 시는 무엇이었을까? 

언어란 시간이 몸에 오는 인간의 物理(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그에게 시란, 언어란, 삶의 시간 속에서 인간의 온 몸과 대등한 비중을 가진 '물질성'으로 다가온다.
'삶의 시간'이 '몸으로 살아내는 삶'과 어울려 버무려진 산뜻한 샐러드처럼 보이는 물질성.
'당신을 가진 시간'과 '당신이 가진 육신'이 언어란 도구를 통하여 하나로 어울린 예술적 행위의 드러남, 그게 시다. 

그에게 시는 '마크툽'에 불과하다. 마크툽은 '그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이미 씌어 있는 말이다'라는 뜻의 아랍어이다.(비정성시 중)
그의 시는 창작한 것이 아니다. 시간이 몸에 새겨지는 인간의 물리에서 '언어'가 나오는 것이며,
그 언어는 항상 창조하는 듯 하지만, 이미 씌어 있는 말을 반복하는 일에 불과하다. 마크툽! 

사진 속으로 들어가 사진 밖의 나를 보면 어지럽다.
시차(時差) 때문이다. 

지구에서는 시인의 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의 별에서는 지구가 보인다 

눈물은 자기 안의 빙하가 녹는 것이다 차가워지려면 뜨거워지는 헤엄부터 배워야 한다 ... 밖으로 나오는 울음은 뜨거워서 타인의 마음을 베지만 안으로 우는 울음은 자신을 베기 때문에 차갑다 눈물은 제 안의 썩고 있는 어류들이다 (비정성시 중) 

그는 언제나 '남들과 같은 시간' 속에서 웃고 떠들지 못하는 존재다.
늘 시차를 느끼면서 살아간다. 사진을 보아도, 사진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 여행을 하고, 어지러워진다.
남들은 시인의 별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은 지구인들을 관찰할 수 있다.
시차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삶의 시간이 가진 물질성을 느끼는 섬세한 촉수를 가지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그의 안에는 비정하고도 차가운 얼음이 가득하다. 빙하처럼... 그의 눈물은 빙하가 녹듯, 하염없이 나온다.
뜨거워지는 일만이 차가운 빙하를 녹여내는 법.
제 눈물마저 시원스레 울지 못하고, 밖으로 나오는 울음과 안으로 우는 울음을 관찰한다.
그의 눈길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짠하게 젖어 온다. 전염되나보다. 

그에게 어머니나 아버지는 '꽃무늬 팬티'와 '아버지의 귀두'로 남아있다.
그에게 인생이란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보다는 비정한 기억뿐인 도시가 오버랩되는 비루한 것이라는 생각이 가득한 듯한 표현이다.  

자신이라는 시차를 견디는 일이란다 꿈이란 (우주로 날아가는 방 3 - 찰흙놀이, 부분)

그의 시차, 시차라는 시어는 '시대착오적 인물'을 자꾸 떠올린다.
속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존재. 그래서 뻐꾸기 둥지 위로 자꾸 날아가고 싶어하는 존재.
세상은 자신과 무언지 '시차'가 자꾸 생겨서, 그 시차를 줄이지 못하고, 그저 견뎌야 하는 일...
삶만 그런 것이 아니다. 꿈이란 것도 세상에 담긴, 자기란 시차를 견디는 일. 견뎌야 하는 일...  

나는 간지럼을 타지 않는다...로 시작한 시가
나는 간지럼을 타지 않는다 밖에서 나를 웃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로 끝난다. (인형증후군 전말기)
간지럼을 태우면 간지럼을 타는 것이 예사 인간이다.
그러나 화자는 간지럼을 태우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같은 시간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간지럼을 태우는 사람은 밖에 있고, 자신은 어딘가 다른 세계에 있다.
곧, 그는 지금 여기에 있지 않고, 어느 정도 시차가 있는 어떤 곳, 그곳에 있다.
그는 그런 상황을 인형 증후군이란 용어를 쓰는데, 그에게 '시차'는 곧 이 시집의 제목 "이 세상에 없는 계절'로 환원된다. 

푸슈킨의 시에 나오는 것처럼, 삶이 그대를 속이는 것처럼 보일 때는 많다.
그러나, 김경주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낸다.
아큐정전에 나오는 아큐처럼 '정신적 승리법'을 거두는 착각속에 빠지기 보다는,
시간과 공간의 다름에서 오는 불화 不和임을 인정하게 되면, 그의 '시차'가 사랑스럽고 귀엽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의 시들이 의미를 담고 있는 세계를 그대로 그리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읽어내는 그의 세계는 푸슈킨의 시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가 '시차'나 '무늬'를 활용하여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주는 푸슈킨의 설명을 참고한다면, 김경주의 횡설수설도 횡으로 수직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은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고야 말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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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0-09-16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 저는 '시'보다 '사람'을 먼저 만났는데요.
'사람'에 대한 인상이 그닥 좋지 않았던 관계로, 나중에 만난 '시'에 대한 느낌도 별로였습니다.
시가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그냥 제 취향과 맞지 않더군요.

아, 그런데 정말 분석을 잘 하시는 군요!

글샘 2010-09-16 12:37   좋아요 0 | URL
ㅎㅎ 사람은 원래 글을 못 따르죠.
저도 취향과는 맞지 않았지만, 그래서 당황스럽다고 했지만,
읽다 보니, 작가가 집착하는 저런 생각들이 눈에 밟히더라구요.
분석이랄 것도 없는 잡문입니다. ^^
 
어머니의 물감상자 창비시선 132
강우식 지음 / 창비 / 1995년 5월
평점 :
품절


집도 절도 없는 신세로
애인과의 데이트 약속장소는
늘 원각사 십층석탑 앞에서다.

이 탑에 서면
음경이 없는 부처님의 방 한칸에
전세들고 싶어진다.

부처님의 주소라서
자칫하면 소멸되는 전교(轉交)편지도
틀림없이 배달되리.

국보 제2호와 같은
여자를 맡겨놓고
안심하고 밥벌이를 나갈 수 있으리.

살아가다 피박을
잔뜩 뒤집어쓴 거덜난
인생이 되더라도

여기 와서는 만세를 불러도
동서남북 어느 길목에서나
넉넉함으로, 넉넉함으로 받아주리라.

애인이여,애인이여
이 탑 앞에서
밑바닥이 제일 튼튼한 이치를 배우자.(원각사 십층석탑 인연설, 전문) 

국보 1호가 불타 내려앉는 화면을 눈물 훔치며 지켜보던 시간에,
국보 2호는 그럼 뭐냐고 아들이 물었는데, 그때만해도 나는 국보 2호가 뭔지는 관심도 없었더랬다.
그 국보 2호가 원각사 십층 석탑이고,
그 탑이 탑골 공원의 그 탑이고, 파고다 공원의 그 탑이란 건 국보 1호가 사라지고 나서 찾아본 거였다. 

불시잡변 佛詩雜辯 이란 말을 쓸 정도로 불교에 관심이 많은 그의 생각이 드러나는 시이기도 하다.
1990년대 외국 여행 붐이 일었을 때, 중국 대륙을 구경하면서 쓴 시들도 장쾌하다. 

뭐니뭐니해도, 이 시집과 조금 외따로 노는 듯도 하지만,
강우식의 시 중의 백미는 '어머니의 물감상자'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물감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물감장사를 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온갖 색깔이 다 모여있는 물감상자를 앞에 놓고
진달래꽃빛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진달래꽃물을,
연초록 잎새들처럼 가슴에 싱그러운 그리움을 담고 싶은 이들에게는 초록꽃물을,
시집갈 나이의 처녀들에게는 쪽두리 모양의 노란 국화꽃물을 꿈을 나눠주듯이 물감봉지에 싸서 주었습니다.
눈빛처럼 흰 맑고 고운 마음씨도 곁들여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해종일 물감장사를 하다보면 콧물마저도 무지개빛이 되는 많은 날들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색동저고리 입히는 마음으로 나를 키우기 위해 물감장사를 하였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이 지상에 아니 계십니다.
물감상자 속의 물감들이 놓아주는 가장 아름다운 꽃길을 따라 저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운 색깔들만 가슴에 물들이라고 물감상자 하나만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물감장사와 물감상자의 음운의 오고감 사이에서
진달래 꽃빛, 연초록 꽃물, 노란 국화꽃물과 눈빛처럼 흰 맑고 고운 마음씨를 가득 담아 놓은
어머니의 물감 상자가 눈앞에 환하게 보일 듯도 한 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운 색깔들로 가득한 물감상자,
그 하나로 남은 어머니의 마음을,
그 마음이 없는 자식이 회상하는 모습은 자칫 위태로우면서도 가슴 따스하게 만드는 시.
외로운 세상에서 외롭다는 말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먼 하늘 우러리는 시인의 눈길을 보여주는 시. 

이런 시를 쓰는 시인과 함께 사는 일도 그리 팍팍하지만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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