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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7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평점 :
이병률은 여행가다.
세계 50여개국을 돌아다녔다니, 그는 여행가이면서, 또 거기서 만나는 마음의 한 꼭지를 찍어댔으니 사진가이기도 하다.
이소라의 음악도시,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사진이나 여행이야기를 수필로 읽고 싶다면 <끌림>이란 책을 보면 된다.
<끌림>에서
그의 삶에서 '여행'과 '사진' 그리고 '시'를 제한다면, 글쎄, 얼마만큼 그의 육신이 가벼워질는지...
몹시도 가볍게 변할 것이다.
'끌림'은 내가 좋아하는 낱말 중의 하나다.
'번짐'도 좋아하고, '희미'와 '황홀'도 좋아한다.
그렇지만, '찬란'은 내 취향이 아니다.
이 시집을 읽고, 특히나, 표지 뒷면의 후기를 읽고는, '찬란'이란 단어도 어쩌면 좀 괜찮은 녀석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괜찮은 단어다. 찬란했다.
그것도 당신도 찬란했다면, 당신 덕분에 찬란했다고... 관계 속에서 빚어진 찬란이란
내가 좋아하는 혼자만의 '희미, 황홀, 번짐, 끌림'보다 나아 보인다.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 누우려는데
무릎이 쓰리다
낮에 사진을 찍겠다고 무릎을 꿇었나보다
무릎 꿇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던가
시에게 사람에게 세상의 내침에 무릎 꿇은 적 있던가
어떻게라도 한번 무릎을 꿇었다니
가뜩이나 서어한 마음 괜찮지 않은가
설산을 넘는 밤길
옆자리에 누가 있어 무릎이라도 닿을 수 있어서
무장 긴 길을 갈 수 있다면 낫지 않던가
낯선 곳에 들어섰는데 자리에 온기가 남아 있다면
그래도 밤을 생각하면 낫지 않던가
왜
잊으면 낫지 않던가 (마취의 기술, 전문)
여행가이면서 사진가인 그가 무릎의 통증을 반가워한다.
어떻게라도 한번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었다는 것이고, 극기복례에 조금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괜찮다, 고 스스로 후한 평을 한다.
그러면서, 삶의 고통을 이기는 법, 특강에 나선다.
살기에 조금 <나은 방법론>
4연, 함께하면 낫고,
5연, 더 어려운 상황을 상상하면 낫고,
마지막, 잊으면 낫다.
삶의 고통은 잊으려 한다고 쉽사리 잊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마취의 기술을 들이대는 화자도 안쓰럽지만,
<괜찮다>
함께 하고, 그래도 안 되면, 최악의 사태를 상상하고, 그래도 안 되면, 잊자.
그는 걸으면서, 사진을 찍으면서, 온 몸과 마음을 바깥 세상에 투사하기때문에, 육신과 마음의 고통을 잊곤 했던 모양이다.
그 경험이 시가 되어 나온다.
무언가 쑥 하고 몸에서 빠져나갈 때/ 스윽 할 때도 있고 흐응 할 때도 있고/ 굉장히 큰 것이 기관을 거치지 않고 맥없이/
흘러나갈 때가 있단다 //
옷으로 스며들어 얼룩을 만들 때 있단다//
열려 있는 문틈으로 바람이 들어와/ 가만히 앉은 등을 째고 속엣것을 꺼내갈 것 같을 때/
문짝만 한 바람이 내 등 뒤를 떠민 것뿐인데/ 등 전체가 흐느끼고 있음을 알 때도/
실은 찔끔 혹은 호로록 새나가는 것이란다//
바람에 천막이 열리고 닫힌 것뿐인데/ 그사이 기억조차 내가 그어놓은 막을 빠져나가버리면/
허물만 두고 모두 끝나버리는 건 아닌가 싶단다/ 아찔하지만 그래도 괜찮단다/ 지나가는 것은 아픈 것이 아니란다//
세상 모든 끝나버리는 것을 몰랐던 몸을 버리고/ 한 칸씩 한 칸씩/ 무수한 뒷날의 모두를 놓친 정신은/ 사방이 흰 방/
그 뒷방에 모여들어 똬리 틀고 안정한 한 시절을 지낸단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전문)
마흔이다.
그가 마흔이 넘으니 이런 시를 쓴다. 불혹. 혹할 기력이 없다는 뜻 같기도 한 나이.
스윽, 맥없이 흘러나가는 것,
찔끔 혹은 호로록 새나가는 것,
지나가는 것.
그렇게 흘러나가고 새나가버리니 '혹할 여력'이 없겠다.
그렇지만, <괜찮다>고 말한다.
원래 사는 것은 시 제목처럼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여기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냥, 한 칸씩 한 칸씩 살아나가노라면,
정신이랄 것도 모두 놓아버린 날이 올 것이고,
정신이 없는 사람들만 있는 정신병원 흰 방에서, 그것도 뒷방쯤에서
가만히 앉았을, 안정한 시절을 맞기도 하는 거란다.
<괜찮다>고 한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게 삶이란다. ^^
다음 계절은 한 계절을 배신한다
딸기 꽃은 탁한 밤 공기를 앞지른다
어제는 그제로부터 진행한다
엎어놓은 모양으로 덮거나 덮인다
성냥은 불을 포장한다
실수는 이해를 정정한다
상처는 상처를 지배한다
생각은 미래를 가만히 듣는다
나중에 오는 것은 모두 아득한 것
네가 먼저 온다 시간은 나중에 온다
슬프게 뭉친 창문으로 나중까지 오는 것이다
희부연 가로등 밑으로도 휑한 나뭇가지로도 온다
한번 온 것은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지 않으며
어떤 시험도 의심도 안 한다
시간은 나중 오는 것이다 네가 먼저 오는 것이다 (창문의 완성, 전문)
꽤나 공들인 것 같은 작품이다.
마흔이 넘으면서, 시간이란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 많아졌을 것이다.
창문으로 그 너머를 바라보면서, 창문은 원래 거기 있었지만,
창문이 완성되는 것은 그 창으로 밖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마침표를 찍는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
어제는 지나간 과거만은 아니다.
그제와의 연속선상에 어제는 놓인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여름' 다음에 놓인 '가을'을 말하게끔 되었지만, 그래서 가을은 여름을 배신하는 것이지만,
여름과 가을은 분절적 개념이 아니다. 연속선 상의 두 지점인 셈.
생각한다는 것은, 과거에 대한 상념이 떠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머지않은 개체의 미래에 닥칠 것들을 떠올리는 것이 <생각>이다.
시간보다 먼저, 생각이 있다.
생각은 시간보다 먼저 앞질러서 걱정하고,
앞질러서 짜증내고, 앞질러서 절망한다.
그러나, 한번 온 것은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지 않고, 테스트하는 여러번의 기회도 없고, 의심의 곁가지도 없다.
이런 생각들로 창문은 가득찬다. 역시 불혹이다.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거울을 보는 일과는 다르다. 거울 속의 반사체는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또다른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윤동주의 '또다른 고향'의 '백골'처럼...
이 말이 그 말로 들릴 때 있지요 그 말도 이 말로 들리지요 그게 마음이지요 왜 아니겠어요 몸피는 하나인데 결이 여럿인 것처럼 이 사람을 귀신이라 믿어 세월을 이겨야 할 때도 있는 거지요 사람 참 마음대로지요 사람 맘 참 쉽지요 궤짝 속 없어지지 않는 비린내여서 가늠이 불가하지요 두 개의 달걀을 섞어 놓고 섞어 놓고 이게 내 맘이요 저것이 내 맘이요 두 세계가 구르며 다투는 형국이지요 길이가 맞지 않는 두 개의 자이기도, 새벽 두 시와 네 시 사이이기도 하지요 써먹을 데 없어 심연에도 못 데리고 가지요 가두고 단속해봤자 팽팽히 와글대는 흉부의 소란들이어서 마음은 그 무엇하고도 무촌이지요 (마음의 내과, 전문)
마흔 맞다. ㅎㅎㅎ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에 대한 희망이 옅어지는 나이.
그러니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많아지고, 제 마음에 대한 성찰도 흔해지는 나이.
수천 년 전에 공자가 마흔이면 '혹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죽을 때 다 되었다는 소리.
절에서 중노릇해도 여자생각 나지 않을 나이.
세상이 바뀌어 인생백세 흔하디 흔한 세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마흔이면 삶의 고비가 넘는 나이다.
그 고비에서 생각노니, 마음과 시간이라...
찬란, 이라고 억지부려 보지만,
관계의 찬란은 가능할는지 몰라도, 글쎄요, <괜찮다> 정도가 최대한 같다.
그의 시집에서 '시간'과 '마음'에 대한 '자아 성찰'의 최종 결정판은 아무래도 <심해에서 그이를 만나거든>이지 싶다.
이 시에서 '그이'는 자신이 바라본 '자기'다. 별로 '찬란'해 보이지도, '괜찮아' 보이지도 않는다. 서글픈 자아.
건너의 그이는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하는 일이라곤 잠을 자지 않는 일뿐
나는 내 쪽에 앉아 건너를 봅니다
건너의 기침 소리를 받아 적다
건너의 그림자가 내 방에 닿을 때면 피하고
건너의 의자 끌리는 소리에 놀라기도 합니다
나는 내 쪽에 앉아 건너의 냄새를 맡습니다
건너의 그이는
아무 일 없이 늘어져 바닥에 끌리고 있을 뿐
그는 여전히 그대로이며
검은 가방은 여전히 무겁고
그는 떠나지 않습니다
겨우 아는 체라도 하라고
나에게 부과된 저 그이에게
내 마음을 지껄이지 않겠습니다
이 심해 협곡에, 난데없이 해가 지려 하고 있습니다
맞추려고 할수록 부서지는 몸으로
살려고 할수록 나를 넘어서는 몸으로
나는 춥게 가라앉고 있습니다 (심해에서 그이를 만나거든, 전문)
마흔이 넘은 그의 이 시집에서 꼭 한 단어만 집어내라면, 나는 핀셋 끝에 <괜찮다>를 집어 보겠다.
아주 오래전 지뢰를 껴안으며
그렁그렁한 눈으로
한 사람을 바라보던
한 소년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밤을 지새웠다
괜찮은 것은
괜찮은 것은
그 소년은 어떻게든 살아 사내가 되었으리라는 것 (굵은 서리 - 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의 다리, 부분)
이렇게 쓰다보니, 정말 괜찮은 건가?
그 괜찮은 건지, 헷갈리는 의혹의 붓놀림 위에,
바로 <찬란>을 덧칠해 놓은 듯한, 이물스런 느낌을 버릴 수 없다.
내 결론은,
찬란한 마흔 살 = 괜찮다~ 정도.
그의 시 <찬란>에서 '찬란하다'를 '괜찮다'로 바꾸어 읽어 보니, 그것 참 <괜찮다> ㅎㅎㅎ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더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쳐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찬란,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