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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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조정래라는 이름 속에는 격정의 한국 근현대사가 녹아있다.
그의 태백산맥은 '이데올로기 분단국의 역사'가 담겨 있고,
그의 아리랑은 '식민지 시대의 고난의 역정'이 담겨 있고,
그의 한강에서는 '현대화 과정의 팍팍하던 삶'이 담겨 있었다. 

이제 큰 어른의 목소리로 현대 한국의 모습을 그려 낸다.
그러나... 이전의 소설들에서 주된 서술의 대상이 '민중의 역사'였다면, 이번에 그린 것은 '골든클래스의 삶'이며,
그것들의 허청대는 짓거리를 '허수아비춤'이라고 비꼬아 풍자해 내고 있다. 

돈을 향한 모든 권력의 일렬 행보는 이미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세세하게 설명된 바 있었지만,
조정래의 이번 소설은 '삼성을 생각한다'에 구체적인 권력관계의 유착을 형상화 하였다는 의미가 있다. 

   
  진정한 작가이길 원하거든 민중보다 반발만 앞서 가라. 한 발은 민중 속에 딛고. 톨스토이
진실과 정의 그리고 아름다움을 지키는 것이 문학의 길이다. 타골
작가는 모든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해야 한다. 빅토르 위고
불의를 비판하지 않으면 지식인일 수 없고, 불의에 저항하지 않으면 작가일 수 없다. 루쉰
나랏일을 걱정하지 않으면 글(시)이 아니요, 어지러운 시국을 가슴아파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요, 옳은 것을 찬양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다. 다산 정약용 
 
   

서문에서 드러낸 그의 의사 표현이 이 글의 주제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경제적 정의'를 이야기하는 자조차 없는 현실.
88만원 세대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골프에 중독되어가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는 현상.
아파트 평수가 점차 넓어지고, 가진 자들의 욕망에 못가진 자들의 욕망도 '명품' 사냥에 휩쓸리는 마음들. 

그 팍팍한 현실을 '일광 그룹'의 '문화개척센터'라는 홍보기획실에서 벌어진 남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통렬하게 풍자한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돈에 대한 숭배'와 돈-정치-경제-언론-대학의 유착과 재생산 구조를 몇 명의 남자들의 이야기 his story를 통해 재구성한다. 그 허구성의 재구는 바로 역사 history가 된다. 

한국이 어떡하다 이렇게 정의를 실종해버린 나라가 되었는지를 알려면 조정래를 읽으면 된다.
그를 읽는 일은 가슴 한켠에 금속성으로 박혀있어, 도무지 나와 융화될 수 없는 '양심'이라는 놈의 압박을 받으며 살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허수아비들이 둘러서서 춤을 춰대는 것을 보고 그 춤사위에 같이 너울대는 것처럼 허망한 것도 없다.
그렇지만, 한국이란 나라의 오늘,
뉴스에 등장하는 재벌이란 이름의 허수아비들의 작태는 더할나위없이 꼴불견이다. 

온갖 지식은 회색이지만, 생명의 나무는 녹색이듯, 조정래의 소설을 읽는 일은 생명수를 흡수하는 나무의 잔뿌리를 우리 몸에 돋게 하는 일이다.
조정래 다운 입담도 맛볼 수 있고,
정말 오랜만에 대자보의 격문을 읽는 듯한 세상보는 눈도 기를 수 있다. 

마지막에서도 결말이 닫히지 않은 구조로 독자를 시험하고 있다.
과연 전인욱은 낚시바늘의 미늘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사람일 것인지, 허민 교수의 충고를 받아들여 술을 끊게 되는 것인지...
험한 세상 술 없이 어찌 살랴마는, 허민 같은 믿음직한 술친구하고 마시는 외의 경우엔 늘 경계의 눈을 풀 수 없을 노릇이다. 

세상 허망하다.
허수아비들의 춤사위는 현란하기 그지없지만, 헛되고 헛되다.
허수아비들의 앞날에 이미 그림자는 드리웠지만, 자본의 힘을 타고 너울대는 허수아비들의 춤은 멈출 생각을 않는다. 

경제 정의를 구현하는 일은 민주주의의 초석이다.
아직 그 주춧돌 하나 마련하지 못하였으니 허수아비들의 너울거림을 맥놓고 지켜볼 뿐...
그렇지만, 허수아비가 인간을 지배할 수는 없으리라는 믿음이 이 책의 시니컬한 주제 의식일 것이다. 

 

양심의 금속성

                                - 김현승 -
모든 것은 나의 안에서
물과 피로 육체를 이루어 가도

너의 밝은 은(銀)빛은 모나고 분쇄(粉碎)되지 않아

드디어 무형(無形)하리만큼 부드러운

나의 꿈과 사랑과 나의 비밀을
살에 박힌 파편(破片)처럼 쉬지 않고 찌른다.
 
모든 것은 연소되고 취(醉)하여 등불을 향하여도,
너만은 물러나와 호올로 눈물을 맺는 밤…… 

너의 차가운 금속성(金屬性)으로
오늘의 무기를 다져 가도 좋을,

그것은 가장 동지적(同志的)이고 격렬한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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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7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0-10-08 18:02   좋아요 0 | URL
아, 이러라고 리뷰 올리는 게 아닌데... 알라딘이 뭐 이런 서재를 벌여준 건 이러라는 거겠지만 말이죠. ^^
재미있는 소설은 아니구요, 머릿속과 양심에 금속성 깨우침을 주는, 그런 풍자소설이라 보심 됩니다.

순오기 2010-10-08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셨군요~~ 나는 인터파크에 연재된 60회를 날마다 보고 댓글 달고 그랬지요.
삼성을 생각한다, 소설판~~ 역시 조정래 샘이죠!

글샘 2010-10-11 13:23   좋아요 0 | URL
형상화에 성공하고, 푹 삭은 말들이 쫀득거리지 않아 조정래 샘 소설치곤 심심한 편이었지만,
한국 현대사를 꿰뚫는 맥락은 역시 조정래 샘이죠. ^^
 
허황옥, 가야를 품다 푸른도서관 38
김정 지음 / 푸른책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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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역사 시간 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결혼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김수로와 허황후의 후손이기 때문인데, 허황후가 인도에서 돌배를 타고 온 공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대학에 가서 국문학사 시간에 삼국 유사와 관련된 자료를 읽으면서도, 인도 공주와 가야? 그저 이런 의문만 품은 채 넘어가곤 했었던 것 같다.

남들은 무심한 것을 들이 파는 사람을 학자라고 한다.
이 소설가는 물론 학자들이 허황옥의 루트를 되밟은 자료들을 찾아 읽었겠지만,
그 사이를 메꿀 만한 역사적 자료가 이천 년 세월을 흘러오면서 오롯이 남아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 간격을 작가의 상상력을 통하여 만들어 낸 이야기다.

인도의 아유타 왕국 공주였던 라뜨나는 월지국의 침략을 피해 동쪽으로 배를 타고 떠난다.
그들은 교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기도 했는데,
우연히 김수로가 위험에 처했을 때 구해주기도 한다.
가야에 정착하게 된 라뜨나 공주 일행은 가야 백성들에게 따스한 보살핌을 주기도 하고, 공방을 만들어 살림살이도 넉넉하게 도와준다. 이 과정에서 상당한 견제를 받기도 하지만, 김수로와 신뢰감을 회복하여 결혼하게 된다는 해피 엔딩.

삼국 유사 속의 허황한 이야기 한 토막을 붙잡고,
소설적 상상력으로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낸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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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10-10-06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정수일의 <한국 속에 세계>라는 책에서 허황후의 얘기를 읽었습니다. 전에 인도공주가 우리나라에 시집왔었다- 정도로만 들었는데 삼국유사와 몇 가지 자료들을 뒤짚어 쓴 그 내용을 흥미롭게 읽었어요. 이 책도 한번 찾아읽어야겠군요.

글샘 2010-10-08 18:02   좋아요 0 | URL
그런 책이 나왔군요. 이 책은 아이들 동화랍니다. 그래도 재미있습니다. ^^
 
미녀냐 추녀냐 - 문화 마찰의 최전선인 통역 현장 이야기 지식여행자 3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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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부분을 옮겨 보면,
<부실한 미녀일까, 정숙한 추녀일까> - 일본사상 최강의 러시아어 통역자, 요네하라 마리가 동시통역의 내막을 처음 공개! 

일본어 원본의 그림을 보면, 미녀와 추녀를 비유한 것과도 같아보이는 어딘가 오며한 매력을 가지고 요염한 자세로 두툼한 허벅지를 자랑하는 여인이 앉았다.
반면, 한국어 판의 그림은 어딘가 어색하다. 옷을 갈아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번역'의 이미지를 나타내려 한 것 같은데, 아직 태그도 떼어내지 않은 것으로 봐서, 탈의실 비슷하다.
이런 표지의 '번역'조차도 직역이냐, 의역이냐의 차이를 보여준다. 

한 언어를 다른 언어와 함께 이해한다는 것은 참 부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번역'하는 과정을 겪어 보면, 두 문화의 차이가 보여주는 거리감과 두 언어의 다름에서 드러나는 차이가 적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한술 더 떠, '통역'의 과정은 '즉시성' 내지 '동시성'이란 시간의 압박이 있기때문에,
특히 통역사로 고용된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거래> 또는 <정치적 입장>이 원만하게 성사되도록 도와줘야 하는 입장이므로 정확한 통역이냐, 원만한 통역이냐를 두고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통역가의 애로사항을 역시 마리여사의 톡톡튀는 입담으로 들려주고 있다.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한 러시아 문호 개방이 아니었다면 마리 여사가 이렇게 유명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역시 시대를 만나야 훌륭한 사람도 빛을 발한다.
마리 여사의 입담은 통역의 어려움을 '부실한 미녀'와 '정숙한 추녀' 사이의 갈등에 비유한다.
통역가를 매춘부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뭐, 일회용으로 쓰이며, 잘하든 못하든 끝나면 버려진다든가... 과감한 비유다.
그런데, 이 비유가 거칠어 보이지만, 이야기를 읽어나가다 보면, 그대로 직역하는 것보다 분위기를 뭉뚱그려 통역하는 편이 훨씬 좋을 때도 있다는데, 그래서 정숙한 추녀보다는 부실한 미녀가 나을 때도 있다는 재미를 느끼게도 한다. 

한국 외대에 통,번역 대학원이 생긴지도 오래 되었지만, 아직 한국의 통번역 문화는 저급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영어 쪽은 그나마 사정이 낫겠지만, 러시아어나 아랍어, 그 외의 약소 언어들에 대한 통번역은 아직 미미하기 그지없다.
일본 정도의 대국과 약소국의 규모의 차이가 뼈저리게 느껴진다. 

외교관의 yes는 maybe이고,
외교관의 maybe는 no이고,
외교관이 no라고 하면 그 사람은 이미 외교관으로서 실격이다.
여자가 no라고 하면 maybe 이고,
여자가 maybe라고 하면 yes의 의미고,
여자가  yes라고 하면 이미 여자로서 실격.
그런데 최근 여자 외교관이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자 외교관이 yes나 no라고 하면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50) 

이런 우스개는 이 글에 가득하다. 

화자의 원 발언이
통역가의 인지(알아 듣는) 과정을 거치면서 상당 부분 실종되고,
이해 과정에서 또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놓치고,
기억했다가 재생하는 과정에서 또 빼먹고,
자기네 말로 코드화하는 과정에서 코드 전환을 하고,
적당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만 번역해 주는 통역가의 말을,
또 청자는 알아들은 부분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72)

아, 통역의 과정은 이렇게 오해의 과정이 연속되는 것이다. 

멋진 통역을 하고 나면 최고의 찬사를 듣기도 한단다.
"정말이지, 저 연사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는데, 당신 통역을 들으니 알겠습니다." 

일본어의 '리듬감'을 이야기하면서 이해하기 힘든 구절이 있었는데, 어디 물어보고 알아둬야겠다.
<일본인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하쿠닌잇슈(100인 1수, 100인의 와카를 한 수씩 골라 모은 것)을 게임으로 즐길 만큼 외우고 있어서 일상 생활에 우연히 잇사의 한 구나 다쿠보쿠의 노래가 저절로 나오는...> 하쿠닌 잇슈를 찾아봐야겠다. 

정보의 전달은 귀로 들은 것은 10% 남고, 눈으로 들어온 것은 30% 남고, 직접 체험한 것은 80% 남는다고 한다.
통역에서도 그래서 현장에서 겪은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백문이 불여일견이고, 백견이 불여일체다. 

마리 여사의 섬세함은 그가 8의 통역을 할 때, 2의 번역에 힘쓴다는 점에 있다.
통역이라는 시간 제약의 환경상, 핑계를 대고 끊임없이 타협하는 행위가 조잡하고 허술해질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제한된 시간의 범위 내일지라도 최고의 최상의 번역을 목표로 하는 번역가적 성향을 배우기 위해서란다.
벼락치기와 임시방편이 번갈아 계속되는 인생에 잠시 쉼표를 찍고 조금 더 차분하고 심오한 표현에 빠지는 일.(136)
자기를 다스리지 않는 자, 약해질 수밖에 없다. 

앞문의 호랑이, 뒷문의 이리, 에 비유되는 통역가.
문화의 틈을 최대한 메우고 문맥을 첨가하라는 지엄한 호랑이의 명령과,
최개한 단축된 시간에 통역하르는 이리의 독촉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통역가의 좌충우돌 진퇴양난의 상황이 리얼하게 그려지고 있다. 

최근 마리 여사의 '빤쓰 인문학'도 출간되어 읽기를 기다리고 있다.
마리 여사의 책을 읽는 동안에는 풍부한 샘물이 펑펑 솟구치는 노천욕탕에라도 앉아 느긋하게 쉬는 듯한 느낌이어서 독서의 즐거움을 빠듯하지 않고 느긋하게 즐길 수 있어 좋다.
마리 여사의 매력은 그런 곳에서 솟아난다.
그래서 나는 독서의 계절 가을에 기꺼이 마리 여사의 팬이 되는 것이다. 롯데 야구가 올라가든 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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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랜 사랑 창비시선 134
고재종 지음 / 창비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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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씨구, 긍께 지금 봄바람 나부렀구만잉!"
일곱 자식 죄다 서울 보내고 홀로 사는 홍도나무집 남원할매 그 반백머리에 청명햇살 뒤집어쓴 채 나물캐는 저편을 향해, 봇도랑 치러 나오던 마흔 두살 노총각 석현이 흰 이빨 드러내며 이죽거립니다. 
"저런 오사럴 놈, 늙은이 놀리면 그 가운뎃다리가 실버들 되야불 줄은 왜 몰러?"
검게 삭은 대바구니에 벌써 냉이, 달래, 쑥, 곰방부리 등속을 수북이 캐담은 남원 할매도 아나 해보자는 듯 바구니를 쑤욱 내밀며 만만찮게 나옵니다.
"아따 동네 새암은 말라 붙어도 여자들 마음 하나는 언제나 스무살 처녀 맘으로 산다는 것인디 뭘 그려, 아 저그 보리밭은 무단히 차오르간디?"
"오매 오매 저 떡을 칠 놈 말뽄새 보소. 그려그려, 저그 남원장 노류장화라도 좋응께 요 꽃 피고 새 우는 날, 꽃나부춤 훨훨 춤서 몸 한번 후끈 풀었으면 나도 원이 없겄다. 헌디 요런 호시절 다 까묵고 니 놈은 언제 상투 틀 테여?"
"아이고, 얘기가 고로코롬 나가분가? 허지만 사방 천지에 살구꽃 펑펑 터진들 저 저 봄날은 저 혼자만 깊어가는디 낸들 워쩔 것이요, 흐흐흐."
괜스레 이죽거렸다가는 본전도 못 건졌다 싶은 석현이 이내 말꼬리 사리며 멈추었던 발 슬금슬금 떼어가는 그 쓸쓸한 뒷모습에 남원할매 그만 가슴이 애려와선 청명햇살 출렁하도록 후렴구 외칩니다.
"이따 저녁에 냉이국 끓여놓으께 오그라이, 우리집 마당에 홍도꽃도 벌겋게 펴부렀어야!" (저 홀로 가는 봄날의 이야기, 전문) 

아 글쎄 새뜸 홍도나무집 김생원은요 엊저녁부터 울어댄 누렁년이 새벽녘엔 아예 바락바락 악을 써대는 통에 잠을 설치곤 일찌감치 아래뜸 박영감에게 전화를 걸었더랍니다.
"어이, 지금 자네 부사리 좀 빌려야 쓰겄어."
"새퉁빠지게 그건 워따 쓰게?"
"아 그곳까장 안 들리던가, 우리집 누렁년 불 앓는 소리?"
"워매, 글면 과학적으로다 해결헐 일이제 이 문명 대낮에 웬 재변이라냐?"
"쎅군이 폴쎄 세 파수나 댕겨갔어도 그 모냥여."
"그려어? 글면 어디 모처럼 회춘이나 해보까!"
그 전화 뒤 곧바로 마을 대밭 돌아 공터에선 집채만 한 부사리가 배에 시뻘건 장칼을 차고 콧김을 씩씩 뿜으며 후닥닥 달려가, 꽃빛으로 단 엉덩이를 한껏 뒤로 버티고 선 누렁년 등에 번개처럼 오르고 있었드랬는데요.
아 글쎄 때마침 저 남산에서 쑤욱 올라오던 아침해가 그걸 내려다보고는, 그 해맑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은 채 숨도 제대로 못쉬고 한참 동안이나 딱! 멈추어 있더랍니다. (홍도화 필 때, 전문) 

고재종 시인은 대나무의 고장 담양에 산단다.
그의 시에서는 농투산이의 말 속에 담겼을 법한 농삿일들이 속속들이 갈무리되어 튀어나온다.
작위적으로 시를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창작 블로그 이름 마냥, <정자나무 그늘 아래> 둘러 앉아 두런두런 수다떨듯 시가 풀려 나온다.
'저 홀로 가는 봄날의 이야기'와 '홍도화 필 때'는 그렇게 흘러가는 봄날의 [정자나무 그늘 아래]가 오롯이 담겼다.   

http://cafe.daum.net/kojaejong21go 

내가 가장 아끼는 고재종의 시는 <감나무 그늘 아래>이다.

어찌 바람뿐이랴.
감나무 잎새를 반짝이는 게
어찌 햇살뿐이랴.
아까는 오색딱다구리가
따다다닥 찍고 가더니
봐 봐, 시방은 청설모가
쪼르르 타고 내려오네.
사랑이 끝났기로소니
그리움마저 사라지랴.
그 그리움이 날로 자라면
주먹송이처럼 커갈 땡감들.
때론 머리 위로 흰 구름 이고
때론 온종일 장대비 맞아보게.
이별까지 나눈 마당에
기다림은 웬 것이랴먄,
감나무 그늘에 평상을 놓고
그래 그래, 밤이면 잠 뒤척여
산이 우는 소리도 들어보고
새벽이면 퍼뜩 깨어나
계곡 물소리도 들어보게.
그 기다림 날로 익으니
서러움까지 익어선
저 짙푸른 감들, 마침내
형형 등불을 밝힐 것이라면
세상은 어찌 환하지 않으랴.
하늘은 어찌 부시지 않으랴. <감나무 그늘 아래, 전문> 

고향집 마당의 감나무에 '형형 등불'을 밝힌 것 같은 환하고 눈부신 시가 아닐까?
시골 경험이 머릿속에 자라나지 않은 아이들의 상상력 속에선 땡감이 서럽게 익어 형형 등불이 되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이런 시도 더이상 유효하지 않을는지도... 그리 생각하면 서글프다. 

그의 <가난을 위하여>에서는 작은 데서 등허리를 꿰뚫는 청신한 깨달음을 얻는 선승의 혜안을 읽는다.
백석의 '갈매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짜릿한 시.

꼭두새벽,넉점도 못됐는데
눈빛 비쳐든 창호문 새하얘서
맑게 깨어나는 정신, 서재에 들어
한기 뚝뚝 듣는 寒山詩한산시 펼친다
봄에 논밭 갈아 가을에 씨 거두고
엄동삼동에 책 읽는 버릇
그 무슨 천금을 줘도 못 바꿀레라
내 비록 가문 들판, 몇 줌 곡식 거둬
세안 양식에 못 미칠지라도
아내 몰래 쌀과 바꿔온 몇 권의 시집들
그 서책 닳는 만큼 깨이는 넋인 양
헛간 장태에선 수탉울음 청청하고
창호에 비쳐든 눈빛은 하도 좋아
시 일 편에 담고자 펜끝 세우니
늙은 아버진 벌써 고샅길 샘길 내느라
쓱쓱 눈 쓰는 소리 바쁘시다
옳거니, 세상의 진실과 아름다움은
숫눈 쌓인 날 제때 기침하여
사람 내왕할 길부터 내는 데 또 있는 것
책 덮고 급히 앞문을 차니
눈부셔라, 울 너머 큰눈 얹힌 청대숲
그 휘적휘적 휘어진 대줄기에서
포르릉 눈 털며 일군의 새 떼 치솟나니
마침내 나 사랑하리, 이 가난한 날들의
천지 사계 공으로 누리는 사치며
거기에 죄 한 점 더하지 않는 꿈이랑. <가난을 위하여, 전문>

농촌에 산다는 일은 그저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힘겹고 팍팍한 삶 속에서 '바람 부는 날' 보리물결 넘실거리는 청보리밭 바라보며 가슴 막히는 시인은
천상 시인이다. 

나 혼자다
나 혼자서만 바라보는
순초록 보리물결
그 앞에서
가슴이 꽉 막혀선
먼 데로 눈 들고 마는
형벌이다 

시방 저만치에선
사과꽃도 펄펄 날리는 <바람 부는 날, 전문> 

들녘 가득 피어난 흰 들국화를 보고는 이야기 하나가 휘리릭 머리에 사로잡힌다. 

기차는 마침내 빼액 소리를 지르며
저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져가고
사내는 그녀가 마지막 건네주고 간
구리반지 하나를 일그러뜨리며
털썩 철로변에 주저앉는 그 순간
사내의 가슴속에 가득 출렁이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라도 한 듯
그 앞에 흰 들국화 서리서리 피어났습니다 (그 순간, 전문) 

이런 풍경에서 우러난 서사란... 

팍팍하고 한켠 시들한 농촌 생활을
형형하게 눈뜨고 지켜보게 하는 그의 올곧은 정신은 <겨울나기>에서 번뜩이는 빛으로 서기를 발한다. 

또또 마음 하나 잘못 잡으면
송두리째 넘어갈 삭풍 속에서
되레 그 여린 우듬지 끝에
형형 별을 이고 서있을 미루나무여 

겨울을 겨울답게 나는 것들은 
뒷산 봉우리처럼 조금은 높고
그 끝에 둔 꿈처럼 조금은 외롭고
그걸 보는 정신처럼 조금은 성성하리 (겨울나기, 부분)

김용택 시와 달리, 고재종의 시를 읽는 일은 가슴을 쩌릿쩌릿하게 하며 반성하게 하는 맛이 있다.
한겨울 얼음이 둥둥뜬 막걸리 한 사발을 쫙 들이켜는 맛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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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어른을 위한 동화 17
이희정 글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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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꽃들에게 희망을... 이란 책이 명작인 이유는, 기어올라가려 기를 쓰던 애벌레들이 올라가본 꼭대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음을 보여준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되어있는데, 글쎄, 어른들이 이 책을 읽고 위안을 얻을까?
아니면, 정말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마음 편하게 살면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할까?
오해한 사람이라면, 노력해서 기를 쓰고 성공하려고 하는 데 이 이야기를 아전인수 격으로 끌어들일까? 

독자의 몫으로 남는 것이 많은 이야기. 그것은 열린 이야기고, 좋은 이야기일 것이다.
이 책도, 열린 책이다.
나비가 되기 위한 과정을 겪는 애벌레, 번데기의 기다림을 통해서,
독자들은 또다른 자신을 관찰하는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
자신을 또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철학의 힘이고 다른 말로 종교의 힘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 내게 이 길을 가라 하신다...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의 소명이라기 보다도,
스스로 그 길에 대해 일어나는 불안감과 자신에 대한 작은 불신들의 씨앗을 덮어버리고 싶은 의지일 수도 있고,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바라봐야겠다는 신념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비'가 되자!
이런 건 아니다.
그럼, 나비가 돼서 뭐가 될 건데? 

애벌레가 느낄 수 있는 곳은 2차원 공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나비가 되면,
3차원 공간을 누릴 수 있다.
그 3차원 공간은 인간처럼 불완전하게 수직 상승 욕구만을 기계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롭게 공기를 딛고 올라서기라도 하듯,
사뿐사뿐 자유곡선을 그리며 자신을 즐기듯 누비는 것이다. 

눈부신 모든 것들이 슬픈 것은, 그 안에 기다림, 고통, 외로움, 단절, 사랑, 보잘것없음이 포함되었기 때문(64)이라는 작가의 말도 나비가 누리는 자유 공간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인간이 쌓아올리는 바벨탑은 무너질 것을 전제로 하듯 무상한 것이기에... 

오늘 해운대에서 '타워링'이란 영화처럼 고층빌딩에서 불이 났다.
아름답기 그지없던 그 건물의 외피는 결국 불 앞에서 인화물질 역할을 하고 만 것이다.
화려한 외피로 치장한 인간의 욕망은 결국 무너진다. 

 

기나긴 기다림의 어려움을 함께 해준 사랑이 있었다.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는 일,
함께 있어주는 일,
오랜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일... 

그것이 가장 강한 사랑의 표현이다. 

나비를 통해서, 그런 것들을 생각하도록 도와주는 독서치료용 '빨간약(머큐로크롬)' 

이야기도 새뜻하지만,
작가의 그림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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