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항해술 - SF 환상 문학의 거장이 들려주는 스토리텔링과 글쓰기 지침서
어슐러 K. 르 귄 지음, 김지현 옮김 / 황금가지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steering the craft가 원제목이다. craft를 기술 정도로 알아서 사전을 찾아보니, 배를 일컫는다.
배를 조정하려면... 이런 정도이니 제목을 잘 뽑았다. 

이 책을 영어로 읽는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어 판으로 이 책을 읽는 일은, 하품나는 일이었다. 

물론, 글쓰기 훈련을 하는 이를 돕기 위해서 그가 강의한 것을 책으로 정리한 실제적 내용인 만큼,
도움이 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예를 들자면, 시점의 설명 같은 부분은 차근차근 여느 소설 이론서보다도 설명이 잘 되어 있다.
창작을 해본 사람이 자기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하는 걸 들으니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창작의 제 1원칙은 창작하는 언어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
말장난이기도 하고, 언어의 부려쓰기이기도 한데 영어를 설명하는 구절을 그대로 옮긴다손 치더라도 도움이 안 될 수밖에 없다. 

'고은' 선생이 노벨상 수상 후보로 올라가는 것은, 그이의 시 세계와 한국 현대사의 상관관계에 대한 글을 통하여 가능할 수 있었겠지만, 결코 노벨상 수상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시'의 특성상 번역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시를 쓰는 일은 '자기네 말의 정수'에 생각을 담는 형식인데, 그걸 번역해서 감상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1장. 글의 소리...도 그래서 패스 해야 하고, 2장. 구두법, 의 부분도 한국어와 영어는 천지 차이다.
한국어는 마침표나 쉼표가 없어도 문장이 ~~다. ~~했지. 이런 부분에서 끝나는 거 누구나 안다.
영어처럼 주어+동사는 맨 앞에 나오고, 툭하면 관계 대명사나 관계 부사로 뒤에서 관계절 가지고 수식하는 일이 대여섯 번 일어나는 문장이 아니란 거다. 영어에서 쉼표나 세미 콜론 없으면, 산소 부족으로 여럿 죽을 것이다. 

3~5장은 재미있게 읽었다. 문장의 길이에 따른 설명과 반복법, 형용사와 부사를 간소하게 쓰기. 

시인들은 죽음과 쉼표에 가장 관심이 많아요.(캐롤린 카이저, 시인)란 말에,
산문 작가들은 삶과 쉼표에 가장 관심이 많다고 저자 어슐러 르귄은 말한다.(41) 어디까지나 영어권 이야기다.
그만큼 쉼표에 숨쉬는 일이 그들 언어에선 중요한 것이다.
서술어가 뒷부분에 놓이는 우리말에선 하나의 절이 자연스럽게 쉼표 역할을 하게 된다.
서술어 뒤에서 그냥 끊어 읽음 되는 일이니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문체론'은 신선하다.
문체란 무척 단순한 문제예요. 모두 리듬이거든요. 일단 리듬을 얻기만 하면 잘못된 말은 쓰지 않게 되죠...(62)
나도 상당 부분 동감한다. 글을 쓸 때, 리듬을 타게 되면 타이핑도 쉬워지고, 문장이 매끄럽게 읽을 수 있게 된다. 
이런 말을 읽을 수 있어서 독서는 즐겁다.
이 책이 별로 한국 문예 창작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지만, 또 이렇게 재미있는 말도 얻을 수 있기도 하다. 

훌륭한 소설 작품의 대다수는 첫 챕터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소재를 도입하며 이 소재들은 여러 방식으로 변화하면서 내내 반복된다.
산문에서 고조되는 단어, 어구, 이미지, 사건의 반복은 음악 구조에서의 재현부와 전개부와 실제로 매우 많이 닮았다.(75) 

좋은 글을 쓸 때는 앞뒤가 조응되는 것이 좋다는 말을 이렇게 해 놓으니 참 멋지다.
소나타에서 재현부, 전개부가 반복되어 주제를 변주하듯이, 글을 쓸 때도 그렇게 장치들을 놓으라는 이야기. 

나는 모든 이야기 작가들에게 형용사와 부사를 주의 깊게 다루고 사려깊고 신중하게 선택하기를 권한다.
영어의 제과점이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풍족한데,
서사적 산문은 특히 장거리를 갈 때라면 더더욱 지방보다는 근육이 더 많이 필요하니까 말이다.(82) 

이야, 장거리를 갈 때라면 근육이 필요하니깐, 형용사와 부사를 잘 선택하란 말은 얼마나 그럴싸한지...
풍족한 제과점에서 쉽게 쌓이는 지방이나 쉽게 흡수되는 포도당을 얻기보다는, 오래 버틸 힘으로 근육이 필요하듯,
장기적 관점의 어휘 선택이 '서사적 산문'을 성공적으로 이끈다는 이야기겠다. 

마지막 장의 '메우기와 건너뛰기'에서 '긴 발언이나 대화를 역시 무자비하게 모두 반으로 줄여라.' 이런 요구가 나온다.
안톤 체홉은 단편 퇴고법에서 '우선 처음 세 페이지를 버려라'하고 충고했다고도 한다.
글의 전체를 모르고 시작하는 단계에서 쓴 것들은 글이 전개되고 나면 버려야 할 것들로 퇴화할 수도 있는 일이다.
모두 반으로 줄여라, 내지는, 첫 세 페이지를 버려라, 하는 주문은 가혹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말을 아껴도 충분히 전달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요구일 것이고,
그런 믿음을 가진 작가라야 충분히 독자를 지루하지 않게 매혹할 수 있을 거란 이야기일 거다. 

간혹가다,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은 때가 있다.
물론 손을 대기도 전에 욕망의 거품은 꺼지고 말지만.
이런 책을 읽노라면, 이런 잡문 말고, 진지한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쓰는 일도 멋지지 않나? 이런 망상에 또 빠지고 만다. 

그렇지만, 역시, 한국인이 한국어를 부려 쓰도록 도와주는 글쓰기 도움책으로는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慢步>가 좋을 거란 생각이다. 안정효의 책은 작가가 아껴야 할 말들, 깎아내야 할 말들을 우리말로 잘 설명하고 있으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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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봄을 사지만 우리는 겨울을 판다 - 성매매 피해 여성들의 글쓰기 프로젝트
(사)성매매피해여성지원센터 살림 지음 / 삼인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그들의 글에는 '솔직히'가 숱하게 튀어나온단다.
누구도 그들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자괴감이 밀어낸 말일지 모른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지어낸 말이 아닌 자기들의 말을, 누구에게 털어 놓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던 이들이다. 

봄을 파는 여성들.
시작은 각기 다르지만, 결말은 모두 한결같았다.
사람 사는 삶이 아니었다. 

봄을 파는 여성들도 노는 물이 다르다.
겨울을 파는 여성들도 있는 반면, 극소수지만 봄을 팔아서 한몫 챙길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곳도 있는 얄궂은 곳. 

그렇지만, 대부분은 다방으로, 집창촌으로 성매매 현장을 뛰어야 하는 '슬픈 몸'으로 살아가게 된다.
슬픈 결말. 

용기를 내서 쉼터를 찾게 되고, 재활의 의지를 갖는 여성들의 이야기인데,
한국에서 성매매 여성이 수십 만 명이 될 거라는 기사를 읽은 적 있는 걸 떠올리면, 새발의 피란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어 뛰쳐나오고 싶을 때, 큰 힘이 될 것이다. 

쓰레기통에서 핀 장미로서의 여성.
대한민국 헌법 제 1조에서 이야기하는 '주권'을 제 몸에도 행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국가는 '노예 국가'이다.
실제로 성매매 여성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빚'이란 이름의 굴레고, 그 삶은 곧 노예의 삶이 된다. 

나의 의식에 붙어 있는 몸뚱이지만 나의 의식도, 나의 몸뚱이도
나의 것이 아닌 상태로 살아온 거 같다.
난 진열장의 상품밖에 되지 못했다.
우리는 진열장의 고기처럼 진한 화장과 화려한 겉옷과 짙은 향수로
싱싱한 고기처럼 그들을 유혹한다.
우리에겐 이 세상의 남자들은 돈에 불과했다.
그 남자들에게 우리가 창녀밖에 되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올 수 없었던 진흙과 같은
내가 살기 위해 나를 버리고 죽여야 하는
난 하루에 열 번, 스무 번씩 나를 죽이고 살린다. 

내가 나를 죽이지 않으면 정말로 죽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라도 살고 싶었기 때문에
그러다가 내가 나를 죽이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죽이기 위해 모여든다. 

내 삶을 찾아준 것은 당신들이지만
이 삶을 얼마나 잘 살아가느냐는 나의 책임입니다.(재수 님, '살림' 상담소에서 일함) 

부산의 남부민동, 속칭 완월동이란 곳에서 일어나는 성매매 여성들의 현실을 고발한 책이다.
달을 감상하는 동네, 玩月洞은 성매매의 대명사가 되어 동 이름도 바꾸었지만, 현실은 여전한 모양이다.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날마다 겨울을 팔 그녀들의 미래에, 따스한 햇살이 함께 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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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그랬으면 좋겠네/ 조용필

나는 떠날때부터 다시 돌아올걸 알았지
눈에 익은 이자리 편히 쉴수 있는 곳
많은 것을 찾아서 멀리만 떠났지 난 어디 서 있었는지
하늘높이 날아서 별을 안고 싶어 소중한건 모두 잊고 산건 아니었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그대 그늘에서 지친마음 아물게 해
소중한건 옆에 있다고
먼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너를 보낼때부터 다시 돌아올걸 알았지
손에 익은 물건들 편히 잘수 있는 곳
숨고 싶어 헤매던 세월을 딛고서 넌 무얼 느껴왔는지
하늘높이 날아서 별을 안고 싶어 소중한건 모두 잊고 산건 아니었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그대 그늘에서 지친마음 아물게 해
소중한건 옆에 있다고
먼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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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10-18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상에 슬픔이 많습니다.
눈을 감고 노랫말을 쫓아 가봅니다.

글샘 2010-10-20 10:50   좋아요 0 | URL
1박2일에 이 노래가 나오더라구요. 조용필 노래 가사는 그대로 시죠. 시^^
 
책을 읽을 자유 - 로쟈의 책읽기 2000-2010
이현우(로쟈) 지음 / 현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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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슈퍼스타K2(줄여서 슈스케2)가 공전(空前)의 인기를 끌고 있다.
오죽하면 슈스케의 4인에서 탈락한 강승윤의 음원이 인기 가수들(뭐, 노래를 잘하는지는 모르겠는)을 제치고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고 하니...
슈스케의 인기는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해 본 일이 있는데,
로쟈의 '지젝'을 읽다가 '시차적 관점'이란 대목을 읽으면서 유사 현상이 얽힐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씩 탈락하는 서바이벌 게임 자체가 가지는 재미가 있는데,
각기 다른 캐릭터를 가진 참가자들을 보면서 관객들은 '자기 동일시'를 하게 될 수도 있다.
또는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마치 '아바타'인 양 응원하게 된다.
게다가, 그 프로그램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윤종신과 이승철, 엄정화가 신이 되어,
"네, 이번 주 생존자는 허각과 존박입니다." 이렇게 발표하지 않는단다.
시청자들이 문자 메시지를 통하여 자신의 아바타에게 응원을 보낸다.

그 상황은 이미 그들이 얼마나 오늘의 무대에서 노래를 잘 소화했고,
멋진 스타로서의 자질을 보여주었는가를 떠나는 문제가 되어 그 무대와 시차가 발생하는 문제로 이행하게 되고,
결국, 상황은 누구도 모르는 사태로 돌아가고 만다.
생방송이라는 상황.
그리고, 시청자는 누구나 문자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환경이라는 상황.
또, 자기들의 응원이 충분히 반영되어 자신의 <아바타>가 결승까지 진출할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하는 그 프로그램은
일종의 <가상 현실>이고 <시뮬라시옹>의 세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두 명의 남자 캐릭터가 남았다.
허각처럼 노래도 잘 하고, 그들을 이끌어온 카리스마도 있지만, 키가 작고 외모에서 핸디캡이 있는 가수와,
존박처럼 스타일 죽이고, 키도 되고, 노래할 때 표정조차 죽이는, 그치만 노래는 조금 안 되는 가수의 대결.
가수왕 선발대회라면 당연히 노래가 더 되는 허각이 우승을 하겠지만,
그 프로는 어디까지나 <스타> 선발대회이므로 스타일이 우승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심사위원의 발표'와 '관객의 투표'란 시차를 이용한 것이 슈스케의 인기 비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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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책을 읽었지만, 나는 로쟈의 책을 읽은 것이 아니다.
로쟈는 이제까지 '인문학 서재'와 '책을 읽을 자유'의 두 권의 책을 냈지만, 아직 그는 한 권도 책을 쓴 적 없다.
'책을 내다'와 '책을 쓰다'의 차이를 그는 잘 이해할 것이다.
내가 그의 책을 읽으면서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그가 '쓴' 책을 읽고 싶은 욕망의 실현이다. 

하지만, 그의 '책을 내는 행위' 또한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아주 중요하다.
조정래가 한국 사회의 온갖 문제의 밑바닥을 헤집으려 '허수아비춤'이란 소설을 썼지만,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가져왔던 것은 결정적인 한 권의 책이나 한 사람이 아니라,
점조직처럼 숱한 대학에 흩뿌려졌던 '세미나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대학생들은 '데모하지 마라'는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대학에 입학한다.
그렇지만, '못된 선배'들을 만나면서 그들은 '의식화'가 된다. 그 의식화 과정을 '세미나'라고 한다.
글을 읽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문제 의식을 가지고 행동으로 옮기게 되는 것을 온몸으로 익힌 것이다.
2년 전 촛불 집회의 현장에 그토록 많은 중년들이 등장한 것은 이미 그들의 세포들이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로쟈의 이 책은 내가 참 싫어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지면이 이미 발표된 것들을 짜깁기하여 책을 만든 것.
그리하여 이 책의 글들에 중언부언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이지만,
로쟈의 이 책은 비평할 수 없이 알찬 '내용'이 가득함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우뚝한 '선배(아마 그는 대학 후배일 것이지만)'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많은 책 제목들에 기가 눌리기도 했고,
또 그 '선배'가 읽었던 책들을 읽고 싶은 이뤄질 가망없는 욕망이 보글거리기도 했지만,
이 책을 읽은 성과라면, 그가 들려준 '가라타니 고진'과 '지젝' 이야기에 힘을 입어,
이제 나도 시간을 내서 지젝을 지젝거린 책들을 찝적거려 볼 엄두를 내었다는 정도다. 

대학 시절 '선배'와 '세미나'가 없었다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마르크스 레닌과 마오쩌둥의 책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경험이 이제 '데리다와 라캉'을 이어 '헤겔과 지젝'까지 읽지 않을 수 없게 다리를 놓아준 '선배'의 글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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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지젝인가?
헤겔의 말대로 철학이란 '개념으로 포착한 자기 시대'를 인용하여, 지젝이야말로 그 정의에 가장 충실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란다.(574)
아내를 강간하는 몽골군의 불알에 먼지를 묻힌 것으로 만족하는 따위의 자기 위안은 집어치워야 한다는 일갈!
베케트,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
그래서 근본적 혁명은 오래된 꿈을 실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꿈꾸는 방식 자체를 다시 창안해야 한다.(569)는 글을 읽으면서 나는 가슴이 뛰었다.
오늘날의 적은 제국이나 자본이 아니라 민주주의(알랭 바디우)이기 때문이다. 

다시 슈스케로 넘어가서,
심사위원이 결정해주던 시대는 갔다.
코카콜라가 후원하고, 문자 메시지(한 통에 200원인가 먹는다. 60,000명이 참여하면, 12,000,000원?)로 수익을 얻는 구조를 감추고, 시청자는 자신의 캐릭터를 응원하기 위해 키보드 워리어가 되는 것이다.
관점의 이동. 

어느 하나가 나머지의 진리가 아니라, 진리란 관점의 이동, 시차적 관점에서의 진리를 보여주려는 지젝의 노력을 간과할 수 없겠다. 

--- 

그에게 인간다운...에 대해 물었더니 '같잖은 인간, 덜 된 인간, 값싼 인간'의 대립항으로서의 '인간'을 내세운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책읽기란 것.
그렇지만, 그에게 가장 절망스런 미래는 다음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526)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바라지 않는다.
아내는 울고 또 운다. 나 역시 운다. (163) 

니진스키란 전설적 무용가가 요양원에 입원했을 때 정신을 놓기 전 쓴 일기라는데, 나는 이런 말에서 로쟈의 진심이 담긴 구절은 아닌가 싶어 마음이 짠해진다. 
시도 간간이 썼다던 문학 청년 로쟈가 유난히 집착하는 '눈물'이란 단어를 만나는 일은 조금 마음 애린다.

로쟈의 문체를 해석해줄 멋진 사람이 알라딘에 한 사람 있긴 하지만,
그 이가 이런 걸 좀 분석해 줬으면 좋겠다.
로쟈가 문학 작품에 대한 비평을 할 때의 다소 멜랑꼴리한 문체와,
그가 번역의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낼 때의 조금 깐깐해 뵈는 문체와,
어쩔 수 없이 사회적 문제에 입장을 제시하며 '선배'로서 서야 하는 대목에서의 어쩌면 당당하고 일면 당황스런 표정의 문체가 드러나는 것인지 어떤 것인지를 말이다. 

비평이란 걸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취향에도 안 맞는 나는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일이 잘 없다.
그런데, 왠지 꼼꼼하게 비평을 한다면, 위와 같은 차이가 나지 않을까...하는 생각은 해 보았다.
로쟈가 가장 맘 편하게 읽고 쓰는 분야가 문학 작품에 관한 것이라면,
로쟈가 지젝거리긴 하지만, 결코 마음 편할 수 없는 '선배'로서의 입장도 어쩔 수 없는 로쟈의 반쪽이다.
그래서, 로쟈가 제대로 된 책을 내려면, 마음 편하게 맨날 강의하는 러시아 문학에 대하여 책을 써 줬으면 하는 갈망과,
또한 '가라타니 고진'과 '지젝'처럼, 헝클어지고 혼돈스런 세계에 철학의 빗질이란 세례를 내려줄 수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계속 소개해 주기를 바라는 열망이 이 책의 독후감이다.
 
다만, 내가 자꾸 시비를 거는 것은, 그것들이 이렇게 뒤섞인 책보다는, 깔끔하게 '러시아 단편 문학 강의'나 '로쟈가 읽는 지젝'처럼 칸을 나눠서 출간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로쟈는 그 이름에서 감지되듯,
인문학의 '인간'과 '문학' 중, 문학 쪽으로 아무래도 감성적으로 치우친 유형인 모양이다.
그렇지만, 그의 '이성과 의지'는 언제나 '인간 세상'의 문제를 좌시할 수 없도록 방향타가 자동-조향 되어있는 것 같기도 하여 중심을 잡아주는 것 같다.

'문학'은 과거의 사건에 '형상'을 입혀 관심을 부르는 것이고,
'인문학'은 현재의 난삽한 삶에 관심을 집중하여 '이성적 분석'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문학'과 '인문학'은 동떨어진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쿤데라의 소설에서 강박적 여성 편력을 가진 바람둥이를,
'여자들에게서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하면서 매번 실망하는 서정시적 유형'과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면서 언제나 만족하는 서사시적 유형'으로 나누었듯이,
문학과 인문학은 '실망'과 '만족'의 사이를 오가는, 영원히 정지할 수 없는 진자나 마찬가지인 '개념'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홍어(洪魚)'도 '광어(廣魚)'도 모두 넓을 홍, 넓을 광을 쓰게 된 나름의 진화지만,
제각기 세상에 적응하는 양태가 달랐던 것처럼,
로쟈의 홍어와 광어가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일요일 아침 타자 속도를 제법 낸다.

건필을 그저 글 잘 쓰라는 요식적인 안부 인사로 알았는데,
나이가 들고,
책을 더 볼수록,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건필'을 간절히 빌게 된다.
요네하라 마리가 '건필'하지 못하고 멀리 가서 아쉽고, 김현이 '건필'하지 못해서 아쉽단 생각을 많이 한다.  

로쟈가 나보다 젊어서 다행이고, 부디 그가 오래오래 건필하기를 바란다. 

 

-----------이 좋은 책에서도 시빗거리 몇 가지...

199쪽. 나보코프라는 듣도보도 못한 사람 이름이 자꾸 '나코보프'라고 읽혀서 몇 번 시선을 버벅거렸는데, 드뎌~~~ 하하하!!! 로쟈도 '나코보프'를 인정했다. 나는 이런 사소한 데서 환희를 느끼는 변태인가??? 

229쪽. 기형도의 '엄마 걱정'을 초등이나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됐다고 하는 건 오류일 것이다. 이제까지 초중 교과서는 국정이었는데, 기형도의 시는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나 실릴 법한 어두운 시였다. 글쎄, 새로 나오는 중학교 교과서는 국정에서 해제되었으니 실린 책도 있을 법하다.
242쪽. 이청준의 '서편제'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있다는 사실... 이런 건 확인해 봐야 한다. 실려있지 않다.

399쪽. 한국은 1제곱미터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다. 1제곱킬로미터당 5천톤에 이르는... 일관성이 없는 걸로 보아 오류로 보이는데, 다음판에선 수정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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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0-10-17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엄마 걱정>이나 <서편제>는 아마 문학교과서에 실렸던 듯싶은데, 오래전 학원강사 시절의 기억이라 바로 확인은 안되네요.^^; 이산화탄소 관련은 다시 확인해보니 필자가 그렇게 썼습니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7# 장문의 리뷰 잘 읽었습니다.^^

글샘 2010-10-18 13:56   좋아요 0 | URL
엄마 걱정은 18종 문학 교과서(고딩) 중 3권에, 서편제는 4권에 실려있습니다. 국어 교과서에는 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가 실려있었지요. 6차 교과서(2001년까지)에요. 뭐, 저 제곱미터는 어찌되었든 말은 되지만, 통일이 안 되니깐, 좀 거슬리네요.^^

비로그인 2010-10-18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넓고 깊게 보시는군요. 알라딘 서재의 영원한 '선배'님^^

글샘 2010-10-20 10:51   좋아요 0 | URL
박이정 博而精 이 되어야 하는데, 뭐 책읽는 게 직업이 아니다 보니, 설렁설렁 많이만 읽고 있습니다. ^^
 
축제 애지시선 16
김해자 지음 / 애지 / 2007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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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라는 이름은 시로 먼저 만났다.
'데드 슬로우'란 시를 양철나무꾼님 서재에서 읽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감동이 참 오래 밀려와 가슴에 담겨있다. 

큰 배가 항구에 접안 하듯
큰 사랑은 죽을 만큼 느리게 온다
나를 이끌어다오 작은 몸이여,
온 몸의 힘 다 내려놓고
예인선 따라 가는 거대한 배처럼
큰 사랑은 그리 순하고 조심스럽게 온다
죽음에 가까운 속도로 온다

가도 가도 망망한 바다
풀 어헤드로 달려왔으나
그대에 닿기는 이리 힘들구나
서두르지 마라
나도 죽을 만치 숨죽이고 그대에게 가고 있다
서러워하지 마라
이번 생엔 그대에게 다는 못 닿을 수도 있다 <김해자, 데드 슬로우>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8년 여 조립공 시다 미싱사
우유 학습지 배달
시집 무화과는 없다 

1980년대에 운동하는 사람들은 공활을 거쳐 현장으로 들어가는 일이 흔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노동자로 일생을 살아오신 아버지를 보면, 멀쩡한 대학교 나와서 다시 노동자로 사는 일은 어떤 지향을 가진 것이래도,
그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러구러 살아오던 김해자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부랴부랴 유용주 등이 그러모은 시집이 이 시집이다. 

그가 노래부를 자리에서 불렀다는 부용산이란 노랫말 참 슬프고 허전하다.
그리고, 이 노래를 작곡했다는 사람이 월북했다고 해서 한참을 금지곡이었다는 것도 더 허전한 소식이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오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박기동 시 /안성현 작곡 /안치환 노래


안치환의 '부용산' 듣기
http://blog.naver.com/djp2218/80060278642 

세상의 모든 아픔을 다 보고 듣고 있다고,
내가 너희의 고통을 다 알고 있다는 '관'하고 '음'하는 관세음의 마음일까.
그의 눈에는 온갖 세상 앓고 있는 소리가 다 들린다. 

결국 그 자신도 아파서 쓰러지지만... 

김해자가 바라보고 들은 관세음 중에서 기억에 남는 건, 몸꽃이다. 

그 여자 몸은 도화지
철도 없이 이 꽃 저 꽃 피고 진다네
그 여자 허벅지는 너럭 바위
밤새 울긋불긋 암각화가 새겨진다네
구렁이 똬리 튼 듯 등나무 덩굴 감고 올라간 듯
눈가에는 눈꽃 등에는 등꽃 터진 뱃가죽엔 배꽃
그 여자 남자는 화가
살빛 화폭에 푸른 색채 그려 넣는다네
그 여자 남자는 조각가
꿈틀대는 돌 위에 보랏빛 문양 때려 넣는다네
열 손가락은 끌이 되고 주먹은 망치가 되고
허리띠는 조각품을 묶는 끈이 되었다네
새벽녘 밤샘 작업을 마친 남자는
완성된 작품 안고 뒹굴었다네
용서해 줘 죽도록 사랑해
부풀어 오르는 그림 위에 눈물의 유약 바라주며
밤새 돋아난 몸꽃 어루만졌다네 (몸꽃, 전문) 

이렇게 날카롭게 날선 신경으로 세상을 듣고 보노라면, 어찌 쓰러지지 않을 수 있을지...  

한몸인 줄 알았더니 한몸이 아니다
머리를 받친 목이 따로 놀고 어디선가 삐그덕
나라고 생각하던 내가, 내가 아니다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언제인지 모르게
삐긋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가슴을 따라주지 못하고
충직하던 손발도 저도 몰래 가슴을 배반한다
한맘인 줄 알았더니 한맘이 아니다
늘 가던 길인데 바로 이 길이라고,
이 길밖에 없다고, 나에게조차 주장하지 못한다
확고부동한 깃대보다 흔들리는 깃발이 살갑고
미래조의 웅변보다 어눌한 현재진행형이 나를 흔든다
후배 앞에서는 말수가 줄고 선배 앞에서는
그가 견뎌온 나날만으로도 고개가 숙여진다
실행은 더뎌지고 반성은 늘지만 그리 뼈아프지도 않다
모자란 나를 살 뿐인, 이 어슴푸레한 오후( 마흔 즈음, 전문 )

그의 마흔 즈음은 삐걱거린 모양이다.
마흔 즈음이면 누구나 삐걱거리는 몸과 마음으로 흔들리는 모양이다.
자신감도 없고 더 이상 이뤄야 할 무엇도 없어지는,
그래서 늘 모자란 내가 살아야 함을 알게 되는 나이.
모자란 나를 살 뿐인, 이 어슴푸레한 밤... 

고정희의  <사십대>에서 방황이나 고비를 그러 안고 마감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는데,
마흔 즈음엔, 마흔에 대한 시들이 눈에 밟히곤 한다.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고정희, 사십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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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0-10-17 0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김해자 언젠가 시특강 하시면서 살짝 인용,퉁쳐 버리셨던 기억이 나는데요.

몇몇 있어요.
그들의 지난한 삶을 알아야 시가 달리 읽히는 시인들.
전 김해자가 그랬고,이면우가 그랬고,고정희가 그랬어요.

고정희는 '제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라고 했는데...
쭉정이든 알곡이든 뭐가 여물어야 말이지요.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글샘 2010-10-17 12:26   좋아요 0 | URL
03:32까지 뭘 하세요? ㅎㅎ
시깨나 쓰는 이들은 다들 삶이 팍팍해요.
그래서 시인을 알아야 시를 안다고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죠.
고정희는 사십대에 지리산에서 삶을 버렸다죠.
뭐, 여물거나 말거나... 조급하지 말고, 제 편지나 하나 읽으시죠. ^^

가을 편지 /고정희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한 열린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