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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오늘의한국작가 5
기형도 지음 / 솔출판사 / 1994년 2월
평점 :
절판
기형도는 딱 맞춤하게 죽었다.
세상 모든 죽음에 '호상'은 없다.
어떤 죽음이든 애석하고 나름대로 아프다.
그렇지만 기형도의 죽음은 그를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매김하도록 만들었다.
아쉽고 아쉬울 수도 있지만,
김지하나 박노해가 가끔 내뱉는 말들은 <세기말> 이후 빛을 잃어버렸음을 볼 때,
기형도 문학의 완성은 그의 죽음과 함께라는 것이 나의 편견이다.
그의 죽음에 많은 작가들이 추모 문집을 냈다.
그의 유작도 16편 실려 있다.
그의 시집 제목은 그의 시의 빛깔을 제대로 담고 있다. 검은 빛.
검은 언어로 쓴 검은 세상. 입 속의 검은 잎.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 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입 속의 검은 잎)
세상은 어둡다. 독재가 가득하던 세상이다.
'먼 지방'에 있던 그는, '가까운 지방'으로 가야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들 이런 <부채 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검은 입 속의 검은 잎인 말못하는 혀의 부자유스러움을 가지고...
세상은 그에게 <빈 집>이었으며, 온통 <안개>로 가득한 곳이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 집>
그에게 사랑이 있었다.
짧았던 밤.
이제 그 사랑을 잃었다. 모두에게 안녕을 고한다.
그리고 이제 문을 잠근다.
이룰 가망없는 그의 사랑은 '빈 집'에 갇힌다.
김기덕 같은 이의 작품을 만들게 해주는 모티프가 될 정도로 강렬하면서도 텅 빈 시상이 가슴을 저민다.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 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 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銃身)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헤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안개)
도시로 흘러온 사람들의 누렇게 뜬 얼굴,
불행의 슬픔이 가득한 그 얼굴들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마치 이성복의 <그 날>을 읽는 기분이다. 무서운 이 도시...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그 날, 부분)
그의 '엄마 걱정'은 유아기 그의 가난을 가장 잘 드러낸 시다.
시어는 아름답다. '찬밥처럼 방에 담겨' 또는 '내 유년의 윗목'
이런 말을 깎아낼 줄 아는 사람은 천상, 시인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한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걱정)
그 아이가 자라 '비극적 세계관'으로 가득한 시를 쓴다.
'괴이하고 딱딱한 이미지들'로 가득한 시를...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
아,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이런 구절은 아무나 지절거릴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아, 살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지금 다른 시를 남긴다면...
그의 젊었던 시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하고 나는 혼자서 곱씹는 것인데...
나는 기형도의 시가 아주 극단적인 비극적 세계관의 표현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은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이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그 부정성을 그 이전에 보여준 시인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
아무리 비극적인 세계관에 침윤되어 있더라도,
대부분의 시인들은 낙관적인 미래 전망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런데 기형도의 시엔 그런 낙관적인 미래 전망이 거의 없다.
그 비극적 세계관의 독특한 시적 모양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다. <김현>
김현의 설명이면 되었다. 더 내가 덧붙일 말은 없다.
장정일의 '마왕'과 '<바람의 집 - 겨울 판화 1>의 대조는 의미있는 독서다. 역시 장정일이다.
바람 부는 밤 말을 타고 달리는 아버지와 아들
그는 그 아들 품속에 안고 춥지 않도록 감싸 줬네.
아가 무엇 그리 무서우냐?
오 아버지 마왕을 봐요. 금관 쓰고 망토 휘둘며...
아아 그건 안개란다.
귀여운 아가 함께 가련?
좋은 장난감 널 기다리고 수많은 꽃들 널 반기리.
아름다운 옷들 쌓여 있네.
자, 나와 함께 떠나가자.
너와 함께 놀아주기 위하여 나의 귀여운 딸이 기다리네.
너를 위해 춤추며 노래하리 너를 위해 춤추며 노래하리.
오 아버지, 저것 보세요. 저 마왕의 땀이 보여요?
아가 아가 저기 저것은 늙은 수양버들이 틀림없다.
울부짖는 아기 가슴에 안고 성급히 집에 와 보니
품속에 안긴 아가 죽었네.(괴테)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우를 깎아 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바람의 집 - 겨울판화 1>
그의 시는 <길 위에서 중얼거림>의 연장일 뿐이었다.
그의 이 유고집에실린 '시작 메모(51)에서 비트겐쉬타인의 말을 인용했던 것으로 그의 마음을 읽어볼 수 있다.
"내 책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에 씌어진 부분과 씌어지지 않은 부분이 그것이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 두번째 부분이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비트겐쉬타인)
그러나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며 이러한 불행한 쾌락들이 끊임없이 시를 괴롭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