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봉우리
유메마쿠라 바쿠 지음, 이기웅 옮김 / 시작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어 원제가 Kamigami no itadaki다. 
일본어가 재미있는 것은 같은 글자가 붙어서 복수형이 되는 건데, '~들'보다 구체적인 맛이 난다.
신들...보다 신,신...이런 조어법이 주는 말의 맛이 있다.
이타다키는 '정상'을 뜻하는 말이다.
'신들의 봉우리'와 '카미가미노 이타다키'가 주는 말의 맛은 그렇게 다르다.
의미는 같지만... 

이 책은 잘 짜여진 미스터리 소설이기도 하고,
인생에 대한 고찰을 등산을 통해 표현한 소설이기도 하고,
산악 소설과 도전하는 사나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맨 앞, 에베레스트 등정에 실패하는 장면을 사진에 담은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광경을 농밀한 구름이 에워싸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뒤덮어 감춘다.
그것이 내가 본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었다.(14쪽) 

마치 시에서 수미상관의 기법을 쓰듯, 맨 뒤에서 다시 수십 년이 지난 사진 이야기로 끝나는 소설. 

어느새 구름이 에베레스트 정상을 모두 감싸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578쪽) 

산사나이들의 순정은 그렇게 아무 이유없이 거기 오르는 것이다. 

앞의 <마지막 모습>을 남긴 사람은 '산이 거기 있으니까' 오른다던 맬러리고,
뒤의 <마지막 모습>을 남긴 사람은 '내가 여기 있으니까' 오른다던 하부다. 

이 긴 소설을 읽으면서 길을 잃지 않고 끝까지 독서의 트레킹을 도와준 것은 탄탄한 구성이다.
이야기를 이렇게 쓰면 독자를 길 잃고 헤매지 않도록 만들 수도 있구나... 감탄한다. 

인생은 등산이라고 하지만, 그저 야트막한 산을 오르내리는 정도의 인생도 있고, 에베레스트의 그 빙벽에 도전하는 인생도 있다.  

도전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지만, 도전하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란 이야기도 있지만,
이 소설은 도전하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하부를 통해 형상화하여 들려준다. 

하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고등학생 시절 황석영이 썼다던 '입석 부근'같은 등산 소설이 얼마나 뜨거운 가슴에서 나온 것인지를 조금 생각한다. 그보다는 오세영의 <등산>의 자세.
많이 오르려는, 꼭대기에서 만세부르려는 자세가 아닌,
지금 여기서 조금 조금씩만 미래를 향하여 <가까이, 가까이> 가는 것이 작가가 찬양하는 삶의 자세다. 

자일을 타고 오른다
흔들리는 생애의 중량
확고한
가장 철저한 믿음도
한때는 흔들린다

암벽을 더듬는다 빛을 찾아서 조금씩 움직인다
결코 쉬지 않는
무명(無明)의 벌레처럼 무명을
더듬는다

함부로 올려다보지 않는다
함부로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벼랑에 뜨는 별이나,
피는 꽃이나,
이슬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조심스럽게 암벽을 더듬으며
가까이 접근한다
행복이라든가 불행 같은 것은
생각지 않는다
발 붙일 곳을 찾고 풀포기에 매달리면서
다만
가까이
가까이 갈 뿐이다. (오세영, 등산) 

작가의 이름 참 멋지다. 꿈의 베개... 유메 마쿠라... ^^ 

그의 이야기는 이것이다.  

인간에게는 권리가 있다.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에 생명을 걸어도 된다는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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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0-11-16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서 이렇게 멋진 리뷰도 가능하군요~

저 에베레스트 말고 일본어도 배워야 할까 봐여,ㅋ~.
'카미가미 노 이타다키'랑 '유메 마쿠라'랑 어감이 좋아서,자꾸만 입안에서 굴리며 발음해 보게 돼요.

글샘 2010-11-16 22:22   좋아요 0 | URL
음... 이 리뷰가 멋진 구석이 있나요??? ㅋㅋ
일본어를 공부하고 나서는 일본어 책은 꼭 원 제목을 찾아보게 됩니다.
원어로 읽는 맛과 번역의 맛은 천지차이거든요.
아~ 꿈의 베개를 아는 유메마쿠라 바쿠... 하부가 마지막 남긴 말이 그거잖아요. 상상해~
삶의 철저함을 추구하는 남자가 남긴 말이란 게, 상상...이라니... 정말 멋진 소설이었습니다.

turk182s 2010-11-17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양사작가라는 말에끌려서 사둔책인데,,좋게읽으셨나보군요,,

글샘 2010-11-21 21:03   좋아요 0 | URL
음양사는 어떤 작품인지 몰라도, 이 책은 멋진 책입디다.
 
토지 2 - 1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2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토지... 땅을 파먹고 사는 인간들의 이야기지만,
과연 인간에게 자신이 제어하지 못할 운명이란 어떤 것일지... 그런 생각을 곱씹게 하는 책이다. 

구천이와 아씨의 관계가 그렇고,
월선이와 용이, 강청댁과 임이의 관계가 그렇다.
서희와 봉순이, 길상이의 관계 역시 운명이란 과연 인간이 넘볼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운명의 손길에 곱다시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인지... 

조준구처럼 참으로 면목없지만, 그것이 인간이라고 고개 빳빳이 들고 사는 것들도 있고,
귀녀처럼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든 뒤바꿔보려고 안간힘 쓰는 존재도 있고,
거기 빌붙어 빌어먹을 인생 어떻게든 바꿀 수 있을지 도박하는 평산이 같은 넘도 있는가 하면,
되나 마나 욕지거리로 살다 죽는 강청댁같은 인물도 있는 법이다. 

토지를 읽는 일은,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의 삶에  도대체 운명은 어떤 역할을 노는 것인지를 곱씹게 하는 일이고,
인간의 악에 가까운 시기와 질투가 얼마나 운명 앞에서 헛된 것인지를 느끼게 하는 일이다. 

윤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옳음'과 '순명'의 사이를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사건과 사고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과 사랑 이야기들. 

'의 義'와 '명 命' 사이에 놓인 인간의 선택은 확고하게 한 쪽으로 기울 수만은 없는 법이지만,
아무리 유치하고 치사해 보이고 더러워 보여도,
강청댁의 삶도 하나의 삶이요,
귀녀의 삶도 하나의 삶이요,
월선이의 삶도 하나의 삶이요,
조준구의 삶도 하나의 삶이다. 

다들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쳐있어 '의'와 '명' 사이의 어느 좌표쯤에 살고 있을지는 쉽게 그려내기 어렵지만,
이 많은 인물들의 삶을 엑스축의 <의>와 와이축의 <명>을 교차하게 그려 두고,
옳으면서 운명에 순응하며 사는 길상이나 봉순네의 삶쪽과,
옳지 않고 운명에도 거스르려는 귀녀같은 삶쪽의 그래프를 그리는 일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옳지 않지만 귀녀처럼 범죄까지는 아닌 환이의 사랑은 나름대로 페이소스를 강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고,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운명의 장난에 놀아나게 되는 용이와 월선, 강청댁, 임이네의 좌표는 참으로 지점을 난감하게 그릴 수밖에 없게 되기도 한다. 

대하소설이면서도 귀녀의 범죄가 처리되는 부분에서는 <람세스>의 후련함을 느끼게 하는 독서 체험을 남기기도 하고,
구한말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농민과 지주, 양반과 상놈의 유명무실한 선을 굵게, 가늘게 설핏설핏 그려내는 속에서 사람위에 사람있고 사람밑에 사람있던 시대상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예전에 읽었던 소설이라는 생각을 거의 할 수 없는 소설이다.
워낙 많은 인물들이 얽혀있어 그렇기도 하고, 한 인물의 개성에 기댄 소설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 군상이 관계맺는 속에서 스토리가 저절로 엮이게 되는 플롯을 가지고 있어 그렇기도 할 것이다. 

날씨는 차갑다.
누군가는 수능 준비하는 수험생을 위하여 초콜릿을 사기도 하고,
누군가는 세상이 자신을 배반하는 원망에 휩싸여 세상을 버리기도 한다.
꿈에 부풀어 미래를 설계하는 이에게는 밝기만 한 햇살이겠지만,
그 햇살조차도 아무런 의미없이 뿌연 안갯속이기만 한 사람도 있는 법이다. 

대하 소설을 읽는 일은, 그 모든 사람들과 그 모든 이들의 환경을 한꺼번에 품고 흐르는 큰 강물을 읽는 일이다.
그래서, 토지를 읽으면서 버스간에서 간혹 서고 간혹 앉은, 또는 창가에서 잉어빵을 굽기도 하고 곱은 손을 호호 불면서 채소를 팔기도 하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모두 대등하게 돌릴 수 있는 마음의 넓이를 던져주는 일이기도 하다. 

여러 사람들...
각기 다른 사람들...
그렇지만, 제각금 하나씩의 고민과 하나씩의 보람을 가슴에 품고 사는 그 사람들...
그들에게 큰 힘은 되지 않겠지만  톱밥 난로에 톱밥 한 줌 던져주는 기분으로
조금은 환한 마음을 갖게 하는 그런 일.
토지를 읽으면서,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와 임철우의 소설 <사평역>이 생각났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사평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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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0-11-16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명이 지배한다'
그렇다면 속시원히 '니 운명은 이것이다'라고 누가 나에게 정답지를 살짝 보여줬으면 좋겠네요.^^;
10대 때는 운명따위 관심이 없었고, 20대 때는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는 거야'를 외쳤는데.
지금은, 어쩐지..'운명은 있어. 그게 몰라서 답답할 뿐이지'하고 중얼거리곤 합니다.
많이 약해졌을까요? (웃음)

글샘 2010-11-16 22:24   좋아요 0 | URL
운명은... 정답지가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운명이죠.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이 충분하진 못했지만 이명박보다 훨씬 나았음에도...
이명박이 뽑힌 그런 거.
앞으로의 운명은... 충분히 바꿀 수 있는 것이구요. ㅎㅎㅎ

turk182s 2010-11-17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토지를 볼때마다 서희가 등장하면 아직도 최수지가 오버랩되요..이번에 리브로 구간도서 반값할인행사에 넘어가서 토지도 구입했는데 언제읽을련지..

글샘 2010-11-21 21:02   좋아요 0 | URL
저는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
토지는 읽을수록 멋진 맛을 느끼게 되는 작품이더군요.

순오기 2010-11-18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실하게 한 권 한 권 리뷰를 남기시네요~~~~~ ^^
토지의 인간 군상들이 엮어가는 삶이 참 드라마틱하죠.
누군가에겐 참 비루하고, 끔찍스런 모습이지만... 난 임이네를 보며 내 속을 보는 거 같았어요.ㅜㅜ

글샘 2010-11-21 21:02   좋아요 0 | URL
착실하게 책을 읽을 시간이 잘 나지 않는군요. ^^
임이네... 인간의 내면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더라구요. 박경리 선생의 훌륭한 점이 그런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해내는 힘.
 

오랜만의 놀토다.
지지난 주부터 2주간 등교하는 토요일이었는데 말이야.
토요일이 쉬는 날이 되면 누가 손해를 볼까?
회사 사장님이겠지.  
쉬는 날이 많으면 놀러 다니는 사람도 많아질 것이고, 
장사하는 사람들도 경기가 많이 풀리는 원린데 말야.
학교도 몇 년 후면 토요일은 쉬는 날이 되겠지. ^^
민우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면. ㅋㅋ 

오늘은 1950년대.
전쟁 이후의 각박한 시대에 쓸쓸한 시를 쓴 박인환이란 시인 이야길 좀 할게.
우선, 그이의 유명한 '얼굴'을 읽어 보자.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 꽂고 산들, 무얼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 -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얼굴) 

수미상관으로 나오는 이야기.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유행가 가사에 이런 말이 있더라. 
'님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만 찍으면 남이되어 버리는 사연...' 

사람의 관계는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지.
아는 사람도 '관심있는 사람'과 '별 관심 없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고...
<남>이란 건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보니,
'별 관심 없는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해.
근데, 모르는 사람이야 나랑 관계가 없는 거니깐...
관계를 맺으면서 <관심없는 사람>이 되지 말자... 뭐, 이런 거 아닐까? 

1940년대에 제2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1950년대는 한국전쟁이 있었단다.
전쟁.
그 무서운 시대.
전쟁이 무서운 것은 <우리 편> 아니면 다 죽여버리는 일이기 때문이야.
바로 <남>이 그만큼 무서운 거지.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이 전쟁이란다.  
전쟁 이전에는 <너와 나>보다는 <인간>이란 한 종족 안에서 함께라고 생각했는데,
큰 전쟁 이후에, <너>와 <나>는 남이지. 또 <너희 나라>와 <우리 나라>는 적대국이고. 

이런 시기에 유명해진 것이 <실존>이란 것이야.
일반적으로 <인간>은 이렇다... 말고,
바로 <지금 여기> 있는 <나>의 실제 존재.
살에서 땀냄새가 나고, 발고랑내도 좀 나고, 밥먹으면 입냄새도 나는... 그런 실존.
그러던 사람이 폭탄 한 방 터지면... 온기가 사라지는 시체 토막이 되어버렸거든.
그런 시대의 노래야. '얼굴'

기를 꽂고 사는 일.
깃발은 이편 저편을 가르는 표시잖아. 청군과 백군. 미국과 소련... 이렇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이념의 깃발이 다른 것.
그런 것이 인간 실존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느냐... 이런 생각이겠지.
기를 꽂고 산들 무엇하나. 

물빛(검은 색)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처럼 고상하게 살려고 해도 소용없어.
인간은 꽃처럼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야.
총알 한 방이면 차가운 시체로 누워버리는 존재니깐.

사랑을 아는 나이 이전부터, 기다림부터 배워버린 불쌍한 실존.
밤새 비가 내리고, 눈물도 흘러 내리고...

가슴에 쌓은 돌단은...
뭔가를 간절히 기도하고 바라는 마음인데,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단 한마디만 여운을 남기는데,
바람처럼, 신기루처럼, 아스라한 별처럼...
그대와 나의 관계는 허무할 뿐이었나봐... 

그래서 이 사람은 이런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어.
물음 : 도대체 왜 사람마다 다른 얼굴, 다른 표정을 갖게 된 걸까?
화자의 답 :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 -,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다음엔 아주 유명한 노래야.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한 번 읽어 보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세월이 가면)


이 노래도 수미상관이지.
이제 그 사람 이름은 잊은 것 같아도, 내 마음 속에 뚜렷이 남은 그 사람.
마지막에 <내 서늘한 가슴> 이렇게 촉각적으로 표현했구나.
서늘한 가슴~ 하니깐 어떤 느낌이 나니?
헤어짐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진 않지만, 왠지 모를 서러움에 가슴 아픈 느낌.  
1970년대에 박인희란 가수가 노래로 불러서 유명해진 노래.

한국도 전쟁 이전엔 농촌 사회였고 변화가 적은 사회였단다.
그렇지만 전쟁 이후, 만남과 헤어짐이 일상이 되어버린 그런 시대가 되고 말지.
도시적인 삶이 주는 상실감, 그리고 그 추억과 회상...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가슴에 남는 느낌을 '정서'라고 한단다.
이 시의 정서는 <상실한 것들을 가슴에 남겨 두는 그리움의 애상감> 같은 것이지.

모든 것이 떨어지는 가을의 벤치 가에서
헤어져버린 사랑을 추억하는 슬픈 노래.

이 노래는 명동 어느 술집에서 작가는 이 시를 읊었고,
친구 김진섭이 즉흥적으로 작곡하였다는 에피소드가 함께 노래로 잘 알려진 작품이란다.

전쟁 이후의 상실감, 그리고 떠돌이(보헤미안)의 피난 경험, 헤어짐의 허무함 등이 드러난 도시적인 시야.
전쟁의 상실감을 드러내주는 시를 한 편 더 보자.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목마와 숙녀)

시의 제목은 '목마와 숙녀'란다.
목마는 <동화적인 순수한 꿈>을 떠올리게 하는 소재이고,
숙녀는 처음에 등장한 <버지니아 울프>란 작가라고 생각해 보자.
근데, 버지니아 울프는 전후의 불안과 절망으로 얼룩진 신경증으로 투신자살한 영국의 여류작가란다.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 제목이 <To the Lighthouse 등대로...> 이런 책이야...
시에도 나오잖아. 그치?
그러니까, 순수한 꿈은 어디로 가고 전쟁 후의 불안과 절망만 가득한가... 이런 것으로 봐도 좋겠다. 

주제는 딱 나와있어. <페시미즘>, 비관주의, 허무주의, 허무함. 이런 것.
그런 전쟁 후 허무주의를 잘 드러낸 사람들에게 <다다이즘>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그 '다다'가 '목마'란 뜻이래.
어린 시절의 동화같은 아름다운 세상을 잃어버린 참혹한 전쟁 이후의 시대.
다다이즘의 시대, 페시니즘의 시대... 

허무하니깐 뭐가 나오지? 술~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별은 보통 무얼 상징할까?
희망, 꿈, 소망... 이런 거잖아.
허무로 가득한 술병에 소망이 떨어져 내린대... 슬픈 시대.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은 '남성의 성기'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고,
원시적 생명력의 건강함을 뜻하기도 해.
동물적인 생명력만 남은 전쟁 이후의 허무한 시대.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 시절.
쓸쓸한 가을.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전쟁 이후의 시절.
술에 취해 쓰러뜨린 술병.
목메어 우는 삶. 

이런 힘겨운 인간 존재를 <실존 주의>는 그리고 있단다.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화자가 가치있게 생각했던 것이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되어버리는 무서운 상황...

그런 무서운 상황을 수용해야하는 화자는 슬프겠지.
주제는 <전쟁 이후의 허무와 고독으로 가득한 인간의 실존>,
또는 <모든 떠나가는 것들에 대한 애상과 허무> 이런 것이 되겠다. 

'한 잔의 술, 버지니아 울프, 목마, 숙녀, 방울 소리, 가을, 술병, 별, 가슴, 소녀,
정원, 초목, 문학, 인생, 사랑, 진리, 애증의 그림자, 세월, 고립, 작별, 바람, 여류 작가,
등대, 불, 페시미즘, 희미한 의식, 바위, 청춘을 찾는 뱀, 잡지의 표지, 가을 바람 소리'

이런 시어는 부드럽고 감미롭지만,
시를 읽고 강한 서러움 또는 서글픔을 느낄 수 있는 시였을 거야.
그 당시 사람들이라면... 

지금도 살기는 팍팍한 시절이지만,
그래도 이런 전쟁 직후에 살지 않은 것만으로도
따뜻하고 배부른 우리 <실존>은 조금 더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살자꾸나. 

즐겁고 보람찬 주말, 행복하게 보내자~
사랑한다.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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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1-14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는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이 박인환 시인의 시를 가사에 붙인 노래인줄 알았답니다.^^;;
하지만 박인희라는 가수의 노래를 듣고 난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글샘님이 소개된 두 편의 시는 우리나라의 명시 베스트에 손꼽을 정도로
유명한 시이지만, 요즘 문학 교과서나 문학 문제집에는 보기 드문 시인거 같습니다.
아마도 '실존' 이라는, 수험생들에게는 까다로울지 모르는 주제를 다룬다는 점과
내용이 허무주의적 분위기가 강하다보니 요즘 학생들에게는 생소한 시인과 작품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저는 이 박인환의 대표작인 두 시를 문학 수업 시간에 배워서 알게 되었다기보다는
우연히 국어 선생님이 소개하게 되어서 알게 되었답니다. 예전에는 문학 교과서에 자주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노래가사로 만들 정도로 유명한 시인데도 요즘 성적 위주의 입시 사회라서
학생들이 정말 시 감상다운 감상을 하지 못한게 씁쓸하기만 하네요.
주말에도 좋은 시 감상했고 글 잘 읽었습니다.

글샘 2010-11-14 21:10   좋아요 0 | URL
70년대는 가난과 낭만이 좌절과 희망 사이에서 나부끼던 시절이었죠.
그러던 시절에 어울리던 목소리의 박인희가 조금 떨리는 톤으로 읽어준 시들은 가슴에 깊이 남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 욕망과 가난의 간극이 갈수록 멀어지는 시대를 만나, 다시 박인희를 듣자니 가슴이 쎄~~합니다.

비로그인 2010-11-14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인환 시인 하면 아주 나이 드신 분들은 명동을 떠올리겠지만 제 또래는 아마도 가수 박인희를 떠올리지 않을까요? <세월이 가면>을 노래한데다 <목마와 숙녀>를 낭송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니까요. 덕분에 오랜만에 옛생각에 젖어보았습니다^^

글샘 2010-11-14 21:10   좋아요 0 | URL
그래요. 이런 시를 읽으면, 옛 생각을 않을 수가 없죠. ^^
벌써 나이가 들고 있다는 증거. 옛날 생각이나 하고... ㅋㅋ

gimssim 2010-11-14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늘은 박인환 시인의 주옥같은 시를 음미하게 되었군요.
학창시절, 무던히도 외웠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외람되게도 그럴듯한 연애편지를 쓰기 위해 한구절씩 슬쩍 인용했던 기억도 납니다.
특히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되기 싫은 까닭이다'를요.
가슴절절 끓었던 시절은 가고
인제는 정말 '국화 앞에 선 누님'의 세월 위에 서 있군요.
오늘 교회에 갔다와서 셀카로 이십여 장의 사진을 찍었드랬습니다.
화장을 하고 성장을 할 때가 주로 주일이어서...
적당히 살이찌고 주름진 아줌마가 프레임 속에 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만하면 됐다, 위로했드랬습니다.

글샘 2010-11-16 22:30   좋아요 0 | URL
ㅎㅎ
박인희의 그 목소리는 아직도 귓전에 청청하죠.
이제는 돌아와 국화 앞에 선 나이들이 되었지만,
옛 시절의 맑은 정신, 그 젊은 마음은 내 가슴에 남아 있죠. ^^

반딧불이 2010-11-23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박인희도 생각나지만 박인환이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도 안갔다는 김수영이 더 생각납니다.

글샘 2010-11-24 21:08   좋아요 0 | URL
ㅎㅎ 김수영 사진 보면, 역쉬 꼴통같이 생겼어요. ㅎㅎ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전 몰랐습니다. ^^
 

아, 요즘엔 수능 바로 코앞이라서 아빠가 많이 바쁘구나.
지난 번에 '공감각적 심상' 이야기한 김광균 이야기를 마저 하자. 

말만 했을 뿐인데,
눈 앞에 환하게 그려져 보이는 시각적 심상이나,
향기가 확 지나간 것처럼 느껴지는 후각적 심상, 이런 걸 느끼는 시간을 가져 보자.

1.

향료(香料)를 뿌린 듯 곱다란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먼 고가선(高架線)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랏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데생)  

이 시는 제목 자체를 '데생'이라고 붙였구나.
데생은 '상세하게 묘사한 그림', '소묘' 이런 뜻으로 쓰이지.
연필로 슥슥 그린 그림이란 뜻인데, <서양의 언어>잖아.
이런 것을 '모더니즘'이라고 그래. 

이 시를 읽으면 눈 앞에 석양에 물든 평화로운 경치가 눈에 선하지 않니?
그 곱다란 노을이 보이기만 하는 게 아니란다. 향기까지 나지. 향료를 뿌린 듯... 이렇게...
시각적 이미지를 후각화 한, 공감각적 심상. 

비유도 멋지게 쓰인단다.
구름이 붉게 물드는 석양 무렵을, 보랏빛 색지 위에 한 다발 장미를 마구 칠한 것 같다,고 표현했으니...
그런데, 그 아름다운 경치에서 화자는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는구나.
주제는 '해질 무렵의 쓸쓸한 경치' 이런 정도면 되겠지? 

1학년 국어에서 '정지용의 유리창'을 배웠잖아.
죽은 아이에 대한 아비의 마음을 쓴 노래.
감정이 절제되어있던 노래.
외로운 황홀한 심사라고... 역설적 표현법을 썼던 노래. 

김광균도 아이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모양이야.
하기야 1900년대 후반까지 한국은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였으니 영아 사망률도 높았겠지.
정지용과는 아이 잃은 슬픔을 어떻게 쓰는지 보자.
이때도 감각적 심상을 잘 살려서 쓰는지 어떤지...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가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속을 들여다 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은수저)

시어는 쉬우면서도 허둥대는 화자의 심정이 보이는 듯 잡히지 않니?
아기를 화장해 뿌리고 왔겠지.
밥상에 우두커니 놓인 한 쌍의 은수저를 보고 화자는 눈물이 핑 고인다. 

밥상을 치우고 멍하니 누웠는데 바람이 부는구나.
바람 소리 속에 애기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애기가 방을 들여다 보는 것 같아 들창문을 열어보기도 한다. 

꿈이라도 꾸는지...
먼 들길에 애기가... 맨발로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도 않고...
그림자만 아른거리는 꿈 속. 
아, 어렸을 때 그 예쁜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이야 어떻겠니?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마음에 묻는다는 말이 있단다.
평생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가난해서 마음껏 먹이고 입히지도 못한 자식에 대한 미안함과 애정이 잘 느껴지지.
반짝이는 외롭게 앉은 은수저를 통해서 말이야.  

자, 다음엔 조금 긴 시를 하나 보자.
외국인 마을이란 '외인촌'이야.  

하이얀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아란 역등(驛燈)을 달은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뭍힌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치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단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외인촌 外人村)

6연으로 된 시다. 한 연씩 살펴볼까? 

우선 1연. '모색'은 저물녘의 햇빛이야. 하이얀 이유는 안개가 끼었거나 그렇겠지.
안개가 뽀얀 저물녘, 산간 마을에 마차가 한 대 지나가고 있어.
<하이얀> 배경으로 <파아란> 등불이 대조적이지? 

2연에선 산마루(꼭대기)에 선 전신주 위로 구름이 빨갛게 솜사탕처럼 불타고 있어.
1연과 함께 한 장의 그림인데,
1연에선 <하이얀> 배경에 <파아란> 등불이고 2연의 바다쪽에선 <새빨간> 노을이 두드러진다.

3연에서,
오르내리는 창문을 단 집들은 한국식이지 않지?
바로 외국인 마을이 보이는구나.
돌다리 아래 작은 시냇물이 흐른다. 

4연에서,
화원지는 꽃밭이야. 벤치는 역시 '이국적'이지? <모더니즘>
시든 꽃다발이 흩어진 꽃반의 벤치.
이런 건 보이는 건데, 거기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이 흩어져 있대.
웃음은 들리는 거잖아. 청각적 심상.
근데, 흩어져 있다고 했으니깐, 공감각적 심상이지?
청각의 시각화~ 이제 술술 나오겠지? 공감각적 심상과 청각의 시각화 이런 거. 

5연에선 외국인 묘지가 나오는구나.
한국식 묘지는 동그스름한 밥그릇같잖아. 근데 외국인 묘지는 십자가가 돌 위에 있겠지?
이국적인 모습의 외국인 묘지에 밤이 되어 별빛이 비친다.

마지막 연.
공백은 하얗게 텅 빈건데 환한 아침이 된 모양이고, 하늘에 높직하게 걸린 시계가 열 시가 되니, 
언덕 위 낡은 성당에서 종소리가 울린단다.
근데, 또 공감각을 쓰고 있지?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종소리를 들었는데, 분수처럼 흩어진다고 했으니 청각의 시각화!

공감각적 심상은 김광균 시만 공부해도 충분하단다.
유명한 것이 박남수의 '아침 이미지'란 시에 나오는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이란 구절이 있단다.
태양을 봤으니 시각인데, 태양이 울리는 것처럼 표현했으니 시각의 청각화!가 되겠지? 

외인촌은 '외국인 마을을 보고 느낀 감상'을 쓴 시야.
시간이 저녁~밤~아침으로 흐르고, 다양한 감각적 심상이 쓰이고 있지.
또 시적 허용, 시적 자유가 해당되는 시어가 몇 있단다.
하이얀, 파아란, 가느단, 시들은... 이런 말들.          

다음엔 '눈오는 밤'의 심사를 그린 '설야'란 시를 한 번 보자.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밑에 호롱불 야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설야) 

이 시는 멋진 비유가 돋보이는 시로 유명하단다.
퍼얼펄~ 흰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시간은 한밤중...
화자는 마루 위에서 그 눈이 내리는 걸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지. 

우선, 한밤중 소리 없이 흩날리는 눈을 보고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같다고 표현했어.
화자는 무슨 소식인가를 기다리는 사람이겠지.

처마가 있는 걸 보니, 한옥의 마루쯤에 기대서 있는 사람이야.
처마 밑에 호롱불은 마당에 외등 역할을 하는 등불이지.
호롱불 가늘게 밝힌 마당에 흰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서글픈 옛 자취>인 양하다고 느끼는 걸 보면,
무슨 소식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데,
지금은 사라진 서글픈 옛 자취와 관련있는 소식인게야. 

입김이 하얗게 나오는데, 소식은 없고 서글픈 옛 생각에
<가슴이 메>이는구나.
그래서 허전한 마음에 등불을 하나 더 켜들고
혼자서 밤 깊은 시각에 뜰에 내려간다. 

잊지 못할 옛 사랑을 떠올리는 것인지,
어디 신춘 문예에라도 응모를 해 두고 입선 소식을 기다리는 것인지,
일제 강점기 멀리 끌려가신 임을 기다리거나,
집나가서 소식이 없는 자식이라도 기다리는 것인지...

뜰에 내려가니 눈이 내리는데,
마치 그 소리가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같다고 표현했어.
이 대목을 가르치면 애들이 야하다고 난린데...^^
이 소리는 풀을 정성껏 먹인 빳빳한 한복 치마가 접히듯 나는 소리를 뜻하는 거야.
눈이 내릴 때 그런 '사르락 사르락' 소리가 난다는 건,
함박눈이 아닌 싸라기눈일 수도 있겠구나.
바람이 안 불 때 습기 많은 공기가 엉킨 눈은 덩치가 큰 함박눈이 되고,
습기가 적은데 바람이 많이 불어 엉킨 눈은 싸라기눈이 되기 쉽지. 

희미해지는 눈발을 본다.
그 눈은 마치 <잃어버린 추억의 조각>같대.
그리고 <싸늘한 후회의 추억>이 마음에 떠오르는 모양이야. 

뭔가 그 기다리는 소식, 잃어버린 추억은 화자에겐 회한(후회하는 감정)을 남긴 일인가 봐.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설레기도 하는 그런 사연.

흰 눈은 '환한 빛을 내지도 강한 향기를 뿜지도 않는' 존재인데,
차단한(차가운, 단정한) 의상을 입은 존재처럼 쌓이는데,
화자의 <슬픔>이 그 위에 서리서리 쌓인대.

눈내리는 밤, 화자는 눈을 통해서 옛날 생각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기는구나. 
그런 여러 가지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을 <회포>라고 그래.
회포에 잠긴 화자는 뜰을 거닐면서 쓸쓸하고 슬픈 마음을 시로 표현한 것이고...  

사람이 그럴 때가 있잖아. 
바람불고 비가 오면 마음이 쓸쓸할 때...
그런 마음을 보통 시간이 지나면 잊기 쉬운데,
시인이란 사람들은 이렇게 그 순간의 마음을 <시어>로 사로잡아 두는 사람들이구나.
누구는 <사진>으로, 누구는 <그림>으로 자기 마음을 남기는 법이지. 

아빠는 이렇게 글로 마음을 남기곤 한단다.
민우도, 네 마음을 무언가로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즐겁고 신나는 주말 만들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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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0-11-12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이 마음을 대신할 순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음을 잡아둘 수는 있는 거군요.

마음을 무언가로 남길 수 있는 방법,기억해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샘 2010-11-13 13:59   좋아요 0 | URL
대신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지만 표현하고 잡아두려는 시도 정도야... ^^

반딧불이 2010-11-23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모든 감각을 총동원 한 것 같아요. 문득 김광균이 실제로도 이렇게 감각적이었는지 궁금해집니다.

글샘 2010-11-24 21:06   좋아요 0 | URL
김광균 시인 사진보면, 별로 감각적일 거 같지 않게 생겼어요. ㅋ 술꾼이고 둔하게 생겼는데, 시어는 엄청 감각적이죠. 저 데생~ 보면...
 
토지 1 - 1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쌀쌀해졌다.
따끈한 차 한 잔이나 두툼한 외투로 온기가 데워질 마음은 아니다.
뭐가 부족해서 마음이 쌀쌀한 건 아니다.
그저.
낙엽지고 한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때면,
저녁 식사를 하고 교무실로 돌아오는 길이 컴컴해 지고, 아침에 등교하는 고갯머리에서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지 않을 때면,
가슴 속이 슬몃슬몃 시리게 마련이다. 

이럴 때는 두꺼운 책을 뽑아 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만포장 독서 시간이 많은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조각조각난 시간 사이에 이런저런 일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유장한 강물같은 소설이 그리워질 때,
내가 토지를 끝까지 다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토지를 주워섬긴 기억에 20년도 넘은 독서를 다시 시작한다. 

대학생 시절에 읽은 토지와 마흔이 넘어 읽은 토지는 전혀 다른 맛이다.
그 때 읽은 기억이 잘은 나지 않지만,
최명희의 혼불이나 조정래의 태백산맥과는 또다른 맛이 토지에서는 진국처럼 우러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최명희의 혼불은 지나치게 '민속사'적 디테일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어 플롯의 전개가 박진감 없고,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개성적, 전형적 인물들의 형상화에는 탁월성을 드러내어 성공하고 있지만 시대적 배경이 해방직후의 혼란기여서 보편적인 소설로 보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는 반면,
토지가 가진 힘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공간에서나 존재할 법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빠른 붓놀림으로 슬몃슬몃 그려내고 있는데도
재재거리는 입담이나 박진감 넘치는 사건의 전개, 그리고 장편 소설에서만 가능한 복합적 구성의 엇갈림이
자못 운명의 흐름은 뉘도 알 수 없는 것이며
그야말로 토지에 얽매여 사는 인생들의 파란만장한 한 살이를
섬진강 구비가 슬렁거리며 흘러가듯 풀어내고 있는 데서 옹골차게 매듭져 나오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최치수네 집안 사정이며,
구천이의 인생사와 천한 것들의 사고 방식이며,
구한말의 계급 의식까지 제대로 묘파되고 있는 '토지'가 한국 문학에 놓여 있음을 정말 든든한 일이란 느낌을 가지고 읽게 된다. 

읽다 보면 대략적 줄거리는 떠오르지만,
상세한 부분의 전개와 대화들, 묘사들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그렇지만, 박경리가 그려내는 사랑들은 또한 얼마나 운명적으로 비극적인지...
시대와 운명이 그려내는 대하와 장강은 토지와 함께 사람을 먹여 살리기도 하지만 인간을 가르고 흐르게 하기도 하는 법. 

평사리의 평화로운 부부송처럼 말은 없지만 구불구불 세상의 옹이들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누가 언제 읽어도 재미있고 의미있는 독서가 될 것이다. 

쌈박질 사이에서 피나 흘리는 삼국지는 여기 비하지 못할 책이라 감히 이름붙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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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0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0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0-11-10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지 다시 읽기, 나는 10년 주기로 읽어야겠다 다짐했으니~ 2014년 1월 20일에 시작하면 됩니다.
나는 사십대에 읽은 토지와 오십대에 읽은 토지를 비교하면 되겠네요.^^
평사리의 부부송은 어디메쯤 있을까요? 제가 갔던 2001년에는 못 봤는데~

글샘 2010-11-10 15:41   좋아요 0 | URL
아 10년 주기로... 그런 계획까지... 역시 계획적 여사님이시군여. ^^
저는 오늘 일을 몰라요. ㅎㅎ
평사리 부부송은 넓은 악양벌 한복판에 있답니다.

cyrus 2010-11-10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토지> 한 번 제대로 읽어야하는 생각이 드네요.
예전에 1권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거든요.
글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사진이 토지 속 작품 배경인 평사리를 연상케하네요.
사진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오늘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글샘 2010-11-11 13:29   좋아요 0 | URL
제대로... ㅋㅋ
저 사진은 평사리입니다. 악양벌이죠.

소나무집 2010-11-10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토지를 다시 읽고 있답니다.
처음에는 한 권 읽을 때마다 서평 좀 써야지 했는데 마음만 그렇고요,지금 6권까지 왔네요.
예전에 읽을 때는 하루에 한 권 이상씩 읽었는데 지금은 평균 한 권 읽는데 2주씩은 걸리네요.
분주한 생활 속에 중간중간 다른 책들도 읽어가며...
선생이 토지를 쓰기 시작한 게 43세라고 하더라구요.
선생의 나이를 생각하며 읽으니까 더 공감되는 부분이 많고,
역사 공부도 다시 하게 되고, 사람 사는 게 예나 지금이나 다른 게 없는 것 같고...
토지는 인생의 맛을 조금은 아는 나이에 읽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싶어요.^^

글샘 2010-11-11 13:2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인생의 맛을 조금 아는 나이... ^^ 대학생때 제가 이걸 읽고 뭔 생각을 했을지... 기억도 안 납니다. 하동 악양벌에 자주 가는데, 갈때마다 읽어야지 했거든요.

blanca 2010-11-10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하소설은 <태백산맥>과 <혼불>을 읽었어요. 글샘님 말씀처럼 <혼불> 정말 아름답고 대단한 작품이지만 풍속의 묘사, 불교 접근 대목에서 서사가 멈칫멈칫하더라구요. <토지> 꼭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는데 권수가 많아서 자꾸 망설여저요...페이퍼를 읽으니 꼭 읽어야 겠다고 또 다짐하고 갑니다.

글샘 2010-11-11 13:27   좋아요 0 | URL
권수 많아도 정말 재미있습니다. 삼국지 왜 읽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ㅋㅋ

BRINY 2010-11-11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3 겨울방학때 엄마의 권유로 읽은 토지. 그러고보니 저도 끝까지 안읽었습니다.

글샘 2010-11-11 13:27   좋아요 0 | URL
저는 12권까지 나왔을 때 읽어서... 그 뒷권을 못읽었거든요. ^^
다시 읽으니 참 새롭습니다. 겨울 방학에 한번 도전해 보세요.

페크pek0501 2010-11-15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에 계시네요. 신의 경지입니다.ㅋㅋ
전21권을 읽으실 생각을 하시다니...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저도 내용은 알지요. 참고서로도 읽은 적이 있어요.
아, 열심히 사시는 훌륭한 블로거들입니다. 그 도전은 아름다운 도전이구요.
저도 이 강한 에너지를 받고 지나갑니다.

글샘 2010-11-16 22:28   좋아요 0 | URL
님, 21권이지만 정말 쫀득쫀득하게 읽히는 책입니다.
제가 읽은 여느 장편과는 비교가 안 되는 글입니다.
홍명희의 임꺽정은 스릴이 적구요.
최명희의 혼불은 스토리가 부족하구요.
황석영의 장길산은 스릴과 스토리는 있지만 속도감이 느리구요.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인물은 죽이지만, 일반적 형상화에선 뒤지구요.
역시 조의 아리랑은 시대성은 뛰어나지만 역시 작위적이고, 그의 한강은 더욱 떨어집니다.
그 외 장편 소설 운운... 보다는 역시 박경리의 토지가 가진 힘은 대단합니다.
장편을 읽는 맛은 오래오래 남는 여운이거든요.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페크pek0501 2010-11-18 00:41   좋아요 0 | URL
글샘님의 박학다식에 감탄하며 한 수 배우며 지나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