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의 시는 요즘 사람들의 감각으로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1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시 감각에 경탄을 보낼 수밖에 없다. 

그만큼 시대를 앞서갔던 감각을 가졌던 시인이니, 그 당시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자기 성씨를 바꾸고 연예인들이 예명을 쓰는 것이 흔한 일이지만,
1930년대에 김해경이란 사람이 자기 이름을 '이상'으로 불렀던 것은,
요즘 어떤 사람이 자기 예명을 '싸이(미친 놈)'라고 부르는 것과는 천지차이로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의 감각적인 시를 한 편 읽어 보자.

나의 소년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저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가을이,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애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길)

어른이 된 후,
자신의 소년 시절을 되돌아 보는 일은 새로운 일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이 이처럼 감각적으로 도드라져 보이기도 어려운 일이다.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언덕길'은 정말 상상화로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지 않니?
그런데 거기 '어머니의 상여'가 놓여 있으니,
슬프고 좌절스런 어두운 그늘의 소년 시절을 금세 떠올릴 수 있겠다. 



첫사랑도 금세 떠올랐다 사라지는데, 그것도 시각적으로 감각화하는구나.
'조약돌처럼 집어들었다가 잃어버린 첫사랑.'

그래서 화자는 혼자서(호저) 시도때도 없이 그 길을 넘어간다.
강가로 내려갔다 돌아오는데, 또 감각적으로 노을에 함빡 자줏빛으로 젖어서 왔단다. 
'노을'과 '놀'은 함께 쓰일 수 있는 복수 표준어란다.
그리고 여기서 '노을'에 '젖은' 것은 공감각적 표현으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제 세월이 많이많이 흘러갔다.
그렇지만...
화자의 마음은 아직도 '어두움'이 남았다. 그래서 몸서리치며 자랐다.
마치 몸이 '감기'를 앓았던 것처럼, 마음도 '감기'를 앓았다.

고향의 버드나무, 오래오래된 그 버드나무,
밑에서
화자는 '어두움'의 근원인
어머니와
계집애를
멍하니 기다린다. 

화자에게 '어둠'은 소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감각이다.
그리고...
그 어둠이 화자의 슬픔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이제 세월이 지난 뒤,
그 어둠이 뺨의 얼룩을 씻어주기도 한다.
그건... 화자의 생에 낙인처럼 각인된 그 어두움이
어린시절의 가장 깊은 추억으로 남아, 지금도 생각하면, 생각을 하면...
마음 속 아련한 추억으로 살아나면서 삶의 기운을 북돋워주는 것이기도 하단 이야기인 것 같다.

이 시에서 화자가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뭘까?
화자의 '길' 위에는
어린 시절 '어둠' 속에서 잃어버린 '어머니'와 '소녀'에 대한 추억이 깔려있다는 것이고,
그 '어둠'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좀 슬프고 가슴이 싸한 애상이란 것이지.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를 지나 살아온 시인의 삶에는
왠지 서러운 삶이 가득했을 것 같구나.
그래서 화자는 그 서러운 길을 걸어온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길'로 형상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시 '바다와 나비'는 그 험한 세상에 대한 감각적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바다와 나비) 

세상은 '의지'로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화자는 멋도 모르고 세상으로 뛰어든 '공주'와 같은 존재였지. 

아무도 바닷속의 수심을 일러주지 않아서,
흰나비인 화자는 세상으로 뛰어들었던 거다.
푸른 무(옛날엔 '무우'로 표기)밭인 줄 알고 뛰어든 곳에선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곤 했던 것이고,
공주같은 나비는 지쳐서 돌아온다.  

꽃이 필 듯이 봄이 오는 3월달인데,
바다엔 꽃이 피긴 커녕 찬 파도만 일렁인다.
그래서 서글퍼진 나비 허리에 초생달이 걸렸는데, 마음은 시리고 시리다. 

여기서도 감각이 아주 날카롭게 살아있구나.
'새파란 초생달'은 시각적 표현인데, '시리다'고 했으니 촉각적으로 표현했다.
시각의 촉각화. 역시 공감각적 표현으로 볼 수 있지. 

이렇게 화자의 현실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이 1930년대 시인들의 특징 중 하나란다.
김광균처럼 '공감각'을 많이 사용한 시대이기도 했지. 
모더니즘이란 것이 이렇게 현실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려한 특징을 가졌단 것을 기억해 두자꾸나.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우리 집처럼 평온하리라 생각하고 뛰어들었다가는
깜짝 놀라는 공주처럼 당황스럽게 만나는 곳이 세상이기도 하다.
민우가 기억하는 '길'이 김기림의 시처럼 '어둠'으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민우가 '나비'처럼 깜놀~하는 세상을 놀라움으로 만나지 않기도 역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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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분단에 대한 노래를 하나 불러 보자꾸나.
한국은 참 슬픈 나라다.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지냈고,
해방 이후에도 오히려 미군의 식민지가 되어 아직껏 분단의 한을 품고 있는 한국. 

독일은 세계대전을 일으킨 죄를 뒤집어써 분단되었지만 이미 20년 전에 통일이 되었건만,
조선은 어디가서 전쟁 한 번 제대로 일으킨 힘이 없던 나라인데, 아직도 분단의 슬픔을 안고있다.
분단이 우리에게 주는 피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 사는 모든 곳에 속속들이 피해가 사무쳐 있단다. 

국가가 못사는 것도 다 국방비 때문이고,
학교가 팍팍한 것도 다 분단으로 인한 섬나라이기 때문이다.
통일이 되고 좀더 자유로운 나라가 된다면...
그렇지만, 미국이나 일본이나 강대국들은 그걸 허락하지 않는단다.
특히 중국의 경우는
한족과 56개의 소수부족으로 이뤄진 나라인데,
한국이 통일이 되고, 조선족이 독립을 선언한다면,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은 무너질 가능성이 크지. 

그래서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고나서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자,
통일을 대비해서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에 통합하려고 난리를 친 거지.
사실, 고구려 땅은 중국과 한국에 걸쳐 있는 것이니,
근대 국가가 세워지기 전의 역사 정도야
그 역사를 어느 쪽에 넣어도 큰 잘못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의 통일로 인한 중국의 흔들림은 파장이 컸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암튼, 통일과 분단의 문제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같다.
우선 시를 한번 읽어 보자.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 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 번이고 감고 푼 실올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 (직녀(織女)에게) 

이 시는 노래로 만들어져서 더 유명해진 노래다.
나중에 한번 들어보기 바란다. 

견우와 직녀 이야기는 들어 봤겠지? 
천상의 견우는 목동, 직녀는 베짜는 처녀였대.
둘이 너무도 일을 잘하는 모범생이어서 옥황상제가 둘을 짝지어 줬단다.
근데... 이것들이 짝을 지어두고 나니 도무지 일을 안 하더란다. ㅋ
둘이 너무 좋아서 하루종일 짝 달라 붙었던 거야.
그래서 옥황상제가 은하수 건너 견우와 직녀를 떼어 두고는
1년에 한 번. 7월7석날 만날 수 있게 했단다.
그런데 그날이면 은하수가 너무 멀어서 만날 수가 없었는데,
까치와 까마귀가 다리를 놓아, 오작교라 부르는 다리를 건너,
곧, 까치와 까마귀 뒤통수를 밟고 만나서 눈물을 흘렸다는구나.
그래서 음력 7월 7일은 그들이 만나서 흘린 눈물로 비가 많이 온대.
그리고 그 무렵 까막 까치들은 뒤꼭지에 털이 숭숭 빠져 있대. ㅋ
그리고 그들이 흘린 눈물로 풍년이 든다는 전설이 있단다. 

이 전설의 주제는 뭘까?
사랑을 해도 결코 게을러져서는 안 된다... 이런 거 아닐까? 

은하수는 두 사람을 갈라놓은 장애물이지.
곧 남북의 분단을 뜻한단다.
남북은 분단되어 있지만, 만날 가능성이 있어. 뭐를 건너서?
바로 오작교지.
노둣돌은 말에 오르거나 내릴 때에 발돋움하기 위하여 대문 앞에 놓은 큰 돌이야.
(하마석이랑은 달라. 조선이 하도 불교를 멸시하자,
절간의 입구에 '하마비'를 세워두고, 거기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오라고 만든 게 하마비란다.)  

긴 기다림으로 가슴이 아픈 이별을 한 두 사람. 두 나라는..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이 되어버렸지만,
<가슴 딛고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는 것이 이 노래의 희망이란다. 

시의 어조는 강렬한 호소력이 강한 목소리지.
이렇게 현실적인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노래를 '참여시'라고도 한다.

주제는 뭐겠니?
남녀의 만남, 남북의 만남, 곧 통일의 희망이 되겠지?
지금은 이별해 있지만,
그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드러난 작품이야.

은하수라는 '장애물'을 건너,
'노둣돌', '오작교' 같은 희망을 딛고 통일이여 오라~ 이런 노래겠지.
김원중의 노래로 노래도 한번 들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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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1-01-19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한국전쟁 수업할 차례인데 더 아리게 들려요. 어휴.....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해요!!

글샘 2011-01-20 02:07   좋아요 0 | URL
아우~ 한국전쟁 같이 무서운 걸 수업을 하시다니... ^^
팩트,라도 제대로 가르쳐 주세요. 아이들은 워낙 무식해서, 제가 뭘 좀 얘기하면 빨갱이처럼 쳐다보곤 한답니다. ㅋㅋ
 

안도현이란 작가가 있다.
그의 시는 짧은 속에 힘이 있다.
가장 짧은 '너에게 묻는다'부터 읽어 보자.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보다 너는 못하지 않느냐?
이렇게 자문하는 시라고 볼 수 있다.
연탄재는 한번이라도 뜨거운 적이 있었다마는,
너는 과연 <누구>에게... 즉, 어떤 대상에게 정열을 다한 적 있었느냐?
삶을 그렇게 미지근하게 살아서야 쓰겠느냐?
이런 질책을 내리는 시다.   

연탄재라는 아무 쓸모없어보이는 사물에서 그런 뜨거운 열정을 발견하는 시인의 눈이 매섭다.
열정과 사랑 없이 살아가는 인간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시라고 보면 되겠다.
삶의 가치란...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이렇게 뜨겁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 
뜨겁게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가치있어 보인다. 

다음엔 같은 주제를 나타낸 조금 긴 시, '연탄 한 장'을 보자.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들선들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을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듯이
연탄은, 일단 제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연탄 한 장)

삶은 곧 연탄 한 장이라는 은유를 들이 댄다.
아까는 연탄 한 장보다 못하다더니, 이제 조금 나아졌다. ㅋ
2연에서 연탄은 뜨거워져서 희생으로 사랑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러나...
나는 연탄 한 장보다 못하다. 역시 ㅎㅎㅎ 
강한 자기 반성.

근데, 3연에서 갑자기 '삶은 나를 으깨는 일'로 건너뛴다.
연탄이 타고 나면 재가 되지.
그 재는 비탈길 대문 앞에 십여 장씩 쌓여 있단다.
그러다가 다들 잠든 사이 소복이 눈이 내린 새벽이면,
연탄재를 으깨서 미끄럽지 않게 만들었던 '연탄길'을 추억하며 이런 시를 쓴 것이다. 
연탄처럼, 또 연탄재처럼 가치를 잃어가는 사물들에게서 가치를 길어올린 소중한 마음이 느껴진다.

그래서 연탄보다 못한 인간으로 살지 말자고,
만약에 만약에 우리가 '눈발'이라면, 좀 더 따스한 눈발이 되자고 이렇게 교훈적인 시도 쓴다.
근데, 시가 교훈적이면, ㅋㅋ
좀 수준이 높아보이진 않는다.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진눈깨비는 눈과 비가 섞여 질척거리고 내리는 것을 의미한단다.
진눈깨비를 맞으면 기분 참 더럽겠지?
춥고 축축하고 눅눅한 찝찝함. ^^
그래서 어떤 눈이 되자고 그러니?
함박눈.
그것도 따뜻한 함박눈.
진눈깨비처럼 차갑고 축축하고 눅눅하고 찝찝한 그런 촉감 말고,
뽀송뽀송한 환하고 기분 좋게 내리는 함박눈 말이야.  

그래서 잠 못 든 이에게는 다가가 위로의 편지라도 되고, 
그 상처에 돋아나는 새살이 되자고 하고 있구나.
위로가 되는, 위안이 되는 존재가 되자꾸나~ 이런 좀 교훈적이고 계몽적인 시란다. 

그런 마음을 마치 그림을 그려 보이듯 잘 형상화 한 시가 다음 시란다.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시 중에 이 시가 가장 뛰어난 시라고 아빠는 평가한다.
왜냐면, 교훈을 이야기하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하나도 교훈을 담지 않았으니까.
담담하게 경치를 이야기했는데,
그 시를 읽는 사람들은 감동을 받을 수 있으니깐.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내리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 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제 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다
(겨울 강가에서) 

이 시는 세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것이다.로 끝나는 세 부분. 

첫부분에서는 '강'이 주체야.
강은 제 속으로 뛰어내리는 눈이 녹는 것이 안타까워 죽겠대.
참 창의적인 생각이지 않니? 

다음 부분에선 그래서 '강'을 더 의인화하여 표현했어.
강에 눈발이 닿으면 녹으니까,
눈발이 닿기 전에 몸을 획~~하고 틀었다는구나.
방향을 바꿔 흐르면 눈이 강에 바지지 않으니깐 말이다.
그래서 강물 소리가 세차게 들렸던 거래.
좀 의뭉스럽지않니?
강물이 눈발 스러지는 게안쓰러워서 뒤채이느라고 세찬 소리를 낸다고 표현하는 이 시인의 마음이  


이 시에 대한 김용택 시인의 짤막한 해설도 있어.

어제 밤에 눈이 살포시 내렸다.
강의 가장 자리가 하얗게 얼어 있다.
얼음 위로 새들이 걸어 간 모양이다.
토끼 발자국이 얼음장 끝 찰랑이는 물가까지 찍힐 때도 있다.
내 몸으로 세상의 무엇을 받을 수 있을까. 

이 시의 성공은 바로 여기에 있어.
시인은 겉으로 드러나게 시적 화자나 서정적 자아인 '나'를 말하지도 않았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다른 이들을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하는 숭고한 영혼의 이야기를
마치 강물이 눈발을 생각해서 제 몸을 얼려가는 이야기에 빗대서 능청스럽게 하고 있는 것. 

그래서 시를 읽노라면 조금은 착해지기도 할지 모르겠다. ^^
또 그래서 어른들이 되면 시를 읽지 않는지도 모르겠고. 

아빠가 읽어주는 시들은 어쩌면 아빠의 눈으로 본 것이라서,
지나치게 교훈적이거나 계몽적인 것 위주로,
또 시험에 날 법한 것 중심으로 설명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시선이니깐, 그러려니 하고 읽어주기 바란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각자의 관점이 놓여있게 마련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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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가 전국을 몰아치고 있다.
이렇게 추운 날, 모두들 방안에 콕 처박혀 아랫목에 살 것 같지만,
누구는 언 수도관을 고치러 찬 바람을 맞아야 하고, 누구는 보일러를 고쳐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다. 

요즘 아빠가 세상 사는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가 있더구나.
사람에 따라 큰 기운을 가지고 태어나기도 하고, 작은 기운을 가지고 태어나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자기 기운을 잘 보전하는 것이래.

기운이 큰데 길이 작으면 잘 참아야 하고,
기운이 작은데 너무 무리하면 안 되는 것처럼...
늘 자신을 긍정하고, 좋은 시절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자세.
그랬다가 자신에게 좋은 시절이라 싶을 바로 그 때, 도약하고,
운이 안 좋으면 다시 지키고... 좋은 시절 오면 다시 도약하고.
이게 정말 인생을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방법이래. 

자기에게 운의 기운이 올 때를 기다리며 자신을 지키는 법.
그냥 멍청하게 기다리면, 그 놈의 '운'이란 놈은,
머리카락이 앞에만 있고 뒤통수엔 없어서,
미리 기다리고 있다 확 낚아채지 않으면,
조금만 지나가고 있어도 잡을 수 없는 것이란다. 

오늘은 이성부 시인의 '누룩'이란 시를 한번 읽어 보자. 

누룩 한 덩이가
뜨는 까닭을 알겠느냐.
저 혼자 무력함에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어디 한 군데로 나자빠져 있다가
알맞은 바람 만나
살며시 더운 가슴,
그 사랑을 알겠느냐.

오가는 발길들이 여기 멈추어
밤새도록 우는 울음을 들었느냐.
저 혼자서 찾는 길이
여럿이서도 찾는 길임을
엄동 설한 칼별은 알고 있나니.
무르팍 으깨져도 꽃피는 가슴.
그 가슴 울림 들었느냐.

속 깊이 쌓이는 기다림
삭고 삭아 부서지는 일 보았느냐.
지가 죽어 썩어 문드러져
우리 고향 좋은 물 만나면
덩달아서 함께 끓는 마음을 알겠느냐.
춤도 되고 기쁨도 되고
해 솟는 얼굴도 되는 죽음을 알겠느냐.

아 지금 감춰 둔 누룩 뜨나니.
냄새 퍼지나니. (누룩)

누룩은 메주와 함께 대표적인 발효 식품이야.
고슬고슬한 고두밥에 누룩을 넣고 물을 부어 발효시키면, 그게 바로 막걸리가 된다고 한다.
누룩은 그 자체가 주도적 역할을 하는 존재라기 보다는,
다른 물질의 변화를 도와주는 촉매 역할을 한다고 봐야겠지.  

우리 인생에 '운'이라는 기운이 바로 촉매 역할을 하는 것이란다.
'운'이 있는 시기에는 힘들지 않게 일이 진행되지만, 또 반대의 경우에는 될 일도 자꾸 엎어지곤 하지.
그 운을 마냥 기다리기 보다는 '누룩'처럼 효소 역할을 하는 것들을 삶에 끼워넣을 필요도 있단 생각이 든다. 

어제 엄마랑 찜질방엘 가서 이런저런 이야길 했는데,
어릴 적 꿈이 뭔지를 이야기했어.
아빠도 어릴 적엔, 평범하게 먹고 살 만큼 가정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고,
엄마도 한 사람으로서 독립적으로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는 것이었다고 하더구나.
그렇게 본다면, 엄마 아빠는 지금 꿈을 이룬 상태라고 볼 수 있단다.
더 큰 집도 필요없고, 지금처럼 가족이 평안하게 살 수 있으면 되는 거야. 

민우는 꿈이 무엇인지... 앞으로 잘 생각해 보려무나.
그 꿈을 이루려면 어떤 숙성의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인지 말이야.
누룩같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상상 밖의 결과를 낳게 될 그런 숙성의 요소를 네 삶에 넣어 보기 바래.
아빠 생각엔, 아직 네 꿈을 확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
직업을 확정하지 않고 더 공부하러 대학을 가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
예를 들면 대학의 철학과 같은 곳에 가서 인생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기회를 갖는 것도 좋겠단 생각이야.
이제 고3이 되니 우선 공부도 해야겠지만 진로도 조금 생각해 보자꾸나. 

이 시는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어.
누룩이 뜨는 까닭을 알겠느냐?
앞으로는 그 까닭을 시로 형상화하겠다. 이런 시도지.
무력함, 나자빠져 있음...
이런 것은 '때를 만나지 못함'이라고 말했지? 

그렇지만, 누구나 <알맞은 바람 만나, 살며시 더운 가슴, 그 사랑>을 만나는 법이야.
일생에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했단다.
이마빡에만 머리카락을 단 그 기회가 말이야. 

2연에서는 <고통스레 사는 사람들> 이야기가 등장한다.
'울음'과 '엄동 설한'에 <무르팍 으깨지도록> <찾는> 그 <<길>>. 
누구나 길을 찾고 있다.
그 길은 쫙 뻗은 8차선 고속도로이기를 바라지만,
한국인에게 그 길은 꼬불꼬불 산길이기도 하고,
어쩌면 누구도 간 적 없는 빙벽 가파른 등반길일 수도 있단다.
쉽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앞길.
그러나... 칼날같이 날카로운 저 <별>은 알고 있다. 네 앞에 길이 있음을. 
그 별을 보고 앞으로 '조금씩' 발을 옮기는 일이 곧 사는 일이다. 

좋은 시절이 오기까지 <기다림>
아까 '자기를 지키는 일'이라고 했지?
자기를 망가뜨리면 안 된다고 말이야.
민우가 어떤 어른이 될 지 모르지만, 되는대로 살다가 어른이 되는 일은 참 무모한 일이 아닐까? 

네 안에서 <발효>의 과정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어린애 같은 민우'가 죽고 썩고 문드러지고,
새로운 친구들과 새로운 대학의 물을 만나면
그 <깊은 기다림>의 시간이 쌓이고 나면,
비로소 발효가 이뤄져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그 과정을 기다리는 일이 바로 <누룩>의 할 일이다. 

덩달아서 기쁨도 되고,
해 솟는 얼굴도 되는 <죽음>
전에 이야기한 <역설>이 다시 나오지?
'죽음'은 불길하고 부정적인 것이지만, 여기서는 어때?
밥이 그대로 있어선 막걸리가 되지 못하잖아.
밥은 자기를 죽이고 발효가 되어서 누룩과 하나가 되어야 해.
그러고 나면 '술'이라는 귀한 음식으로 다시 태어는 것이지. 

원래 술이란 것이 제사나 잔치에 쓰이던 귀한 것이었단다.
지금이야 공장에서 만드는 쉬운 제품이지만 말이야.

마지막 연은 <감춰둔 누륵이 뜨는 냄새>가 퍼짐을 '후각적 이미지'로 가득 잡아내고 있단다.
아~~
화자는 지금 감춰둔 누룩이 발효되는 순간임을 감지하고 있어.
그 냄새가 퍼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얼마나 감동을 받는지 몰라.

이 시에서 <누룩>을 <희생>의 의인화로 보기도 해.
민중은 그렇게 희생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만든다고 보기도 한 거지.
아래서 설명할 <벼>와 연관지어 본다면,
독재 시대 힘들게 살아가는 민중관으로 봐도 그럴 듯 하단다. 

그렇지만, 오늘은 민우의 '숙성'을 염두에 두고 시를 읽어 봤단다.
부디 민우에게 좋은 시절이 올 때 도약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 지혜를 터득하길 바라면서 말이야. 

이성부의 <벼>는 민중의 이야기다.
조선의 민중들은 농민이었어.
그저 농사만 짓던 이들이 아니라, 국가의 근본이라 믿던 사람들이었단다.
농자 천하지대본... 농사란 것은, 세상의 근본이다.
그래서 임금이 잘못하거나 정치가 잘못되면 농민들이 일어섰다.
왜놈이 쳐들어오면 '의병'이 되었고,
탐관오리들에게는 '동학군'이 되었지. 

조선 말기, 세도정치가 행해지던 어지럽던 시절에는 말이야.
아무런 죄도 없던 이들을 감옥에 처넣던 일이 많았다더구나.
탐관오리들이 자기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 온갖 죄목을 다 만들어 냈다고 그래.
죄도 없이 죄지었던 민중들을 '벼'에 비유한 시.
그 힘없는 벼같은 민중들은 서로 의지하면서 힘을 갖게 된다는 시, '벼'를 읽어 보자.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 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벼) 

1연에서는 벼는 서로 기대고 산다는 '연대감'을 느낄 수 있지.
2연에서도 '튼튼해진' 벼들의 연대감.
그러나 죄도 없이 죄지어서... 힘겹게 살던 민중의 모습도 보이고,
벼가 익으면 벼는 베어져서 인간을 먹여 살린다. 

3연에서는 벼의 <고상한 정신>을 드러내고 있어.
서러운 일 많아도 마음을 맑게 다스리는 지혜와, 노여움을 덮는 지혜.
민중은 화가 난다고 매번 일어서지 않아. 때를 기다리지. 

마지막 연에서 벼는 베어지면서 '쌀'이 되는 '사랑'의 화신으로 그려지고 있단다.
벼가 베어지길 거부한다면 우린 뭘 먹고 살겠니?
벼의 희생으로 인간은 존재하는 거지.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는
<김수영의 풀>과 같은 끈질긴 민중의 힘은
거기서 '넉넉한 힘'이 나오는 거란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벼의 어울림
어우러진 벼의 힘
벼의 인고
벼의 생명
민중이 어울리고, 거기서 힘이 생기고, 인고의 시간을 보내, 생명력을 얻는다. 

어때?
앞에서 노래한 <누룩>의 효과와도 뭔가 상통하지 않니?

<벼>라는 식물의 외면적 특징과
<누룩>이라는 소재의 존재적 특징을 시인은 잡아낸 것이란다.
거기서 나아가
'벼'에서는 '민중의 생명력과 의지의 가능성'을,
'누룩'에서는 '때가 되어 무르익는 숙성의 가능성'을 읽어낸 것이 아닐까 싶어. 

시를 읽는 일은 이렇게 시인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배우는 일이기도 하단다.
시들을 허투루 넘기지 말고,
다시 곱씹으며 읽어보기 바란다.
네 안에서 누룩이 발효되어 화학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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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1-01-17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 선생님, 궁금한 것이 있어 질문을 드립니다. 인용문 쌍따옴표안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 옳은 것인가요? 아니면 찍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인가요?/예를 들어 ; 그녀는 "나는 네가 싫어."라고 말했다./그녀는 "나는 네가 싫어"라고 말했다. 중에서 어느 것이 맞나요? 혹시 맞춤번 규정에 변경이 있었나요?

페크pek0501 2011-01-17 11:59   좋아요 0 | URL
저도 끼어들어도 되나요?(두 분께 양해 구함)
저도 그게 궁금해서 정확히 알아보고 싶었어요.글샘님의 대답을 기다릴게요.
저의 경우엔 확신없이 그냥 마침표를 찍어서 씁니다. 왜냐하면 "점심을 먹었습니까?"하는 경우에서처럼
물음표를 찍으면서 마침표를 찍지 않으면 불균형한 것 같아서요. 통일성을 위해서 점을 찍는거죠.

글샘 2011-01-17 15:57   좋아요 0 | URL
따옴표 안이라도 문장이 끝났으면 마침표를 찍어야죠. ^^

마립간 2011-01-18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 선생님, 감사합니다. 질문을 하게 된 계기는, 저는 주로 인터넷 신문을 보는데, 인용구에 안의 문장에 구두점이 없는 것들이 많아 맞춤법 규정이 바뀌었나 궁금했습니다.

글샘 2011-01-20 02:07   좋아요 0 | URL
신문은 원래 띄어쓰기를 안하기로 유명했던 매체구요. 인터넷 신문에서도 맞춤법 규정 따위는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엔 한글 맞춤법이 어렵단 이유도 있고, 체계적 교육이 없다는 이유도 있겠구요. ^^ 궁금할 때마다 공부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공부하고 있으니까 말이죠. ㅎㅎ
 

아빠가 날마다 시를 읽어주는 이유를 알까?
글쎄.
나중에 나중에 좋은 아빠라고 스스로 위로하려는 걸 수도 있고,
정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도 하고...
뭐, 이런 저런 생각의 짬뽕이야.
요즘 추세가 워낙 퓨전이잖아. 

오늘은 인간의 언어에 대한 시를 한 편 소개할게.
문덕수의 '꽃과 언어'란다.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문덕수, 꽃과 언어)

전에 한번 이야기한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나 신동집의 '오렌지'와 유사하지.
이 시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다.  

'언어'의 트라이앵글이 있어.
<라캉>이란 프랑스의 언어학자의 이론인데...
사물에는 원래 이름이 붙어있는 것 같이 우리는 착각하며 살지만,
사실 그 '이름'이란 것, '존재'의 본래 모습이란 것을 생각해 보면,
'이름'은 가리키는 진짜 대상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 '컴'이 하나 있다고 해 보자.
너는 어떤 컵을 상상했니?
보통 머그컵이나 유리컵을 생각했겠지?
손잡이가 달린, 우리 부엌에서 물마시는 컵.
아니라고? 손잡이 없는 컵을 생각했다고?
그럼 재질은?
종이, 플라스틱, 알미늄, 쇠, 질그릇(도기), 그걸 구운 자기, 유리, 크리스탈... 끝도 없지.
그렇게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재질도 다른 것들을 우리는 통틀어서 <컵>이라고 이름붙인단다. 

실제 컵과
우리가 이름붙이는 컵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
그것을 마치 '거울'에 비추인 듯이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뇌>가 하는 일이다.
인간의 관념 속에서는 '작은 종이 컵'과 '큰 강철 컵'을 하나의 밭두둑 안에 둔단다.
그 밭두둑을 한자로 '범주'라고 부르고, 영어로 '카테고리'라는 말로 쓴다. 

인간의 관념 속에 갈래지어진 밭두둑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국가나 문명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단다.
그렇지만 하나의 단어에는 하나의 물건이 대응되는 것처럼 우리는 착각하며 살고 있지. 

꽃을 제대로 이름불러 보려고 언어를 갖다 붙였대.
그러자, 제대로 들러붙지 못하고,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는 <나비>가 되어 <쓰러진다>고 했어.
뭐, 나비가 어떻다는 게 아니라,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는 일이 그만큼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겠지. 

언어는 원래 본질을 적확하게 콕 찍어서 표현하기 어려운 거란다.
그래서 3연에서 <꽃의 둘레에서 /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진다고 했지. 

예를 들면, 젊은 남녀가 호기심을 가졌을 때 '사랑해'라는 말을 나눴다고 해 보자.
그 말은 무얼 의미할까?
나 너한테 관심있어~ 정도?
아니면, 우리 좀 사귀어 볼래~ 까지?
더 나아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면 좋겠는데~ 만큼?
결정적으로, 평생 당신만을 위해서 내 모든 걸 바치겠다는 지경?
그 사랑은 어머니가 자식에게 품는 사랑과도 또 다르고,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신 인류에 대한 사랑과도 다르단다.
모든 관념은 다 다르지만 같은 언어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는 거지. 

마치 인간이 그 존재유무를 인식하지도 못하는 <무의식>이
인간의 <의식> 저 너머에서 검은 어둠 속에 잠겨 있듯이 말이야. 

그렇지만, 늘 그렇게 언어가 빗나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야.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이렇게, 어떤 언어는, 어떤 시인은, 어떤 학자는 제대로 언어를 구사하기도 했단다.
그렇게 언어를 잘 구사한 사람은, 어쩌면 깊은 사색의 본질에 다가간 사람일 수도 있어. 

부처님께서 '부처라 하는 것은 이름이 부처일 따름이지 진짜 부처가 아니다'고 했던 것이나,
노자가 '진리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진짜 진리가 아니다'고 했던 것이나,
예수님께서 '가장 낮고 가난하고 아픈 자를 나를 대하듯 하라'고 했던 것이나,
공자가 '자기에 대한 이기심을 버리고 예의로 돌아가라'고 한 것이나,
아인슈타인이 '절대적인 시공간은 없다'고 한 것이나,
달마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한 것이나,
소크라테스가 '앎은 불완전하다. 너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부터 깨달아라.'고 하는 것들... 

한결같이 진리는 '이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잖아.
모두 똑같이 약속이나 한 듯이, 진리는 '이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형식을 띠고 있단다. 

그렇지만, 이런 언어들이 오래 남아 <고전>의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 경지에 다다랐기 때문이겠지. 

존재 파악이 어렵긴 하지만, <꿀벌>처럼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도 하니,
우리가 읽어야 할 책들은 바로 저런 <고전>이 아닐까 싶구나.
오늘은 조금 뻣뻣한 이야기였지만,
살면서 읽어야 할 것이 정말 많아 보이지만,
진리에 가까운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는 껍데기일 뿐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로 맺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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