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문장론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김욱 옮김 / 지훈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은 김에 '부산시민도서관'의 '전자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 읽었다.
인터넷으로 몇 가지 프로그램만 다운받으면 쉽게 볼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프로그램도 점차 발달되어 글자를 크게 해 놓고 읽으면 눈도  피곤하지 않고 좋다. 

글을 쓴다는 일.
참 어렵다.
글을 쓰는 일은 인류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이 되기도 했는데,
단테의 신곡처럼 이탈리아 시골말로 적힌 글이 르네상스의 시작을 울린 것이나
세익스피어의 희곡과 소네트들이 영국의 전성시대와 함께 쓰인 것.
독일 철학의 발흥과 함께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글들이 탄생한 것은
라틴어 성경을 제 지역 말로 옮긴 <종교 혁명>과 함께 인간의 지력을 상승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조선에서 훈민정음이란 훌륭한 도구를 만들었고
그 이전에 이미 금속활자를 세계 1위로 발명해 두고도,
훈민정음과 금속활자가 조선의 지력을 세계적으로 상승시키지 못한 원인은,
그것들을 이용해 과거를 치게 하고 글을 쓰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유교의 규범인 삼강행실도나 소학같은 책을 찍어낸데 불과했기 때문인데, 조선의 읽기와 쓰기가 정체된 원인 중 하나가 그런 것들이다. 
결국 조선의 책들은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지 못하고 말았다. 

좋은 글을 쓰려면 <사고>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 '사색'은 그저 멋진 문장을 완성하려는 고민이 아니다.
세계와 인간의 삶에 대한 <인문학적 사고>가 좋은 글의 요건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인생은 짧고 시간과 체력에는 한계가 있다. 

어찌 양서를 읽지 않고 악서를 읽는 데 온갖 시간과 체력을 낭비할 것이냐고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요즘 내가 하는 생각과 같다.
지난 수 년간 많은 책을 읽는 데 힘을 들여왔는데,
체력적으로 시간적으로 한계에 부닥칠 것임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양서, 고전을 읽는 데 시간과 체력을 안배하여야 할 때임을 실감하는 중에 만난 쇼펜하우어는 고마운 친구다. 

위대한 작가들은 다량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소량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독서는 양으로 승부를 걸 것이 아니다. 그 사상을 풍부하게 표현한 소량의 언어를 반추하는 것이 나의 독서의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고맙게 받아들인다. 

독서는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떠넘기는 행위다.
많이 읽을수록 내용은 정신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독서의 특징은 모래에 남겨진 발자국과 같다. 발자국은 보이지만 그 발자국의 주인이 과연 이 길에서 무엇을 보고 생각했는지 알 수 없다.
독서만 하고 사색이 부족한 경우 그저 방황하는 사람과 같다는 생각을 잘 쓰고 있다. 

파이프 오르간의 기본 저음이 모든 음계를 관통하며 울려퍼지는 것처럼
사색의 결과가 드러난 책은 울림이 오래 가고 서로 공명할 것이다.
그렇지만 외국의 통화를 화폐로 사용하는 약소국처럼
독서만 일삼는 행위는 보잘것 없는 결과를 낳을 따름이다. 

위대한 사상가의 책은 쉽다. 쇼펜하우어의 이 책은 참 쉽다.
그리고 간결한 문체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왜 '고전'을 반복하여 읽는 일이 중요한지를 쉽게 설득하고 있는 책이다.
이런 좋은 책을 읽지 않고, 재미로 책을 읽는 일은 시간과 체력을 낭비하는 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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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1-26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펜하우어라고 하면 인생론, 토론 잘 하는 법, 회의주의자,, 이런 이미지만 떠올리는데
문장론에 대해서도 썼군요. 처음 알게 되었어요.
' 인생은 짧고 시간과 체력에는 한계가 있다. ' 라는 문장이 가슴에 와닿았어요.
저도 오래전에 공공도서관 전자북을 사용해봤는데 (아마, 전자북이 도입된지 얼마 안 된 초창기였을거에요)
모니터만 보니 눈이 아프더군요. 종이책으로 읽는게 더 좋았어요.
요즘엔 전자북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기능이 발달되어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이참에
도서관 전자북을 이용해봐야겠어요 ^^

글샘 2011-01-26 16:45   좋아요 0 | URL
문사철 데칸쇼...
공부란 문학,역사,철학과 데카르트,칸트,쇼펜하우어...를 읽는 거란 이야기가 있었죠.

요즘엔 전자북이 양도 많고 질도 좋아졌습니다.
오디오북도 있더군요. ^^ 읽기 싫으면 듣는 것도 좋죠. ㅎㅎ
 
소통 - 욕망하는 아이들과 이성적인 부모, 그들의 서로를 향한 이해의 창
송재희 지음 / 페퍼민트(숨비소리)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학생과 학부모와 교사가 소통하려면, 인간의 신체를 알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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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가방 2011-01-25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뜻 이해가 안가는 건... 제 무식함 때문일까요??
학생과 부모와 교사가 소통하려면... 인간의 신체가 아니라 정신세계를 먼저 알아야하지 않을까요??

글샘 2011-01-25 15:26   좋아요 0 | URL
ㅎㅎ 책가방님...
정신 세계가 다르지 않나요? 애들과 어른이...
그건... 몸이 다르기 때문이랍니다.
자녀 교육에, 또는 요즘 아이들 이해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읽기를 권해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오늘은 80년대를 풍미했던 최승호의 시들을 살펴 보자.
최승호의 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시가 '대설 주의보'일 것이다.
한번 읽어 보렴.

해일처럼 굽이치던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대설주의보)

1979년에 독재자 박정희가 암살당하고, 80년에 민주화 기운이 무르익던 시절,
광주에서 총칼로 민중을 제압하고 다시 군인 독재 시대가 열렸다.
정의롭지 못한 자들이 내세운 '민주 정의당'이라는 이름은
역설적으로 그 시대가 얼마나 정의롭지 못하고 민주주의가 퇴보한 시대였는지를 보여준다. 

이 시에서 '대설' 곧, 큰눈은 그런 무시무시한 독재시대를 상징하는 것이다.
큰눈이 올 것을 예보하는 대설주의보.
결국 시련의 계절이 앞으로 닥칠 것을 예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하는 것이 시임을 드러내고 있다. 

백색의 산들에 굵은 눈발이 휘몰아친다.
제설차가 와서 눈을 치워준다면 좀 나아질 텐데...
눈보라 속에 '쪼끄마한 굴뚝새'가 하나 날아간다.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을 비유한 것 같다. 

산 속엔 길 잃은 등산객들도 있을 것 같다.
대설주의보가 내렸는데... 등산객들은 고립되고, 외딴 마을도 고립된다.
힘찬 눈보라를 '군단'이란 군사 용어로 표현했다. 군사 독재의 냉혹함이 드러난다.
'백색의 계엄령'에서 눈의 본질이 그려졌다.
계엄령은 당시에 툭하면 내려지던 것으로,
국가가 혼란스러워지면 계엄령을 내릴 수 있다.
대신에 국민의 모든 권리는 제지당할 수 있지.
아무나 감옥에 처넣고 고문하는 시대가 계엄령이 내려진 시대다.

쪼그마한 굴뚝새가 솔개라도 있는지, 몸을 감춘다.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도 민중과 같다.
소나무도 눈더미의 무게를 못이겨 부러진다.(이렇게 눈의 무게로 부러진 나무를 설해목이라 한다.)
시련은 계속 되는 것이다.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집은 '때'라는 발음이 반복된 언어 유희에 해당한다.
한 때 먹으려고 밥이라도 안쳤는지 굴뚝에 연기나는데,
그 배경으로 하염없이 내리는 눈보라는 계엄령처럼 냉혹하다. 

이 시는 추상적 관념의 세계(군사 독재, 계엄의 시대)를 대설주의보와 눈보라로 형상화하고 있다.
해설가 조남현은 이 시를 통하여 그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겨울에 눈 내리는 현상은 당연한 자연적인 현상이자 우주의 섭리이다.
따라서 눈이 내리는 것 자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눈은 평범한 일상적 현상으로서의 눈이 아니다.
여기서의 눈은 해일처럼 굵은 눈발을 휘두르며 천지를 삼킬 듯이 내리는 눈이다.
그것은 깊은 골짜기를 메우고 온 산을 백색으로 물들일 듯 거칠게 내린다.
이러한 흉폭성은 자연을 파괴하고 그 질서를 교란시킨다.
그리하여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온갖 동식물들의 삶들을 제압하고 위협하기 시작한다.
굴뚝새를 '쬐그마한 숯덩이'같이 초라하게 만들고 서둘러 뒷간에 몸을 숨게 만드는가 하면,
삶과 삶을 연결시키는 '길'을 끊어 놓기도 한다.
또한 온갖 산짐승을 굶주리게 하고 소나무 가지를 부러뜨릴 정도의 위험으로 몰고 가기도 하는 것이다.  

비록 이 시는 시대적 상황을 눈 내리는 일상적 현상에서 읽어 내며 그 비극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에서 보듯
이 시대를 이겨내려는,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 주고 있는 시이기도 하다.



다음엔 시험에 잘 나오는 같은 작가의 '북어'를 읽어 보자.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북어(北魚))

밤의 식료품 가게에서 '밤'은 곧 부정적인 시대를 상징하곤 한다.
김수영의 <폭포>에서도 '밤'은 어두운 시대였다. 

북어는 말린 명태를 일컫는다.
위의 사진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뻣뻣하게 굳어있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마치 그렇게 의식 없이 살아가고 있음을 북어를 통해 대변하고 있다. 

그 북어들이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 있다.(1쾌는 20마리란다.)
분대는 군대에서 쓰는 용어다. 분대가 모여 소대가 되고, 중대, 대대, 연대, 사단 이렇게 커진단다.
군대에서는 창의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지.
군사 독재 정권 하에서도 마찬가지란다.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은 억압당하고,
모두들 굳어버린 북어처럼 획일적으로(나란히) 살 수밖에 없던 현실을 비판한 것이지.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는 주체적 삶을 상실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보인다.
그 대가리들의 '혀'는 자갈처럼 딱딱하다.
언론의 자유가 없던 시절...
그래서 '말의 변비', '무덤 속 벙어리' 처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은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이며,
'빳빳한 지느러미'로는 주체적으로 헤엄칠 수 없는 몸이다.
'막대기 같은 생각' 역시 비판적인 사고력을 무시당하는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그렇게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런 상념에 빠진 화자는 갑자기 주체가 자신에게 돌아선다.
그 전까지는 '독재 시대에 사람들이 다들 획일적으로 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이었는데,
이제 반성해 보니 '나도 역시 그들과 같은 북어'일 따름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느닷없이>에서 시상이 전환되고 있다.
시적 관심이 북어와 사람들에게서 <자신, 화자>에게로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화자가 당혹스럽게도 환청이 들린다.
북어들이 '너도 마찬가지지?'하는 고함을 치는 것처럼 말이다. 

획일적인 군사 독재 시대를 상징하는 말로 '북어'를 쓰고 있다.
그러면서 비판적 내용이 자기 반성적인 부분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지.

시적 화자의 진지한 모색이 독특한 발상을 통해 드러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우리도 늘 남들을 비평적 시선으로 보기 쉽다.
그렇지만 돌이켜 보면 그 비평은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은 1980년대 어두웠던 시절의 시들을 두편 보았다.
지금이라도 그 시절보다 무척 밝아진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와도 같다는 말이 있단다.
민주주의는 여러 사람의 주체적인 인식과 실천이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말이겠다.
민우도 시를 읽으며 시대를 읽는 눈도 키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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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11-01-22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시 감상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_()_

글샘 2011-01-25 14:23   좋아요 0 | URL
좋은 시야 뭐, 애들 문제집 들쳐보면 가득한걸요. ^^
애들은 그걸 문제라고 읽으니 문제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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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읽기 - 쇼펜하우어의 재발견
랄프 비너 지음, 최흥주 옮김 / 시아출판사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쇼펜하우어란 작가는 '염세주의'로 알려진 모양인데,
뭐, 그들이 살았던 19세기가 상당히 세기말의 분위기를 풍긴 시대였다면, 근대 철학자치고 염세주의자 아닌 자들을 찾는 것도 어려울 듯 싶다. 칸트처럼 시계마냥 또박또박 삶을 살려고 했던 것도 어찌 보면 세기말의 분위기를 부정하려했던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 이성을 주장했던 독일의 철학자들의 분위기를 상당히 개그스럽게 풍자한 자들 중 하나가 쇼펜하우어로 알려져 있다. 

쇼펜하우어의 '문장론'도 함께 읽고 있는데, 쇼펜하우어보고 염세주의 운운한 사람은 질투심이 강했거나,
아니면 자격지심이 강했거나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쇼펜하우어가 지금 한반도에 존재한다면, 개그콘서트에서 슈퍼스타로 활약하고 있든가,
아니면 도올 선생 뺨치는 동분서주를 보여주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의 편집 의도가 쇼펜하우어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기때문일지 몰라도,
이 책은 결국 그래서 쇼펜하우어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결정적인 한계를 가지게 된다. 

작가가 편집한 쇼펜하우어의 글들의 토막들은 쇼펜하우어가 얼마나 유쾌한 작가인지를 보여주는 데 성공하고 있지도 못하다.
차라리 '문장론'처럼 일관된 주제를 이야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독자에게 쇼펜하우어를 제대로 보여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장의 '웃음론'이 이 책의 유일한 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 

작가가 세간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쇼펜하우어에 대한 지극한 애정으로 이 책을 빚은 충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짜깁기로 인한 단편성은 결국 한 철학자를 바라보는 시점에 신뢰도를 뚝 떨어뜨리는 역할을 했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청취자가 좋아하는 가수를 한 명 골라서 그의 노래를 짜깁기한 음반을 만들어 판다면... 글쎄, 그 음반은 성공하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느낌과 비슷할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유쾌한 철학자의 독설을 읽는 일은 한편 즐겁기도 하다.
독일의 철학 풍토에서 짱짱한 역사를 가진 자들에게 퍼붓는 독설이야말로 왕비호의 특권일 수도 있겠다. 

훌륭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얼마나 발버둥치는지!(21)
그래, 사람은 그런 법이다.
교사들은 돈을 벌기 위해 가르치며 '지혜'가 아니라 지혜가 있다는 '평판과 명성'을 구한다.
또한 학생들도 지식이나 인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는 척이나 하고 거드름이나 피우려고 배운다.(74)
세상을 시니컬하게 비평하는 자에게 돌아올 몫은 늘 '투덜이 스머프'라는 욕설 뿐이다. 아무리 옳은 말이래도... 

그래서
내가 내 비밀을 지키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나의 포로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누설하면 내가 그것의 포로가 된다.
침묵이라는 나무에는 평화라는 열매가 열린다.(78)
이런 독설을 내뿜는다. 그러니 왕비호가 될 밖에... ㅋㅋ 

카드놀이, 여송연은 사고의 대용물이다.  그것은 사고의 파산 선언이다.
사람들은 무료함도 나쁜 일 중의 하나라고 여기는 듯 하여, 모이면 무료하다고 카드, 여송연을 나눈다.(81)
날카롭다. 이렇게 정확한 사람에게는 적만 많이 생길 뿐이다. 

인류를 아주 형편없는 종은 아니라고 부추긴다.
다양한 예술과 학문이 태어나고 보존되고 완성되어서, 이 종은 그것으로 자신들이 그 천재들의 가치를 알아보았음을 증명하기 때문(83)이라고 했다. 여기 독일의 철학자는 쏙 뺐다. ㅋㅋ 역시 왕비호답다. 

그는 잰체하는 인종을 경멸한다.
그들은 모두 빌린 의견들만을 갖고 있다. 그들은 그것들을 손에 넣을 기회만 생기면 탐욕스럽게 잡아채서는 자기 것이라 사칭하며 뽐낸다. (85)
이렇게 형편없는 자들이 세상에 가득한 지식인들이라고 그는 비판하는 것이다.
그는 늘 '독서'를 '사색'의 아래 둔다. 
오, 얼마나 생각할 것이 없었으면 저렇게 많이 읽을 수 있었을까?(88) ㅋㅋ 

그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어야 그가 세계를 보는 관점을 좀더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시대의 영향이겠지만, 여성에 대한 그의 관점은 상당히 촌스럽고, 예의에 대한 관심도 좀 유치하다.
그렇지만, 그 시대에 그런 이야기를 표현하지 않았던 촌놈들에 비하면 그의 독설은 시대를 읽어주는 남자 역할도 한다. 

익살과 비유, 풍자로 가득한 쇼펜하우어를 읽는 일은 그래서 신선한 유머집을 읽는 기분이다.
염세주의 철학자처럼 박제된 용어로 그를 만나는 일은 슬픈 일이지만, 또 그것이 현실인 듯 하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 볼 가치가 있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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