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마음이 바빴구나.
선생님들 대상으로 힘든 강의가 있어서 그거 마치고 나니깐 힘이 빠졌던 모양이다.
오늘은 송수권의 시를 몇 편 읽어 보자.
송수권의 시에서는 '설움', '울음' 이런 '한 恨'이 많이 묻어나는 시들이 제법 있다.
우선 그의 '산문에 기대어'부터...
'산문'은 산에 있는 문이니, 절의 입구를 뜻하는 문이 되겠다.
절문에 기대어 있으니 무슨 생각엔가 잠긴 화자가 등장하겠지.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 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 물 속에 비쳐옴을 (산문(山門)에 기대어)

'서프라이즈 진실 혹은 거짓' 같은 데 보면 느닷없이 사람이 죽기도 하고,
남은 가족이 슬퍼하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지.
실상 우리 주변에서 죽음이란 사건을 잘 일어나지 않는데 말이야.
그러다가, 어느 날 자기 주변에서 당황스런 뜻밖의 죽음을 겪게 되면 큰 충격을 받곤 한단다.
엄마도 작은 이모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나서 한 5년을 정신적으로 방황했던 일이 있어. 

옛날에 어떤 어머니가 계셨는데,
무지무지 사랑하던 자기 아들을 그만 읽고 말았대.
마침 그 동네에 부처님이 지나가고 계셨어.
그래서 그 엄마가 부처님께 하소연을 했지.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자식을 앞세웠냐고...
도대체 왜 내 자식이 죽었어야 되냐고...
자식을 다시 살려 줄 수 없겠느냐고...
그랬더니 부처님이 이 마을을 다 다니면서, 누구도 죽지 않은 집이 있으면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했지.
그래서 어머니는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아무도 죽지 않은 집이 있는지 샅샅이 물으며 다녔대.
그리고 깨달았다. 죽음은 어느 집에나 있었다는 것을 말이야. 

송수권이 군대갔다 나왔을 때 남동생이 죽었다든가 그런 사연이 있었대.
단짝으로 붙어 지내던 피붙이가 어느 날 죽었다는 그런 사정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 거야.
엄마가 그랬거든. 엄마가 대학을 이모랑 같이 안동에서 다녔잖아.
둘이 붙어 살면서 얼마나 친했겠어. 그랬는데 언니가 어느 날 없어졌다 생각해 봐.
정말 숨쉴 때마다 모든 생각에서 그 죽은 사람 생각밖에 더 나겠냐고.
잠을 자면 꿈에 나와서 괴롭고... 눈을 두면 그곳마다 추억이 떠올라 괴롭고...
밥을 먹자니, 너는 없는데 나는 여기서 밥을 먹는구나... 그래도 살겠다고... 이러고 가슴이 미어지고... 

그런 마음을 쓴 시야. 산문에 기대어. 
산문에서 바라본 죽음. 그러니까, 산문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 지점이 되는 것이지.
정지용의 '유리창'에서처럼, 단절의 기능. 그리고 연결 또는 소통의 기능.
산문 이쪽은 이승, 저쪽은 저승으로 나뉘지만, 거기서 만남의 장소가 되는 것.
'가을 산 그림자(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은
바로 산 그림자를 보고 동생의 눈썹을 떠올린 형상화일게다.
아니면, 기러기라도 날아가는 그림자가 두엇 비쳤는데, 그게 누이의 눈썹을 떠올렸을 수도 있고.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아~ 아까 내가 쓴 거 기억나?
나는 지금도 여기 살아서 보고 있구나. 이런 원망섞인 목소리. 나는 밥을 먹고 있구나... 이런 거. 

깨끗한(정정한) 눈물을 <절제>하는 모습을 '돌로 눌러 죽이'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 눈물 흘린 날들을 따라 가면, 즈믄 밤(천 날, 千日)이 지났구나. 누이가 죽은 지 3년이 되었단 이야기야.
<강이 일어선다는 말이나,
강물 깊이 가라앉은 말씀이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온다는 말이나,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이나
산다화(동백꽃) 한 가지 꺾어 건네이던 것>은 세상 모든 것에서 누이의 죽음을 떠올렸던 슬픈 날들에 대한 이야기겠다.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그렇게 잊지 못하던 누이의 모습 말이다. 

2연에서 기러기가 보이는구나. 그걸 보고 누이의 눈썹이 떠올랐겠지.
이제 누이의 무덤에라도 왔나 보다.
내가 한 잔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니 네가 마시렴.
너와 나는 오랜 시간 지나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게 될 날이 있겠지?
죽은 사람과는 이렇게 추억을 통해서도 만나지만,
미래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기도 하지. 그런 사상을 <윤회>라고 한단다.

마지막 연에서는 '누이야 너는 아는가~'하고 자꾸 부르면서
애닯은 마음을 심화하고 있단다.

누이의 죽음을 <애상적>으로 <회한어린 독백체>로 추억하고 있지.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가 화자의 슬픔을 또렷이 그려내고 있구나. 

박재삼의 <밤바다에서>도 비슷한 모티프를 가진 시란다.
모티프는 <시를 쓰게된 동기>같은 말인데, 영어의 모티브와 같은 말이다.
여기서는 '누님'의 부재를 슬퍼하는 화자가 등장하지.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진정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에 많은 할 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 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박재삼, 밤바다에서)

1연에서 누님의 치맛살 곁에서 누님의 슬픔을 함께하지 못해 바닷가에 선 화자.
바닷가에 서면,
가슴 울렁거리고 눈에 눈물 어린 화자.
일렁이는 바다의 파도를 보며 <차라리 진정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고 싶다고 한다.
어떤 마음인지 알겠니?
절친하던 육친의 상실이 불러오는 가슴 울렁이는 육체적인 슬픔 말이야.
그 슬픔을 말로 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하늘의 별처럼 많겠지만,
아파할 수밖에 없는 화자.
3연에서 누님은 잠드는 섬처럼 형상화되고 있어. 섬은 저만치 멀리 있는 거잖아.
나는 섬에 도달하지 못하는, 그러나 끊임없이 섬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가늘지만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서러운 심사가 잘 드러나 있지. 

다음엔 3년 전에 수능에 출제되었던 송수권의 <지리산 뻐꾹새>를 한번 읽어 보자.

여러 산 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꾹새가
울음 울어
떼로 울음 울어
석 석 삼년도 봄을 더 넘겨서야
나는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냈다.

智異山下(지리산하)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 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智異山中(지리산중)
저 連連(연연)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림 끝에
비로소 한 소리 없는 江(강)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쪽 남해를 흘러들어
南海群島(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智異山下(지리산하)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細石(세석)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지리산 뻐꾹새)

이 시는 <슬픔의 본질>을 탐구한 시다.
도대체 나의 이 '슬픔'은 어떻게 생겨서 어떻게 변화하여 오늘까지 이른 것인가에 대한 탐구.
앞에서 동생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이야기가 <산문에 기대어>에서 나왔잖아.
그런데 그 슬픔은 마치 뻐꾹새 울음이
<오랜 세월 지나> <많은 공간 거쳐> 지금 나에게는 어떤 하나의 경지.
시 속에서 진하게 우려나 있고, 삶의 모든 곳에서 진한 이미지로 각인되어버린 그런 마음을 그린 거야.  

1연에서 울음을, 많은 울음을,
석 석 삼년 = 3*3*3 = 27년이니깐 한 30년 울었던 거다.
그 세월을 더 지나고 나서야 나는 길뜬(게으른) 서러움에 적응이 되었다는구나.
서러움의 맛을 알게 되었다는 거지.
이 앎은 지적인 습득이 아니라, 그저 설음에 익숙해져버린 상태겠구나.
그리고 그 슬픔의 원인은 <한 마리의 뻐꾹새> 였음도 이제 알겠단다. 

그 뻐꾹새의 울음은
2연에서 智異山下(지리산하)
3연에서 智異山中(지리산중) 거기서 흐른 물이 강이 되어 다시
4연에서 남해로, 섬들을 밀어 올리고
5연에서 지리산 (꼭대기) 細石(세석)에까지 오랜 시간과 긴 거리를 거쳐 뭔가를 형성한다.
그렇게 형성된 것이 나의 슬픔의 실체였던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뻐꾸기는 '한과 설움을 지닌 원혼이 뻐꾸기로 환생'한다는 설화에서 차용한 것 같다.
또 이 시에서는 '알았다’, ‘보았다’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시의 주제라면 <한과 설움을 극복한 이후에 승화된 삶의 아름다움> 같이 쓸 수 있겠다.
아니면 <뻐국새 울음을 통해 깨달은 설움의 근원 탐구> 정도거나...

이 시어 덧붙인 해설을 한번 읽어 보자.

민족의 원형적 심상을 노래한 절창

우리민족의 한의 정서나 슬픈 비극적 체험의식을 가장 잘 나타내줄 수 있는 객관적 상관물의 새가
바로 접동새와 뻐꾹새다. 접동새의 한스런 슬픔의 정서가 김소월의 <접동새>에서 절창되었다면.
송수권의 <지리산 뻐꾹새>는 뻐꾹새에서 환기되는 그런 점을 절창하고 있다.

이 시의 문체적 특징은 서술체로 되어 있고 . 시적 화자인 "나"(주어)가 보고 느낀 점을
'알아냈다" "알았다" "보았다"(3연, 4연, 5연)라는 술어동사로 각 연을 마무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각동사와 시각동사로 통일 되어 있고 . 더 나아가 시 전체 분위기를 '운다'라는 청각어가 압도하고 있어
독자들의 이해가 쉬운 장점이 있다.

1연과 2연은 여러 산봉우리에서 울어대던 뻐꾹새 소리를 처음에는 여러 마리가 우는 울음인줄 알았으나
실상은 한마리의 뻐꾹새 울음인 것을 오랜 세월이 지나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그 소리 는 '뒷산 봉우리 받아넘기고/또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긴 한 마리의 울음이었다는 사실 확인이다.

이는 곧 미당 서정주가 국화꽃 개화의 비의(秘儀)를 ‘한’송이에다 압축시킨 숫자개념의 기법적 효과와 같다.
여러 송이가 아니라 오로지 ‘한’송이요, 여라 마리가 아니라 ‘한’마리로 압축․극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다음 3연, 4연, 5연으로 오면 이미지의 공간구조가 확대된다.
즉 산에서 울던 뻐꾹새의 울음이 3연과 4연에 와서는 드디어 눈물이 되어 섬진강을 이루어 남해로 흘러들고,
마지막 5연에서는 그 눈물이 피눈물이 되어 철쭉 꽃밭을 벌겋게 다 태우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뻐꾹새를 노래했다고 다 절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시가 절창일 수 있는 점은 민족의 원형적 심상을
이미지의 전이(轉移)와 변용이란 시적 장치를 원용해 비극감을 압축․극대화 시켜줌과 동시에 덤으로
민족사(6․25)의 비극적 공간이란 사회학적 상상력까지 자극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 이유식 

암튼 도대체 이 슬픔이란 것은 어떻게 형성된 것이냐? 그것을 탐구한 결과를 시로 형상화한 거라고 보면 되겠다. 

마지막으로 그의 <여승>이란 시를 한번 보자.
시에서 <여승>이란 소재가 많이 쓰이지?
교과서의 '백석의 여승', 또 '조지훈의 승무'에서 두 뺨이 고와서 서러울 정도로 이쁜 여승 ㅋ
이 시에서의 여승은 어린 아이가 바라본 아름다운 '여승'이란다.
어려도 사내는 사내다. ㅎㅎㅎ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女僧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릿대를 든 女僧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小僧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 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되돌라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뒤로 나는 女僧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女僧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事物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詩를 쓴다. (여승)

어린 시절의 '봄날'을 회상하고 있지.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낀 풍경은 <병자>의 모습과 오버랩되어 조금 서러운 풍경이다.
고뿔은 <코+불>에서 나온 말로, 감기다. 여기서는 심한 병을 앓는 아이를 뜻한다.
이 아이는 창호지에 <구멍>을 내서 세상과 통하고 있다.
그 <구멍> 밖에서는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고깔 쓴 여승>이 있지.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 

어린 시절의 추억은 꼭 어떤 상황이 그대로 기억에 담겨있는 건 아니란다.
어떤 감촉이나 향기만으로도 한 순간이 오롯이 살아날 수 있다.
마르셀 푸르스트라는 작가는 어린 시절 먹던 <마들렌>이란 빵 냄새를 떠올리면서 7권이나 되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썼단다.
김종길의 <성탄제>에서도 어린 시절의 <서늘한 아버지 옷깃>과 <새빨간 산수유 열매>로
아버지의 사랑을 떠올리고 있잖아.
여승의 음색(목소리의 아름다움), 설움에 진 눈동자,
그 당시의 낮달까지 아직도 아련하게 마음에 잔상으로 남아있구나.
(낮달에 포름한 향내가 풍기니 공감각적 심상이 있다.)
참 강인한 인상이었던 모양이다.  

어린 화자는 너무 마음이 안타깝고 아쉬워서
바리때(스님의 밥그릇, 4개가 한 벌이 된다)를 들고 시주를 얻으러 다니는 여승을 따라 나선다.
그걸 알지만 그저 나아가던 여승은 마을 입구 네 거리에 가서야

(도련님, 小僧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보셔얍지요.)

이렇게 합장을 한다. 아마도 괄호를 한 이유는 환청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마음 속 서늘한 기억이 화자에겐 오래오래 남아있던 것인데,
화자는 아직도 그 때의 순수함을 추억하고 있단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事物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詩를 쓴다. 

화자에게 그 마음.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그 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이 넘쳐 흐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고 한다.
그것이 이 시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어린 시절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이 넘치는 시 세계 추구> 이런 것. 

민우도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마음을 다 간직하고 있던 어린 시절이 있었겠지.
그 세계가 조금씩 쪼개져 나가면서 어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만,
또 그 세계의 온기로 평생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시란 것은 이렇게
다른 사람의 인생 경험을 통해서
내가 해보지 않은 경험의 속내까지 읽어내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소재가 된단다.
사람들은 이렇게 다양하게 아프고 쓰라린 추억들을 담고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마음을...
그래서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일이 소중하다는 것을
시를 읽으며 배워가기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강의를 한다.


댓글(0) 먼댓글(3)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無化果는 없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35
김해자 지음 / 실천문학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무화과...
꽃이 없는 과일...
그렇지만 무화과에도 꽃은 있다. 그 과일처럼 보이는 육질 안에 가득한 것이 꽃이다. 

세상의 이치는 그렇다.
무엇 하나 없으면 안 되는 것.
겉으로 없어 보이지만, 사실 다 있는 것. 완전하고 온전한 것. 그렇다. 

그렇지만, 또 세상 이치는 이렇다.
길거리엔 똥물 시궁창물 구정물 가득 끓어 넘치지만
뉴스엔 살인 강간 절도 수뢰 똥물 구정물보다 더러운 소식들로 박이 터지지만
나이 따윈 잊으라는 탈렌트 한 마디에 수십 만원 짜리 크림은 불티가 나고
술집을 나갈지언정 명품 백은 옆구리를 장식해야 하는 사람들로 네온사인은 붉게 물든다. 

그리하여 세상 이치를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말하는 것은 너무도 모순되기에,
그리고 그 모든 미시사를 역사적으로 기록하기엔 역사학자가 너무도 부족하기에,
거기 문학이란 불량품이 기생할 틈이 놓인다.
문학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지만, 칼날같은 철학과 무쇠같은 역사가 적지 못하는 것들을 부드러운 인절미마냥 담고 앉은 것이다. 

삼백 날이 다가오도록 일기 한 장 쓰지 못한 나는
삼백 날이 넘도록 울면서 시 한 줄 쓰지 못한 나는
그래서 하루의 무용담을 노래하지 못하는 나는
일 년 삼백 예순 날 누군가를 위해 울지 못한 나는
이 밤중에 나의 누추를 운다 

고개 돌려 나의 상처에 귀기울인 동안
겨울이 가고 어느새 나뭇잎은 무성해지고
누군가는 또 병들었다
내 앞의, 내 안의, 또 내 뒤의 고단함에 지쳐 
병석에서 뱃살만 늘려온 나는 죄만 늘려온 나는
아니다 아니다 고개만 흔들어온 나는
지금 한밤중이다 (한밤중, 전문) 

이런 시를 읽으면, 나도 아프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던 날, 플라톤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앓아 누웠던 것이다.
김해자 시를 읽노라면, 김진숙이 떠오른다.

http://www.youtube.com/watch?v=7w3TTUjecos 
(김진숙 지도위원의 타워크레인 인터뷰) 왜 그는 타워크레인에 올라갔는가?

다음 생엔 꼭 내 속으로 들어와 열 달 뱃속 품어 고이고이 길러 내 배 앓아 엄마를 낳아줄게 배탈나면 차조 메조 눈 많은 곡기 끓여 기저귀에 꾹 짜서 한 입 한 입 먹여줄게 한참 자랄 땐 새벽시장 콩물 받아다 노란 주전자 가득 머리맡에 놓아줄게 입맛 없을 적엔 산낙지 사다 식초 설탕 간장 넣어 염포탕도 해주고 석화 넣어 훌훌 넘어가는 매생이국도 끓여줄게 한평생 서서 밥상 고이 차려줄게 늘 앉아서 밥상만 받은 몸이 (어머니의 밥상, 부분) 

김해자의 시는 전설이고, 추억이고, 아련한 옛 이야기를 끌어내지만,
또 한켠 날카로운 종잇장에라도 베인 듯 아릿한 슬픔도 자아낸다. 

깎을 만큼 깎고 견딜 만큼 견뎠는데
기다리라 해서 기다려도 봤는데
돌아가다 말다 하던 콘베어벨트는 끝내 멈췄다
마이너스 통장도 깨서 쓸 적금도 이제 없다
누비라는 거리를 잘도 누비는데
낡은 작업복은 누비고 다닐 데가 없가나
붕토를 접어볼까 아내 앞에 꿇어앉아
한 판에 40원짜리 컴퓨터 키보드라도 끼워볼까
셔터 내려진 부평 거리 갈 곳 없는
사내 하나 부평초로 떠돈다(대우우중, 大宇雨中, 부분) 

제목부터 풍자가 가득하다.
대우의 김우중이는 배부르게 잘 사는데, 노동자는 다 자르듯,
큰 비 내리는데 노동자는 갈 곳이 없이 잘렸다.
대우 누비라는 누빌 곳도 많지만 늙은 노동자는 일터가 없다.
결국 부평초가 되고 만 신세.
신자유주의 세상의 인간이다. 

어두운 한낮 산사에 갔다  

해탈문 지나 무량수전 처마 밑에
죽지 접고 졸고 있는 새의 무연한 시선에 
풍경 소리 날아와 부딪히는데
그 순간 석가모니처럼 반개한
새의 눈에 엷은 미소가 번졌는데
나는 왜 배롱꽃처럼 얼굴 붉혔을까 

내 평생 더듬거리다 보면
절로 안겨오는 노래 부를 수 있을까
온몸이 귀가 되고 눈이 되어
제 말이 없어진 천수천안보살처럼
다 타고도 바람 속에 묻어나는 향
울려퍼지는 풍경 빚을 수 있을까
말 속에 절이 깃들듯
절 속에 말이 숨쉬듯 (言 寺, 전문) 

시의 제목 '언  사'는 합치면 '시'가 된다. '말과 절'이 합쳐서 시가 된 것. 

절로 안겨오는 노래가 시가 되는 이치를,
말 속에 절이 깃들고, 절 속에 말이 숨쉬어야 남들에게 들려줄 시가 되는 이치를
그는 볼 수 있게 된 것이 언제부터일까?
배롱나무처럼 얼굴 붉힐 줄 아는 이라야 말 속의 절과 절 속의 말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김해자의 시를 읽는 일은 아프면서도 아릿한 성장통이 몸의 이쪽저쪽에서 싹틔우는 느낌을 주는 일이다.
밤늦게 김해자를 읽는 일.
말 속에 절을 깃들이는 일과 같고,
절 속에 숨쉬는 말을 읽는 일과 같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실 2011-01-30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십일동안 성당에 가지 않은 나는
그저 휴식기간이라고 나름 변명을 하던 나는
묵주반지를 끼고 온 타인의 손가락을 보면서
그만 성당엘 가고 싶어진다.

첫번째 시 읽으며 문득 생각났어요.

전 살아오면서 억지로라도 긍정적인 성격을 가지려 노력했나봐요.
세번째 글, 이런 글 보면 외면하고 싶어지니 참 못 되었죠?

글샘 2011-02-01 21:51   좋아요 0 | URL
와~ 새해에 시심이 솟아나시나 봅니다. ^^
억지로 긍정적 성격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일도 좋긴 하죠.
그치만 가끔은 자기를 확 비워버리고 풀어놓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
신경림 시에 '석 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가 되어...' 이런 구절이 있거든요.
좋지 않나요? 한 일주일 바보가 되는, 진짜 휴가...
설 잘 쇠세요~

세실 2011-02-02 08:01   좋아요 0 | URL
^*^

sslmo 2011-02-01 0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해자, 참 좋죠?
그렇네요, 김해자와 김진숙...닮았네요.

명절 잘 보내시라고 인사 드리러 왔다가, 무방비 상태에서 후두둑이예요~

글샘 2011-02-01 21:52   좋아요 0 | URL
설 잘 쇠고 오세요. ^^

김해자나 김진숙이나 참 짠한 사람들입니다.
어쩌자고 그렇게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가고 있는지...
집사람 직장가는 길에 김진숙이 올라가있는 타워가 있는데요... 지나칠 때마다 마음이 짠해요.
 
플라톤의 국가, 정의를 꿈꾸다 주니어 클래식 5
장영란 지음 / 사계절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67 페이지짜리 서광사의 <플라톤의 국가, 政體>를 빌렸다.
지난 번에 가서 허탕을 쳐서 이번엔 갔더니 두툼한 것이 제법 자리를 잡았다.
플라톤의 대화편의 몇 꼭지를 읽었는데, 그건 대학때 조금씩 접했던 것들이고,
짧은 것들이어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국가, 정체>는 일단 책이 하드커버로 된 <전공서적> 삘이 확 난다.
그래서... 식전에 <오르되브르>를 먹는 기분으로 빌린 책이 <주니어 클래식>이다. 

읽노라니, 이 책이 내 수준에 좀 맞다. 아니 내 수준보다 좀 높다.
과연 767페이지짜리 책을 읽어낼 수나 있으려나 미리 걱정이다.
도서관 대출은 기한이 2주니깐... 열심히 읽어볼 생각은 가지고 있지만, 설도 끼고, 개학도 있고... 어둡다. ^^ 

무지한 나는 플라톤의 <대화편>이 따로 있고 그의 <국가>란 책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하긴, 뭐 읽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대화편은 소크라테스 이야기고, 국가는 플라톤의 논설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그거란다.
플라톤은 모든 책을 대화체로 쓰고 있다.
그 대화편의 상당한 부분에 할애된 것이 '국가'라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이 국가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나오던 시절의 국가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스가 혼란기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시절.
소피스트들이 '진리'를 알고 있는 양, 혼란기를 틈타 돈을 벌고 명예를 얻던 그 시기,
플라톤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일인가'를 이야기한다.
물론 인류가 살았던 모든 시기는 <과도기>로서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욕망이 가장 강하고, 그 다음은 기개, 그리고 이성이 가장 약했던 시기(255)로 당시를 정리한 플라톤은 <다른 무엇보다도 어떠한 삶이 최선의 삶인지를 배울 수 있는 학문을 추구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단다(276) 

이런 구절을 읽노라니, 뭐 홍세화 씨나 강유원 선생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여기가 그리스인지, 미국인지 분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고전의 힘이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진리란 꿰뚫어지는 것. 그 진리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는 것이 고전이다. 

철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이다.
그래서 철인 정치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펴는 플라톤.
간혹, 도식적이기도 하고, 히틀러스러운 괴기론을 펼치기도 하는 것이 귀여울 지경이다.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 계층은 각각 이성과 기개와 욕망이란 개인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혜, 용기, 절제란 덕목을 추구해야 하며, <정의>는 이들 모두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이렇게 노트 필기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는 강사가 바로 '플'선생인데,
역시 정리의 제왕 '기하'를 모르면 학원에 오지도 말라고 했다는 명언이 남는다. 

호메르스의 '일리아스'나 '오딧세이아', 헤시오도스의 '일과 나날' 등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차용하면서 설명하다가,
그래도 안 되면 '우화'를 지어내서 설명을 한다.
역시 설명에는 '유추'를 활용한 <비유>로서 하는 것이 최고다.
예수님도 비유로서 말할지니 귀가 있는 자는 알아 들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가장 좋은 나라를 만들 것인가? 가 이 글의 주제일 것인데,
남녀평등도 그 당시엔 거부감을 불렀겠지만,
처자공유, 사유재산 금지, 철인 왕의 통치, 민주제에 대한 불신의 의혹 등은 현대에 생각할 때 지나치게 좁은 세상에 살았던 플라톤의 경험부족을 읽을 수도 있고, 역사 기록이 남지 않았던 시대의 해석으로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게스의 반지'라는 '절대 권력'에 대한 비유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반지를 돌리면 보이지 않게 되는 상황일 때, 곧 권력자가 되면 무소불위의 힘을 얻게 될 때,
인간은 얼마나 포악해질 수 있을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 좋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하여 어떤 꾀를 생각할 수 있는가.
결국 이 책에서 요약한 플라톤의 <국가>는 '정의'가 되겠다.
인간은 어떻게 살면 <잘 살 수> 있는가, 이것이 '정의'다. '옳음'의 이데아를 좇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
올바른 사람은 <이성과 기개와 욕망>이 조화를 이룰 것이라는 것.
그렇다면 <잘 살 수 있다>는 것. 

그렇지만, 당시의 소피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잘살기>에만 골몰하는 인간들에게 이 주제는 영원한 과제가 아닐는지...
그리고, 그리스 신화 속의 온갖 불륜과 부정을 저지르는 신들의 모습을 '시'로 표현한 <문학>은 가르치기 어렵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예술에 대한 검열> 까지 불거지는 플라톤에 대한 오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라.'고 가르쳤던 방식 그대로,
대화를 통하여 아이가 저절로 순산되도록 도와주는 산파처럼,
플라톤의 이야기도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를 들려주려고 한다는데...
과연 그의 장광설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아니 길을 잃었는지 어쨌는지 모르더라도 그의 이야기 속에 노정된 오솔길들에서 <올바름>, <정의>를 만나게 될 일은 <두려움>과 <설렘> 사이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1-01-30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 번 <향연>이 수록된 서광사에서 나온 플라톤의 책을 읽으려다가 포기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수준 하향하여 쉬운 개설서를 읽고 다시 번역 원전에 도전하려고 해요.
글샘님이 읽으신 이 책도 꼭 읽어봐야겠어요. <국가>와 관련되어 읽으면 좋은 책 알게 되었네요. ^^

글샘 2011-02-01 21:53   좋아요 0 | URL
아마도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시려면 이 책을 먼저 보시는 게 좋겠네요.
<국가, 정체>도 전혀 어렵지 않은 책이더군요. 아마도 이 책으로 제대로 오리엔테이션을 받아 그럴 듯...
 

예전에 중학교 교과서에 '파랑새'란 시가 실렸더랬다.
한하운은 '한센씨 병' 환자였단다. 나환자라고도 하지.
경상도 사투리로 '문둥이'라고 하던 병이었다.
하늘이 내린 병이라고 해서 '천형'이라던 문둥병은
이제 거의 발병이 많지 않은 질병이 되었지만,
못먹고 헐벗던 시절엔 가끔씩 이 병에 걸리곤 했단다. 

그러면 마을에서도 격리되고 이 세상에서 버림받아 떠돌아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마을에서도 박대받을 일만 남은 인생들에게 삶이란 죽음보다 못한 것이었을 게다.
일제는 이 나환자들을 전라남도 고흥의 '소록도'란 섬에 격리할 생각을 하고 모든 나환자를 거기로 모았다.
질병 치료보다는 격리를 위한 목적이 크겠지.
그곳의 참상을 그린 소설로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이란 작품도 있다. 

나병은 느닷없이 살이 썩고, 신경이 삭으면서 손가락 발가락이 짓물러 덜어지고
눈썹이 빠지면서 얼굴에 버짐같은 것이 피는 병이다.
그러자니 먼 길을 걷노라면 발가락 몇 개가 떨어져 나가기도 하는 힘든 삶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한하운의 노래는 목이 메인 울음을 대신한 시였을 것이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파랑새)

아주 간단한 시다.
그렇지만, '파랑새'란 한 단어로 '나병환자로서의 비통, 병고, 저주의 사슬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존재'를 형상화 했다.
나환자에게는 성한 인간들의 세상이 생지옥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파랑새가 되면 푸른 하늘, 푸른 들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으리라는 소망이 담겼다.

거기서 '푸른 노래, 푸른 울음'을 자유로이 울겠다는 것은,
현실이 얼마나 부자유스러운지를 절절히 읊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의 시 중에서 노래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바로 <보리피리>다.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매 연이 <보리피리 불며~~ 그리워>로 되어 있다. 피 - ㄹ 닐니리는 후렴이지.  

오로지 '그리움'만이 노래되어 있다.
고향의 봄언덕, 어린 시절... 다신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니 얼마나 그리울까.
'인환의 거리'는 '임금이 살던 경기 지역'에서 온 말로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이다.
우리는 조용한 곳에서 쉬기를 좋아하지만,
또 깡촌에 가서 처박혀 있으면 도시가 그리울 것이다. 

마지막 연에
방랑한 산하가 <얼마나(기幾)> 많았는지...
그 눈물 지으며 넘던 언덕은 얼마나 많았던지...
형상화 되어 있다. 
이 시로 한하운은 <보리피리 시인>이란 별칭을 갖게 된다.

기산하의 '기'는 중국어 또는 한문에서 '몇'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의문사로 보면 된다. 중국어로 '지'로 읽는다.
몇 명~ 이러면 '지 웨이 幾位' 이렇게...
그런데, 이 한자의 쓰임이 특이한 것이 있다.
수학에서 쓰이는 '기하 幾何'란 말.
'몇 기'에 '어찌 하'가 쓰인다. 붙이면 '몇어찌'가 된다.
이 말은 뜻으로 풀이하면 안 된다.
기하라는 말은 기하학의 영어 어원 'geometry'를 음차한 것으로 봐야 된다.
소리만 빌린 것이지.
'지오메트리'에서 '지오'만 따온 것이다. 그걸 한자로 '기하'로 쓴 것을 일본에서 다시 '기하'로 쓴 거지. 

한하운은 이런 말을 남겼다.

   
  "청운의 뜻이 어허, 천형의 문둥이가 되고 보니 지금 내가 바라보는 세계란 오히려 아름답고 한이 많다.
아랑곳없이 다 잊은 듯 산천초목과 인간의 애환이 다시금 아름다워 스스로 나의 통곡이 흐느겨진다.
나를 사로잡는 것,
그것은 울음 속에서 터지는 모든 운율이 나의 노래가 되고 피리가 되어 조국땅 흙 속에 가라앉을 것이다."
 
   

다음은 <전라도 길>이란 시를 읽어 보자.
소록도가 전라남도 고흥에 있어서 생긴 시일 것이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전라도 길 -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 -)

포장도로가 아닌 <붉은 황톳길>은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이 걸어야 하는 유형(流刑)의 길이다.
숨막히는 더위도 문둥병을 얻은 화자의 운명적인 고통을 더욱 강화한다. 

'우리들 문둥이끼리'란 표현에서 동병상련의 애틋함이 느껴진다.
하루를 걷는 '쑤세미 같은 해'는 '거칠고 힘든 하루 '가 저물어감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들의 '쩔름거리며' 걷는 길은 문둥병을 가진 화자가 감내해야 하는 운명적 고통이 담긴 표현이다.

지까다비는 일본식 '작업화'다.
걷다보니 '발가락이 없어졌다'는 표현이 오히려 담담하다.
그래서 슬픔이 더 짙은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벗어날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슬픈 운명을 이렇게 표현하니 더 슬프구나.
가도가도 천 리... 아~ 이 먼 길은 그저 고단한 길이 아니라,
천형의 병을 앓고있는 이의 바스락 바스라질 듯한 가슴이 그대로 묻어난다. 

절망이 극도로 절제되어 있지만, 그 슬픔이 금세라도 묻어날 것 같다.
비극적 운명은 떠돌이(유랑)의 여정에 비유되어 형상화되고 있다. 

사람이 '잘사는' 일과 '잘 사는' 일이 있다.
앞의 것은 그저 풍요롭게 사는 것이고, 뒤의 것은 올바르게 사는 것이다.
잘살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쓰지는 않아야 하겠다.
잘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과제가 아닐까? 

이런 시를 읽으면서,
인간답게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한번 되돌아 보자꾸나.


댓글(1) 먼댓글(1)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ala24 2014-08-19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지금은 잊혀진 나병, 소록도 등 그 시대의 아픔이 이렇게 아름다운 시로써 표현되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네요. 가슴이 찡하게 젖어오는 듯
 
우리 함께 죽음을 이야기하자 1218 보물창고 3
게어트루트 엔눌라트 지음, 이옥용 옮김 / 보물창고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참 독특한 주제의 책이다.
죽음 - 은 삶의 반댓말처럼 여겨지기 쉽다.
태어남 - 을 서양사람들은 '창조'처럼 여기지만, 동양사람들은 '연속'으로 여긴다.
원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있던 존재가 열 달 전에 수정이 되어 피가 엉겼고,
열 달 자라 탄생하는 것으로... 

그렇게 본다면,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다.
삶의 끄트머리가 죽음이라면, 삶이 다하면 삶이 끝나야 한다.
정말 그렇다면, 죽음에 대하여 왜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느냐 이거다. 

삶의 반댓말, 또는 삶의 끝이 죽음인 것이 아니라,
삶은 죽음이라는 형식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물론 끝도 없이 이어지지는 않는다. 스르르 희미해 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죽음은 삶에서 스르르 풀려진 물감마냥 번져가서
남은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고 애도가 필요하기도 하고, 치료가 필요한 경우도 생기게 한다. 

죽음은 슬픔이기도 하고, 깨달음이기도 하다.
여느 죽음은 슬픔이지만, 안중근이나 윤봉길의 죽음은 깨달음과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는 것이다. 

어른들도 죽음을 이해하는 양식이 다양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워하는데,
하물며, 아직 세상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죽음은 그저 '없어짐'과는 또다른 경험일 것이다.
그것은 '상실'에서 오는 '두려움' '소외감'같은 것일 수도 있고, 더 크게는 삶에 대한 '자신없음'이나 '죄책감'까지 갖게 될 수도 있다. 

아직 삶의 세계에 명확하게 발을 들여놓지 않은 아이들의 상상력 속에서
죽음의 세계는 자신의 존재조차 확신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으리라. 

그림 형제의 동화에 나온다는 '작은 눈물단지'는 아이들의 상상력을 헤아리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하나밖에 없는 아이를 잃고 한없이 괴로워하는 한 어머니.
죽은 아이는 엄마에게 제발 그만 울라고 애원한다.
아이의 눈물단지가 꽉 찼기 때문.
엄마가 자꾸 울면, 눈물단지는 넘칠 것이고, 자신이 무덤 속에서 편히 쉬지 못할 것이라고 아이는 말한다.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가 서로 의존하고 결합되어 있음을 인정하지만,
산 사람이 삶에 몰두해 열심히 살아가려고 할 때,
비로소 죽은 자들도 자신의 자리를 찾고 고이 잠들 것을 상상한 이야기다. 

   
 

이를 닦고 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났어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요.
엄마가 내게 왔어요.
난 막 옷을 입으려고 했지요.
하지만 엄마는 내 침대에 누웠어요.
나는 엄마 품에 꼭 안겼어요.
그러자 엄마가 말해줬어요.
아빠가 죽었다고요.
그래서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어요. 

 
   

아이들이 느끼는 죽음은 상상 속에서 부풀어 오를 수도 있지만, 객관적 사건일 수도 있다.
아이들의 충분한 애도를 위하여 상담 교실이 열리는 곳도 많다고 한다.
아이들만의 세계에 들어가서 바라본 죽음의 세계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 준다. 

아이들이 죽음을 대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은,
어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어른들이 더 슬플지도 모른다.
오랜 기간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상황을 좀더 자세히 알았기 때문에...
그렇지만, 애도는 필요하고, 이해받기도 필요하다. 

이런 책들은 특정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심한 경우 사망 후 5년 정도까지 큰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더 오랜동안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옆에서 같이 애도해 주는 일도 필요하고,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마음도 필요한데, 이런 책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