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죽음'이라는 좀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 해 보자. 
얼마 전에 장석남의 <번짐>이라는 시에서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이렇게 읊은 구절을 읽을 기억이 나는지...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느 순간, 숨이 끊어지고 심장이 멎는 순간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의학적으로 죽음의 순간을 결정하는 것에도 여러 가지 입장이 있단다.
그것조차도 <주관적>으로 판단하게 되는 거야.
사람은 의식이 없이도 그러니까 뇌가 활동하지 않는 뇌사상태일 때에도 청각같은 것은 살아있대.
감각을 한다는 것이지.
그러다가 호흡이 멈추면 사람이 죽은 거냐면 
호흡이 멈추고도 심장이 뛰고 있는 경우도 있단다.
한국의 '법'은 '사망'을 '심장사'로 결정한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심장이 멈췄을 때를 죽음으로 친다, 고 주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지. 
그래서 '뇌사'이 경우, 뇌는 멈췄으나 숨을 쉬고 심장이 뛴다면 살아있는 사람 취급을 하는 거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으니,
그것을 <번짐>으로 표현한 장석남도 멋지구나.
죽음의 순간은 그래서 번져 나가서 고인의 삶을 환하게 밝힌다.
죽고 나면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었는지 욕먹을 사람이었는지 평가받을 수도 있지.
죽음 이후에 안타까움을 많이 남기는 사람이 있고,
후련함을 남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죽음에 대한 절창은 뭐니뭐니해도 천상병의 <귀천>이 아닐까 해.
우선 한번 읽어 보자.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

 

아주 짤막한 시다.
제목도 <하늘로 돌아가리>하는 뜻의 귀천이야.
천상병은 서울대 상대 재학 중, 1967년 동베를린사건(동백림사건)을 날조(거짓으로 지어냄)한
박정희 군사 독재정권의 피해자란다.
감옥에 다녀온 후 바보가 되어버린 바보 시인이지.
그래도 특이하게 결혼을 하여 아내가 <귀천>이란 찻집을 내서 먹여 살리곤 했다더구나. 

고문을 받으면서 죽음을 생각했던 것일까?
죽는 일은 <원래 우리가 온 그곳>으로 돌아가는 일일 뿐이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니...

인생을 <아침 이슬>에 비유하곤 한다.
풀잎에 가득 매달렸던 이슬은 햇살이 와 닿으면 금세 스러져 버리는 허망한 것이거든.
그래서 구운몽에서도 금강경의 한 구절을 빌려서 이렇게 노래했잖아.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고,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니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하라.

인간의 모든 일은 꿈 같고, 허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
이슬 같고 또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러함을 볼 것이다. 

삶은 뭐 엄청 장엄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우리가 왔던 어던 기슭에서 놀던 것이래.
그러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가면 되는 가벼운 것이지. 

3연이 절창이야. 삶은 곧 <소풍>과 같다는 발상.
비유는 '유사한 점'을 찾는 것이잖아.
소풍은 어때?
소풍을 2박 3일 가는 일은 없잖아.
금세 갔다 오는 것이고,
피곤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은 그런 거잖아.
재미도 조금 있지만, 사실은 시시하고 뭐 좀 그런 것. 
그리고 순진한 아이들 시절에나 가는 그런 것. 

이렇게 인생을 다 초월한 것 같은 관점을 <달관>한 것 같다고 표현하지.
이 시에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것도 한때일 뿐,
곧 스러져버리고 마는 존재로 '이슬과 노을'을 들고 있단다.
인간도 그것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지. 

이렇게 '유사성'을 가져다 대는 것을 빗댄다고 하고, 어려운 말로 비유라고 해. 

실제로 화자의 삶은 가난과 고통의 연속이었는데 마지막에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하고 표현했어.
삶에 대한 화자의 긍정적 태도가 잘 드러난 표현이라고 봐야겠지.
이 시의 주제라면, <삶에 대한 달관이 드러난 죽음에 대한 관조>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이 시가 감동을 준다면 어떤 면에설까?
시인의 인생이 비극적이었는데도 <아름다웠던 소풍>으로 미화하는 데 있을까?
시어의 단순성과 소박함이 명상적이고 관조적인 시인의 서정을 더 북돋우고 있는 것 같다.

이 시에서 죽음과 삶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과연 '죽음'의 반대말이 '삶'인 것일까?
아니지?
여기서 죽음은 삶과 분리된, 구분된, 구별된 개념이 아니란다.
우리는 원래 어디에선가부터 인연을 맺어 왔고,
이승에 잠시 태어나 삶을 살았고,
삶이 끝나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불교의 윤회설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단다.
이 시의 화자가 죽음을 맞는다면, 글쎄, 슬프다기 보다 평화로운 얼굴로 맞을 것 같기도 하구나. 

다음엔 황동규의 <풍장>이란 시를 보자.
사람이 죽으면 장례의 풍습엔 여러 가지가 있대.
한국은 주로 매장과 화장을 하지만, 요즘엔 수목장이라고 나무 밑에 뼛가루를 묻는 일도 흔다단다.
몽골 사람들은 '조장'을 하기도 한대. 들판에 냅두면 새들이 와서 처분해 주는 것이지.
이 시의 풍장은 '풍화'되도록 시신을 자연에 내버리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 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황동규, 풍장 1) 

'풍장'은 한국의 '법'에 따르면 금지되어 있단다.
법을 위반하면 처벌을 받게 되어있지. 그래서 시신을 들판이나 어디 무인도에 가져다 버리면 벌을 받는다.
좀 웃기지 않니?
어차피 시신은 아무 쓸모도 없는 건데,
유언에 따라 산에 묻든, 바다에 뿌리든, 나무 밑에 묻든, 무인도에 내버리든...
인간이 얼마나 주관적인 존재인지 알 수 있단다.   

그런데도 죽으면 풍장시켜 달라고 한 것은, 그만큼 죽어서라도 자유를 맛보고 싶다는 이야기지.
사람이 죽으면 얼마나 성가신지 몰라.
그냥 가져다 묻는 게 아니란다.
무조건 의사의 <사망진단>이 떨어져야 하고,
그 뒤에 관에 넣을 수 있고, 장례식이란 거추장스런 절차를 거쳐야 하고,
마지막이란 이름으로 고인의 지인들이 와서 대접도 해야 하고...
손님이 오면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곡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2,3일 지나서 관을 싣고 화장장으로 가서 화장을 하든, 매장을 하든 해야 한단다.
화장한 것도 일정 기간 항아리에 넣어서 납골당에 모셔야 한다니 참, 어처구니가 없다. 

그래서 화자는 그저 홀가분하게 죽고 싶다는 욕망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
옷도 전자시계도 그대로 달아 놓으란 이야기는 아무런 꾸밈없이 죽고 싶다는 희망이다.
사람이 죽으면 새로 '수의'라고 해서 옷도 삼베로 입힌다. 당연히 돈도 비싸지.

군산과 곰소는 전라북도의 지명이다.
무인도에 가서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살을 말리'고 싶은 화자의 소망.
세상의 구속, 질곡(수갑과 족쇄를 뜻하는 말, 구속과 비슷한 말, 어렵지만 꼭 알아 둬야할 말)이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화장도 해탈도 없이' 가고 싶은 화자는 세속의 가식적인 장례가 무의미함을 드러낸단다.
죽고 나서 종교적으로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도 모두 '니미 뽕(영화 글러브의 용어 ㅋ)'이란 외침이기도 하다.

죽어서도 가죽가방 안에서 다리 오그리고 있다가,
뭍에 배가 닿는 기척에 시간을 떨어뜨리겠다는 등의 표현으로 보면,
죽어서도 아주 사라지는 것 같지는 않은 삶의 연관성을 조금 드러내고 있단다.
그렇지만, 육신에 대하여 지나치게 형식적인 장례에 대하여,
인간의 삶은 과도하게 겉치레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천상병의 <귀천>이 순수한 아이가 깔깔거리듯 읊은 시라면,
황동규의 <풍장1>은 얽매이는 것이 너무도 많은 세상사가 귀찮아진 어른이 남긴 시 같지.
주제라면 <자유로운 죽음을 맞고 싶은 의지> 정도면 되겠지.
죽음이란 현실에서의 존재가 소멸되어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이란 의식도 있고 말이야. 
'바람'이란 자연에 묻어 가고픈, <순환>의 의지가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죽어서라도 자유롭고 싶다는 것을 보아,
살아서의 현실이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 것이었던지 추측해 볼 수 있다.
황동규의 시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를 전에 배운 적 있잖아?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고은, 문의 마을에 가서)

이 시는 시인이 동료 시인의 모친상을 맞아 찾아간 충북 청원군에 있는 문의마을에서
죽음과 삶에 대한 깨달음을 경건하고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는 시란다. 

우리는 보통 '죽음'이라고 하면 무서운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서프라이즈 같은 데서는 '귀신'이 뭔가 신령스런 노릇을 한다고 설정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생명체는 드래곤 볼 일곱 개를 모으기 전까지는 모두 유한한 존재다.
죽음은 삶의 <번짐>이기도 하고,
그래서 또 죽음은 <소풍>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자유로워지고 싶은 <절차>로서의 풍장을 소망하기도 하고 했던 거지.  

이 시에서 문의(文義) 마을은 죽음과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공간으로 설정되고 있다.
시골마을에 가서,
거기까지 닿은 길이 꼬불꼬불 찾아갔는데,
거기서 또 산길로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보면서,
아, 이런 유사성이 있구나... 하는 발견을 적은 거야.

동료 시인의 초상집이라고 찾아가는데, 힘들게 묻고 또 물어가면서 꼬불꼬불 찾아간 길 끝에 상가(喪家)가 있겠지.
그런데, 그 집이 목적지였지만,
그 목적지의 옆과 뒤에는 다시 길이 몇 갈래 펼쳐져 있었던 걸 보면서,
아, 삶의 종착역까지 우리는 힘겹게 꼬불꼬불 살아 가겠지.
그렇지만 종착역에 가 보면, 거기가 끝이 아닐 거야.
거기서 시작되는 길이 다시 몇 갈래 펼쳐져 있을 거야.
이런 오묘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시인들이란다. 

여기서 <길>은 중의(重義)적으로 쓰였지. 두 가지 뜻으로...
하나는 화자가 걸은 길이고, 또 하나는 인생길이고... 

죽은 뒤에도 길이 이어진단다.
대신에 삶의 길은 시끌벅적 소란스러운 그것이지만,
죽음의 길은 길이 <적막>하겠지.
<귀를 닫고> 쓸쓸하고 비정한 길은 <추운 쪽>으로 뻗어 있단다.
그 <적막하고 추운 길>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길이 되겠지. 

죽은 자는 그렇게 떠나보내고,
그러나,
살아있는 자들은 그 길에서 돌아가 집으로 간다.
거기서 고인의 유품을 태워 재를 날리지.
그러다 문득 팔짱 끼고 바라본 산.
이제까지 <먼 산>이라 생각했던 앞산이 <너무 가깝게> 느껴진다.
초상을 치르는 과정에서 <삶과 죽음>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느낌을 갖게 되겠지.

눈에게 묻는다.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 하고.
죽은 이의 무덤을 눈이 포근하게 덮어 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눈은 살고 있는 사람의 집도, 길도 다 덮어주고 있기도 하잖아.
그러니, 눈은 죽음과 삶을 모두 덮어주는,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포용하고 안아주는> 그런 시어라고 보면 될 것 같아. 

2연은 마찬가지 모티프로 보면 될 거 같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은
삶이 번져 죽음이 되는 것과 한치도 다름 없는 표현이구나.
죽음을 환영하는 사람은 없기에, 사절(사양)하다가,
어쩔 수 없이 죽게 되었음인데,  
저만큼(거리감) 가다가 삶을 되돌아보게 되겠지. 

죽음의 위치에서 삶을 되돌아 보니,
아, 참으로 모든 것은 <낮>구나.
참으로 보잘것이 없구나.
살면서 그토록 애걸복걸 매달렸던, 인간관계, 명예, 재산, 지위, 그 모든 것들이...
참으로 <낮은 것>이었구나.
이렇게 한 순간에 <겸허함>을 되찾게 한 공간이 <문의 마을>이었다. 

거기에 눈이 쌓인다. 
살면서 참으로 <돌에 맞기 싫어> 그렇게 애를 태웠던 날들이었는데,
인간관계에서, 명예, 재산, 지위, 그 모든 것들에서 돌을 맞기 싫어 공을 들였는데,
삶을 떠나고 보니,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이 시의 주제 의식은 <삶과 죽음이 하나의 실체>라는 깨달음이 되겠다.
죽음을 통해 삶의 경건함을 깨닫고, 겸허함을 되찾는다는 이야기겠다. 

죽음은 참 멀리 있는 것 같지만, 누구도 비껴갈 수는 없는 것이겠지.
이런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서 다양한 죽음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저 부유하게 <잘살기>만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적인 <잘 살기>를 위해 노력할 것인가?
이런 철학적 사색의 기회를 갖는 것도 좋은 일일 게다. 

입춘이 지나더니 날이 많이 풀렸다.
시간은 앞으로만 가는 물질성을 가진 존재라고 그러지.
사색하는 인간의 삶이 온 건물에 울리는 파이프오르간 소리처럼 웅장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단다.
사색으로 얻어진 자기의 입장, 신념, 소신 이런 것들이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단다.
아빠의 시 읽기가 지향하는 바가 그런 것이기도 하고...
환절기일수록 감기 조심하렴.


댓글(2) 먼댓글(1)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1-02-06 0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죽가방 속에 다리 오그리고 누워 있는' 모습이 시인의 말마따나 편안하게 느껴지는 밤이네요.
덕분에 좀 편안해졌습니다. 설은 잘 쇠셨죠 글샘님?^^

글샘 2011-02-06 23:05   좋아요 0 | URL
ㅎㅎ 이런 걸 편안해 하시는군요.
죽음을 생각하면 삶이 편안한 날도 있죠.
후와 님도 설 잘 쇠셨겠죠?
 
플라톤의 국가·정체(政體) - 개정 증보판 헬라스 고전 출판 기획 시리즈 1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 서광사 / 200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전을 읽는 일은 등산으로 비유하자면 '지리산 종주'의 경험과 같다.
삼박 사일 정도 코스를 꼬박 걷고 난 흐뭇함이랄까.
그렇지만 등산을 마치고 소감을 남기거나 사진을 제대로 찍은 것은 없다.
사진도 찍고 글도 쓰는 것은 가벼운 하이킹을 한 뒤에 여유롭게 즐기는 여기다. 
그래서 리뷰 제목도 저 따위로 적을 수밖에 없음을 핑계댄다.

플라톤의 <국가, 정체>를 마치 어린 아기가 발가락 힘으로 몸을 밀며 나가듯 읽었지만,
종주했다는 느낌 외에 어떤 감상을 남기기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는 느낌이다.
어쩌면, <정치학 개론>을 읽고 독후감을 쓰기가 민망한 뭐, 그런 기분이랄까. 

자꾸 비유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본질이 한 눈에 확 꿰이는 그런 책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고,
한 번 읽었다고 플라톤의 생각을 한 쾌에 꿰인 북어마냥 나열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말을 하면 내 생각을 놓치거나 엉뚱한 생각을 적을 수밖에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배운 것이라고는 <국가>는 '나라'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정도. ^^
그래서 관습에 따라 제목은 <국가>로 적었지만, 본문에서는 이해에 도움을 주도록 <나라>라는 용어를 쓴다.
아무래도 <국가>라는 용어에는 <근대 국가>의 폭력적 냄새가 짙게 배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플라톤이 이런 책을 남긴 시절만 하더라도 철학과 역사와 문학의 구별이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은 분절적으로 '문, 사, 철'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근대가 폭력적으로 범주를 나눈 개념이고,
플라톤이 저술하던 시기, 제대로 된 역사는 남지 않았고, 신화를 기록한 서사시라는 문학이 책의 개념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플라톤이 주로 인용할 수밖에 없는 근거는 그리스 신화라든가, 호메로스 등의 작품이다. 

비유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으면서도, 이 글 전체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주로 전달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희곡을 읽는 듯한 기분을 버릴 수 없다.
그래서 글을 읽는 맛은 편안한 쪽이다.
다만 700쪽이 넘는 분량이 독자를 압도하는 것만 제외한다면 난코스는 별로 없는 편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청소년 클래식으로 장영란의 책을 읽은 것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리산이 어떻게 생겼는지, 중간중간 어떤 휴게소가 있는지를 알고 걷는 일과,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저 걷는 일은 초행길에선 큰 차이가 있다.
물론 해마다 지리산을 오르는 이에게는 무념무상의 행군이 더 큰 의미를 전수할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이 책을 읽었다는 데 의미를 둔다.
국가, 정체는 총 10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올바르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거시적으로 <나라>의 차원에서 설명한다는 것 정도 트레일의 개략을 남기면 되겠다. 

그리고 왜 시를 가르치지 말자고 했는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으니 확실히 이해가 간다.
전체는 제대로 보지 못하지만, 이렇게 하나라도 기억에 남는 것이 초심자에겐 심리적 위안이다. ㅋㅋ 
168쪽의 우라노스, 크로노스, 제우스 등의 신들이 서로 다투고 죽이는 엽기적 행각을 읽어 보면 음... 그런 것들은 가르치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나도 든다. 막장 드라마에 <15세 미만 관람 불가> 딱지가 붙는 거나 마찬가지로 생각하면 되겠다. 

지혜, 용기, 절제, 그리고 정의가 계층에게 구현되어야 나라가 <올바름>을 이룰 수 있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올바르게 사는 일> <잘 사는 일>의 거시적 버전의 비유라고 했으니,
개인도 관리자로서의 지혜, 지킴이로서의 용기,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절제, 그리고 정의에 대한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정도는 읽었다. 

그의 '철인 통치'는 어쩌면 쇼펜하우어의 <사색>과 연관될 수도 있을 듯 하다.
지혜로운 자,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면 반드시 <사색>의 파이프오르간이 저음으로 깔리는 <나라 polis>를 만들 수 있고, 그런 <정체 politeia>를 확립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태양을 '좋음'의 유비라고 하였고,
인식을 <상상, 짐작 - 믿음, 확신 - 추론적 사고 - 지성에 의한 앎, 인식>의 선분에 비유하였으며,
동굴의 비유로서 실재계와 인식의 오류를 표현하는 등 다양한 비유를 활용하는 것도 재미있는 표현이다. 

잘못된 정체의 하나로 민주제를 들고 있는 점도 재미있다.
민주주의를 만병통치약으로 삼고 팔아먹는 약장수를 믿는 넘이 어리석다.
절대선과 다수결 사이의 부조리를 플라톤은 예견했던 것이다.
숫자가 많은 우중에 의하여 헝클어진 정치는 참주 정체를 낳기도 하는 법.
철인 정치에 대한 그의 순정이 느껴진다. 

그리고, 수학과 천문학 등에 대한 관심을 결코 철학적 관심과 별개로 떼어 생각하지 않는 통합적 관점이 현대처럼 분파적인 학문의 '통섭'의 노력을 미리 내다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올바르게 사는 삶>은 <인간들에게 받는 상> 뿐만 아니라 <신들에게서 받는 상>까지 이야기한다. 

영리하며 올바르지 못한 자들은
출발점에서는 잘 달리나 반환점부터는 그러지 못하는 달리기 선수들이 하는 바로 그런 짓을 하지 않는가.
이들은 처음에는 날쌔게 출발하나,
결국엔 웃음거리가 되고 마는데,
어깨 위로 귀가 처진 짐승 꼴을 하고서 화관도 두르지 못한 채 경주로를 빠져 나가네.
반면에 진짜로 달리기를 잘 하는 사람은 끝까지 달리게 되어 상도 받고 화관도 두르게 되네.
올바른 사람들의 겨우에도 대개는 이렇게 되지 않는가.
그들은 모든 행위나 교제 그리고 생애의 끝에 이르러, 좋은 평판도 얻게 되며 인간들한테서도 상을 받게 되겠지.(650)

그 뒤엔 마치 불교 설화 속의 '극락과 지옥'이나 단테가 이야기한 '천국과 지옥'처럼 인과응보의 결과를 받는 에르의 이야기가 덧붙어 있는데, 어찌 보면 후대에 끼워 넣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야기가 어수선해 보이기도 한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낳은 치밀한 논거에 따른 증명이 이렇게 두꺼운 책으로 아직도 남아있다는 사실이 신비로울 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실 2011-02-02 0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학 개론 읽고 독후감 쓰기 민망한....ㅋㅋ 그런 느낌 알아요.
지리산 종주 축하드립니다. 근데 종주 해보신거죠? 안해 봤으면 말을 하지마~~~~
편안한 설 명절 되세요^*^

글샘 2011-02-07 01:08   좋아요 0 | URL
이제 플라톤 다 읽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 있습니다.
플라톤보단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이 전공과 관련이 있으니 훨씬 재미있네요. ^^
 

내일이면 설날이다.
원래 음력설을 쇠던 것이 조선의 풍습이었겠지만,
을미사변 이후 개혁을 한답시고 양력만 쓰라고 억압을 하니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구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이러고 놀았다.
까치가 왜놈을 지칭하게 된 사연이야 정확하지 않지만 그런 사연이야 늘 있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독재를 하면서 구습을 쓸어버린다고 해서 음력설을 폐지했다.
법적으로 휴일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양력설(신정)은 쉬고, 음력설(구정)엔 출근을 하는 쇼가 벌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음력설날 아침 일찍 차례를 올리고 출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는 '민속의 날'이란 희한한 이름으로 설날이 부활되었다.
다음 대통령인 노태우는 아예 '설날'과 '추석'을 3일 연휴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자 추석 무렵에는 10월 1일 국군의 날, 3일 개천절, 9일 한글날이 원래 공휴일이어서
대기업의 불평이 많아지자 국군의 날과 한글날은 공휴일에서 제외시켜 버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휴일 하나에도 역사적 굴곡이 담겨 있단다. 

오늘은 가난하던 시절의 모습이 잘 각인된 시를 몇 편 보자.
뭐, 지금이라고 넉넉하진 못한 살림들도 많지만,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궁핍한 나라들 축에 들었으니 그런 상황을 그린 시들이 많다. 

우선 박용래의 '시락죽(시래기죽)'을 읽어 보자.

바닥난 통파
움속의 降雪(강설)
꼭두새벽부터
降雪(강설)을 쓸고
동짓날
시락죽이나
끓이며
휘젓고 있을
귀뿌리 가린
후살이의
木手巾(목수건) (박용래, 시락죽) 

팥죽을 끓여 먹던 풍습이 있던 날, 동짓날. 양력 12월 22일.
통파(대파)가 바닥나고 만 저장고(움) 속에 눈이 내렸다. 

 

꼭두 새벽부터 마당의 눈을 쓸고 시락죽(팥죽이 아닌 시래기를 넣고 끓이는)이나 끓여야 하는
후살이하는 여인(이 시에서는 박용래의 누이를 칭한다)의 고단한 삶을
목수건(무명으로 만든 수건)에 집약시켰다.  

박용래는 간호사로 일하는 아내를 대신해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아이들을 돌보았다고 할 정도로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는 평이 많다. 
이 시는 짧고 간결한, 지극히 절제된 시어들의 나열 속에서 느껴지는
후처 사는 여동생의 가난함을 안쓰러이 지켜보는 오라비의 아픈 가슴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동짓날 / 시락죽이나 / 끓이며 / 휘젓고 있을... 후살이의 / 목수건. 

그저 마음이 아프다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마음은 분명히 두뇌에서 인식하는 것인데, 실제로 가슴에 통증이 느껴진다.
다음엔 같은 시인의 '저녁눈'을 읽어 보자.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박용래, 저녁눈)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 이야기다.
눈발이 '붐빈다'고 했다.
눈송이가 바람에 설렁설렁 날리면서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휘날리는 풍경을 이렇게 잡아내기도 쉽지 않다.
박용래의 <소묘법>이 잘 드러난 시다.
마치 동영상으로 마구간 호롱불에 붐비며 휘날리는 눈송이,
그래서 조랑말 발굽 아래 붐비는 눈송이가,
여물 써는 소리와 함께, 마당 가 빈터로 몰려 다니며 붐비는 모습이 비쳐지는 듯한 느낌이 잘 살아 있다.
뭔가 마음 속이 흐뭇한 풍경이다. 설날이라도 된 것일까? 

요즘 시인 중에 함민복이란 시인이 있다.
그는 강화도 동막골(막다른 동네란 뜻)이란 곳에 산다.
시를 쓰기만 하여 먹고 사는 사람이라 가난하다.
그렇지만 그는 가난을 천직인 양 그저 그렇게 산다.
자기는 가난하다고 시를 쓰며 산다.
그렇지만, 돈 없어서 죽겠다는 소리 안 내고 산다.  

 

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함민복, 긍정적인 밥)

그에게 시는 곧 '밥'이다.
그런데 시 한 편 써봤자 3만 원 밖에 안 준다.
하루에 시가 한 편씩 나오는 것도 아닌데...
참 보잘것 없는 액수다. 
그런데도 화자는 그 '불행'을 '행복'으로 금세 바꿀 줄 아는 마법의 혜안을 가졌다.
쌀이 두 말(20되)이라고 생각하면 금세 적은 돈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 든든한 마음이 된다는 것이다. 

시집 한 권을 쓰려면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일이십 년이 걸린다.
그런데 그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참 보잘것 없는 액수다.(요즘엔 칠천 원 정도 한다.)
그렇지만 삼천 원이면 국밥이 한 그릇인데 하고 생각해 보면,
자신의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반성해 보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다. 

아, 그런 사람이 달인이 아닐까?
가고 가도 계속 길 위에 놓인 사람.
계속 가고 있는 그런 사람. 

시집 한 권 팔리면 삼백 원 남는다고 속이 상하다가도,
박리(낮은 이윤)여서 돈이 안 되니 기분 나쁘다가도,
그 돈이면 소금 한 됫박 살 수 있으니,
소금은 세상을 상하지 않게 하는 존재고, 또 자신의 속도 상하지 않게 해 준다는 이야기다. 

부정적인 현실을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마음의 운용'을 아는 지혜의 눈이 본 세상 이야기다.
세상은 <그들>이 잘못해서 이렇게 더럽다고 욕하면 항상 부정적으로 보인다.
불만투성이로 살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는 것은 <나>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을 바꿔먹으면 세상은 나름대로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음이다.
그래서 '일체유심조'라고 한 것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한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린 것이고,
세상에 오로지 '나의 마음'만이 있는 것이다.
부정적인 세상이 객관적으로 여기 놓인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 

철학적으로 따지자면, 주관과 객관 같이 복잡한 이야기를 써야 하는 것인데도,
시인은 간단하게 말했다.
세상이 아무리 허름하게 자신을 홀대해도,
자신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반전의 어법을 지닌 시인이다.

그의 시 중에 <눈물은 왜 짠가>는 산문시다.
수필이나 이야기를 한 편 읽고 있는 듯 한데 거기서 느껴지는 감정은 살아있다.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양념장)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 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 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제목이 '눈물은 왜 짠가'이다.
그런데 시이기 때문에 눈물이 짠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자신이 눈물을 흘리게 된 경위를 죽 늘어놓고는,
가난을 탓하거나 세상을 탓하는 논설을 가져다 대지 않고서,
눈물은 왜 짠거야? 이렇게 엉뚱한 말을 하고 있다.  

아,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여 이모네 집에 모셔다 드리려고 가는 길에,
고기를 먹으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는 어머니가 고깃국을 사먹자고 갔던 데서
가난하지만 왜 사랑을 모르겠는가? 하고 울부짖던 신경림의 이웃집 청년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일본의 소설 <우동 한 그릇> 이야기처럼 주인 아저씨는 슬그머니 깍두기나 가져다 주는 인정을 베푸는데,
화자는 가난에 속이 상하고,
돈 없으면 인간적으로 대접받기 어려운 세상에 속이 상하고,
돈 없어도 시 잘 쓸 수 있는 시인이라는 자부심과 자존심에 금이 가서 속이 상한데,
그걸 드러내 놓고 표현할 수 없어 그렇게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눈물은 왜 짠가? 

그렇지만 그의 이 한 마디에
자본이 자본을 낳고,
자본이 인간을 짓누르는 세태의 폭력에 대한 저항의 몸짓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서정주는 <무등을 보며>에서 '가난은 남루(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긍정적으로 표현하려 했지만,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화자가 마음을 긍정적으로 먹고 살려고 해도,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만들고, 상대적 빈곤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사회다.
함민복의 시는 그런 갈등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 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엄마 걱정) 

이 시는 박재삼의 '추억에서'의 '엄마 생각'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은 시다. 

진주 장터 생어물전에는
바닷물이 깔리는 해다진 억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맞댄 골방안 되어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밤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박재삼, 추억에서)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화자는 어린 아이다.
열무 삼십 단이면 참 보잘 것 없는 상업이다.
밭에서 기른 열무를 삼십 단 팔려고 시장에 간 엄마는 해가 져도 안 오신다.  

해가 시들었다는 것은
해가 지는 시각적인 표현을 시들시들한 감각(촉각)으로 표현한 공감각적 표현 되시겠다.
(시각의 촉각화)
해가 지기 시작한 것도 오랜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엄마는 안 오신다.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겼다.
차가운 밥은 뭔가 환영받지 못한다.
따끈한 밥, 고슬고슬한 밥의 풍족함에 비하자면
찬밥 신세는 왠지 서글프고 서럽다.  

빨리 숙제를 하면 엄마를 기다릴 시간과 어두움이 두려워서 천천히 숙제를 한다.
요즘이야 투니버스도 있고, 컴퓨터도 있고 어린이의 친구들이야 얼마든지 있지만,
예전에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 집안엔 아무 것도 없었을 것이다. 

배추 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들리는 것처럼 환청이 들리지만,
실제로는 안 들린다.
여기서도 청각적 심상을 배추 잎이란 시각적 심상으로 표현한 공감각적 심상이 쓰였다.
(청각의 시각화)
공감각적 표현은 언어를 훨씬 다양한 감각을 활용하여 느끼게 함으로써
마음(心) 속에 생생한 상(像)을(심상, 이미지) 떠올리게 한다. 

어린 마음은 어둡고 무서워 진다.
창에는 금이 갔는데... 가난한 집이다.
그리고 유리창 깨진 것을 갈려면 아빠라도 있어야 할 텐데...
아빠도 없는 것 같다.
이제 저녁인데 고요히 빗소리도 들린다.
화자는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며 운다. 

'찬밥'은 '빈방'과 어울려 쓸쓸함을 증폭시킨다.
여기에 쓸쓸함의 심상을 더 강하게 증폭시키는 작용을 하는 시어가 직렬 연결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윗목'이다. 

내 유년을 떠올리면 '찬밥'처럼 '빈방'에서 훌쩍이는 모습이 떠오르는데,
마치 싸늘한 방의 '윗목'같은 느낌이 든다는 거다.   

시인의 어린 시절,
지금도 생각만 하면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가난과 쓸쓸함의 트라우마(무서운 경험으로 인한 심리적 상처)가 떠오른다.
그 트라우마를 상징하는 시어가 바로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인 것이다.

간결한 시어를 통하여 건조한 시 속의 어린이는 참 외롭고 쓸쓸하다.
기형도 시인의 시들은 이렇게 퍼석퍼석한 뻥튀기처럼 쉽게 바스라질 것 같은 촉감을 가지고 있다.
그 뻥튀기는 고소한 냄새나 바스락, 경쾌한 소리를 내는 뻥튀기가 아니다.
칙칙하고 퀴퀴한 냄새와 눅눅함으로 무장한,
가난의 뻥튀기랄까.
다음엔 기형도의 잿빛 시를 몇 편 살펴 볼게.
그의 시에는 이런 개인적 가난의 경험과
시대적 어두움(1980년대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독재시기)도 함께 작용한 것들이어서
참으로 눅눅하고 습기가 가득한 것들이다. 

요즘 나오는 싸구려 커피는 조금 경쾌한 느낌이나마 들지.
청년 실업의 시대가 풍기는 비애가 느껴지는 장기하 노래보다도 훨씬 암울했던 시대를 노래한 어두운 시인 기형도.
그 이름을 기억해 두기 바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옥탑방으로 올라간 칸트
가브리엘레 뮈닉스 지음, 이승은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아버지의 수술을 당하여 두 아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댁으로 간다.
할아버지는 철학자이며, 할머니는 맨날 맛있는 음식이나 하는 평범녀다. 

근데 다락방(제목만 옥탑방이다. ㅋ)에 올라가서 놀던 남매는 특이한 책을 한 권 만난다.
철학 우화 속에는 서른 가지 정도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이야기들은 다양한 철학적 문제제기가 가능한 열린 이야기로 되어 있는데,
아이들은 그 우화를 읽어나가면서 철학적 사고력을 배운다. 

다행히 아버지의 병은 별것이 아닌 것으로 수술이 잘 되었는데,
놀랍게도 철학 우화를 지은 것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머니라는 반전이 숨어 있다.
누구나 철학은 손쉽게 생활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임을 담고 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쇼펜하우어가 말한 <사색>이다. 쉽게 말하면 '생각'이다.
그 <사색>의 궤적을 학문적으로 말하면 <철학>이 되는 것이다.
모든 생각의 틀이나 흐름의 기본이 되는 것들을 철학 우화들은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우화의 맨 앞장에 칸트의 <네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는 주문이 걸려 있다.
살면서 얼마나 남의 생각대로 살고 있는지, 자신의 사색의 결과를 말할 기회가 얼마나 되는지,
또는 그 사색의 결과를 말하면 얼마나 비웃음을 사게 될는지... 세상은 평탄하진 않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할아버지가 쇼펜하우어를 아주 좋아하는 대목에서 마음이 기뻐졌다.
뭔가를 읽어나갈 때,
여러 권의 책에서 관통되는 하나의 목소리를 자꾸 만나게 되는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행동으로 옮기고 법처럼 지켜야 하는 이성적 원칙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감정을 이입하고 동정을 느껴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할아버지는 쇼펜하우어의 이런 점을 좋아했는데, 읽을수록 매력적인 인간이다.
인간은 고슴도치처럼 상처를 주는 존재라고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를 치부하기도 하고,
니체에게 압도당해버린 면도 없지 않지만,
마르틴 부버의 명언처럼, <나는 너에게서 비로소 내가 된다>는 관계론은 쇼펜하우어의 감정 교육과도 상통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이 책에 담긴 우화들을 워드로 작업해 두었다가 학생들에게 철학적 사고의 기본을 다룰 때 쓸 수 있도록 하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에게 줄 무언가를 건지는 독서는 자못 뿌듯하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인 - 천 가지 성공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 개정판 패러독스 5
조지 레너드 지음, 강유원 옮김 / 여름언덕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강유원 선생님이 자기 계발 서적을 번역했다. 특이해서 읽어 봤는데 제법 멋진 말이 많다. 

개그 콘서트에서 가장 장수 프로가 '달인' 코너라고 한다.
16년동안 맨날 뭔가 연마하지만 그것이 어설픈 가짜 달인이라는 컨셉트인데,
갈수록 이 사람의 진수가 드러난다.
처음 김병만이 나와서 근육을 쓰는 스포츠 개그를 할 때 전혀 웃기지 않았는데,
요즘엔 한 마디 툭 던지는 것이 예술이다.
김병만은 어쩌다 달인이 된 걸까? 

'생활의 달인'이란 프로그램도 있다.
어떤 일에 오래 종사하다 보니 온몸이 기계처럼 익숙해 져서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사람들을 찾아가서 미션을 주기도 하며 촬영하여 방영하는 프로그램이다.
'인간 극장'이 굴곡진 인생사를 짠하게 방송하는 프로라면, '달인'은 그 인생사에서 남은 흔적을 찍어온 스틸컷에 가까운 프로다. 

어떻게 하면 달인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도대체 달인이 필요하긴 한 걸까?
컴퓨터 산업처럼 앞서가는 산업의 달인이 되려면 정말 머리가 좋아야 한다.
안철수나 빌 게이츠를 일반인이 본받으려면 안 된다.
그들은 의대를 때려치워도 충분히 뭘 해도 달인이 금세 될 수 있는 상위 0.001%의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뛰어난 두뇌를 가진 이들이 되는 달인의 분야는 최첨단 전문 분야이거나,
학문 분야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다루는 달인은 '생활의 달인'에 가깝다.
김병만이 몸으로 이리저리 때우는 개그는 운동 신경이 조금 뛰어난 사람이라면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줄타기 같은 것은 꽤나 오래 연습이 필요한 것인데 그런 점에서 달인 프로그램의 인기가 가능할 것이다.
저자는 계속 <합기도 수련>에 관련된 예를 든다.
운동은 매일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여야 조금씩 <미립>이 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정체되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정점을 넘어 자기 것으로 된 기술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제법 여러 분야에서 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요가를 한다거나, 공부를 하더라도 어느 순간을 지나면 발전되어있는 자신을 깨닫게 되는 그런 것. 

달인은 자기 기술을 더 잘해내려고 그것을 연마하는 것이 아니라, 연습 자체를 사랑한다.(80)
달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5분 이상 매트에 더 머무르는 사람이다.(81) 
달인의 길은 연습이다. 달인의 길은 길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85)  
사실 지겨움의 본질은 강박적으로 새로운 것을 찾는 것에서 비록된다.
만족이란 마음 속에 새겨진 반복 속에 존재하며, 익숙한 주제를 미묘하게 변조하면서 끝없는 풍부함을 발견하는 데 있다.(87) 

달인이 되는 것은 순간의 폭발력이나 천재성과는 다르다.
경지에 도달하는 사람. 그것은 결국 지속성과 지구력에 관계된 속성인 것이다.

우주라는 것은 거대한 기계라기보다는 거대한 생각처럼 보인다.(98)
의식의 지향성은 달인의 길에서 연료가 된다. 모든 달인은 비전의 달인이다.(100) 

달인이 되기까지는 신체적, 정신적 단련도 중요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강한 믿음. 긍정적 마인드,
결국 비전의 마인드가 달인이 되느냐 마느냐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의식이 없는, 생각이 없는 달인은 없다. 그저 기술자는 있을 수 있지만... 

저자에게 "어떻게 하면 달인이 될 수 있습니까?"하고 질문하면, 이런 답을 준다. 

기꺼이 바보가 되기만 하면 됩니다.(170) 

그렇다.
바보스러울 수 있는 자유는 천재의 성공을 위한 열쇠(173)인 것이다. 

공부의 달인은 없다.
그러나, 어떤 공부를 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러니까, 소크라테스 선생의 가르침대로,
나는 아는 게 별로 없소이다. 그러니 가르쳐 보시구랴~ 이런 태도로 바보가 되어 전진한다면,
달인은 아니더라도, 바보는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금메달 8관왕에 오른 펠프스나 빙상 요정 김연아에게 달인의 길을 물어본다면,
아마도 '바보같은 연습'이란 대답을 할는지도 모르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1-02-02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유원 씨가 이런 책을 번역했다니,, 의외인데요.
하나의 분야의 달인이 되기위해서는 연습이 제일 중요한거 같아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즐거운 설 연휴 보내세요 ^^

글샘 2011-02-02 04:42   좋아요 0 | URL
정말 의외죠. ^^
연습... 맞습니다. 바보같이 연습해야죠.

님도 새해 복 많이 지으시길...

비로그인 2011-02-02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달인들의 만남이로군요.
저자나 책에 등장하는 달인들이나 역자나 책을 읽고 리뷰를 쓰신 글샘님이나 모두!!ㅋㅋ
설 잘 쇠세요 글샘님~~^^

글샘 2011-02-02 04:43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알라딘 서재의 달인 3년 연속 선정입니다. ㅎㅎㅎ
후와님도 설 잘 쇠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