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동안에 - 사랑으로 세상을 움직인 감동 실화
게리 채프먼 지음, 서현정 옮김 / 예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인간이 인간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의 뇌에 흐르는 전류는 1초에도 수십 번 이상 찌르르 흐를 것이기 때문에,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이 미워지기도 하고 지겨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사소한 데서 화가 나다가 심해지면 증오심이 깊어지기도 하고, 급기야 이별도 서슴지 않는다.
또 사랑할 때는 한눈에 반하는 일도 흔하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이 가까운 심사를 스스로도 헤아릴 수 없기도 하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들을 모은 책이다. 

101가지 이야기 류의 이런 책들을 굳이 찾아 읽지 않으면 마음은 자꾸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 토끼뜀을 뛴다.
럭비공처럼 점핑의 방향을 알 수 없는 마음이 허하다고 느낄 때,
다른 이들의 따스한 사랑의 온도는 내 가슴도 역시 36도를 넘는 체온을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줄 것이다.  

사랑의 가장 큰 힘은 <칭찬과 격려>에서 나온다.
무조건 나는 당신 편이야. 이것이 사랑의 언어다.
사랑이 고픈 사람의 언어는 이것이다. : 내 이야기 좀 들어줘~ ㅠㅜ 

은빛 상자에 쪽지를 가득 담아 사랑을 되살리는 방법을 쓰던 예전 사람들이나,
남편이 싫어질 때 남편의 장점을 적어보고, 자신의 단점을 적다가 스스로를 발견했던 사람들이,
문자를 아무리 따스하게 보내도 금세 삭제할 수 있는 요즘 사람들보다 행복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다만, 심장이 멎어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요법으로는 심장을 되돌릴 수 없다.
CPR의 깜놀 요법만이 살릴 수 있는 이에겐 권하고 싶지 않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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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견훤지간... 견원지간이 옳다. 원숭이와 개처럼 으르렁대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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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2-07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 그림이 따뜻하네요.
무조건 당신 편이야,가 사랑의 언어라면...남편은 영원히 남의편이라 사랑이 아니군요.ㅋㅋ

글샘님은 설에 귀성대열에 합류할 일은 없었는지, 세뱃돈은 많이 풀었는지 궁금하네요?^^

글샘 2011-02-07 00:53   좋아요 0 | URL
집 안에선 내 편, 집 나가면 남의 편...이라 하잖아요. ㅋㅋ
그니깐... 영원한 사랑이라 해도 되죠. ㅎㅎ 집에서 매일 만나기만 하면요.
저는 설에 먼 곳은 안갔습니다. 처가는 봄방학에 가기로 했거든요.
처가가 제천이라 이번엔 차가 막혀서 포기했답니다.
세뱃돈은 제가 많이 풀고 아들이 많이 모았습니다. ㅎㅎ 셈쎄미죠. ㅋㅋ

cyrus 2011-02-07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의 가장 큰 힘은 칭찬과 격려,,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있어야할 힘인거 같아요. ^^

글샘 2011-02-10 19:09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근데, 칭찬하기 참 어렵습니다.
 
소통을 꿈꾸는 토론학교 : 사회.윤리 - 우리 사회를 가로지르는 열 가지 쟁점 청소년을 위한 토론학교
김범묵.윤용아 지음 / 우리학교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논술이 좋은 제도라는 것에는 누구도 토를 달지 않지만,
한국처럼 채점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논술 시험이란 것은 의미가 없다는 데도 의견을 함께 한다. 

논술 내지 구술 면접이란 제도가 정착되지 못하는 것은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학생들은 '사고력'을 뒷받침하는 '독서'의 이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적거나 말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하느님이 보우하사' 수능을 몽땅 찍어서 맞히면 연세대나 고려대는 입학할 수 있다.
그러니 변별력 없다고 비중을 낮춘 내신보다는 수능에 올인하는 것이 현명하고도 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공부를 해봤더니 도저히 내신을 따라내지 못할 성적이 나오는 학생들은 논술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거기 근거를 들이대는 글쓰기가 논술이고, 그런 말하기가 구술 면접이라면
이제까지의 참고서와는 전혀 다른 참고서가 <우리 학교> 출판사에서 나오고 있다. 

학생들은 이 책을 읽어 가면서 다양한 사안에 대하여 '관점을 정립하는 법'과,
근거를 만들어서 주장을 뒷받침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 

학생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들( 외모 지상주의, 대학 입시, 인권 등)을 다루고 있어 재미도 있을 것이고,
따끈따끈한 그림들과 그래프들은 오히려 쓰기 문제를 낼 때 응용해야겠다는 내 욕심이 앞선다.
숫자를 활용하고 그림을 활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일이 얼마나 설득력이 강한지를 함께 익힐 수 있는 기회가 되겠다. 

학교들은 마지막 페이지의 <참고 도서> 목록을 참고하여,
독서 동아리, 논술 동아리 등에 활용할 수도 있겠다. 

글을 쓰는 일은 자신의 <생각의 지도>를 펼치는 일이다.
생각의 지도를 펼치려면 우선 생각이 여러 곳을 흘러가야 하는데,
그 흘러가는 곳이 맨날 뻔한 뉴스나 인터넷 기사, 교과서 내용이라면 참신한 글이 나오기 힘든 것이 당연지사다.
고등학생 정도라면 우리 학교의 <토론 학교> 시리즈를 꾸준히 구입하여 읽도록 지도하는 것도 좋은 학습법의 하나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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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눈감고 살 수도 있지만,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 하던 고 전우익 할아버님의 책 제목처럼,
현실의 변화에도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지혜이기도 할 거다.

오늘은 독재 시대의 획일성을 읊은 김명수의 <하급반 교과서>를 한번 읽어 보자.

아이들이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
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
한 아이가 소리내어 책을 읽으면
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 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 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도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 대로 따라 읽는다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읽기여
우리 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김명수, 하급반 교과서)

이 시는 참 쉽죠~~잉~~하던 박지선을 흉내내도 되겠다.
아이들이 글을 읽고 따라 읽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 사회의 획일성과 유사성을 발견하고 있다.  

<읽기에도 좋아라>는 반어법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실제로 화자의 귀에는 <쓸쓸한 책 읽기>로 들리는데 <좋아라>라고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좋은 시는 쉬운 속에서 진리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엔 '정 양'의 '물 끓이기'를 읽어 보자.
민우도 라면이나 자장면 삶아 먹기를 즐기잖아.
집에서 매일 흔하게 접하는 물 끓이기라는 행동 속에서 화자는 대단한 것을 발견하고 있단다.
우선 읽어 보자.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 수거비 받으러오는 말단에게
신경질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배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 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개든 말단이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놓고 넘치고 싶은 물이 끓는다 (정양, 물 끓이기)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
끓어오르는 것은 분노와 울분을 토하는 일이 되겠지.
아빠도 뉴스를 안 본 것이 꽤나 오래 되었다.
뉴스를 볼 때마다 끓어오를 일이 너무 많아서 혈압이 높은지도 모르겠구나. 
소시민은 현실 속에서 화가 나는 일이 너무도 많게 마련인가 보다.
그런데,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화자는 자신보다 냄비 속 맹물이 나아 보이고 있다. ^^
국수 끓이는 맹물 속에서 자아 성찰을 하다니... 대단한 내공이지 않니? 

2연에서 다산 정약용의 <증문(모기를 증오함)>과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인용한다.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 시기의 혼란을 비판한 다산 선생이나,
1960년대 독재 사회의 소시민적 자아를 비판한 김수영의 시를 떠올리면서,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더럽게 끓탕을 치고 있고,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이고,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고 느낀다. 

혈식을 일삼는 모기는 '현실의 작은 불편을 주는 대상'으로서 탐관오리가 될 거고,
호랑이, 구렁이는 부정, 불의의 모순의 원인이 되는 존재로서 거대한 권력의 횡포가 될 거다.
국가의 구조적 모순보다 사소한 수탈이 더 열받게 한다는 이야기다.

다산과 김수영의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국가가 썩어 빠져서 국민의 희생을 요구하는데,
지식인은 국가가 망해가는 모습을 바로잡는 요구를 해야 옳지만,
그런 큰 일을 하지는 못하고,
그저 사소한 일에나 화를 내고 있다는 자기 반성인 것이지. 

그래서 3연에서 '사소한 일에 끓어넘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우랴~ 하는 것은,
거대한 부정적 횡포가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심정이다.
국가가 농민의 재산을 착취하는 더러운 세상.
'국가가 나한테 해 준게 뭐가 있냐?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비아냥은,
조선 시대에도 '양반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었고,
독재 시대에도 '부자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었다.
이런 권력의 부정에 속 끓이는 일 없이,
그저 사소한 다툼에만 몰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런 바람은 사실 희망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화자의 소망, 바람은 마지막 연에서 집중되고 있다.
배가 고파 제 배나 채우려는 소시민적 나약함은 잊어 버리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놓고 넘치고 싶은> 것이 화자의 소망이다.
부정한 것과 싸우는 것의 정당함을 잊지 않겠다는 화자의 내면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 시는 자기 반성적이기도 하고, 현실 비판적이기도 하다.
물 끓이기를 통하여 <소시민적 행태에 대한 반성과 현실 비판>을 하는 것이 주제가 되겠다. 

한국 사회는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겪으면서 옳은 소리 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회가 되었다.
바른 소리를 하면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고 감옥엘 보냈다.
부정한 것에 대한 당당한 비판과 분노는 정당한 삶인데도,
부정적 현실은 그런 비판에 익숙하지 않게 만들곤 했던 것이다.
소시민적 나약함은 사회의 부정에 대해 묵인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는 시대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단다.
각종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하는 것이 그렇다.

작년에 G 20 (group of 20)이란 자본가들의 행사 포스터에
'쥐 20'(발음을 이용한 언어 유희)이란 풍자를 담은
그래피티를 그린 대학 강사를 구속하였다가 벌금까지 매긴 일이 있었단다.
공공 시설물에 낙서를 하는 것은 벌금을 매길 수 있는 일이지만, 구속까지 하는 것은 좀 웃긴 일이었지.

그러면, 위에서 나온 김에 정약용의 '증문'을 한번 읽어 보자.  

사나운 범 울밑에서 울부짖어도 나는 코골며 잠잘 수 있었고
구렁이 꿈틀대며 처마 끝에 매달려도 드러누워 그 모양 볼 수 있지만
한 마리 모기 소리 귓가에 들릴 때는
간담이 서늘하고 기가 막혀서 오장이 죄어들고 끓어오르네.//
부리박아 피를 빨면 그로 족하지
어이하여 뼛속까지 독기 불어놓는고
베이불 덮어쓰고 이마만 내놓는데
어느새 울퉁불퉁 혹이 돋아서 보골보골 부처님 고수머리 되고 마네.//
내 뺨을 때려 봐도 헛치기 일쑤이고
넓적다리 때려 봐도 모기 이미 달아난 뒤
힘든 싸움 공은 없고 잠만 못 들어
지루한 여름밤이 일 년보다 더 길구나.//
지극히 작은 몸에 그렇게도 천한 것이
어이하여 사람 보면 침을 질질 흘리는고
밤에만 다니는 건 도적을 배운 거고
혈식은 한다지만 성현이라 그렇겠나.//
지난 날 대유사서 교서할 적에 푸른 솔 하얀 학이 마당 앞에 벌여 있고
유월에도 파리 얼어 날지 못할 때 대자리 깔고 앉아 매미 소리 들었는데
지금은 흙바닥에 볏짚 깔고 사는 신세
내가 부른 모기이지 모기 허물 아니로다. (정약용, 증문(憎))

 이 시를 5부분으로 나눠 보았다.
5번째 부분에서 정약용이 <대유사서 교서>란 벼슬을 할 때는 파리 한 마리 얼씬도 못하더니,
지금은 귀양가서 권력을 놓치고 나니 모기(탐관오리)가 덤빈다는 이야기다. 
정약용은 귀양이란 힘든 상황에서도 온갖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사람이다.
특히, 그는 조선 후기 사회의 어지러운 '관리'들에게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니,
그리하여 <목민심서>라는 책도 지었던 것이다. 

다음엔 김수영의 시를 읽어 보자.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1연)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2연)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3연)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情緖(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4연)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5연)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6연)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7연)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8연)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1연에 <왕궁>, <왕궁의 음탕>을 욕해야 마땅하다는 인식이 등장한다.
왕이 있던 시대가 아니었으니 바로 <박정희>라는 독재자를 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3연에서 <언론의 자유>나 <월남 파병>처럼 반대해야 할 사안에 정당하게 저항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화자는 그러지 못하고 만만하고 사소한 일에만 화를 낸다.

2연의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은 만만한 대상이고,
3연의 <야경꾼>은 만만한 대상이고,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7연의 <이발쟁이>도 욕을 들어주는 사람일 뿐이다.

4연에서 <나의 옹졸함>은 유구하고(오래되었고) 이제 나에겐 '정서'처럼 익숙해 졌다.
포로수용소 병원에서 간호사들과 거즈나 개고 있는 화자에게
옹졸하게 남자가 간호사들 옆에서 시시한 일이나 한다고 놀린 적이있는데, 그때부터 난 옹졸했다.

5연에서 자신은 여전히 옹졸하다고 말한다.
아주 자조적(스스로를 비웃음)이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어린애 녀석의 투정에도 진다>
화자는 스스로 너무도 자신감이 없기에 은행잎도 가시밭길처럼 여겨진다.  

6연에서 화자는 <절정>위에 있고 싶지만,
지식인이라면 뜨거운 화제에 대하여 <부글부글 끓고> 싶지만,
화자는 비켜서있고, 비겁하게 살고 있다. 

마지막 8연에서 스스로의 왜소함을, 부끄러운 나약함과 소시민성을 반성하고 있다.
바람보다 먼지보다 풀보다 자신은 작아 보이고 부끄럽기 그지없다.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 의식을 깨닫는 진지한 자기 반성>이 되겠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발견한 새로운 관점을 자랑하듯 써서 보여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화자는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을 드러냈다.
자조적인 어조로 자신의 소시민적 행동을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이렇게 강렬하게 스스로 반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시인은 자신을 반성한 것도 되지만, 시대와 지식인에게 반성을 촉구한 것도 된다.
주제는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 의식을 깨닫는 진지한 자기 반성> 정도가 되겠구나.  

화자는 <절정>위에 서는 삶을 지향하지만,
<절정>위에 선 삶은 언제나 가혹한 시련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오늘 읽은 시들 역시 시대를 아파하는 마음이 잘 드러난 시들이다.
시를 읽고, 해설을 읽으면서,
인간의 언어가 화자의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때,
유사한 경험을 빗대서 <비유법>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그래서 글을 쓸 때,
유사한 것을 찾아 쓰는 <유추>하는 글쓰기가 얼마나 효율적인지도 생각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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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이 지나더니 날씨가 풀려 완연한 봄 같다.
1월 내내 춥더니 봄의 문턱에 다 온 기분이 든다.
한 해의 시작은 정초에 세운다고 하지만,
새 학기가 곧 시작될 테니 한 해의 시작을 잘 해보기 바란다. 

요즘 뉴스를 장식하는 이야기 중 하나로 '소말리아 해적 소탕 작전'이 있었다.
강대국의 상선은 원래 건드리지 않는 것이 해적들의 철칙이다.
그래서 한국처럼 어정쩡한 나라의 배가 건드리기 딱 좋은 것이다.
돈도 좀 있고, 군사를 파견하기엔 너무 멀고...
그래서 이번에 납치된 배를 구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기는 한데,
지나치게 자화자찬의 잔칫상을 벌이는 언론을 보니 좀 안쓰럽기도 하다. 

저렇게 정부가 잘한 것을 내세우고 싶을까 싶어서 말이야.
평소에 잘한 사람은 발렌타인 데이라고 꼭 초콜릿으로 점수를 얻으려고 안간힘 쓸 필요는 없을 텐데 말이다.
세상 일은 서로 통하는 면들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서도,
우리의 일상 생활과 시 속의 생각들이 어떻게 연관될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풍장>과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즐거운 편지>를 통해 만났던 황동규의 시
<삼남에 내리는 눈>을 한번 읽어 보자.
3남은 임금이 살던 서울 인근('경기'라고 부른다.)의 남쪽 세 도를 가리킨다.
충청, 전라, 경상도가 되겠지.
예부터 이 3남 지방은 곡창 지대로 많은 세금이 걷히던 곳이고,
그만큼 탐관오리의 수탈도 심하던 곳이다.
우선 시를 한번 읽어 보자.

봉준(琫準)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큰 왕의 채찍!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포(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목매었으련만, 대국낫도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귀 기울여 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무식하게 무식하게. (황동규,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봉준이는 동학 농민 운동으로 <조선 왕조>에 저항의 깃발을 높이 든 전봉준을 말한다.
수탈이 심하여 부정적 시대에 저항한 울분의 시대.
'한문을 모르고 부드럽게 우는 법을 몰랐던' 민중은 거세게 봉기하였다.
관군까지도 농민군에 합세하여 <왕조>는 위기에 부딪히게 되고,
<왕조>는 왜병을 끌어들여 서양식 총으로 농민군을 몰살시킨다.
<조선 왕조>를 <국가>의 개념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왕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도 버릴 수 있는 것이 <왕조>라고 봐야할 게다.

왕의 뒤에는 '큰 왕' 일본이 있었고, 그들의 채찍은 매웠다.
결국 동학 농민군은 몰살의 길을 걷게 된다.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포(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목매었으련만, 대국낫도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 

이 부분은 '겨울 안개' 자욱한데, '보병과 기마병이 국경을 넘어 들어왔다는 이야기다.
총알이 튀는 모습이 부챗살처럼 땅을 파헤치고,
일본식 소총들은 대포소리를 울리며 당황스런 농민군을 울리고 만다.
제 나라 임금이 돈주고 불러온 일본놈 총알에 맞아 눈밭에 쓰러지던 농민군을 떠올린다.
찬 눈에 홀로 쓰러져 볼 비비고 있었던 칠복이, 만수, 순이 아배, 만득이 할아범...
차라리 계룡산에 들어가 밭갈이에나 목을 매고 농사를 짓고 살았으련만...
이렇게 왜놈 총알에 나자빠져 죽을 줄 알았더라면...
밭갈이에나 목을 매었을 것을...
대국(중국, 중국인을 때가 많다고 땟놈, 뗏놈으로 불렀음)낫이나 일본낫(왜낫)이나
외국에서 들어온 물건이라도 농사짓는 데는 유용하게 쓰였을 것이지,
우리 농민을 죽이지는 않았으련만... 

이렇게 조선 왕조에 의하여 죽어간 농민군들의 슬픈 과거가 화자에겐 떠오른다.
이 이미지가 떠오르는 이유는, 바로 '눈'이 내리기 때문이다. 
갑갑한 하늘 아래 눈이 내리는데,
눈 맞으며 잡혀갔을 전봉준이 떠오르고,
눈 내린 벌판에서 찬 눈에 볼 비비며 죽어갔을 동학군을 떠올리면 속이 터진다. 

화자는 뜬금없이 왜 눈이 내리는 데 이렇게 불행한 삶을 살았던 동학군을 떠올렸을까?
왜 그렇게 슬픈 현실이 오버랩 되었을까?
아마도 화자가 살았던, 이 시를 지었던 1968년 박정희 독재정권의 통치와 그에 대한 저항이,
마치 조선 왕조가 짓밟은 제 나라 국민들처럼 짓밟히던 시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시를 다시 낮게 읊조려 보기 바란다.
부정적 현실의 어두운 시대.
조선 농민들의 울분이나 20세기 농민들의 울분이나
<유사함>에 기초하여 오버랩되는 장면들이 슬프고 처연하구나.
우리는 동학 농민군 하면 <전봉준>이 대장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김개주>같은 장수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장수들은 워낙 강성이라서 잡자마자 바로 참수(목을 벰)했다고 하더구나. 

어두운 시대, 그래도 희망을 가져봐야 하지 않았겠니?
의지적으로 희망을 가져보려는 노래 중에 오늘은 '황지우'의 시를 한 편 읽어 보자.
시들은 한번 읽으면서 느낌을 살펴 보고,
설명을 듣고 나서 다시 한번 읽어 보기 바란다. 아마 정리가 더 잘 될 거야.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裸木(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황지우, 겨울 - 나무로부터 봄 - 나무에로)

시의 제목은 '겨울 - 나무로부터 봄 - 나무에로'이다.
'겨울-나무'가 '봄-나무'로 변화하는 과정을 통하여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시란다. 
그냥 '겨울 나무'나 '봄 나무'라고 해도 될 것을 가운데 하이픈을 넣은 것은 강하게 눈에 띄도록 장치를 한 거지.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이 처음 부분만 살펴 보자.
'나무는 나무이다.'라는 발언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런 만큼 독자는 화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호기심을 가지게 되어 있지.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마지막에 이런 부분이 반복된다. 수미상관.
그 사이에서 화자가 주장하는 바는 수미상관의 구성을 통하여 <강조>되고 있는 것이겠다. 
수미상관의 시는 그 사이에 어떤 주제가 담겨있는지 살펴보면 된다. 

나무는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서 피하지도 않고,
<뿌리박고 무방비의 裸木(나목)으로 서>있다.
<벌 받는 자세로 서>있지만,
나무는 <온 혼>으로 <애타고 불타고 버티고 거부하>는 존재다.
그러면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온몸이 터지면서 싹을 내밀고 잎이 되고 나무가 된다.
힘겨운 겨울을 <온몸>으로 이겨내고 봄을 불러오는 것이 나무인 것이다. 

이 시에서는 가만히 있어 보이는 <겨울-나무>가 사실은
간절히 봄을 부르는 역동적인 <봄-나무>이기도 하다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래서 '나무는 나무이다'라고 할 때,
앞의 나무는 '겨울-나무'고 뒤의 나무는 '봄-나무'이다.
겉보기에는 보잘것 없어보이지만, 그 가능성을 보면 무한정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었구나. 

이 나무는 <전봉준>이 되기도 할 것 같다.
시련을 당하는 사람의 상징이다.
벌 받는 나무는 <죄도 없이 죄 지어서>의 '벼'와 같은 존재들이다.(이성부, 벼)

그렇지만 그 나무는 무기력하지만은 않다.
버티고, 이겨낸다.
막 밀고 올라가서 싹을 틔우고 기어이 봄을 부른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이 영탄은 간절히 바라던 것이 경이롭게 펼쳐지는 새 세상을 보는 감탄인 것이다.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으로서 시인은
시를 통해 시대를 풍자하고 유토피아를 꿈꾸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30회)>와 <너를 기다리는 동안(14회)>에서도 마찬가지 주제가 드러난다.

주제는 <시련을 이기는 민중의 힘과 의지> 정도면 될까?
다음엔 '하종오'의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를 읽어 보자.
마찬가지로 고난의 민중사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우리끼리 하는 말로
태어나면서도 넓디넓은
평야 이루기 위해 태어났제.
아무데서나 푸릇푸릇 하늘로 잎 돋아내고
아무데서나 버려져도 흙에 뿌리박았는기라.
먼 곳으로 흐르던 물줄기도 찾아보고
날뛰던 송장메뚜기 잠재우기도 하고
농부들이 흘린 땀을 거름 삼기도 하면서
우리야 살기는 함께 살았제.
오뉴월 하루볕이 무섭게 익어서
처음으로 서로 안고 부끄러워 고개 숙였는기라.
우리야 우리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총알받이 땅 지뢰밭에 알알이 씨앗으로 묻혔다가
터지면 흩어져 이쪽 저쪽 움돋아
우리나라 평야 이루며 살고 싶었제
우리야 참말로 참말로 참말로
갈라설 수 없어 이 땅에서 흔들리고 있는기라. (하종오,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이 시의 주제 의식은 <우리>라는 말에 잘 드러나 있다.
'벼'는 우리가 먹으려 기르는 것이지만, '피'는 먹을 수 없는 풀이다.
그렇지만 벼가 자라는 곳이면 어디선가 피가 섞여서 자라곤 한다.
벼와 피는 이 땅을 지키는 민중의 상징인 것이다. 
이 시에서 '벼와 피'는 이질성보다는 <동질성>이 강조되고 있단다.

5행 <뿌리박았는기라>까지 읽어 보렴.

우리야 우리끼리 하는 말로
태어나면서도 넓디넓은
평야 이루기 위해 태어났제.
아무데서나 푸릇푸릇 하늘로 잎 돋아내고
아무데서나 버려져도 흙에 뿌리박았는기라.   

벼와 피는 민중이랬지? 민중들은 이렇게 평야 가득하게 생명력을 펼치며 살고 있단다.

먼 곳으로 흐르던 물줄기도 찾아보고
날뛰던 송장메뚜기 잠재우기도 하고
농부들이 흘린 땀을 거름 삼기도 하면서
우리야 살기는 함께 살았제.

벼와 피는 가까이 물줄기가 흐르지 않아도, 메뚜기떼가 마구 파먹으려 해도,
끈질기게 살아 남았지. <함께> 살아 남았단다.

오뉴월 하루볕이 무섭게 익어서
처음으로 서로 안고 부끄러워 고개 숙였는기라.  

오뉴월의 강렬한 햇볕은 벼를 잘 익게 한다.
<무섭게> 같은 말은 사투리지.
이 시는 마치 시골 농부의 말처럼 사투리가 구수하게 들리는 시다.
잘 익어서 서로 '안고' '고개 숙이'며 살고 있었다.
순수하고 겸손한 민중의 마음씨가 곱게 드러나는 것 같은 부분이다.

우리야 우리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총알받이 땅 지뢰밭에 알알이 씨앗으로 묻혔다가
터지면 흩어져 이쪽 저쪽 움돋아
우리나라 평야 이루며 살고 싶었제
우리야 참말로 참말로 참말로
갈라설 수 없어 이 땅에서 흔들리고 있는기라.

이 부분에서 분단된 현실이 드러난다.
<총알밭이 땅 지뢰밭>이 그것이다. 
분단된 현실이지만, 우리 민중들의 뜻은 분단에 있지 않다.
민중들이 우리 맘대로 할 것 같으면,
씨앗이 터져 흩어지면 여기 저기서 움을 돋게 하고,
우리나라를 하나의 평야로 이루며 살고 싶은 것이다. 

얼마나 간절하냐면...
참말로 참말로 참말로
이렇게 간절하다.
우리는 갈라설 수 없어 이 땅에서 흔들리는데,
어디서 외세가 우리를 갈라놓고 <총알과 지뢰>로 흩어버린 것이다.
민중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지배세력에 의해 분단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표현이
<우리>의 의지와 상반되어 대립되고 있단다. 

이 시의 주제는 <분단 현실 극복을 향한 민중의 염원>이 되겠지.
그 염원을 '벼'과 '피'를 통해서 형상화하고 있다.
벼와 피는 <우리>가 된다. <동질적 존재감>을 강조하는 것이지.
<하나의 땅>에 함께 뿌리내리고 있어 <분단을 극복>하려는 태도를 강조한 거란다.  

아빠가 읽어주는 시 중엔 유난히 '부정적 현실'과 '의지'를 드러낸 시가 많을 거다.
세상엔 아름다운 사랑 노래도 많이 있을 것이고,
화자 자신의 주변을 돌아본 시도 많이 있을 것이지만,
조선이 망하고 식민지 시대, 분단과 한국 전쟁, 군사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 등으로 점철된 
한국의 현대사와 '시'읽기는 떨어진 것이 아니어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이제 독재 정권이 아니어도 저절로 더욱 험악한 곳이 되어가고 있다.
세계화의 울타리로 한 식구가 된 <글로벌 지구>는 강대국의 자본이 약소국의 민중을
직접 착취하는 구조로 변화되고 있단다.
조선 후기처럼 탐관오리가 그 지방의 농민만 수탈하던 시대나
독재 시대처럼 독재자가 그 나라 국민만 수탈하던 시대가 가고 만 거지. 

공부란 것은 꼭 문제집을 푸는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시대의 흐름도 읽을 줄 알아야 공부고,
세상의 모습이 드러난 문학 작품들을 읽는 것도 공부가 되겠지.
이제 내일이면 개학이구나.
며칠 학교에 나가야 하니 일찍 일어나도록 일찍 자자꾸나.
아무래도 학교는 독서실보다 추우니 옷도 잘 챙겨 입고 다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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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고은 시인의 '문의 마을에 가서'를 통해 죽음에 대한 관조를 읽어 봤다.
산다는 일은 죽음의 뒷면과도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는 날까지 열심히, 잘 살아 보자. ^^ 

오늘은 고은 시인의 <눈길>이란 특이한 시를 살펴 볼 거야.
왜 특이한 시냐면, 고은 시인은 '스님'이 되었다 환속한 경력을 가진 분이었는데,
이 시에서는 인생에 대한 관조와 함께, <어둠>이란 단어를 독창적 상징으로 쓰고 있는 시라서 그렇게 말한 거다.
우선 읽어 보자.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고은, 눈길)

첫 행의 <이제 바라보노라>는 마치 영화에서 인트로의 역할을 하는 구절 같구나.
영화에서 과거를 회상하겠다는 부분과도 같은 구절.
말투는 조금 거창하고 경건한 느낌이야.
무얼 바라보냐면,
<지난 것이 다 덮인 눈길>을 바라본대.
화자가 살아온 인생길이겠지.
그리고 겨울처럼 냉혹한 그 길을 떠돌고 와
지금은 <낯선 지역>에 서 있는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시 같다.  

화자가 어떻게 살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온 겨울을 떠돌고> 왔다는 것으로 보아 많은 고난을 겪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이제 화자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이 오버랩된다.
이제까지 마음 속에서 폭풍이 휘몰아치고 성난 파도가 용솟음쳤다면,
이제 마음 속에 눈이 고요하게 내리고 있다.
세상은 지금 묵념을 드리는 것처럼 고요하다.
내가 살아온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가 가득 덮인다.
눈이 소복소복 덮이는 그 위로... 
시각적 효과를 위하여 '눈'이나 '겨울'이 동원되었지만, 사실은 화자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지. 

10행에 다시 <바라보노라>가 등장한다.
다시 시각적 효과를 통해 화자의 심리가 펼쳐지겠지.
그런데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바라본다고 했어. 
<소리 없는 아우성>과 같은 표현 기법이 쓰인 걸 알 수 있겠니?
<보이지 않는 움직임>에서 말이야.
움직임은 뭔가의 변화가 보이는 상태잖아. 역설적 표현이지.
그럼 도대체 이 사람은 뭘 본걸까?
보이지 않는 속에서도 움직이는 것.
그런 것은 <자연의 이치, 섭리>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늘은 무엇인가'
그리고 '대지는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화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보인다.
바로 '하늘과 대지'의 섭리지.
대지가 고백하고 하늘이 울리는 함성을 '귀 기울여 듣는' 것으로 화자는 수도자가 되는구나.

여태까지는 귀를 달고도 듣지 못했던 그 소리.
이제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고 외치고 있어.
화자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에 소복하게 쌓인 풍경을 보며 아까 얻는 <평화>로 가득하고,
                    안에서는 <어둠>만이 가득하단다. 

화자의 마음 안에 가득한 <어둠>은 보통 '어둠'이 상징하는 '악, 잘못, 죄스런 마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란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구별, 분별'을 버린 마음. '선악과 좋음이나 나쁨'을 버린 마음을 얻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밝은 곳에서는 기쁨과 슬픔이 나뉘잖아.
그런데 마음 속에 어둠이 가득하다는 것은 <판단>할 필요가 없는 참된 <평화>의 경지를 말한다고 봐야겠지.  

여기서 <어둠>이 평소와는 달리 <평화로운 마음의 표현>이란 상징으로 쓰였는데,
이런 것을 <독창적 상징>, <창의적 상징>이라고도 부른단다.
뭐, 별로 어려운 말도 아니지?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그 어둠을 얻게 된 기쁨을,
마지막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반복하고 있지.
좀 이해가 되니? 

겨울같이 흔들리고 시달리던 삶을 살아온 화자에게
이제 눈길같은 평화와 어둠같은 고요함이 찾아온 것이란다.
얼마나 마음 속 깊은 기쁨이 샘속겠니?
얼마나 소리쳐 기쁨을 표현하고 싶겠니?
그런 것을 고요하게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로 표현하고 있는 거야.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살아온 고은 시인은 최근 몇 년째 노벨 문학상 후보자로 거론되곤 했지.
한국에서 그것도 <시>처럼 번역이 불가능한 장르가 수상하긴 쉽지 않은 노릇이다.
아마 통일이라도 되면 시든 소설이든 수상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
그만큼 노벨상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상이란다.
고 김대중 대통령도 이북의 김정일과 평화회담을 진행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거든.
고은 시인의 <머슴 대길이>는 전에 읽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만인보>에서 10,000명의 개인사를 시로 적음으로써
이 민족의 삶을 형상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시인이 고은 시인이다.
이제 고은 시인의 <화살>을 한번 읽어 보자.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몇 십 년 동안 가진 것,
몇 십 년 동안 누린 것,
몇 십 년 동안 쌓은 것,
행복이라던가
뭣이라던가
그런 것 다 넝마로 버리고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이 소리친다.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단 한 번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정의의 병사여 영령이여! (고은, 화살)

어때? 짜릿하지 않니?
독재 시대. 저항의 기운이 열기처럼 솟구쳤던 그런 시란다.
물론 노래로 불리우기도 했지. 

'우리'라는 말을 처음에 쓰고 있구나.
동지 의식의 강조로 보인다.
<화살>은 <목표물>을 향해 조준하는 무기다.
군사 독재 정권이란 목표를 향해 <화살>이란 무기가 되어 날아가자는 선동으로 이뤄진 참여시지.  

화살이 가는 길은 정해진 길이 없단다.
허공을 뚫고 가야 한다.
앞서 누가 갔던 길도 아니다.
홀로, 외로이 허공을 뚫고 온몸으로 가야 한다.
마음만 조금 도와주는 그런 희생이 아니라, 온몸을 바치는 희생. 

저항하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감옥에 가서 썩을 수도 있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서는 돌아오지 말> 각오로 투쟁해야 함을 드러냈던 시란다.
과녁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자. 그리고 돌아오지 말자. 

참으로 비감했던 시대였다.
장엄했던 시대였다.
가진 것. 명예와 부 같은 것들.
누린 것.
쌓은 것.
이런 것들을, 행복했던 다사로운 나날을 넝마처럼 버려야 하는 희생정신.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몇 십 년 동안 가진 것, / 몇 십 년 동안 누린 것, / 몇 십 년 동안 쌓은 것,
행복이라던가 / 뭣이라던가 / 그런 것 다 넝마로 버리고 /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이 소리친다. / 허공 뚫고 /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
단 한 번 /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정의의 병사여 영령이여!

이런 말들은 이제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구나.
일제 강점기에만 <속죄양> 의식이 있었던 건 아니다.
어떤 시기건 어두운 시기에는 누군가의 피가 여럿의 행복의 제단에 바쳐지곤 했던 것이 역사란다.
그런 역사를 쉽사리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

<캄캄한 대낮>은 절망적 현실 상황을 역설적으로 나타낸 표현이다.
대낮조차 절망으로 캄캄하게 여겨진다는 말이지.
고은 시인처럼 스님이기도 했던 만해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도 함께 읽어 보자.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어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어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 (한용운,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고 당신은 행인이란 비유가 시종일관하고있다.
나룻배는 강물을 건너 주는 도구다.
당신은 지나가는 사람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중요한 것은 <행인의 강 건넘>일 것이다. 

당신은 이 강을 건너야만 하는 행인이다.
그런데 나는 나룻배로서 당신을 건너게 해 줄 준비가 다 되어 있다.  

2연에서 흙발로 나를 짓밟는 당신이 등장한다.
당신은 나를 고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기에, 당신을 싣고 강 건너로 갈 것이다.
아무리 깊은 물 빠른 여울이라도 나는 기꺼이 당신을 안고 간다. 

이 <나룻배>는 참으로 희생정신이 강한 존재이기도 하다.
참을성이 많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강을 건넘>이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이자 수단>에 불과할 따름이다. 

불교에서 뗏목의 비유를 많이 쓴다.
강을 건널 때 뗏목을 필요로 한다.
강을 건너고 나면 행인은 뗏목을 어떻게 해야 할까?
결코 행인은 뗏목을 머리에 이고 가지는 않는다.
강을 건너면 뗏목은 버리고 계속 가야할 뿐이다. 

일제 강점기에 제국주의 일본 세력과 투쟁하기 위하여 <공산주의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학교>를 세운 사람도 있고, 중국으로 가 <임시정부>를 세운 자도 있다.
이들의 <공산주의>, <학교>, <임시정부>는 모두 뗏목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뗏목이 아니다.
뗏목은 강을 건너면 버리는 것이다. 

민우야.
세상을 사는 일은 강을 건넘과 유사한 점이 많단다.
행인인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도구>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학교>도 다니고 <졸업장>도 딴다.
그렇지만 <학교>나 <졸업장>은 뗏목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행인의 걸음걸이인 것이다. 비유가 너무 어렵니? 

3연에서 이 나룻배는 <당신을 기다린>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버린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러나 당신은 언제든지 오실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간다고 했다.

낡아 가는 것은 <고난>이겠다.
일제의 고난, 삶의 고뇌.
그것은 날마다 날마다 되풀이된다.
그렇지만 당신이 언제든 오면, 나룻배가 필요하기에 당신을 기다린다고 했다.

나룻배는 바로 <불법><불도>와도 같은 진리를 추구하는 길일 수도 있다.
독립운동가에게는 <독립군>과도 같은 단체가 될 수도 있고.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나룻배>가 아니라 <행인>이라는 인식이다.
<나룻배>는 행인의 강 건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고귀한 떠받듦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용운 스님에게 있어 <불교>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민족이 이민족에게 짓밟히는 모멸을 당하는 것을 보고,
불교란 나룻배로 강을 건너가기를 강렬하게 소망하는 시로 읽을 수도 있겠구나.
나룻배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널 수 있는 도구다.
물론 당신은 강만 건너면 나룻배는 거들떠 보지도 않지만 말이야.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어요  

이렇게 독립을 간절하게 기다렸던 시인일 수도 있겠다.
어떤 치욕도 헌신적으로 인내하는 <나룻배>의 비유는
<행인>의 물 건넘을 간절히 소망하는 시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는 나름대로 험난한 파도를 넘어야 했고,
독재 정권 하에서는 또 다른 폭풍우를 견뎌야 했던 민족.
지금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나라로 남은 민족.
동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을 일상으로 여기고 대립이 평상이 된 현실.
그렇지만,
아직도 우리는 <나룻배>가 필요하다.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라는 팝송이 있었듯,
민우가 건너야 할 세상의 바다에 어떤 <나룻배>가 소용이 될지...
글쎄다.
혼자서 헤엄쳐야 하는 정도로 외톨이가 아님을 고맙게 생각하렴.
그리고 부모가 <나룻배> 역할을 해줄 수 있을 때 유용하게 쓰는 것도 지혜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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