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 18세기 조선의 문화투쟁
백승종 지음 / 푸른역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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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를 개혁 군주라고 부르기도 하고, 조선의 르네상스를 꾀한 지식인으로 부르기도 한다.
세계적 사조를 보나,
중국을 비롯한 북학의 영향으로 보나,
정조가 집권하였던 18세기 후반은 '문제의 세기'였음은 분명하다.
조선에서도 르네상스적 인물은 정약용 등의 실학자들 역시 이런 관점 정립에 기여한다. 

그러나 정조는 '왕조'를 지키기 위하여 애를 쓴 '군주'에 불과했다는 관점도 있다.
이 책에서 <문체 반정>을 다루는 관점은,
조선 왕조의 유지에 해를 끼치는 세력의 하나로서 '소품문'에 대한 왕의 관점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지난 주에 <아이들......>이란 영화를 보았다.
대구에서 개구리 잡으러 나간다며 나갔다 사라져버린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화의 앞부분에서는,
오로지 상업적 히트만을 노리는 비인간적인 방송 감독과,
개구리 소년들 사건에 관심이 엄청 많은 심리학자가 의기투합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들의 시점에서 한 실종자의 아버지가 이상하게 보였고,
정치적 영향 속에서 그 아버지가 꾸민 자작극 내지는 살인 사건으로 몰아간다.
의심은 꼬리를 물어 화장실을 푸고 방바닥을 파제키는 해프닝을 벌이고 문제는 닫히고 만다.
결국 십 년이 넘은 어느 날 동네 야산에서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되고,
유골에 남은 흔적으로 범인을 찾으려 애쓰지만, 그 또한 하나의 시점일 뿐이다. 

<아이들...>에서 남은 것은 시점이다.
부모의 시점에서 보면 '수시로 걸려오는 장난 전화'에 심드렁하게 반응할 수 있고,
그 부모를 의심하는 자의 시점으로 보면 '수상한 행동'으로 비칠 수 있는 것이다.  

역사는 '무슨 일이 일어 났던가?'를 실증적으로 쓰는 것이라고까지 연구자들이 내세우지만,
결국 그 일이 일어난 것을 기술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해석된 결과는 천양지차이다.
역사학자들은 그 차이를 <사관>이라고까지 높여 이야기하지만,
남은 것은 <차이>다. 

불량학자 강이천을 바라보는 시점은 다양하다.
이 책의 작가 백승종은 강이천 사건에 대한 다양한 시점들을 늘어놓을 뿐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 정조는 개혁군주라기보다 왕조를 지탱하려 노력한 임금일 뿐이라는 시점을 강화한다. 

이 책에 등장한 각종 사료 역시 특정한 시점에서 기술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양한 방향에서 발사한 <빔>이 한 지점에서 만나 하나의 상을 맺게 한다면 그 다양한 시점은 객관적일 수 있다.
다양한 시점이 하나의 홀로그램을 완성하는 시점이 소설이나 영화에서 인기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나 역사에서 등장하는 시점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다양한 방향에서 발사된 빔들은 많은 경우 서로 겹쳐지지도 않을 뿐더러,
전혀 다른 쪽을 향하여 발사하고 있다.
역사적 자료, 곧 사료를 읽는다 하여도 <팩트>를 이해하는 일조차 어려운 것이다. 

자, 여기서 다시 독자의 <시점>이 문제가 된다.
독자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사료들을 접하고 취사선택할 것인가에 따라,
사료는 문제적 사료가 되기도 하고 무의미한 취향, 편향, 날조로 치부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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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쪽에서 '무군무부'의 한자를 "無君無夫"로 적고 있다. 156쪽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있다.
천주교가 박해받던 것 역시 <시점>의 차이에 의한 것이었다.
순조 이후 정치적 혼란기에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선택되었던 것이 천주교였을 수 있다.
그러던 천주교를 <임금도 부정하고 남편도 부정한다>고 한 것은 웃기는 일이다. ㅋㅋ
당연히 <지아비 부 夫>가 아닌 <아비 부 父>가 문제되었던 것임은 당연한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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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2-26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다운 리뷰네요. 비판적 읽기의 표본이랄까요.
'시점' 혹은 '관점'과 '차이'에 대한 말씀... 오래 생각하게 됩니다^^

글샘 2011-02-28 21:38   좋아요 0 | URL
저를 아세요? ㅎㅎ 저 다운 것이 어떤 것인지...
제가 비판적 읽기를 한단 말인가요?

'시점'과 '관점'을 혼용해서 써서 저도 혼란스럽지만,
'시점'이 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 같고, '관점'이라면 객관적인 시점을 띠려 애쓴 흔적이 보입니다.
'차이'를 애써 감추는 관점도 있구요, '차이'를 애써 드러내려는 관점도 있겠죠.
이 책은 뭐 중요한 사료를 다룬 것은 아니지만, 여러 입장의 시점을 입체적으로 드러내려한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책이었습니다.

sslmo 2011-03-01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혼란스러워 했던 부분을 '관점'이라는 단어 하나로 깔끔하게 정리해 주시네요.
위 시조의 '성리학 '얘기와 같이 읽게 되니 일목요연해져요.

글샘님의 학생들, 좀 부러운걸요~^^

글샘 2011-03-01 13:03   좋아요 0 | URL
깔끔한가요? 그럼 다행이구요. ㅎㅎ
한국을 조선의 연장선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8.15가 해방이 아니라 <광복>이죠.
다시 돌아온 조선과 임금님...

중국 학자들도 조선의 화폐에 <이순신, 이황, 이이, 사임당>이 있는 걸 보고 놀란대요.
차라리 <이승만>이 낫죠. <박정희>나...
대한민국 화폐에 조선의 성리학 대가들이 가득한 건 좀 웃긴 일이랍니다.
세종은 조금 다르지만 말이죠.

학생들은, 너무 이런저런 이야길 해대니... 오히려 혼란스러워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준이 높잖은 애들에게 너무 많은 얘길 하면 오히려 역효과거든요. ㅠㅜ
 

전에 이상을 이야기하면서, 1930년대에 도무지 이해받지 못할 짓을 한 시인이라고 이야기했다.
오감도라는 특이한 용어를 쓰면서 말이지.
오늘은 그의 작품 중 '거울'이란 작품을 살펴 보자.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상, 거울>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것은 큰 특징이라 보기 힘들어.
일본어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고,
일제 강점기의 책들 중에서 띄어쓰기가 없는 것도 많이 있었단다.
근대 이전의 책에서 띄어쓰기가 있는 다음엔
임금을 가리키는 '상(上)'같은 말이 나오곤 했지. 

거울 밖의 세계와 거울 속의 세계는 닮았지.
아니 똑같아 보이기도 한단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것이 많다.
그럴 발견하는 시인의 창의성, 한번 따져 볼까? 

우선 거울 속엔 소리가 없어. 여긴 있는데 말이야.
내 귀는 소리를 듣지만, 거울 속에도 귀는 있으나 듣지 못하지. 소리가 없으니...
나는 오른손잡이인데, 거울 속에선 반대지.

거울은 내가 비춰지지만 거울 속의 나를 나는 만질 수 없다.
만날 수 없는 <단절>의 역할을 거울이 하는 거야.
그렇지만, 또 거울 덕분에 나를 만나게 되었으니,
거울은 <소통>의 역할도 하고 있겠지? 

내가 거울을 보고있지 않을 때도, 거울 속엔 내가 들어 있어.
나는 거울 속 내가 뭘할지 모르지만
아마도 잘못된(나와 반대로 된) 일에 골몰하고 있을 거라는구나. 

거울 속의 나는 참나와 반대지만, 한편 똑같이 닮았지.
'참나'는 '거울 속의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답답하고 힘들단다.
그걸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다고 표현했어. 

이상의 <거울>은 <참 자아>와 <분열된 자아>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것이란다.
내가 살아가는 <참 자아>는 늘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비추어지는 것이기도 하지.
혼자 있을 때는 까칠한데 사람들은 부드럽다고 느낀다든지,
혼자 있을 때는 게으른데 사람들은 부지런하다고 여기기도 하지.
세상엔 <참 자아> 이외의 <분열된 자아>도 있는 거야.  

이상은 일제 강점기에 건축을 전공해서 공무원 생활을 하기도 했단다.
그렇지만 열심히 하려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세상은 엉망으로 돌아가기도 했지.
심지어 병까지 들어 요양하러 시골에 오래 내려가 있기도 했대.
<나>와 <거울 속의 나>는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느꼈던 혼란상이 잘 그려져 있는 시야.  

  나는 무얼 바라/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거울은 이렇게 세상을 똑같이 비춰주는 역할을 하면서,
사실은 따져볼수록 세상과 다른 점이 많기 때문에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지.
거울에서 연상된 공포 영화도 많을 수밖에...

다음에 읽어주는 시는 이가림의 시란다.
그의 '유리창'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한번 살펴 보렴.
임은 부재하지만, 저편에서 오는 빛을 아무도 볼 수 없지만,
나는 느끼고 나는 보인다. 임의 눈동자가 말이야. 

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 본다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 번도 더 입맞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
먼 부재의 저편에서 오는 빛이기에
끝내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오는가
얼굴을 가리우는 차가운 입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 본다 <이가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어때? 시적 화자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기대섰다.
처음과 끝이 대응되고 있지? 수미상응.
거기서 <모래알/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 본다>고 하고 있어.
유리창에서 모래알처럼 가슴 속에서 서걱거리는 이름을,
눈물 방울처럼 가슴 아리는 이름을 불러 보는 이는 이별의 슬픔을 또는
임의 부재를 서러워하는 마음이라 상상할 수 있겠구나.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이란 구절에서,
영원히 이별할 수 없는 당신을 땅에 묻은 날, 정도로 해석한다면,
임과 사별한 이의 슬픔이라고도 추측해 볼 수 있겟다. 

화자인 '내'가 일천 번도 더 입맞춘 별은 '사별한 임' 대신이겠지?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는,
정지용의 <유리창 1>에서와 같이 사별한 임을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거기서 떠올리는 상황인 듯.

어디선가 오는 이 투명한 이슬.
눈물이 주루룩 흐르는 느낌이구나.
유리창에 기대어 차가운 입김만 뿜고 섰는데,
물방울로 남은 그대의 이름,
이제 다신 만날 수 없는 그대의 이름을 하염없이 반복해 불러 보는 이의 마음을 상상해 보렴.  

이상의 <거울>은 '참 자아'와 '분열된 자아'가 어떻게 다른지를
곰곰 생각해 보는 시였다면,
이가림의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는
사별한 임을 떠올리게 되는 공간으로서의 '유리창'을 만나게 되었다.
이가림의 다른 시 중에 이상의 <거울>을 떠올리는 시가 있다. 읽어 보자.

나를 보는 나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
무한한 반사의
환한 허공 속으로
뚫린 길 

없는 나를 찾아
그림자 하나
홀로 헤매고 있다 <이가림, 순간의 거울 3>

내가 나를 보는 상황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지.
그런데 그것이 무한 반사 되는 것을 보면,
엘리베이터 양면에 붙은 거울들이 반사하고 반사하는 모습 속의 나를 떠올리게 된다.
또는 제주도 '거울의 집' 안에 비친 삼각형 거울들에 비치는 나의 옆모습 뒷모습들...  

거울에 비친 <가짜 나>는 이렇게 많은데,
거기 <진짜 나>는 없다.
세상에는 <가짜 나> 또는 <분열된 자아> 내지는 <남들이 본 나>는 많지만,
정말 <나>는 어디 있을까?
<내 마음>이란 것은 어디 있을까? 

'없는 나'를 그 '숱한 나들'로부터 찾아내는 눈이 신선하다.
세상에 '없는 나'를 찾아서,
세상을 홀로 헤매는 그림자가 있다. 그 그림자가 현실의 '나'다.
자기가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은 어떤 인간인지 제대로 알기는 참 어려워보인다.
이가림의 '순간의 거울' 다시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이상의 '거울'과 함께. 

세상의 삶은 자기가 살려는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쓴 시가 있다.
<환목어>라고 한다. 우리가 <도루묵>이라 부르는 생선의 이름의 유래가 담긴 시다.

목어라 부르는 물고기가 있었는데
해산물 가운데서 품질이 낮은 거지.
번지르르 기름진 고기도 아닌데다
그 모양새도 볼 만한 게 없었다네.
그래도 씹어보면 그 맛이 담박하여
겨울철 술안주론 그런대로 괜찮았지.

전에 임금님이 난리 피해 오시어서
이 해변에서 고초를 겪으실 때
어가 마침 수라상에 올라서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해 드렸지.
그러자 은어라 이름을 하사하고
길이 특산물로 바치게 하셨다네.
난리 끝나 임금님이 서울로 돌아온 뒤
수라상에 진수성찬 서로들 뽐낼 적에
불쌍한 이 고기도 그 사이에 끼었는데
맛보시는 은총을 한 번도 못 받았지.
이름이 삭탈되어 도로 목어로 떨어져서
순식간에 버린 물건 푸대접을 당했다네.

잘나고 못난 것이 자기와는 상관없고
귀하고 천한 것은 때에 따라 달라지지.
이름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한 것
버림을 받은 것이 그대 탓은 아니라네.
넓고 넓은 저 푸른 바다 깊은 곳에
유유자적하는 것이 그대 모습 아니겠나. <이식, 환목어> 

목어(묵)가 푸대접 받다가,
임금이 피란왔을 때 대접을 받아 '은어'라 불렸대.
그렇지만 전란이 가라앉자 다시 '목어'가 되었단다.
(도로 묵이 되었다고 <도루묵>이란 이름으로도 불린대.) 

이 이야기에서 얻은 교훈을 마지막 연에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단다.
이름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한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필요하면 칭송하고,
필요하지 않으면 버리는 세태임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것이지. 

목어는 원래 푸른 바다 깊은 곳에서 유유히 헤엄칠 뿐인데 말이야.  

인간은 원래 모두 <부처>라고 했잖아.
그런데 세상에서는 누구는 1등급이고 누군 9등급으로 나누기도 하고. 한우도 아닌데 말이지.
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사람의 <본질>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평가>일 뿐임을 안다면 마음을 넓게 가질 수도 있겠구나. 

<환목어>같은 시는 세상을 '풍자'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필요하면 등용하고 쓸모가 없어지면 금세 잊어버리는 세태를 비꼬려고 주워든 이야기니 말이야. 

자, 오늘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을 다룬 시들을 만나 보았다.
세상은 내가 보는 것처럼 한쪽 면만 가진 것은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어.
나와 다른 편에서 바라보는 시선도 있음을 깨닫는다면
세상이 불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배움도 얻을 수 있겠다. 

내일부터 며칠간은 좀 푹 쉬자.
새 학기 시작할 때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도록.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에서도 '분열된 자아'가 등장하지만,
차이점이라면, 이상의 시에선 분열되기만 했던 것이,
윤동주의 시에선 <악수>를 함으로써 <화해>의 분위기가 보인다는 정도겠지. 

오른손잡이끼리 악수를 하면, 당연히 오른손끼리 잡아야 하는데,
그 아이는 반대니 악수를 할 수 없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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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02-28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거울속의 나도 유리창의 기댄 나도 어쨌든 "나"이고 나로서 사랑하고 싶고, 사랑하고 있다면 자기애가 심각한 수준인거요? 아무래도 시대를 걱정하기보단 일상을 즐기며 살고 있어서 이런가 봅니다~
거울이 보이지 않아도 그속에 나는 있고, 오른손이라 악수를 못해도 마주 웃어줄수 있으니 행복하게 삽니다~

글샘 2011-02-28 21:40   좋아요 0 | URL
일상 속의 '나'도 시대를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대 속에 있겠지요.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사신다니 감사합니다.
이런 말을 듣는 일이 하도 드물어서요. ^^
저도 요즘 날마다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
 
49일의 레시피 키친앤소울 시리즈 Kitchen & Soul series 1
이부키 유키 지음, 김윤수 옮김 / 예담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태양을 등지고 삶을 버리려 했을 때 무지개는 나타난다.(260)   
   

오토미가 죽었다.
오토미의 남편과 딸은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들이다.
그런데 동화처럼 요정들이 나타난다. 

이모토란 '말괄량이 삐삐'가 나타나 오토미의 레시피를 통해 활기를 불러 넣어주고,
하루미란 외국 총각의 하얀 와이셔츠도 집안을 정리하게 도와준다. 

태양을 향해 걸어갈 때는 무지개를 볼 수 없다.
무지개는 태양을 등진 자리에서 굴절각이 맞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오토미의 남편 아쓰타와 딸 유리코는 태양을 등진 곳에서 무지개를 맞았다.
그 무지개는 오토미의 삶의 발자국이었고,
그 발자국에서 연결된 <리본 Re-Born> 프로그램이었다.
삶의 희망을 놓아버리려 할 때,
다시 태어나게해주는 레시피, 그것은 곧 테라피였다.
치료이자, 처방전으로서의 레시피.

   
 

우리는 테이크오프 보드예요.
뜀틀에 발판이 있잖아요. 우리는 그 발판이에요.
뛰어가서 발판을 힘껏 차고 날아오르면 이제 떠올리지 않아도 돼요.
과거를 뛰어넘었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가지고 똑바로 달려가면 되는 거예요.
돌아보면 안 돼요.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생각해서는 안 돼요. 날기 전의 세상일은.
...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은 인생인지도 모르죠.
그래도 내 일을 테이크오프 보드로 해서 분명히 누군가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세상은 수없이 많은 익명의 테이크오프 보드로 이뤄졌다...(193) 

 
   

가치없는 생은 없다.
인생은 누구나 다른 이에게 테이크오프 보드가 될 수 있다.
그 익명의 테이크오프 보드들로 인하여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해 질는지도 모르겠다. 

일본 소설의 가벼움을 충분히 살렸으면서도,
우중충한 구석을 경쾌하게 날려버리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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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2-24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예뻐요. 다른이에게 테이크오프 보드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겠죠.
고종석의 여자들 빌려다만 놓았어용^*^
빌려다 놓은 책은 10권. 완독한 책은 0권. 요즘 이렇게 살아요. 책만 읽으면 10분만에 잠들어요. ㅠ

글샘 2011-02-24 13:05   좋아요 0 | URL
강유원 선생님 책을 보세요. ^^
살이 되고 피가되는 책입니다.
강유원 선생님의 <주제> <몸으로 하는 공부> <책과 세계> 같은 책들은
책을 어떻게 왜 읽을 것인가... 이런 공부에 도움이 되실 겁니다.
대학원 공부가 바쁘실수록 요런 책들을 읽어 보시길...
그리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시려면, <인문 고전 강의>와 <서구정치사상고전읽기>도 한번 보시구요.

뭐, 이런 책들은 5분만에 꿈나라로 모실 수 ㅎㅎㅎ

세실 2011-02-27 10:45   좋아요 0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고전강의 빌려다 놓았습니다.
적어도 20분은 버틸거라구욧^*^

글샘 2011-02-28 21:39   좋아요 0 | URL
잘 하셨습니다.
이제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도 한권 빌려다 두세요. ㅎㅎ
강유원보다는 강신주가 훨씬 말랑한 읽기일 것입니다.
강신주는 아마 잠을 못이루게 만들지도 몰라요. ㅎㅎ
 

아침에 같이 차 타고 가는데,
창밖에 봄이 온 것처럼 온 세상이 환하더구나.
나무는 아직 새카맣게 보이지만,
지난 토요일이 雨水였단다.
더이상 눈이 오지 않고 비가 온다는,
얼어붙은 대동강(패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 

바야흐로 봄이다.
곧 화창한 햇빛과 함께 꽃들이 홍수처럼 밀려올 것이다.
동양 철학에서 봄을 '태양'의 계절이라고 한단다.
여름을 '소양'이라고 하고.
여름이 '양'의 기운이 더 많아보이지만, 사실은 봄이 더 많대.
여름은 이제 시들어 가는 거지. 

사람이 패기있고 의욕적인 시절도 생각해보면 꽃피기 전인 너희때가 아닐까 싶어.
아직 무엇이든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말이다.
오늘은 성실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김동환의 '북청 물장수'는 읽는 맛이 상큼한 시란다.
마치 봄냄새가 가득한 냉잇국을 후루룩 마시는 기분이야.
한번 읽어 보렴.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 물을 솨-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김동환, 북청 물장수>

수돗물이 일반화되기 이전.
도시엔 이렇게 물장수가 많았단다.
매일 물을 길어다 넣어 주고 얼마를 받았겠지. 
그들은 어머니들이 아침에 밥하기 전에 물을 부어주고 가야했을 테니,
얼마나 부지런했겠니. 

새벽마다 꿈이 아직 현실로 넘어오기도 전에,
솨~ 찬물을 붓고 가는 물장수.
그가 사라질 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이유는 뭘까?
물장수가 멀어져가는 걸 생각하면서 그의 발걸음이 내 가슴을 디디고 가는 건,
그이의 물 붓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일 거야.
화자의 애정이 잘 담겨 있지.  

북청 사람들 중에 서울 지역에 물을 대주는 이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청신(맑고 신선한)한 새벽의 분위기를 전해주는 사람들이지.

'물에 젖은 꿈'은 새벽의 신선한 분위기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거야.
아직 잠이 덜 깬 이른 새벽에 물을 날라다 붓는 물장수에 대한 화자의 애정이 담긴 표현이지.
마지막 연에서 날마다 기다려진다고 하여 애정이 더 강조되고 있단다. 

주제는 '북청 물장수에 대한 신선한 감각과 그리움' 정도가 될 거야.
무슨 일을 하든 즐겁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일을 맡겨도 힘들다며 핑계로 일관하는 투덜이도 있단다.
북청 물장수는 비록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일을 하진 않지만,
오히려 험한 일이기도 하지만,
신이 나서 흥겹게 일을 하는 멋진 사람으로 보이는구나.
시인 김동환은 '국경의 밤'이란 서사시로 유명한 사람이다. 
다음에 더 살펴볼 기회가 있을 거야. 

제 고향 떠나 서울에서 물장수 하는 북청(함경남도 동해안) 사람들의 외로움도 컸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동환의 시에서는 서글서글 일 잘하는 그들의 모습이 유쾌하게 그려졌다.
다음엔 고향을 잃고 외로워하는 김소월의 시를 몇 편 보자.

물로 사흘 배 사흘
먼 삼천리(三千里)
더더구나 걸어 넘는 먼 삼천리(三千里)
삭주구성(朔州龜城)은 산(山)을 넘은 육천리(六千里)요

물 맞아 함빡히 젖은 제비도
가다가 비에 걸려 오노랍니다
저녁에는 높은 산(山)
밤에 높은 산(山)

삭주구성(朔州龜城)은 산(山) 넘어
먼 육천리(六千里)
가끔가끔 꿈에는 사오천리(四五千里)
가다오다 돌아오는 길이겠지요

서로 떠난 몸이길래 몸이 그리워
님을 둔 곳이길래 곳이 그리워
못 보았소 새들도 집이 그리워
남북(南北)으로 오며 가며 아니 합디까

들 끝에 날아가는 나는 구름은
밤쯤은 어디 바로 가 있을 텐고
삭주구성(朔州龜城)은 산(山) 넘어
먼 육천리(六千里) <김소월, 삭주구성(朔州龜城)>

삭주 구성은 평안북도 군청 소재지로  화자가 가고 싶고 그리워하는 공간이란다.
화자의 고향인 모양이지.

1연은 고향 삭주구성의 멂을 표현한 것이다.
화자가 가기엔 너무 먼 거리감이 생생하지.

2연의 '물 맞아 함빡히 젖은 제비'는
고향엘 가다가 비에 걸려 돌아오더라는 이야기를 끌어들이고 있다.
자신의 처지도 비 만나 고향에 못 가는 제비와 같다는 것이지. 동병상련.
제비는 비 만나 못 가고,
화자는 높은 산(山), 높은 산(山) 때문에 못 가고... 

3연에서는 6천 리 거리를 가지 못하지만,
가끔 꿈에는 4,5천 리라도 가다 오곤 한다는 이야기.

4연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절실함을 노래하고 있다.
'새들'도 집이 그리워 오며 가며 하더라마는
인간인 화자는 집이 그리워도 오갈 수 없는 아쉬움. 

5연에선 '구름'도 밤엔 고향 가까이 어디쯤 갈 수 있을 테지만,
내 고향 삭주구성은 산이 가로막은 먼 육천 리... 거기 있어 가지 못한다는 아쉬움 가득.
한국은 제주에서 백두산까지가 3천 리밖에 안 되는데,
육천 리라고 표현한 것은 <심정적 거리감>이 그만큼 크다는 이야기겠다.

이 시도 소리내어 읽어 보면 7.5조의 운율감이 느껴지는 부분도 많단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에서도 그런 운율을 찾은 적 있지.
일제 강점기엔 당연히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동환의 '산너머 남촌에는'을 보면, 7.5조가 확연히 드러난단다.
소리내어 운율만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1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南)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데나.

2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데나.

3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재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었다 이어오는 가는 노래는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김동환, 산너머 남촌에는>

잃어버린 고향은 <산너머 남촌>이란 이상향으로 소생했다.
7.5조의 운율과 함께 희망차고 활기 넘치는 산너머 남촌이 멋진 그림으로 살아오는 시다.  

다음엔 김소월의 '나그네' 설움을 읽어 보자. '길'이란 유명한 시다.

어제도 하룻밤
나그네 길에
까마귀 까악까악 울며 새었소.

오늘은
또 몇십리
어디로 갈까.

산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말 마소 내 집도
정주 곽산
차 가고 배 가는 곳이라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십자 복판에 내가 섰소.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김소월, 길>

1연에서 ‘어제도’라고 표현하여 유랑생활이 계속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구나.
3,4연까지는 차가고 배가는 내 고향엘 나는 못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그네의 설움. 

그러다 올려본 하늘엔,
기러기가 잘 가고 있다.
공중엔 길 있어 잘 가는가?
아, 얼마나 고향엘 가고 싶으면 고향 가는 기러기가 저리도 부러울까.  

6연에서 기러기에게 아예 하소연을 한다.
당신은 고향엘 그리도 잘 가지만,
나는 열십자 복판에 섰소.
열십자는 4거리잖아. 어디로 가야할지 나는 모르겠다는 이야기지.
고향엘 가지 못하는 외로움.
이런 부조리가 어디 있겠니?
그렇지만 식민지와 도시화는 사람을 부조리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 일쑤였단다.

마지막 연에서 <갈래갈래 갈린 길 길~>에서는 같은 음운이 반복되면서 재미를 주는 곳이지.
갈래갈래 갈린 길이 저렇게 많지만,
내가 갈 길은 바이(전혀) 없다는 절망적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어.

이 시의 운율 역시 7.5조라고 볼 수도 있고, 3음보로 볼 수도 있단다.
갈 고향 잃은 화자의 서러운 처지를 하소연하는 문체로 표현하고 있지.
김소월이 이렇게 '나라 잃은 민족 전체의 비애어린 삶'을 주제의식으로 표출한 시는 제법 된단다.
'엄마야 누나야'도 그렇고, 문학 교과서에 실렸던 '초혼'도 그렇게 볼 수 있지. 

박목월의 '나그네' 역시 이런 유랑민의 허전한 마음을 그린 시로 보기도 한단다.
나그네는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초혼'을 한번 읽고 마치기로 하자.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김소월, 초혼(招魂)>

이 시는 한 연을 4행으로 가지런하게 배열한 단정한 시다.
혼을 부르는 '고복 의식'이 드러나 있지.
망자의 혼을 세 번 부르는 것은 절절한 그리움과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1연에서 <이름이여!>를 네 번이나 반복하고 있구나.
간절하게 고인을 부르는 소리로 '초혼제'의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부서진 이름', '헤어진 이름', '주인없는 이름'
이런 것으로 고인이 된 당신을 상정하고,
'부르다가 내가 죽을 것 같은 이름'으로 화자의 아픈 마음을 표현했다.  

슬픔이 전혀 절제되지 않고 있지.
슬픔이 절절하게 표출되고 있어서 화자의 절규가 잘 드러나는 시란다. 

2연에선 끝끝내 마저하지 못한 한 마디 말을 외친다.
'사랑했다고' '사랑했다고...'  

3연의 '서산 마루에 걸린 붉은 해'는 <하강>의 이미지를 갖는다.
죽음의 시는 이렇게 <하강>의 이미지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단다.
사슴도 슬피 우는 것은 <감정 이입>이 되겠다.
사슴은 그저 우는 것이지만, 화자가 슬프니 이입된 감정이지.
'떨어져나가 앉은 산'이 화자의 현재 위치다.
무덤 가에 갔는지도 모르겠구나.
거기서 목놓아 그대를 부른다. 

4연의 설움에 겹도록 부르는 소리가 반복되는 것 역시
복받친 감정이 거칠게 여과되지 않고 그대로 표출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대를 부르는 소리는 그대에게 가지 못하고 비껴간다.(빗나간다.)
나는 여기 땅에서 그대를 부르고,
그대는 거기 하늘에 있는가?
그 사이가 너무 넓다는 건, 그만큼 거리감을 실감한다는 이야기다. 

5연에서 망부석 설화처럼 '슬픔이 응결'되어 <돌>이 될지라도,
나는 절절하게 그대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사랑했다고, 진정 사랑했노라고... 

죽은 임에 대한 사랑의 노래이기도 한 이 시는,
망해버린 조국에 대한 애국의 노래일 수도 있단다.

이 시에서 <죽음>은 혼백이 사라짐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화자는 사랑한다는 말을 못해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을
그대가 돌아오면 들려주고 싶다는 절규로 소리친다.
물론 그 소리는 그대에게 갈 수 없다.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어 그런가. 비껴갈 뿐이다.

이 시에서 그려진 고복 의식, 곧 '초혼(招魂)'이라 불리는 이 의식은
사람의 죽음이 곧 혼의 떠남이라는 믿음에 근거하여 이미 떠난 혼을 불러들여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려는 간절한 소망이 의례화된 것으로서,
사람이 죽은 직후에 그 사람이 생시에 입던 저고리를 왼손에 들고
지붕이나 마당에서 북쪽을 향해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즉, 초혼은 죽은 사람을 재생시키려는 의지를 표현한 일종의 '부름의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의 운율 역시 3음보로 이뤄져 있지만,
격렬한 감정이 표현되는 구절은 2음보로 이뤄져 있기도 해서 감정에 충실하고 있다. 

현대인은 모두 고향을 잃은 존재라고들 하더라마는,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있는 곳이 모두 고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란다.
어린 시절에 오래오래 한 곳에서 살면 평생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있을 수 있겠지만,
유목민처럼 고향이란 것이 마음에 없더라도 평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도 있는 일이지. 

다만, 유목민의 생활에선 더욱 에티켓과 명확한 이해타산이 계산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수십 년을 바라봐서 말하지 않아도 아는 농경 부족의 습관보다는,
매순간 새로 만나 정확한 표현이 발달한 유목 부족의 습관이 유리할 때도 많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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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들 민우야.
바야흐로 봄이 오는구나.
이제 너는 학교로서는 최고 학년인 고3이 될 순서고.
이제까지 학교를 11년간 다닌다고 고생 많았다. 

마지막 한 해를 정말 성실하게 잘 보내길 바란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지난 19년간 참 여러 번 이야기했을 것 같구나.
한국 사회가 열린 사회라면 아빠가 시 특강을 했을 때,
그렇게 부정적 현실에 대한 저항 이야기도 많이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 밝지만은 않기 때문에,
또,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진다고 그것이 손쉽게 이뤄지지 않는 시대기 때문에,
너희는 한층 고민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삶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
이것은 인류가 존속하는 한, 최대한의 공통적인 의견이 아닐까 해.
나는 어디쯤 와서 살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디로 갈 건지...
이런 것이 철학이고,
그것이 바로 고전이고, 문학이고,
결국, 책에 쓰인 것은 다들 그런 것들이란다. 

오늘은 자신의 삶을 돌아본 시들을 몇 편 소개할게.
우선, 시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본 김광균의 '노신'을 읽어 보자.

시(詩)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기적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 것의 베갯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을 씻어 내린다.
노신(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上海) 호마로(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거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傷心)한 사람이 있다. <김광균, 노신>

'노신'은 중국어로 '루쉰'이라고 읽는다.
루쉰은 중국의 정신적 스승으로 일컬어지던 분이다.
중국이 일본에 패망하던 어렵던 시절,
꼿꼿한 정신으로 중국인의 멍청한 정신 상태를 꾸짖던 분이기 때문이지.
루쉰의 소설로 "아큐정전"이란 작품이 있다.
'아큐'란 바보는 늘 '과거에 나는 잘났던 인물이야. 우리 집안은 대단한 집안이지.'이렇게 착각을 일삼는 놈이지.
얻어맞으면서도 '나는 똥이야. 나를 때린 저놈은 똥을 때린 거지.' 이렇게,
바보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정신적 승리>라며 좋아하던 바보란다.  

근대 중국이 그랬다는 비유지.
마치 조선이 왜구에 불과하던 일본이 통일국가가 된 후 서구 문물을 받아 들이고,
급기야 조선과 중국을 침범하는데도,
왜놈들, 쪽바리들, 이러면서 무시하기만 하다가 망해버린 것을 꾸짖는 거야. 

화자 김광균은 젊은 나이로 '시인'이란 직업이 못마땅하다.
가족을 먹여살리기도 어렵기 때문이지
서른 먹은 화자는 <시를 믿고 살기 어려워서> 잠을 못 잔다고 그래. 

멀리 기차의 기적소리 들리고,
아내와 어린 아기는 잠이 들었는데, 창밖엔 눈이라도 쌓이나 봐. 

시인이란 사람은,
어디 잡지사 같은 데서 책을 만드는 일을 도와주며 살겠지.
근데, 그 일이 그닥 쉽지만은 않구나. 

무수히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이런 구절에서 보면, 먹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이 나지 않니?
실제로 뺨을 얻어 맞거나, 돌팔매를 맞은 것은 아니겠지만,
먹고 산다는 것.
그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일제 시대에 말이지. 

그래서 혼자 등불을 켜고 일어나고, 담배를 피워 물어.
그건 내적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는 과정이지.
혼자서 온갖 고민을 다 하는 거야.
가족을 먹여살리기 어려운 가장의 비애. 그런 거. 
그러노라면, 쓸쓸한 고뇌로 오장육부,
창자를 쓸어내리는 고통이 느껴지지. 

그런 고통스런 밤이면,
중국의 '루쉰'을 떠올리게 된다는 거야.

온 세계가 제국주의의 고통으로 울고 있는 시절.
상하이의 '호마로' 어느 뒷골목에서
루쉰은 홀로 쓸쓸히 등불 아래서 시를 썼겠지.
물론,
고통스런 마음으로 가득한 삶이었겠고 말이야. 

그러면,
마치
루쉰이 나에게 속삭거리듯,
등불아래서 그이의 목소리를 듣는 듯,
혼자서 이런 느낌을 갖게 된단다. 

"여기 하나의 상심(傷心)한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옛날 중국에서 근대화를 위하여 고통을 이기며 견뎌냈다.
너는 지금
한반도의 어려움 속에서 시인으로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어려움처럼
너의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 
나도 상심했었으나 이겨냈든, 너도 상심을 이겨내기 바란다. 

이런 동병상련의 마음을,
거기서 얻는 힘을 나타낸 시가 바로 <노신>이리라. 

시인 김광균이 가족을 부양하기도 힘든 상황을 당했던 거 같다.
그 때,
중국의 힘겹던 세월을 부득부득 이겨낸 '루쉰'을 생각하며
힘겨운 세월을 이겨낸 화자의 심정을 잘 나타낸 시로 보인다. 

이번에도 먹고 살기 위하여 교사라는 직업을 택한 어떤 시인의 시를 읽어보자.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정희성, 길>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지낸 세대는
자식이 떵떵거리는 권력을 가지거나 적어도 지식인으로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처럼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국가에서
4년제 대학은 무조건 보내야 한다는 통념이 생겼을 것이다. 

자식이 공부를 잘 하는 경우에,
부모는 자식이 법관이 되거나, 좋은 대학을 나와서 여러 친구와 함께 사업을 하길 바랐던 것이 흔했다.
돈없는 사람도 높은 권력을 잡기 쉬운 것이 법관이었고,
돈만 많이 벌면 또 세상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화자는 어쩌다 보니,
국문과를 가서 시를 읽고 쓰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국어 선생이 되어
높은 권력자가 되지도 못했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되지도 못했다.

아니, 거꾸로 나이 마흔이 되었는데도 아직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시절.
옆 자리에 누워 자는 아내도 화자의 처지를 비웃는다.
참 삶은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화자가 서러운 것은
법관이 되거나 돈을 못 벌어서만은 아니다.
화자가 미친듯이 공부를 했으면 법관이 되었을 수도 있고,
화자가 미친듯이 사업을 했으면 돈을 벌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화자의 현실에서 서러운 일은,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니?
세계에서 '행복 지수'를 따져 보면,
가난한 나라가 '행복'을 느끼는 경우가 많단다.
방글라데시는 최빈국 중의 하나지만, 늘 행복은 최고 지수를 얻곤 하지.
그건, 모두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함이 멸시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한국도 전쟁 이후가 지금보다 더 행복한 세대였는지 몰라. 

지금 한국은 세계에서 '자살률 1위, 출산저하율 1위' 이런 불행한 국가거든. 
행복하지 않은 거지. 죽고 싶고, 자손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세상.
어떻게든 세상 사는 일에 적응하는 일에 길들지 않은 화자에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고,
노엽다는구나. 

화가 날 수밖에 없지 않겠니?
그래서 아내에게 말한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아내에게, 울지 마라.
법적으로 잘못하지 않고,
그저 평범한 교사로 살고 싶은 게 화자의 꿈이지만,
그렇게 살기 참 어렵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옳은 것을 옳다고 가르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면, 감방엘 가던 시절이 한국에선 먼 과거가 아니었거든. 

그래도 화자는 마음은 단단히 먹는다.
어쩌겠는가.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서,
화자의 마음을 비겁한 곳으로 돌리려 해도,
화자는 꼿꼿한 마음으로.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시야.  

제목인 '길'은 '인생'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지.
이 시의 화자에게 '길'은
교사로서의 '인생'이었다고 보면 될 거야.
아빠도 그렇지만, 옛날 시절의 선생님은,
꼿꼿한 정신의 상징처럼 여겨졌단다.
절대로 더러운 일에 공감하지 않는 선비 정신을 가진 존재.
큰 돈을 벌러 떠났다면 그 뜻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을,
아이들과 이런 저런 일로 소일하는 것을 낙으로 삼아,
권력도 돈도 손에서 놓친 사람들. 그런 존재. 

그래서 선생님들의 삶은 어쩌면 권력도 돈도 놓쳐버린 패배자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아빠는 아직도, 교사가 가져야 하는 자존심 하나를 믿고,
어리석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 시가 바로 '길'이란 시야.
아빠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한단다. 

민우가 어떤 삶을 살지 모르지만,
아빠는 나의 살아온 길에 대하여, 나름대로 만족한다.
시대를 잘 만나, 먹고 살 만하고, 아빠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말이야.
물론, 정말 아이들과 즐겁게 수업하고 열정적인 교육활동을 펴기엔 학교가 답답한 구석도 있지만,
아빠가 살아온 삶에 대하여 아빠는 나름의 자존심과 행복을 느끼고 있거든. 

세상은 남의 눈으로 보는 게 아닌 거 같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것.
그것만큼 아름다운 일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아빠는 나이가 들수록 자주 하게 된단다.
다음엔 박재삼의 <흥부 부부상>을 읽어 보자꾸나.
아빠가 하던 이야기와 상통하는 주제를 담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헤아려 보라.
금이 문제리.
황금 벼이삭이 문제리.
웃음의 물살이 반짝이며 정갈하던
그것이 확실히 문제다.

욕심이 없는 웃음의 아름다움
없는 떡방아 소리도
있는 듯이 들어내고
손발 닳은 처지끼리
같이 웃어 비추던 거울면들아.

가난 속에서도 서로 위로하던 웃음
웃다가 서로 불쌍해
서로 구슬을 나누었으리.
그러다 금시
절로 면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본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확실히 문제다. <박재삼, 흥부 부부상>

자, 여기서 흥부 부부는 어떤 존재로 거론되냐면 말야.
엄청 가난한 사람들이잖아. 그치?
근데... 그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는 말이지. 

가난한데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가난하다고 이야기하는 건,
글쎄, 과연 어떤 것이 부유한 거고, 어떤 것이 가난한 건지 생각해 봐야 한단 거야. 

엄마 아빠가 어리던 시절, 한국은 전쟁을 겪고 난 후였단다.
그래서 유엔의 원조도 받고, 거지같이 살던 시대였어.
새옷을 사입기도 힘들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기 힘들었지.
돈이 없으면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기 어려웠단다.  

이 시에서 흥부 부부가 박을 가르기 전,
그 상황을 생각해 보자고 한다. 

흥부 부부가 왜 박을 가르려 했지?
제비가 <보은표>, 곧 은혜를 갚는 박씨(報恩瓢)를 가져다 줬고,
그 박이 쑥쑥 자랐고,
근데, 배가 고파 죽겠고,
박 속이나 파서 죽이나 쒀 먹자고 켠 거거든. 

근데,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생각해 보래. 

그건, 배가 아무리 고파도,
부부 사이의 정,
초코파이 없이도 다사롭게 나눌 수 있는 정에 대한 이야기잖아.
그건, <금 덩어리>나 <황금 벼이삭>같은 금전적 문제를 초월한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단다.
흥부 부부가 <웃음의 물살이 깨끗하게 반짝이던 그것>이 중요하다는 거지. 

앞의 <황금 벼이삭이 문제랴>는
돈이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고,
뒤의 <확실히 문제다>는
믿고 사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는 이야기지.
똑같은 <문제>란 단어도,
앞의 것은 '노 프라블럼'이고, 뒤의 것은 '썸씽 굿'이란 이야기야. 

이 정도 했으면 2연은 그냥 휘리릭~~~ 넘어간다.
욕심없어도, 아름답다.
노 프라블럼.
가난해서
떡방아 찛을 것 없는 집(백결 선생 전설도 있잖아.)도
방아 찧을 것도 없는 집에서 거문고로 둥~더덩~ 울리는 음악도
곡식 있는 듯이 들어 주고 말이지,
손발 닳게 고생하던 사람들도,
같이 웃으며 서로 빤히 사정 알던,
거울에 비친 것처럼 사정을 뻔히 알던 사람들끼리
더 가지고 못 가진 것에 대하여 자랑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던 것처럼,
노 프라블럼!!! 

언더스탠드???
이런 생황이 이해가 가니? 

가난한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하던 웃음,
동병상련의 처지.
웃다가
서로 불쌍한 맘에
서로 눈물을 나눴겠지.
그 눈물은? 뭐로 비유되었다고? 그래. 구슬. 

이 흥부 부부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사람일까?
그건 아니겠지?
흥부 부부는 가난해서, 먹을 게 없어서 박을 탔던 사람들이었으니 말이야.
그들이 추구했던 행복은, 바로 <정신적인 것>이었겠다. 

그러다 금시
절로 면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본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이런 부분을 읽어 보면, 히야~ 시인은 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독심술사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둘이서 박을 타다가 서로 하도 불쌍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치자.
그러다가 금세,
두 부부의 얼굴에 맞닿은 눈물을 느끼고는,
서로 부끄러워하여
물살들이 서로 부딪혀서 반짝이는 빛을 내듯,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가난하지만,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웃음을 짓는 그 웃음,
그 본웃음의 물살.
그런 흥부 부부의 웃음의 물살을 생각해 보자. 

가난하지만,
서로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는 사랑의 마음들이 지어내는
본웃음 물살. 
이것이야말로 <확실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확실한 문제>는
삶의 의미,
과연 부유한 삶만이 삶일까?
이런 <삶의 의의>를 따지는 시가 이 시가 되는 것이다. 

이 시가 탄생했던 1960년대는 참 가난했던 시대였다.
유엔의 원조를 받던 시대.
그렇지만, 그 가난했던 시대의 가족은 <흥부 부부>처럼 <행복>을 느끼기도 했던 것이고,
정말 가난하다고 해서 <행복>을 모르겠는가? 하면서 삶의 의의를 나누던 시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예전 어떤 싹퉁바가지 없던 광고처럼,
당신이 어떤 아파트에 사는가가 당신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가난을 무능력으로 취급하던 시대는 아니었던 거다.
이 시의 주제는 바로 <가난한 삶의 애환과 소박한 행복, 가난한 삶의 애환과 그 정신적 극복.
정신적 행복을 추구하는 소박한 인간상> 이런 것들이었다고 보인다. 

민우야.
세상은 참 복잡하고 끝없이 가지가 많아 보인다.
그걸 누구랑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답도 여러 가지일 것 같구나. 

나는 행복하다, 아니다를 혼자서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늘 주변 사람들과 얽히고 설킨 속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미치고 싶었을까? 

아빠는 만약에 내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다면,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많단다.
그 때는, 독립 투사가 되기보다는 아마도 정신병자가 되었을지 모른단 생각을 해봤어.
그런 시대적 상황을 글로 쓴 사람이 아마도
'이 상'이란 작가가 아니었나 싶다. 

그는 '김해경'이란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이상' 곧, 이상한 놈, '싸이코'란 별명을 쓴 거잖아.
지금은 '정지훈'이가 '비'란 이름을 써도 문제가 없지만,
80년 전에 <싸이>란 이름을 쓴 '이상'은 확실히 <문제 작가>임에 틀림 없었지. 

니네가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하다고 하는 지 몰라도,
나는 일제 강점기에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모르겠다~ 얼라리요~ 헐~
이런 시가 바로 <오감도>란 생각이 들어.
우선 <오감도의 1호>를 한번 읽어 보자꾸나.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 오감도- 시 제1호> 

이 시는 절대로! 수능에 날 수 없는 문제란다.
해석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 

그렇지만, 이상이 왜 이런 시를 썼을지는 상상해 볼 수 있지 않겠니?
그 시대의 문제작이었으니 말이야.
이상이 이런 시를 쓴 것은,
확실히 그것은 <문제>였거든.  

<오감도>란 어휘는 한국어에 없단다.
<조감도>는 있지.
새가 하늘에서 <부감 : 날면서 내려다 보기>하는 듯 그린 그림을 <조감도>라고 그래.
그럼, 오감도는?
언어 유희일 수 있어.  

너희 인간 사는 세상?
족까지 말라고 해~ ㅋ
니들이 알긴 뭘 알아? 

일본 넘들? 조선을 먹었다고?
니들도 족까지 마~ 일본은 뭐, 만 년 간대니?
이렇게 하늘서 내려다본 새의 시선에서 인간 세상의 미약함을 비웃는 시선이었는지도 모르지.
근데, 왜 <조감도>를 <오감도>로 바꿨냐고? 

아, 일본 넘들도 <조감도>는 뭔가 하느님의 시선이잖아.
그러면, 일본 넘들을 비판하는 <하느님의 뜻>일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러니깐, 새 조(鳥)자에서 작대기 하나 떼고, 까마귀 오(烏)자를 쓰면
뭐, 무슨 뜻인지 설명할 필요도 없잖아.
미친갱이란 뜻의 <싸이코>란 이름으론 도저히 방송에 출연이 불가하니깐, <싸이>라고 쓴 넘이 부른 노래 알아?
<완전히 새 됐어>거든.
원래 <완전히 좆됐어>라고 욕으로 노랠 만들었는데,
그럼 당연히 방송 불가거든.
그래서, '새 조'자를 응용해서,
<완전히 새 됐어>로 바꿔서 성공했지. 

천재 시인 <이 상>을 그대로 본딴 것이
'싸 군'의 '오나전 새 됐어'야.
시대는 바뀌었지만, 아이디어는 같지. 

이 시에서 13인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 하는 이가 많아.
그치만, 13일의 금요일이 예수가 죽었다는 이도 있고,
제목의 <까마귀 오>자와 연계하여 불길하다는 이도 있고 그래.
사실,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ㅋㅋ 
아마, 세상 사람들아,
엿 드실래요? 이런 의미였는지도 몰라. 

이 시에서 생각할 점은
<무서운 아해>야. 

자, '무서운 아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건, <무섭게 보이는 아이>란 뜻과, <무서워 하는 아이>란 뜻으로 볼 수 있어.
중의적이지.
이 13인의 아해는 무서워 보이는 아이기도 하고,
무서워 하는 아이기도 해. 

자, 오감도.
조감도야.
하느님의 시선에서, 즉,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니,
세상은 참 요지경이지. 웃기거든. 

일본 넘들이 조선 넘들을 잡아 먹고 아웅다웅 하고,
조선 넘들 중에도 일본넘 앞잡이들이 동족을 괴롭히고 그런단 말이지.
웃기지 않겠어? 하느님 입장에서? 

조선 넘이 조선 넘을 괴롭히고,
조선 넘이 조선 넘을 무서워하고 말이지.
'무섭게 보이는 넘'이 곧 '무서워 하는 넘'이고 말이야.
이건 뭐,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란다.
국가 간의 관계나, 인간 간의 관계나 똑같고, 다 다르지. 

길은 막다른 골목이나 뚫린 골목이나, 모두 적당하다고 그랬지?
일제 시대에도 힘겹게 살았고,
지금은 해방된 세상인데도 살기는 힘겹단다. 

막다른 골목, 일제 강점기에 모든 아해들은 <두렵다>고 그랬겠지?
그러나 뚫린 골목,
아해들이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세상은 <두렵다>고 볼 수 있어. 

세상은 늘 불안의 요소를 안고 있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라고 볼 수 있는 거야.
그래서 이런 시들을 <모던>하다고 한단다. 현대적이라고.

띄어쓰기를 하나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 한국어나 일본어는 명사를 중심으로 조사가 붙은 형식이어서 띄어쓰기가 큰 의미가 없으니
이런 양식이 가능한 거란다.
영어같은 경우는 띄어쓰기를 무시하는 '신선한?' 양식은 실험이 불가능해.
'Tobeornottobethatisaquestion.'같은 글은 이해가 불가능하잖아.
'To be or not to be, that is a question.'은 누구나 이해하는 글인데 말이지.  

오늘은 '인간의 삶'과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를 몇 편 봤다.
민우도 이제 곧 어른이야.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지,
아빠랑 이렇게 시를 통해 이야기나눌 수 있는 삶이 되면 좋겠다는 게
아빠가 이렇게 매일 글을 쓰는 이유란다.
사랑하는 아들,
이렇게 쓸 수 있는 데는, 그런 모든 것이 들어간 마음이 작용한다는 거.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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