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살, 내 마음이 왜 이러지? 사춘기 어린이를 위한 심리 포토 에세이
김민화 지음, 성혜현 그림, 신혜현.강정환 사진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엔 성교육을 위한 그림들이 나온다.
과연 그것이 필요한 것인지...
교육이랍시고 관심도 없는 아이들에게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참 부질없는 노릇이란 생각도 든다. 

예전에 '유한 킴벌리'에서 장래 고객을 확보하고자 학교마다 돌면서 여학생 성교육을 실시한 일이 있다.
교육을 마치고 아이들에게 '생리대'를 하나씩 나눠줬는데,
우리반의 학급일지 쓰던 여자아이가 '선생님, 전 이거 아직 필요 없는데... 하더니, 엄마나 줘야겠다.'하고 간 일이 있다.
쩝~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이면 겪게 되는 심리적 불안을 과연 이 책으로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히려 이런 저런 것에 관심만 더 키우는 결과를 낳는 건 아닌지...  

아이들은 정확하진 않지만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어른이 되는 길을 모색한다.
요즘엔 인터넷 검색으로 인하여 아이들이 너무 일찍 성인의 뒷모습을 보고 마는 것도 안타깝다. 

공부, 친구, 성격, 몸 등으로 불안해하는 아이들에게,
선뜻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이 책의 특정 파트를 보여주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의문이다.
과연 '성'을 교육할 필요가 있는지, 교육해야 하는 것인지...
성교육보다 먼저인 것은 좋은 세상 만들기여야 하는 것 아닌지...
나쁜 세상에서 아무리 성교육 열심히 해도,
술집에서 하루 벌면, 공장 나가는 것에 비하면 열 배는 벌 수 있는데,
성실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 이런 광고만 때리고 학교에서 순결 교육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한국이 세계에서 출산율 감소가 당연히 1위라는 소식은 이제 새로울 것도 없는데,
과연 그 문제가 살기 나쁜 나라여서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지점에 다다르면,
청소년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도 심각한 의문에 부딪히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학 펭귄클래식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한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펭귄클래식 코리아가 100권 출간을 기념하여 선보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겨울 방학과 봄방학을 이용해 읽었다. 

이번 책은 프랑스의 뒤퐁록과 랄로가 주해를 붙인 판본을 번역한 것이다. 

나는 시학을 세 번째 읽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내가 국어교육과엘 간다니깐,
쪽집게 국어선생님이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어야쥐~ 이런 말을 한 마디 날리셨다.
그리고 책을 사 봤는데, 도무지 그 선생님이 이 책을 읽었을까? 아직도 의문이다. 

대학시절, 무슨 강의에선지 기억도 가물거리는데, 암튼 시학을 읽었다.
우울하던 시절에 그냥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도 의문으로 남았던 것은,
<시학>에서 왜 <서사시와 비극>만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도대체 <시>는 언제 나오는 건지...
하다가 결국 <시학>에는 <서정시>가 없다는 사실만을 기억했던 추억이 있다. 

이번엔 제법 두껍고 주해가 빡빡하게 달린 책을 읽으면서,
<시학>엔 시가 없고, <붕어빵>엔 붕어가 없고, <가래떡>엔 가래가 없고(우엑..),
<칼국수>엔 칼이 없고, <곰탕>엔 곰이 없고, <국화빵>엔 국화가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알았다. 

시학이 쓰여지던 시대, 기원전 4세기 경에는 <서사시>와 <비극>만이 서양문학의 전부였다.
그리스 로마 문명에서 탄생한 문학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그리스의 고전 <비극>이 다였던 것이다.
물론 그 시절에도 동양에선 한자로 시를 남겼고,
각 지역에서 종교적인 금언들과 영웅 서사시가 풍미했지만,
<클래식>이란 것이 '전쟁이 나면 배 한 척 정도 희사할 수 있는 계급'에서 나온 말이라 하니,
그리스 로마 문명 중심주의적 입장에서 본다면, <서사시와 비극>이 곧 문학이란 개념의 대체였다 볼 것이다. 

그러니깐, 이제 읽고 보니, 이 책은 '제목이 시학일 뿐', 내용은 '그리스 로마 문명 중심의 문학 개론'인 것이다.
'시학'이란 제목에 홀려서 계속 '시'를 탐했던 독자가 어리석었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과 <서사시>라고 이야기했을 때는 내가 생각하는 <서정시>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된 것이다. 참 큰 공부 했다. ^^ 

이문세 노래 중, '시를 위한 시'란 노래가 있다.

바람이 불어 꽃이 떨어져도 그대 날위해 울지 말아요 / 내가 눈감고 강물이 되면 그대의 꽃잎도 띄울게
나의 별들도 가을로 사라져 그대 날 위해 울지 말아요 / 내가 눈감고 바람이 되면 그대의 별들도 띄울게
이 생명 이제 저물어요 언제까지 그대를 생각해요 / 노을진 구름과 언덕으로 나를 데려가줘요

이게 노래의 전부다.
화자는 곧 눈감을지 모르는 사람이다.
천상병의 노래처럼 '노을진 구름 언덕'으로 곧 돌아갈 소풍객이다.
바람이 불어 꽃이 떨어지면 화자는 눈감고 강물이 되고 바람이 되어 그대의 꽃잎도 별들도 띄우겠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여기 어디에 <시>가 있다는 건지... 시를 위한...이 무슨 의미인지...
병마와 싸우다 숨진 작곡가 이영훈이 자신을 염두에 두고 쓴 노랫말 같기도 한데...
저 '시'는 혹시 영문 'C'가 아닐지... 마치 뜨거운 감자의 김C처럼...
<C를 위한 시>라면, 이영훈의 이니셜에도 C가 없으니, 작곡가의 composer의 이니셜인가 싶은 곳까지 상상이 미쳤다.
나는 아직도 <시를 위한 시>를 <Composer 작곡가 자신을 위한 시>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듣는 이 노래는 눈물을 꼭 동반한다. 특히 이 생명 이제 저물어요~ 언제까지 그대를 생각해요~
이런 구절을 이문세 목소리로 들으면, 감정이 주체가 안 된다.  

이 노래는 작곡가 이영훈이 병석에서 쓴 노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제가 생각하기로 말이죠.)
<시를 위한 시>의 후자는 우리가 보통 쓰는 <노래>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되지만, 앞의 것이 좀 복잡해요.
저는 때 시 時자를 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時를 위한 詩>라구요.

이제 곧 저는 <눈 감고 바람>이 될 거래요.
그 때가 되면, 당신은 마음 아파할 거 아녜요? 그러지 말래요. 마음아파하지 말래요.
꽃이 떨어져도, 나의 별들이 가을로 사라져도, 이 생명 이제 저물어도... 날 위해 울지 말래요.

그 때 時 가 되면, 노을진 구름과 언덕으로 나는 갈 거거든요.
천사들이 나를 데려갈 거거든요.
그 때가 되면, 내가 눈 감고 바람이 되면요... 그대의 꽃잎도, 별들도 다 띄울게요.
나는 없어지는 게 아니라, 강물이 되고, 바람이 되어, 노을진 구름과 언덕으로 갈 거거든요.

그 때를 위한 노래, 그 때를 위한 시,가 이 노래의 의미가 아닐까 해요. ^^(어딘가 내가 썼던 글)

다시 시학으로 돌아와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기원전 4세기 경의 <문학 개론서>이다.
다만, 문학 literature이란 용어 자체가 구술성 orality 과 대비된 문자성 literacy에 기반을 둔 용어로 훨씬 나중에 개발된 용어임을 고려하면 함부로 <문학 개론>이란 말을 쓰기도 어렵다.

서양의  literature를 일본인들이 문학으로 번역을 했을 것이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문학은 언어로 된 예술>이라는 통상적 정의나,
<문학>의 갈래로는 서정시, 소설, 희곡, 수필 등이 있다는 장르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을 이야기하던 시대와는 개념 자체가 천양지차가 있다고 봐야 한다. 

이 책을 두 번 읽었는데,
한 번은 그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본문만 읽었고,
다음 번엔 주해까지 밑줄치면서 읽었다. 
물론 읽으면서 지나치게 전문적인 부분을 따질 때엔 휘리릭 넘어가는 방법을 쓰곤 했다. 

시학을 읽으면서 <그리스 대표 희곡선>을 읽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아쉬운 점은 아직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를 읽지 않았다는 점인데, 그 작품들은 워낙 유명해서 줄거리를 많이 읽었고,
다이제스트로 많이 접해서 마치 <고전 홍길동전>을 한번도 읽지 않은 아이들도 홍길동 이야기를 꿰고 있는 것처럼 친숙했기때문에 읽는 데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정도는 함께 읽어야겠다는 야망은 남아 있다. 

고전은 오래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문학의 '개념'을 최초로 정리한 책이라 보면 되기 때문에,
거기서 다양한 <언어의 샘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데 가치가 있다.
<미메시스 - 모방 또는 재현>같은 용어도 거기서 출발했고,
<뮈토스 - 줄거리나 플롯>, <카타르시스> 같은 용어들이 탄생한 모태가 된 작품이어서 가치가 크다.
그의 <서사시>에 대한 이론이나 <비극>에 대한 이론들은 무성하지만, 잠시 이야기가 되다 만 <희극>에 대해서는 참으로 많은 관심들을 보이게 된다. 

그래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도 시학의 2권, 즉 '희극'에 대한 상상이 무한대로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웃음은 예술이며 식자들의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이다... 이런 구절이 적힌 페이지에 독약을 묻힌 수사 호르헤의 이름은 <호르헤 Jorge> 루이스 보르헤스의 상상력을 떠올리게도 한다.  

저자들은 서문에서 <모든 독서는 해석이다>라는 말로 자신들의 작업의 변명을 붙여 두며 시작한다.
이 책 역시 <시학에 대한 해석의 일단>에 불과하다는 겸손의 변명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원본과 번역이 상당히 매끄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학의 원문만 읽으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도하는 바가 읽히기 때문이다.
사실, 서사시와 비극에 대하여 자세히 모르는 독자인 나로서는 주해 부분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 책을 독파하려 마음먹은 이라면,
적어도 <그리스 비극 대표 컬렉션>이나 <일리아스, 오딧세이아> 정도는 함께 읽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힘이 닿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또는 <수사학>이나,
플라톤의 <국가, 정체>도 함께 읽는 것도 당시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서사시는 <줄거리가 여러 개 있는 구조>로 되어있고,
비극은 <분규와 해결>의 구조로 되어 있다. 분규와 해결 사이에는 <반전>이 놓인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강의 노트를 작성하였다.
이 노트는 출판용보다는 강의용이었기때문에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분류가 일관적이지도 않다. 그렇지만, 당시의 문학을 생각하자면, 지금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문학의 분류와는 기준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도 한다. 

마지막 부분에 옮긴이의 해제도 간결하고 깔끔하다.
리쾨르의 논문도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어 도움이 된다.
번역의 어려움을 '낯선 것의 시련'으로 표현한 부분도 재미있고,
언어 번역에서 만나게 되는 '저항과 망설임과 거부'의 과정을 적고 있는 부분도 사족같지만 오히려 재미있게 읽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slmo 2011-03-02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를 위한 C'가 되려면 '쌀'을 '살'로 발음하는 그 지방 사투리여야 제대로겠는걸요.^^
님의 리뷰를 보면서 이 책이 이렇게 재밌게 읽힐 수도 있구나 싶어, 용기를 내보려구요~

글샘 2011-03-02 03:26   좋아요 0 | URL
時를 위한 詩...일는지도 모르구요.
떠나야 할 때를 위한 시인지도... 암튼 저는 저 제목이 자꾸 눈에 밟힙니다.

이 책은 재밌게 읽힌다...고 제가 쓰진 않았는데요. ^^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고 썼잖아요. ㅋㅋ
2500년 전의 '문학개론'이니 지금은 별로 재미가 없답니다.
다만, 워낙 저런 문학의 시원을 밝힌 책이 되어놔서 읽어둘 법은 하지요.
뭐, 용기를 낼 거까진 없구요.
저처럼 읽기를 권합니다. ^^
먼저 원문을 주루룩 읽으시고, 틈나는대로 해제를 읽으시면... 훨 쉬울 겁니다.
 

한국의 봄은 3.1절로부터 온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4월은 한국의 3월과 같은 느낌이랄까? 4월이 개학이거든.
<4월 이야기>란 영화가 일본에선 가능하지만 한국에선 <3월 이야기>가 좋겠지?
새 학년, 새 학교의 설렘과 기대감... 

3월이 되면 비로소 한 살 먹는 느낌이야.
아빠는 아직도 학교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그런 느낌이 여전하단다.
1월 1일이나 설날보다 더 느낌이 강하지. 

오늘은 나이 이야기를 해볼까 해.
시도 그런 것을 몇 개 골라 보고.
<논어>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와.
15세에 지우학(학문에 뜻을 두고)
30세면 립(몸을 세워 널리 알리고, 입신양명)
40세면 불혹(세상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50세면 지천명(하늘의 명을 알아 따르고)
60세면 이순(귀가 운명의 가르침에 순해지고)
70세면 종심소욕불유구(마음이 하자는대로 해도 기준에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여기서 15세는 지학, 30은 이립, 40은 불혹, 50은 지천명(또는 지명), 60은 이순, 70은 종심...이란 말이 나왔지.
간혹 20의 나이를 <약관>이라고 하는데, 그건 예전에 나이 20이면 <관례>를 치뤄줘서 생긴 말이야.
관례는 요즘으로 치면 성인식이 되겠지? 약관이 지나면 어른 취급한다... 이런 거지.
70은 두보의 시에 '인생칠십고래희'라고 해서 '사람의 일흔은 예로부터 드물게 온다'는 구절이 있어 <고희>라고도 해. 

그 외에도 10을 나타내는 '순'을 넣어서 70은 '칠순', 80은 '팔순', 90은 '구순'이 되고,
77세는 한자 七十七을 세로로 쓰면 기쁠 희(喜)와 비슷해 보여서 '희수'라고 하고,
80세는 한자 八十을 세로로 쓴 우산 산(傘)자와 비슷하다고 '산수'라고 하고,
88세는 한자  八十八을 세로로 쓰면 쌀 미(米)자가 된다고 '미수'라고 하고,
90세는 한자 九十을 세로로 써 죽을 졸(卒)의 약자가 되어 '졸수'라고 하기도 해.
99세는 한자 일백 백 百에서 한 일 一을 뺀 흰 백 白 자를 넣어서 '백수'라고도 부른단다. 

81세는 90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나이라고 해서 <망구>... 할망구가 여기서 나온 말이야.
91세는 당연히 <망백>이 되고, 71세는 또 <망팔>이 되겠지.
이런 복잡한 나이 계산에 덩달아서 요즘 농담처럼 <지공>이란 나이가 생겼단다. 
65세가 지공...이래. <지하철 공짜>의 준말이란다. ㅋㅋ 

우선 강윤후의 <불혹(不惑), 혹은 부록(附錄)>을 한번 읽어 보자.

마흔 살을 불혹이라던가
내게는 그 불혹이 자꾸
부록으로 들린다 어쩌면 나는
마흔 살 너머로 이어진 세월을
본책에 덧붙는 부록 정도로
여기는지 모른다
삶의 목차는 이미 끝났는데
부록처럼 남은 세월이 있어
덤으로 사는 기분이다
봄이 온다
권말부록이든 별책부록이든
목련꽃 근처에서 괜히
머뭇대는 바람처럼
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겠다 <강윤후, 불혹(不惑), 혹은 부록(附錄)> 

앞에서 마흔이 '불혹(삿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줏대가 잡힌 나이)'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화자는 그것을 '부록'과 유사하게 듣는다.
언어 유희가 되겠지? 발음은 같잖아. 

그러면서,
화자에게 불혹 이후의 세월은
본책에 덧붙는 <부록>같다는 생각이 든대. 

<부록>은 왠지 별 내용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책이기도 하고,
본책에 끼워 넣어 주는 써비스 제품이기도 하고,
덤으로 더 주는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잖아. 

<목차>는 글의 차례란 이야기야.
본문의 삶의 순서는 모두 끝났는데, 마흔 이후는 부록처럼 다가온다.
이런 화자의 의식 속에는
마흔이 되어 보니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모두 결정이 되어 버려서
그날이 그날처럼 익숙하게 살아지더라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거겠지. 

그래서 마지막엔 <목련꽃 근처에서 머뭇대는 바람처럼> 자신도
뭔가 새로운 것에 <매혹> 당하고 싶다는 희망을 드러내고 있단다. 

삶에서 <봄>은 청춘이라 부르는데,
이 <봄>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에 <매혹> 당하고,
평생 하고 싶은 일에 <매혹> 당하고,
함께 인생을 나누고 싶은 이성에게 <매혹> 당하는 시기란다.
그런데, 마흔 살이 넘고 나면 이제 매혹의 시절은 지나가는 거야.
그래서 화자는 삶에 의욕이 없고 좀 지쳐 보이는구나.
오죽하면 자기 남은 삶이 본문이 끝난 다음의 '부록'처럼 여겨진다는 거겠니? 

그렇지만 화자를 피시방 죽돌이 취급해선 안 될 거야.
왜냐면, 화자는 '매혹'에 대한 의지가 아직 강하거든.
뭔가 새로운 일을 맞아서 치열하게 자신을 단련하는 삶을 바라고 있는 거란다.
강렬한 매혹의 힘에 압도되어 그 분야에 자신을 몰입하고 싶다는 의지가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나고 있지.
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 겠다... 면서 말이야. 

이 시의 주제는 <마흔 살에 만난 새로운 분야에 대한 관심 또는 의지> 같은 것이 되겠지.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민우에겐 서른 너머 마흔 너머까지 읽기는 쉽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계기가 자신의 삶을 더 치열하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단다.
그것이 문학의 힘이기도 해.
다음엔 구광본의 <서른 해>를 보자.

처음부터 그대를 알아본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대를 사랑한 것은 아닙니다

물 빠진 뻘밭에서 갯흙을 일으키며 헤매던 지난 여름
무언가가 기어간 흔적에 한나절 따라가다 가뭇없이 눈
들자 바다 너머 하늘에 가 닿아 있던 온몸으로 간 흔적,
그 한 평생의 궤적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대여, 더 멀리 떠나가세요
아득할수록 깊게 꽃 핍니다
서른 해 이끌고 온 지친 몸 남루한 한낮
그대를 다시 찾아갑니다

한 눈에 알아보았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한 눈에 사랑하였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구광본, 서른 해> 

이 시는 처음 연과 마지막 연을 나란히 두고 보면 주제가 떠오른단다. 한번 해볼까? 

처음부터 그대를 알아본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대를 사랑한 것은 아닙니다 ......
한 눈에 알아보았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한 눈에 사랑하였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화자는 '한 눈에 알아보고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어.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물론 있지만, 그것은 감정에 치우친 사랑이기 쉽지.
누구나 어떤 매력인가는 가지고 있단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매력을 가진 이성에게 끌리기 쉽대.
그러면 첫눈에 반하게 되지.
그렇지만 오래오래 같은 일을 하면서 친해지게 된 사람들은,
성격이 비슷하고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끼리 친해지게 되거든.
화자는 자신의 사랑이 그렇다는 이야기야. 오랜 세월을 두고 친숙해진 사랑. 

그런데, 2연과 3연에서 <지난 여름>의 궤적(지나간 흔적)이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은 이별을 이야기하고 있단다.
지난 여름 화자와 연인은 서해안의 바닷가엘 갔겠지.
(서해안은 경사가 완만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갯벌이 넓게 형성되었거든.) 

이제 이별을 겪고 다시 그 바닷가엘 갔나 봐.
그래서 지난 여름 무엇인가가 기어갔던 흔적을 한나절 생각했나봐. 

그러다가,
가뭇없이(보이던 것이 사라져 찾을 일이 감감함) 눈을 들어.
그런데, 눈을 드는 순간 뭔가 큰 변화가 생기는 거야.
마음 속에 변화가 일어나지.
그걸 시에서 강조하며 표현하기 위해 행을 바꿨어. 


들자 

이렇게 말이지. 
이제 하늘에 아스라하게 보일락말락하는 건
화자와 연인이 살아왔던 <온몸으로 간 흔적, 한 평생의 궤적>이래.
그 연인과 함께했던 삶의 기억이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단다. 

그렇다면, 화자와 연인은 단순한 이별인 걸까?
그럼 지금 당장 달려가면 될 거잖아.
연인에게 달려가서 '난 당신 없인 못 살 거 같아.' 이러고 고백하면 되잖아.
그러면 드라마처럼 해피엔딩도 기대할 수 있을 거잖아. 

그렇지만 화자는 <그대여, 더 멀리 떠나가세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득할수록 깊게 꽃 피>기를 기다리면서 말이야.
이별이 멀수록 꽃이 잘 핀다고 했으니 역설적 표현이지? 

아마도, 화자와 연인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거리에 놓인 것 같아.
사별하였거나, 또는 연인이 화자의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존재이거나.
서른 살이 된 화자.
몸은 지치고, 모습은 남루(누더기)하단다.
그런데, 화자의 마음은 거기서 스톱! 하는 게 아니야.
그대를 다시 찾아간대. 

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좀 짠해지지 않니?
남의 이야기지만, '나만 아니면 돼~' 이런 건 아니잖아.
남들이라도 좀 잘 됐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좋은 거잖아. 

화자는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닌데,
오랜 기간동안 당신의 매력에 빠졌는데,
이제 함께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다가,
이제 다시 당신을 생각하고 있지.

그대가 더 멀리 떠나가도, 그대를 다시 찾아갈 거라는 의지가 있지만,
사실은 거리감이 너무 멀구나. 마음이 아프게도 말이야.
어쩌면, 이런 시는 사별한 임의 무덤 앞에서 읊조리면 어울리는 시가 아니겠니?
이어서 마흔 살에 대한 시들을 몇 편 보자꾸나. ^^
시인들이 서른 살엔 자신을 돌아볼 시를 별로 쓰지 못하나봐.
유독 마흔 살에 대한 시가 많은 걸 보면 말이야.
그렇지만 오십에 대한 시도 적은 걸 보면... 그건 너무 늙었나?
마흔 살이 '삶을 돌아보기'도 좋고 적당하게 피곤한 나이인가봐.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어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고정희, 사십대> 

시에 표시한 것처럼,
<사십대 문턱(이랑, 들녘)에 들어서면> ~ <안다>는 구절이 이 시는 반복되고 있어.
나이 마흔이 되니 뭔가 좀 알게 되었다는 거고,
그 알게 된 것들은 뭐, 뾰족한 것은 아니고, 좀 초라한 것이지만,
<불혹>이란 나이에 걸맞게,
적당하게 포기하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누리며 살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다. 

1연에선 <남은 삶>과 <만날 인연>이 많지 않음을 안다고 썼어.
30대까지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매혹당하는 재미로 살 수 있겠지만,
40대부터는 이미 맺은 인연들을 잘 유지하는 것을 생각한다는구나.
'보속'은 '속죄의 의미로 행하는 보상'을 말해.
주변의 인연들에게 잘해준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지. 

20대엔 씨를 뿌렸고, 30대엔 그걸 가꾼대.
그 세월이 정말 빨라서 이제 거두는 40대가 되면
남은 세월이 많지 않게 느껴진다는구나.(40대인 아빠는 너무 오래 살까 걱정인데 말이야. ㅋ)
그렇지만 아빠도 이제 정년퇴직까지 20년도 안 남았단다. 휴 =3=3 

선택해야 할 것도 별로 없고,
방황이나 고비의 추억을 안고 마감까지 남은 지도를 바라보는 나이란다. 

고정희는 등산을 좋아했다나봐.
그러자니 <지도> 속의 인생을 내다 봤겠지.
그리고 해남 들녘의 삶과 어울리게 <이랑, 들녘>같은 시어도 잘 쓰고 있단다. 

화자가 나이 마흔이 되니
남들의 말대로 출세를 했든, 그렇지 못하든,
외롭고 슬픈 마음이 가슴 한 구석에 놓인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로 시를 맺는다.

글쎄, 아빠에게 마흔은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이 많이 남은 나이 같은데...
시인은 이런 시를 쓰곤, 마흔 네 살에 지리산 등반 중 실족사로 죽고 말았어.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길
내가 가야 할 저만치 길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크고 넓은 세상에
객사인지 횡사인지 모를 한 독신자의 시신이
기나긴 사연의
흰 시트에 덮이고
내가 잠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달려와
지상의 작별을 노래하는
모습 보인다
오 하느님
죽음은 단숨에 맞이해야 하는데
이슬처럼 단숨에 사라져
푸른 강물에 섞였으면
하는데요 <고정희, 독신자(신을 모독하는 자), 부분>

이런 시를 남기고 지리산 뱀사골의 계곡물에 휩쓸려 세상을 뜬 시인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자신의 앞날을 본 걸까?  

불혹에 대한 시를 더 볼까?

집에 가야 할 시간이 훨씬 지난 술집에서
싸움이 났다
노동과 분배와 구조조정과 페미니즘 등을 안주 삼아
말하는 일로 먹고사는 사람들과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개새끼들, 놀고 있네
건너편 탁자에서 돌멩이 같은 욕이 날아온 것이다

갑자기 당한 무안에
그렇게 무례하면 되느냐고 우리는 점잖게 따졌다
니들이 뭘 알아, 좋게 말할 때 집어치워
지렛대로 우리를 더욱 들쑤시는 것이었다
내 옆에 있던 동료가 욱 하고 일어나
급기야 주먹이 오갈 판이었다

나는 싸워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단단해 보이는 상대방에게 정중히 사과를 했다
다행히 싸움은 그쳤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굽신거린 것일까
너그러웠던 것일까
노동이며 분배를 맛있는 안주로 삼은 것을 부끄러워한 것일까

나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싸움이 나려는 순간
사십세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맹문재, 사십세>

뭐, 일상 속의 작은 사건에서 뭔가를 깨닫고 그걸 적는 게 '시'란 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지식인인 화자의 동료들과 술집에서 '노동, 분배, 구조조정, 페미니즘' 등 떠들면서 한잔 하는데,
"개새끼들, 놀고 있네." 이런 욕설을 듣는다.
아마도 그 욕설을 던진 이는 노동자였으리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무례하면 되겠소?"  하고 따지자,
"니들이 뭘 알아, 좋게 말할 때 집어치워." 이런 대꾸가 온다.

옆자리 동료는 욱해서 일어나고
나는 사과를 하고, 싸움은 끝났다. 

화자는 자신이 비굴했던 것인지,
아니면 너그러웠던 것인지,
노동자들의 힘든 삶을 안주로 떠든 것을 부끄러워 했던 것인지,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순간,
자신이 나이 <마흔>이 넘었단 생각을 하게 된다. 

<구조조정>같은 말은 쉽게 말하자면,
기계가 자동화되고 세계 경제가 재편됨에 따라
한국의 조선 업계가 수주하던 물량이 중국으로 많이 넘어가게 되어
회사의 구조를 조정하기 위하여 <노동자를 함부로 자르는 일>이다. 

부산에도 영도에 <한진 중공업>이란 배만드는 회사가 있는데,
이번에 구조조정건으로 노동자들은 싸우고, 회사는 문을 닫는 일이 벌어졌단다.
노동자들에게 '구조조정'이란 말은 '사형'이라는 판사의 선고와도 같은 말인데,
지식인 나부랭이들이 술집에서 이야기를 떠들고 있으니,
옆자리 노동자들이 화가 났을 수도 있겠다.

재미있게도 '맹문재'와 이름이 같은 '이문재'도 같은 '마흔 살'이란 시를 남겼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 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 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이문재, 마흔 살>

맹문재의 <사십세>가 일화(에피소드) 중심이라면,
이문재의 <마흔 살>은 화자의 관조 중심이다. 

화자는 염전이 있던 곳으로 갔다.
계절은 '늦가을', 음, 염전의 일도 여름에 한창이니
한창때가 지난 계절, 나이 '마흔 살'과도 잘 매칭되는 계절이네.
'시린 바람'이 지나가고,
'옛날 노래'가 입에서 흥얼거려졌는지도 모르지.

말라버린 갈대꽃들은
넘어가는 햇빛 받아 눈부시게 반짝인다. 
이 마른 갈대꽃들도 나이 '마흔 살'과 어울리는 소재다.

'오후 세 시'란 시간도 역시 '마흔 살'에 어울리는 시간이다.
해가 슬몃 지려고 하는 시간.
열두시 반이면 해가 하늘 꼭대기에 올라앉아 이글거리고,
오후 두 시면 뜨거움이 절정에 이르는데,
그런 시간이 설핏 지난 시간, 오후 세 시.
계절도 '늦가을'
거기다 '말라버린 갈대꽃'
그리고 공간도 여름이 지나버린 갯벌의 <염전>,
햐~ 화자의 <마흔 살>이 이렇게 시각적으로 표현되고 있구나. 

기러기를 바라보던 화자는 눈물짓는다.
기러기가 가면 겨울이 오고, 곧 한 해가 끝나니 기러기 역시 가을이구나.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이 구절이 화자가 나이 <마흔>을 대하는 자세를 요약하고 있다.
옛날은 <흘러가버린 날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은 <옛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정작 화자가 나이 마흔이 되고 보니,

자신이 <옛날 사람들> 속에 포함되는 그런 것이란 생각에 눈물짓게 되는 것이다.
<흘러가버린 날들>이 옛날이 되는 것이라던 생각은
늙음은 남들의 것이란 의식이 담겨 있었는데,
이제 <늙음이 나에게도 오는 것>이라는 마음이 들고 보니,
<내게 오는 순간 순간들>이 모두 <흘러가버려 화석이 될 날들>로 여겨지고,

<한여름이 지나버린 염전>을 보아도,
<늦가을>이란 계절을 만나도,
<오후 세 시>의 뉘엿한 태양을 바라 보아도,
한창 피었다 말라가는 <갈대꽃>에 비친 반짝이는 햇살을 보아도,
가을을 느끼고 날아가는 <기러기>를 헤아리다가도,
문득 나이 <마흔>을 떠올리는 화자의 쓸쓸한 마음.  

글쎄, 아빠는 조금 이해가 되려고 하는데, ㅋ
민우는 어떨까?
요번엔  <삼십세>란 시를 한 편 보자.
<삼십세>는 오스트리아의 '잉게보르크 바흐만'이란 여성 작가의 책으로 유명하단다.
그는 삼십세를  이렇게 썼다.

30세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그를 보고 더 이상 젊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그 자신은 일신상에 아무런 변화를 찾아낼 수 없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불안정하다고 느낀다.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게 어색해진다. <잉게보르크 바흐만, 삼십세 중>

 뭐, 요즘에야 워낙 잘 먹고 사니깐 마흔인데도 동안이라며 좋아들 하지만,
1926년에 태어난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시대였다면 서른 살이 노년의 입구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르지.
늙지는 않았지만, 더이상 젊다고 우기긴 어려운 나이 서른 살.
민우도 서른, 마흔이 되기 전에 너 자신의 젊음을 충분히 즐기렴.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 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아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최승자, 삼십세>

인생은 하나하나 개별자마다 모두 다른 것이란다.
누구는 백수를 누리고 누구는 열 살도 못 되어 세상을 뜬다.
인생에서 <표준 그래프>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단다.
이 시에서 '삼십세'는 화자 개인의 체험이라고 봐야 할 게다. 

그의 서른은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나이였다.
참 힘겨웠나보다.

치통으로 시작된 <통증>은
<암 세포>가 싹트고, 간의 <독>이 눈 뜨고,
그렇지만 '장가'가고픈 꿈도 있었는데,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면,
<젤리같은 피>, <톱밥같은 손톱>, <철사같은 머리칼>로
생명력 하나 없이 금세 바스라질 것 같은 육신으로,
안개 속에서 그림자처럼 살고있던 서른이었나 봐. 

<꿈없는 새>들은 예수가 묻힌 골고다 언덕의 무덤으로 가 <뼈를 묻고> 만다.
이 시에서 반복된 이미지가 있어. 1연과 2연의 끝에 반복되는 구절.
흰 손수건과 부릅뜬 흰자위의 이미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1연)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2연)

흰 손수건은 마치 하얀 '수의'나 '죽음의 드레스'를 연상시키는구나.
아름다운 서른 살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서른 살을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을 상상할 수 있겠니?
1연에서 그래도 애원하던 눈자위는 2연에서 감기고 만다.
서른에 죽음을 연상하는 시를 쓴 이는 세상이 얼마나 비관적이었을까?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마지막 연은 그래서 반전으로 보이지.
갑자기 우울 모드에서 행복 모드로 뒤바뀌니 말이야. 
고통에서 벗어난다면 죽음조차도 <행복한 항복>이란 말일까?
'행복'과 '항복'은 유사한 발음을 이용한 언어 유희가 되겠구나.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패러디한 마지막 구절 역시 화자의 삶을 반영한다.
이제 죽음에 대하여 초월한 화자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지.
죽음보다 더 두려울 게 뭐가 있겠어?
얼굴에 철판깔고 사는 거지. 뭐.
자, 그럼 이 최승자 시인이 <마흔>이 되어 어떤 생각을 했는지 한번 볼까?
금세라도 죽어버릴 것처럼 광적인 마음이 드러난 시 <삼십세>가 <세기말>적인 시일 수도 있어.
1900년대의 타락한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저렇게 병적이었는지도 모르지.

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 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 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최승자, 마흔> 

1952년생 시인 최승자로서는 그의 30대를 '광주 학살'로 시작해서 저렇게 괴로운 시를 썼을지도 모르겠다.
잉게보르크 바흐만이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는 책도 썼거든.
서른살 이후는 날개도 없이 추락하는 나이라고 생각했겠지.
서른을 <높은 벼랑 끝>에 섰던 것으로 회상하는 그의 <마흔>.

그가 마흔이 되자 세상은 <드넓은 궁륭 같은 평야>임을 느끼고 있어.
궁륭은 활처럼 휜 지붕을 의미하는 건데, 글쎄, 궁륭 같은 평야...는 좀 어색한 비유 같기도 해.
어쩌면 드넓은 궁전 같은 평야라고 쓰려고 했는지도 몰라. 

한없이 넓은 것 같지만, 구석구석 유리벽이 가로막는 세상.
그의 40대는 1990년대야.
한국인들이 처음으로 <해외여행>이 자유화 되었던 새로운 시대.
그래서 더 넓은 세상을 보려고 너도나도 비행기에 오르던 시대지.
그렇지만, 재수 없으면 쿵, 머리방아를 찧을 수도 있는 위험도 도사리고 있었지.
공산주의 국가가 개방되었다곤 하지만 그 시대만 해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는 없던 시대였거든. 

마지막 연에서 그래도 그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 단 한 가지는 종교적 대상으로서의 '절대자'일 수도 있고,
화자가 시인이니 '시를 쓰는 일'일 수도 있고,
화자에게 끔찍이도 잘해주는 남편이거나 아들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겠다.
날마다 그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조금 웃긴 표현으로 마무리짓는 걸로 봐서,
뭐,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것 같지? 

암튼 화자는 서른 살에 그토록 비관적으로 꽉 막혔던 세상이,
나이 마흔 살이 되어 좀 숨통이 틘 것으로 볼 수도 있겠어.
건강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살림살이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가족의 관계에서 힘들었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화자가 직접 드러내지 않고 숨겨두고 이미지만 드러내니 구체적인 건 상상하기 힘들구나.

 

오늘은 <나이>란 주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모아 보았다.
이렇게 한 주제를 두고 다양한 예술가들이 작품을 내는 것을 <옴니버스>라고 한다.
만약에 <불혹>이란 제목의 시집에 이런 작품들이 모였다면 <옴니버스 시집>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랑'이란 주제를 주고 세 명의 영화 감독이 전혀 의논하지 않고 색다른 영화를 만들어 한꺼번에 방영한다면,
<옴니버스 영화>가 될 것이고 말이야.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피카레스크 구성>이란 것이 있단다.
'포켓 몬스터'란 만화 영화를 떠올리면 피카레스크 구성이 이해가 갈 거야.
맨날 똑같은 등장 인물이 나오지.
지우와 이슬이, 용이가 가는데, 새로운 마을에서 새로운 몬스터와 만나게 된단다.
새로운 몬스터와 싸우는 와중에 로켓단이 훼방을 놓다 날아가고 한 편은 끝나지. 
다음 시간이 되면 또 같은 등장 인물들이 같은 패턴으로 행동하고 말이야. 

'막돼먹은 영애씨'도 그렇고 '명탐정 코난'도 그렇잖아.
영애씨 가족과 회사 사람들이 맨날 나오고,
코난과 미란이, 탐정 아저씨, 그리고 동네 꼬마들과 박사님은 맨날 나오지.
그렇지만 매 회 색다른 사건이 펼처지는 구성을 피카레스크 구성이라고 한단다. 

오늘은 '나이'에 대한 <옴니버스 구성>으로 시들을 읽었다.
민우도 네 나이 '열아홉'에 대해 생각해 봤니? ㅋ
아직 생각하기엔 너무 적은 나인가?
그치만 삶에서 아주 힘든 1년일 수 있단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의논하자꾸나.
그게 좋은 가족이 아니겠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반딧불이 2011-03-02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라는 주제로 시를 모으니까 재미있네요 오십에 관한 시가 없는 것도 재미있구요 찜해갑니다

글샘 2011-03-03 23:0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오십 이후론 시가 잘 없어요. 그런 생각은 못해봤네요.
오십 이후론 소설 양식이 적절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는 감상이 그대로 묻어나서, 우울해지거나 써늘해 질는지도...
 
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철학'이란 딱딱한 것을 충분히 물에 불린다음 독자에게 슬며시 내민다.
독자는 그 말랑한 것이 원래 책받침처럼 딱딱하던 악어 등딱지인줄도 모르고,
그 졸깃한 맛을 즐기며 씹는맛을 즐기곤 한다. 

오죽하면 '철학'은 인문대학 '금속공학과'라고 할 만큼 딱딱하단 느낌을 갖게 하는데,
이 책은 전혀 딱딱한 느낌을 받지 않게 한다.
그리고 읽고 나면 알게 되지만, 이 책은 <서평집> 내지는 <독서 가이드>로 기획된 책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는 나는 계속 바둑의 <묘수풀이집>을 떠올리고 있었다.
바둑을 배운다는 일은 끝없는 반복과 망각의 과정을 온몸으로 거쳐가는 일과 동의어이다.
그런데 바둑의 '정석'은 너무도 변화무쌍한 '변주'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바둑을 배우면서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가는 것보다 먼저 들어왔던 것이 튕겨져 나가는 속도가 빠를 때도 있다.
그래서 간혹 접하는 퀴즈 타임이 바로 '묘수 풀이'란 것이다.
바둑의 '묘수 풀이'는 전체적인 바둑의 행마나 계가를 염두에 둘 필요가 없어 일단은 마음이 홀가분하다.
전체를 볼 필요 없이, 그저 이 순간의 '사활'만이 문제가 된다.
어떤 곳이 사는 점이고 어떤 곳이 죽는 점인지를 콕 집어 내는 일만이 중요하다.
중앙에서 벌어진 일이 변에서나 귀퉁이에서 벌어진 일과 맞물려 울려퍼지게 하는
환희의 합창이나 비극의 곡성을 떠올릴 필요 없다. 
그저 가볍게 주어진 몇 칸의 가능성들을 머릿속에서 반복해 진행하다보면 어느 순간 통쾌한 해법이 보이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신영복의 <나의 동양 고전 독법 - 강의>를 동양 고전 입문서로,
강유원의 <인문 고전 강의>를 서양 고전 입문서로 소개하곤 했다.
그렇지만 철학에 대해서는 어떠한 개론서나 입문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학생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철학 통조림'이나 고딩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철학, 역사를 만나다' 같은 책도 철학에 대한 이야기로는 쉽지 않았다.  

아니, 쉽기는 한데, 과연 그것이 전체적 그림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인지,
더 깊은 독서를 이끌어줄 가이드로서 도무지 맥락을 얻지 못했던 것 같다. 

며칠간 쉬면서 그간 있었던 복잡한 학교 문제와 새학기 준비의 짜증에서 나를 빼냈다.
학교의 구조적인 문제를 얄팍한 해법으로 풀어내려는 다양한 시도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늘 허우적거렸다.
일을 떠맡아 허우적거렸고, 남들이 '너는 잘 하잖아~' 이런 칭찬 사이에서 발로 뛰어 다녔다.
그런 일들과 사람들과의 연락을 끊고, 텔레비전도 만나지 않고 그저 즐겁게 며칠을 보냈다.
그저 바보가 되어 산 것 같다. 한 이틀 남짓인데도... 

그런 내 곁에서, 히히덕거리며 내 마음을 만져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묘수풀이처럼 통쾌하면서도 간단하게,
또 복잡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간단한 논리로 다 설명이 가능하게,
아무리 두꺼운 책이거나 난해한 이론이라도 비유적 이야기 한 편으로 알기 쉽게 들려주는 책이다. 

물론, 철학에 다이제스트란 있을 수 없다.
초등학생용 철학이 있고 철학가용 전문 철학이 있을 수 없다.
삶이 있다면 영아용이나 노인용이나 모두 <인생>에 대하여 공손한 태도를 갖춰야 함과 같다.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이순재가 "호상은 무슨 호상, 니미럴~" 이런 대사를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죽음은 모두 나름의 아픔을 가지듯,
삶은 모두 나름의 의미를 가지겠다. 그게 철학이 선 자리다. 

제목은 중요하지 않았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목의 한 글자만한 크기에 들어간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도 문제가 아니었다.
카운슬링은 문제가 있는 내담자가 카운슬러의 안내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인데,
이 책에서 강신주는 카운슬러가 되어 내담자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타자>와
인생의 봄에 만나게 되는 <자아>와,
이 둘이 겪게 되는 <우리>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특별한 구도 없이 이야기를 풀고 있다. 

화자는 프롤로그에서 이 이야기들이 독자를 향한 <유리병 편지>였으면 좋겠다고 희망사항을 밝혔다.
결국 <유리병 편지>는 존재하지만, 그 병을 발견하고 그 편지를 읽는 이의 마음에 그 편지의 존재 의미는 달려있다.
발견하고도 무시하는 독자이거나,
편지를 읽고도 웃어 넘기는 독자라면,
유리병 편지는 참 바보같은 짓거리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그 유리병을 발견한 사실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에게,
그 편지의 내용과 편지를 쓴 사람의 처지를 곰곰이 씹어보는 이에게는 그 편지가 특별한 효용을 발휘할는지도 모른다. 

고전을 만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는 내게 이 편지는 단비와도 같았다.
밤새 운전을 할 때 그 단비는 자동차의 제동 능력을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조심 운전을 하거나 자신의 스피드를 조절할 수 있는 이에겐 봄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비가 내린다는 사실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지금 인생은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할 것도 없이,
삶 앞에 놓인 철학은 '참을 수 없이 가벼움'으로 다가온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부터 시작되는 철학의 그럴싸함에 비하면,
밥벌이 앞에 놓인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철학'을 <개똥 철학>으로 명명하면서부터
철학은 늘 삶 앞에 무릎꿇곤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개똥이 민들레 꽃의 생명력의 근원이 되듯,
그 가벼움이 삶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는 '일체유심조'를 개똥철학이라면 어쩔 수 없다.
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마라는 말도 개똥철학이라고 폄하하면 할 수 없다.
철학이란 배고픔 앞에서 늘 굴복하는 우스개에 불과하니깐. 

그렇지만, 조금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면, 인간은 개똥 철학이 필요하다.
이지보다 니체보다 김수영보다 우리는 배가 부르지만, <솔직하지> 못하다.
그 솔직함 안에 철학이 담겼다면, 배가 고프고 부르고를 따지기 이전에 '예민한 촉수'를 가진 이들의 생각에 그들의 개똥 철학에 관심을 가질 법 하다. 

주희의 성리학이 내세운 기본 원리, 인과법칙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렇게 의문부호를 던진 정약용 이야기를 듣는 나는 행복했다.
무엇보다 강신주가 나보다 젊다는 이유로 행복했다.
그의 앞날이 멀고 멀기에, 그의 책들을 얼마든지 더 기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새학기를 앞두고 복잡한 머리를 잠시 정지하고 있던 나에게,
한나 아렌트처럼 "지금 당신은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하는 질문을 던져주는 이를 만나는 일은,
괴로우면서도 반가운 일이었다.
아이히만처럼 관료제 아래서 수백만을 죽이는 일을 하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교사인 나의 판단에 따라서 천여 명의 학생과 육십 여 명의 교사가 이렇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음을 고려하면,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악임을 툭, 알려주곤 한다. 

교사로서 해야할 일을 하고,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는 자세.
아무 생각없이 타성에 의하여 그저 밥벌이의 지겨움 속에서 살아가는 자세.
이런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헤엄치며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이런 독서>라면 반갑기 그지없다. 

물론 강신주의 이 책은 깊지 않다.
철학을 공부하고자하는 초심자에게 기본적인 개념조차 제대로 설명하기엔 지나치게 한 꼭지에 배당된 면수가 적다.
그렇지만, 철학이 필요한 시대,
앎과 실천, 아무 생각없이 소나 돼지를 파묻다 과로로 죽어가는,
생각없는 공무원들에게 아무 생각없이 죽음이나 애도하는 또다른 나에게,
생각하는 삶과 소통과 관계의 역학을 곱씹게하는 책으로 이 책은 재미있게 다가왔다.
묘수풀이집은 역시 짧은 시간 머리를 식히는 데는 탁월한 효능을 발휘하는 것이니 말이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slmo 2011-03-01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예상대로 좋군요.
님의 서재에서 오랫만에 만나는 별 다섯개예요.^^

글샘 2011-03-01 12:59   좋아요 0 | URL
예상보다 좋았습니다. ㅎㅎ
제가 요즘 별에 인색했나요? 옛날엔 너무 후하단 소리도 들었는데...

잘잘라 2011-03-08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브르의 식물 이야기』를 읽고 사계절출판사에 반했어요.
사계절출판사에서 나온 책 검색하다가보니 또 글샘님 서재예요 ^ ^
알라딘에서 책구경하다보면 글샘님 닉네임을 자연스럽게 만나게되요.
'글샘'이라는 닉네임에 갖게되는 기대감을 충족시켜주시는 리뷰,
님의 서재 글들.. 항상 고마운 마음으로 읽습니다.


글샘 2011-03-08 21:56   좋아요 0 | URL
저는 '임꺽정'때부터 좋아했던 출판사랍니다.
멋진 출판사죠.

제 서재 글을 좋게 보아 주셔 고맙습니다.
제 글에 대한 기대감보다 책이 나을 때가 많겠지요. 속았을 경우도 있을 거구요. ㅎㅎ
아무래도 취향은 사람 수만큼 많으니 말입니다.

2011-04-08 2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1-04-10 11:1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어쩌다 당선이 되었군요.
철학, 좋아하면 이 책을 좋아할 겁니다. ^^
저도 주변 분들께 막 홍보할 만큼 좋은 책이니까요.

드팀전 2011-04-08 2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잘 지내시지요.

글샘 2011-04-10 11:1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영 소식이 뜸하시군요. ㅎㅎ
예찬이도 잘 자라죠? 곧 학교갈 나이가 됐겠는데...

세실 2011-04-10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홋 축하드려요^*^ 아 읽어야지, 읽어야지....
묘수풀이집이라~~~ 리뷰가 참 맛깔스러워요.

글샘 2011-04-11 13:03   좋아요 1 | URL
리뷰가 맛깔스럽다니... 칭찬이 과하시네요. ㅎㅎ
이 책은 어렵지도 않습니다. 한번 읽어 보세요.

starover 2011-04-22 1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삶에서 철학을 자주 적용해보아야 겠습니다. 철학이 아니더라도,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해보며 살아야겠네요.

글샘 2011-04-23 19:26   좋아요 1 | URL
오로지 경쟁뿐인, 철학적 사고는 통용되지 않는 사회에 사는 사람의 하나로서,
철학은 인간이 되기 위한 몸부림이 될 것입니다.
 

고3 올라가지 전 마지막 휴가를 다녀오느라 며칠 쉬었구나.
이제 내일 3.1절 하루만 쉬면 본격적인 고3이다.
민우도 새로운 마음일 거라 생각한다. 

그런 이야기가 있더구나.
농부가 밭을 가는데, 숙련된 농부가 간 밭은 똑바른데 비하여,
초보 농부는 삐뚤빼뚤 갈아놓았대.
초보가 숙련된 농부에게 비결을 물어 보았더니,
수십 년간 반복하다 보니, 밭을 갈 때 먼 곳의 소나무를 목표지점으로 삼아 간다는 것이었지.
이렇게 목표가 있는 사람은 똑바른 생활을 하는 데 더 힘들지 않은 법이란 이야기일 거야. 

오늘은 지폐에 등장하는 인물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이란 시조를 공부해 보자꾸나.
몇 번 '시조'는 '문자문학'이 아니라 '시조창'이란 노래란 이야기를 했을 것 같다.
도산십이곡은 '도산(陶山)'이란 지역의 십이 골짜기를 노래한 것으로,
이황이 만년에 후학 양성을 위하여 지은 '도산 서원' 주변의 자연을 노래한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요즘으로 치면 최고급 학원이었던 도산서원에 모인 서생들은,
멤버로 친다면 조선에서 내로라 하는 가문의 훌륭한 인재들일 거였어.
그 자부심도 대단했겠지.
조선시대에 '사대부'란,
군자의 도를 닦을 때는 '사'가 되고, 입신출세하여 이름을 떨치는 벼슬을 하면 '대부'가 되는 이였단다.
그 서원의 <교가>라고 보면 될 거야. 

이 시조는 총 12수로 이뤄져 있는데,
앞의 6곡(전 6곡)은 <자연에 동화된 생활>을 그리고,
뒤의 6곡(후 6곡)은 <학문 수양 및 학문애(學問愛)>를 권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앞부분의 '자연에 동화된 생활을 하겠다는 의지'를 한자로 <지(志)>라고 부르고,
뒷부분의 '학문을 추구하는 생활을 하겠다는 내용'을 한자로 <학(學)>이라고 부른대.
<지>를 말한 부분은 <언지(言志) >, <학>을 일컬은 부분을 <언학(言學) >이라고도 하지.  

이 노래는 문학적으로 볼 때에는 중국 문학을 차용한 곳이 많고,
생경한 한자어가 남용되어 높이 평가할 수는 없지만,
성리학의 대가의 작품이라는 점을 살펴보면,
시조의 출발이 유가(儒家)의 손에 있었고 그 성장 발전 역시 그들에 의하여 이룩되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노래야. 

이황과 이이가 지폐에 새겨질 정도로 높이 알려진 이유는
조선은 군주제 국가인 <왕조>였고,
그 <왕조>를 떠받드는 이념적 기틀이 바로 <성리학적 질서>였는데,
중국의 <성리학>을 조선 지배 이념으로 학문적으로 높은 경지까지 연구한 사람들이 바로 이 두 사람이란 거야.
조선의 임금 입장에서는 엄청 중요한 사람들이었던 거지.
근데... 과연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그들이 뭘 해줬는지는... 글쎄다. 연구 과제구나. ^^

자, 그러면 조선 최고의 학원 도산서원의 교가를 1절부터 차근차근 읽어보자꾸나. 

[1] 이런들 엇더하며 져런들 엇더하료 
    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러타 엇더하료 
    하믈며 천석고황을 곳쳐 무슴하리.

이렇게 산들 어떠하며, 저렇게 산들 어떠한가
초야에 묻혀 사는 어리석은 서생이 이렇게 산들 어떠할 것인가.
하물며 자연을 몹시 사랑하는 병을 고쳐서 무엇하리

<자연 사랑>의 뜻(언지) 제 1장이야.
엇더하며, 엇더하료, 초야우생이, 엇더하료.
반복되는 구절을 표기해 보면 aaba 구조라고 볼 수 있지.
<천석고황>은 '샘물 천(泉)', '돌 석(石)'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 속 깊은 곳에 병이 되었다(고황)이라고 과장해서 표현하는 것이란다. 

사대부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입신출세를 하지 않더라도,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며 늘 기회를 기다리는 자세. 그것이 바로 '안빈낙도'이며 '안분지족'이지.
그러려면, 때를 만나 출세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할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진인사대천명>의 자세가 필요하단다.
그러니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 자연 친화적 태도가 강조된 것이라 보면 될 거야. 
2연을 보자. 

[2] 연하(煙霞)에 집을 삼고 풍월로 벗을 삼아 
    태평성대(太平聖代)에 병으로 늘거가뇌 
    이 중에 바라는 일은 허믈이나 업고쟈.

안개와 놀을 집으로 삼고 풍월을 친구로 삼아
태평성대에 병으로 늙어가지만
이 중에 바라는 일은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나 없었으면... 

역시 <안빈낙도>의 뜻(언지)을 드러낸 표현이지.
자연을 집으로 삼고 벗을 삼는다.
입신출세하면 세상 사람들이 '베프'가 되자고 난리를 치겠지?
그치만 화자는 아직 <세상에 나가지(출세)> 못했어.
그러니 자연을 벗을 삼을 수밖에.
세상은 평안한데, 병으로 늙게 되니 나이가 많아졌지.
그런데 희망 사항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살고 싶다는구나.  

아직 입신출세하지 못한 선비가 <허물>이라면 어떤 것이겠니?
오직 출세를 위하여 인격적 수양을 게을리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지 못하고 출세를 위하여 안달복달하다가,
급기야 뇌물을 쓴다거나 과거 시험에 부정을 저지른다면 큰 <허물>이 되지 않을까?
아니면 허생전의 주인공처럼
마누라의 바가지에 못 이겨, 돈벌이에 나서서
선비의 고결함에 누를 끼치고 <장사치>의 비루함을 행하는 일도 <허물>이 될 거야.
돈에 연연하는 것을 '허물'로 친 허생이 변부자에게
"당신은 나를 장사치로 보는가?"하고 소리지른 말이 이런 맥락일 거야.
3연을 보자꾸나. 

[3] 순풍(淳風)이 죽다하니 진실로 거즛말이 
    인성(人性)이 어지다하니 진실로 올흔말이 
    천하(天下)에 허다 영재(英才)를 소겨 말슴할까.

순수한 풍습이 줄어 없어지고 사람의 성품이 악하다고 하니 이것은 참으로 거짓이다.
인간의 성품은 본디부터 어질다고 하니 참으로 옳은 말이다.
천하에 슬기로운 사람(영재)을 속여서 말할 수 있을까?  

순박한 풍조가 사라진다고 한다. 에이, 거짓말이겠지.
인간의 품성은 원래 어질다고 한다. 그래, 정말 옳은 말이야.
세상에 허다하게 많고 많은 영재를 속일 수 있겠어?
똑똑한 사람이라면 인간은 원래 <착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세상이 험악한 것 같지만 <순박한 풍조>는 아직 남아 있대. 

3연에선 자연 친화가 나오지 않지?
그렇지만, 아직까진 <언지>잖아. 화자의 뜻을 강조하는 부분.
인간의 품성은 원래 순박한 것이고, 어진 것이래. 성선설이지?

맹자가 4단을 이야기했어. '단(端)'은 '새싹의 뾰족한 끝'을 가리키는 말이야.
인간에겐 네 가지 싹수가 있다는 거지.
불쌍한 인간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나쁜 일을 싫어하는<수오> 마음.
좋은 일만 바라지 않고 겸손하게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른 일을 가릴 줄 아는<시비> 마음. 

이런 새싹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해서 4단이라고 했고,
그것을 유교의 <인, 의, 예, 지>와 연결지어 생각하기도 했던 거란다.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이어받기도 했겠지.
부처님이 선배니 말이야. 선배의 좋은 점은 따라해야 하지 않겠어?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싹수>를 가지고 있단다.
그러니, 학교든 학원이든, 도산서원이든 그 싹수를 바탕으로 교육을 하는 거지.

[4] 유란(幽蘭)이 재곡(在谷)하니 자연이 듯디 죠해 
    백설(白雪)이 재산(在山)하니 자연이 보디 죠해 
    이 중에 피미일인(彼美一人)을 더옥 닛디 못하얘

그윽한 난초가 골짜기에 피어 있으니 듣기 좋아
흰눈이 산에 가득하니 자연이 보기 좋아
이 중에 저 아름다운 한 사람(임금)더욱 잊지 못하네

난초가 골짜기 가득 피었으면 그 향을 맡기(듣기) 좋고,
눈이 산에 가득 쌓였으면 그 경치가 보기 좋지.
이렇게 사는데도, 안분지족의 마음 속에 잊지 못하는 한 가지 뜻은,
바로 <그 아름다운 한 분>을 향한 사랑이란다. 

조선의 성리학은 <왕조>의 이념이라고 했지?
결코 <어리석은 백성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자가 많아서> 훈민정음을 만든 게 아니란다.
왕조의 이념인 성리학을 백성에게 교육하기 위해서 훈민정음이 필요했던 거지.
그래서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열심히 찍어낸 책이
유교의 <바른생활 교과서>인 <소학>이었단다.
국어책에 <소학>과 <삼강행실도>가 실린 걸 배웠지?
정말 훈민정음이 어린 백성을 위한 거였다면,
열심히 번역, 출판했어야 하는 책은 '법전'이나 '의학서', '각종 증명서' 등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러니 성리학의 기본인 <뜻>을 드러내는 시에서
임금님(미인)이 빠질 수 없었겠지. 

[5] 산전(山前)에 유대(有臺)하고 대하(臺下)애 유수(有水)ㅣ로다. 
    떼 많은 갈며기는 오명가명 하거든 
    엇더타 교교(皎皎) 백구(白鷗)는 멀리 마음 하는고

산 앞에 높은 대(낚시터)가 있고, 대 아래에 물이 흐르는구나.
떼를 지어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거든
어찌하여 희고 깨끗한 갈매기(어진 사람 - 현자)는 멀리 마음을 두는고

'대'는 절벽을 상상하면 돼.
부산에도 '태종대, 해운대, 이기대, 오륜대, 몰운대, 자성대' 등이 많잖아.
'대'는 높직한 곳이어서 절벽이나 동산 같은 뜻을 지닌다.
그 아래 물이 흐른대.
갈매기도 오락가락 하고 있는데,
어쩌자고 교교한 달밤에 갈매기는 마음을 멀리 두고 있을까? 이런 생각. 

멋진 경치에 떼를지어 나는 갈매기들은 <일반 갈매기>야.
리처드 바크가 쓴 <갈매기의 꿈> 이야기를 아니?
여느 갈매기는 먹고 사는데 급급하지만,
오타쿠 갈매기가 한마리 있었다. 그 이름은 조나단 리빙스턴!
그는 날마다 더 폼나게 나는 법을 연구하지.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그는 혼자 연습에 몰두해.
아까도 이야기했듯,
갈매기 조나단은 <자신이 할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선비>의 자세와 통하는 것 같아.
진인사 대천명. 조나단에겐 진구사 대천명이겠지. ㅋ 

갈매기 떼는 오명가명 날지만,
어찌하여 <교교 백구>는 멀리 마음을 두는 것일까? 이런 의미.
교교는 '달빛이 밝고 환하다'는 때 쓰는 '교교'하다~ 이런 거야.
<교교 백구>는 일반 선비떼와 구별되는 존재지.
그저 입신출세에만 눈먼 선비와는 달리,
멀리 마음 두는 선비.
조나단 리빙스턴처럼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말을 하려면,
마음 자체를 일반 갈매기들과는 다르게 먹는 자세가 필요하단다. 

[6] 춘풍(春風)에 화만산(花萬山)하고 추야(秋夜)에 월만대(月萬臺)라 
    사시가흥(四時佳興)이 사람과 한가지라. 
    하믈며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이야 어내 그지 이시리.

봄바람에 산에 꽃이 만발하고, 가을밤에 달이 대에 가득하다.
사계절의 흥취가 사람의 흥겨움과 같구나.
하물며 고기가 뛰고 소리개 날며 구름은 그림자 지고 빛이 가득하기 어느 하나인들 다함이 있겠는가.

자, 이제 <언지>, 즉 선비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마음가짐의 마지막 노래야.
앞의 다섯 곡을 요약하자면,
1. 안빈낙도하며 자연을 즐기고,
2. 선비로서 허물을 짓지 말고,
3. 성선설(인간의 가능성)을 의심치 말고,
4. 임금을 늘 생각하고,
5. 뜻을 멀리, 크게 두고...
6. (                                        )
이런 거야. 이제 6번을 채우자. 

봄에는 산에 꽃이, 가을엔 누대에 달이 가득한 자연 친화적 풍광은 익숙한 거지?
자연의 아름다운 변화의 흥겨움은 인간 세계와 동일하대.
물고기, 솔개, 구름, 햇빛은 끝이 없을 거라는구나. 

즉 자연이 그침이 없이 날마다 새롭게 생동감 넘치듯,
인간도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뜻이 담겼다 보면 되겠다.
위의 빈 칸에 채울 내용은?
(자연처럼 끝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를 가지자)는 권유가 되겠지. 

자, 그럼, 이제 뒷부분의 여섯 수를 살펴 보자.
언학이라고 했으니, 공부합시다~ 이런 내용이겠지?
미리 생각해 보자.
퇴계 선생님은 무엇을 완성하신 분이라고 했지?
<왕조>의 이념적 기반인 <성리학>이야.
이황은 임금을 가르치려고 <성학십도>란 책도 썼단다.
성인의 학문을 가르치기 위한 열 장의 <그림>이야. 시청각 자료라 보면 되지.
성리학을 열 장의 파워포인트 자료에 정리한 책이라 보면 된단다. 

참고로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는 성리학의 <요점을 모은> 요점 노트가 되겠지. 
암튼, 성리학에 대한 탐구와 학문적 열정을 잊지 말자는 이야기가 앞으로 펼쳐질거야. 

[7] 천운대 도라드러 완락재 소쇄(瀟灑)한듸 
    만권(萬卷) 생애(生涯)로 낙사(樂事)ㅣ 무궁(無窮)하얘라. 
    이 중에 왕래(往來) 풍류를 닐러 므슴할고

천운대를 돌아들어간 완락재는 깨끗한데
많은 책에 묻혀 사는 생활의 즐거움이 끝이 없구나
이런 중에 바깥을 거니는 재미를 말해서 무엇하랴

천운대는 높직한 '대'겠지. 완락재는 '별당'일 거야.
서재로 쓰는 건물이겠지. 근데, 거기가 <소쇄>하대.
'소쇄'는 아주 중요한 낱말이란다.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말인데,
한여름 무더위에 소나기가 한 줄금 뿌리고 간 뒤의 시원한 느낌, 이런 것이란다.
<소쇄>는 풍경뿐만 아니라, 정신적 경지까지도 일컬을 수 있을 거야.
왜 좋은 사람은 만나고 나면 마음이 상쾌해지잖아.
책을 만 권 읽었다니 과장법이다.
예전엔 책이 그렇게 많지 않았으니 말이야.
그렇지만 암튼 대단한 독서가란 이야기지.
즐거움이 끝없단다. 독서의 즐거움. 

그런 즐거움 중에서도,
<왕래 풍류>는 말할 것도 없이 즐겁다는구나.
왕래는 <오고 가는 것>이지?
풍류는 자연 속에서 학문을 논하는 것일 거야.
책을 만 권 읽은 즐거움보다 더 큰 것은 <왕래 풍류>래. 

아빠가 교지에 쓴 글 읽어 봤니?
공자가 말한 <멀리서 벗이 오니 즐겁지 아니한가?>하는 구절.
그 벗은 <학문적으로 토론이 가능한 벗>일거야.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 말이지.
혼자서 책읽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마음이 통하는 벗과 오가며 의견을 나누는 공부라는구나. 
그래서 <서원>에서 함께 공부하는 일이 중요하겠지. 

[8] 뇌정(雷霆)이 파산(破山)하여도 농자(聾者)는 못 듯나니 
    백일(白日)이 중천하야도 고자는 못 보나니 
    우리는 이목 총명(聰明) 남자로 농고같지 마로리


우뢰 소리가 산을 깨뜨릴 듯이 심하게 울어도 귀머거리는 못 듯네
밝은 해가 하늘 높이 올라도 눈 먼 사람은 보지 못하네
우리는 귀와 눈이 밝은 남자가 되어서 귀머거리와 봉사 같지 말리라

귀머거리는 천둥소리를 듣지 못하고, 맹인은 해를 보지 못한다.
우리는 이목이 밝은 남자이니, 귀머거리, 맹인처럼 살지는 말자는 이야기다. 

자, 이 노래는 일반인들에게 들려주는 노래가 아니라고 했다.
왕조 조선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을 연구하는 <도산 서원>의 주제가인 만큼,
뻔하게 눈 앞에 보이는 <진리>인 성리학 연구를 반드시 해야한다는 강조일 것이다.

[9]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봇 뵈 
    고인을 못 뵈도 녀던 길 알페 잇네
    녀던 길 알페 잇거든 아니 녀고 엇졀고 


옛 어른(성인)도 나를 보지 못하고 나도 그분들을 못 보네
그러나 그분들이 행하던 길은 아직도 앞에 놓여 있네
그렇듯 올바른 길이 우리 앞에 있는데 그를 따르지 않고 어찌할고?

이 9연~11연이 시험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연들이다.
성인도 나를 못 봤고, 나도 성인을 만나진 못했지만,
그분들이 녀던(가던, 다니던) 길이 앞에 있다. 

성인의 길이란 곧 <성리학적 길>인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는 것이 <성리학>이다.
요즘 이야기하는 <인문학>에 들어가는 문학, 역사, 철학 등이 다 포함된 것인데,
그 기본이 인간의 본성이란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순하고 선한데,
그 <어진 본성>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이 성리학이다.
극기복례(克己復禮)는 '자신만을 내세우는 이기심을 이겨내고, 예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논어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말은,
인간다움의 요체는 '사랑'인데, 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곧 자신을 절제하는 마음.
<제가 하기 싫어하는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정신이다. 

공자의 말씀으로 비롯된 성리학적 올바름의 드러난 모습인 <예>를 행하는 일.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안다면,
<공자님이 행하신 길이 앞에 있으니, 나도 아니할 수 없다>는 반어적 질문이다.
안 가고 어쩌겠는가? 가야지. 당근.
성리학, 이거 참 좋은데~
뭐라 말로 설명할 수가 없네~.
좋다.
누구한테 좋다고? 남자한테? 노~~~
바로 임금한테 좋단 거야.
선비는 오로지 왕조를 지탱하기 위한 존재로서만 의미가 있다보면 될 거다.

[10 ] 당시(當時)에 녀던 길흘 몃 해를 버려 두고 
    어듸 가 다니다가 이제아 도라온고? 
    이제야 도라오나니 년 듸 마음 마로리.


그 때 뜻을 세우고 학문 수양에 힘쓰던 길을 몇 해씩이나 버려 두고
어디에 가서 무엇하다가 이제야 돌아왔는고?
이제라도 돌아왔으니 다른 곳에 마음 두지 말고 옛날에 하던 학문 수양하리라

퇴계는 젊어 등과하여 노년에야 고향으로 돌아온다.
안동의 '도산' 골짜기에 손수 설계한 집을 짓고,
도산서원이라 하였다.
현판을 쓴 이는 한석봉인데, 너무 쫄아서 질그릇 도 글자가 삐뚤어졌다는 농담도 있다. 

학문 연구의 길을 버려두고 벼슬살이의 북새통에서 살다 왔다.
어디 돌아다니다 이제 돌아왔는가~ 이런 반성이 보인다.
이제 돌아왔으니, 년 듸(다른 데) 마음두지 말자! 이런 의지가 보인다. 

다른 데 마음 쓰지 말고, 열공!!!하자는 의지가 불꽃을 튀긴다.
그 공부의 내용은 이제 알겠지?
바로 성리학이다. 조선 왕조의 기틀, 성리학.  



[11] 청산(靑山)은 엇데하야 만고(萬古)애 프르르며,
    유수(流水)는 엇데하야 주야(晝夜)애 긋디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디 마라 만고상청(萬古常靑)호리라.


푸른 산은 어찌하여 영원히 푸르며
흐르는 물은 또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흐르는가
우리도 그치는 일이 없이, 언제까지나 푸르게 살리라

산은 맨날 푸르고, 물은 맨날 흐른다. 변치 않는 자연의 속성이다.
근데, 인간은 툭하면 공부를 스톱한다.
특히 일에 바쁘면 공부를 뒷전으로 미룬다.
그 공부는 바로? 성리학이지. 

어떤 대기업에서 <일십백 운동>을 말한다고 하더구나.
초중고 대학에서 <일>을 배운 사람을,
기업에서는 <십>을 알도록 가르칠테니,
스스로 <백>을 공부해야 미래에 적합한 인재가 된다고 한다. 

세상의 지식은 <네이버 지식in>에게 물어보면 다 나온다. 물론 쬐끔은 틀리지만 ㅋ
배가 아파도 네이버에 물어본다. 의사는? ㅋㅋ 나중에 확인차 물어보는 거고...
지식의 변화 속도가 엄청나다. 정보의 양은 메가톤급이다. 
한 사람이 하나의 직업으로 평생 사는 시대가 가고 있다.
한 나라에서 사는 시대도 가고 있다. 

그래서 요즘 맨날 나오는 말이 <자기 주도적 학습>이란다.
학교에서 아무리 열공해도, <1>밖에 못 배운다니 말이다.
회사에서 전문적 지식을 습득해도 <10>밖에 안 된다니 한숨난다.
평생 배워야할 <100>은 그야말로 스스로 학습하는 수밖에 없다.
변하지 말고, 그치지 말고, 꼿꼿하게 공부하는 자세를 버리지 말자는 의미의 시조를
책상 머리에 붙여두는 일도 좋을 듯 싶다.

[12] 우부(愚夫)도 알며 하거니 긔 아니 쉬운가? 
    성인도 못다 하시니 긔 아니 어려온가? 
    쉽거나 어렵거나 중에 늙는 줄을 몰래라.


어리석은 자도 알아서 행하니 학문의 길이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성인도 다하지 못하는 법이니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쉽든 어렵든 간에 학문을 닦는 생활 속에 늙는 줄을 모르겠노라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학문>인 성리학.
그건 바보도 안다. 알기는 쉽다.
그렇지만 공자도 못다 하셨다. 실천은 어렵다.
알기는 쉽고 실천은 어렵지만,
그 학문을 닦는 속에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그렇게 사는 것이 훌륭한 생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결국 <성리학>의 완성은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있다는 것이란다. 

작년부터 발굽이 갈라진 동물에게 걸린다는 <구제역>이란 동물질병이 대유행을 했다.
그래서 그 병이 걸린 소와 돼지 등을 죽이는 <살처분> 명령이 내렸어.
근데, 소는 숫자가 적으니깐 한마리씩 죽여서 묻었는데,
돼지는 숫자가 너무 많으니까 구덩이를 파고 비닐을 깐 뒤
몇백 마리에서 천여 마리까지 생매장을 했단다. 

요즘 그 참상을 담은 동영상이 떴는데, 정말 눈뜨고 보기 어렵더라.
문제는 그 담에 생겼어.
동물 사체에서 흘러나올 액체(침출수)를 모으기 위해서 비닐을 두 겹으로 까는 건데,
산 돼지를 무더기로 묻으니, 그 돼지들이 발버둥을 치면서 비닐을 다 찢었어.
원래 사체에서 나오는 물은 정화조에 모이도록 되어있는데, 비닐이 찢어지는 바람에
그 돼지들의 사체가 썩으면서 나오는 물이 지하수로 들어간 거야.
그 지하수를 펌프로 퍼올려 농업용수로 쓰던 농가들은
어느날 갑자기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물을 농작물에 뿌릴 수 없게 되었지. 

그 물은 결국 식수로 사용하는 강물로까지 흘러들어가게 되었단다.
동물의 사체를 무더기로 묻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도 뻔한 일을 대~~충 해 놓으니 당연히 이런 결과가 생긴 거야.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원인은 너무도 작은 것이었단다. 

이렇게 세상 살이에서 중요한 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야.
<내가 알아야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이 있었어.
성인의 말씀을 아는 것은 쉽다는 거지.
뭐, 세상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책이 있고,
다 따지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철학자들과 그 유파가 있단다.
그치만, 삶에서 중요한 것.
그런 철학적 태도는 어려운 게 아니란 거야.
문제는,
실천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 그런 거지. 

이 노래는 16세기에 지어진 시조란다.
근데, 하나 살펴볼 게 있어.
18세기에 상당히 앞서나간 사상을 가졌던 박지원같은 사람도 한문으로 소설을 썼단다.
교과서에서 배운 <허생전>도 사실은 한문 원본을 번역한 거야.
그런데, 왕조의 성리학적 토대의 핵심 요원이던 퇴계 요원이 <시조>로 교가를 지어 부른 이유가 뭘까? 

그 내용이 <도산십이곡 발>에 잘 적혀 있어.
'발'은 '창작 동기, 배경, 작가의 견해' 등을 적은 글이야.
읽고 설명해 볼게.

도산 노인은 평소에 음률을 이해하지 못하나, 세속의 음악은 싫어하였다.
그러나 노인은 한가롭게 병을 요양하던 중에 무릇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으면 시를 짓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시는 옛날의 시와는 달라서 읊기는 좋아도 노래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하여,
이를 노래로 부르려면 우리말로 지어야 되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음절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별이 지은 ‘육가’를 본을 삼아 ‘도산육곡’ 둘을 지으니,
그 첫째는 ‘지(志)’를 말한 것이고, 둘째는 ‘학(學)’을 말한 것이다.
이를 아침 저녁으로 아이들에게 익혀 부르게 하며, 의자에 기대어 듣기도 하려니와
또한 아이들이 스스로 노래하고 춤추게 하면 비루함과 인색함이 사라지고 마음이 감동하고 서로 통하여
노래 부르는 자와 듣는 자가 서로 이로움이 있을 것이다. <이황, 도산십이곡 발에서>

오늘의 시는 옛날의 시와는 달라서 읊을 수는 있겠으나, 노래하기에는 어렵게 되었다.
이제 만일에 노래를 부른다면 반드시 이속(俚俗)의 말로써 지어야 할 것이니,
이는 대체로 우리 국속(國俗)의 음절이 그렇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일찍이 이별의 노래를 대략 모방하여 ‘도산 육곡’을 지은 것이 둘이니,
기 일(其 一)에는 ‘지(志)’를 말하였고, 기 이(其二)에는 ‘학(學)’을 말하였다.
아이들로 하여금 조석(朝夕)으로 이를 연습하여 노래를 부르게 하고는 궤(几)를 비겨 듣기도 하려니와,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를 부르는 한편 스스로 무도를 한다면
거의 비린(鄙吝)을 씻고 감발(感發)하고 융통(融通)할 바 있어서,
가자(歌者)와 청자(廳者)가 서로 자익(資益)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이 시를 창작한 배경을 알 수 있는 자료야.
도산 노인(이황)은 우선 세속의 음악과 지금의 한시와 다른 노래를 짓고자 했대.
그리고 아이들로 하여금 이 노래를 불러 ‘지(志)’와 ‘학(學)’을 깨닫게 하고자 하는
후학 양성의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어.
또한 아이들이 밤낮으로 이 노래를 통해 정신 수양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지었으며,
나아가 이 노래를 듣는 자도 부른 자와 같은 마음이 일어나도록 유도했다고 그래. 

우리 나라의 음률에 적합한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한 것이지.
결국 이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 속에 <내면화>되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해 보면 이 노래의 주제를 알 수 있단다.
내가 몇 번 반복해서 이야기한 것처럼
<언지>에서 선비의 바람직한 삶의 자세를,
<언학>에서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탐구의 자세를 가르치려 한 것이겠지. 

이렇게 노래는 그 시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란다.
요즘 노래들이 '가벼운 만남과 헤어짐'을 노랫말에 담고 있다면,
시대가 그렇게 변하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 

자, 이제 바쁜 학기초가 되겠구나.
민우도 마음을 잘 가다듬고 새학기를 맞기 바란다.
곧 겨울눈을 찢는 아픔을 겪고 새싹과 봄꽃들이 치열하게 돋아날 것이다.
그 꽃들을 보면서 삶의 원리도 곰곰 생각해 보는 봄을 맞기 바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