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벽 2 - 고독한 사람들
이시카와 다쓰조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좋은 조건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인간과 인간이 바로 만나서 ...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이 느껴질 때, 감동같은 걸 느끼잖아요. 그런 감동에 묶이는 거죠. 

 
   

내가 대학다닐 때 알바 두 개 해서 버는 월급이 50만원이었다.
그러다 발령을 받고 초봉으로 받은 월급은 479,500원.
이 일을 계속 해야 하나,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일보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주는 마력은 지금도 여전하다.
교사 아닌 누구도 느낄 수 없는 매력이 수업 시간, 그 고단한 속에 있는 것이다.
뭐, 그 479,500원 안에 보너스 계산이 잘못되었다고 3,4만원을 몇달 뒤에 빼앗아갔지만 말이다. 

   
  교육연구를 한다고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단 한 푼의 수입과도 연결되지 않는 순수한 봉사 노동이었다.
일교조라는 집단은 이름도 없이 고생하고 봉사하는 교사들이 지탱하고 있었다. 
 
   

이런 것이 가장 무서운 힘이다.
전교조를 박살내지 못해 늘 아등바등 애쓰는 정권도 그 순수한 힘 앞에서 늘 힘겨워하는 것이다.
교사의 노동조합을 마치 정치 권력인 양 여기는 것은, 그 내부의 순수함을 몰라 그렇다.
그렇지만, 한국의 조합은 또한 정치적인 힘에서 전혀 벗어날 수도 없다.
그 역학관계는 늘 유동적인 것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교사들의 조합운동을 고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하며,
정부의 탄압하며,
어쩜 그렇게 1950년대의 일본과 1990년대의 한국이 꼭같아 보이는지,
아니, 일교조는 그나마 90% 가까운 가입률을 보였지만,
전교조는 정부의 탄압 성공에 힘입어 늘 2,30%를 오락가락하는 낮은 가입률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아사이 요시오라는 아이가 단돈 1,2엔을 아끼려고 비바람을 뚫고 찻길을 건너다 사고를 당한다.
아, 이런 날 교사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한 것인지,
오자키 선생은 아사이의 가족 중 누구도 아사이를 돌봐줄 이가 없음을 알고 스스로 교육탑에 아이를 묻는다.
의부와 살게 된 아이의 슬픔과 답답함. 

내가 담임하던 아이 중에 성이 전씨였다 임씨로 바뀐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내 반에서 늘 임씨였으나, 누나는 전씨였다.
그 아이가 공고에 합격하였으나 등록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 통장에서 27만원을 찾아 등록을 하러 보냈는데...
그날 하필이면 방학식이어서 잊고 있었는데,
결국 그 아이는 등록을 하지 않았고,
그 아이를 어느 회사에 취직까지 시켜주려 했건만, 녀석은 자장면 집 배달부로 들어갔단 후문을 들었다. 

교사로 살다보면, 이런 일은 숱하게 겪는다.
마음 아프고, 남의 일로 신경쓰다 잠을 설치는 일이 허다하다.
그렇지만, 언젠가, 녀석이 나의 27만원을 들고 찾아올 것을 믿는다.
그런 것이 교사로 사는 사람의 자존심이다. 

   
 

교사는 사회에서 고독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지요.
교사의 기쁨은 학생이 아니면 안 돼요. 

 
   

사와다 선생은 장애인 아이를 놀린 아이들을 체벌한 사건으로 곤란을 겪는다.
그렇지만, 교육의 이름으로 달라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과,
사회적 문제를 만드는 것 사이엔 종잇장 하나 거리도 없지만, 
교육의 이름으로 바른 교육을 받은 아이들의 마음 속에 남는 것은 평생을 사는 힘이 될 것이요,
교육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가혹한 처벌의 결과는
어른이 되어서도 매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저항하는 어른들의 모습만을 남길 것이다. 

현대 한국의 교실에서 강압적 폭력적 체벌이 거의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체벌에 대한 저항이 그토록 강한 것은,
지난 시절, 일제 강점기와 군사 독재 시절에 넘쳐났던 그 폭력에 대한 저항이라고 나는 읽는다. 

교실에서 아이들 손바닥을 때리고, 종아리를 때리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런 방법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한두 명 손바닥을 맞는 걸 보면서 '허생원'이 파는 것은 '드팀전'도 아니고 '메밀꽃'도 아닌 '옷감'임을 알게 된다면,
한두 명의 손바닥이 잠시 발개지는 것이 과연 죄악인지 살펴볼 일이다. 

   
 

그들은 아직도 이런 사고방식에 젖어 있었다.
같은 노동자라는 말을 쓰고는 있지만
일반 공장노동자와 교사의 구별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단순 노동자가 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공장 노동자는 파업으로 몇 달 씩 생산을 중단시킬 수 있다.
그러나 교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학생들은 살아 있다.
교육은 쉴 틈이 없다. 

 
   

교원노조 활동을 하면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이런 점이다.
쉴 틈 없이 교육활동을 하면서 인습과 고집을 이겨나가는 일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다.
그렇지만, 내가 처음 시작한 학교에 비하면,
교장의 돈과 관련한 비리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고,
학부모회에 의존하는 구조도 거의 사라졌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학생들의 학습 노동 강도가 지나치게 강화된 면을 막지 못한 것은 가장 큰 잘못이다.
그러나, 어쩌랴.
노동운동은 언제나 문제점을 대증처방으로 막을 수밖에 없음을...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노동운동의 역사는 늘 선구자적 교사들이 이런저런 사유로 파면당하고 그들이 구제되는 과정의 반복을 통하여 겨우 발전이 이뤄지는 것을 보아온 나로서는 그 전철을 밟는 일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여김을 가슴에 묻을 수밖에 없는데... 

오십 년 전의 소설을 읽으면서,
현재의 문제로 여기는 일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교육처럼 관습적인 활동 속에서는,
수백 년 전의 교사가 느꼈던 갈등이 지금 반복된대고,
나는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읽으며 책장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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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별을 오이처럼 따다가 - 마음으로 읽는 옛글 청소년을 위한 옛글
조희정 엮음 / 우리학교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된장, 고추장, 그리고 청국장과 막걸리...
뭔가 걸쭉하면서도 특유의 감칠맛을 느낄 수 있는 한국의 맛은 글에서도 등장한다. 

우리학교에서 나온 옛글 읽기 시리즈, 두번째 권은 첫번째 권의 신선한 맛에 제법 농익은 맛이 들었다. 

신분제 사회에서 나름대로 같은 의식을 가진 친구들에 대한 다사로운 정을 나누는 '척독(편지)'글들이 처음에 등장하는데,
거기서 우러나오는 진심은 오랜 시간을 지난 지금 읽어도 모락모락 삭은 맛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묻어 난다. 

맹자를 팔아 밥을 해 먹고, 좌씨를 팔아 술을 마시던 '책만 읽는 바보' 이덕무의 글에서는
가난 속에서도 벗과 함께 하는 일의 즐겁던 모습이 오롯이 살아난다.
원이 아버지에게 보냈던 편지는 오랜 시간이 지나 읽어도 더 감칠맛나게 읽히는 특유의 맛이 그대로 묻어난다. 

이순신의 차도남 스탈의 난중일기에서 묻어나는 아비의 진정과 조식의 두류산 기행은,
선비 정신의 진수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막걸리에서는 위스키나 블렌디에서 맛볼 수 있는 끈적함이 없다.
깔끔하면서도 걸쭉한 스타일이지만, 차가운 냉정함이 담긴 맛.
그런 글을 만나는 일은 더위먹듯 힘겨운 세상살이에서 서늘한 막걸리를 넘기는 맛이리라. 

고전 속에서 얻어내는 이야기들도 있다.
이야기 읽어주는 '전기수'나, '다모'의 다사로운 이야기,
여장부 만덕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쉬이 접할 수 있는 이씨 조선의 왕조실록 속의 이야기와 다른 세상에서도 충분히 훌륭한 인간상들이 조망되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글들이다. 

자유로운 생각을 풀어내는 자들의 글을 마치 벼 속의 피 같대서 '패관문학'이라고 얕잡아 불렀지만,
그들의 글 속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을 현대인들이 잡아낸 것들도 많다. 

복숭아나무와 잡목이 겉보기엔 천양지차로 보이지만, 생명체임이 같은 것은,
마치 '설'을 읽는 기분이다.
다양한 차마설, 이옥설, 주옹설 등은 유명해서 이 책에서 제한 느낌도 난다. 

마지막에 실학자들의 실용문을 실었다.
재미는 없으나, 사실은 실학의 본류가 어떤 것이었는지,
글의 의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으로서의 실학자들의 글을 제시한 이유를 생각한다면,
내용을 떠나 충분히 읽힐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옛글 속의 지혜와
옛글 속의 인생을 만나는 일은,
곧 미래의 자신을 가늠하고 가다듬을 수 있는 지혜로운 인생을 꿈꾸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은,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나,
중학교 저학년의 우등생, 중학교의 고학년부터 고등학교 1,2학년생까지 충분히 읽히고 이야깃거리를 찾을 제재로 적절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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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타고 가면 되지 - 천 년 동안 맛있게 발효된 우리 옛이야기, 재미로 읽는 옛글 청소년을 위한 옛글
조희정 엮음 / 우리학교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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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고전이라고 하면, 읽을 수도 없고, 읽더라도 뜻도 모르는 말들이 많이 나오는, 
그렇게 엄청 어려운 책들,
예를 들면, 훈민정음 서문이나 두시언해, 기미독립선언서 같은 글들을 떠올리는 것은,
국어 교육의 실패 결과다. 

그렇지만,
지금 아이들이 찾아 읽을 수 있는 고전 작품집이 많지 않은 것 또한 국어 교육자들의 실패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한국의 역사에서 배울만한 뭔가가 있음을 가르치기 시작하는 단초가 되는 일이다.
그렇게 시작해야 한다. 모든 공부는. 

이 책은 초딩 고학년 정도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설화들로 가득하다.
그렇지만,
독서를 통한 다양한 사고의 발산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고등학생이라도 읽고 토론한 거리로 풍부하다.  

예를 들면, '돼지가 먹어치운 폭포' 이야기에 덧붙인 말에,

   
  옛글에는 탐관오리의 횡포를 고발하는 작품들이 유난히 많은데, 이 이야기 역시 그와 비슷한 부류이면서도
포복절도할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풍자문학의 백미입니다.
얼마나 관리들의 횡포가 심했으면,
얼결에 돼지가 폭포를 먹어 버렸다고 했을까요.
우스우면서도 한편 씁쓸한 이야기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같은 구절은 충분히 토론거리를 제시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구렁덩덩 신선비 같은 작품은 이야기 화소가 흥미를 놓칠 것 같아서 다른 설화와 얽어 놓기도 한 것은,
어떻게 보면 원전을 해친 것 같지만,
이 책의 모토가 '재미로 읽는 고전'이라면,
재미를 놓칠 수 없다는 면에서 성공하고 있는 부분으로도 볼 수 있겠다. 

초등학교 저학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선생님이 읽어도 좋겠고,
어린 아이들을 기르는 어머니들이 읽으셔도 좋겠다.
특히 초등 고학년 부터는 이런 책들로 독서에 관심을 가지게 하되,
동화와 차별되는 고전 공부의 시작을 이런 책들부터 시작하게 하는 일도 흥미로울 것 같다. 

이런 시도가 많이 열렸으면 좋겠고, 이런 도서들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국어 교사로서 간절한 바람이다.
아이들이 읽기를 통해서 옛날과 오늘날의 사람 살이는 모두 같지만,
또 사람 사는 데는 일정한 철학적 바탕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일이
교육이란 이름의 작업임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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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4-03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저학년들을 위한 옛 이야기 모음집 같은 책이 많이 출간되는거 같아요, 최근에 나온 서정오 씨의
책도 그렇고요,, 옛 이야기들도 그리스 로마 신화 못지 않게 흥미롭고 재미난 것들도 있는데
저 역시 아이들이 이런 책을 많이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글샘 2011-04-04 19:40   좋아요 0 | URL
한국 고전의 한계가 한문으로 씌어있단 건데요.
이런 작업들이 한계를 넘기위한 노력이고 좋은 결과도 낳겠지요.

야홋! 2011-04-04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 교과서도 소화 못하는 초딩은 안돼겠죠? 진단평가가 52점이라며, 시험지도 안보여줍니다....
하.. 요새 초딩과외를 하는데. 수학이야 모르면 다시 풀어주면 되지만 국어랑,영어문법은 정말 답이 안나오네요..^^;; 대체 이아이의 지식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가 감이 안와서... 오늘도 공부하기 싫다고 완전 일찍끝내달라는 애 잡아놓고 공부...(실은 암기^^)시키는데, 저야 넉넉한 자취를 위해서 하지만... 후-_-이렇게 과외선생님 붙여놓고 집 비워놓는 집은 좀 아닌거 같아요..

글샘 2011-04-05 08:43   좋아요 0 | URL
이 책이 앞부분은 재밌거든.
공부 싫어하는 애 일수록, 재미있는 이야기를 자꾸 읽으라고 하면 될 거야.
초딩도 힘들단다. 에효~~
 

역사는 발전하는가? 하는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갑론을박하던 주제였단다.
역사 속에서 경제적으로 발달함에 따라 역사가 풍족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올바른 배분의 역사가 있었던 적은 인류 역사상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다. 

한국은 1인당 국민 소득이 20,000달러가 되니 마니 하는 나라지만,
1인당 2만 달러면, 한국 돈으로 2천만원 이상 되고,
4인 가족 기준으로 연간 8천만원 이상을 벌어야 한다는 소린데,
글쎄, 부가 편중되어서 그렇게 버는 가족이 그닥 많을 것 같지는 않구나. 

오늘은 1970~80년대의 노동자들의 노래를 한번 보자.
1988년에 올림픽이 열리고, 그 전후의 민주화 운동과 노동자 대투쟁을 통하여 임금인상이 상당히 많이 되었어.
그렇지만, 사장들이 노동자들에게 권리를 넘겨주기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
더군다나, 정경유착이라고,
정치인들은 경제인들과 짝짜꿍이 맞아서,
노동자들의 정당한 노동운동을 경찰의 힘을 빌려서 막곤 했단다. 

그러니 아직도 한국의 노동운동은 세계적으로 많이 뒤떨어진 편에 속한다고 봐야겠지.
앞으로도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이 더 많아지고,
한 사람이 몇 가지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근근히 먹고 사는 시대가 점점 오고 있다고 봐야해.
그런 것이 세계화의 원리이자 결과물이지.
FTA의 결과로 비정규직이 많아지고, 부가 편중되는 것이 심화되는 일은 어쩜 당연한 거란다.
국가 전체의 이익이 많아진다고 해도, 부가 편중되는 것이 심화되면, 가난한 사람이 더 많아지는 결과를 낳게되 되겠지. 

오늘 소개할 시들은 이미 지나간 시대의 시들이다.
그렇지만, 역사는 반복된단다.
이런 슬픈 노동의 노래들을 다시 부를 시대가 올는지 모를 일이야.
우선 <노동 해방>의 앞자를 따서 이름을 '노해'라고 지은 '박노해'의 '손 무덤'을 읽어 보자.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 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 주질 못하였다

훤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앉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데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 눈 까뒤집어도 없고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거리엔
세련된 남녀들이 화사한 봄빛으로 흘러가고
영화에서 본 미국상가처럼
외국상표 찍힌 왼갖 좋은 것들이 휘황하여
작업화를 신은 내가
마치 탈출한 죄수처럼 쫄드만

고층 사우나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고급 요정 살롱 앞에도 승용차가 가득하고
거대한 백화점이 넘쳐흐르고
프로야구장엔 함성이 일고
노동자들이 칼처럼 곤두세워 좆빠져라 일할 시간에
느긋하게 즐기는 년놈들이 왜이리 많은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선진조국의 종로거리를
나는 ET가 되어
얼나간 미친 놈처럼 헤매이다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장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박노해, 손 무덤>

이 시 속에는 <이야기>가 들어있어.
그런 시를 '서사적'인 시라고 했지? 

화자는 손목을 잃은 사람을 '정형'이라고 부르고 있어.
그런 걸로 보면, 같은 노동자인 처지라고 봐야겠지.
정형은 올해 어린이날은 어린이대공원에라도 가겠다는 꿈을 꾸는,
싸구려 은하수 담배를 피우던(빨던) 소박한 노동자였단다. 

지금은 공정이 많이 자동화 되었지만,
아직도 외국인 노동자들의 영세한 공장들은 위험천만이란다.
프레스 기계로 냄비같은 것을 만드는 공장에선 손목 날아가는 일도 흔한 일이었대. 

빨리 병원으로 후송해야 하는데,
더러운 작업복 차림으론 사장님의 고급 승용차도 탈 수 없고,
짐차 트럭의 짐칸에 실려 병원으로 간대. 

화자는 기계 사이에 끼어있는 정형의 '손'을 장갑 속에서 꺼내고,
비닐봉지에 싸서 정형의 집으로 가.
봉천동은 가난한 사람들의 산동네였는데,
거기서 정형의 아내와 아들을 보면서 손을 전하지 못했대.

하릴없이 소주나 한 잔 마시고,
산업재해(산재) 관련 서적을 찾아보는데,
큰 서점에도, 산더미같은 책 중에도, 노동관련법은 찬밥이야.
변호사들도 '노동법'은 모른대.
판사들도 '노동법'은 모르면서 되는대로 판결을 내린다더구나. 

책을 찾으러 종로엘 간 화자는 마치 미국이라도 온 듯,
세련된 남녀들의 멋진 모습에,
작업화 신은 스스로를 '탈출한 죄수'처럼 이물감 느끼며 쫄아들었대. 

한 노동자는 오늘 손을 잃었는데,
세상에선 멀쩡하게 사우나, 술집, 백화점, 야구장에서 즐기는 사람으로 가득해.
노동자들이 일할 시간에 즐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화자는 비속어를 막 내뱉지.
노랫말 속에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어... 아, 아, 대한민국, 아, 아, 우리 조국, 아, 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이런 노래를 부르던 가수가 있었는데,
어느 재벌 총수의 첩이 되어 무슨 백화점을 하나 얻었다는 소문이 있더구나.
웃기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데, ㅋㅋ
그건 할아버지의 첩이 되어야 하는 일이라니 말이지.

화자는 자신이 <탈출한 죄수>같다가, 이번엔 <이티>같대.
그리고 다시 노동 현장으로 돌아와서 연장노동을 시작한대. 

아직 화자의 품 속에 있는 '손'은 식었는데,
그래서 그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담벼락 밑에 정성스레 묻어.
그 싹둑 잘린 노동자의 손을 보면서,
일 안하고 놀고 먹는 하얀 손들(백수),
그들에 대한 원한의 눈물을 흘리게 된대.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이 마지막 구절에서 화자는
노동자가 일한 만큼 대접받는 세상, 그 기쁜 세상이 될 때를 바라며,
손을 묻는다는구나. 

이런 사회 비판적이고 참여적인 시를 썼다고 해서,
박노해는 감옥살이를 하게 돼. 한 일도 별로 없는데 무기징역을 선고받지.
뭐, 나중에 풀려나지만.
무슨 '사회주의 노동자 동맹(사노맹)'이란 단체를 만들었다는구나.
그렇지만, 그 단체가 한 일은 기껏 이런 시 몇 편 노동자에게 읽히고,
파업해야할 때 파업하는 것의 정당함을 이야기한 것 뿐이지. 

5월 1일은 세계 노동절이란다.
메이데이라고 하지.
미국의 노동자들이 노동운동 중에 많이 희생된 날을 기념하는 날인데,
한국에선 '노동절'이란 말을 엄청 싫어해.
자꾸 '근로자의 날이란 말을 쓰지.
'노동자'는 '사용자'와 반대입장에서 싸우는 의미가 강하거든.
'근로자'는 시키는 대로 온순하게 일하는 의미가 강하고.  

이런 단어 하나에서도 화자의 의도는 그대로 드러난단다. 

박노해는 1958년 개띠야.
58년 개띠란 말을 많이 쓴단다.
그 해에 태어난 사람도 많고, 아주  가난하던 시절이라,
너무 흔하고 귀하지 않은 사람들의 무리를 일컫는 용어로 쓰여.
또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이란 사람이 공부를 못해서 고등학교 입시도 없어지고,
그래서 공부를 안 했겠지? 58년 개띠들이?
그래서 열공해서 명문고 들어갔던 선배들이 무시하는 뜻으로 썼겠지. 58년 개띠. 이러고 말야. 

그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섬유 · 금속 · 정비 노동자로 일했대. 
유신 말기인 1978년부터 노동 운동에 뛰어들었고,
노동자의 삶을 다룬 시가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노동시들은 바로 노동자 자신에 의한 시쓰기라는 점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어.
19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간행하여 완전 베스트셀러가 되었지. 



그의 시 <노동의 새벽>을 한번 읽어 보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가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가 끝내 못 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 가도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박노해, 노동의 새벽>

화자는 몇 살이지? 
3연에서 나오지. 29세.
그 젊은 나인데, 어투는 마치 49세쯤은 되어 보이는구나.
전쟁같은 밤일을 마치고, 찬 소주나 마시는 노동자의 싸구려 인생. 

그러나 그 인생을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해.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에서 보이잖아.
그러나 그들에게 절망만 있는 건 아니야.
그들에게도 희망이 있단다. 좀 억지 희망이긴 하지만,
그들은 <차가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 동지들이 있어. 

그러노라면, 노동자에게도 <햇새벽>이 밝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보이지.
노동자들이 1988년 노동자 대투쟁때 내세웠던 이슈가 뭐였는지 알아?
'두발 자율화'였대.
머리도 제대로 기르지 못하던 노동자들의 비인간적 삶이 잘 드러나 있지. 

노동자뿐 아니라, 농민들의 마음을 드러낸 신경림의 <파장>도 한번 읽어 보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신경림, 파장>

'못난 놈들'에서 농민들의 동류의식이 잘 보인다.
'참외, 막걸리'같이 서민적인 음식을 나누면서,
'가뭄 걱정, 빚 걱정'을 이야기하지. 

그러면,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는 마음을 감출 수 없어. 
이촌향도라고 촌을 버리고 도시로 향하던 시대였잖아.
시골에선 먹고 살기도 힘들고,
도시 위주의 개발을 하니 죽을 맛이겠지. 

농무의 시인이잖아.
답답하고 울분이 터지던 농민의 춤사위. 

마지막에서 사든 것은 '고무신 한 켤레'임을 볼 때,
장터에 온 것은 꼭 물건 구입은 아닌 모양이지.
삶의 답답함을 풀기 위해서 나온 거지.
<절뚝이는> 장터는 농촌 현실의 <파행(절뚝걸음)>을 보여주는 시어야.
술에 취해 비틀거리듯, 엉망으로 망가진 농촌 말이지.

이 시는 낮시간부터 파장 무렵까지 <시간 경과>에 따라 시상이 흐르고 있어.
이러던 시절에 김지하는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를 썼지.
간절히 민주주의와 자유를 원하던 노래 말이야.
그 시의 원류가 된 폴 엘뤼아르의 시를 한편 읽어 보렴. 

 

초등학교 시절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페이지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황금빛 조상(彫像)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밀림과 사막 위에
새 둥우리 위에 금작화 나무 위에
내 어린 시절 메아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밤의 경이로움 위에
일상의 흰빵 위에
결합된 계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누더기가 된 하늘의 옷자락 위에
태양이 곰팡 슬은 연못 위에
달빛이 싱싱한 호수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들판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리고 그늘진 방앗간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새벽의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배 위에
미친 듯한 산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구름의 거품 위에
폭풍의 땀방울 위에
굵고 무미한 빗방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모든 것 위에
여러 빛깔의 종들 위에
구체적인 진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깨어난 오솔길 위에
뻗어나간 큰 길 위에
넘치는 광장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불 켜진 램프 위에
불 꺼진 램프 위에
모여 있는 내 가족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둘로 쪼갠 과일 위에
거울과 내 방 위에
빈 조개껍질 내 침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게걸스럽고 귀여운 우리 집 강아지 위에
그 곤두선 양쪽 귀 위에
그 뒤뚱거리는 발걸음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 문의 발판 위에
낯익은 물건 위에
축복받은 불의 흐름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화합한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놀라운 소식이 담긴 창가에
긴장된 입술 위에
침묵을 넘어선 곳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안식처 위에
무너진 내 등댓불 위에
내 권태의 벽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욕망 없는 부재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되찾은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 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 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엘뤼아르, 자유>

세상 만물의 자유를 갈구하는 의지의 목소리로 외치는 이 시는,
김지하 시인에게 같은 열망을 표현하는 시를 쓰게 했지.

22개의 연에서 모두 단 하나의 초점(포커스)를 위하여 달려오고 있어.
바로 그것은 간절하게 <자유>를 원하는 것처럼 표현되고 있지. 

이 시는 엘뤼아르가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하면서 발표한 저항시래. 

시인은 시간적으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현재까지,
공간적으로는 지상의 미세한 사물에서 저 하늘에까지
모든 것에 자유를 쓰고 있지.  

그러한 `자유'라는 이름을 쓰는 행위가 무려 20연에 걸쳐 행해지고 있어.
게다가 모든 연의 마지막 행은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고 말야.
그러나 이러한 반복에도 불구하고 자유라는 이름을 쓰는 그 구체적 사물들이 끊임없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어서
오히려 상승적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단다.
시인이 모든 사물 위에 `자유'라는 이름을 쓴다는 것은
곧 모든 사물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명명한다는 뜻이고,
이 세계의 모든 존재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기를 갈망하고,
아울러 자유라는 깃발을 들고 자유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야.

이 시의 원래 제목은 `단 하나의 생각'으로,
주제는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워하는 것이었다고 그래.
어찌 보면 `님'에 대한 절실한 사랑은 한용운 스님의 시와 비슷하단다.
인류의 공동 가치에 대한 절실한 애정과 일맥 상통하는 법이라,
자유에 대한 간절한 희망이나,
애인에 대한 '단 하나의 생각'이나 한줄기로 통하기도 하지. 

유사한 시, 김지하를 읽어 보자.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2연의 <소리>들은 억압받던 현실을 감각적으로(청각) 잘 살리고 있지.
<푸르른 자유의 추억>도 자유 민주주의 실현 열망이 감각적으로(시각) 잘 나타난 표현이고 말이야.

2연의 <외로운> <눈부심>은 역설적 표현이지?
외로움, 괴로움, 답답함과
눈부심, 환함, 희망, 기대감은 상반되고 모순된 표현이니 말이지.
투쟁하는 이의 앞길은 <외로운 감옥의 길>이기도 하고 심하면 <죽음의 길>이기도 하지만,
그 길은 옳은 일을 행하는 <눈부신> 길이기도 하고, 희망을 추구하는 <삶>의 길이기도 하니 말이야. 

이런 저항시들로 인하여 김지하는 박정희의 하수인인 법원에서 '사형' 선고까지 받게 돼.
전두환 때의 박노해보다 더 무섭던 시절이지.

민주화를 의인화시켜 표현한 이 시는 노래로도 만들어져 많이 불리우곤 했단다.
아빠가 대학생이던 시절엔 지하 주점에 앉아 이 노래를 구슬프게 부르곤 했지. 

이런 <손무덤>이나 <노동의 새벽> 그리고 <타는 목마름으로> 같은 시들을 읽으면서,
불의와 부정에 맞서려는 의지를 가지던 사람들이,
1987년 드디어 6월 항쟁을 통해서 군사독재에 이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단다.
물론, 미국의 개입으로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서긴 했지만,
상당히 민주화된 국가로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틀림없지.  

 

 

1980년 광주에서 총과 탱크로 짓밟힌 국민이
7년만에 권력자를 무릎꿇게 한 일은 대단한 것이란다.
1953년 전쟁을 마친 국민이 7년만에 독재자 이승만을 하와이로 보낸 일도 대단한 일이었고. 

한국인은 7년만 열받으면 100도씨까지 끓어서 보그르르 넘친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어. ^^ 

오늘은 민중의 노래, 저항시 몇 편을 읽었다.
역사는 오락가락 순서가 없는 것 같아.
좋은 일도 일어나고 나쁜 일도 함께 벌어지고 말이야.
과거의 역사를 아는 일은 그래서 힘들 때 힘이 되기도 하는 것이란다.
거기서 미래에 희망을 가지는 힘도 생기는 것이고.
역사에도 관심을 가지고 책도 읽고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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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초가 지나가는데도 아빠는 몹시 정신이 없이 산다.
지난 주에 수련회를 다녀오고 나니 더 바쁜 것 같아.
리듬을 잃어서 그런지, 아니면 진짜 바쁜 건지...
바쁘다는 핑계 속에서 하루하루가 가고,
집에 오면 픽 쓰러져 자고 그랬구나. 

아들도 피곤하긴 마찬가지겠지만,
아빠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힘을 덜어주는 활력소가 되면 좋겠다. 

요즘엔 수업 시간에 '정체성' 이야기를 하게 돼.
윤동주의 시 비평문을 가르치는데, 정체성이란 말이 나오거든.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알려고 노력하면서 평생을 보내는 존재인 거 같아.
그렇지만, 그 정체, 자신의 본모습을 알긴 참 어렵지. 

오죽하면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의 본모습을 알라. 너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존재 아니냐?" 이러고 물었을까.
자기 점수를 보면 20점 같고, 옆사람 점수를 보면 100점 같아 보여.
내 재산을 보면 100원 같은데 옆사람 재산은 수십 억원 같아 보여.
그렇지만, 아빠는 이런 비유를 쓴단다.
20점과 100원을 가진 사람의 가치는,        1,000,000,000,000,000,000,000,000,000,120이고,
100점과 수십 억원을 가진 사람의 가치는, 1,000,000,000,000,000,000,000,100,000,100인 거라고. 
아랫 사람이 과연 훨씬 더 가치있는 사람일까?
과연 인간의 정체성을 <분별>할 수 있을까?
그 낫고 모자람을? 

성경에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부끄럼을 알고 스스로의 몸을 가렸다고 그래.
과연 '선악과'를 먹은 것이 왜 잘못됐을까?
하느님의 명령을 어겨서?
'선악'을 구별하게 된 것이 무슨 잘못이지?
그것은 바로 '인간의 분별이나 구별은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일 거야. 

인간의 불완전하고 미흡한 구별. 차별. 그런 시를 한 편 읽어 볼게.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발 아래 구부리고 엎드린 작고 큰 산들이며
떨어져 나갈까 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언덕과 골짜기에 바짝 달라붙은 마을이며
다만 무릎께까지라도 다가오고 싶어
안달이 나서 몸살을 하는 바다를 내려다보니
온통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
또 세상살이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다.
그러다 속초에 내려와 하룻밤을 묵으며
중앙 시장 바닥에서 다 늙은 함경도 아주머니들과
노령노래 안주해서 소주도 마시고
피난민 신세타령도 듣고
다음 날엔 원통으로 와서 뒷골목엘 들어가
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
싸구려 하숙에서 마늘장수와 실랑이도 하고
젊은 군인부부 사랑싸움질 소리에 잠도 설치고 보니
세상은 아무래도 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
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
너무 멀리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 가까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경림, 장자를 빌려 - 원통에서> 
**노령노래 : 러시아 노래, 생활을 위해 러시아 영토로 떠나가는 참담한 실정을 노래한 함경도 민요. 조선 말기 함경도 남자들은 생활이 어려워 흔히 러시아 지방으로 품팔이를 나갔는데, 이 민요에는 그러한 절박한 상황, 즉 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가족과 헤어져 떠나야만 하는 애달픔, 남편을 보낼 수밖에 없는 여인들의 슬픔, 조국에서 살 수 없어 국외로 가야 하는 현실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는 세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어.
첫 부분은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바라본 세상.
다음은 <속초에 내려와> 본 세상.
그리고 <잘못보는 인간>에 대한 비판 내지 반성. 이렇게... 

높은 관점에서 잘난 체하면서 보면
인간의 모든 삶의 원리를 다 알 것 같기도 하지.
그렇지만 또 낮은 곳에서 인간의 땀냄새 고름냄새를 맡노라면,
인간에 대해 다 알 것 같던 그 생각이 조금 달라지기도 한단다. 

그래서 마지막에서 <우리는 너무 멀리서만, 혹은 너무 가까이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비판을 하고 있어. 

인생을 멀리서만 보고,
"인생, 까짓거 뭐 있어~ 즐기다 가는 거지."하고 까부는 것도 우습고,
인생을 너무 좁게 보고,
"아이고, 공부 끝나니 취직 걱정이고, 취직 끝나면 결혼 걱정이고,
다시 진급 시험봐야 하고, 아이고, 세상은 걱정 투성일세."
이렇게 비관하는 일도 어리석은 일이지.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서도 보고,
그 중간의 관점을 유지하는 일.
이런 일을 '중용'을 지킨다고 하겠지. 

제목이 '장자를 빌려'인 이유는,
[장자] '추수편'에 '큰 앎은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살핀다.'는 글귀가 있대.
진정한 앎은 먼 곳에서도 보고, 가까운 곳에서도 보는 지혜가 있다는 거지. 

아들아.
네 삶을 너는 어디서 보고 있니?
하루하루의 삶의 반복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쉽게 지치고 있나,
아니면, 긴 삶 속의 좁은 지점이라 쉽게 생각하고 있나,
하루를 백년처럼 지겹게나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지,
이런저런 걱정이 된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안심도 한단다.
아들을 철석같이 믿는 것은,
네가 어떤 삶을 살든 엄마와 아빠는 너를 응원할 것이기 때문이야.
최선을 다해서 사는 아들을 응원하는 일은 당연한 거지.

세상은 이렇게 단순해 보이면서도 복잡하고, 거꾸로이기도 한 거야.
암튼, 아빠는 영원히 아들의 편이고 팬이기때문에
네가 잘 되기를 바란단다.
잘 되는 건,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살고,
재미있는 일 찾아서 즐겁게 살고,
이쁜 아내 귀여운 아기들과 즐겁게 사는 그런 일이겠지. 

물론 멀리서 보면,
세상이 험악한데 혼자서 즐겁게 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또 가까이서 보면,
하루하루 즐겁게 사는 일의 소중함도 결코 가볍지 않단다. 

오늘은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보는 관점들이 보여주는 모순,
그리고 그 모순 사이의 진실을 느껴보는 시를 한 수 읊었어.
바빠도 한 수씩 읊으려 노력할게.

설악산 대청봉을 읽노라니 오세영의 <강물>이 떠오르는구나.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沼)에선 쉴 줄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오세영, 강물>
 

너무 전진만을 위한 삶을 살지도 말고,
너무 서두르는 삶을 살지도 말라는 이야기야.
무심하고 텅 빈 마음이 목표에 도달하게 할 때도 있다는 거지. 

신경림의 시나 오세영의 시나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죽자사자 뛰는 삶'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지.
<통념 속의 정답>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오답>이거나 <답과 거리가 먼 답>일 수도 있는 거야.
이런 시를 통해 마음도 좀 너그럽게 가지고 그러자.
그럴 수 있다면,
매일이라도 시를 읊어야지. ^^
동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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