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못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바위와
바위와
구름과 구름과
바위와

손 씻고
낯 씻고
앉아 있었다

바람에 씻은 불처럼
앉아 있었다

연못은 혼자 
꽃처럼 피었다 지네  

시인이 곧 화자인 모양. 
화자는 연못 가에 앉아 있었다죠.
아무도 없는 연못가에 조용히 앉아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겁니다.
연못 가의 한적함에는,
지난날의 추억도
아스라한 기억과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서 꺼져가는 지난 날들도... 
다 있다는 걸... 

연못 가에 앉아서
연못도 보고,
물 위에서 졸고있는 수련도 보고,
바위도 보고 
바람도 느끼고
시원함도 느끼고... 

자기 자신은 가뿟하게 사라지고
나라는 존재는 조붓하게 가벼워지고
가슴이 시원해 지는... 

운명이라는 면식범이 저지르는
이런저런 잡사따위는 가볍게 날리고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바람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볼을 스치고 옷을 한들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는 거죠. 

낙엽을 태워 보셨나요?
장작을 쌓아 두고 모닥불을 지펴 보셨나요?
바람이 불면 더 세차게 피어오르는 불길을 느껴 보셔야
바람에 씻은 불의 심상을 떠올리실 건데요. 

저는 화단에서 떨어진 낙엽을 까만 봉다리에 담아 두었다가,
알미늄박 도시락 위에 종이를 좀 태우고,
고 위에 낙엽들을 얹어 불장난을 가끔 합니다. 
새 낙엽을 얹고 입으로 호=3=3하고 불어주면 
새빨간 불길의 켜가
파르르 떠는 게 참 이쁘답니다. 

불은 잡다한 것들을 다 살라버리잖아요.
운명이라는 면식범이 저지른 범행들로
마음이 시들해지는 날,
조붓한 알미늄박 도시락에다
낙엽을 태워보세요. 

홧홧한 불길을 맞으면서
마음도 바삭하게 마르는 걸 느낄 수 있답니다.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손으로도
얼굴로도
마음으로도 느끼는 거겠죠. 

바람에 산소가 공급돼서
불길처럼 자신이 살라지는 상상을
잡념과 상념들이 소멸되는 체험을...
눈을 지긋이 감고서 

바람에 씻은 불이 되는 거겠죠.^^ 

그 사이 해가 설핏 지는 저녁이 되고,
연못도 한결 검게 되고,
밤을 맞을 준비를 하는 거죠. 

처음에 연못 가에 앉았을 땐,
이런저런 잡생각으로 고독했지만
연못가에서
멍하니 바보처럼
바람을 맞으면서 

바람에 씻긴 불이 되어보는 저녁 어스름. 

이제 연못과도 이별입니다. ^^


새로 생긴 저녁

보고 싶어도 참는 것
손 내밀고 싶어도
그저 손으로 손가락들을 만지작이고 있는 것
그런게 바위도 되고
바위 밑의 꽃도 되고 도 되고 하는 걸까?
아니면 웅덩이가 되어서
지나는 구름 같은 걸 둘둘 말아
가슴에 넣어두는 걸까? 

빠져나갈 자리 마땅찮은 구름떼 바쁜
새로 생긴 저녁

 

그대를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저녁 무렵,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이면
세상이 천천히 문을 닫아
이런저런 분별의 지혜도 닫혀버리는 시간이면
어둠이 선뜻 다가서
내 시야가 좁아지는 시간이면
그대가 생각납니다. 

새로 생긴 버릇이에요.
그 시간을 가만 느껴봅니다.  

'부베의 연인'이란 영화가 있어요. 

살인죄로 14년을 복역해야하는 부베를 찾아가는 여인 마라
부베는 마라의 오빠와 같이 레지스탕스로 활동했지요.
오빠가 전사하고 전사통지하러 마라네 집에 온 부베.
처음 본 순간 그들은 이끌리고
부베는 낙하산 천으로 옷이나 만들어 입으라는 썰렁한 농담과 함께 페이드 아웃. 

부베는 계속 편지를 하고,
아버지에게 결혼 승락도 얻지만,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곧 체포됩니다.
재판정에서 마라는 마음을 접으려 했으나 부베의 아직도 사랑한다는 고백에 흔들리죠. 

그리고 한 달에 두 번씩,
14년이나 연인을 찾아갑니다.  

마라의 마음이 그랬을까요?
저녁무렵이면 생각나는 부베. 

보고 싶은 마음은 참을 수밖에 없고,
손을 잡고 싶지만,
부베의 손이 닿았던 제 손가락만 매만질 뿐. 

마음은 새록새록 커져만 가고,
바위 밑의 난초처럼 뻗어가고
꽃도 피우고
단단한 바위처럼 굳어버릴 것도 같고,
연못이 되어
구름을 가두고 있지만
영원히 구름에 닿을 수 없는 사랑... 

저녁이 되면 그대가 그렇게 떠오르겠지요. 

그렇지만 일상은 구질구질하게 바쁜 일로 가득해요.
그대를 느끼게 되는 저녁,
그 느낌을 혼자서 가득 채우고 싶은데,
웅덩이에 빠진 구름을 가득 품은 연못처럼,
그대를 가득 품고 싶은데... 

일터에선 빠져나갈 자리가 마땅찮아서
한숨만 곱게 쉴 뿐입니다. 

마음에 한가득 구름을 빠트리고 싶은데
구름처럼 밀려있는 바쁜 일터는 매일 만나는 면식범이죠. 

저녁이면 그대를 떠올리는 습관이 새로 생겼답니다.
부베의 연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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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7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1-04-27 13:35   좋아요 0 | URL
위로가 되셨나요? 그럼 다행이고요.
저렇게 볼 수도 있겠단 거지, 뭐 시의 특징이 감추어진 얼굴이니 말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4-27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의 매혹적인 면 중 하나는
숨을 쉬게 해주는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쁘게 달려나가다가도 잠시 멈춰서
자신의 심장 소리에 귀기울이게 하는 것이, 시 아닐까 하고. 그래서 점점 시가 좋아집니다.

오늘 머리가 많이 무겁습니다. 베란다 화초에 둘러싸여 멍하니 있어야 할 시간이구나 싶습니다.

글샘 2011-04-27 13:3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머리가 무거운 날은,
멍하니 있는 게 최고죠.

오늘 하루는 멍~하니 있어 봅시다. ㅎㅎ

pjy 2011-04-27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도 시지만 글쌤님의 글이 그대로 다 시입니다~~~

글샘 2011-04-27 18:52   좋아요 0 | URL
아침에 술이 덜 깨서... ㅋㅋ 쪼끔 감상적이었던 모양이에요. ^^

sslmo 2011-04-28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공문서에서 걸어나온 듯한 글은 그닥이고,
꽈배기과의 글은 그럭저럭이고,
이런 술이 덜 깨서 쓰신 감상적인 글은 엄청 좋아요~^^

특별회차까지 만들어 위로하신 이 분 완전 행복하셨겠는걸요.
전 연못을 보면 돌팔매를 하고 싶어지는 삐뚤어진 심성이 있다는~


글샘 2011-04-28 12:15   좋아요 0 | URL
특별회차를 만들어 위로하신...이라 하니 좀 그렇네요. ㅎㅎ
세실님이 시를 적어 두시고,
뭐 어떤 뜻이었을까나...하고 물어보셔서 몇줄 적은 건데요. 뭐.

삐뚤어지셨군요.^^ 그렇다고 돌을 던지실 거 까지야.
님도 좋은 시 하나 뽑아 주세요. 제가 특별회차를 만들어 드립지요.

sslmo 2011-04-30 02:51   좋아요 0 | URL
아웅, 선의와 부러움으로 단 댓글이었는데...삐뚤어짐에 방점이 찍혔네요~ㅠ.ㅠ
전 정중히 사양할래요.
유니크할 때 스페셜하다고 하지, 두번째부턴 스페셜한 거 아니거든요~^^

글샘 2011-04-30 12:20   좋아요 0 | URL
ㅎㅎ 삐뚤어짐에 점을 찍었더니 삐짐 모드가 되실라...
뭐, 이 나이에 새삼 유니크할 거나 스페셜할 게 뭐 있겠습니까?
싶지만,
사실 매일 매일이 스페셜이고,
유니크한 걸로 만나고 살아야 될 나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

(그리고 방점은 옆에 찍는 점을 뜻해요. 윗점같이 써야하는데, 예전에 세로쓰기 습관에서 방점이란 말을 그저 쓰곤 하죠. ^^)
 
100인의 책마을 - 책세이와 책수다로 만난 439권의 책
김용찬.김보일 외 지음 / 리더스가이드 / 201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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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09님의 소개로 이 책을 도서관에 사뒀었는데 이제야 서가에서 만난다. 

나는 알라딘에서만 출몰하는 블로거지만, 다른 세상에도 많은 블로거들이 책이란 주제로,
글을 쓰고 읽고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이 그런 인연으로 글을 쓰게 된 것을 모으는 작업을 했다. 

마을이란 말은 여러 사람이 모여사는 <장소>의 의미도 있지만,
<마실>이란 용법으로 <모여 노는 연회, 모꼬지>의 의미도 있다. 

이 책은 여러 사람의 책에 대한 단상들을 자유롭게 묶어 두었는데,
그 분야가 다양하다.
그중에 느리게 살아가는 삶을 찾아가는 이의 글을 인상깊게 읽었는데,
김연수의 한 마디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놓여 있어서 줄거리도 없는 책의 스포일러처럼 되어버린 느낌이랄까? 

   
 

Q : 당신에게 뭘 주거나 하지 않는데,
당신은 왜 그따위 인생을 살고 있어?

A : 최선을 다해봤자, 돌아오는 건 하나도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애당초 나는 뭔가 돌아오는 게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책을 읽은 건 아니지.
그럼 왜 읽었냐고?
거기 한 작가가 진심을 다해서 쓴 문장들이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진심을 다해 읽었으니까. 

 
   

그런 데 비해, 마지막에 달린 변정수의 까칠한 <보론>은 이 책을 '밥맛없게' 만들었다. 

독서의 종합선물세트를 기획한 편집자라면, 마지막 글까지도 조금 더 부드러운 글로 만들 수 있었을 건데 아쉽다. 

   
 

독후감을 써놓고 서평이라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독후감은 자신의 일기장에 쓰는 것으로 족하다. 또는 '나'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지인에게나 보여줄 만한 것이다. 설령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할 수 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라는 인격과 만나는 일 자체에서 기꺼이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312) 

 
   

너무 고압적이지 않은가?
영화를 본 비평가가 영화의 흥행과는 반비례되는 칭찬과 비난을 하기도 한다지만,
그렇다면 인터넷 블로그에 영화 비평을 올려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블로깅하면서, <여기는 전문 비평가의 블로그입니다> 또는 <저는 개인적 글만 씁니다>하고 적으라는 건지... 

책의 편집 의도와 정반대되는 글을 적었고, 그것이 편집자가 보여주려는 또다른 면이었다면 이 글은 성공한 것일지 모르지만,
글쎄, 나는 부조화처럼 읽고 만다. 

   
 

서평에 담기는 가치평가에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근거가 제시되어야 하고, 제시된 근거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이 설득력을 지녀야 한다. 

서평뿐 아니라 모든 글은 언제나 '도대체 누구 읽으라고 쓰는 글인가'를 분명하게 의식하면서 써야한다는 것을 강조한다.(317)

 
   

이런 구절을 만나면 나는 망연자실, 아연실색하게 된다. 

마치, 조선일보가 한겨레신문보고 빨갱이라고 하는 논조나 다를 게 뭐 있는가 싶다. 

책을 평가한다는 것은, 그리고 모든 비평문의 기본은 <주관적>인 것이다.
그 주관성이 어떤 <공신력>을 가진 매체, 예를 들면 신문의 서평란이나, 텔레비전의 도서 소개 프로그램 등에서도 소개하는 사람의 개성에 따라 충분히 다양한 해석으로 만나게 될 수 있는 것이 서평이란 장르인데, 글쓴이는 마치 서평자는 정답을 알고 써야한다는 투로 이야기한다. 

과연 이 책이 <누구 읽으라고 쓴 글인지> 아는 사람들이 만든 책일까?
이 책의 글쓴이들은 그저 세상엔 책이란 사물이 있고,
책이란 사물을 즐겨 보는 사람들, 그리고 독후감이든 서평이든, 책에 대한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적게 하고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는 것이 이 책의 기획의도였던 것 같은데,
마지막에 이런 엄격한 사감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앞서 들었던 달콤한 마실 속 수다들은 한 여름밤의 꿈이 되어 사라져 버린 느낌이 들어 못내 아쉽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글은 '독후감'이다. 서평이 아닌 것이다. ㅎㅎ 

그런데 그가 쓴 책이 '만장일치는 무효다', '편집에 정답은 없다'같이 느슨한 것이라니... 잠시 쓴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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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7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1-04-27 13:36   좋아요 0 | URL
그냥 그런 게 아니라, 좋은 부분도 있었는데...
임팩트가 좀 약했죠.
막판에 저 글이 임팩트가 강한 글이었습니다. ㅋㅋ

sslmo 2011-04-27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독후감이 그 어떤 서평보다 설득력 있는걸요.
저는 다행히 밥 다 먹고 읽었어요~^^

글샘 2011-04-27 13:38   좋아요 0 | URL
괜히 마지막글보고 시비가 걸고 싶어졌나봅니다. ^^
다행이네요. 밥 다 먹고 읽으셔서... ㅎㅎ
 

오늘은 달팽이가 주인공인 시를 두 편 보자.

 

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달팽이 두 마리
얼굴 비비고 있다.

요란한 천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 뚫고
여기까지 기어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멀리서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 뛰어왔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가쁘게 달려와 그들은
이제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 속삭인다.

짤막한 사랑 담아둘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년을 바둥거린 나에게
날 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은
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김광규, 달팽이의 사랑>

 

이 시의 주인공은 달팽이와 화자 자신이란다.
달팽이는 천천히 천천히 사랑을 완성해가는 존재야.
거기서 사랑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거지.

장대같은 빗줄기라는 시련을 뚫고 드디어 만난 달팽이 두 마리.
그들이 뛰어왔을 것이라고 표현하지만,
달팽이가 어떻게 뛰어올 수 있겠니.
그건,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겠지.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가쁘게 달려오는 달팽이의 사랑.
느릿느릿 움직이는 속도와는 달리,
그들의 간절한 사랑은 숨가쁘게 느껴진다는 역설적 표현이 재미있다.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년을 바둥거린 화자는,
날 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을 보면서 한없이 부끄러워한다.
화자는 먹고 사는 일에 매달리느라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도 못했고,
뜨겁게 사랑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고 있는 거지.
집 따위 마련할 필요 없이도 느릿느릿 사랑하는 달팽이만도 못하다는 자아 성찰. 



시적 화자는 어느날 문득
‘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얼굴을 비비고 있는 ‘달팽이 두 마리’를 보게 돼.
그리고 자신의 삶을 생각하지.
‘집 한 칸’을 장만하기 위해 바둥거린 십 년
아내나 가족을 사랑한 시간의 너무 적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고,
자신이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거지.
시련과 역경을 헤쳐 나와 천천히 사랑의 삶을 완성해 온 ‘달팽이 두 마리’와
집을 장만하기 위해 바득바득 애를 쓴 화자의 삶을 대비시키고
‘달팽이 두 마리’가 환기시키는 ‘느림’의 이미지를
사랑의 깊이로 확장시킴으로써 시의 감동을 만들어 내고 있지.

다음엔 마찬가지 달팽이를 노래한 정현종의 시를 읽어 보렴.
 

등에 지고 다니던 제 집을 벗어버린 달팽이가
오솔길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엎드려 그걸 들여다보았습니다.
아주 좁은 그 길을
달팽이는
움직이는 게 보이지 않을 만큼 천천히
그런 천천히는 처음 볼 만큼 천천히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성서였습니다. <정현종, 어떤 성서>


화자가 오솔길을 걷는데,
집을 벗어버린 민달팽이 한 마리가
오솔길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대.
그걸 바라보는 화자.

아주 좁은 그 길을
달팽이는
움직이는 게 보이지 않을 만큼 천천히
그런 천천히는 처음 볼 만큼 천천히
건너가고 있었단다. 



이 시 구절을 읽는 일만으로도 숨을 살며시 쉬어야 할 것 같구나.
정말 성경을 공손하게 온 마음을 다해 읽듯이,
살아있는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순간을 극대화한 표현이야.

그걸 ‘오늘의 성서’란 표현으로 마무리했단다.
달팽이 한 마리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보고도,
성경 속 인간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겠지.

오늘은 달팽이의 노래 두 편을 읽어 봤단다.
달팽이는 인간의 눈으로 보자면 참 느릿느릿한 존재지.
인간의 속도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속도감이란다.
그렇지만, 달팽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의 움직임이 건성건성이고 무가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어디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달라지는 속도감.
삶은 늘 그런 것이 아닐까 싶어.
나는 이렇게 잘났는데 저런 모자라는 것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
이렇게 뻐기는 녀석들은 달팽이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를 결코 느낄 수 없겠지.
또 달팽이의 삶이 하늘을 가르는 독수리의 삶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그저 자기 관점만 옳다고 우기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 쉬운 인간이,
달팽이를 보면서,
그 느림의 미학 속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도 고마운 일인 듯 싶다.
오늘은 느릿느릿 정신을 천천히 움직여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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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2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1-04-26 12:00   좋아요 0 | URL
저는 다른 컴에서 봐도 잘 보이던데요. ^^

마녀고양이 2011-04-26 14:44   좋아요 0 | URL
이젠 잘 보여여, 알라딘의 이미지 서버가 조금 문제가 있다더니
속도가 느렸나봐여. 거기에 우리집 컴터의 공감대 형성이 너무 잘 된 듯한걸요. ㅎㅎ

달팽이 너무 이뻐요, 저 사진들 못 봤으면 아쉬울뻔 했네요.

글샘 2011-04-26 16:20   좋아요 0 | URL
ㅎㅎ 달팽이가 느리게 갔나 봅니다.
 
정답을 넘어서는 토론학교 : 과학 - 토론으로 들여다 본 과학의 두 얼굴 청소년을 위한 토론학교
가치를꿈꾸는과학교사모임 지음 / 우리학교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 문명은 과학에 기대고 사는 바가 크다.
석유 에너지와 원자력 에너지에서 나오는 전기가 없다면...
주거는 금세 황폐화될 것이고, 식생활 역시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옷 역시 대개가 합성섬유로 된 것이니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에너지 자원은 한계가 있고,
식량 문제는 해결이 가능한 생산량을 가지고 있으나 정치력 부족으로 기아는 늘어간다. 

어쨌든 기후 변화가 심상치 않고,
자연의 변화는 인간의 과학 기술을 일거에 무너지게 할 정도로 거세다.
인간의 오만은 겸손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경고가 심각하지만,
꼭 죽어봐야 지옥을 안다는 족속이 있는 법이다. 

후쿠시마가 터지고, 폐병 환자가 많이 늘고 있지만,
온실 가스에 대한 협정조차도 발효되기 힘든 것이 인간의 욕심이고 삶의 수준이다. 

심지어 난자가 체외수정되어 착상되기 전까지는 실험해도 된다는 식의 오만이 판을 치는 지경이다.
거기다 황우석 쇼비니즘까지 가세하면 '나치즘(국수주의)'의 발호는 언제든 가능하다. 

과학이 고마운 것은 우리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데 있다.
그러나, 과학이 두려운 것은... 폭격과 원자력 오염 등 일거에 삶의 질을 지옥도로 만들 수 있는 지점에 있다. 

이 책을 쓰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특히 '찬성'의 논거를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 선생님들께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걱정되는 바는,
이 책을 읽고 <균형잡힌>이란 착각을 하며 <찬성>론자의 입장만을 내면화하는 괴물이 탄생할까 두려운 마음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아이들의 '토론' 교재로 사용해야 한다는 매뉴얼이 주어진 것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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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위미 2011-04-26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샘~ 우리학교 편집자입니다. 저희 책에 관심가져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말씀대로 가치를꿈꾸는과학교사모임 샘들께서 '찬성'쪽 글을 집필하느라 정말 고생하셨어요^^ 옳고 비판적인 생각이라도 일방적으로 주입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책인데, 그렇다해도 교사의 안내와 도움이 꼭 필요하겠죠?^^ 아이들이 토론을 통해 개발만능주의 논리의 허점을 찾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행복한 봄날 되셔요~

글샘 2011-04-26 18:43   좋아요 0 | URL
찬성쪽이 논리가 좀 허술하긴 하던데 말이죠. ㅎㅎ
철학이랑 역사는 언제 나오죠?
우리학교 독서토론 동아리 애들 사줘야 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 밑에 제가 수정한 건 고치실거죠? ok 하면 지울게요.

이인위미 2011-04-30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ok입니다. 철학토론은 5월18일, 역사토론은 6월 안에 나올 예정입니다.

글샘 2011-04-30 12:20   좋아요 0 | URL
기대하고 있습니다. ^^

bohnen이 독일어로 태어나다, 살다... 이런 뜻인가요? born처럼...
 

부활절이다. 
성경에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던 금기를 어기고 원죄를 지은 존재로 기록되어있어.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이 <죄악>임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겠지. 

이런 인류의 죄를 대신 갚으려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인간은 더이상 죄없는 존재임을 깨달으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인간은 죄없는 존재이니 과거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오지 않은 미래 걱정을 당겨서 하지 말라는 것.
그래서 지금 착하고 행복하게 어린아이처럼 현재를 누리며 살면,
천국이 곧 저의 것이라는 말씀이 성경 말씀이란다. 

오늘은 인간 세상을 천국으로 여기지 못하고
모순 속에서 사는 인간의 한 사람인 시인이 바라본 천국의 상징인 <장미>를 통해
세상살이를 읽어본 오규원의 <개봉동과 장미>를 읽어 보자. 

제목은 '개봉동의 장미'가 아니야.
개봉동과 장미는 서로 다른 개념이란다.
개봉동은 서울의 외진 공장지역 이름이니, 인간의 문명을 대표할 거고,
장미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하느님의 뜻이겠지. 

그 모순된 공존의 현장을 한번 읽어 보렴.

 

개봉동 입구의 길은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장미는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장미는 이곳 주민이 아니어서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
그대와 나는
사촌(四寸)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비 오는 지상의 어느 발자국에나 고인다.

말해 보라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두드려 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 <오규원, 개봉동과 장미>

개봉동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공장지대란다.
도시 문명이 만들어낸 부조리한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낸 단어지. 
회색 도시로 기억되는 개봉동.
그 흑백사진 같은 골목길. 

거기 붉은 장미 덩굴(또는 넝쿨)이 뻗쳐 나왔어.
흑백사진에 겹쳐진 생명력의 정수, 장미 한 송이. 
개봉동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미. 

쪽바른 길, 도시의 길은
한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어 보인대.
직선의 이미지는 장미 넝쿨이 늘어진 그 작은 사건 덕에
휘어진 곡선의 이미지로 바뀌지.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장미는 길 밖에 늘어져 있어. 

2연에서, 콤마(,) 하나를 통해 세상은 둘로 나뉜단다.
앞에선 보라! 에 이어 장미의 생명력을 노래하지만,
콤마 뒤에서, 그대와 나의 '발자국에 고인 빗물'같은 신세를 노래하지. 

장미는 이곳 주민,
초라한 흑백 사진의 도시 서울의 주민이 아닌,
시간 밖의 서울,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존재야.
곧 원색의 자연의 생명력이 살아있는 세계의 표상이지.
그러나, 이곳 개봉동에선 그대와 나, 일상적인 이야기, 사촌들의 이야기 토막 속에
고인 물처럼 살아가고 있어. 

마지막 연에서 '말해 보라'고 하면서 직접적으로 화자의 가치를 드러내려 하고 있어.
어떻게 장미와 닿을 수 있을까?
화자는 개봉동과 대조적인, 그러나 개봉동 안에 놓인 장미를 보면서,
장미와 <닿>기를 소망하고 있어. 

그러나,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어떻게 장미와 닿을 수 있을지,
불편한 의문을, 불편한 비밀을 느끼게 된대. 

그래서 개봉동 집들의 문을 두드려 보라고 해.
그러나,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 개봉동 집들의 문.
소통이 되지 않는 도시의 삶.
여전히 회색인 채, 생명력의 본질을 감춘 개봉동의 집들과 골목의 삶. 

이런 문명적 삶의 모순을 '장미'란 생명의 가치를 통해 밝히는 시가 '개봉동과 장미'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개봉동이란 가난한 공장지대에 핀 한 떨기 장미 넝쿨을 보면서,
"야, 참 이쁘네."
이렇게 평범한 한 마디를 던지고 일상으로 걸어갈 터인데,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은
장미가 삐죽 내어민 골목길이 왼쪽으로 굽어있는 것도 보고,
회색 도시 속의 생명력의 의미도 찾아내고 있어. 

우리가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모두 옳은 것만은 아니지.
그것을 뒤집어 볼 때,
진실이 드러나기도 하는 법이거든.
불편한 의문,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
개봉동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불편>한 일인지도 몰라. 

세상 살면서 그저 높은 자리만 차지하려고 하고,
돈만 모으려고 이전투구(진흙탕의 개싸움)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이런 불편한 생각은 하지 않을지 모르지.
그렇지만, 삶이란 것은 이런 불편한 생각을 통해서 발전하는 것이란다. 

텔레비전의 <사이렌>이란 프로그램에서 되는대로 살아온 인생들을 보면,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에만 급급하고,
인간의 소중함, 삶의 가치 같은 것엔 눈돌릴 틈이 없는 인생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단다.
그것은 꼭 경제적인 가난이나 환경의 불우함이 필연적으로 가는 길은 아니지.
불편한 의문을 가지면서, 더 나은 자신의 삶을 추구하는 삶.
이런 것이 사는 가치일 수도 있단다. 

물론, 그것이 쉽게 보이지 않아 <비밀의 꽃, 장미>라고 하곤 있지만 말이야.
이 시가 실린 시집이 <王子가 아닌 한 아이에게>란 제목이었어.
우리는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여서 좀 초라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
그렇지만, 우리 삶엔 늘 한 떨기 장미가 길앞에 늘어져 있단다.
그 장미를 보고 비밀을 알아채느냐, 그저 지나치느냐가 문제가 되겠지. 

장미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삶.
소중한 삶의 가치를 눈감지 않고 찾아내는 것이 삶의 의미 중 하나가 아닌가 싶어. 

다음엔 고통스런 세상을 고통스레 바라본 화가 뭉크에게 바치는 시를 한편 읽어 보자.
이승하의 '화가 뭉크와 함께'야.

어디서 우 울음소리가 드 들려
겨 겨 견딜 수가 없어 나 난 말야
토 토하고 싶어 울음소리가
끄 끊어질 듯 끄 끊이지 않고
드 들려와 

야 양팔을 벌리고 과 과녁에 서 있는
그런 부 불안의 생김새들
우우 그런 치욕적인
과 광경을 보면 소 소름 끼쳐
다 다 달아나고 싶어

동화(同化)야 도 동화(童話)의 세계야
저놈의 소리 저 우 울음소리
세 세기말의 배후에서 무 무수한 학살극
바 발이 잘 떼어지지 않아 그런데
자 자백하라구? 내가 무얼 어쨌기에 

소 소름 끼쳐 터 텅 빈 도시
아니 우 웃는 소리야 끝내는
끝내는 미 미쳐버릴지 모른다
우우 보트 피플이여 텅 빈 세계여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이승하, 화가 뭉크와 함께>



화가 뭉크의 <절규>는 유명한 그림이지.
피할 수 없는 공간인 다리에서 한 인물이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단다.
저 멀리 바다를 보면 배는 한가롭게 떠있어.
세상은 그저 그런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도 몰라. 

그렇지만 주인공은 귀를 막고 '절규'를 내지르고 있단다.
뒤따르는 두 인물은 마치 괴물처럼 그를 억압하는 분위기로 느껴지고,
하늘은 온통 붉은 빛으로 가득차서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어.
바다 역시 이유모를 움직임에 휘말린 것 같고. 

이 시에서 가장 대표적인 말하기는 <더듬기>야.
말더듬기를 통해 현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지. 

1연에선, 끊어질 듯 끊이지 않는 울음소리가 들려서,
화자는 토하고 싶을 정도로 견딜 수가 없대. 

2연에서, 공포스런 불안의 이유가 좀더 상세하게 드러나 있단다.
양팔을 벌리고 과녁에 선,
죽음을 앞둔 불안한 생김새들.
그 치욕스런 광경을 보면 화자는 소름끼쳐 달아나고 싶대. 

同化와 童話는 동음이의어지.
힘센 자들은 자신에게 동화시키려고 폭력을 쓰고,
아이들의 동화는 이치에 닿지 않는 황당한 이야기 속의 세계겠지. 

세기말, 뭉크의 절규는 1893년(19세기말)의 작품이었다면,
화자의 세기말은 20세기말의 학살을 이야기하고 있단다.
울음소리, 학살극의 울음소리.
1980년 광주에서 벌어졌던 자국민을 향한 학살극은
1980년대를 장악했던 두려움의 소리였어.
1980년대는 광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지. 

도망가고 싶지만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데,
자백하라는 공포에 떨고 있는 화자.
꿈 속인지, 화자는 심문당하는 신세인 것 같구나.
얼마나 두려웠을까.
독재 시대의 고문과 공포 정치란.. 

텅 빈 도시는 소름끼치도록 비인간적인 곳이지.
광주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도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단다.
그렇지만,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는 일상이겠지.
눈물없이 잠들 수 없는 밤들.
결코 잠들 수 없는 잠을 자는 사람들.
총소리의 환청,
죽어간 벗들의 피묻은 얼굴에 대한 환상. 

마지막 밤의 장갑차 캐터필러 굴러가는 소리와,
끝없이 갈겨지던 연발총 당기는 소리와,
소리도 없이 고꾸라졌을 죽음이 흘리던 신음 소리에 대한 악몽으로 차마 잠들 수 없었던 남도의 기억. 

그 텅 빈 도시를 직접 이야기할 수 없었던 화자는
멀쩡하게도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프로야구나 즐기라며 웃음소리를 흘리는 피묻은 손의 가해자들의 웃는 소리에,
끝내 미칠 지경이 된다. 

보트 피플은 베트남 전에서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바다에서 일렁이던 베트남 사람들이고,
화자는 텅 빈 세계 속에서 웃음 소리를 흘리는 이런 현실을 당하여,
부 부 부인할 것이다.
하면서 부정적 현실에 저항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어. 

이 시에선 마침표가 단 하나 찍혀있단다.
마지막에 찍힌 마침표.
이 유일한 마침표의 의미는 화자의 단호한 선언의 심리가 반영되었겠지. 

성경에 예수님의 가장 훌륭한 제자 베드로가 예수를 아느냐고 묻자,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다는 이야기가 있단다.
화자의
부 부 부인은 그런 강한 부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  

시인은 뭉크의 그림과 함께 세기말의 공포스럼을 다루면서도,
전쟁으로 일그러진 인류의 잔혹한 역사에 더 전면적으로 저항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겠어. 

같은 시인의 '이 사진 앞에서'란 유명한 시도 한번 읽어 보렴.

 

식사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교인을 향한
인류의 죄에서 눈을 돌린 죄악을 향한
인류의 금세기 죄악을 향한
인류의 호의호식을 향한
우리들을 향한
나를 향한

소말리아
한 어린이의
오체투지의 예가
나를 얼어붙게 했다
자정 넘어 취한 채 귀가하다
주택가 골목길에서 음식물을 게운
내가 우연히 발견한 타임지의 사진
이 까만 생명 앞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이승하, 이 사진 앞에서>

이 시는 이웃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사는
현대인의 이기주의를 비판하는 시야. 

1연에선 점점 짧아지면서 '나를 향한' 비판이 날카롭게 집중되고,
2연에서 점점 길어지는 시행이 '반성과 참회'로 이어진단다. 

타임지란 미국 잡지에 실린 사진을 활용해 현대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지.
시인이 직접 작품의 화자가 되어 반성하는 어조를 드러낸단다.
휴머니즘이 잘 드러난 시로,
화자의 양심이 시의 주제가 되고 있어. 

오체투지란 불교에서 온몸(머리, 두 팔, 두 다리의 5체, 오체불만족에서도 쓴 말이지)을 던진다는 예법인데,
오체투지하듯 절하는 굶주린 아이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 

인류의 호의호식과 증오심은 결국 인류를 이렇게 인간답지 못하게 만든다고 했어.
화자는 자정 넘게 취하도록 뭔가를 위에 넣었고,
급기야 그걸 토할 지경이 되도록 엉망으로 살고 있었지.
그의 망막에 비친 저 사진 앞에서 화자는 망연자실...
자기를 잃고 말았던 거야. 

결국 화자는 절대 기아선상에서 고난을 겪는 고통을 외면한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겠지.
그렇다고 화자가 당장 유니세프 같은 곳에 기금을 냈다고 볼 순 없어.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거든.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도를 하고 '아멘'이나 외치는 사이비 '교인'과 인류의 '죄악'이 만든 결과물.
결국 가난과 기아 속에서 굶주리는 소말리아 사람들을 향한 화자의 반성이 드러난 시란다.
그런데, 과연 타임지라는 미국 잡지는
정의로운 잡지일까?
타임지는,
그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보여준 이 정도의 아픈 마음은,
소말리아의 오체투지 하는 아이가 폭탄 아래서 평화롭게 죽어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아멘'과
같은 소망인 것이나 아닐까? 

이 시의 '타임지'는 그런 의문도 강하게 지닌 소재로 보인다.
결국 화자는 무엇을... 이라는 말을 잇지 못하는 자세로 시를 마치고 만다. 

기아를 방치하는 인류에 대한 일갈은 아래 사진에서도 볼 수 있어.
케빈 카터라는 사진가가 아프리카의 수단에서 1994년 찍은 사진이지.

세계에는 1년에 수백 수천만의 인간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지만,
또한 쇠고기를 위하여 농장에서 사료로 쓰이는 옥수수 등의 곡물은,
그들 모두를 배터져 죽게 하고도 남는다는 통계 자료가 있단다.
결국, 생산의 부족이 아니라 분배의 불균등과 독재 정치의 어두운 그늘이 문제임을 잘 보여주지.

세계에서 가장 다이아몬드가 많이 나는 라이베리아, 짐바브웨 등의 국가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 나라래.
결국 그 비싼 다이아몬드를 팔아 버는 이윤을 군인 독재자들이 독점하는 이유 때문이지.


이 사진은 아요드의 식량 센터로 식량을 얻으러 가는 도중에 힘이 다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소녀의 사진이란다.
그 뒤로 소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독수리가 있지.
이 사진은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한편, 사진 작가의 윤리에 대한 논란도 일었대.  

소녀를 촬영하기보다는 소녀를 먼저 구했어야 했다는 비판과,
사진이 가진 사회적인 영향력에 관한 거였지.  
촬영 이후에 곧 독수리를 쫓아보냈고, 소녀를 구했다곤 하더구나.

항상 강렬한 감정에 몰려 극한의 세계를 취재해 온 카터는
자신이 찍은 다양한 현실의 공포를 가슴 밑바닥에 담고 33살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대 

가뭄과 전염병까지 겹쳐
19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1백만 명 이상이 죽었는데,
국제적인 인도적인 차원의 원조 프로그램도 독재정권 아래에서는 거의 제 기능을 못하고,
구조식량은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에게는 좀처럼 전달되지 않았다더구나.  

이제 음식 먹을 때도,
아껴먹고 소중함도 생각하며 먹어야겠단 생각이 들지?
다시 새로운 한 주 시작이다.
새싹처럼 파릇파릇한 마음으로 한 주를 열자.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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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25 0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봉동이 이젠 가산디지털단지라는 이름으로 각종 할인 매장이 들어선 걸 보면 정말 격세지감이 느껴져요...
맨 아래 사진을 보니 문득 김기택 시인의 시가 떠오르는데요. 바로 저 사진을 보고 쓴 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찾아봐야겠네요^^

글샘 2011-04-25 09:26   좋아요 1 | URL
구로공단역이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바뀌었더군요. ^^
역사 속에 묻힌 '87년 구로구청 선거부정'이 문득 떠오르네요. 비참했던 진압과정까지... 광주의 연속이었죠. 껍데기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김기택의 시는 글쎄요. 찾아봐 주세요. ^^

2011-04-25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1-04-25 18:12   좋아요 1 | URL
전혀 실례가 아닙니다. ^^ 이렇게 댓글 달아주시면 고맙죠.
완전히 믿고 살 수 있는 세상...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저도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