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클래식 보물창고 5
윤동주 지음, 신형건 엮음 / 보물창고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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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를 가르치는 일은 어렵다. 

그의 시는 '동시'이기도 하고, '저항시'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간극을 설명하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하다. 

순정의 시인, 이라고 교과서에서는 정의하고 시작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동시이기도 하고,
감옥에서 죽어갈 운명의 시이기도 하다. 

윤동주를 가르치고,
다시 읽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환하다. 

윤동주가 쓴 시어들은,
태양을 향해 노래하는 환한 빛으로 가득하다. 

세상은 비록 어둡더라도,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이렇게 쓸 줄 아는 사람을 가졌다는 것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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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5-03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든 세상에 아름다운 시어를 배터낸다는 것 그건 보통 내공이 아니지요

글샘 2011-05-03 23:36   좋아요 0 | URL
그래요. 그래서 윤동주 시인의 시는 쉬우면서도 어렵답니다. ^^

비로그인 2011-05-03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동주 시인을 무척이나 존경하던 은사님이 떠오르네요.
주어진 길을 꿋꿋하게 걸어간다는 것, 참 대단한 일인 것 같아요.
글 잘 읽고 갑니다 ^^ (윤동주 시집 슬쩍 꺼내봐야겠네요 ㅎㅎ)

글샘 2011-05-03 23:37   좋아요 0 | URL
윤동주 시집은 아무런 감정이 들 때라도 읽어 보면 듬직한 기분이 들어 좋습니다.
꼭 읽어 보세요.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 이야기, 제1회 창비청소년도서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고 1
설흔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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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영원한 화두는 '내게 문학이란 무엇인가?'일 것이다. 

인간의 삶의 궤적을 귀납적으로 얽은 것이 <역사>라면,
그 역사의 원인은 연역적으로 풀어보려한 것이 <철학>일 것이다.
문학은 <역사>와 <철학>의 추상성을 극복하기 위한 형상화의 과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귀납적, 연역적 방법론으로도 일깨우기 힘든 것을,
직지인심하기 위해서는 <문학>적 수사가 필요한 것이라는... 

그렇지만, 어느 시대에나 바람직하다고 권장되는 문학이 있었고,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배척된 문학도 있었다. 

플라톤이 철인정치를 내세우면서 '시인추방'을 이야기한 것은, 문학이 불필요하단 것이 아니라,
그리스 서사시 전통의 문학적 수사가 지나치게 전투적이며 교육적이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는 데 대한 반성이었다고 본다. 

조선같은 성리학 기반의 왕조 국가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성리학적 건조물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수직질서의 성리학은 봉건사회의 지지 배경이 되어 주었다. 

부자유친.
아버지는 가정의 짱이다. 아버지는 가정을 지킨다. 가족은 아버지를 따르라. 

군신유의.
왕은 국가의 짱이다. 왕은 국가를 지킨다. 백성은 왕을 따르라. 

근데, 3강5상의 기율이 무너졌다.
왕은 전쟁나자 제일 먼저 씨앗을 보존하러 도망쳤고,
되지도 않을 고집을 내세우다 백성에게 크나큰 고통을 주었다.
임진,병자 양란으로 민심은 강상의 기율에 등을 돌렸을 것이다.  

설상가상,
청나라에서 물밀듯 밀려온 온갖 문물과 서적들은 조선의 성리학적 질서를 송두리째 회의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에서 수입된 말로, 소위 '실학자들', 베이징학파(북학파)들의 이야기는 모두 '성리학'에 도전하는 내용이었다.  

결국, 조선이 권장하던 문학인 성리학적 질서에 대한 찬탄은 물러간다.
그리고 왕조국가 조선이 경계하는 문체가 탄생한다.

촛불집회보다 무서운 성리학적 질서에 대한 배척은 역사 속에 '문체반정'이란 찻잔속의 태풍으로 남아있다.
그 와중에 이옥, 강이천처럼 수난의 대상이 된 사람들도 있었으나,
역사는 귀납적 결과들이 남는 기록인 법.
성리학적 질서에 대한 향수는 지폐에 퇴계와 율곡을 남기고 뒷걸음질쳐 사라졌다. 

박지원의 글을 읽다보면, 이게 뭐 어쨌다고? 이런 구절이 많다.
'통곡장'같은 글에서도,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넓은 곳을 보니 통곡할 만한 자리다.'
'왜?'
'보통 슬퍼서 운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은 7정 모두에 의해서도 울 수 있는 거다.'
이런 대화는 그게 뭐, 어쨌다고? 이럴 수 있다. 

그렇지만, 성리학적 질서를 유지하려 갖은 애를 쓰던 16세기 퇴계, 율곡이 200년 뒤의 박지원을 본다면 천하의 불쌍놈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성리학적 질서는 <본질>에 대한 규명이었다.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
인의예지라는 4단이 본성이라면, 희로애락애오욕의 7정은 어떠한 관계인가.
이런 본질에 대한 규명의 연역적 학문의 과정은 18세기의 변혁기라는 시대의 패러다임으로 적합하지 않은 것이었다. 

조선 전기가 붕괴되면서 <실존>의 문제를 들고 나온다.
실존의 인간, 그들이 풍겨내는 온갖 다양한 모습들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다.
실존의 인간은 '질서'를 저절로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제멋대로 살아가는 일상을 중시하는 존재다.
물질은 에너지가 흐트러지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법이고, 역으로는 되지 않는 거다. 

이옥과 김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시대 정신을 읽는다.
이옥의 소품문이라 불리는 글들에 대한 변명을 이야기로 꾸몄다.
드디어, 열하일기를 읽고 싶은 욕구가 조그만 몽우리를 맺는다.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가 추구한 시대 정신을 읽고 싶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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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5-03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구나...저흰 아직 신간이 들어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즘 인문학강좌에 이옥편이 조만간 있을 예정이라 기대됩니다.

글샘 2011-05-03 23:38   좋아요 0 | URL
제가 사서 보는 책 중의 얼마 안 되는 책이죠. ^^
조선 후기 여러 학자들의 글은 참 짠한 맘으로 읽어야 하는 책들이 많습니다.
이옥의 글은 특히 더한 것 같습니다.
쉽고 재미있으니 넉넉한 맘으로 읽어보시는 게 좋을 거 같네요.
 
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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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은 '외딸다'란 동사가 활용된 관형사형이다.
영어 사전도 같이 보여서 읽어보니, 혼자인, 고독한, 고립된... 이런 뜻이 담겼다.
1. (be) alone 2. solitary 3. isolated

신경숙의 '외딴 방'은 '외딴'이란 동사의 관형사형과 '방'이란 명사의 합성구가 아니다.
그미의 '외딴방'은 그의 삶(이 소설이 95년에 나왔고, 그가 63년 생이니)이 32세에 이르도록
마치 블랙홀처럼 그의 삶에서 정신적으로 증발해버렸던,
신경숙의 열여섯에서 열아홉까지, 그 시절을 상징하는 하나의 '합성명사'다. 

삶의 궤적에서 증발해버린 듯이 보였던 그 4년간을 길어올리는 펌프질은 그에게 고통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모종의 마중물을 부어주지 않았더라면, 그의 심중을 흐르던 지하수는 영원히 표층으로 솟구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박민규가 '한국인에게 청춘은 없다, 다만 청춘으로 보이는 시기가 있을 뿐'이라고 썼듯,
신경숙의 외딴방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즐거운 청춘들은 없다.
그들은 우물 속에 잠긴 쇠스랑처럼 우울하고,
신혼부부의 살림방에 붙여둔 검은 도화지처럼 암울한 삽화들이,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잘 짜여진 플롯 따위는 없었던 채로,
에피소드의 나열로 이뤄진 인생의 한 시기가 있을 분이었다. 

작가의 과거 한 시절 이야기가 문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그 '외딴방'의 시절이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음의 지점에 놓여 있다.
그의 '외딴방'에는 가족 부양의 원죄를 짊어진 장남과,
집안을 일으켜야 하지만 데모꾼이 되는 삼남과,
매끈한 아가씨지만 남의 집에 얹혀사는 외사촌과,
삶이 계란보다도 팍팍했던 열여섯 어린 여공, 이렇게 넷이 살고 있었던 공간이지만,
이 소설 속에는 하계숙, 미스 리, 미스 명, 안향숙, 윤순임, 연탄불 피우던 아저씨 등 숱하게 많은 이들의 삶의 궤적이 녹이 있어, '외딴방'에 사는 사람들은 그 넷을 초월하여 <만인보>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만인보에서 추리소설보다도 스릴러물보다도 더욱 끈질기게 서술자의 심기를 놓아주지 않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재희 언니다.

   
 

손이 기억했다. 

열쇠통을 잠글 때의 감각이며 문이 잠기며 냈던 딸깍, 소리들을, 나는 손을 내려다본다. 

몸의 기억력은 마음의 기억보다 온화하고 차갑고 세밀하고 질기다. 마음보다 정직해서겠지. (403)

 
   

작가의 마음 속에 원죄처럼 남았던 죽음의 공범자로서의 서술자.
결국 재희 언니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을,
작가에게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픈 추억만으로 글을 쓸 사람은 아니다.
그의 자의식을 잠근 자물통은 여간 튼튼한 것이 아니어서,
어지간한 펌프질로는 뿜어올리기 힘든 기억이었을 것이다.  

   
 

"국수 삶아줄게. 배부르면 마음이 좀 나아질 거야."(375)  

 
   

이렇게 흰 국수를 삶아 주던, 마음씨가 국수 사리처럼 하얀 이의 기억을 몸이 저장하고 있었기에,
마음의 기억보다 온화하고 차갑고 세밀하고 질긴, 이 기록을 정직하게 남길 수 있었을 게다.
이런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영원히 방 안의 검은 도화지를 떼지 않은 채, 세상을 향해 앙칼진 소리를 질렀을 테다.
"내 방으로 들어오지 마!" 하고.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하지만 그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이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 

 
   

어쩜 수미상관을 염두에 둔 듯,
옛날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내는 구절을 집어 넣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살아남은 자의 기록'이며, '살아남은 기억의 기록'이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이라면, 

   
  ......  아, 은행이나 우체국이나 그런 데들. (259)  
   

이런 구절이 의미하는 바를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꿈'이란 곧 '먹고 사는 일'과 동의어였음을 말이다.  

박수근 화백의 터치처럼 '납작납작'한 삶을 살았던 광어같은 인생들의 희망이,
고작 은행이나 우체국이나 그런 데들에서 일하고 싶었던 기억을 말이다.

   
 

우리가 그 집에 살았을 때라든지, 혹은 옛날에 우리가 닭을 길렀을 때, 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인다. 이 글 속에 그런 행복이 잠겨 있었으면, 하는 희망이 생긴다. 

 
   

이렇게 애써 희망하는 글을 쓰고 있지만,
세상은,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그런 행복에 잠겨 살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삶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아파트'이다.
70년대의 '골방'과 '단칸방', 곧 그들 모두의 '외딴방'의 볼품없음을 가릴 수 있는 곳이 <아파트>이며,
'내 방에 들어오지마!' 이런 말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아파트>다. 

'시-댁',
'장-남',
'친-척',
'연-좌',
'연대-보증'
'화-병'
이런 얽히기 싫은 단어들과 가장 손쉽게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으로 채택된 곳.
이렇게 <타인>이 곧 <지옥>임을
삶은 계란보다 팍팍한 것임을 온몸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선택한 곳이 <아파트>란 공간이다. 

70년대 그의 [외딴방]은 이제 [공중 부양 공간]이자 [가장 확실히 잠긴 공간]으로서의 [아파트]로 재구성된 것이다. 

청춘은 없었던 사람들이,
제 자식의 청춘들마저 담보로 잡힌 세상.
마술 피리는 아이들을 학교로, 학원으로, 유학의 길로 모두 데리고 사라져 버렸다.
초등학생이 유서를 쓰는,
기러기 아빠가 유서를 쓰는,
홀로 남은 노인이 유서를 쓰는,
그러나 '국가는 해주는 것이 없'고 그저 '각개 전투식 보험'으로만 삶을 유지하라는 현실. 

YH 신민당사 농성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김경숙만큼이나 흔한 이름을 가졌던 작가는,
그의 '외딴방'이 21세기에도 다른 이름의 [외딴방]으로 전이되어 여전히 존재할 것임을 미리내다봤던 것일까.
21세기 그 땅에서 '구로공단'이란 지명이 사라진 자리를 뒤덮은,
피시방, 노래방, 키스방, 보도방, 방...방...방... '방자'의 전성시대이며,
그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여전히 산업 역군(?)이 되어 그곳들에서 일하고 있음을 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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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02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바닥에 엎드려서 <외딴방>을 읽던 때가 떠오르네요. 이 책은 다시 읽는다 해도 서늘한 냉기가 전해지는 방바닥에 엎드려서 읽게 될 것 같아요. 잘 봤습니다^^

글샘 2011-05-03 10:42   좋아요 0 | URL
댓글이 기형도의 엄마걱정같네요. ^^ 내 유년의 윗목이 생각나는...
정말 서늘한 유년의 윗목을 적은 글 이죠.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윤대녕 산문집
윤대녕 지음 / 푸르메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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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졸업식 날,
한눈 팔지 말고 하나의 길을 가다 보면 어느 날 자신이 바라던 곳에 이르게 되는 법(17)이라는 선생님의 마지막 훈화를 들었음을 아직도 기억하는 그는 행복하다. 

삶은 늘 미완성이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나고, 진학을 하고, 직업을 얻고,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고, 노인이 되고, 죽음을 맞곤 한다.
그런데, 하나의 길을 가다 보면 어느 날인가는 자신이 바라던 곳에 이르게 됨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도 지혜롭고,
그걸 평생 가슴에 담아둔 지은이도 훌륭하다. 

이 책은 윤대녕이 어떤 잡지에 실었음직한 글들이 토막토막 모인 것이다.
전체적인 아우트라인은 없지만,
윤대녕이 삶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지금'에 놓여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글들이 되었다. 

사람을 만나면,
입춘에 만나기 좋은 사람, 초복에 만나서 한잔 합시다. 이런 시으로 만남을 가지게 된다는 그는,
어찌 보면 즉흥적이지만, 그런 것이 또 사람 사는 운치가 아닐까 한다.
그는 참 운치있는 사람이다. 

김혜자의 신발끄는 소리를 들으면서,
사소한 몸짓에서부터 깊은 맛이 우러났으면... 그런 삶을 살면 좋겠다는 세밀한 마음을 내는 사람.
어찌 보면 참 짠한 사람이지만,
뭐, 사는 일은 스스로가 짠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그 짠한 시간들을 무연히 바라보는 일임을 인정하면,
비록 떠돌이처럼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도,
순간에 몰입해서 긴 시간 이상의 감동을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인연의 회복은 타다 남은 것들을 가지고 조각조각 이어 다시 만드는 것'이라는
미당과의 인연에서 얻은 구절도
어찌 보면 짠한 삶에 몰입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조각보가 아닌가 한다. 

퀼트라는 예술이 있더라.
쓰다 남은 것들을 가지고 조각조각 이어 다시 만드는, 인연의 회복과도 같은 작업.
요즘엔 퀼트를 아예 이쁜 천들을 조각내서 이어 붙이는 사치재가 되어버린 느낌도 강한데,
마르고 남은 자투리를 활용한 퀼트에서 삶의 지혜가 우러나는 법이다.
그래서 <타다 남은 조각>이 인연이 되는 것이지,
<일부러 조각낸 자투리>로는 인위적으로 되기 힘든 것이 인연이기도 하다.

박완서의 이야기에서, '자연이 한 일은 모두 옳았다.'는 표현을 찾는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건방지군! 이런 생각이 스쳤다.
자연에게, 스스로 그러한 한 세계를 이룬 시간 앞에서,
건방지게 옳고 그름을 들이밀다니.
선악과를 따먹고 아직도 인간의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한 발언 아닌가 하고...
반면, 중국 고대 미학서 ‘화화미학’이란 책이 있다는데,
거기서 '천지는 크게 아름다우나 말하지 않는다.'라고 적은 구절은 한 시절을 얻은 문장임이 느껴졌다.
천지는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주체는 천지일 수도 있고, 화자일 수도 있으나,
어쨌든 옳다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천지고, 자연이다.
자연이 일으킨 지진, 해일 등의 일에는 그저 '스스로 그러했을 뿐'이라고 여겨야지.
자연이 잘 했고 잘못 했음을 붙이면 안되지 않을까? 

'화이트 아웃'이란말이 있단다.
눈의 빛 때문에 방향 감각을 상실해버리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라는데,
방향 감각의 상실은 곧, 판단력을 잃게 됨이고,
곧 선악의 판단을 내려 놓는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안도감, 평화로운 느낌, 상실해버린 느낌의 평화로움을 느낀다는 이야긴데,
고은의 <눈길>에서 얻은 <어둠>의 상태가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마루야마 겐지, 달에 울다
이 책에 대한 감상이 재미있다.  

열 살의 봄, 스물의 여름, 서른의 가을, 마흔의 겨울을 그린 책이라는데,
어쩌면 김기덕이 이 책을 읽고 '봄여름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란 영화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봄 병풍에 그려져 있는 것은 중천에 떠있는 어스름 달, 동녘 바람에 흔들리는 강변의 갈대, 그리고 거지 법사이다.
겨울 병풍에 그려져 있는 것은 잘 갈아 긴 겨울 달. 얼음과 가루눈에 갇힌 산위의 호수, 그리고 거지 법사다. 

어쩌면 <정중동>
멈춰선 거기, 그 순간에서 세상의 움직임을
인간의 마음, 제 마음이 움직임을 주시하는 일.
이것이 도를 닦는 일이 아닐까.

   
  <만약 당신의 사진이 좋지 않다면, 그건 당신이 충분히 다가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설적 종군 기자, 로버트 카파가 남긴 말이다. 

이 구절은 숱하게 만났더랬지만,
이 책을 읽으며 다시 만난 이 구절은
당신의 지금 삶이 충분히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당신이 삶의 매 순간에 충분히 다가서 집중하여 주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로 읽혔다. 

이 책을 '마음 공부'에 넣어도 될 법하다.
읽는 이의 마음에 따라서는 모든 책이 마음 공부가 될 수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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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온 산이 신록으로 푸르게 물드는 계절이다.
5월은 청소년의 달이니, 어린이 날이니 이런 것들이 있지만,
고3에겐 그저 공부해야할 피곤한 날로 기억될지도 모르지만,
이제 6개월 후면, 
온 세상이 낙엽에 휩싸일 거고,
노랗게 은행나무도 익어갈 거고,
고3도 끝날 거다.
희망을 가지고 꾸준히 가렴. 

오늘은 그런 의미로 가을을 생각하며 은행나무를 하나 만나 보자.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
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
맑은 바람결에 너는 짐짓
네 빛나는 눈썹 두어 개를 떨구기도 하고
누군가 깊게 사랑해 온 사람들을 위해
보도 위에 아름다운 연서를 쓰기도 한다
신비로워라 잎사귀마다 적힌
누군가의 옛 추억들 읽어 가고 있노라면
사랑은 우리들의 가슴마저 금빛 추억의 물이 들게 한다
아무도 이 거리에서 다시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
벗은 가지 위 위태하게 곡예를 하는 도롱이집 몇 개
때로는 세상을 잘못 읽은 누군가가
자기 몫의 도롱이집을 가지 끝에 걸고
다시 이 땅 위에 불법으로 들어선다 해도
수천만 황인종의 얼굴 같은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희망 또한 불타는 형상으로 우리 가슴에 적힐 것이다. <곽재구, 은행나무>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이 수미상관으로 이뤄져 있다.
늘 그렇듯이,
수미상관은 '처음' 구절과 '마지막' 구절의 반복 사이에서,
주제가 형상화되는 과정을 겪는 것이란다. 

조지훈의 '승무'의 수미상관에서,
여승의 번뇌가 승무를 통해 종교적으로 승화되듯이 말이지. 

은행나무를 '너'라고 형상화하고 있고,
은행잎이 노랗게 변한 것을 '노오란 우산깃'으로 형상화하고 있지. 

그리고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의 주인공 무이쉬킨의 대사에서
선한 인간만이 이 세상을 궁극적으로 구원할 수 있다는 뜻으로,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는 말을 했다는 것도 인용하면서 시를 끌고 있구나. 

음... 첫부분에선 은행나무가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덮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길거리에 널부러져 말라가고 부서지는 은행잎을 보면서,
화자는 '빛나는 눈썹'과
'아름다운 연서'를 상상한다.
'누군가의 옛 추억'도 떠올리며 금빛 추억을 떠올리는
신비롭고도 참 아름다운 시인의 눈이지.  

은행잎 가득한 거리에선 '절망'을 노래할 수 없대.
그런데,
은행잎 다 떨어진 헐벗은 가지 위에
곡예를 하듯 매달린 도롱이집이 몇 개 매달렸어.

'도롱이집'은 도롱이나방의 집인데, 이 시에선 노오란 우산깃과 상반되는 부정적 이미지로 쓰이고 있단다
은행잎이 다 떨어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인데,
세상을 잘못 읽은 누군가,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고 자기 몫의 도롱이집을 걸고 버티고 있어.
<다시 이 땅 위에 불법으로 들어선> 도롱이집.
왠지 불법으로 정권을 잡은 권력자, 독재자들이 생각나는구나.  

 

이렇게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아도,
은행잎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서는
수천만 황인종인 한민족의 희망의 형상으로 기록될 것이라서
힘든 일도 버텨낼 수 있다는 의지를 가지게 되는구나. 

수능에서 이 시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을 물어본 적이 있단다.

① '빛나는 눈썹', '수천만 황인족의 얼굴'은 은행나무 잎을 비유한 것이다.
② '노래할 수 없다', '우리 가슴에 적힐 것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화자의 의지를 나타낸다.
③ '자기 몫의 도롱이집을 가지 끝에 걸고'는 상황에 대한 운명적 수용을 나타낸다.
④ '노오란 우산깃'이라는 표현을 반복 사용하여 대상의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⑤ '불타는 형상'은 '희망'을 감각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답은 뭘까? 
3번이지? 운명적 수용이 아니라, 시대에 역행하는 행위니까 말이야. 

다음엔 이 시와 함께 엮여서 수능에 나왔던 이용악의 <낡은 집>을 읽어 보자.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느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래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모도 모른다. 

찻길이 뇌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 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세째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도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그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한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절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고양이 울어 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한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 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옥만 눈 우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 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이용악, 낡은 집>  

제목이 <낡은 집>이니, 왜 그 집이 사람이 살지않는 폐가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첫 연에서 낮밤으로 거미가 줄치는 집, 흉가가 등장해.
이 집 사람들은 '은동곳', '산호관자'처럼 조금이라도 값어치있는 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단다. 
동곳은 '상투에 꽂는 막대'고 '관자'는 망건에 다는 거야. 

이성부의 <벼>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죄도 없이 죄 지어서>라는 구절이 나오듯이,
가난한 사람들이 어떤 시련을 겪고 흩어져 유랑하는 삶을 살게 되었으리라 상상해 볼 수 있겠지. 

예전에는 재넘던 당나귀, 항구가던 소도 있었나봐.
근데, 털보네 외양간엔 내음새 남아있지만 종적이 없어졌단다.
무곡은 곡식 무역하는 거고, 콩실이는 콩 싣고 다니던 일이지.

찻길이 놓이기 전.
찻길은 새로 놓은 길이라고 '신작로'라 불렀단다.
일제 강점기에 신작로가 마구 놓였으니, 일제 이전이겠지.
동물도 아이들도 자유롭던 옛날. 

털보 아저씨 셋째는 내 친구였는데,
(싸리빗자루로 말을 타던 죽마고우였지)
이집 안방 반짇고리 옆에서 태어났대. 

근데, 아이가 태어나도 축복받지 못하는 가난한 집이었나부지.
송아지는 팔아라도 먹지만, 인간은 밥만 축낸다는 말에서,
가난이 가득 묻어나지.  

마을아낙들이 무심호 흘린 이야기를 들은 밤,
삼대를 꼬아 피운 '겨릅등' 가에서 털보 아저씨는 울고 있었다지.
소주에 취해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 거야. 

갓을 쓴 스님에게 자식을 줘버리는 이야기,
무서운 절간 생활 이야기.
그런 가난 속에서 동무는 마음졸이는 어린 시절을 보냈어. 

그렇지만, 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고양이는 발정이라도 난 듯 울어 제키고,
어미는 방앗간에서 분주히 일할 때도,
나의 친구는 그 <낡은 집>에서 작은 꿈을 키웠지. 

친구가 9살 때, 겨울이었는데,
그 집 7식구가 사라져버렸어.
<북쪽을 향한 발자국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는 표현으로
화자의 애잔한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어. 

오랑캐의 땅 만주로 갔을까,
러시아(아라사)로 갔을까.
노인들의 이야기 속의 땅은 모두 무서운 곳 뿐. 

이제 다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이 수미상관으로 반복되고 있어.
예전에 털보 아저씨 살던 시절엔
제철이 되면 먹음직한 탐스런 살구 열매 가득하던 살구나무도,
이제 그루터기만 남아서
봄이 와도 귀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 쓸쓸한 풍경을 통해
일제 강점기의 시대 변화로 인한 삶의 팍팍해진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단다.

이 시의 주제라면 <가난과 시대가 준 한 가족의 파탄된 삶>이 되겠지.
꼭 털보네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시대 일제의 압제로 인해 고향을 등지고
유랑하던 비극적 삶을 형상화한 거지.

이 시의 특징은 시 속에 이야기(서사 구조)가 들어있다는 거지. 

이 시에 대한 감상문을 쓰기 위해 <보기> 자료를 수집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작품을 감상한 내용 중 적절하지 않은 것은?
이런 문제가 수능에 등장했단다. 한번 읽어 봐. 어렵진 않을 거야. 

<보기> 발표 연도 : 1938년

 작가 소개 : 이용악의 고향은 함경북도 경성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소금 장사를 하였는데, 아버지의 객사(客死)로 어머니가 생계를 꾸려야 했다. 어려서부터 궁핍한 생활을 했던 이용악은 일본 유학 시절에도 품팔이로 학비를 조달했다. 그러면서도 방학 때면 으레 귀국하여 동포들이 모여 사는 간도 등지를 돌며 유이민(流移民)의 비극적인 삶을 살펴보기도 했다.

① 1938년에 발표된 것으로 보아, '가난', '겨울'과 같은 시어를 일제 강점기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하여 읽을 수도 있겠어.
②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이라는 시구에서 시적 화자의 아버지가 객사했음을 알 수 있어.
③ 이 시에 나타난 궁핍한 생활상은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작가의 실제 삶과도 관련된다고 볼 수 있어.  
④ 유이민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털보네 가족의 삶으로 형상화된 것으로 보여.
⑤ 함경도에서의 공간 체험이 시에 방언으로 형상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어.

쉽지?
답은 두번째 것이지. 시적 화자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으니 말이지.
낡은 집, 곧 털보네 집 이야기임을 알면 쉽게 풀 수 있었던 문제야.
하나 더 볼까?

이 시의 4연 부분을 <보기>와 같이 희곡으로 구성할 때, 시의 맥락에 비추어 자연스럽지 않은 대사는?  

장소 : 털보네 안방
(갓 출산한 털보 처와 산파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산파 : 아들이야. 애아버지를 쏙 빼닮았구먼.
ⓐ 털보 처 : (기운 없는 목소리로) 어쩌다가 이런 집안에 태어났는지……. 

마을 빨래터
(동네 아주머니들이 빨래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주머니 1 : 털보네, 아들 낳았다면서요?
ⓑ 아주머니 2 : 그러게요. 자식새끼만 줄줄이 낳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원…….
ⓒ 아주머니 3 : 송아지라도 낳았으면 팔아나 먹지. 쯧쯧.

털보네 안방
(등불이 가물거리는 어두운 방. 털보와 털보 처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털보 처 :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없는 살림에 입만 자꾸 늘고……. 어떡해요, 앞으로…….
ⓔ 털보 : 걱정 말구려. 저 먹을 건 제가 가지고 태어난다잖소. (아기를 들여다보며) 고놈, 참 잘도 자네. 이놈이 다 자랐을 때면 세상도 달라져 있겠지. 

이런 걸 틀린 사람도 있었을까?
5번이지. ㅋ 
  

이 시는 길어 보이지만,
그 속에 이야기가 들어 있어서 이해하기 어렵진 않을 거야.

아까 은행나무를 읽다 보니깐,
가을의 샛노란 심상이 떠올라서 김춘수의 시 한 편 덧붙일게.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한번 감상해 보렴.        

샤갈의 마을에는 3월의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샤갈은 러시아의 식민지였던 벨로루시란 나라에서 태어난 화가였어.
늘 고향의 환상적인 색감을 사용하곤 하던 화가지.
샤갈의 그림은 언제나 꿈꾸듯 무중력 상태의 세상을 표현했단다. 

이 시의 '샤갈의 마을' 역시 실제 공간이 아닌 환상적인 세계라고 봐야겠지.

바르르 떠는 남자의 정맥,
이런 시어를 통해서 봄이 살포시 오고 있음을 표현하는 시란다.  

눈송이들이 날리는 모습을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단>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신선한 표현도 돋보인다. 

눈, 올리브, 불 등을 상상해 보렴.
이 소재들은 선명한 색채의 대비를 통해 봄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잘 반영된 거지.


맑고 순수한 생명감이 피어나는 <봄>을 그리기 위해,
샤갈의 그림 이미지를 끌고 왔고,
파리한 사나이의 관자놀이의 정맥과
홧홧한 아궁이의 불길이 어울려 풍요로운 마음이 살아있는 시지.  

햇살은 밝은데,
대기는 아직 차다.
건강 조심하고, 중간고사 잘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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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4-30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감기가 지독해서 몽롱하게 페이퍼를 읽습니다.
이런 날은 심상이 더욱 가득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은행나무 황금빛이 너무 생생하게 다가와서 놀랐습니다.
도롱이집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부분과 샤갈의 무중력 상태에 대한 부분으로 시를 다시 읽게 되는군요.

항상 저는 시를 토막쳐서 읽는게 싫다고
그냥 다가오는 대로 멋대로 해석하고 싶다고 주장했었답니다. 마이페이스 B형이거든요.
하지만 요즘 글샘님의 시 설명을 읽으며 새로운 것을 배웁니다.
즐거운 주말되셔요.

글샘 2011-04-30 12:24   좋아요 0 | URL
짧은 시는 통째로 감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시가 길거나 좀 어려운 구절을 만났을 땐, 토막도 치고 한 구절을 오래 곱씹다 보면,
한 순간에 탁, 하고 오는 기회를 만나기도 하죠.

뭐, 배울 거는 없을 거예요.
맨날 애들에게 하는 수업인데 글로 적으니 뭐가 좀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
원래 시 속에 배울 게 많은 법이죠.

마녀고양이님도 즐거운 주말 만드시길... 이불은 두 장 덮으세요. ^^

페크pek0501 2011-05-02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학 읽기로 했었죠? 저,최근 마이클 샌델 저, <정의란 무엇인가>를 다 읽었어요. 아주 꼼꼼히 읽었어요. 큰 일 한 것 같아요.ㅋ
저는 한꺼번에 서너 권을 같이 읽어요. 오늘은 이 책, 내일은 저 책을 읽죠. 장르가 다 달라서 내용이 헷갈릴 일은 없어요. 그 중 시집도 한 권 넣어 읽고 있어요.
다른 시 감상하고 싶을 땐 이곳을 들러요. 이곳 왕성한 에너지를 얻어 갑니다.

글샘 2011-05-03 10:44   좋아요 0 | URL
저도 되는대로 여러 권 읽기의 달인이었는데, 요즘엔 바쁘다는 핑계로...
저는 다른 시...랄것은 없구요. 고딩들 문제집에 잘 등장하는 시들을 읽고 있답니다.
왕성한 에너지를 얻어가신다면 제가 영광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