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는 크다(대), 많다(다), 초월하다(승)의 뜻이고, 반야는 지혜, 깨달음의 뜻이며, 바라밀다는 저 언덕에 이르다(도피안)는 뜻이다. 심경은 핵심되는 부처님의 말씀이란 뜻이다. 일체를 초월하는 지혜로 피안에 도달하는 가장 핵심되는 부처님의 말씀.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이 (삼계. 사생. 육도의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깊은 반야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오온(물질적 현상, 감각작용, 의지적 충동, 식별작용)이 모두 공함을 (실체가 없음을) 확연히 알고 이 모든 고통(4고, 8고)에서 벗어 났느니라.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여, 물질적 현상이 그 본질인 공과 다르지 않고, 공 또한 물질적 현상과 다르지 않으니, 물질적 현상이 곧 본질인 공이며, 공이 곧 물질적 현상이니라. 감각작용, 지각작용, 의지적 충동, 식별작용도 다 공이느니라.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여, ( 이 모든 존재들이 외관상으로는 생겨나는 것 같기도 하고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더러운 것 같기도 하고 깨끗한 것 같기도 하고 증가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감소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 모든 현상계의 본질적 차원(관세음보살의 차원)에서는 생겨나는 일도 없고 없어지는 일도 없으며,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으며, 감소하는 일도 없고, 증가하는 일도 없느니라.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그러므로, 사리자여) 이 현상계의 본질의 차원인 공의 입장에서는 물질적 현상도 없고, 감각작용과 지각작용 그리고 의지적 충동과 식별작용도 없느니라.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이 공의 세계에서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사유작용 등 감각작용도 없고, 빛깔과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비감각적 대상인 원리 등 객관대상도 없으며, 시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 촉각의 영역) 사유의 영역등 주관작용도 없느니라.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이 공의 세계에서는) 무명도 없고, 무명의 소멸도 없으며(행, 식, 명색, 6입, 촉, 수, 애, 취, 유, 생도 없고 그 소멸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늙고 죽음의 소멸도 없느니라.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이 공한 세계에서는)고통도 없고, 고통의 원인도 없고, 그 원인의 소멸도 없고 그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수행방법도 없느니라. (그럼므로 이 공의 세계에서는)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을 얻은 것도 없고,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도 없느니라.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 故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그럼므로 사리자여)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느니라. (보살은) 뒤바뀐 잘못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는 열반에 이르렀느니라.




三世諸佛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최상의 깨달음인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완전한 깨달음)를 얻었느니라.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그러므로, 이 반야바라밀다는 이 큰 신비한 주문이며, 큰 밝은 주문이며, 큰 최상의 주문이며, 이 얼마나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주문인가를 알아야 하느니라.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이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은 능히 일체의 고액을 소멸시키며 진실하여 거짓이 없나니, 그러므로(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이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일러 가로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3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우리 함께 피안으로 가자. 피안에 도달하였네. 아! 깨달음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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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5-10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처럼 스크랩이 되면 스크랩하고 싶네요.

글샘 2011-05-10 21:28   좋아요 0 | URL
긁어서 복사해 붙이시면 될 겁니다. ^^
쓸수록 멋진 글귀예요.
 
소설 무소유 - 법정스님 이야기
정찬주 지음 / 열림원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법정 스님의 삶을 정찬주가 쓰다. 

시자 법정이 설거지하면서 흘린 것.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까?" 
"...시주한 것을 함부로 버리면 삼세 제불이 합장하고 서서 벌선다고 했다.
부처님이 벌선다고 했으니 오늘은내가 먼저 벌서겠다." 

효봉스님은 빈 그릇에 담은 밥알과 시래기 줄기를 우물물에 한번 헹구더니
망설이지 않고 삼켜버렸다.
"다음번엔 서로 나눠 먹을까?" 

이런 스승님 아래서 큰 제자가 나는 법이다.  

효봉스님의 식사는 하루에 한 끼만 하므로 점심공양이 끝이었다.
지독한 소식이어서 점심공양 시간은 짧았다.
"세속인처럼 많이 먹는 것은 낮밥이라 하고,
수행자들이 뱃속에 점을 찍듯 적게 먹는 것을 점심이라 하느니라.
배를 부르게 채워서는 점심이라 할 수 없느니라." 

그 작은 뱃속과 큰 마음, 큰 공부를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많은 인세를 배불리 모아두지 않고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데 쓰고,
더 나이 들어서는 오두막을 짓고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신 스님. 

더 배불리 먹기 위해서 나서는 사람들을 위해서,
스님의 글은 널리 알려졌지만,
과연 스님의 삶이 배부르기만을 추구하는 인간들에게 얼마나 큰 가르침이 되었을는지는...  

전도몽상의 꿈만 꾸는 세속인으로서,
스님들의 이야기를 자꾸 읽는 일만으로도 큰 공부가 되고,
마음을 내는 계기가 된다. 

스님께옵서 가벼이 떠나신 뒤끝은,
요즘 가버린 이들,
노무현, 김대중 같은 정치가와,
김점선, 장영희 같은 예술가와,
김수환, 법정 같은 종계인과,
모두 아쉬울 따름이어서... 더욱 헛헛할 따름이다. 

어차피 모두 사라지고 지나갈 일인데,
큰 별들끼리 다투지 않고 살아갈 평화로운 날은 마음으로라도 그리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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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초
루쉰 지음, 김원중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암흑기 루쉰의 불안과 공허함을 가득담은 책, 야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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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햇살이 따갑다.
금세 여름이 될 듯 한 날씨더니,
밤이 되자 어디서 스멀스멀 안개가 가득 밀려와 시야를 가득 메운다. 

화단에 예쁜 봄꽃을 가득 사다 심었더니 세상이 다 환해 보이더구나.
그렇게 조그만 변화로도 칙칙하던 화단이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바뀌는 걸 보면 신기해.
그리고 깨끗하게 단장된 화단에선 매일 떨어진 낙엽도 줍게 되고 그렇다. 

관심을 가지고 쓰다듬는 것과
아무런 관심도 없이 처박아 두는 것은 결과적으로 큰 차이를 보여줄 수도 있겠다. 
오늘은 딱딱한 시,
딱딱한 것들에 대한 시를 두 편 보자.
딱딱한 것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부드러운 시선을...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海溢)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졌던 것이다
모래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김기택, 멸치>

이 시는 좀 길어 보이지만,
멸치가 어떤 존재였는지, 지금 어떤 존재이며, 그 속에 어떤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지를
화자의 생각이 옮겨감에 따라 보여주는 '서술어' 중심으로 읽어 보면 쉽게 뜻이 보이는 시야. 

'물결 - 무수한 갈래의 길' - 이었던 멸치.
그러나 인간은 그 멸치의 자연스런 삶을 바꿔버렸어. 

'떼어내 - 긿을 잃고 - 굳어졌던 - 접시에 담긴' - 멸치를 만들어 버렸지. 

그러나, 그 멸치는 지금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지만'
멸치를 상상하면 '바다 - 물결 -  파도 - 해일'을 부를 수도 있는 생명력을 느끼게 된다는 시야. 

딱딱한 것은 죽은 멸치, 반찬으로서의 멸치, 곧 <죽음의 이미지>를 불러온다.
그러나 '물결'은 부드럽지. <생명력>을 말하려는 것이겠지. 

멸치떼가 다녔던 바닷속의 길,
그 길은 멸치떼가 만들어가는 것이었지.
그렇게 멸치떼는 길을 만드는 창조적 생명력이었대.
그물에 걸리기 전까지는...

그물은 생명에 반하는, 자연에 반하는 인간의 문명이겠지.
부드러운 물결과 멸치의 길의 물결치는 곡선에 반대된,
꼿꼿한 직선들의 햇빛은 멸치에게서 생명성을, 수분의 부드러움을 탈취해 간단다.
물기의 생명력을 모두 빼앗긴 멸치는
마치 <모래더미>처럼 무기력하게 쌓여있게 되지.

현실 속의 멸치는 이렇게 무기력한 존재지만,
화자는 멸치의 본래적 생명력을 상상하는 힘을 발휘한단다.
굳어져버린 멸치의 뒤틀림 속에 생명력이 약동하는 바닷물의 선율을 추가하는 것이지. 

문명으로 뒤틀려가는 자연의 부드러움을
회복하려는 화자의 상상력이 멸치를 바다로 되돌려 보내는구나. 

교실에서 늦은 시각까지 문제들과 싸우는 전사같은 학생들을 매일 보는 아빠도
그런 생각을 한단다.
원래 들판에서 자라던 이 아이들은
말타기도 하고 뜀뛰기도 잘 하던 아이들이었을 터인데,
교실에서 늘 형광등 불빛에 얼굴이 파리해져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문명은 그렇게 자연 속의 인간도
비정하게 만드는 건지 몰라.
또한 인간의 탐욕은 그런 구조 속으로 자연스럽게 말라비틀어져 가기를 바라게 될지도 모르고 말이지.  

아빠는 민우가 공부로 꼭 선두에 서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단다.
열심히 살기는 바라지만,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어울리고 장난도 치고 그렇게 사는 평범한 사람이 되길 바란단다.

바퀴벌레에 대한 시도 배웠을 거야. 한번 읽어 보렴.
같은 시인의 시니깐 말이야.  


 믿을 수 없다. 저것들도 먼지와 수분으로 된 사람 같은 생물이란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시멘트과 살충제 속에서만 살면서도 저렇게 비대해질 수 있단 말인가. 살덩이를 녹이는 살충제를 어떻게 가는 혈관으로 흘러보내며 딱딱하고 거친 시멘트를 똥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입을 벌릴 수밖에 없다. 쇳덩이의 근육에서나 보이는 저 고감도의 민첩성과 기동력 앞에서는.

 사람들이 최초로 시멘트를 만들어 집을 짓고 살기 전, 많은 벌레들을 씨까지 일시에 죽이는 독약을 만들어 뿌리기 전, 저것들은 어디에 살고 있었을까. 흙과 나무, 내와 강, 그 어디에 숨어서 흙이 시멘트가 되고 다시 집이 되기를, 물이 살충제가 되고 다시 먹이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빙하기, 그 세월의 두꺼운 얼음 속 어디 수만 년 썩지 않을 금속의 씨를 감추어 가지고 있었을까.

 로봇처럼, 정말로 철판을 온몸에 두른 벌레들이 나올지 몰라, 금속과 금속 사이를 뚫고 들어가 살면서 철판을 왕성하게 소화시키고 수억 톤의 중금속 폐기물을 배설하면서 불쑥불쑥 자라는 잘 진화된 신형 바퀴벌레가 나올지 몰라. 보이지 않는 빙하기, 그 두껍고 차가운 강철의 살결 속에 씨를 감추어 둔 채 때가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아직은 암회색 스모그가 그래도 맑고 희고, 폐수가 너무 깨끗한 까닭에 숨을 쉴 수가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뜬 채 잠들어 있는지 몰라.  <김기택, 바퀴벌레는 진화 중> 

이 시의 바퀴벌레는 '변화하는 환경에 재빨리 적응하여 생존하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존재'다.
인류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살아왔던 바퀴벌레.
아직도 온갖 살충제를 뿌린다고 해도 멸종되지 않는 바퀴벌레.
어쩌면 인류보다 훨씬 더 오래오래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농후한 바퀴벌레에 대한 놀라움으로 시작한다. 

 

살충제와 거친 시멘트 같은 <자연 파괴>에 인간은 휘청거리지만,
바퀴벌레는 까딱도 않아 보이지. 

바퀴벌레의 표면은 금속성의 철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퀴벌레는 아무리 오염된 미래 사회에도 잘 적응할 것 같다는 비판적 시선이 이 시의 기본 기조지.  

인간에겐 치명적인 암회색 스모그, 폐수들이 아직도 바퀴벌레를 멸종시키기엔
너무 깨끗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반어를 쓰면서,
인류가 만들어낸 문화에 대한 비판적 어조를 드러내는 것이란다.

현대 문명이 초래한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기 위해,
화자는 어디에나 보이는 바퀴벌레를 소재로 삼았단다. 

인간은 지구에서 가장 오염된 종류의 벌레인지도 몰라.
인류가 문화란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는 온갖 사물들은,
지구에게서 빼앗은 것들인데,
그 수량은 한정적이고,
인간의 문화는 한 순간에 뻥~~하고 터질 수 있는 무기도 만들고 있으니 말이지. 

환경에 대한 관심은 아무리 지나쳐도 넘치지 않을 정도라고 볼 수 있단다.
어쩌면 미래 산업의 대부분은 환경에 관련된 것일지도 몰라.
병주고 약주고... 이런게 어리석은 인간의 삶이니 말이지. 

이제 미끈하면 지나가 버릴 5월이 앞에 섰구나.
모레는 휴일이고, 여러 가지 행사로 바쁘겠지만,
나름대로 시간계획 잘 세워서 보람찬 날들을 챙기기 바란다. 

교실은 멸치처럼 너희를 옥죄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너희들은 나름대로 멸치가 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해가는 사람들이기도 하니 재미있는 고3을 만들어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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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 이덕무 청언소품
정민 지음 / 열림원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독서토론반 아이들을 데리고 도서관 구경을 갔던 날.
원래는 도서관 앞산을 산책하며 중간고사 스트레스를 좀 날리려 했는데,
금세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을 보면서 도서관 구경만 했다. 

우연히 맞닥뜨린 이덕무의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너무 가난해서 한서로 이불처럼 덮었다는 둥, 논어로 병풍처럼 막았다는 이야기인데,
가난 속에서도 책만 읽는 바보의 사고는 끝없이 펼쳐진다. 

신선이란 마음이 담백하여 때에 얽매임이 없으면 도가 원숙해지고 금단이 거의 이루어진다. 

이렇게 신선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공부를 한 모양이다.
마음을 담백하게 하는 것은,
욕심을 버리고,
집착도 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현재에 몰두하는 것이리라.
때에 얽매임이 없다는 것은,
지금 이 일을 꼭 마쳐야 할 것처럼 열을 내고,
이 나이때는 꼭 이런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할 것처럼 골몰하느라,
현재의 자신이 가진 가치를 잊고 사는 사람이 되지 말자는 뜻이리라. 

마음을 담백하게,
때에 얽매임이 없이 사는 삶.
아, 말은 간단하지만,
반야심경의 그 숱하게 많은 '빌 공 空'자 하며, '없을 무 無'자가 가리키는 바가
인간이란 참으로 많은 '색'과 '신체의 망상'에 끄달리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한다. 

세모시 가는 실이 호박 구슬을 자르고, 얇은 판잣조각이 쇠뿔을 자른다.
군자가 근심을 예방함은 소홀히 하기 쉬운 것을 삼가야 한다. 

작은 금이 가 있는 상태를 방치하면 굵은 금으로 발전하듯,
장차의 근심거리를 예방하려면,
소홀히 여기기 쉬운 것을 미리 삼가야 한다.
그래서 홀로 있을 때조차도 <경건>하게 여기라는 '위기지학'으로서의 퇴계의 말씀이 오래 남는 것이다. 

시문을 볼 때는
먼저 지은이의 정경을 살펴야 하고
서화를 평할 때는
도리어 저자신의 마음가짐과 됨됨이로 돌아가야 한다. 

시를 읽을 때, 글을 읽을 때는, 지은이가 처한 상황을 살피면서 읽어야 한다.
그저 제 멋에 겨워 칭찬하거나 폄하해선 안된다는 이야기겠다.
글씨와 그림을 평가하는 자리에선,
제 자신의 마음가짐과 인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곧,
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남을 탓하고 비평하지 말라는 말이렷다.
마치 얄팍한 재주로 남의 글을 비평하는 글을 써두고는 재치있는 표현을 한 것인 양 우쭐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경고하는 글이다. 

어린 아이가 거울을 보다가 깔깔 웃는다.
뒤쪽까지 터져서 그런 줄로만 알고 급히 거울 뒤쪽을 보지만 검을 뿐이다.
그러다가 또 웃는다.
그러면서도 어째서 밝아지고 어두워지는지 묻지 않는다.
묘하구나
구애됨이 없으니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

인류의 원죄는 '선과 악'을 구별하려는 순간부터라고 성경에 씌어있다.
그 원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은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른다.
어린 아이와 같은 자가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를 이덕무도 하고 있는 것이다.
밝아지고 어두워짐에
구애됨이 없는, 분별력을 발휘하지 않는 순수함의 스승이란...  

남의 문장에 대해 망령되이 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지극히 미세한 일이지만 큰 재앙이 이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음이 없다. 

자기의 생각으로 자신의 글을 엄격히 적을 뿐이지,
남의 문장에 대하여 함부로 논하는 일의 엄중함을 재삼 강조하는 글이다. 

조선의 학자들의 글읽는 자세를 본받을 만 하다.
그들은 글을 가슴 속에 담아 두고 수백, 수천 번 곱씹으면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 하였다.
자기의 것이 된 글은, 곧 그 사람 자신이 되어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책을 반복하여 읽는 일은,
자신이 선 자리를 돌아보는 일이고,
자신이 하는 일을 늘 반성하는 일이다.
그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말을 빌리고 글을 훔치는 자들과는 근본이 다르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지만,
그 길은 결코 왕도는 아니다.
가시 면류관으로 가득한 길이고,
옳음을 알기에 가지 아니할 수 없는 통곡의 길이기도 하다.

글의 겉멋만 만나고 흥얼거릴 노릇이 아님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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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5-09 0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곳 학생들도 학교가는 토요일에 도서관에 와서 독서토론 해요. 방 빌려주지요~~~
어린이를 스승으로 삼을수도 있다는 자세. 음 좋은데요.
이번 한주 모토로 삼아야 겠습니다.

저두 요즘 잠이 없어졌어요. 하루에 5시간 자네요.
몽땅내사랑에서 전이사가 하루에 10분만 자도 괜찮다고는 하더만 저는 7시간은 자야 개운한데
아 피곤해.........

글샘 2011-05-09 08:56   좋아요 0 | URL
헐~ 하루 5시간...
연속극에서 무슨 말을 못하겠어요. ㅎㅎ

갈수록 잠 못 잘 일만 가득 생기네요. 날씨도 흐리멍텅하고... ^^

석란1 2011-05-23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때가 있다고 하지요. 정말 그 말이 가슴에 팍 와 닿는 기분입니다. 요 몇년 저는 한문학에 푹 빠졌습니다. 옛날엔 고리타분하다고 느껴지던 것들이 끌리는 걸 보면 살만큼 살아서 고전을 이해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잘 계시죠?

글샘 2011-05-23 10:37   좋아요 0 | URL
맞아요. 때가 있죠.
한문학... 석란님께 잘 어울리는 분야입니다. ^^
고전은 살만큼 살아야 다가오는 게 맞아요.
아이들에게 괜히 고전고전 할 필요 없다니깐요.
님도 잘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