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 서영은 산티아고 순례기
서영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산티아고를 가진 못하고,
늘 남의 눈으로 눈팅만 하고 앉은 나로서는,
솔직히 남의 글을, 거기 다녀온 사람들이 열심히 쓴 글을 평가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이 책은 읽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몇 달을 읽다 말다 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내가 싫어하는 종교적 색채가 짙게 드러났기 때문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 서영은이란 사람이 꽤나 유명한 소설가의 셋째(처)로 살았던 사람이고,
그 이의 소설도 몇 편 읽은 터라, 그런 부류의 사람들의 삶에 대한 선입견도 독서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으리라. 

이 책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은혜를 입는다든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든지,
이러한 사고방식과 용어에 친근한 사람이라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아니, 오히려 작가가 체험한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 공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가 걸은 그 길 속에서,
그를 좀 더 놓아 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편안한 글을 쓸 수 없었던 것이 아쉽다.
예술은 자신을 남기는 것에,
종교는 자신을 버리는 것에 초점을 둔다는 말을 스스로 하면서도,
산티아고 가는 길을 그는 자신을 오롯이 안고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치타라는 동행이 없었더라면 그의 산티아고 순례기는 나올 수 있었을지...  
치타라는 동행은 똑부러진 말로 참다참다 야단도 친다. 

   
 

선생님은 이 길을 걷는 사람의 자세가 안 되어 있어요.
음식 사치가 심하고, 주문한 음식을 남기고, 차를 타고 싶어하는... 

 
   

그 이후로 조금 바뀐 부분도 있으나 내가 읽기엔 별무반응인 듯 싶다. 

   
 

죽음은,
오지 않은 내일이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는 오늘 이 때의 속살 속에 있다. 

 
   

 이런 멋진 말을 설사 좀 하고 적은 것도 좀 마땅찮아 보인다. 

자아로 가득찬 한 소설가의 산티아고 걷기는
힘겨웠겠지만,
이미 와 있는 오늘 이 때의 속살로 가득한 책으로 보기엔 부족한 점이 많아 보인다.
오히려 그의 이 책은,
오지 않은 내일이란 시간 속의 자아, 종교 속의 자아에 바치는 글처럼 보여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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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ylim 2011-10-16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이온 와이를 검색하다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 글을 남깁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종교적 색채'때문에 거부감과
치타라는 동행없이 혼자였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슁움이 많이 들었습니다

글샘 2011-10-16 22:4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산티아고 가고 싶어서... 책만 십여 권 읽었는데요. 이 책에 제일 시시합디다.
 

바야흐로 봄이 온 것 같은데,
황사 탓인지 세상이 뿌옇다. 

봄이면 몸이 좀 개운했으면 좋겠는데, 몸살인지 피곤하구나.
민우도 건강 잘 챙기면서 생활하기 바란다. 

오늘은 시조를 주로 쓰던 시인 이근배의 조금 어려운 시를 한편 읽어 보자.
제목은 '겨울 자연'이야.
겨울이면 자연이 모두 숨죽인 듯한 계절이잖아.
꽁꽁 얼어붙으면 아무 것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막막한 세상.
그렇지만, 그 자연 속에선 끊임없이 생명력이 약동한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
우선 이런 생각을 염두에 두고 시를 한번 읽어 보자.

나의 자정에도 너는
깨어서 운다.
산은 이제 들처럼 낮아지고
들은 끝없는 눈발 속을 헤맨다.
나의 풀과 나무는 다 어디 갔느냐.
해체되지 않은 영원
떠다니는 꿈은 어디에 살아서
나의 자정을 부르느냐.
따순 피가 돌던 사랑 하나가
광막한 자연이 되기까지는
자연이 되어 나를 부르기까지는
너의 무광의 죽음,
구름이거나 그 이전의 쓸쓸한 유폐
허나 세상을 깨우고 있는
잠 속에서도 들리는 저 소리는
산이 산이 아닌, 들이 들이 아닌
모두가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쁨 같은 울음이 달려드는 것이다. <이근배, 겨울 자연> 

시조 시인이라 그런지,
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영원, 무광, 유폐' 같은 단어들이 그렇지. 
그러다 보니 금세 의미가 전달되진 않아. 

한 문장씩 의미를 풀어가면서 살펴 보자.
전체가 의미가 잘 안 들어오면, 부분으로 나눠보면 의미가 들어 오기도 하니 말이다. 

우선 첫 부분. 

나의 자정에도 너는/ 깨어서 운다. 

화자는 '자정'이 되었대.
밤 12시면 잠들 시각이잖아.
화자는 잠들어 쉴 시각인데, 겨울 자연은 깨어서 우는 거야.
여기 이미 화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다 들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불현듯 느끼기를,
나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들려는 이 시각에도,
어떤 존재인가는 아직도 깨어서 맹렬하게 울고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는 것. 
그러면서 스스로를 반성하는 화자를 발견하게 되는 것.
다음 부분을 계속 보자. 

산은 이제 들처럼 낮아지고 / 들은 끝없는 눈발 속을 헤맨다.  
나의 풀과 나무는 다 어디 갔느냐.

겨울 산.
눈으로 하얗게 덮인 겨울 산은
푸르른 잎사귀로 자신을 장식하거나,
붉고 누른 단풍으로 스스로를 장엄하지 않는다.
하얀 눈 덮은 겨울산은 들처럼 납작 엎드리고,
들에는 끝없이 눈이 내린다.
세상엔 풀과 나무가 다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말았구나.
이런 느낌일까. 

해체되지 않은 영원
떠다니는 꿈은 어디에 살아서
나의 자정을 부르느냐.

해체되지 않은 영원.
좀 멋진 말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의미가 쉽게 와 닿지는 않는 구절이다.
이런 말로 읽어 보자. 

해체는 흩어지는 것이고 풀어지는 것이고 없어지는 것이잖아.
영원은 영원히~ 이런 말이고.
겨울 자연은 지금 보이지 않지만,
영원히 있는 존재고,
눈 좀 쌓인다고 해체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이야. 

겨울 자연의 '꿈'.
겨울 자연은 현실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원히 해체되지 않는 거라고 했어.
그 겨울 자연의 꿈은 떠다니고, 어딘가에 살아 있어서,
매운 겨울 바람이 겨울 나무를 가르는 소리로
자정에,
편히 잠들려는 나의 자정에 나를 부르는 거지.  

대조적으로 설명하자면,
겨울 자연은 영원히 깨어있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존재로 시퍼렇게 눈뜨고 있는데,
화자는 자정이 되면 금세 잠들어 버리는,
꿈 같은 것 정도야 금세 잊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스스로 돌아보게 만드는 시란다.

이 정도 들어 보고 앞부분을 다시 읽어 보렴.

나의 자정에도 너는
깨어서 운다.
산은 이제 들처럼 낮아지고
들은 끝없는 눈발 속을 헤맨다.
나의 풀과 나무는 다 어디 갔느냐.
해체되지 않은 영원
떠다니는 꿈은 어디에 살아서
나의 자정을 부르느냐.

요기까진 조금 이해가 가니?
그럼 뒷부분을 마저 보자. 

따순 피가 돌던 사랑 하나가
광막한 자연이 되기까지는
자연이 되어 나를 부르기까지는
너의 무광의 죽음,
구름이거나 그 이전의 쓸쓸한 유폐

'따순 피가 돌던 사랑 하나'는 '광막한 자연'이 되었대.
'따뜻한 피가 흐르던 사랑 하나'는 평범한 존재, 일상적인 자연의 하나겠지만,
<광막한 자연>은 겨울인데도 쉬이 얼어붙지 않는 생명력으로 충만한 존재로 변화한 것 같구나. 

일상적이던 자연이,
겨울 자연이 되어 나에게 깨우침을 주기 까지,
너, 겨울 자연은 '무광(無光)'의 죽음을 무수히 겪었을 것이래.
무광의 죽음은 빛도 없이, 영광스런 순간도 누리지 못하고 죽어감을 의미하겠지.
그리고 구름처럼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는 채로,
쓸쓸하고 유폐(아주 깊숙히 가두어 둠)되어 있었던 존재였다고 하는구나.  

파릇파릇 새싹돋고 꽃피우고 광합성하던 나무들이,
한 겨울 광막한 <겨울 자연>이 되기까지는,
그 <겨울 자연>이 자정이 되어 편히 쉬려는 나를 부르기까지는,
영광을 누리지 않고, 쓸쓸하게 걸어왔던 <무욕>의 시간들을 거쳤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뒷부분도 계속 보자. 

허나 세상을 깨우고 있는
잠 속에서도 들리는 저 소리는
산이 산이 아닌, 들이 들이 아닌
모두가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쁨 같은 울음이 달려드는 것이다. 

그러나,
잠들려는 화자를 깨운 저 소리,
겨울 자연의 매서운 소리는
푸르던 산도 산이 아닌 것처럼 만들고,
풍요롭던 들판도 들이 아닌 것처럼 만들고,
그리하여,
온 세상이 다시 태어난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고 하는구나. 

화자는 자신의 삿된 욕망과 잡다한 일상사에 파묻혀 살고 있었는지도 몰라.
집을 새로 사야하는데,
융자도 얻어야 하는데,
딸내미는 성형수술하게 돈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외국에 가서 공부하는 아들 녀석도 돈이나 부쳐달라고 해서 속이 시끄러운데, 
그래서 도무지 머릿속이 복잡해서 사는 게 뭔지 모르겠을 때, 

산도 변하고,
들판도 변하고,
세상 만사는 원래 그렇게 변하는 것.
<무상(無常)>한 것임을 겨울 자연이 세찬 바람 소리로 가르쳐 준 건지도 몰라. 

그렇게 겨울 자연한테서 배우고 보니,
융자 얻어서 갚을 걱정은 미리 할 필요가 없고,
딸내미 성형수술할 돈도 그리 큰 돈도 아니고,
아들 녀석에게도 이제 일 년만 부쳐주면 되니 금세 끝날 거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맘이 편안해 지는 거지. 

뭐,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살고,
그러다 보면 한 세월 훌쩍 지나는 것이 삶인데,
맨날 바뀌고 변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뭐,
거기 끄달려서 고민하고 맘 조릴 것 있겠냐는 좀 똥배짱이 생기더라는 이야기인지도... 

그래서 화자는 
<모두가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쁨 같은 울음이 달려드는 것이다>라고 표현했는지도 몰라. 

꽁꽁 얼어붙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겨울 자연에서도 생명력은 존재하듯,
모두는 돌고 도는 것.
사라지면 다시 태어나는 것.
이런 생각을 하니,
기쁜 마음이 들어 삶의 시련이나 고난의 울음도 한결 후련하게 풀리는 건지도 몰라. 

화자가 잠들려는 순간 들려온 <저 소리>
그것은 화자가 일상 속에 매몰될 때,
단순한 삶의 오밀조밀한 귀퉁이에 부딪혀 고민할 때,
화자의 마음을 넓고 넓게 만들고,
부드럽고 매끄럽게 만들어 주는 그런 소리인 것 같구나. 

겨울 자연의 저 소리를 통해서 새로운 모습의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 노래.
겨울 자연.



민우도 겨울 자연의 소리를 들어 봐.
지금 세상은 누구도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 없어 보이지만,
가만가만 겨울 자연의 소리를 듣노라면,
세상 모든 것이 그렇게 흘러감을,
순간순간 변화하고 변화하는 것임을,
그래서 너무 깊이 고민만 할 필요는 없고, 
다만 때가 되었을 때 생명력을 꽃피우며 살면 되는 것임을 생각해 보자꾸나. 

이 시는 다소 복잡하지만,
화자인 <나>와
화자를 일깨워주는 존재, <겨울 자연>의 심상에 집중하면서 읽노라면,
그래서 여러번 읽게 되면,
서늘한 겨울 바람같은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시이기도 하단다.
몇 번 읽어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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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다.
31년 전.
우리가 사는 반도의 한 끝에서 독재의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던 날이 5.17의 밤이었다. 

전에 '화려한 휴가'란 영화를 본 적 있지?
이번에 '오월愛'란 영화도 나왔더구나.
잊을 수 없는 오월에 대한 다큐멘터리 같은데,
언제 시간이 되면 같이 보러 가자. 

오늘은 계단을 통해서
기다리는 마음을 간절히 드러낸 곽재구 시인의 시를 한 편 보자. 

강변에서
내가 사는 작은 오막살이집까지
이르는 숲길 사이에
어느 하루
마음먹고 나무계단 하나
만들었습니다
밟으면 삐걱이는
나무 울음소리가 산뻐꾸기 울음
소리보다 듣기 좋았습니다
언젠가는 당신이
이 계단을 밟고
내 오막살이집을 찾을 때
있겠지요
설령 그때 내게
나를 열렬히 사랑했던
신이 찾아와
자, 이게 네가 그 동안 목마르게 찾았던 그 물건이야
하며 막 봇짐을 푸는 순간이라 해도
난 당신이 내 나무계단을 밟는 소리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신과는 상관없이
강변 숲길을 따라 달려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곽재구, 계단> 

화자는 강변 오막살이에 살고 있어.
거기 맘먹고 계단을,
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하나 만들었다는구나. 

그 삐걱이는 나무 울음소리는,
언젠가
당신이 그 계단을 밟고
내 오막살이를 찾을 때를 위하여
마련해 둔 것이지. 

만약에 당신이 삐걱이는 계단에 찾아오신 그 날에,
화자가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던 신이 찾아오신다 해도,
화자는 그 나무 계단을 밟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는구나. 

그리고 신이고 뭣이고,
강변 숲길을 따라 당신을 맞이하러 달려 내려갈 거래. 


아, 이 시만 가지고도
화자가 얼마나 외로운지,
그리고 외로운 공간에서도 얼마나 임을 기다리는지 간절히 느껴지지 않니? 

그 기다림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또 청각적으로 표현한 소재가 뭐겠어? 

그렇지, 계단이지. 

그런데, 여기 '신'이 나오잖아.
신이 내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
그건, 뭐 정확히 단정지어 말할 순 없지만,
신이 내게 주시는 생명이거나 삶의 활력 같은 것일 수 있겠지. 

어쩌면 당신이 오신다고 한다면,
나는 신을 버리고라도
당신을 만나러,
그 계단 소리를 들으며 뛰어갈 거라는 화자의 기다림. 

화자가 간절히 원하는 기다림은 단순히 남녀간의 기다림만은 아닐 수도 있단 생각을 해 보았다.
깜깜해 앞이 한 치도 보이지 않던 어두운 시절.
임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들이 놓고 싶던 계단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자신의 생명의 샘을 버리고서라도,
당신을 만나러 기쁘게 기쁘게 달려갈 거라는 데서 화자의 진실성이 가득 담겼다. 

다음엔 고3 여학생이 쓴 '그 날'이라는 시를 한편 보자.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쟤.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경기여자고등학교 3학년 정민경(18), '그 날')


80년 광주에서 있었을 법한,
그 날의 한 사건을 겪은 화자의 독백을 늘어 놓고 있어. 

상황은 이렇지.
자전거를 끌고 출근하고 있는 아저씨의 뒤에서,
어떤 꼬마가 훌렁 뒷자리에 올라타서 자꾸 가자고 그래.
근데, 뒤를 돌아 보니,
총을 든 진압군이 아이를 겨누고 있어. 

아이는 겁에 질려서 눈물 콧물이 나오면서 사촌 형님이라고 둘러대고,
화자는 아니라고 부정했지.
아이는 진압군이 잡아가고 화자는 도망가다가 뒤돌아봤대. 

그 아이가 학생임을 봤고,
그리고는 죄책감에 휩싸여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듣지 못했대.
그래도 자꾸 뒤에서 갑시다~ 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고... 

이렇게 무서운 환경에서 충격을 입어 생긴 심리적 상처를 <트라우마>라고 그런대.
광주 사람들에게 80년 오월은 하나의 큰 트라우마였지.
그리고 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 모두에게 광주는 또 트라우마였고... 

이번에 <오월愛>란 영화가 나왔는데,
오마이 뉴스에 이런 기사가 실렸어.
한번 읽어 보렴.

"'피의 일요일'에 일어난 사건은 정당하지 않고, 정당화될 수도 없습니다. 먼저 시위대에 총을 쏜 것은 영국군이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군의 행동에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는 정부를 대신해 그리고 이 나라를 대신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지난 2010년 데이비드 캐머론 영국총리가 하원에서 '영국판 광주항쟁'이라고 할 수 있는 '피의 일요일'에 대해 공식 사과한 대목 중 일부입니다. 이후 당시 영국 공수부대 여단장이 사과하면서 무장폭도들의 폭동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던 '피의 일요일'은 38년 만에 명예를 회복하였습니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을 보고문학적 관점에서 철저한 조사와 고증을 통해 충실히 재현한 영화가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블러디 선데이>입니다.

침략과 저항의 역사가 서로 빼닮은 한국과 북아일랜드에서 공교롭게 같은 일요일에 일어난 5·18 광주항쟁과 '피의 일요일'. 하지만 북아일랜드와 달리 오월 광주는 발포 명령자와 행방불명자, 미국의 역할 등 가장 핵심적인 사실들이 1980년 5월 18일 그 날에 여전히 밀봉되어 있습니다. 핏빛 진실로 역사를 기록했던 광주의 그 날을 '주먹밥'과 '공동체'로 재현하며 가장 낮은 곳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다큐멘터리 <오월愛>를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무명씨'들을 위한 영화

<오월愛>는 광주의 안과 밖에 있었던 두 사람, 김태일 감독의 아내와 항쟁 당시 시민방위군으로 활동했던 김춘국(관광버스 기사)씨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당시 이름 없이 참가했던 분들의 기억과 지금의 모습을 통해 30년이 지난 현재 5월에 대한 기억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었다"는 김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무명씨'들을 통해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띄웁니다.  

<오월愛>의 사람들은 정치인도 지식인도 종교인도 그리고 행세깨나 하는 민주투사도 아닙니다. 역사가 시민군이라고 부르는 그들은 전남도청 취사조 여고생, 구두닦이 총각, 과일행상 아줌마, 자장면집 아저씨, 택시운전사, 전파상 주인, 시장통 할머니 등 말 그대로 '무명씨'들입니다.

얄팍한 머리보다 일상의 노동으로 오월 광주를 기억하는 무명씨들의 증언은 생생합니다.

"전남방직 어린 여공들이 거리로 나서는데 내 가슴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고 해서 들어갔제"

"정의를 외치다 피 흘리는 걸 보면 사람은 강해져"

"동네 사람들이 죽어나가니까 이래선 안 되겠다…"

"아이고 말도 못해 사람들이 다쳐가꼬. 그라니까 아줌마들이 열이 바치는 거예요. 어느 아줌마는 물통을 가져다주고…"

"어린 학생들이 배고파 죽겠다고 난리야"

"솥단지 걸어 놓고 금남로에 나갔당께. 주먹밥을 뭉쳐갔고…"

"전두환이 TV에 나올 때마다 울화통이 터져. 속이 뒤집어진다니까."

하지만 기억할수록 오월 광주의 상처가 덧나 고통스러운 것도 그들입니다. "엄마 쪼금만 고생해. 돈 벌어 행복하게 해줄게. 통금 때까지 집에 갈게"하던 아들을 잃은 김길학 어머니는 "제일 마음 아픈 게 도청철거와 (광주가) 잊혀지는 거예요"라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시민군의 시체를 부모들에게 확인시켜주던 당시 기동타격대원은 "저녁이면 한 번씩 기억이 떠올라. 나이 어린 학생들의 주검이 지금도…"라며 지워지지 않는 고통을 증언합니다. 그렇게 광주는 오월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결같이 가난한 삶이지만 그들의 기억은 여전히 다부집니다. '5월의 꽃' 기동타격대원으로 망월동 구 묘역 앞에서 '5월 화원'을 하는 이세영씨는 "그런(주먹밥 공동체를 꾸렸던 5·18 항쟁 10일간의) 세상이 있을까? 우리 가족 묘 같아"라며 그 날의 기억을 가슴에 담은 채 광주에서 살고 있으며, 중국집 주인 양인화씨는 "무엇이 민주주의고 무엇이 독재라는 것을 5·18 항쟁을 겪고 알았다는 거요. 그래서 내 인생이 완전히 디 바뀌었지요"라며 5월 광주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5·18 31주년인 올해 주제는 '관심'입니다. 이 대목과 관련해 김 감독은 양동시장에서 과일노점상을 하는 이영애 어머니를 통해 세상과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아무 씨잘데기 없어.  씨잘데기 없는 소리 때레치고 언능 가브러야. 너도 똑같은 놈이니 다시 오지 마!"

시민군의 존재조차 가물거리며 박제가 되어가는 5월 광주와 우리들의 무관심을 향한 어머니의 일갈은 서슬 퍼런 비수가 되어 아프게 가슴을 파고듭니다.

'가장 완벽한 세상'이었던 5·18항쟁의 주먹밥 공동체

<오월愛>는 5월 광주를 '주먹밥 공동체'로 재조명합니다. "워디 전쟁이 있난는데 지기집 쌀퍼다가 밥해 갖고 밖에다가 뿌리는 놈들이 어디가 있어요. 세계적인 역사를 봐도 그런 데가 없잖아?" 나명관씨가 들려주는 이 말은 학살의 한복판에서도 땀과 피와 웃음으로 희망의 공동체를 일구던 그날의 정신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증언해 줍니다. 공수부대에 의해 고립무원의 지대로 전락한 광주에서 폭력과 공포와 죽음의 아가리가 모든 것을 집어 삼키려던 때에, 영화는 무명씨들의 증언을 통해 '주먹밥 공동체'의 실체를 생생하게 전합니다.

시민들 스스로 주머니를 털어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고, 상점 주인들은 팔 물건을 나눠주고, 쌀이 있는 집은 쌀을 가져와 주먹밥을 만들고, 심지어 자동차까지 자발적으로 동원하는 등 양인화씨의 말처럼 "니꺼 내꺼가 없"이 '우리 것'만 있는 공동체를 구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랬기에 "도둑도 강도도 항쟁기간 동안은 한 마음"이어서 단 한 건의 범죄사고도 없었으며, 총에 맞고 칼에 찔려 신음하면서도 더 위급한 이들을 위해 병상을 내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거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어머니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거리에 내놓으면 청년들이 그 주먹밥을 먹고 싸웠으며, 양동이째 길어 온 물로 타는 목마름을 적셨습니다. 그 주먹밥은 아들만 같았던 청년들이 무사하기만 바랐던 어머니들의 애간장과 눈물이 녹아있는 밥이었고, 1980년 5월 27일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마지막 결사항전을 벌이던 전남도청에서 여고생(영화는 김영희라는 가명으로 대신했고, 그녀는 "살아 나왔다는 죄책감, 미안함에 견딜 수가 없더"라며 하염없이 오열했다)들이 핏물로 지어 시민군들에게 나르던 밥이었습니다.

그 낱알 하나하나를 두 손으로 단단히 움켜쥐고 건네던 밥이 주먹밥입니다. 주먹밥은 군홧발에 맞선 무명씨들이 생명과 상생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만든 밥이었으며, 저항과 나눔과 자치의 공동체를 실현하려는 대동 세상을 상징하는 밥이었습니다. 무명씨들의 곁에서 모든 두려움과 분노와 소망을 한데 모아 한솥밥을 지어먹으며 5월 광주를 사수하려던 공동체의 표상이 그 주먹밥이었습니다. 항쟁 다시 문화선전대원으로 활동했던 5월의 화가 홍성담 선배가 보았다던 "가장 완벽한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철거 앞둔 역사의 현장 '전남도청 별관'... "시민의 힘으로 지켜주십시오" 

올해 초 수원지법 안양지원에서는 희한한 판결이 있었습니다. 5월 광주에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했다고 주장했다가 5·18 단체에 의해 명예훼손 등으로 고발된 지만원씨가 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은 것입니다. 법리해석을 떠나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이 판결은 극우세력들이 5·18 광주항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입니다.

최근에는 5·18 기록물 3만 5000여 건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는 가운데 한미우호증진협의회 한국지부가 "탈북자들이 600여 명의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서 광주시민을 칼빈으로 죽였다고 진술했는데, 5·18 자료가 기록유산에 등재되면 광주사건의 진실이 은폐된다"며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토록 광주를 훼손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5·18 당시 미국의 역할을 희석시키기 위한 물타기로 읽힙니다.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미국이 훼손되는 것만큼 이들에게 절체절명의 위기는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화에서 유일하게 계엄군 증인으로 나온 당시 20사단 소대장 출신의 이은재 산돌학교 교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광주를 알면 알수록 죄의식이 더 커지고 나는 역사에 빚진 자다, 죄송하고 고마워요. 광주가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줬어. 이분들 대신해 열심히 사는 게 역사적으로 속죄하는 길이에요."

"언제부턴가 광주가 우리 안에 고립되어 있다"는 시민군의 말은 우리 안의 광주에 대해서도 톺아보게 합니다. 영화는 "우리 동지들이 우울증에 밤에 악몽을 꾸다 자살하는 것이 사는 게 아니야. 이게 잊는다고 잊혀지는 게 아니거든"이라는 시민군들과 함께 옛 전남도청 별관 철거를 놓고 5월 단체들 간에 막말과 욕설이 난무하고 있는 5월 광주를 동시에 비춥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5월의 '주먹밥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이겠냐고.

망자들의 정신을 올바로 계승하기 위해 하나로 뭉쳐야 할 5월 단체들이 스스로 공동체 정신을 파괴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광주로부터 멀어진 우리들의 '무관심한 일상' 또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 무관심은 우리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별관'을 철거한 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건설해 '주먹밥 공동체'를 붕괴시키려는 이명박 정부의 들러리 노릇을 해왔으니까요.

시민들의 광장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촛불을 드는데도 연행을 각오해야 하고, 4대강으로 국토가 도륙당하며 민주주의가 신음하는 이명박 정부에서 '별관'은 원형 보존돼야 합니다. 윤상원과 150여 구의 시민군 사체가 나온 그 별관은 주먹밥을 먹고 치켜들었던 민주주의의 횃불이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1987년 6월 항쟁으로 되살아났고 2008년 촛불대행진으로 타오른 5월의 정신이며,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철거 직전의 '별관'을 지키고 있는 무명씨들이 내건 펼침막을 한동안 클로즈업합니다.

'이곳을 철거한답니다. 1980년 5월 그 날의 핏빛 절규를 기억하십시오. 이제 시민의 힘으로 지켜주십시오.'

늙은 어머니들의 노래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영화의 후반부에서 내레이터는 "배운 사람도 배우지 못한 사람도 10일간 모두들 평등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늙은 어머니들은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고 처연히 부릅니다. 30년의 세월도 가로막지 못한 모정의 노래는 "5월의 기억이 우리 안에서 계속될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럴 때, 망자에 대한 추모를 넘어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다시 광장에 서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수 있다고. 그럴 때, 승자의 역사가 패자의 역사가 되고, 패자의 역사가 사실은 승자의 역사이자 진보의 역사가 된다고.

깨인 새벽 눈 비비고 일어나 잊혀진 이름을 다시 세우는 <오월愛>가 광주를 다시 복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으며, 광주를 넘어 '5·18 정신'의 전국화를 다시금 요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출처 : "전두환이 TV 나올 때마다 울화통 터져" - 오마이뉴스 

아빠는 80년 광주의 학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저 지점이 아닌가 한단다. 

<배운 사람도 배우지 못한 사람도 모두들 평등한 시간과 공간>
그런 곳을 '코뮨'이라고 부르지.
모두가 공동체여서 소외되지 않는 시간과 공간.  

어쩌면 영원히 이뤄지지 못할 꿈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시공간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그런 기회를 만났을 때,
정말 신이 자신을 찾아와서 가장 소중한 것을 선물이라고 내려놓는다손 치더라도,
임을 만나러
그 계단을 밟으며 뛰어내려갈 수도 있을 거 같단 생각이 드는구나. 

5월이 되니 마음이 무거워 몇 자 적는다.
하늘은 맑고 푸르지만,
어디선가 바람은 설렁거리고 우리를 흔든다.
바람은 어쩌면 우리더러
흔들리지 말라고 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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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17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이 먹먹해지는군요....

글샘 2011-05-18 16:39   좋아요 0 | URL
518을 그냥 넘길 수 없는 저도 하나의 트라우마죠. ㅠㅜ

마녀고양이 2011-05-18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삐걱대는... 이라는 단어에서,
이상하게 울리는거예요.
삐걱대는 계단이라는 심상이 희안하게도 그리움, 해묵은 반가움, 슬픔과 함께 다가오네요.

그러게요, 5월, 가정의 달 5월, 슬픔의 달 5월 이예요.
저는 전두환에게 1년 경비 비용 8억 들어간다는 뉴스에 울화통 터져 죽을뻔했습니다. ㅠ

글샘 2011-05-18 16:40   좋아요 0 | URL
그래요.
이 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단어가 삐걱대는...이죠.
삐걱대는 계단이 아니라면,
이 시의 계단은 별 의미가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 삐걱대는 계단의 여린 소리만으로도 온갖 심상을 다 부르죠.

pjy 2011-05-19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는것만으로도 울컥 눈물이 납니다...
 

비님,
장엄스레 내리셨다. 

빗방울이
창틀에,
유리창에
톡,
톡,
부딪는 소리는 참 아름답다. 

솨~아~~~
샤워처럼 들리는
천지를 뒤덮는 빗줄기는
답답한 마음을 조금은 시원하게 만들어 주곤 한다. 

오늘은 '가을의 시'를 주로 쓰는,
김현승의 시로 시작해 보자.
우선 <가을>을 한번 읽어 보렴.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寶石)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김현승, 가을>

가을의 기도에서는 '가을이 되면 호올로 사색적인 기도'를 드리겠다고 했는데,
이 시 <가을>에선 어떤 이야기가 기억에 남니?
아빠는 마지막 연의 <고요한 밤에 고르는 언어의 뼈마디>가 인상적이었어. 

그리고 1연에서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었고,
2연에서 <가을>은 '머나면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고 했지. 

이렇게 봄과 가을을 대조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이 시의 특징이야.
봄은 인생에서 청춘이라면, 가을은 좀 시들해가는 결실의 중년이겠지. 

청춘이란 건,
봄이란 건, 말이야.
숨가쁜 호흡처럼,
조금은 달뜬 호흡으로,
뭔가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고,
아직 이뤄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슴 뛰는,
이런 거라면 말이지. 

가을, 곧 중년이란 건,
왠지 조금은 쓸쓸하고 서럽게,
외롭고 시들하게,
저 푸른 하늘 멀리서,
찬물결처럼 한 순간에 밀려오는,
왠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런 느낌이 드는구나. 

3연에선 <봄>은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계절이었는데,
<가을>은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드'는 계절이래. 

청춘은,
심장의 박동 소리가 빨리지는 기대감으로 가득차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
꽃과같이 건강하고 싱그러운 모습으로 가득찬 시기란다.
그래서 버스를 타더라도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쏠려
자기 이야기를 하곤 한대.
건강한 청춘은 꽃잎처럼 아름다운 살결이
그 특징이겠지?
싱그럽고 매끈한 살결이 보드레한 느낌으로 가득한 것이 청춘의 특권이란다. 

반면, 가을은
싱그러운 살결의 희망보다는,
저 멀리 비추이는 별을 바라보면서,
골똘한 생각으로 가득차는 시기를 맞게 된단다. 
그래서 마음 속에 하나의 보석을 깎아 만들듯,
그렇게 정신적인 성숙을 기하는
원숙의 계절이겠지. 

4연에서 봄의 특징은 '눈동자 먼' 것이고, 가을의 특징은 '다문 입술'이래. 
청춘은,
사랑에 빠지면 눈멀어 버리고,
불의를 보게 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우곤 하지.
가을은,
자신의 삶의 중심을 잡는 중년의 나이엔,
입을 다물고 마음 속에 하나의 보석을 가꾸는 시기란다.
사랑에 눈멀기엔 많이 원숙해 졌고,
삶 속의 불의도 한순간에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되는 나이겠지.  

마지막 연은 조금 까다로워 보인다.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던 시기라면,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르'는 때라는구나.
화자가 '고르던' 시기라고,
과거 회상 선어말 어미 '-더-'를 넣은 걸로 봐서, 지금은 <가을>임을 드러내고 있어.  

이 부분은 시인 자신의 시작(詩作) 태도를 돌아본 것 같아.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른다'는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국어로 시를 쓰기 시작하는 사람의 자세지.
어떤 시어를 쓰는 게 더 좋을까?
이런 단어가 좋을까, 저런 구성이 좋을까,
이런 단계의 시인이 <봄>의 시인이었다면,
이제 원숙한 경지에 다다른 <가을>의 시인은,
이적지 써온 노래들을 뒤적거리면서,
<내 언어의 뼈마디>를 추려내는 사람이란다.
'언어 가운데서'의 '언어'는 누구나 다 쓰는 말이지만,
<내 언어의 뼈마디>는 자신만의 사고 과정을 드러내는
철학적인 의미가 담긴 언어가 되겠지. 

이렇게 이 시는 <봄>과 <가을>의 시인을 상정하고,
두 시기에 자신은 어떤 시를 적어 왔던가를 돌아보고 있어.
이렇게 쓰자니,
아빠가 이 글을 쓰는 것도,
어쩌면 <가을>의 작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어떻게 가르쳐 왔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니 말이야. 

시인은 <봄>에 공간적으로 가까운 곳에 관심을 가지고,
땅에 속하는 숨결, 꽃잎, 살 등의 심상을 써 왔대.
그런데 <가을>에는 공간적으로 먼 하늘, 별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먼 곳에 속하는 철학적 <토대>를 형상화하려고 한다는 이야길 하고 있단다. 

이 시를 단순하게 <가을이 주는 그윽한 느낌>으로 읽어도 좋겠지만,
아빠처럼 <인생의 본질>에 대한 의미를 담아서 대조적으로 읽어도 괜찮겠다. 

다음엔 인생이란 어떤 것일지
화려한 것만 인생인지,
하루하루 뚜벅뚜벅 걷는 것도 괜찮은 인생인지,
생각해보는 시를 한 편 읽어 보자. 

드문 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놓고
가이 없이 한없이 펄렁 펄렁.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 <김혜순, 납작납작 ―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이 시의 화자는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고 시를 시작한다.
뭘 걸어 놓고 바라볼까?  
제목으로 봐서, 화가 박수근의 그림이라도 걸어놓고 보는 모양인데,
<드문 드문 세상을 끊어 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고 본단다. 

자신의 삶을,
세상 살이를 드문 드문 - 아주 꼼꼼하고 세밀하지는 않게 - 대충대충... 
시일이 촉박하게 깝치는 것이 아니라,
며칠 내버려 뒀다가... 바라본대. 

그러면 그림속에서 사람들이 살아나지.
그 그림속 인물들은
어쩌면 화자의 생활 속 인물들인지도 몰라. 

흰 하늘,
쭈그린 아낙네 둘.
박수근 화백이 납작납작 물감을 눌러 붙이듯 그렸듯이,
거기 존재하는 인물들은
푸른 하늘을 향한 꿈과도 거리가 있어 보이고,
쭈그리고 앉아 높이 도약하는 삶과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벽위에 납작하게 뻗어있는 물감들 속의 아낙네들.
그들의 삶 역시 푸르르고 솟구치는 삶은 아니었을 거야.
오히려 납작납작 엎드린 볼품없는 삶이었을 거다. 

화자는 가끔,
심심할 때
아내와 아이들도
한 며칠 벽에 붙여 놓는대.
상상이겠지.
자기 아내와 아이들 역시
꿈과 희망보다는
찌든 나날 속에서,
흰 하늘 아래서,
팍팍한 생활을
납작납작 엎드려 살아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다, 조심스럽게 물어.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아~
하나님은, 대답하실 수 있을까?
대답하시기 민망하지 않을까?
하나님,
도대체 이 인생들은 무슨 재미로 삽니까?
얼마나 초라합니까?
왜 세상을 멋지게 꾸며 주시지 않으십니까?
그래,
이렇게 초라하게 사는 사람들 보니, 어떻습니까? 

건방져 보이는 질문이지만,
화자는 조금 소심하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2연에서는 그림에 대한 묘사가 더 자세해.
발바닥도 없는 인물들이 서성서성 거리는 그림.
서성이는 것은 안정되지 못한 불안감을 드러내지.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삶에 자신감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니 무표정할 수밖에... 

슬그머니 웃다가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서민들의 고단한 삶. 

그리고 다시 물어.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 

이 납작해진 사람들이
이 볼품없는 사람들과 현실이
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는
끝 간데 모르도록 한없이 펄렁펄렁 날리게 창조하시곤, 

보시기에 마땅합니까?
역시 화자에게 돌아올 하나님의 대답은 긍정적이지 않겠지.   

이 시는 박수근의 <세 여인>을 보고 쓴 시라고 알려져 있어.
여인들은 소외된 서민들이지.
삶의 무게에 짓눌린 서민의 이미지.
과연 이들이 이런 부당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니 더 행복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의문을 강하게 제기하는 시라고 볼 수 있단다. 

이 시는
'힘겨운 세상살이에 대한 서글픔과 연민'을 박수근의 그림을 통해 드러내는 멋진 시란다.

설의법을 사용한 질문은,
시를 읽는 사람에게,
납작납작 사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는 골고루 돌아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는 느낌이
<서성서성>, <납작납작>, <펄럭펄럭>을 통해
마구 달려와 닿는 느낌이 들지 않니?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가이 없이 한없이 펄렁펄렁'하는 구절이 입에서 맴돈단다. 

힘없이 세파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을
어쩌면 펄렁펄렁 하는 의태어를 사용해서
고단하지만 나부낄 수밖에 없는 모양으로 형상화한 것이 기막히지 않니?

 

박수근이란 화가는
생활에 충실한 시골 사람들의 꾸밈없는 모습,
빨래를 하거나 농악놀이를 하는 사람 등을 주로 그렸어. 
그는 사실주의적 화풍을 외면하고,
극도로 평면화시킨 화폭에서 단순한 형태를 절제미 가득하게 형상화하지.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서민의 건강함이 잘 드러나는 그림,
또는 서민의 고달픔이 잘 묻어나는 그림 등으로 평가되곤 한단다.


피곤한 삶의 반복이 우리의 하루하루임은 변함없단다.
그렇지만,
그 하루를 행복한 하루로 만드는지,
불행한 하루로 만드는지는,
그림을 그리는 우리의 몫도 조금 있지 않을까 싶다. 

비가 내리면,
우산을 쓰기 귀찮지만,
어린아이들은 빗방울 듣는 소릴 듣기 좋아하고,
장화 신고 물웅덩이에서 첨벙거리기 좋아하고,
우산을 돌리면,
우산살 타고 날리는 물방울 가는 곳을 바라보길 좋아하기도 하잖아.  

김현승의 <가을>에서 삶을 관조하는 냉철한 시인의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면,
김혜순의 <납작납작>에선 구체적인 삶의 모습 속에 따스한 시선을 던지는 시인의 온기도 느낄 수 있었어.
시란 건,
이렇게 때론 날카롭게 세상을 보게 하고,
때론 둥글둥글 세상을 감싸안아 보게 하는 요상한 안경이란다.
그러니 어찌 아니 읽을 수 있으랴~ 하고 읽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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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리영희 선생이 고인이 되신 지 5개월이 되었다. 

그 무렵 사두었던 책을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 읽었다. 

리영희 선생님의 책으로 대학 생활을 시작한 나로서는,
매운 최루탄 냄새와 함께 대학을 다니면서 리영희 선생님의 모든 책을 읽었으니,
나 역시 '의식화의 원흉' 덕택에 삐딱선을 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청운의 꿈을 품고 들어간 대학 내에는,
온갖 대자보와 투쟁가 뿐이었다.
광주에 대한 죄책감이 가장 무르익었던 85년에 신입생이던 나는,
<과외 독서>를 통해 단기간에 반정부적 입장으로 무장하게 된 것인데,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을 시작으로,
<8억인과의 대화>, <베트남 전쟁>, <분단을 넘어서>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교사 의식화 교재 <페다고지>도 선생이 번역했다니 제대로 세례를 받은 셈이다.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요즘엔 '응오 딘 디엠'으로 표기되는 이름조차 '고 딘 디엠'으로 적힌 책으로 제국주의 침탈의 역사 속에 끼인
한국의 부끄러운 모습을 읽곤 했던 날들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미 고인이 되신 리영희 선생의 삶을 읽는 일은 벅찬 현대사를 읽는 일이었다.  

리영희 선생은  연합 통신 등에서 치열한 세계 정세 읽기의 달인이 되었고,
그 속에서 한국의 격동의 시기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읽어주는 유일한 스승이었다.  

다른 운동가들처럼 그저 통일을 감정적으로 되뇌거나
독재 반대를 외치다가, 자기 편이 정권을 잡으면 어정쩡한 자리에서 권력의 단맛을 보다가
또 제대로 된 길이 무엇인지 잃어버리는 일은 리영희 선생의 삶에선 없었다. 

국제사회에서의 '객관적인 자기'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국민에게
'주체적인 자기'가 있을 리 없다.(235) 

리영희 선생에게 분단과 국가 보안법과 군사 독재 정권의 발호는,
세계 정세 속에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의 일부였을 뿐으로 보였다.
전체 구도를 보는 이에게는 작은 나사들의 작동이 한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일이다. 

네 머릿속에 들어있는 상식을 버려라.
네가 진실로 믿고 있는 많은 것들은 허위의식, 그러한 미신들을 네 머릿속에 주입한
이 우상들의 세계와 분질을 꿰뚫는 새로운 눈으로써 이 세계를 다시 바라보라.(257)

보아야 할 것들을 올바로 보아야 함을 맵차게 보여주는 이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최근 몇 해의 법정 스님, 리영희 선생의 죽음은 그런 면에서 큰 손실이다.
자신의 생각이 건전하기 짝이 없고 온건하고 올바르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리영희 선생의 이 평전과 <대화>를 읽어볼 일이다.
거짓된 상식이 주입된 채로,
권력의 단물을 빨아먹는 주제에 자신이 올바로 보고 있는 상식인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리영희는 <우상과 이성>을 썼던 것이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재량을 지니는 자율적인 인간의 창조를 위하여,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광신적 반공주의에 대해 저항적 입장에서,
군인 통치의 야만성, 반문화성, 반지성을 고발하기 위하여,
시대정신과 반제, 반식민지, 제3세계 등에 댛나 폭넓고 공정한 이해를 위하여,
남북 민족간의 증오심을 조장하는 사회 현실에 반발하면서
두 체제 간의 평화적 통일을 원하는 입장에서...(257)

한국 내에 산적한 숱한 모순들의 핵심 고리는 바로 '외세에 의한 분단'에 있었다.
그 모순을 바로잡을 수 있는 비전을 김대중 대통령 집권기부터 이야기했던 바,
그것이 차근차근 이뤄지고 있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 치욕의 시절을 살고 있음은 이 민족의 불행이요, 부조리한 세상의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우상과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힘없고 짓눌린 백성, 민초들이었고,
이 아이를 사갈시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를 암흑으로 몰아가는 권력에 눈이 뒤집힌 자들이었다.
뭣이건 바른 것, 옳은 것, 아름다운 것, 화평한 것, 착한 것, 진실한 것을 보기만 하면 눈알이 뒤집히고
온몸에 경련이 이렁나는 정신병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의 위대한 우상을 믿고 있었다.
반 무슨무슨 주의, 냉전 논리, 흑백 이분법, 총검 숭배 따위가 그것이다.
평화는 약자의 도덕이라는 믿음에는 니체 숭배자였고,
권력의 의지만이 최고의 철학이라는 데서는 히틀러의 아류들이었다.
이들에 의해서 짓눌린 백성들은 이성을 믿고,
그 회복을 기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거꾸로 보이고, 뒤집혀 있고, 일그러져 있는 세상에 이성의 빛이 활짝 비치기를 손 모아 기도하고 있었다. (282)

우상과 이성의 책 제목에 얽힌 이야기다. 

지금 다시 세상은 우상 숭배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촛불 집회를 거쳐 4대강이 몸살을 앓고 있으며, 한미- 유럽  FTA도 통과되어,
자유롭게 외제 자동차를 탈 자유를 구가하고 있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려 그토록 노력했건만,
다시 어두운 세상 속에서 눈을 감으신 선생의 심사가 얼마나 불편하셨으랴.
어두운 시대일수록 선생이 루쉰을 등불로 삼아 삐뚤게 걷지 않으려 노력하셨듯이,
이런 책을 읽으며 바로 걸으려 힘쓸 일이다. 

백범이 통일정부 수립 협의차 북행하기 전에 쓴 서산대사의 시는 그래서 그가 남긴 발자취를 떠올리며 상념에 잠기게 한다. 

눈길을 걸을 때
흐트러지게 걷지 마라.
내가 걷는 발자국이
뒤에 오는 이의 길이 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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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1980년 1월 9일 출감, 323. 1월 19일 출감... 바로 잡기 바란다. 

412. 1987년에 마침내 홍콩을 ... 반환하였다는 말은 1997년 7월 1일로 바로 잡아야 한다. 

430. 1889년 헝가리와 국교를 수립... ㅋㅋ 1989로 바로 잡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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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0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1-05-12 21:30   좋아요 0 | URL
리영희 선생님의 삶, 그 자체가 한 권의 교과서였습니다.
슬픈 교과서...
저 시 참 좋죠?

pjy 2011-05-11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야말로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이야기겠군요~

글샘 2011-05-12 21:30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말 그대로 격동이 살아 꿈틀거리는 시대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