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비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 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인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 얼음 속에서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그 빛나던 눈도 비늘도 다 시들어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나희덕, 마른 물고기처럼)

나희덕이 '사랑', 그 영원히 풀지 못할 과제에 대해 곰곰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몰라요.
사랑이 뭔지... 
인간의 언어가 가진 속성을 학자들은 삼각형으로 표현하곤 하죠.
세상의 숱하게 많은 '현실'들을,
인간의 두뇌 속에선 '개념화', '범주화'하여,
특정한 '언어'로 활용하는 것. 

사람들이 '사랑해.'하고 쉽게 내뱉는 그 말 속에는,
사실 수많은 머릿속 카테고리에 담겨야 할 것들이 구별되지 않고 쓰인다는 것.
그래서 화자의 '사랑해'가 나온 카테고리가
청자가 받아들인 카테고리의 '사랑해'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칸이었을 때,
소통의 불발이 일어나기 십상이라는 것. 

인간의 언어란 원래 태생적으로 그런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는 것.  

 

1연. 

(어둠 속의 남녀.)
남 : 영이야. 잠시만... 나와 잠시만 함께 있어 줘.
여 : (방백) 철아, 너... 너, 날 사랑하는 거 맞아?
      정말 날 사랑해서 나와 잠시라도 같이 있고 싶은 거야? 
      아니면, ... 아니면, 젊은 네 몸의 본능이 절제되지 못하고 있는 거야? 
남 : 영이야, 잠시만... 잠시면 돼. 

(영이, 손을 뻗어 철이의 어깨를 짚는다.)
여 : 철아, 괜찮아?
남 : (고개를 끄덕이며, 푸~푸~ 거칠게 한숨을 내쉰다.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른다.)
여 : 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남 : (갑자기 영이를 꽉 껴안으며) 몰라. 모르겠어. 내가 너를 정말 사랑하는 건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남녀.
그들은 사실 그들 머릿속의 다양한 카테고리 속의 상황을 모두 하나의 도가니에 넣어,
<사랑>이라는 상황의 용광로에서 녹여버리죠. 

사랑하는 이들이 두려운 것은,
자신의 사랑이 진실한 사랑인지 모른다느
자신의 사랑이 오락가락하는 욕정과,
연애 감정과,
소유욕과,
결혼을 전제한 교제와,
영원히 당신의 편이 되려는 순수한 마음과,
나를 버려도 좋을 투명한 마음의,
그 다양한 칸들을 유영하는 자신의 마음이,
어느 칸에 있으면 올바른 사랑이고,
어느 칸에 있으면 부정한 사랑인지,
배운 적도 없고,
그래서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그래서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그렇게 힘겨운 것일 수밖에 없지요.
한 사람의 머릿속에 질러진 칸만 해도 숱하게 많은데,
그 중 어느 한 칸의 감정에서 길어올려진 '사랑'이란 단어가,
상대방의 머릿속에 질러진 칸에 든 개념과 충돌하는 순간,
에효 =3=3 그 부딪힘의 에너지란... 

어쩌면 '물질'과 '반물질'이 부딪히면 질량이 '0'이 되면서 에너지를 방출한다고 하듯,
나의 사랑과 너의 사랑이 부딪히면서 뜨거운 사랑의 열기만 느껴질 뿐,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느낄는지도 모를 일이랍니다. 

나는 어린 시절을 떠올립니다.
몹시 추운 날, 시린 손을 비비적대던 것처럼,
미봉책으로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의 물고기마냥
헐떡거리는 너에게
그저 너를 적셔주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어댈 뿐.
그것이 그저 나의 최선이므로,
자꾸만, 자꾸만 침을 뱉어댈 뿐. 

잠시, 네 비늘은 어둠 속에서 빛날 순 있었지요.
그러나 나는 정말 두려웠답니다.
당신이 그걸 알았을까요? 아마 몰랐겠지요.
내 행위가 당신에게 영원히 전달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지금은 어둔 밤.
그래서 헐떡대는 당신 위로 내가 뱉는 침 정도의 위로로도
당신의 비늘은 잠시 빛날 수 있지만,
잠시 후 해가 뜨고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한다면,
그 환한 세상에서는
아마,
아마 우리의 착각이 환하게 밝혀질 것입니다.
나는 그게 두려운 거예요. 

어둠이 사라지고,
밝은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나의 행위는 결코 사랑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면...
두려움에 잠긴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습니다.
당신의 시든 비늘 위로...

아, 이 소통하지 못함.
소통의 불가능함.
여기에 답답해하는 것은,
인간만이 스스로 가로지른 빗장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짐승들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사랑과,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랑의 고귀한 아름다움의 간격이 좁혀질 때,
그 칸지름에 익숙하다 생각했지만,
또 그것에 불과하다고 느껴질 때,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처럼
그 간극이 멀고 깊다고 느껴질 때,
인간은 사고의 불빛을 꺼버려야 할는지요. 

나희덕은 결국 사랑의 의미 나눔에 성공하고 있지 못해 보입니다. 

이전의 젖은 물고기들은 결국 헤어지고 맙니다.
장자의 학철지부(涸轍之鮒)는
가장 필요할 때 물 한 바가지가 필요한 것이지,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오히려 더 잔인한 것일는지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있었지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밥상 위의 마른 생선을 만납니다.
그 황어는 바로 너였지요. 

네가 물 한 바가지 필요하다고 했을 때,
내가 물 한 바가지 부어주지 못했던 네가,
바싹 마른 황어가 되어 내 앞에 놓였을 때,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었던 것이 없었음을,
나 역시 네 옆에서 침이나 뱉어줄 따름이었지,
너에게 한 바가지의 물을 길어다 부어줄 능력이 못되었음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너의 꺾인 지느러미,
너의 시들어버린 눈과 비늘이 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 앞에서,
화자는 할 말이 없죠. 

그때, 너에게 어떻게 해주었어야 했던지를 아직도 모른고,
그리고, 너의 꺾인 지느러미와 시들어버린 눈과 비늘이 나를 원망할는지,
아니면 무연히 잊었는지도 나는 모르죠. 

장자의 가르침은 이 대목에서 유효합니다. 

서로 침을 뱉어주고 거품을 내어 서로 적셔주는 행위,
이것은 강이나 호수에 있을 때 서로를 잊어버리는 것만 못해요. 

진실한 사랑은 가슴 떨린 사랑도 아니고,
잊지 못해 가슴 태우는 사랑도 아닙니다.
정말 사랑이란 것은,
<서로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랑이에요.
가족 같은 사랑.
산소 같은 사랑. 

서로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랑을 <떨어져 살아 서로 잊>는 것이라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헤어질까 바들바들 떠는 사랑이 아니라,
물과 물고기처럼
헤어짐을 상상할 필요도 없이 안정적으로 사는 삶.
수어지교라고 했던가요.
물 만난 고기라 했던가요. 

살아갈수록 손바닥이 까슬해지고,
손가락에 습한 기운이 조금씩 줄어들어,
자주 핸드 로션을 바르게 됩니다. 

그렇지만, 마음의 물기마저 말라버린다면,
슬프겠지요. 

서로의 대뇌 속,
다른 카테고리 속에 담겨진 낱말밭에 연연하기보다는,
사랑이란 말을 잊고,
당신이 거기 존재함 자체를 감사하며 사는 하루가 되기를... 

마른 물고기처럼 변해버린 당신의 존재를 만났을 때,
미안해하거나 후회하는 일도 애시당초 만들지 않으며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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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 인생도처유상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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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특정한 목차의 순서가 있을 수 없다.
인생 도처에서 만나는 문화 유산과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부터 늘어놓으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가 오랜 외도 끝에 다시 문화유산 답사기를 냈을 때부터 이 책에 침을 발라두었는데, 이런 저런 일이 겹쳐 이제서야 읽는다. 

유홍준 답사기의 장점은,
자신이 직접 다양한 답사를 인솔하고 다녀본 사람이기에,
글에 꼭 맞는 사진을 읽는 사람에게 제시할 줄 안다는 것. 

그리고 글 속에 사람들의 삶의 온기가 살아있는 말맛을 살릴 줄 안다는 것. 

무엇보다도 도처에 숨어있는 절경들을 소개해 주면서도 뒷이야기를 상세히 들려줄 줄 안다는 것. 

이런 여러가지 덕목들이 그의 글맛을 높여주는 것이다. 

이번에 나온 제 6권에서는 경복궁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넣어 두었는데 내가 정말 읽고 싶은 것이어서 반가웠다.
그리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절집 선암사 이야기도 멋지고,
올 여름이나 가을쯤 답사를 갈 예정인 부여에 그가 터를 잡고 살면서 느끼고 본 것들 이야기도 맛깔스럽다. 

마치 오랜만에 푸짐하면서도 저렴한 시골할머니 밥상을 만난 횡재의 느낌이랄까.  

다음 달에 서울 출장갈 일이 있는데, KTX 덕에 시간 아껴서 경복궁이나 한번 돌아보려고 맘먹은 참에 참 잘 읽었다.
그리고 유홍준이 어디서 끌어다 인용하는 멋진 글들도 남겨 두고 싶은 맘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도,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 (161. 김수근 선생의 건축 수상집 제목) 

깊은 산 속의 깊은 절이라는 산사의 미학적 표현도 멋졌다. 

거창 양민 학살같은 대목을 짚어주는 것이 유홍준 답사기의 미덕 중의 하나이기도 한데,
마지막에 '울리고, 울리고, 또 울리고, 울리고'라는 울림은 오랜 여운을 남긴다.
이런 한 구절은 백 마디의 웅변을 뛰어넘는 울림을 남긴다.  

302쪽에서 인용한 황매산 화강암에 대한 기근도 교수의 설명을 얻어 듣는 일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화강암은.. 무엇보다 단단하다는 특징, 그리고 분해될 때는 확실하게 부스러져 모래사장을 만들어 주고, 물을 빨아들여 맑게 걸러 주고, 비옥한 농토를 만들어 줍니다.   
   

이런 행복감은 마늘종(마늘쫑)을 뽑을 때 바늘로 찌르고 뽑는 것을 공과대학 교수가 <응력 집중>으로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마찬가지의 통쾌함을 얻는다.

그가 문화재청장을 역임하면서 노력했던 바가 글의 곳곳에 남아있다.
물론 비판적 안목은 학자시절 더했겠지만,
정책적 실제의 자리에서 집행하는 입장에 서 본 그로서는 현실의 냉엄함도 많이 배웠으리라.

경복궁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경복궁이 임진왜란때 불탔던 사연에 대한 여러 가지 입장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선조수정실록에선 난민이 열받아 불질렀다고 나오니 그것이 가장 믿음직한 주장인 것 같지만, 다른 왜인들의 기록에선 조금 차이가 나는 것으로 아는데, 유홍준이 아무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에서 아쉬움이 못내 남았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경복궁 모든 건물이 불탄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었다.   
   

이 한 마디로 원인도 설명하지 않고 전란으로 불탄 것처럼 기술한 것은 아쉽다. 

이 부분은 이덕일(이런 사람은 학자들은 싫어한다. ㅋ 웃긴 나라다.)의 '조선왕을 말하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류성룡은 '전쟁 후의 일을 기록하다'라는 글에서 거가가 도성을 나서자 난민들이 먼저 장예원과 형조에 불을 질렀는데,
이 두 부서는 공사노비들의 문서가 있는 곳이다 라고 전하고 있고,
임진록도 같은 내용을 전한다.
또, '내탕고(왕실 재산 관리하던 곳)에 들어가 금백을 약탈했고,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도 불태워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면서,
'다 적이 이르기 전에 우리 백성들이 불태운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또한 류성용은,
'처음 일본군이 입성했을 때는 백성들이 다 도주했으나 차차 돌아와 마을과 시장이 가득 차서 적과 서로 섞여 장사했다.'면서
'적이 성문을 지키면서 우리 백성들에게 적첩을 휴대하게 하고 출입을 금하지 않았다.'라고 전한다. 

 
   

이 때, 이미 조선은 끝장이 나버린 왕조였던 것이다.
이런 것을 역사에서 자꾸 빠트리는 이유는, 미필적 고의가 아닌 <고의>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혁명>이었을 것이다. 

---------------

이 책에서 간혹 참고 자료 사진의 설명과 본문 내용이 어긋난 부분이 여럿 있어 아쉬웠다.
물론 참고 사진을 찾고 편집하는 것은 편집자의 몫이겠지만, 그런 세세한 곳도 틀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 문화재 공부하는 사람의 기본 아닐까 싶다. 

56쪽. 효명세자를 '의종'이라고 잘못 썼다. 59쪽에서는 '익종'이라고 바로 불렀는데. 
그리고 이왕이면 56쪽을 '효명세자(익종)'이라고 했으면 59쪽도 '익종(효명세자)'라고 순서를 바꿀 필욘 없어 보인다.   

199쪽. 선암사 뒷간 현판 사진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라고 오기하였다.

221쪽. 도동서원 석축 조각 디테일 설명에서 '오르내리는 다람쥐'를 '거북이'라고 오기하였다.  

307쪽의 영암사터 멋진 돌계단을 보고 사인 12도라고 부르는 건 좀 웃긴다. 내가 보기엔 사인 72도쯤이면 맞을 거 같다.

312쪽. 본문 설명에선 분명히 북쪽과 남쪽의 돌거북 설명이 나오는데, 그림에 붙은 설명에선 동쪽과 서쪽으로 적혀 있다.
뭐, 방위가 북동쪽이고 남서쪽일 수도 있으리라마는, 통일시키는 것이 좋겠다. 

361. 녹채 설명에서 '목채'라고 표기된 것은 '목책'의 잘못이다. 본문에서는 목책이라고 바로 쓰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도처에서 외래어 표기법을 무시하고 쌍자음을 쓰고 있다. 쎄미나라든가, 씨드니라든가...
그런 것들은 그런대로 봐줄 법도 하지만,(나도 외래어 표기법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니 말이다.)
152쪽의 '꾸바'(쿠바)라든가, 281쪽의 '샹하이'(상하이), '도오꾜오'(도쿄) 등은 눈에 거슬린다.
281 쪽에서 '빠리'와 '파리'가 함께 뒤섞여 쓰이는 것을 보고 원칙을 무시한 편집자의 무신경이 아닌가 싶어 적이 기분이 상했다. 

유홍준의 책을 구입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고,
금세 새로운 판을 짤 것이니, 그때는 수정될 것을 '창비'를 믿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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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5-26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다 읽고 장점과 오류까지 세심하게 짚어주셨으니 참고 하겠습니다.
창비 편집자는 글샘님이 지적한 부분을 보면 뜨끔하겠습니다.^^

글샘 2011-05-26 08:57   좋아요 0 | URL
글쎄요, 창비 편집자님이 보시면 다행이지만, 뜨끔하라고 쓴 글이기도 하죠. ㅋ

shalom2k 2011-05-30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처음 나왔을 때부터 거의 사모으시다시피 해서 이것도 곧장 사려고 하다가 마침 잘 봤습니다.
이렇게 세밀하게 짚어주시니 참 고맙습니다. 이 글은 아예 창비 편집자에게 곧장 보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좀 기다렸다가 새 판 나오면 마련해야겠네요. 아이구, 근질거려라 ㅎㅎ

글샘 2011-05-30 23:24   좋아요 0 | URL
저도 다른 책은 다 나눠주곤 했지만, 유홍준 세트는 고대로 있답니다. ^^
뭐, 저 몇 가지가 걸리더라도 글맛이 떨어지진 않으니 사셔도 될 겁니다.

세실 2011-05-30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리뷰 읽고나니 한곳에 방치해(?) 두었는데 얼른 읽어야겠다는 생각 드네요.
요즘 이 책이랑 요네하라 마리 책 출판사에서 선물 받았는데 이러고 있어요. 리뷰 써주는게 도리인데 말이예요.ㅋ

글샘 2011-05-30 23:25   좋아요 0 | URL
음, 사서의 횡포군요. ^^ 책을 마구 방치해 두실 수 있는... ㅎㅎ
이제 방학 하셨나요? 한 학기 수고 많으셨습니다.
딴데서 받은 책 리뷰는 최대한 빨리 써버려야 밀리지 않죠. 경험자는 압니다. ㅋ
아, 요네하라 마리... 저도 읽고 싶군요.
 

오늘로 100회가 되었구나.
숫자가 별의미를 가지는 건 아니지만,
100번이나 민우에게 강의를 했다는 걸 기념해 보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조금 특별한,
어려운 시들을 두어 편 읽어 보자. 

송찬호의 '구두'는 가끔 문제집에 나기도 하지만,
워낙 환상적인 상상력이 필요한 시라서 의미를 정확히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만큼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읽어 보자꾸나. 

우선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하나 보자. 

 

이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란 화가가 그린 그림이야.
그림 제목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란다.
분명히 이 그림은 파이프 그림이지. ㅋ
그런데 글씨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음으로써,
<그림>과 <의미>의 관계, 그리고 <언어>의 관계를 한번 생각하게 한단다. 

물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지.
파이프 그림일 뿐.
그렇지만, 사람들은 보통 이게 뭐야? 이러고 물으면,
어, 그거 파이프네. 이렇게 대답하겠지. 

일상적으로 우리가 생활 속에서 부려 쓰는 언어들도 사실은
자기 마음을 정확히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단 걸 알 수 있지. 
아빠가 민우에게 '사랑해~'하는 말을 하는 거랑, 엄마에게 하는 건 전혀 다르단다.
민우에게는 '엄마 아빠가 사랑하는 아들아, 잘 자라서 행복한 인생을 살기 바란다.' 이런 의미고,
엄마에게는 '당신은 나와 힘을 합치고 마음을 합쳐서 남은 일생을 즐겁게 살 나의 짝입니다.' 이런 의미겠지.  

마그리트가 이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바라보고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만 비틀어 생각해 보면, 그러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웅변이 아닐까 해. 

그럼 송찬호의 구두 속으로 들어가 보자.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넣어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는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보는 것이다 <송찬호, 구두> 

자, 이 시의 제목이 '구두'임을 생각해 본다면,
중심 생각을 '구두'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자. 

그런데, 바로 '새장'이란 단어가 나오잖아.
'감옥'이라고도 하고.
화자는 구두와 새장, 감옥의 속성에 주목하고 있는 거야.
왜, 구두를 오래 신고 있으면 갑갑하잖아.
우리 삶은 오래 신고 있는 구두처럼, 구속되고 갑갑한 것이라는 전제에서 시를 전개하는 건가 보다. 

1연에서 '날뛰는 발'은 자유롭고 싶은 자신의 영혼을 뜻한다고 봐야겠지.
누구나 세상에 얽매여 살지만 내심 자유롭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지.
세심한 아저씨는 구두 하나를 신으면서도 새장 속의 새처럼, 답답함을 느꼈나봐.
아마도 화자는 어린 시절 들판에서, 논밭에서 맨발로 자유롭게 뛰어다닌 추억을 가지고 있겠지. 

2연에서 처음엔 구두가 너무 커서 덜그럭거렸대.
'구두', '새장', '감옥'은 모두 부자유, 구속의 환경이잖아.
발에 너무 커서 덜그덕거리는 구두.
자신은 왠지 세상 속에서 꼭맞춤하게 살지 못하고 덜거덕거리는 느낌이 있다.
감옥이 작아지고, 그래서 구두가 발에 꼭 맞았으면... 하는 희망과,
자유로운 비상을 꿈꾸는 새가 오버랩되면서 시를 쓰고 있어.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이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의 '피레네의 성'이란 작품이다.
바다 위로 넓은 하늘이 펼쳐졌는데,
그 위에 공중에 뜬 땅이 있고, 그 위에 성이 있지.
물론, 이것은 '바다'도 '하늘'도 '바위'도 '성'도 아닌 그저 한 장의 그림일 뿐이지만. ㅋ
파이프가 아니라는 그림처럼 말이지. 

그러나, 화가는 넓게 펼쳐진 바다.
그리고 푸른 하늘을 가득 날고 있는 구름.
또 산 위의 성을 그렸어.
어찌 생각하면, 저 바위는 둥근 지구를 축소해 놓은 것일지도 몰라.
이런 환상적인 그림을 통해서 우린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
우리가 일상적으로 그러하다는 생각이 사실은 잘못된 것이고 바뀌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메시지인지도 모르겠다. 

'새장', '구두', '감옥' 그 부자유스러운 구속 속으로
<모자>나 <구름>을 집어 넣어 본대.
모자는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것이지만,
왠지 조금 멋스럽게 폼을 잡으려는 도구기도 하지.
야구선수 모자보다는 영국 신사 모자풍이 어울리겠다.  
르네 마그리트가 쓴 것 같은 이런 모자.
역시 이 포스터에도 파이프가 등장하는구만.



새장이라는 구속된 공간 안에서 답답해하는 새.
새장에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어서, 그나마 새는 숨통이 트이듯,
새장 속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으려 애써 보는 화자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러나...
새장 속의 새들은 이미 자유롭게 활강하던 넓다란 언덕을 잊었고,
숱한 이랑들을 세며 날던 시절을 잊어버린 듯,
현실 속의 하루하루는 답답하고 지루하지.  

현대인의 삶은 이렇게 꽉막힌 것이란다.
자유를 잃어버린,
그 푸르른 자유의 추억을 다 놓쳐버린 구속된 삶.

그러나,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 넣듯,
작은 시도로도 현실의 구속감, 답답함은 조금 완화될지도 몰라.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비록 현실적으로 새장은 구속의 의미를 갖지만,
거기 작은 구멍과 먹이통을 통해서나마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할지도 모르지. 

4연에서 화자는 오늘 산 새 구두를 보고 있어.
아직 신지 않은 새 구두.
그 구두는 구름 위에 올려져 있는 듯 땅을 밟지 않았고,
물에 뜨기 전인 듯 물에 젖지 않은 새 구두야. 

원래 새 구두는 발에 조금 맞지 않잖아.
어떤 쪽은 넓고,
어떤 쪽은 찡기게 마련이지.
새 구두를 사 두고 바라보면서, 이런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자유를 바라고 있는 건지... 

속박에 묶인 직장에서 일하기도 했던 화자,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화자.
그는 새 구두를 하나 사서 쳐다보면서,
자기 인생을 회고한다. 

늙었고 고집세어서 새구두와는 좀처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화자의 발.
구두와 화해하지 못했던,
그래서 덜그덕거리고 꽉 쪼여 답답하던 화자의 삶을 돌아보면서,
갑갑한 속박의 <새장>을 벗어나
자유롭게 비상하는 <새>의 자유를 상상하고 싶은 것인지도... 

새 구두 한켤레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통찰력.
그리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상상력.
이런 것들을 마음껏 펼친 시가 아닐까 싶다.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보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일상의 틀을 깨고 자유로이 비상하려는 꿈을 가진 존재인지도 몰라.
그러기에는 세상은 너무도 많은 속박으로 짜여진 공간이고 말이지. 

이야기를 듣고 나서 시를 다시 한 번 읽어 보렴.
몇 가지 낱말들에 걸려서 의미가 들어오지 않던 시가,
다양한 삶의 모습을 형상화한 시로 읽히기를 바라며 아빠가 쓴 글이니깐,
꼭 다시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넣어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는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보는 것이다 

다음엔 수능에 나왔던 시 중 김춘수의 <내가 만난 이중섭>을 읽어 보자.

광복동(光復洞)에서 만난 이중섭(李仲燮)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욱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南浦洞)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李仲燮)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김춘수, 내가 만난 이중섭(李仲燮)>

 

화가 이중섭은 일본인 아내와 결혼했어.
그렇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 속에서 아내는 일본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가 살지.
이중섭은 가난 속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그림으로 남기곤 했단다. 

어느 날, 화가 이중섭을 시인 김춘수가 만났지.
그런데 이중섭은 김춘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눈을 먼 곳,
바다에만 두고 있었나봐. 
아내가 건너간 곳.
그리고 온다면 거기서 아내가 올 바로 그 바다로 말이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는 표현은,
머릿 속에 온통 바다 생각 뿐이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이중섭이 서있는 배경으로 바다가 가득 펼쳐져 있었다는 형상화일 수도 있어.
암튼 이중섭의 이미지에는 바다가 가득한 거지. 

도쿄(東京)로 떠나버린 아내를 기다리며,
바다를 바라보다,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이 빛깔은 어둠인지, 마음의 어두움인지 모르지만,
그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대. 

아무리 화자가 이중섭을 찾으려 해도,
길 위에 발자국이 보이지 않더래.
이중섭을 찾을 수 없었던 거지.
그만큼 철저하게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 거겠지.
그 어둠 속으로... 

그러다 한참 뒤에
화자는 또,
남포동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을 만나게 돼. 

이중섭은 여전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유행가 중에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가 있는데,
'눈 멀도록 바다만 바라보다...'하는 구절이 있단다.
아마도 이중섭이 그런 심정이었겠지.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내리는 바다를 보면서,
바다를 한 뼘 한 뼘 지워나가고 있었대.
동경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면서... 

화자는 이중섭을 두 번 만났지.
그런데 이중섭의 관심사는 오로지 아내 뿐이야.
그 넓은 현해탄을 한 뼘씩 지워나가봤댔자 거리는 줄어들지 않을 건 뻔한 노릇. 

이 그리움엔 절망만이 가득 남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평양이 고향이며 건강이 악화되어 있던 이중섭을 간첩, 공산당 내지는 정신 이상자로 몰았대.
단지 병을 앓고 있었을 뿐인데 말이야. 

그래서 자신이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자화상을 그렸어. 
정신이상자는 자화상을 이렇게 정확히 그릴 수 없기 때문에... 하지만 결국 그는 정신병원에 한 달이나 수용되어야 했다는구나. 

그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 담뱃갑 은박지에다가 송곳으로 그림을 그려 넣어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기도 했지. 

 

그의 <가족>이란 작품이야. 

 

우리의 감각과 대뇌는 세상 모든 것을 늘 똑바로 바라보는 것 같지만,
힘든 일을 겪으면,
감각과 대뇌가 세상의 빛을 굴절시켜 어둡게 보이도록 만든단다. 

이번에 어떤 여자 아나운서가 힘든 일을 겪으면서 결국 목숨까지 버리게 됐대.
안타까운 일이지.
우리 감각을 너무 믿는 것도 늘 경계해야 할 일이란다. 

세상은 힘들게 보여도,
즐겁게 보여도,
늘 힘들지만은 않고 즐겁지만도 않은 곳임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단다.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잖아.
인간이 옳다, 그르다고 부르는 것들은 늘 그르고 옳은 것으로 바뀔 수 있고,
아름답고 추하다고 나누는 것도 금세 더럽고 이쁜 것으로 뒤바뀔 수 있는 것이란다. 

오늘 읽은 환상 속의 시들을 감상하면서,
너무 한 가지 생각에만 매몰되어서,
인생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를 경계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상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을 우리 마음에 주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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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5-25 17: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모르는 시인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
시와 그림이 절묘하게 어울리네요. 그러니 이 페이퍼 한편 쓰시기 위한 시간과 노력,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 정도 할 뿐 입니다.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글샘 2011-05-26 00:58   좋아요 2 | URL
시와 그림이 잘 어울린다니 다행이네요. ^^
페이퍼 하나 쓰는데 시간은 많이 안 걸립니다. 뭐, 맨날 하는 수업이니깐 말이죠.

비로그인 2011-05-26 01: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느덧 100회로군요. 편집자들이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을 텐데 내년쯤에는 책으로 묶여 나오는 건가요?^^

글샘 2011-05-26 09:23   좋아요 2 | URL
글쎄요. 아이들에게 도움은 되겠다 싶으면서도, 책으로 만드는 일은 영 찜찜하거든요.
그리고 제멋대로 설명이 튀어 다녀서, 출판하기엔 편집자들이 달가워하지 않을 듯 하기도 해요.^^

smdan 2011-08-30 11: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정말 좋은 서재를 발견했습니다. 음. 잘보고/잘읽고/많이 느끼고 갑니다. 구들장(시공부모임)에서 작년에 이어 송찬호(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을 공부하는 날이 오늘인데, 노다지를 발견했습니다.

글샘 2011-08-31 08:58   좋아요 1 | URL
시공부 모임이란 것도 하시는군요. ^^
저는 혼자서 되는대로 쓰던 글이라... 송찬호... 재미있는 작가지요.

저도 저녁을 좋아합니다.
 

하늘이 파랗다.
봄바람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콧등을 살랑거리고,
햇살도 피부에 따끔거리도록 와 닿는다. 

봄이 문득,
칸을 옮겨 여름으로 이사가는 느낌인 요즘.
이제 다시 평가원 모의고사를 앞두고 열심히 준비하고 있겠구나. 

오늘은 오랜만에 한용운 스님의 시를 두어 편 보자.    

님이여,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한 금(金)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珊瑚)가 되도록 천국(天國)의 사랑을 받읍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아침 볕의 첫걸음이여. 

님이여, 당신은 의(義)가 무거웁고 황금(黃金)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福)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梧桐)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光明)과 평화(平和)를 좋아하십니다.
약자(弱者)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慈悲)의 보살(菩薩)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 바다에 봄바람이여. <한용운, 찬송(讚頌)>

척봐도 이 시는 제목 그대로 '님'에 대한 찬송이지.
예찬적 태도로 님을 극찬하는 시야. 

각 연의 처음엔 '님이여,'로 시작하고, 마지막행은 '님이여, 사랑이여, ~~~이여.'로 마치지. 
그 사이에 '님은 ~~~이다.'라는 은유법이 하나씩 들어가 있고 말이야.
수능에 쓰이는 용어로 이렇게 비슷한 문장 구조가 반복되는 것을,
<통사 구조의 반복>이라고 부른단다.
잘 외워두렴. <통사 구조의 반복>
우선 1연부터 읽어 보자.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한 금결>이래.
뽕나무 뿌리가 산호가 되도록(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만)
오랜 세월 동안 천국의 사랑을 받기에 마땅한 존재가 '님, 당신'이지.
금은 순수한 금속인데, 백 번이나 단련하였단 건,
불순물 제거를 위하여 그만큼 여러 번 수고를 거친 <금결>이니 대단한 찬송이지.
아침 햇살은 참 환하고 밝아 반가운데, 그 아침 볕의 첫걸음처럼 그대는 환한 존재란 이야그지. 

다음 연에서 당신은 <의리가 중요하고 재물은 가벼움을 잘 아는> 존재래.
그래서 거지의 거친 밭, 가진 것 없고 소외되는 자들에게
복된 씨를 뿌리는 존재로 그리고 있지.
오동 나무는 전설 속의 봉황이 깃든다는 신비로운 나무인데,
오동의 숨은 소리는 왠지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지는 시어구나. 

마지막 연에서 님은 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한대.
이 시가 씌어진 일제 강점기는 <겨울>이고 <암흑>이고 <폭력의 시대>였지.
그러니 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찬송가는 바로 독립에 대한 간절한 의지가 아니겠니? 

관세음 보살 이야기는 전에 한 적 있을 거야.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보고 觀>, <듣는 音> 자비로운 관세음보살.
눈물로 이어가는 우리 민족에게 자비의 눈물을 뿌려달라고,
그래서 얼음 바다에 봄바람처럼 우리에게 오시라고 간절히 비는 시란다.

이 시에서 우리 민족을 비유한 시어는 무엇무엇이 있을까?
바로 거지와 약자란다. 

이 거지와 약자를 <지고지순한 님, 의로운 님, 자비의 님>이 보살펴 주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뭐, 이런 느낌이랄까. 

만해 시에서의 '임'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데,
그의 시집
[님의 침묵]의 서문 '군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  

 

 "'임'만이 임이 아니라, 기룬(그리워하는, 사랑하는) 것은 다 임이다.
중생이 석가의 임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임이다. 장미화의 임이 봄비라면, 맛티니의 임은 이태리이다.
임은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임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장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임이 있느냐. 있다면 임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이처럼, 한용운에게 '임'은 이 세상 모든 존재라는 의미를 가진대.
그것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조국일 수도 있고, 부처일 수도 있지.
즉, '임'은 애인인 동시에 조국, 조국인 동시에 부처, 아니 그 모두가 한데 어우러진 추상적인 개념이야.
그래서, '임'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느껴지지 않으니 조금 어려워 보이기도 한단다. 

다음엔 <당신을 보았습니다>를 읽어 보자.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을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

이 시에서도 '님, 당신'이 나와.
총 4연으로 이뤄진 이 시는 앞부분에서 <좌절>하는 화자가 등장하지만,
시가 진행될수록 <희망>을 보게 되는 구조란다. 자세히 한번 볼까? 

1연에서 나는 당신과 이별한 후 당신을 잊지 못한대.
그런데, 그것은 당신을 위함이 아니라, 나를 위함, 좀 이기적인 거라고 한다.
뭐,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인 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말이야.
모든 사랑도 다 이기적인 것이겠지. 

2연에서 나는 <땅이 없어 추수가 없는> 존재야.
<찬송>에서 '거지, 약자'로 대변되던 조선의 민중이겠지.
저녁거리가 없어서 좁쌀이나 감자라도 좀 빌리러 이웃집에 갔더니
이웃집 주인이 '거지는 인격이 없다. 생명도 없다. 너를 도와주는 건 죄다.' 이렇게 말해.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 가장 좌절스러울 때
화자는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만난대. 

정말 쪽팔리는 상황이고 절망적인 상황인데,
역설적이게도 그 좌절스런 상황에서 <님의 존재>를 확인한대.
비록 님은 나와 이별한 존재이고,
그래서 님은 침묵한 존재지만,
님이 거기 계심을 의심하지 않게 된단다. 

2연과 3연은 비슷한 구조야.
집도 없고 그래서 민적(호적)도 당연히 없지.
'민적이 없으니 인권이 없다. 정도를 지킬 것도 없다.'
이렇게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꺼낸단다.
2연에서 이웃집 주인과 같은 존재지.
그에게 항거한 뒤에
격한 분노가 조금 누그러지고 슬픈 마음이 솟구칠 때,
다시 당신을 만나게 돼. 

가장 억울하고 가장 분노하고 가장 슬픈 시점에서,
만나게 되는 당신.
그 당신은 <찬송>에서와 같이,
우리의 슬픔을 모두 보시고,
우리의 아픔 소리를 모두 들으시는, 그분이 아닐까?
하느님이라면 하느님일 것이고,
관세음보살이라면 관세음보살일 것인 당신 말이야. 

마지막 연에 '아아'가 나온다.
님의 침묵 마지막 부분에서도 '아아'가 나오지.
아아~ 하는 비탄과 함게 주제의식이 드러나겠구나...하고 추측해 보자. 

화자가 깨달은 것은 인간의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가진 자,
곧 권력자를 위한 것임을 깨달았대.
우리가 보통 윤리, 도덕, 법률은 약자를 지켜주는 거라고 착각하잖아.
그런데, 이제 보니 모든 있는 체 하는 것들은 모두 <칼과 황금>을 향하여 있다는 거지.
제사 지낼 때 향을 피우고 연기를 내서 대상을 숭배하듯,
모든 <윤리, 도덕, 법률>은 <권력자의 힘>을 향한 숭배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거. 

영원한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데,
화자는 다시 당신을 만난대.
영원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
어쩌면 죽음이란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인간 역사가 이만큼 흘러왔는데,
그 첫페이지에 잉크칠을 해서 다 뭉개버리는 것은
역사에 대한 부정의 의미가 들어있지.
술을 마시는 것은 자포자기와 좌절의 이미지겠고.  

님과 이별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화가가 바라본 님.
그것은 화자를 포근히 감싸안아주는 그런 님이겠지.
님의 안에 있으면 세상의 모든 고통도 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느끼게 되는 그런 것.
힘든 절망적 삶을 극복하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모색하고 추구하는 시라고 보면 되겠다. 

일제 강점기의 시들이 <한>이 맺힌 시들이고,
<나그네>처럼 떠돌아다니는 유랑의 시고,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하는 의심으로 가득한 시들이라면,
한용운의 시들은
역설적으로 힘든 상황 속에서 님의 부재를 통해 님의 존재를 강하게 확인한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나는 힘있는 시들이란다. 

한용운의 시들은 대부분
여리고 여성적인 화자들을 차용하고 있지만,
결코 소극적으로 포기하는 존재가 아니란다.
헝클어진 세상을 똑바로 보는 관점을 통해서
끈질긴 저항의 마음과,
희망의 줄기를 찾아내는 노래를 부르고 있지. 

연애편지를 쓰려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보면 될 정도야.
그렇지만, 그의 시가 가진 힘은 단순한 '사랑 노래'를 뛰어넘는단다.
늘 이별에서 시작하지만, 극복 의지와 희망을 끌어들이거든. 

이런 것이 불교적 희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이란 말이 있잖아.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사실은 금세 사라질 것들임을 잊지 말라는 거야.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이지만,
극복할 수 있음을 힘주어 쓰는 시.
이런 시가 삶의 힘이 되기도 할 거다.
박카스 한 병 마시듯, 시를 통해 한 모금의 힘을 얻어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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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05-24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있을땐 잘 모르다가 없으니 더 절실하고 반드시 계시는,
힘든 상황속에서 님의 부재를 통해 님의 존재를 강하게 확인한다....
희망이란게 그런거죠~ 절망속에서 더 빛나는 존재감 말입니다^^;

글샘 2011-05-25 16:44   좋아요 0 | URL
원래 희망이란 놈은,
어두운 데서 빛나는 속성을 가진 모양입니다.
어두운데... 희망의 상자가 꽉 닫혀있다면... 절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기도 하구요...
 
신공략 중국어 (책 + CD 1장) - 초급편
마전비.소영하.적염 지음, 변형우.강필임 옮김 / 다락원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중국어 기초 뛰어넘기로 좋은 책 - 단어가 많아 도움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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