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문학과지성 시인선 216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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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가르치는 일은 참 웃기다.
아이들은 묻는다.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해요?" 
시는 글자를 읽는 게 아니다.
시는 마음으로 읽는 거다.
근데, 그 마음이, 너희 청소년의 마음은 아닌 거다.
나잇살 제법 먹은 사람의 마음을 상상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이먹다 보면 외로운 일, 쓸쓸한 일,
이제는 바다에 다 와가는 강물처럼,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매일 살고 있는 어른들의 삶을 상상하지는,
차마 마라고 말하지 못하는 일은 외롭다. 

황인숙의 시를 읽는 일은 위로받는 일이다.

나는 아무의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구절초처럼 빛나는 혈통에 대한
간도 쓸개도 없이

멍하니 기가 죽어 살고 있다.

나는 타락했다.
내가 아무의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피의 계율을 잊었기 때문에. (자유로, 전문)

황인숙이 이렇게 멍하니 기가 죽어 사는 글을 쓰고,
제목을 자유로라고 붙인 걸 보면서,
나의 잃어버린 바다에 대한 자유를,
나의 멍하니 기죽은 오늘을 용서받는 것이다.

그래.
어떤 이는 자기의 병을 짊어지고
자기의 가난을 짊어지고, 악행을 짊어지고
자기의 비굴을 짊어지고 꿋꿋이
그렇게, 아무도 따라오지 않을
자기만의 것인 것을
짊어지고, 쌍지팡이 짚고, 거느리고. (독자적인 삶, 전문)

나만의 것인데,
독자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매일 나사 돌리는 단순노동자가 되어,
짊어지고,
짚고,
거느리고 살아간다. 

소설가 김훈이 일찌감치 썼다.
'모든 밥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싯바늘을 함께 삼킨다.'
아, 사는 게 낚이는 거로고.(손철주, 옛그림보면 옛생각난다. 287)

어둠이
푹신하게
깔린다

알아?
네가 있어서

세상에 태어난 게
덜 외롭다. (일요일의 노래, 부분)

고맙다.
반말로 이렇게 툭 던져주는 위로는...
그의 소중한 이,
콤마 하나를 사이에 둔,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에서도
이런 반말이 반갑기 그지없다.

비가온다
네게 말할게 생겨서 기뻐
비가 온다구!

나는 비가 되었어요
나는 빗방울이 되었어요
난 날개 달린 빗방울이 되었어요

나는 신나게 날아가
유리창을 열어둬
네 이마에 부딪힐 거야
네 눈썹에 부딪힐 거야
너를 흠뻑 적실 거야
유리창을 열어둬
비가 온다구!

비가 온다구!
나의 소중한 이여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전문)

나이듦을 속일 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이듦을 티내지 않고 가벼이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진다면,
나잇살깨나 처먹은 주제에...
이런 노탐에 빠지진 않을 것이다.

여기 변변히 젊어본 적 없는 자.
고이 늙지 못하다. (거울들, 부분)

나는 영혼이
나뭇가지를 샅샅이 훑고 다니는
바람이라면 좋겠다. (영혼에 대하여)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두렵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무엇을 보게 되는 것.

어둠 속에서,
가령 어둠보다 더 캄캄한 얼굴을.(어둠 속에서, 부분)

그와 함께 늙고 있어서 위로가 많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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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1-06-08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도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 자유로죠.
저도 자유로를 즐기다가 인천국제공항 가는 길로 갈아탔다가(통행료가 무서워~ㅠ.ㅠ)다시 자유로예요.

직접 한자 한자 적어내려가셨군요.
너를 흡뻑 적실거야...^^

글샘 2011-06-08 18:18   좋아요 0 | URL
오타 찾아 놀리기 대장! 하세요. ㅎㅎ
과속의 여왕이시군요. 스피드 줄이세요.
벌금많이 내야하니까.

2011-06-08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1-06-09 10:36   좋아요 0 | URL
마음의 등불...
어둠 속에서 어둠보다 더 캄캄한 얼굴을 보는 일을 겪으면,
등불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잊게 되는 게 인간이죠.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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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철주가 옛그림을 한 점 보면서,
A4 한 페이지도 안 될 짧은 글을 썼다.
그런데 그 글이 대단한 응집력과 매력을 발산한다. 

마치 물방울이 표면장력을 갖고 있어서 서로 끌어당기고 밀어내듯,
찰랑찰랑 가득한 찻잔에서 넘치지 않는 멋이 그만이다.
가끔 몇 방울 찻잔 밖으로 넘친들 어떠냐. 

옛그림 안에는 옛사람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이 그대로 담겼다.
풍속화로 불리는 삶의 단면도 프레파라트처럼 고정되어있고,
그 시절의 윤리의식도 함께 남아서 보존되어 있다. 

무엇보다 향기를 진하게 풍기는 것은,
그림 속에 담긴 인격인데,
문인화의 전통이 그리는 이의 '뜻'을 담고 있는 걸 중시하다보니,
풍기는 인격의 매운맛, 단맛, 쓴맛이 여간 아니다. 

매운맛은 캡사이신 수용체가 통증과 열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감각이라는 둥의 과학적 서술보다는,
그림 속에 비쳐진 사람들의 멋스런 삶이 현대인의 가슴에 그대로 전해지는 것은,
손철주 글의 장점이자 개성적인 맛이다. 

 

임희지의 난초를 두고 적은 글을 한번 옮긴다. 

   
 

하여도 이 난초, 심하다.
어쩌자고 이리 간드러지고 누구 마음 녹이려고 저리 교태인가.
샐그러진 잎이 바람결에 춤춘다.
여인의 소맷부리처럼 보드랍다.
꽃들은 맞받이에서 끌어안는다.
그리움 타서 옹그린 표정이 애잔한데,
꽃잎에 이슬 맺히면 글썽이는 눈망울을 볼 뻔 했다.
그려놓은 난초라도 마음에 심은 난초다.  

 
   

 

누군가 옛사람이 한국인의 심사를 '은근과 끈기'라고 했던가. 

최북의 <차가운 강 낚시질>을 두고, 유종원의 '강설'을 끌어왔다.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萬徑人蹤滅(만경인종멸)
孤舟蓑笠翁(고주사립옹)
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

산이란 산,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길이란 길, 사람 자취마저 끊겼는데
외로운 배, 삿갓과 도롱이 쓴 늙은이
홀로 낚시질, 차디찬 강에 눈만 내리고 

원시의 운은 절묘하다.
절, 멸, 설이 압운이다.
입밖으로 소리내 보라.
잇소리 '리을'의 뒤끝이 적막강산으로 번진다.
산, 길, 강은 인정머리가 없고,
버림받은 시인의 하소는 메아리가 없다.
회한에 차 낚싯대를 드리운들 세월 말고 무엇이 낚이랴.

 
   

아, 이러하거든,
한시를 버리고 수능에서는 그저 순간적 판단력만 평가한다.
한시를 버리고...
잇소리 '리을'의 뒤끝이 적막강산으로 번지는 저 느낌과
산, 길, 강의 인정머리 없음에 버림받은 시인의 하소가 메아리 없음을
낚대 하나에 던진 고주사립옹...
이걸 가르치지 않고 문화를 어찌 전수하랴. 싶어 아쉽다. 

술이 한 잔 하고 싶어졌던 차에,
술 대신 술에 취한 사람들 이야기와,
꼭 취해야 맛이 아닌 그림에 빠진 사람들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또 늦게 잠이 들었다. 

돈을 주고 사야하는 책은,
바로 이런 책이다.
나무를 깎아 만들어도 아깝잖은 책이,
바로 이런 책이다. 

인간의 문화와 정신의 정수,
인문학적 사고가 가득차, 그야말로 텅빈 충만을 즐길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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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꽃나무 사이에서, 한 동이 술을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친구 없이, 혼자 마시다.




擧杯邀明月(거배요명월)  잔 들어 밝은 달을 맞고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그림자를 마주하니 셋이 친구 되었네




月旣不解飮(월기부해음)  달은 술을 아예 마시지 못하니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그림자만 부질없이 나를 따라 다니네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잠시 달을 친구하고 그림자 거느리고

行樂須及春(항낙수급춘)  즐거움을 누리는 이 일 봄에야 가능하리




我歌月徘徊(아가월배회)  내가 노래하면 달도 따라다니고

我舞影零亂(아무영령난)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덩실덩실 춤을 추도다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깨어서는 함께 서로 기뻐하고

醉后各分散(취후각분산)  취한 뒤에는 각자 나누어 흩어지노라.




永結無情游(영결무정유)  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귐을 영원히 맺어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멀리 은하수에서 만나기를 서로 기약하노라  


  

한 주가 시작되는 아침부터, 
술 생각이 나게 한다.

삶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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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6-07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월요일을 쉬어서 술 생각이 날까요?

사인 12도, 사인 72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먹어요.ㅜㅜ
부산에서 보낸 00님 문자에 차가 필요하면 연락하랬는데, car인지 coffee인지...^^

글샘 2011-06-08 08:44   좋아요 0 | URL
출근했더니 할일은 많고, 하기는 싫고...
그래서 그만 확 한잔 하고 다 잊고 싶은 생각이 들었답니다. ^^
제발 선생은 수업 걱정만 하고 싶어요. ㅠㅜ
무슨 입학사정관제 이딴 거 맨날 대비하는 행사 만드는 데 지쳤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실패한 '자율형 공립고'가 사람잡아요.

사인 12도는 각도가 12도니깐 야트막한 계단이구요.
72도면 경사가 아주 가파른 계단이죠.
이제 알아 먹으시겠어요? 알아먹으시겠으면, 사진 다시 보셈. ㅋㅋ
부산에서 즐거우셨나요? 저도 토욜날 뵙고 싶었지만 면접을 보러 어디 다녀와야해서... ^^
그리고 다섯 분이니 제가 끼어들 자리도 없을 거 같더군요. ^^

꼬마요정 2011-06-07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시였는데.. 기억이 안 나네요. 그 시를 짓고 연못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걸 어디서 봤더라..ㅡ.ㅜ

나와 달과 그림자.. 혼자 마시는 술이 아니라 운치 있는 그림이 되었네요~~^^ 글샘님은 어떤 술을 즐겨 드시는지.. 왠지 막걸리를 좋아하실 것 같아요.

글샘 2011-06-08 08:45   좋아요 0 | URL
저는 저 밑에 있는 사람,
완전히 몸도 못 가누면서도 몽롱한 눈으로 달을 바라보는 저 눈빛이 참 맘에 듭니다.
저는 주류불문, 청탁불문, 남녀불문, 원근불문, 안주불문...이랍니다.^^

세실 2011-06-08 0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마셔야죠^*^ 아쉽다~~~~~~~~~

참으로 쓸쓸하지만 운치있는 글.
달과 그림자를 벗삼아 마시는 술은 괜찮을까????

글샘 2011-06-08 08:47   좋아요 0 | URL
부산까지 오셨는데... ㅋㅋ 자갈치 시장가서 꼼장어에 쐬주 한 잔은 대접했어야 하는데...
그날 초승달이 멋지게 떴었거든요. ^^
하늘에 하나, 바다에 비친 달 하나, 술잔에 빠진 달 하나, 그대 눈 속에 달 하나...
이러고 취하는 것도 멋진 일이죠.
아침부터, 취하는 이야기라니... ㅎㅎ 즐건 하루!!
 
포옹 창비시선 279
정호승 지음 / 창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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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문학이 대세이던 때, 민중문학을 하지 않은 이는 없었다.
그러나 문학에서 이념 논쟁이 소거되면서,
민중문학 하던 이들의 글에서 민중의 퀴퀴한 냄새가 산뜻하게 제거된 사례는 부지기수다. 

여전히 사람들의 삶은 팍팍한데,
절대적 빈곤이 사라진 자리에 상대적 빈곤이 자리를 틀었을 뿐인데,
문학은 그리고 시는 소풍날 보물찾기처럼 성의없게 던져진 <보물쪽지>와 그것 못지않게 성의없이 구입된 <보물>만큼이나 시덥잖게 변한 것 같다. 

문학과 시는 이제 뜨겁지 않고, 그렇다고 냉철하지도 않고,
다소 당황스러운 언사를 만나게 하고,
간혹 황망스러운 상황에 부닥치게 하고,
자주 낯선 어휘들에 곤혹하게 하곤 한다. 

정호승의 시는 말갛게 투명한 유리 구슬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거기 세상이 조그마하게 거꾸로 뒤집힌 채로 들여다보이는 것인데,
그 세상은 바람벽에 달린 박바가지에 유치하게 그려진 그림과 '인내는 쓰고' 류의 못쓴 글씨가 어울린 화면처럼,
익숙하고 또 그만큼 낯설다. 

벽에 박아두었던 못을 뺀다
벽을 빠져나오면서 못이 구부러진다
구부러진 못을 망치로 억지로 펴서
다시 쾅쾅 벽에 못질하던 때가 있었으나
구부러진 못의 병들고 녹슨 가슴을
애써 헝겊으로 닦아 놓는다 (못, 부분)

이어진 부분은 '구부러진 못'에 비유된 구부러진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이가 바라보는 세상이 그런 것 같아 못마땅하게 읽는다. 

작년, 천안함 사태라는 국가 초유의 사기극이 진행될 때,
정호승은 천안함 46 용사(?)들이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이런 도인스런 발언을 하셨다.

적에게 기습 공격을 당해도 물증을 찾아야만 항의할 수 있는 시대에 사는 나는 우울하다. 

기습 공격을 당했다면, 당연히 물증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물증이 없어도 조선일보가 했다면, 인간 어뢰를 믿을 수 있는 시대에 그는 행복했던 모양이다.
하긴, 그 당시 그는 그 신문사 기자였으니.  

사람 사는 일
누구나 마음속에 절 하나 짓는 일
지은 절 하나
다시 허물고 마는 일 (지하철을 탄 비구니)

빌어먹을,
지은 절 하나 다시 허물고 말았으면,
조선일보에 저런 소리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민중문학으로 좀 유명짜 해졌으면,
그게 절 하나 지은 거라면,
지은 절 하나 다시 허물고 닥치고 있을 노릇 아닌가 말이다. 

한여름에 겨울 점퍼를 입은 노숙자 한 사람이 빗속에 쓰러진다
나는 젖은 돌멩이로 떡을 만들어 그에게 주고
흙으로 막걸리는 빚어 나눠 마시고
신나게 꼬리를 흔들다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에게 말한다
부디 다시는 태어나지 말라고
태어나지 않은 날이야말로 내 생일이라고 (생일, 부분) 

김지하가 1991년 '젊은 벗들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외쳤던 그 정론지도 역시 그 신문이었다.
왜 있잖은가.
선거철 되면 기자들이 모두 신춘 문예라도 나갈 듯, 소설 쓰기 잘 하는 그 유명한 신문. ㅋ 
김지하도 젊은 벗들이 나날이 분신에 투신에 비분강개할 때 너무도 아쉬워서 한마디 거든 거지만,
그 뒤에 북한의 사주가 있다는 모 대학 총장님의 말씀도 가소롭기 그지없었지만,
김지하가 새로운 <생명> 사상을 들고 나왔을 때, 역시나 누구도 개새끼를 쳐다보지 않았듯,
이 사람도 왠지 새로운 <도사>가 되어 <오병이어의 신이한 기적>이라도 일으킬 태세다. 참 위인 나셨다. 
그런데, 스스로 개새끼가 되어,
생일날 태어나지 않았으면 부끄러워하는 걸 보니, 좀 도사가 된 건가? 

젊을 때는 산을 바라보고 나이가 들면 사막을 바라보라
더이상 슬픈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과거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웃으면서 걸어가라
인생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오늘을 어머니를 땅에 묻은 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첫아기에게 첫젖을 물린 날이라고 생각하라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분노하지 말고
나에게도 이런 날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침밥을 준비하라
어떤 이의 운명 앞에서는 신도 어안이 벙벙해질 때가 있다
내가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잔이 있으면 내가 마셔라
꽃의 향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듯
바람이 나와 함께 잠들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일에 감사하는 일일 뿐
내가 누구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 되어야 한다
오늘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무엇을 이루려고 뛰어가지 마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지 말고 가끔 저녁에 술이나 한잔해라
산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을 내려와야 하고
사막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깊은 우물이 되어야 한다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전문)

역시 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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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락 창비시선 295
정끝별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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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차근차근 조근조근 오손도손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는다.
울컥 솟구치는 시간도 있고,
와락 달려드는 사건도 있고,
왈칵 눈물나게 만드는 일도 있고,
문득 초승달이 뜨면 가던 걸음 멈추게 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얼마전, 양철댁 님의 페이퍼에서 정끝별의 '설렁탕과 로맨스'를 만났는데
시가 시같지 않고 판타지 연애소설 같아서 좋았다.
시 속에서 만나는 판타지는 황홀하다.
뭐, 꼭 의미를 찾아서 세상을 사는 건 아니잖은가?
이런 메시지를 그저, 툭,
모래내란 동네 이름처럼 주머니 뒤지다 모래알 몇 개 툭, 떨구듯 시를 만나 시를 읽는다. 

남자의 직업은 배우였어 한때 잘나갔던 연기파 배우였지 그러던 어느날 남자가 희박해지기 시작했어 처음에 카메라맨은 렌즈가 더러워졌다고 생각했어 렌즈를 닦고 닦았지만 남자는 점점 흐릿해져갔어 그제서야 카메라맨은 그 남자가 희미해져가고 있다는 걸 눈치챘어 "자네는 요즘, 초점을 잃어가고 있어" 감독도 자기 눈을 의심했어 하지만 금세 사태를 파악했어 "이보게, 자넨 휴식이 필요해, 자네가 선명해질 수 있는지 지켜보자구" 애인도 자꾸만 혼잣말을 시작했어. "어쩌나 당신, 텅텅 비었네" 더욱 희미해진 남자는 집으로 퇴각했어 집에서도 문제는 나아지지 않았어 아내는 짜증스럽게 투정했어 "인기척 좀 하세요, 깜짝 놀랐잖아요" 아이들도 놀라서 외쳤어 "아빠, 온통 바랬잖아!"
누구와도 대화해본 적 없던 남자
제 목소리를 내본 적 없던 남자
한번도 제 안을 들여다본 적 없던 남자
이 가엾은 영화 속 주인공이 혹시......(희미해지는 병에 걸린 남자) 

남자의 양복 주머니를 뒤지다가 문득 만난 조약돌 하나는 서글프다.
그 조약돌은 처음엔 단단했지만 금세 희미해지고 흐릿해지면서 존재감이 없어져 모래알이 떨어지듯 무의미해진다.
모래내라는 그 동네 이름처럼... 

반 평도 채 못되는 네 살갗
차라리 빨려들고만 싶던
막막한 나락 

영혼에 푸른 불꽃을 불어 넣던
불후의 입술
천번을 내리치던 이 생의 벼락 

헐거워지는 너의 팔 안에서
너로 가득 찬 나는 텅 빈, 

허공을 키질하는
바야흐로 바람 한자락 (와락)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내린 시를 만나는 일은 황홀하다.
사랑은 그렇게 와락 달려드는 것인데도,
닿으려 할수록 닿을 수 없는 <막막한 나락>이고,
영혼이라도 닿을 듯 내리치던 <이 생의 벼락>이고,
안으려 할수록 텅 비어버리는 <바람 한 자락>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갈수록 허전한 <와락> 달려들었던 한 순간만을 남기고 희미해져 가는... 

부사들의 존재론이란 권혁웅의 글맛도 글맛이지만, 

세상 참, 떼꾼한 크리스마스 또 돌아왔네 (크리스마스 또 돌아왔네, 부분) 

역시 해설은 해설일 뿐,
이 철없는 세상 살이를
<떼꾼한> 한 마디로 정리해버린 정끝별의 언어 사용 역시 '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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