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ㅣ 창비시선 333
도종환 지음 / 창비 / 2011년 7월
평점 :
난 14시 또는 14:00시라는 표현을 싫어했다.
왠지 어려서부터 그런 표현은 익숙해지지 않았고,
오후 2시, 이런 표현보다는 '새로 두 시'가 그 시각에 마츰한 어휘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공문서를 작성할 때에는 나도 14시 같은 말을 쓰긴 하지만...
나와 띠동갑인 도종환 시인이 지금의 좌표를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라고 한 시를 읽고는,
나는 어디쯤 살고 있는지를 헤아려 보았다.
계절로 친다면 한창 한여름이어서 뙤약볕이 내리쬐이는 삼복더위를 살고 있는 거 같고,
시간으로 친다면 '새로 두 시'쯤, 그 어간을 지나고 있는 거 같단 생각을 해 본다.
쓸쓸해지면 마음이 선해진다는 걸
나도 알고 가을도 알고 있었다
늦은 가을 오후 (가을 오후, 부분)
이런 가을에 대한 구절이 눈에 띈다.
안도현 시 중에 이런 시가 있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絶交다! (안도현, 무식한 놈)
가을 하면 생각하게 되는 꽃이 들국화다.
들국화에도 몇 종류가 있는데, 그게 쑥부쟁이와 구절초 같은 이름이다.
뭐, 그걸 구별하지 못한다고 절교까지야 심하지마는,
한번 잘 익혀두면 오래 잊히지 않는다.

쑥부쟁이는 '쑥을 캐러 다니는 불쟁이(대장장이)의 딸'에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불쟁이의 딸이 죽어 그 위에 돋아난 풀을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특히 춘궁기 때 나물로 활용할 수 있어 배고픈 사람에게 있어 좋은 먹을거리가 되기도했다고 한다.
쑥부쟁이의 특징은 꽃대 하나에 여러 개의 꽃이 가지마다 피는 것이란다.
보라빛의 색깔로 논두렁이나 밭두렁 등지 같은 사람과 가까운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잎새가 가느다라한 것이 쑥부쟁이 딸년처럼 가녀리게 생겼다.
그런가 하면, 구절초로 불리는 이넘은 꽃잎이 통통하다.
풍성해 보이지만 꽃대 하나에 하얀 꽃 한송이만 핀단다.
여름에는 마디가 5마디이지만 가을이 되면 마디가 모두 아홉마디가 된다고 하여 구절초라고 부른다고 한다.
헷갈리면, 이렇게 섞어 놓고 다음 들국화 중,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시오~ 하는 문제라도 내 보면 쉽다.
요거는 꽃대 하나에 여럿이 붙었으니 '쑥부쟁이'인데, 색깔은 하얗다.
이건 잎뒷면이 까실까실하다고 하여 '까실 쑥부쟁이'라고 이름붙였다.
꽃이 조밀하고 풍성하고 또한 작은게 특징
오늘도 막차처럼 돌아온다...
오늘도 많이 덜컹거렸다
급제동을 걸어 충돌을 피한 골목도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넘어온 시간도 있었다
그 하루치의 아슬아슬함 위로
초가을 바람이 분다 (막차, 부분)
역시 그이의 시에서 초가을 바람이 선선하게 분다.
쑥부쟁이 생각이 물씬 나는 구절이다.
초가을에서 깊은 가을로 돌아오는 길
옹송그리며 서 있는 과꽃 몇 송이가 보인다
이파리 몇 개는 벌레 먹고 군데군데 구멍이 났는데도
자줏빛 꽃 곱게 피우고 있는 게 예쁘다 (발치, 부분)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풍경을 견딜 수 있었을까
특별하지 않은 세월을 특별히 사랑하지 않았다면
저렇게 많은 들꽃 중에 한 송이 꽃일 뿐인
너를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풍경, 부분)
초가을에서 깊은 가을로 접어드는 무렵을 살고 있는 시인은,
많이 앓았다.
특히 이를 앓는 것은 몸의 기력이 쇠해지는 시작이다.
그 지나온 세월 속에서 들꽃을 생각하는 시인.
기억나는 들꽃이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리라.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아련한 향기가 스미어 있다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살구꽃 위에 내린
맑고 환한 빛이 들어 있다...
은은한 것들 아래서는 짐승도 순한 얼굴로 돌아온다
봄에 피는 꽃 중에는 은은한 꽃들이 많다
은은함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꽃길을 따라
우리의 남은 생도 그런 빛깔로 흘러갈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이의 손 잡고 은은하게 물들어 갈 수 있다면 (은은함에 대하여, 부분)
초록은 연두가 얼마나 예쁠까?
모든 새끼들이 예쁜 크기와 보드라운 솜털과
동그란 머리와 반짝이는 눈
쉼 없이 재잘대는 부리를 지니고 있듯
갓 태어난 연두들도 그런 것을 지니고 있다
연두는 초록의 어린 새끼
어린 새끼들이 부리를 하늘로 향한 채
일제히 재잘거리는 소란스러움으로 출렁이는 숲을
초록은 눈 떼지 못하고 내려다본다 (연두, 전문)
가을이 짙어가는 나이에,
봄의 은은한 꽃들, 또는 연두의 어린 빛이 얼마나 이쁠까?
그러나 그의 삶의 처절하였음을,
그 성실하게 투쟁하였음을 보여주는 시는 역시 '해인으로 가는 길' 시집의 <밀물>이다.
모순투성이의 날들이 내게 오지 않았다면
내 삶은 심심하였으리
그물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지 않았다면
내 젊은 날은 개울 옆을 지날 때처럼
밋밋하였으리 무료하였으리
갯바닥 다 드러나도록 모조리 빼앗기고 나면
안간힘 다해 당기고 끌어와
다시 출렁이게 하는 날들이 없었다면
내 영혼은 늪처럼 서서히 부패해 갔으리
고마운 모순의 날들이여
싸움과 번뇌의 시간이여 (밀물, 전문)
그에게 '모순투성이'의 날들과 '몸부림치던' 날들은 아름다운 추억처럼 쓰이지만,
쓰라린 삶만이 이렇게 쓰여질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열두 시에서 새로 두 시까지를 처절하게 살았던 시인의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를 읽는 일은
나의 옛날과 미래를 함께 바라보는 일이었고,
지금의 나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일이었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파워북로거 지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