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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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적힌 이 글자를 골똘히 들여다본다.
그러다 보면, 숲 사이로




이 슬그머니 걸어나온다.
술이라도 한 잔 걸친 듯,
조금은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다. 

그 걸음걸이를 바라보면서,
김훈은 기록을 시작한다.
그런데 늘상 그렇듯, 김훈의 걸음걸이에 대한 묘사는,
스틸컷으로 정지영상처럼 기록될 뿐이다.
보통 소설이라는 장치가 담는 서사는 수많은 스틸컷들이 모인 동영상처럼 착각하도록 엮는 도구이거늘,
김훈은 그 동영상의 길이를 길게 만들지 않는다. 

수많은 스틸컷들이 착시를 일으켜 마치 동영상의 착시를 만드는 작업 대신,
그는 수많은 스틸컷들을 모으고 모아서 무덤 하나를 이룬다.
그 무덤이 하나의 인생이라면,
그 무덤들의 모임은 숲이 되려나?
저 글자처럼 말이다. 

소설속의 사람들은 무던한 결핍을 끌어 안고 있다.
그 결핍은 대부분 '관계'에 대한 결핍이다.
혼자 있을 땐 온전한 한 장의 스틸컷인 것 같지만,
몇 장의 관계가 어긋날 때, 아버지는 감옥엘 가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꿈 속에서 좆내논으로 찾아오고, 떠나간다. 

수목원의 세밀화가인 주인공,
안실장과 자폐인 그의 아들,
김중위와 얽혀드는 유골 발굴 기록화 작업,
그리고 목매달고 죽은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옥영'의 그림자.
그들은 '사람'과 '사람'이 닳고 닳아 사랑을 만든다는 논리를 따르지 못하고,
그저 낯설게 서있을 따름이다.

 

김훈의 눈길은 세상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그의 눈길이 머무는 곳은 언어의 켜들 사이이기도 한데, 

   
  돌이켜본다는 말은 돌이켜 보인다라고 써야 옳겠다.
보여야 보이는 것이고 본다고 해서 보이는 것도 아닐 터이다.
돈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돈이 다 떨어지고 나면 겨우 보이는 수가 있다.
돈이 떨어져야 보이게 되는 돈의 실체는 사실상 돈이 아닌 것이어서,
돈은 명료하면서도 난해하다.
돈은 아마도 기호이면서 실체인 것 같은데,
돈이 떨어져야만 그 명료성과 난해성을 동시에 알 수가 있다.
구매력이 주는 위안은 생리적인 것이어서
자각증세가 없는데,
그 증세가 빠져나갈 때는 자각증세가 있다.
그래서 그 증세를 느낄 때가 자각인지, 느끼지 못할 때가 자각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돈이 떨어져봐야 이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을 것이다.(47) 
 
   

언어란 것이 원래 '사물'과 '개념'과 '언어'를 잇닿게 하는 삼각형을 틀로 오가는 것이어서
그 켜켜를 관찰하는 일은 철학에 가깝게 마련이다. 

그의 소설이 이야기로 마구 달리지 못하고, 머뭇머뭇 철학적 심상을 머물게 되는 것은,
그의 관찰이 이야기 사이에서 자주 멈추기 때문일 것이다. 

   
  검은색을 이끌고 흰색으로 가는 어느 여정에서 내가 작약 꽃잎 색깔의 언저리에 닿을 수는 있을 테지만,
기름진 꽃잎이 열리면서 바로 떨어져 버리는 그 동시성,
말하자면 절정 안에 이미 추락을 간직하고 있는 그 마주당기는 무게의 균형과 그 운동태의 긴장을 데생으로 표현하는 일이 가능할 것인지를 머뭇거리는 동안에...(143) 
 
   

그래서 이렇듯 묘사하는 구절이 나오면 그의 절창이 시작된다.
그의 '자전거 여행'에서 감동적이었던 부분들이 이런 묘사였음을 나는 기억한다.
묘사에서 뛰어난 그가 왜 서사로 눈을 돌리는가.
그것이 '밥벌이의 구차함'이라면 또 덧붙일 말은 없다. 

   
 

본다고 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본다봐 보인다 사이가 그렇게 머니까
본다와 그린다 사이는 또 얼마나 아득할 것인가를,
그 아이의 뒤통수 가마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이가 자라고 여자가 늙는 것은 닥쳐오는 시간 앞에서 쩔쩔매는 난감한 사태일 터인데,
그림을 그려서 그 난감한 것들을 종이 위에 붙잡아 놓을 수는 없는 것이라고,
그 어린아이의 가마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린다는 말은 만진다는 말이나 품는다는 말과는 대척점에 있는 반대말이었지만,
그 두 개의 국면이 반대되는 대척점에서 서로 그리워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말일 수도 있다고...(187)

 
   

김훈이 주인공 여자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돌아보면서,
사람들에게서 뚝, 떨어진 마치 수목원같은 곳에서,
동물적이기보다는 식물적인 삶을 살아온 자신을,
어쩌면, 굵직굵직한 사건 위주의 삶이기 보다도,
세밀화처럼 자잔한 것들의 묘사에 치중했던 삶이었음을
그리려고 하지만, 그릴 수 없음을,
돌아보고 싶었으나, 그 거리가 주는 막막함에 눈물 핑 도는 고백이 아니었는지... 

소대장이 겨울에 북쪽에서 건너오는 다듬잇방망이 소리를 듣고 눈물이 났다는 대목이 있다. 

   
  인기척이기 때문일 거예요.
눈보라나 대포 소리와는 다르니까요. 그 안에 사람을 부르는 신호가 들어 있잖아요.(235) 
 
   

인기척을 듣고,
관계가 그리워,
관계가 끊어진 곳에서 흘리는 뜨끈한 눈물,
사람을 부르는 신호...

역시 그의 문장은 묘사적이고, 식물적이다.
그는 신우를 통해서 '나물'에 집착하고,
죽어가는 병사를 통해서 '상추'에 집착하는 동물성에 주목한다.
개미들과 바삭 마른 뼛조각들을 소재로 등장시키는 작가는
결국 가장 섬유질로 묘사된 숲 해설사 이나모를 만나게 한다.
이름 자체가 나모인 그는 숲을,
곧 인생을 해설하는 동시에 삶이 곧 죽음이라는 사설로 인도한다. 

   
  나무줄기의 중심부는 죽어 있는데,
그 죽은 뼈대로 나무를 버티어주고 나이테의 바깥층에서 새로운 생명이 돋아난다.
그래서 나무는 젊어지는 동시에 늙어지고,
죽는 동시에 살아 난다.
나무의 삶과 나무의 죽음은 구분되지 않는다.
나무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르다.
내용이 다르고 진행 방향이 다르고 작용이 다르다.(215)
 
   

이런 소설이라니... ㅎㅎ   

베스트셀러 작가를 나는 가능한한 빨리 찾아 읽으려 하는 편이다.
학생들에게 소개할 목적도 있고, 학생들의 독서평을 평하기도 해야 해서인데,
유난히 나는 김훈과 한비야의 글을 마뜩찮아 하는 편이다.
그들의 글은 나온 지 몇년이 지나고서야 겨우 읽게 된다.
어딘가에서도 썼듯, 한비야의 글맛은 수다스러워 읽는 데 장애를 주고,
김훈의 글맛은 섬유질로 가득한 것 같아 마음결에 자꾸 껄끄럽게 걸린다. 

   
  수목원 구내식당에는 늘 나물과 버섯 반찬이 나왔다.
영농 출입허가를 가진 농민들이 캐오는 나물이었다.
봄부터 늦여름까지, 절기에 따라서 다른 나물이 나왔고
가을에는 말린 나물을 데치고 무쳐서 내놓았다.
수목원에 온 뒤로 온갖 나물을 다 먹었다.
나물은 쓴맛을 기초로해서 그 위에 풀 나무들의 제가끔의 향기와 섬유질의 질감을 입안으로 펼쳐주었다.
나물에는 식물 종의 운명이 각인되어 있었고,
그 운명이 맛의 관능으로 살아 있었다.
들여다보고 그림으로 그려서 대상을 파악하는 것보다
씹고 삼켜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본질적이라는 것을 수목원 구내식당의 나물을 먹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 본질의 맛과 질감을 나는 그리고 싶었다.
나물을 말리면, 그 맛과 향기의 풋기가 빠진다.
말린 나물은 맛과 향기의 뼈대만을 추려서 가지런해지고 맛의 뼈를 오래 갈무리해서 깊어진다.
데치거나 김을 올리면 말린 나물은 감추었던 맛과 냄새와 질감의 뼈대를 드러내는데
그 맛은 오래 산노인과 친화력이 있을 듯 싶었다.(273) 
 
   

내가 찾은 절창은 그의 나물론이다. 

그 뒤에 화석이 되어 발견된 뼛조각과 사병의 편지글이 대조적인데,
화석화된 전투의 바람결에서도 '살고 싶어요' 이상의 생명에 대한 천착이 강하게 느껴진다. 

   
  식순에 따라서 사회를 맡은 장교가 죽은 박창수의 편지를 낭독했다.
사병이 노파의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낭독을 복창했다.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어요.' 라는 대목에서 노파는 울었다.
- 그래, 맞다 맞아. 오래비가 상치럴 좋아했지러.
  아 대가리 만큼 싸가 볼때기가 미지도록 묵었제. 밥떡꺼릴 질질 흘리미... 아이고 맞지럴, 맞제
  죽을 때도 그게 묵고 싶었던 기라. 상치, 상치야, 상치 아이가...
박창수 병장의 유골을 국립묘지에 묻자고 하자,
- 뭐라꼬, 거 와가노? 거게 가문 삭신이 편하나? 죽으마 고마 노이야제. 집 뒤께 상치 밭 여불때가 좋은 자리 안 있나.
  하기사 젤 좋으 자리는 죽은 자리에 고마 놔두는 긴데... 
 
   

 

서어나무는 자작나무의 일종으로 단풍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김훈의 애정이 가득 담긴 나무인 듯 하여,
그렇게 탐스럽게 늙어가고 싶은 마음을 담아 몇 장 찾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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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의 비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추지나 옮김 / 북스피어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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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하도랑 지하가(지하상가 같은)는 느낌이 다르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지하가라는 말을 쓰지 않으니 지하도로 번역한 모양이다. 

이 책에선 일곱 가지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작가의 상상력은 다양하게 번져나간다. 

결혼을 의미하는 청실홍실처럼 죽음을 의미하는 검은실도 있지 않을까?
그 검은실을 전해주는 사람과의 조우는 어떤 느낌일까? 

또, 세상은 너무나도 많은 잡음, 소음으로 가득하다.
듣기 싫어도 도시 생활은 그 소음과의 전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며 일해야하는 직장에선 더하다.
이 소음을 한방에 잡는 방법은 없을까, 또는 그 방법의 부작용은 없을까?
이러다가 쓰게되는 소설도 있다.  

지하상가에서 일하다보면, 밖에서 비오는 줄도 모르고 활동한다.
그런 공간으론 백화점이나 할인매장도 있다.
그러다가, 손님들이 비에 젖은 우산을 들고 다니는 걸 보고서야, 아 밖에는 비가 오는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삶에서 그런 일들이 흔하다.
남들로 하여금 자신의 몽매함을 깨닫게 되는 일도 많고 말이다.
자기가 사는 곳, 만나는 사람만을 보고 갑갑해 할 일은 아닌 것이다. 

일가족이 차량에 탑승한 채 물에 빠져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마도 미미 여사가 뉴스를 시청하다 유사한 사건을 들었을 거다.
미미 여사의 상상력은 번져나간다.
운전자 가장의 인간관계, 엄마나 아이들의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서
모두들 그들의 죽음을 추측할 뿐,
진실을 모른다면, 입을 닫아야 할 노릇인지... 

미미 여사의 이 단편집을 읽는 일은,
스도쿠를 몇 편 푸는 일보다 흥미롭고,
다른그림찾기를 찾아보는 일보다 유쾌하다.
두뇌의 회전에는 역시 미스터리가 최고다. 

열쇠 구멍이 빡빡할 때는 WD-40을 뿌리면 되지만,
머릿속이 빡빡한 날은 이런 미스터리를 읽으면 된다.
베르나라베르베르처럼 두뇌의 체조를 도와주는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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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1-09-30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제작 <지하도의 비>는 상당히 달콤하더군요.-__-;;;;
 

아이들 곁에서 같이 가르치고 배운 것이 꽤 오래 되었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20년 남짓 한국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이 많이 변했음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89년에 발령받아 가르쳤던 아이들은, 어찌 보면 애어른들 이었다.
시대가 하수상하니 담배피우는 아이들 지도하다가 고발도 당해보고,
자동차 와이퍼가 부러지는 테러도 당해보고,
요즘엔 상담할 시간도 없이 학교를 안 나오다가 전학을 가거나 자퇴를 하는 아이들도 드물지 않게 만난다. 

자기 주장이 강해진 것이라 생각하면 긍정적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을 너무 오냐오냐 길러서 자기밖에 모르는 멍충이로 만드는 세상이 아닌가 싶어 안타깝기도 하다. 

그냥, 컬링. 

제목이 뭐 이래?
컬링이란 시시한 스포츠(?)에 대한 시시한 이야기다.
보통 스포츠 정신이라고 하면, 치열한 육체와 정신의 투쟁을 떠올리게 되고, 그것이 불변의 공식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컬링에 입문하게 된 아이들은,
야구부에서 도태된 아이들과, 어쩌다 컬링 동아리에 들었다가 해체를 맞게된 아이들.
그리고 인원이 부족하다보니 그냥, 인간이라서 들어오게 된 '으라차'까지... 

동계 올림픽을 유치는 해 놓았는데,
이건 뭐, 86,88 아시안 게임, 올림픽이나, 2002 월드컵처럼 흥미로운 게임도 아니고,
온갖 처음 듣는 스포츠들로 가득하고 한국은 선수도 없는 종목들로 가득한 올림픽을 어떡할지 고민일 듯 싶은데,
이 소설이 적고 있듯, 다양한 동아리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면, 한편으로 다행이다. 

동계 올림픽에서는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 요즘엔 김연아 덕에 피겨 정도가 관람종목이다. 
영화 덕에 스키점프도 조금 재미가 있지만, 컬링이란 종목은 아무리 봐도,
스포츠라고 하기엔 20% 이상 부족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나름의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종목이며,
스피리트! 는 훌륭한 종목이고,
팀워크와 인간의 평정심을 시험케 하는 훌륭한 종목일 수 있음도 이 소설에선 끼워넣고 있어 양념맛이 좋다. 

청소년들의 좌충우돌 이야기는 늘 불안하지만, 또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을 이해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다.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집단에 대하여 피해를 입는 주인공들이 안쓰럽고 답답하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우정과 결의를 다지면서 성장해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든든하다. 

강산처럼 덩치도 있고, 멸치처럼 촐싹거리지만 늘 곁에 있어주는 친구도 있고,
좌절하는 꿈나무 여동생도 있는 청소년 소설. 

과연 왜 공부하고 왜 대학을 가야할지, 고민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이 소설은 답을 던진다. 

그냥, 하는 거라고.
인생은 늘 정확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만은 아니라고.
그냥, 하다보면, 거기서 목표도 생기고, 삶의 의미도 배울 수 있는 거라고... 

이 책을 읽노라면, 아이들의 간단 명료하면서 시크한 말투가 그대로 느껴져서 즐겁다.
주제도 한 방향으로 몰아가지 않는 것이 청소년들에게 인기있을 법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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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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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고 리뷰를 쓰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시집을 읽던 중, 팍~하고 삘이 오는 작품을 몇 편 베껴 쓰고 몇 마디 덧붙이는 걸로 리뷰를 대신하는데,
심보선의 시집은 도무지 팍, 하고 오는 게 없다.  

그래서 지난 번 그의 시집 리뷰에서도 뒤표지의 글을 옮긴 것이었는데,
이번에도 아무래도 그래야 할까부다. 

시를 쓰게 된 이래 줄곧,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사건의 주범이 된 느낌이다.
"나는 거기 없었다"라고 강변할 때,
애초부터 '거기'가 없는 기이한 알리바이.
긍정으로 회귀하지 않는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시.
그러므로 나는 텍스트로서의 시에 대해선 짐짓 초연하다.
오직 시를 쓴다는 육체적 행위 속에서만 시는 나를 지배하고 나는 시를 경배한다.
그렇지 않을 때 나는 차라리 시에 대해 험담하고 조롱하고 모반을 꿈꾸는 불경한 이교도이다.
그러나 노예라는 신분의 그 이교도는 간혹 불안에 떨며
아무도 없는 고요한 평일의 성전으로 숨어든다.
거기서 남몰래 마음을 바쳐 기도를 올릴 때, 그는 치유되고 고양된다.
유일무이해지는 동시에 비밀이 되는 것.
이것이 비천한 자에게는 가장 바람직한 일 아니겠는가.

스스로의 시를 규정하지 못하고,
부정의 부정으로 드러냈다.
그의 시는 유일무이하면서 비밀, 이란다.
휴~ 그가 스스로 비밀, 이라고 했으니, 내가 좀 못알아 먹어도 패쓰~겠다. ^^ 

그는 시를 쓴다는 육체적 행위 속에서 행복하다.
자신있게 시를 쓰지 못하지만,
간혹 불안에 떨며 숨어들어 남몰래 마음바쳐 시를 쓴다.
시를 통하여 그는 치유되고 고양된다.
그의 기도를 내가 엿듣는다고 한들, 그의 기도지, 내 기도가 아니니 내가 못알아 먹어도, 굿~이다. ㅎㅎ 

그래서 그의 시어는 '고정'되지 못하고 '정착'하지 못한다.
그의 언어는 떠다닌다고 말한다. 

말들은 떠다닌다, 거리 사이로, 건물 사이로, 다리 사이로..
스트레스는 디오니소스나 제우스 같은 스, 자 돌림 신의 반열에 올랐다...
김밥을 말았는데, 불끈, 분노 때문에 주먹밥이 된다.
말들은 떠다닌다, 모든 틈새로, 간극으로, 미끄러지듯, 유영하며, 떠다니는 말꼬리나 붙잡고, 나는 사람들 앞에서 자주 운다.
오랜 세월 간직한 일기장을 털면, 책장 사이에서 빠져 나온, 무수하고 미세하고 사소한 말들이, 허공에 두둥실, 두리둥실, 구원 없는 아름다움 앞에서 나는 오늘도, 속절없이, 아프다 (떠다니는 말, 부분) 

그의 마음이 말들을 통하여 표현되지 못하고,
김밥이 불끈, 분노 때문에 주먹밥이 되고 말듯,
무수히 미세한, 사소한 말들이 유영하고 떠다니며 미끄러지다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것 같아,
하냥 슬퍼서 속절없이, 그는 아프다. 

거미란 가수가 이런 노래를 했다. 

이별은 항상 사랑 뒤를 따라와, 떠날 땐 사랑까지 데려가... 

간절히 바라는 바는, 언제나 부재.
표현하고자 하는 의욕은 늘 부족과 부재와 통증을 유발하는 모양이다. 

사회학 박사라는 그가 

노선을 잃었다
버스 노선과 정치적 노선
둘 다(미망 버스) 

이런 시를 끄적거릴 때,
이 시가 3년 전의 것이니 희망 버스의 패러디일 리는 없고,
독자들 또한 노선을 잃고 허망한 하늘말 바라볼 것인데, 

명확하지 않아 오히려 인간적인 그의 시를 읽으면서,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 떠올랐는데,
신은 죽었다던 니체를 생각나게 하는 그의 시가 있다. 

오래된 습관을 반복하듯 나는 창밖의 어둠을 응시한다, 그대는 묻는다, 왜 어둠을 그리도 오래 바라보냐고, 나는 답한다, 그것이 어둠인 줄 몰랐다고, 그대는 다시 묻는다, 이제 어둠인 줄 알았는데 왜 계속 바라보냐고, 나는 다시 답한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그대는 내 어깨 너머의 어둠을 응시하며 말한다, 아니요, 당신은 멀쩡히 깨어 있어요, 너무 오랜 고독이 당신의 얼굴 위에 꿈꾸는 표정을 조각해놓았을 뿐

이 밤에 열에 하나는 어디론가 떠나고 열에 하나는 무척 외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열에 하나는 흐느껴 울기도 한다, 이 밤에 그대와 내가 이별할 확률(=0.1x0.1x0.1)을 떠올리면 내 얼굴은 저 높이 까마득한 어둠 속 백동전으로 박힌 달 표면처럼 창백해진다, 나는 다만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시간의 완곡한 안쪽에 웅크리고 누워 잠들고 싶은데, 지금 나는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잊고 번민으로 오로지 번민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모든 병든 개와 모든 풋내기가 그러하듯 나는 운명 앞에서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대를 오랫동안 품에 안았으나 내 심장은 환희를 거절하고 우울한 예감만을 가슴 복판에 맹렬히 망치질 하였다, 우연이란 운명이 아주 잠깐 망설이는 순간 같은 것, 그 순간에 그대와 나는 또 다른 운명으로 만났다, 그러나 운명과 우연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다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지금 서로의 목전에서 모래알처럼 산지사방 흩어지고 있는데

그대에게서 밤안개의 비린 향이 난다, 그대의 시선이 내 어깨 너머 어둠 속 내륙의 습지를 돌아와 내 눈동자에 이르나 보다, 그대는 말한다, 당신은 첫 페이지부터 파본인 가여운 책 한 권 같군요, 나는 수치심에 젖어 눈을 감는다, 그리고 묻는다, 여기 모든 것에 대한 거짓말과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진실이 있다, 둘 중 어느 것이 덜 슬프겠는가, 어느 것이 먼 훗날 불멸의 침대 위에 놓이겠는가, 확률은 반반이다, 확률이란 비극의 신분을 감춘 숫자들로 이루어진 어두운 계산법이 아닌가

눈을 떴을 때 그대는 떠났는가, 떠나고 없는 그대여, 나는 다시 오랜 습관을 반복하듯 그대의 부재로 한층 깊어진 눈앞의 어둠을 응시한다, 순서대로라면, 흐느껴 울 차례이리라(확률적인, 너무나 확률적인)

그대는 떠나고 없다. 임의 침묵, 임의 부재.
그 어둠을 응시하면, 순서대로라면, 확률적으로다가, 흐느껴 울 차례이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순서대로라면...이고, 확률적으로라면...이므로, 화자는 울지 않는다. 

그에게 확률, 이란 어둑한, 어리석은 계산법이다.
우연과 운명,
순간과 영원,
여기와 우주,
모래알과 무한, 
이 반대편에 있어보이는 것들 역시,
밤안개를 타고,
또는 뫼비우스의 띠를 타고,
내륙의 습지를 돌아와  스리슬쩍 담을 타넘을 수도 있는 것을...
비극의 신분을 감춘, 숫자들로 이루어진 어두운 계산법.
비극을 잉태하기 위해 억지로 떠맡겨진 슬픔의 계산법, 확률. 

인생이란 늘 반반의 확률을 타고 넘어와 슬픔에 흐느낄 차례인 것처럼 강요하는 일인지, 그는 따져보는데,
뭐, 그도 사회학 박사라 그런지, 그이 확률론은 정답이 생략되어 있다.  

사회학에서 통계학과 데이터의 처리를 흔히 하던 그의 습관적 용어가 콕, 드러난 시가 있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는 언표를 읽으면, 십오 초의 여집합이 읽힌다. 

십오 초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적 공간은, 슬픔으로 가득한 것이라는 표현을 사회학자는 이렇게 읽어 주나보다.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은 화자의 소망은, 난망이다.
늙는 일은 초 단위로 조용히, 일어나지 않고, 질병과 죽음을 친구삼아 시끌벅적, 좌충우돌, 정신없이 일어나리라.
그렇게 비가 새듯, 찔꺽거리는 신발을 신은 듯한 것이 늙어감, 이리라.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게 운명이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이 인간이니 말이다. 

과거가 떨어지고, 미래도 떨어질 과거에 불과하고,
현재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의 십 음절 사이, 어느 지점에 있는 것. 

아,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다 지나가 버렸다.
놀부가 그나마 살만 하다고 선택해 들어간 지옥의 똥간에서 '십초 휴식 끝, 십년간 잠수 시작!'이란 외침을 듣듯,
슬픔 없이 십오 초, 지나갔으니,
남은 삼백 예순 날, 하냥 슬프게 울고 있어야 하는 게 삶인 것일지...

그의 시를 한 마디로 말하면, '침묵'이다.
그러니,ㅡㅡㅡ 내가 읽을수록 모르겠을 수밖에... ㅎㅎㅎ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결단코 침묵이다(구름과 안개의 곡예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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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9-29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꼼꼼히 읽어내시고는 모르겠다고 하시면 저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하나요ㅠㅠ 잘 봤습니다. 신춘문예 당선작이 퍽 인상적이었던 시인인데(제가 유일하게 등단작을 기억하는 시인이죠ㅋㅋ), 사회학을 공부하고 온 모양이군요. 십오초의 여집합... 오래 생각하다 갑니다^^

글샘 2011-09-29 08:58   좋아요 0 | URL
원래 사회학과 출신이더군요.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여집합을 생각하니 가슴이 콱, 막힙디다. ^^
 
사토장이의 딸 - 상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박현주 옮김 / 아고라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사토장이, gravedigger라고 되어있는 이 단어는, 묘지에서 무덤파는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사토장이라도 해야했던 사람들의 후예로 태어난 한 여자의 이야기다. 

첫 장면은, 레베카가 둑길을 걸어가는데 어떤 남자가 쫓아와서 상당히 긴장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따라오던 남자는 레베카를 헤이젤 존스란 여자아이로 착각하고 따라온 의학박사인 남자였다.
이런 해프닝 뒤로는 본격적인 레베카의 가족사가 이어진다.
어떻게 해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게 되는지,
어떻게 해서 호텔 메이드가 되고 티그너란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고 사는지,
그리고 또 어떻게 티그너에게서 탈출하여 살게 되는지... 

하권에 가서 이야기의 물매가 빨라진다.
의학박사였던 남자의 정체가 밝혀지고,
도망다니면서 그토록 두려워했던 남편 티그너의 소식도 듣게 된다. 

아들 녀석은 피아노에 재능을 보이고,
이제 헤이젤이 된 레베카는 갤러허라는 남자와 만나 결혼에까지 이른다. 

가난한 이민자의 딸이
또 그렇게 폭력적인 남편을 만나 추격을 피해 일생을 가슴졸이며 살아야했던 이야기.
어쩌면 레베카였던 헤이젤의 이야기는
이 땅의 많은 여성들도 고개 주억이며 닭똥같은 눈물을 함께 흘려 공감할 이야기일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대한 불신,
남자에 대한 불신,
가족 모두에 대한 불신,
나아가 인간에 대한 불신에 이르는 모든 인간 군상들의 어두운 이야기는
조이스 캐롤 오츠의 필력으로 흥미진진하게 이어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쩜 미국판 박경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인간의 삶에 대하여 들이 파는 느낌이 들었다.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의 길 위에 놓였던 유럽출신 미국인들의 삶.
그 속에서 핏줄을 타고 흐르는 불안감이 강렬하게 표현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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