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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그림자 - 김혜리 그림산문집
김혜리 지음 / 앨리스 / 2011년 10월
평점 :
여자,를 따라 백화점을 걷는 일.
백화점 워킹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차분차분 한 걸음씩 옮기는 발걸음은,
걷는다기보다는 눈을 따라간다고 하는 편이 어울린다.
여자,의 눈을 끄는 코너는 무엇보다도 '그릇'이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그릇들은 그 효용과 이름도 알기 어려운데,
나름대로 세트를 이루고 겹쳐지고 쌓여져서 일가를 이룬다.
접시들에 아로새겨진 무늬는 형형색색의 영롱한 미술관을 방불케 하는데,
여자,는 그 찻잔과 그릇 세트를 바라보면서 그릇과 찻잔 너머의 행복을 맛보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여자,는 '가구' 또한 사랑한다.
우아한 선을 가진 조붓한 협탁 하나도 지나치지 못한다.
비록 삼각대에 붙여진 가격표엔 동그라미가 너무 많아 내 손안에 들어올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지만,
대리석 식탁과 쿠션 가득한 소파,
오래 뜨끈할 돌침대와 환한 공주 침대도 지나칠 순 없는 것인데,
괜스레 앉아보고 눌러보면서 미래의 행복에 젖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 하다.
여자,는 또 옷을 찾아 이끌린다.
여자,의 눈을 끄는 마네킹은 인체 비례와는 전혀 무관한 10등신 이상이 되며,
허리는 20인치나 될까말까 하지만, 거기 걸린 옷들은 그래서 인체와 무관한 비례로 조합된 옷이지만,
그 색상과 라인과 맵시에 눈길이 끌리면,
하염없이 들이비치는 하늘거림까지 사랑해 마지않는 발걸음으로
여자,는 백화점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여자,의 발걸음을 마무리하는 곳은 사은품 코너가 될 테지만,
여자에게 사은품 코너의 줄 정도는 사랑할 수도 있는 것이리라.
비너스의 별 금성에서 온 여자와는 달리, 마르스의 별 화성에서 온 남자는 도무지 백화점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남자를 이끄는 팽팽한 긴장감과 힘, 뛰고 닫는 공기의 흐름을 느낄 수 없는 공간에서 남자,는 무기력해지고 만다.
남자를 매혹하는 것은 '탄성'이 아닐까? 탄력적인 근육과 탱탱 튀는 공.
오죽하면 축구,가 욕이 되는 바도 이런 특성의 하나임.
긴장과 탄성 끝에 오는 '승부' 또한 남자가 욕망하는 것인 바,
그래서 남자가 둘만 모이면 온갖 게임에 몰두하고 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혜리의 그림 읽기는 철저히 여자,의 눈을 따라 걷는 워킹이다.
그림,에서 그리움,을 읽는 이도 있지만, 작가는 그림,자를 읽는다.
그림자는 화려한 색상과 외곽선과 양감, 질감, 볼륨감을 다 읽고난 다음에라야 사랑할 수 있는,
모든 읽기를 마친 뒤에 조우하는 감동과도 같은 실루엣이 아닐까?
<가난한 여배우의 크리스마스 디너>란 작품 속에 드리워진 삶의 그림자.
그 그림자는 그리움과는 또다른 면을 읽게한다.
삶의 궤적을 따르다 보면 다다르게 되는 한 지점.
거기서 하릴없이 별로 생활에 도움도 안될 사은품 줄에 피로함을 얹어 서듯,
어둡지만 또 그만둘 수 없는 삶의 한 지점에서 만나는 피로와
우리 앞의 生이 던져 주는 삶의 막막한 무상감을 그림의 바닥에서 읽게 한다.
동키호테,를 그린 그림을 통해 '인간은 어떻게 살도록 허락받아야 하는가?'를 묻는 작가는 짓궂고 얄밉지만,
그나 나나 삶의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동키호테를 손가락질이나 하는 주제임을 깨닫는다면,
그림 속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짙은 어둠 속의 산초 판자의 주제나 작가나 나나 거기서 거기란 생각을 하게 된다.
드가의 머리 빗기,란 그림은 여자의 몸짓 일체에 우아한 색채를 입힌 화가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데,
머리 빗기는 부인의 체형과 몸짓은 참으로 여실하다.
머리 빗어주는 하녀의 마음 속까진 읽을 수 없으나, 그 마음의 그림자까지 읽기는 어렵지 않다.
쳇, 제 머리조차 못 빗는 주제에 귀부인이랍시고... 하는데,
부인의 배를 보니... 임신부일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럼 조금 봐줄까?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청색과 금색의 야상곡 - 낡은 배터시 다리>에서 들어볼 만한 그림자 이야기가 등장한다.
빛이 사위고 그림자가 깊어지면
사소한 디테일은 사라지고 자질구레한 모든 것이 퇴장한다.
사물은 위대하고 강력한 덩어리로 보인다.
단추는 보이지 않지만 옷은 남는다.
옷은 보이지 않지만 모델이 남는다.
모델도 보이지 않게 되면 그림자가,
그림자조차 사라지면 마침내 그림이 남는다.(54)
결국, 삶도 그런 거 아닌가... 알 듯 알 듯 알 수 없는 삶이 하나하나 소거되고 나면,
남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그림 한 장.
인상,이라거나, 그 사람의 체취, 라거나...
어쩌면 한 단어로 남을, 아니면 아무 인상도, 체취도, 한 단어의 기억도 남지 않는 그림자일 지도 모르는...
완성은 소멸로 흩어진다. 절정은 곧 죽음이다.
흡사 벚꽃의 미학이다.
불꽃놀이를 보며 남긴 글이다.
삶 자체가 그렇게 벚꽃구경(하나미)처럼, 불꽃놀이(하나비)처럼...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고 덧없이 스러지고 마는 것이어늘...
잊지 말아요.
수억년 전 별이 폭발해 세상의 모든 걸 만들었어요.
당신도 만물처럼
우주의 먼지로 이뤄진 걸 잊지 말아요.(영화 비포 선라이즈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