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8, 우연히 데이브 거니 시리즈 1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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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원제는 Think of a number...이다. 
숫자 하나를 생각해 봐~ 같은.
퍼즐 놀이처럼 보이지만, 스릴러물이다. 

어릴 때, 이런 놀이가 있었다. 

내가 안 보이도록 종이를 두고
백의 자리가 일의 자리보다 큰 숫자를 하나 적어 봐~   583
그리고 그 아래 위의 숫자를 뒤집어서 적어봐~           385
그 아래 빼기를 한 숫자를 적어봐~                           198 
다음엔 그 숫자를 뒤집어서 적어봐~                         891 

자, 그 두 숫자를 더해봐. 1089가 맞지?
이런 놀이. 

이 소설은 퍼즐도 아닌 그저 숫자 하날 생각해봐, 그리고 떡 맞춘 정답이 봉투 안에 들었던 편지에서 비롯된다.
잔혹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또 하나의 살인 사건이... 

우연히 발견하게 된 두 사건의 연결 고리와,
다시 연속 살인 사건... 

첫 살해 대상이 된 사람은 정신수련원을 운영하는데 그 사람의 주장에 제법 매력적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이런저런 역할들을 수행하게 되지.
그런데 그 역할들은 비롯 사람들이 대체로 의식하지 못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꽤 일관성이 있고 예측 가능한 것들이거든. 

우리가 여기서 하는 일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수행하는 역할들을 의식하게 해주는 거지.
그 역할의 득과 실이 무엇인지.
그 역할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일깨워주는 거야.
우선 자신의 행동 양식을 똑바로 인식하게 되면,
그 다음엔 그것이 선택의 문제임을 인식하게 돼.
그때부턴 취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는 거야.
그 다음엔,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건전한 행동으로 대체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거지.(95) 

예상처럼, 이 궤도에서 어긋난 사람이 범인이다.
삶의 궤도에서 얻게 된 역할과 행동 양식의 수행에 실패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잘못들.
거기서 결과로 드러나는 범죄, 사건. 

그와 첫아들의 관계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영역이었고, 온통 회피와 합리화로 가득 찬 영역이었다.(127) 

 누구에게나 이런 영역이 있을 것이다.
그 영역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것이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의 과제라고 이 소설은 단언하는 것인데,
지난 여름 수십 명을 비명횡사하게 한 노르웨이의 한 젊은이의 삶의 문제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단 생각을 한다.   

여느 소설과 마찬가지로 600페이지 중 200페이지에서 살인사건을 만나게 되고,
400페이지에선 해결의 실마리를 얻게 되며,
500페이지에선 범인과 대결하게 되고,
해피엔딩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스토리가 흥미롭고 퀴즈를 맞춰가는 재미가 있으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술사를 바라보는 관객이 된 기분으로
책장을 자기도 모르게 넘기는 일을 경험하게 하는 재미있는 추리 소설이다.

------------- 사소한 맞춤법 오려 몇 가지(글을 읽는 데 방해를 줄 정돈 아니지만, 재판이 나오면 고쳐주시길...)

351. 어쨋든... 어찌하였든...의 준말로 어쨌든이 맞다.  

476. 유래가 없는 일... '유례'가 맞다. 

516. 집결할 있도록... (수)가 빠졌다. 

533. 나르도은...(는)이 맞다. 

566. 오직 한 가직밖에...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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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이는 서고 싶다 창비시선 209
박영희 지음 / 창비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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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이는 맞아야 선다.
종아리에 시퍼렇게 쑥물이 들도록 맞아가면서 팽이는 비로소 삶의 동력을 얻고 바로 선다. 

옳게 한번 서보기 위해
아랫도리에 핏물이 든다 

채찍을 피하지 않는 저 당당함!
줄에 목을 매고도 포기 않는 저 뜨거움! 

일어서고 싶거든
한번 사무쳐 보라
바람같은 원한이어도 좋다
팽이는 서고 싶은 것이다
어떠한 빙판 위에서라도
중심을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팽이, 전문) 

그는 이렇게 노력하며 살아왔지만,
기실 그의 삶은 국가보안법의 그늘에서 쑥물든 것이었다. 

일제치하 광부징용사를 쓰기 위해 월북을 감행, 그 대가로 7년의 감옥살이를 한다.
이 시집의 언어들은 그 옥살이를 바탕으로 해야 이해할 수 있다. 

팽이처럼 바로 서고 싶고, 손으로 발로 뛰면서 글을 써내고자 했던 작가 의식은 이념의 진흙탕에서 붉게 매도되고 말았다. 

입 닫고
귀 열어라 

어떤 노래가 들려오는가
누구의 말이 못이 되어 박히는가 

계곡은
함부로 물을 흘려보내지 않는다 

두 개의 눈은 빛나지 않아도 좋다
시력을 잃어도 좋다 

손이 말하게 하라
발이 말하게 하라 (나의 잠언, 전문) 

그 대신 옥바라지하며 고생했을 아내를 생각하면 그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이렇게 이데올로기와 억압은 인간의 존엄성을 일거에 무너뜨려 버린다.
촛불 집회 나간 유모차 엄마에게 벌금을 매기는 일도 마찬가지다. 

아내 생각하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남자도 때로는 눈물로 아내의 슬픔을 빠는 것이다
이처럼 아내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동굴처럼 웅크리고 산 것을
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던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나 오늘 아침에
피죤 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렇게라도 향기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내의 브래지어, 부분) 

아내의 브래지어를 빨면서, 미안함과 왜 자신이 미안하게 동굴 속에서 살았던가를 혼란스러워 할 수밖에...
피죤 두 방울의 반성,  눈물 두 방울의 두려움... 

나이 서른에 관절을 앓기 시작한다...
내 나이 서른 몇은 고사하고
다들 무릎 꿇고 기도할 때
그 무릎마저 낮출 수 없음이
마치 무슨 죄라도 짓는 기분이다 (관절, 부분)

감옥살이, 빨갱이 삶의 흔적은 관절에 남았는데,
그 기억은 마치 녹찻잎이 꿈틀꿈틀 되살아나듯 살아오른다. 

꿈틀꿈틀,
찻잔 속의 누에들 천지다
짓눌린 몸 일으켜 세우느라 아우성이다 

참으로 삽시에
잊고 산 기억들 파릇파릇 눈을 뜨고
겨우 바닥을 채웠던 마른 잎들
다시금 되살아 나고
어찌 기다림의 아픔 없이 목을 축이랴
어찌 목 잘리는 희생 없이 향기 있으랴 (녹차를 마시며, 부분) 

이렇게 힘겹게 감옥에서 싸우고 있는데,
노무현 정부의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도 1/3만 국보법 폐지에 찬성하고 나머지는 점진적 폐지나 폐지 반대론자였다는 정봉주 전 의원 소리를 들으면 혈압이 빠각 오른다.
씨바, 그 새끼들은 국민의 대표가 아니야.
수천 명이 그 추운 겨울에 단식 투쟁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지금 다시 한미 FTA를 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커피를 타오고
팔팔 딜럭스를 내밀며
한장만 쓰랍니다
산다는 건 어차피 사고 파는 장사,
요구 사항을 제시해 보랍니다
그까짓 사상도 따지고 보면
계집의 하룻밤 품 같은 것
원한다면 사나흘 귀휴도 좋답니다
눈 딱 감고 한장만 쓰면 까짓것
밖에 나가 오입도 시켜줄 수 있답니다... (전향서, 부분)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데,
그 감옥 살이는 또 육신이 슬퍼하여 이런 시를 낳는다. 치욕의 역사... 

단 하루라도 좋으니
따뜻한 방에서 한숨 푹 자봤으면
탄불 지핀 아랫목에서 삼십분만 누워봤으면
욕탕에 들어가 언 몸 한번 담가봤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흠뻑 비에 젖어봤으면
밤길 한번 거닐어봤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 갇힌 자의 노래 3, 부분) 

그리고 또 꿈꾼다. 

출소하면 말예요
술도 안 마시고
밥도 안 먹고
연애도 안할 거예요 

哭星場에 가
고무신부터 한켤레 살 거예요 

그 고무신 다 닳도록
미친 듯 걸을 거예요 

비오면 비를 맞으며
눈내리면 눈을 맞으며 

혼자도 좋고 둘도 좋고
걸을 거예요 

밤이 찾아오면
하얗게 새벽이 밝아오도록
집시처럼,
집시처럼 걸을 거예요. (출소를 꿈꾸며 - 갇힌 자의 노래 4, 전문)

그래, 박영희는 걷는 사람이다.
세상 어디든 가서 살펴 보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일까.
그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만주까지 가서 글 쓸 자료를 찾으라
두만강을 건넌 죄로
1992년 1월 국가보안법에 걸려 98년 815 특사로 풀려나기까지 무려 6년 반을 옥살이 했다.
죄목이 잠입탈출이었다. (이하석의 해설 중)

잠입탈출...
그래서 박영희는 아직도 걷고 있다.
길에서,
길을 걷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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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앤 올 에이지 클래식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최지현 옮김 / 보물창고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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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애니메이션으로 봤을 법한 빨간 머리 앤.
어릴 때 우리집엔 책이 없었기때문에(아, 한 권 있었다. 박정희 전기, 아마 아버지가 예비군 훈련 가서 얻어온 듯)
이런 책을 읽을 순 없었는데,
이번에 보물창고에서 나온 판으로 읽게 되었다. 

19세기 낭만적 성장물은 대략 비슷하다.
캔디라든가, 소공녀라든가, 성장 과정이 비슷한 것인데,
불우한 어린 시절(대부분 고아원 출신)과
우연히 만나게 되는 은인, 그렇지만 빠짐없이 겪게 되는 고난과 성공 이야기. 

어른의 시각에서 본 빨간 머리 앤은 좀 달랐다. 

앤을 이해하지 못하는 마릴라와 매튜는 처음엔 남자 아이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지만,
그래서 앤의 엉뚱한 상상력이 빚어내는 사건 사고들에 혀를 내둘렀지만,
사랑으로 앤을 품어 주게 된다. 

앤은 아무리 불행한 현실에 마주쳐도, 즐거운 상상을 하는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실제와 다르게 상상함으로써, 유쾌하게 세계와 맞짱뜨는 것인데,
작지만 따뜻하고 행복한 감정을 생활 속에서 달콤하게 녹이는 것이 삶의 긍정에 얼마나 필요한지를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는 소녀인 셈이다. 

지금 세상도 그 때의 가난이나 고아의 문제와 무늬만 다를 뿐, 마찬가지 문제에 봉착해 있다.
부모가 있어도 아이들을 사랑하는 대자연과 유리되어 있으며,
물질 문명의 페티시즘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오히려 아이들의 상상력 대신에 물신화된 애니메이션 들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다. 

애니메이션의 성공은 곧 유사 캐릭터 상품의 성공과 직결되는 상업성에 다름아니기 때문인데, 
일본인들의 다양한 캐릭터의 양산(포켓몬스터의 수백 종류는 가공할 만 하다.)으로
끝없은 소유욕을 꼬맹이 코묻은 돈부터 훑어대는 현실에 마주하게 한다. 

만약에 나에게 열살 안팎의 딸이 있다면,
매일 시간을 쪼개어 빨간 머리 앤을 나직이 읽어 주고 싶다.
아마 그 딸은 그 시간을 무척 기다릴지도 모른다.
스스로 책을 읽으려 애를 쓸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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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귀는 귀가 참 밝다 동심원 21
하청호 지음, 성영란 그림 / 푸른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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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시집을 읽노라니,
어린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동시를 처음 접하던 생각이 든다.
어떤 장면을 만나면 예전에 마치 똑같은 상황을 겪었던 것처럼 데자부 현상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내겐 이 시집의 시들이 30여년 전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색깔이나,
특정한 상황이 그런 마음을 들게했는지 모르겠지만,
새싹이라든지, 풀꽃들에 대한 이야기가 예전 교과서적 감상을 환기했는지도 모르겠다. 

빗방울이 떨어지네 

떨어진 자국마다
송이
송이 

비꽃이
비꽃이 피어나네.(비꽃 부분) 

이렇게 빗방울이 흙바닥에 툭툭 터지듯 꽃피우는 꽃비, 비꽃을 내리기도 하고, 

초록 꽃을
보셨나요 

어디, 어디에
초록 꽃이 있나요 

눈에 보여도
너무 많아
보이지 않는
초록 꽃 

저기, 저기
수만의  
초록 꽃이 피었네요 

꽃처럼 예쁜
오월 나무의 새잎 

초록
초록 꽃들.(초록 꽃을 보셨나요, 전문) 

이처럼 새싹들을 꽃처럼 바라보는 시선도 싱그럽기 그지없다. 

'다슬기 잡기'처럼 환경과 하나되어 살아가던 삶의 모습도 오롯이 떠오르고,
에움길(에돌아 가는 길), 산돌림(비구름이 몰려다니던 소낙비) 같은 말도 정겹기만 하다. 

가을날 꽃씨는
이 모든 것을 불러들이고
빗장을 꼭 닫았다. 

까만 꽃씨 하나.(모두 들어오너라, 부분)

자연을 바라보기만 해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세상이. 

이 시집은 외갓집도, 외할머니의 옥수수 찐 냄새도 기억 속에 없는 아이들에게
외가가, 외할머니가 되어주려는 노력이 가득한 시들로 빛난다.
그렇지만... 과연 아이들이 무얼 떠올릴지는...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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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그림자 - 김혜리 그림산문집
김혜리 지음 / 앨리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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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따라 백화점을 걷는 일.
백화점 워킹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차분차분 한 걸음씩 옮기는 발걸음은,
걷는다기보다는 눈을 따라간다고 하는 편이 어울린다.
여자,의 눈을 끄는 코너는 무엇보다도 '그릇'이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그릇들은 그 효용과 이름도 알기 어려운데,
나름대로 세트를 이루고 겹쳐지고 쌓여져서 일가를 이룬다.
접시들에 아로새겨진 무늬는 형형색색의 영롱한 미술관을 방불케 하는데,
여자,는 그 찻잔과 그릇 세트를 바라보면서 그릇과 찻잔 너머의 행복을 맛보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여자,는 '가구' 또한 사랑한다.
우아한 선을 가진 조붓한 협탁 하나도 지나치지 못한다.
비록 삼각대에 붙여진 가격표엔 동그라미가 너무 많아 내 손안에 들어올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지만,
대리석 식탁과 쿠션 가득한 소파,
오래 뜨끈할 돌침대와 환한 공주 침대도 지나칠 순 없는 것인데,
괜스레 앉아보고 눌러보면서 미래의 행복에 젖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 하다. 

여자,는 또 옷을 찾아 이끌린다.
여자,의 눈을 끄는 마네킹은 인체 비례와는 전혀 무관한 10등신 이상이 되며,
허리는 20인치나 될까말까 하지만, 거기 걸린 옷들은 그래서 인체와 무관한 비례로 조합된 옷이지만,
그 색상과 라인과 맵시에 눈길이 끌리면,
하염없이 들이비치는 하늘거림까지 사랑해 마지않는 발걸음으로
여자,는 백화점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여자,의 발걸음을 마무리하는 곳은 사은품 코너가 될 테지만,
여자에게 사은품 코너의 줄 정도는 사랑할 수도 있는 것이리라. 

비너스의 별 금성에서 온 여자와는 달리, 마르스의 별 화성에서 온 남자는 도무지 백화점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남자를 이끄는 팽팽한 긴장감과 힘, 뛰고 닫는 공기의 흐름을 느낄 수 없는 공간에서 남자,는 무기력해지고 만다.
남자를 매혹하는 것은 '탄성'이 아닐까? 탄력적인 근육과 탱탱 튀는 공.
오죽하면 축구,가 욕이 되는 바도 이런 특성의 하나임.
긴장과 탄성 끝에 오는 '승부' 또한 남자가 욕망하는 것인 바,
그래서 남자가 둘만 모이면 온갖 게임에 몰두하고 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혜리의 그림 읽기는 철저히 여자,의 눈을 따라 걷는 워킹이다.
그림,에서 그리움,을 읽는 이도 있지만, 작가는 그림,자를 읽는다.
그림자는 화려한 색상과 외곽선과 양감, 질감, 볼륨감을 다 읽고난 다음에라야 사랑할 수 있는,
모든 읽기를 마친 뒤에 조우하는 감동과도 같은 실루엣이 아닐까? 

<가난한 여배우의 크리스마스 디너>란 작품 속에 드리워진 삶의 그림자.
그 그림자는 그리움과는 또다른 면을 읽게한다.
삶의 궤적을 따르다 보면 다다르게 되는 한 지점.
거기서 하릴없이 별로 생활에 도움도 안될 사은품 줄에 피로함을 얹어 서듯,
어둡지만 또 그만둘 수 없는 삶의 한 지점에서 만나는 피로와
우리 앞의 生이 던져 주는 삶의 막막한 무상감을 그림의 바닥에서 읽게 한다. 

동키호테,를 그린 그림을 통해 '인간은 어떻게 살도록 허락받아야 하는가?'를 묻는 작가는 짓궂고 얄밉지만,
그나 나나 삶의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동키호테를 손가락질이나 하는 주제임을 깨닫는다면,
그림 속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짙은 어둠 속의 산초 판자의 주제나 작가나 나나 거기서 거기란 생각을 하게 된다. 

드가의 머리 빗기,란 그림은 여자의 몸짓 일체에 우아한 색채를 입힌 화가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데,
머리 빗기는 부인의 체형과 몸짓은 참으로 여실하다.
머리 빗어주는 하녀의 마음 속까진 읽을 수 없으나, 그 마음의 그림자까지 읽기는 어렵지 않다.
쳇, 제 머리조차 못 빗는 주제에 귀부인이랍시고... 하는데,
부인의 배를 보니... 임신부일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럼 조금 봐줄까?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청색과 금색의 야상곡 - 낡은 배터시 다리>에서 들어볼 만한 그림자 이야기가 등장한다. 

빛이 사위고 그림자가 깊어지면
사소한 디테일은 사라지고 자질구레한 모든 것이 퇴장한다.
사물은 위대하고 강력한 덩어리로 보인다.
단추는 보이지 않지만 옷은 남는다.
옷은 보이지 않지만 모델이 남는다.
모델도 보이지 않게 되면 그림자가,
그림자조차 사라지면 마침내 그림이 남는다.(54)

결국, 삶도 그런 거 아닌가... 알 듯 알 듯 알 수 없는 삶이 하나하나 소거되고 나면,
남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그림 한 장.
인상,이라거나, 그 사람의 체취, 라거나...
어쩌면 한 단어로 남을, 아니면 아무 인상도, 체취도, 한 단어의 기억도 남지 않는 그림자일 지도 모르는... 

완성은 소멸로 흩어진다. 절정은 곧 죽음이다.
흡사 벚꽃의 미학이다. 

불꽃놀이를 보며 남긴 글이다.
삶 자체가 그렇게 벚꽃구경(하나미)처럼, 불꽃놀이(하나비)처럼...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고 덧없이 스러지고 마는 것이어늘... 

잊지 말아요.
수억년 전 별이 폭발해 세상의 모든 걸 만들었어요.
당신도 만물처럼
우주의 먼지로 이뤄진 걸 잊지 말아요.(영화 비포 선라이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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