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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길을 묻다 - 조용호 문학기행
조용호 지음 / 섬앤섬 / 2011년 12월
평점 :
또 다시 시의 시대가 오는가...
80년대.
한국 시는 그 80년대에 빚진 바 크다.
훌륭한 현대시들은 일제 강점기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김소월과 한용운이란 두 거목을 얻게 된다.
1960년대 독재에 저항하면서 김수영과 신동엽이란 주춧돌이 한국시단에 등장한다.
광주를 겪으면서 황지우, 김지하, 김정환, 고은 등 수도 없이 많은 시인들이 명멸해 갔다.
그러다 1990년대 사회주의 붕괴로 정신적 아노미를 겪는 동안 시는 퀭한 눈으로 세상과 교통했다.
이제 한마디 한마디가 다시 시가 되는 시대를 맞았다.
오늘 정봉주 전 의원이 입감된 날이다.
울지마라. 울면 지는 거다.
우리가 울면 저들이 웃는다.
나를 가두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지금은 진실이 갇히지만
다음에는 거짓이 갇힐 차례이다.
Don't Worry, Be Bonjour!!!
서울대생들의 시국 선언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대로 시가 되었고,
이화여대생들의 신문 광고가 오롯이 시로 살아나는 시대.
불행의 시대를 딛고 시는 피어오르는 모양이다.
혁명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두 시가 된다고 한다.
그래, 사랑은 정신의 혁명인 셈이기도 하지.
이전의 자신과는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는 일의 연속이니 말이다.
시인과의 1박! 2일! - <그는 시인이다!>
이 책은 세계일보 문화부장 조용호가 2009년 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시인과 <1박2일>의 경험을 묶은 것이다.
참 좋은 시인들에 얽힌 삶의 이야기들을 시와 함께 읽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마치 '1박 2일'에서 흥미로운 먹거리를 발견하였을 때나,
멋진 배경화면처럼 아름다운 자연을 만났을 때,
놀라운 감동을 맛볼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나는 가수다'가 처음 나왔을 때,
긴장한 가수들의 속내를 들어가면서 아름다운 노래를 듣게 되었을 때,
그 황홀한 감동을 느꼈던 것처럼 이 글들을 흥분하면서 읽기도 했다.
시에 휩싸여 몇 번을 소리내어 읽기도 했고,
술자리로 가는 지하철에서 내리기 싫을 정도로 몰입하며 읽기도 했다.
요즘 읽는 책들이 <철학 카페에서 시 읽기>라든가,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같은 것인데,
둘다 철학자들이 시 속에서 이런저런 철학적 함의들을 읽어주는 것들이라
앞의 것은 조금 말랑하고, 뒤의 것은 자못 까칠함을 느끼게 되었던 데 비하면,
이 책의 장점은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얼렁뚱땅 시인과 한담을 나눈 경험담처럼 들리는 속에서,
그 시인을 만날 수 있는
결정적 순간이 놓여진 배경을 읽게도 되고,
그 시인의 눈물이 배어날 수 있는 스토리가 밝혀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겠다.
1박 2일 프로그램이 어디를 가서 어떤 놀이를 하느냐에 따라 재미에 가감이 있을 수 있듯이,
어떤 시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감동이 달라질 수도 있고,
그 시인을 만난 포인트와 어울리는 시를 적시하고 있느냐에 따라 흥미가 덜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매주 그 시간이면 텔레비전 앞으로 관객을 불러오는 유명 프로그램들처럼,
마음 속 높은 기대감이 다음 시인과 시들을 기대하게 만드는 책이 이 책이다.
흔히 마주치는 배경에서 만나는 신선함
만남과 마주침은 다르다고도 한다.
늘상 많은 사람과 마주치는 지하철, 엘리베이터...
그렇지만 그 마주침에는 큰 의미가 없다.
친구랑 마주치러 가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그렇지만, 특별한 사이가 되면, 어린 왕자의 말처럼 '길들이는' 과정을 통해 <만남>이 탄생한다.
이미 자주 마주쳐서 잘 알고 있던 시인의,
잘 알고 있던 시라도,
이 책에서 색다른 배경과 색다른 뒷이야기를 깔고 펼쳐지노라면,
왠지 새로운 만남의 경험을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
그리고 자주 마주치지 못했거나 마주쳤더라도 기억에도 없던 시인의,
낯선 시들 속에서,
아, 어쩜 이적지 이런 시인의 시집 한 권 골똘히 읽지 않았던가... 하는 한탄과,
나의 무지에 대한 꾸짖음보다는,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감으로 고마움이 앞서게 하는 글들을 읽게 되어 행복한 독서가 되기도 했다.
치유의 시, 생명의 시
시는 생명이다.
시를 읽는 일은 한 호흡을 새로 숨쉬게 되는 깨달음의 순간이고,
시를 읽음으로써 안도의 한숨과 마음 속 토닥거림을 얻게 되는 체험이다.
문인수의 <채와 북 사이, 동백진다>같은 시를 읽노라면,
한국어를 사용하는 화자로서의 자부심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 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 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문인수,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들 속에는 찬 바람이 지나간다.
그러나 시인들의 사진에선 웃음이 난다.
산책하다 골목길에서 만나기 쉬운 어수룩한 사람들의 표정을 그들은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또 그들의 뇌리에서 생각되는 것들은 서늘한 것들이다.
누가
발자국 속에서
울고 있는가
물 위에
가볍게 뜬
소금쟁이가
만드는
파문 같은
누가
하늘과 거의 뒤섞인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가
편안하게 등을 굽힌 채
빛이 거룻배처럼 삭아버린
모습을 보고 있는가.
누가
고통의 미묘한
발자국 속에서
울다 가는가 <박형준, 빛의 소묘>
다시 시의 시대로...
광주.
이 한 마디만 들어가면 울컥 심장이 일렁이던 시절이 있었다.
노동.
이 한 마디에 팔뚝의 핏줄이 불거져 오르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숱한 이들의 죽음을 안고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왔고, 살고 있다.
아직 용산은 끝나지 않았고,
구럼비 바위의 포성은 끝나지 않았다.
새까맣게 그을린 용산의 욕망은 감옥에 가둔다고 사그러들 불이 아니며,
제주 할망들의 숨비소리 가쁘게 들리는 구럼비 바위의 울음 소리는,
미군의 항공모함 들락거릴 기지를 빌려준대도 잦아들 그런 것은 아니다.
산천이 유린당하고,
이제 법적으로 미국 기업의 식민지가 되기 위하여,
검은 머리 미국인들이 '선진 조국'을 건설하고 있는 이 시기에,
시가 터져 나올 시기가 되었다.
뜨거운 가슴은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대로 시가 된다.
변화를 깨달은 가슴에서 새겨지는 말들은 오롯이 시적이다.
시인을 만나고, 시집을 또 만나고,
그리고 세상을 만나야 할 시간.
시인과 시집을 소개해 주는 중매쟁이로 조용호는 제법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시를 아는 사람이... 글쎄, 시를 행갈이 하지 않고,
아무리 신문 지상에 실을 때는 슬래시로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치더라도,
그래, 시를 요렇게 실은 것은 쫌 아니지 않나 싶다.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가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문정희, 남편>
이 시를 행갈이하면,
이렇게 황홀하게 눈에 쏘옥 들어오는데 말이다.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가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다음 판을 찍으면,
종이 몇 장 더 들더라도,
시는 행갈이 좀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