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 위에서 떨다 창비시선 226
이영광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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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광의 시에서 '직선'과 '두려움'을 만났다.

삶이 온갖 우연성들의 산만한 합집합처럼 보일 때도 있어

무의미한 일들이 날마다 쌓이고 쌓일 따름으로 느껴지는 날도 있지만,

어떤 날인가에는

수정할 수 없는 직선으로

외나무다리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만나야 하는

벼랑 끝처럼 단호하게 느껴지는 날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 날에 대한 시다.

 

고운사 가는 길

산철죽 만발한 벼랑 끝을

외나무다리 하나 건너간다

수정할 수 없는

직선이다

 

너무 단호하여 나를 꿰뚫었던 길

이 먼 곳까지

꼿꼿이 물러나와

물 불어 계곡 험한 날

더 먼 곳으로 사람을 건네주고 있다

잡목 숲에 긁힌 한 인생을

엎드려 받아주고 있다

 

문득, 발 밑의 격랑을 보면

두려움 없는 삶도

스스로 떨지않는 직선도 없었던 것 같다

 

오늘 아침에도 누군가 이 길을

부들부들 떨면서 지나갔던 거다.(직선 위에서 떨다, 전문)

 

그래, 두려움 없는 삶도,

스스로 떨지 않는 삶도... 없다는 것을,

누군가도

오늘 아침

이 길을 부들부들 떨면서 지나갔던 것을

그 직선을 만날 수밖에 없음을 생각했던 것은 시인만은 아니리라.

 

그래서 그는 벼랑에 얼어붙은 폭포를 보면서,

흘려보낸 물살들은

멀리 가서 함부로 썩어버리고

아무 것도 기르지 못함을...

그런 삶을 함부로 살아왔음을 반성하기도 한다.

 

그런 눈으로 보면,

빙폭 한 점에서도

침묵하고 거꾸로 벌받는 몸이 되어 매달려 선

프로메테우스를 만나게도 되는 법이다.

 

서 있는 물

물 아닌 물

매달려

거꾸로 벌받는 물,

무슨 죄를 지으면

저렇게 투명한 알몸으로 서는가

출렁이던 푸른 살이

침묵의 흰 뼈가 되었으므로

폭포는 세상에 나가지 않는다

흘려 보낸 물살들이 멀리 함부로 썩어

아무 것도 기르지 못하는 걸 폭포는 안다 (빙폭 1, 전문)

 

그의 꼿꼿한 정신은

개개 풀린 나날의 삶을 흐리멍텅한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목에 칵,

하고 걸린 한 점의 호흡처럼,

그의 정신은 순간순간의 부끄러움을 문자로 '빙폭화' 하는 것이다.

 

가시처럼 목에 걸린

한 점의 호흡이

물을 문득,

돌로 부풀린다(빙폭 2, 부분)

 

이 시집에서 시인은 먼 길을 걸어 돌아온 지점에 서 있는 듯하다.

그래서 먼 길이 함축한 먼지 바람을 무연히 회고하면,

문득,

열대처럼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런 것이 '마루 밑 열대'에서 화들짝 펼쳐진다.

 

세월에 손을 댄다 뜯어낸 마루 아래가 금방 희게 바랜다 빛의 무덤 속, 바람이 깁고 지나 뒤란까지 길 나있다 ...

사람이 버린 것만이 이렇게 온전하여 마루 위 식솔들 공기알처럼 흩어질 때 눈먼 바람 눈먼 세월을 허락해 일가를 이루었다 겨울밤의 놋요강은 여전 지리고 귀 떨어진 무쇠 화로가 화끈하다 푸르러 산으로 돌아가는 개간밭들 건너다볼 때 떨손 대지 마, 쥐어박듯이 불인두 하나 눈시울을 눌러온다 마루 밑에 열대가 있다 (마루 밑 열대, 부분)

 

이영광의 시집에서

흩어져있던 삶들이 주섬주섬 모인 이삿짐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글을 읽는 일은

재미보다는 삶에 대한 부끄러움을 환기한다.

 

그의 시들이 죽음을 더듬는 것들도 흥미롭다.

삶에 대한 강한 긍정들은,

죽음에 접촉하는 점접들조차 능수능란하게 말로 펼치고 있는 듯 하여 재미있다.

 

먼 곳의 조사에 다녀왔다....

잊혀진다는 것은 나의 공포였으나

아무도 없는 곳이 이렇게 아늑할 줄이야

결국 혼자가 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인가

이곳이 대체 어딘가  또 문을 열어 놓았던가...

이 세상에 내 것이란 애당초 없었다는 것

그렇지, 동의하듯 다시 날리는 눈발...

깜박, 불이 꺼지듯 나는 깨달았다.

나는 다만 오래 나를 떠돌았을 뿐

세상의 둥근 의자에 앉아 있으면 자객처럼

어디엔가 완전히 묻혀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고

나의 생에 발 씻고 간 자들이 눈앞을 지나간다

바깥의 어둠, 천천히 걸어 안으로 들어온다 (앉아서 말하다, 부분)

 

삶 자체가 하나의 '영광'스러운 일이어야 하는가?

무연히 풀어헤쳐진 연기처럼 바람처럼

가벼운 것이어야 하는가...

 

등불 하나처럼 존재를 환히 밝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영광스런 날도 있게 마련이고,

자객처럼 존재 자체가 무화되어버리는 날도 있게 마련인 법.

 

바깥의 어둠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곧 사는 일이고

곧 죽는 일이라고

그는 '앉아서' 조용히 말한다.

 

그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데,

그는 나보다 백 살은 나이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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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
박에스더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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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도 족보가 있다.

나는 ‘경주 정씨’ ‘00공파’ ‘00대손’임을 외우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집 족보가 가짜임을 나는 알고 있다.


조선은 망했지만, 조선인이 살고 있는 나라, 그게 한국인들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국이란 사회의 권위주의, 남성우월주의, 남성중심 성문화, 가족중심주의는 조선조 유교적 질서가 그대로 살아남아 있다.

아직도 '상놈의 자식', '근본이 없는 집 자식'이 욕일 수 있는 사회다.


박에스더는 그 남성적 질서가 가장 강한 방송국 기자 생활을 하면서 온갖 물음표를 달고 살아왔다.

그래서 그 물음표의 시원이 어딘지를 처절하게 묻고 있다.


이 책의 꼭지들을 읽으면서 수십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저자의 역사 공부가 좀더 깊었더라면,

그래서 박노자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사태들을 낳았을 원인들을 좀더 역사적 배경에서 찾아내고,

강제했던 역사적 배경에 조선의 ‘성리학적 종법 사회 질서’가 있었음을 강조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세계에서 가장 아이를 적게 낳는 이유도 거기서 연유할 수 있고,

자기 아이를 위하여 가장 많은 학원 시간을 투입하고, 심지어 인생을 다 거는 엄마와,

결혼 하고도 자식을 위하여 집을 사주는 등의 투자를 하는 이상한 부모가 사는 나라.

그래서 남의 식구를 입양하는 일은 생각하기도 힘든 나라.


그 근원이 어디 있는지 밝히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당신의 집안이 ‘양반 가문’이었음을 자랑하지 말라.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입으로 ‘근본 있는 집안’, ‘뼈대 있는 집안’의 무의미함를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삼종지도’와 ‘현모양처’의 멍청한 여인상을 배척할 줄도 알아야 한다.


신사임당은 한량 남편 지도에 실패하고,

첫째 아들 역시 한량 스탈이라 실패하고,

차남 율곡의 교육에 올인하여 5만원권 초상으로 등극하시었다.

어찌보면 21세기 강남 엄마의 표본이시니 5만원권 초상으로 적합할는지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슬픈 일이다.


역사적으로 부패한 왕조가

식민지 경험과 동서 냉전의 경험 속에서

세계 역사상 가장 ‘광장과 밀실’이 발달한 두 나라로 쪼개져 버린 역사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

그리고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했지만,

그래서 가장 급격한 기울기로 마음의 울렁증이 생겨버린

빈부격차와 양극화의 양극단에서 느껴지는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의 불안감.

국가는 국민을 팽개치고 각개 약진만으로 버티어지는 국가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


한국의 어떤 세대는 조선왕조부터 식민지, 전쟁, 독재기를 거치며 살아온 그야말로 살아있는 화석이 되어버린 역사의 피조물인 것이다.

그 역사 속에서 '거짓 날조된 역사'는 가르쳐졌지만,

아직도 권력에 앉은 자는 '한국 근,현대사' 폐지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애쓰는 낮은 수준의 역사 인식을 가진 가엾은 나라다.

(결국 뉴라이트 정권은 2009 개정 교육과정을 통하여 '한국근현대사' 과목을 폐지하고 '동아시아사'라는 애매한 과목을 신설했다.)


그 역사의 추체험들이 날줄과 씨줄로 얼키고 설켜 만든 것이 대한민국 사람들이란 모습의 단편들일 것이다.

한 권의 책으로 ‘다른 대한민국’을 요구하는 것은 박에스더의 치기어린 용기였을 것이다.


이런 문제 의식을 가진 사람은 많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진지하게 논의되는 자리는 많지 않다.

박에스더의 문제제기와 함께 살고 싶은 대한민국, 미래의 비전이 숨쉬는 함께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로서의 한국의 도래를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근본없는 자식, 상놈의 자식임을 드러내놓고 자임하는 것이다.

 

 

시인 이영광은 이 주옥같은(? 빨리읽기) 대한민국을 이렇게 시로 썼다.

통,쾌,하,게,도...

 

대(大)

 

대한민국이여, 대가리에 쓴 그 대(大)자는

음경확대수술 후유증 앓는 곪은 귀두 같구나

커질 수만 있다면 문드러져도 좋아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아

반쯤 얼어터진 봄이 다 가도록

사람 죽여 원혼 만들고

전쟁과는 전쟁할 줄 모르는 공포의

대한민국이여, 함께는 사실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절망이겠지

무수히 적을 물리쳐도 예부터

전쟁을 무찌른 용사는 없었는데

대한민국이여, 겨우겨우 키운 좆 움켜쥐고

사창가로 쳐들어가는 취한 수컷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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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3-06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마지막 줄이 멋지군요.ㅋ
신사임당에 대한 해석이 재밌어서 웃음이 나왔어요.
저는 박노자의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를 샀는데, 얼른 읽어야겠어요.
글샘님처럼 리뷰를 쓰고 싶은 충동이 확 일어나는군요. ㅋ

글샘 2012-03-07 01:07   좋아요 0 | URL
저처럼... 리뷰를 쓰다뇨? ㅋㅋ
기대하겠습니다. ㅍㅎㅎㅎ

saint236 2012-03-06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쌤앤 파커스에서 저런 책도 나오는군요. 전 자기계발서만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글샘 2012-03-07 01:0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계발서인줄 알았는데, 뜻밖의 사회비판서더라구요.
박에스더의 문장은 가파른 건조체인데, 마음은 뜨거운 용광로였답니다.
 
소공녀 올 에이지 클래식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지음, 전하림 옮김 / 보물창고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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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렸을 때, 학교에서 폐품 수집하는 날을 무진 기다렸던 것 같다.

폐품 수집을 하면 우리집에선 여기저기서 주워두었던 폐신문지를 가져다 내곤 했지만,

아이들은 집에서 만화책이나 동화책을 마구 가져다 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간혹 선생님들이 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쉬는 시간에 주워다 읽기도 했는데,

그럴 때 소공자, 소공녀 등의 책은 어쩌면 꿈속의 고향을 헤매는 기분으로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교실의 폐휴지는 하루이틀만에 정리가 되어버렸고,

책을 읽을 기회는 상실의 허전함만 남기고 사라졌다.

 

아이를 기르면서 다이제스트 동화책들을 읽어주고 하면서 간단하게 줄거리만 엮인 어린이용 책으로 읽었을 때에 비하면,

요즘 읽게 되는 이야기들은 삶의 오묘함을 가득 담은 비밀 공간을 살짝보여주는 묘미를 담고 있달까,

그런 느낌으로 읽게 된다.

 

비밀의 화원이나 빨간머리 앤처럼,

소공녀 역시 소녀들 취향에 어울리는 수난과 운명에 얽힌 이야기이다.

 

주인공 사라는 인도 출신 아버지가 영국의 유명 기숙학교에 맡겨 자라게 된다.

워낙 귀족 취향이라 주변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은데, 상상 속의 이야기 들려주기가 사라의 취미다.

어느 순간 아버지가 죽고 사라는 고난의 구렁텅이로 빠져 고난의 일상을 살게 되는데...

사라는 비참한 삶 속에서도 스스로가 공주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스스로 부처임을 깨달은 존재와도 같다고나 할까.

물론 삶의 거스러미는 날마다 사라를 괴롭히지만,

사라는 멜키세덱이란 쥐를 보고도

"사람들이 나를 보고 소리치며 달아나면 정말 기분이 안 좋을 거야. 게다가 나를 잡으려고 먹이로 가장한 덫도 놓을 테니.

사실 얘도 쥐가 되고 싶어된 건 어나잖아."하면서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낸다.

 

어떤 상황도 모두 '이야기'로 치환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준 능력이었다.

 

"이야기지. 모든 게 이야기야.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민친 선생님도 이야기야."

 

주어진 상황에 지나치게 비관하지 않고, 스스로 놓인 자리를 제대로 파악하면서

늘 긍정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갈 줄 아는 사라의 지혜로움과 천성적 고결함은 이야기를 힘차게 이끄는 힘이 된다.

 

"무슨 일이 있더고 나에게서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어.

공주라면 아무리 누더기를 걸쳐도 여전히 내면은 공주잖아.

황금 옷을 입고 공주답게 행동하는 건 쉬운 일이겠지만,

아무도 알아 주지 않을 때 공주답게 행동하는 게 더욱 가치있는  일이야.

... 그것이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강한 거야."(181)

 

어쩌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는 듯도 한 구절들을 만나게 된다.

이야기는 우연의 연속으로 해피엔딩을 끌어내지만, 이렇게 긍정적 사고로 충만한 사람 옆에서라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느낄 수 있겠다.

 

18쪽. 천천히 도보를 걸어가며... '보도'를 걸어가는 게 맞다.

102쪽. 파리에서 직접 공수해 온 거라니... '공수'는 비행기로 운송한 걸 뜻한다. 이 시대엔 어울리지 않는 용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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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유다 청소년문학 보물창고 23
팜 뮤뇨스 라이언 지음, 민예령 옮김, 브라이언 셀즈닉 그림 / 보물창고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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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원제목은 '라이딩 프리덤'이다.

프리덤은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말이름이다.

 

1800년대 중반, 서부의 야생 도시들이 개발되기 시작하던 무렵,

어느 마을에서 마부 부부가 죽으면서 아이 하나만 살아남는다.

그 아이가 샬롯이란 여주인공인데,

여자 혼자서 살아가기 위하여 남장을 하고 마굿간 일을 한다.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는 마필관리와 본능적으로 말과 의사소통하는 능력을 갖춘 샬롯은

여성으로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여성 마부로 멋진 삶을 꾸려가게 된다는 이야기.

 

야생의 본능이 풋풋하게 살아있는 글들에서는,

개척기 미국 여성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과 속박된 삶이 잘 살아있다.

반면, 흑인 노예나 인디언 원주민들에 대하여는 열린 관점의 서술이 보이지 않아 아쉽기도 하다.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면 삶의 의미를 잃게 된다.

'자유'를 위하여 최소한의 물질적 기초도 필요하지만,

자유를 향한 의지 또한 굽히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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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리라이팅 클래식 15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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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명의는 '척 보고' 아는 의원이었다.

얼굴빛만 보고도 '간이 나쁘구만.'하거나, 몇 마디 나눠보고는 '색을 밝히는 놈이구만.' 이러고...

맥을 짚어보고 '셋째가 들어섰어.'라거나, 배를 눌러 보고, '큰 병원 가봐, 오래 못 살겠어.' 이러는 의원을 명의로 쳤다.

병을 제대로 아는 것이 바른 치료의 시작이라고 했으니,

이런 여러 가지 진료의 방법으로 병증을 알아내는 것이 의사의 기본이었겠는데,

글쎄, 그것이 요즘엔 전문대 졸업한 방사선 기사에 의해서 결과가 판독되는 시대가 오고 말았다.

 

수십 만원을 내고 큰 자기공명통 안에서 고뇌의 무도를 겪고 나면,

고귀하신 원장님께로 인도된 환자는 컴퓨터 화면 앞의 자기 신체를 바라보게 된다.

물론, 이렇게 기계화된 결과 오진의 확률이 급격히 낮아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값비싼 기계들을 운영하기 위하여 또한 '불필요한 진료'의 확률은 급격히 높아졌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자본의 시대엔 질병조차 자본의 관리를 받는 셈인데...

 

바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이다.

일단 '두 집'이 있어야 이어진 바둑돌들은 살아있는 게 되는데,

그 '집'을 갖추기 전까지는 '미생'이라고 해서, '아직 살아있는 게 아닌' 상태를 유지한다.

이 '미생'의 상태에서는 아무리 대마라고 하여도 한 순간에 위기를 맞게 되는 법이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역시 '집'이다.

일단 마음 속에 튼튼한 집이 있어야 집에서 나고 드는 사람들은 살아있다는 존재감에 싸여 살게 되는데,

그 '집'이 허약해진 상태, 어쩌면 '빈집'을 드나드는 것처럼 살아 간다면,

'함께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가정인 상태를 유지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미생'의 상태에서 아무리 부유한 집안도 한 순간에 위기를 맞게 되는 일은 당연지사.

 

편작의 큰형은 미병의 상태에서 예방을 했고, 작은형은 병이 약할 때 치료했으나, 편작은 죽을병을 낫게 하여 명의로 유명해 졌다고 한다. 편작네 집안에서 편작은 가장 하수로 여겨졌다고 하니...

 

바둑의 묘미는 대마를 잡기 위하여 '패'를 활용하기도 하고,

'자충수'를 두기도 하는 등, 꾀를 부리지만,

튼튼한 집이 있다면 어떤 고수 앞에서도 흔들릴 염려없이 살아있는 말이 되고,

집도 없이 떠돌다가 '축'으로 몰려 자폐적 행보를 보이는 자는 영락없이 자멸하는 말이 되고 만다.

 

의학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예방에 있고,

그 예방을 위하여 '자기 몸의 연구자'가 스스로 되도록 이끌어주는 책인 '동의보감'의 의미는 자못 크다고 하겠다.

허준은 '스스로 자기 병을 알아 스스로 치유해 가라'고 하고,

이제마는 '널리 의학을 밝혀 집집마다 의학을 알고 사람마다 병을 알게 된 연후라야' 장수한다고 하였다.

결국 가장 큰 의사는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는 게 결론이다.

 

동양의 의학은 서구의 해부학이나 이원론적 생리학과는 자못 다른 점이 많은데,

보이고, 존재하는 해부학적 지식을 뛰어넘어 '비유적이고 철학적인' 장부의 작용이 '태극'처럼 상생하고 상극하면서 상호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해석의 어려움을 보여주며,

이것 아니면 저것 식의 길항작용뿐만 아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기운의 흐름을 다루는 점에서 존재를 상정하는 매트릭스가 다른 곳임을 배우게 된다.

어느 것이 낫다는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서구의 의학과 차이점을 음미할 필요는 충분히 있어 보인다.

 

동양 사상은 우주와 생명을 어떤 실체들의 종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흐름이자 운동으로 본다.(125)

따라서 삶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동사는 운동성이 존재를 규정한다.

그때 운동은 이동, 중첩, 변이가 핵심이다.

정기신, 음양오행, 이 개념들 역시 명사가 아니라 동명사에 가깝다.

그것을 절단, 채취하는 순간 명사화된다.

명사가 아닌 동사적 흐름을 사유하는 건 일단은 쉽다. 하지만 미끄럽다.

잡았는가 싶으면 슬그머니 손을 빠져나간다.

 

고미숙의 설명 역시 쉽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고미숙이 위치한 유리한 자리는,

고미숙이 쓴 책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런 책을 들춰볼 용기를 얻기 어려웠을 것이란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자본의 세상은 인간을 단절화, 단편화시킨다.

돈벌러 간 남편은 '빈집'을 두려워하면서 외도를 하고,

공부하러 간 아이는 '빈집'을 두려워하면서 학원을 전전하고,

그 '빈집'을 지키는 아내는 다시 온갖 중독에 침윤하고 마는 악순환.

 

공감과 비움,천지만물과 공명하기 혹은 절대적 영토 벗어나기,

이런 용어들이 뒤섞여 나오지만, 결국 목표치는 같다.

'빈집'을 튼튼하게 꾸리고, '빈몸'을 유기적으로 활발발한 개체로 되살리라는 것.

 

불통의 경지를, 진액이 막히면 담음이 된다... 뭐, 이런 말을 쓴다.

통즉불통, 불통즉통,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게 된다.

현대인의 '뒷담화'라든가, 화병으로 치닫는 조급증, 속도 경쟁은 인간을 질병의 복합체로 만들게 되는 바,

'의학 내부의 전통'과 '자연 철학적 논리'의 대립에서 선택하여야 하는 지점이 있다면,

늘 후자를 택했다는 동의보감의 저술 원리를 생각해 보면,

'의학을 위한 의학'을 뛰어넘어 '인간을 위한 의학'을 지향했던 현인들의 사랑이 돋보이기도 한다.

 

선조가 허준에게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산출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을 백성들이 쉽게 알수 있도록 하라.'는 선조의 교지가 있다는데,

뭐, 어느 기관에서 발간되는 자료든, 맨 앞의 발간사야 기관장 명의로 기록되기 마련인 법이니 무시하고,

'신토불이'의 '동의'라는 '귀한' '책'으로서의 동의보감을 읽는 사람 옆에서 이야기 듣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노릇이다.

 

수승화강이라고,

음의 기운은 오르게, 양의 기운은 내리가 하는 것이 원리라는데,

요즘엔 하체가 가느댕댕하게 스키니진을 입는 것이 유행이라 하니,

음허화동, 음이 비어서 화가 동하는... 감정과 정욕이 한없이 항진하는 세상이 되기도 한다는 해석도 들어둘 법 하다.

 

존재와 병은 분리될 수 없다.

죽은 존재에게는 아무런 병도 없는 법이다.

인간은 '순음지체'이거나 '순양지체'일 수 없다고 한다.

'음양화평지체'를 추구하는 동의학에서 '질병' 역시 '인간의 존재'와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대단히 복잡한 유기적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셈이다.

 

한미 FTA로 한국의 의료 서비스가 민영화 내지는 국민건강보험의 파산을 예고하기도 하는 걱정들도 있다.

유기적 관계가 깨어진 사회는,

그리하여 서로 통하지 않고 불신과 괴담만이 난무하는 사회는,

결국 '질병의 도가니'로 그 구성원을 몰아넣을 것은 아닌지 두려울 따름이다.

 

이 책에서 고미숙은 '동의보감'을 통하여 '삶의 비전'을 보자고 한다.

이 책이 부족한 점이라면, '낱낱의 전문 용어들에 대한 쉬운 설명'이다.

그렇지만 이 책의 장점이라면, 풍부한 철학적 해석과 비유를 통하여 낯선 개념이 곧장 이해되도록 하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 책의 상세 부분이 옳고 그름이야 전문가들이 판단할 영역이지만,

결국 삶이란,

바둑 한 판 두는 일처럼,

한 치 앞을 보기 힘든 '패' 싸움이 아니라,

'든든한 집'을 중심으로 살아나가는 요령을 깨우치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미생'의 '대마'는 한 순간 위기에 처할 수 있음을, 의학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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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금, 보험, 저축을 능가하는 노후대비'책'
    from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2012-11-01 18:16 
    '두통에는 진통제', '우울증엔 항우울제', '불면증엔 수면제'라는 것이 공식처럼 각인되고 있다. 그러나 시댁과 갈등을 겪는 전업주부의 두통과 학습우울증에 걸린 청소년의 두통이 과연 같은 질병일까. 또 시댁과 갈등을 겪는 주부에게 어깨 결림, 두통, 불면증, 소화불량, 생리통이 동시에 나타났다면, 이는 각각 정형외과, 신경과, 정신과, 내과, 산부인과에서 따로 해결해야 할 병일까. ─강용혁, 『닥터K의 마음문제 상담소』, 12쪽 예전에 손발이 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