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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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정작 봄은 우리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네.

행복을 찾아 길을 떠난, '파랑새' 이야기는 세상에 너무도 흔하다.

그렇지만, 늘 파랑새의 귀결점은 '우리집'이었다.

우리집의 핵심은 '나'다.

 

왜 읽는가?

저자는 카프카의 한 구절로 답을 대신한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카프카)

 

만약 나더러 독서 경험을 나누는 독서회를 꾸리라면 어떤 책을 꼽을까?

나라면, 조르바, 안나 카레니나, 미셸 트루니외, 광장, 법정, 손철주와 오주석 정도가 떠오른다.

시인 김선우나 장영희, 성석제 정도도 이야기할 것이 많을 것 같고.

 

이 책에선 이철수로 시작해서 최인훈, 이오덕, 김훈, 보통, 고은, 김화영, 카뮈, 쿤데라, 한형조까지 자신의 독서 세계를 일람하여 보여준다.

 

한형조의 '붓다의 치명적 농담'에서

 

내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리라는 기필 期必을 거두십시오.

세상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 오만과 아만을 버려야 합니다.

 

이런 구절로 독자의 독서 습관에서 '근기'를 중시하여야 하지, '양이나 질'에 매몰되면 안 되는 것을 보여준다.

책을 몇 권이나 읽느냐,

어떤 책을 읽는다고 남들에게 보여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삶 자체가 다 그렇다.

 

이철수 판화야

워낙 명문이 많지만,

 

땅콩을 거두었다

덜 익은 놈일수록 줄기를 놓지 않는다.

덜된 놈! 덜떨어진 놈!

 

심장을 콱, 움켜쥐는 말이다.

탐진치 삼독에 얽매이는,

줄기를 놓지 않는 나를 꾸짖는 소리 같다.

 

핑크 마티니의 <초원의 빛>을 들으면서,

삶의 속도를 생각한다는데...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서 자연에 대한 관조는 역시 탁월하다.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삶이다. 더이상

자라지 않고 두꺼워지지도 않고, 다만 단단해진다. 대나무는 그 인고의

세월을 기록하지 않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다.

 

무위는 존재의 뼈대이다.

나무의 늙음은 낡음이나 쇠퇴가 아니라 완성이다.

 

결핍이 결핍되어 있는 시대.

이런 말들을 얻는 일은 소중하다.

 

삶에서 만나는 사랑에 대하여,

보통의 이야기 한 도막.

 

우리 모두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해서 사랑에 빠지며,

우리의 무지를 욕망으로 보충한다.

 

사랑을 하게 되면, 나보다 상대가 중요해진다.

어떤 상대를 사랑하느냐에 따라, 사랑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인데,

비트겐슈타인도 인용하고, 저 뒤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등장하는 이야기다.

 

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우리의 농담을 이해하면 우린 재미난 사람이 되고

그들의 지성에 의해 우리는 지성있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훌륭한 사람과의 대화는 흥미롭고 재미있다고 한 것이다.

 

감각적 경험의 획기적 기억을 보통은 키스를 예를 들어 이야기한다.

 

키스는 모든 것을 바꾸어버린다.

두 살갗이 접촉하게 되면,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가,

암호화된 말의 교환은 끝이 나고 드디어 이면의 의미들을 인정하게 될 터였다.

 

물길의 소리

                                 - 강은교 -

그는 물소리는 물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렇군, 물소리는 물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
물이 바위를 넘어가는 소리,
물이 바람에 항거하는 소리, 물이 바삐 바삐 은빛 달을 앉히는 소리,
물이 은빛 별의 허리를 쓰다듬는 소리,
물이 소나무의 뿌리를 매만지는 소리……
물이 햇살을 핥는 소리, 핥아대며 반짝이는 소리,
물이 길을 찾아가는 소리…

가만히 눈을 감고 귀에 손을 대고 있으면 들린다.
물끼리 몸을 비비는 소리가.
물끼리 가슴을 흔들며 비비는 소리가.
몸이 젖는 것도 모르고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의 비늘 비비는 소리가…

심장에서 심장으로 길을 이루어 흐르는 소리가. 물길의 소리가

 

강은교의 시를 읽노라면, 키스보다 더 진한 감각적 경험이 서로 얽혀드는 몸의 시를 읽게 된다.

허리를 쓰다듬는,

뿌리를 매만지는,

햇살을 핥는, 핥아대며 반짝이는, 

몸을 비비는

가슴을 흔들며 비비는... 육감적 언어들이 얼마나 펄떡거리며 살아있는지...

 

작가는 책을 읽으면서 온몸이 촉수인 사람이 되려고 한단다. 

알랭 드 보통이나 오스카 와일드의 책을 읽고 나면 촉수가 더 예민해 지는 것 같다고 한다.

충분히 공감이 간다.

책을 읽을 때는 다양한 사고들이 서로 호환되고 지식이 쉽게 흡수되는 경향성이 

물매가 빠른 바닥처럼 속도감이 나니 말이다.

 

인생의 봄날이 있다. 

그 봄날에 만난 한 사람은 그냥 한 사람이 아니다.

세상 모두를 담고 있는 한 사람이다.  (291)

 

나는 지금 '한 사람'을, '세상 모두를 담고 있는 한 사람'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 봄날인가?

 

이 책을 읽고 나면,

밀란 쿤데라를, 안나 카레니나를, 한형조를, 카뮈와 김화영과 장 그르니에를 다시 읽고 싶어진다.

 

인생의 봄날,

세상 모두를 담고 있는 한 사람과 함께 읽고 싶은 '책'들과 조우하고 싶은 이라면, 기필,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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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2-03-25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읽으셨군요. 보물 같은 책이죠. 섬은 사놓고 아직 들추어 보지도 못했습니다.
아직 겨울안에 꽁꽁 갇혀있는 느낌이지만, 이제 곧 봄이 시작되겠지요.
해운대에서 누리마루까지 이어지는 동백꽃 가득한 산책길이 그립네요.

글샘 2012-03-25 20:07   좋아요 0 | URL
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책들이 참 좋더군요.
저랑 취향이 좀 비슷한 듯. ^^

장 그르니에의 '섬'은 아무때나 읽히는 책이 아니에요. ^^
도서관에서 1년 중 기분이 제일 나쁘고, 착 가라앉아서 사표를 쓰고 싶은 날,
그런 날 읽으면, 장 그르니에란 남자가 듣기 좋은 중저음으로 말을 걸어 올 겁니다.

화창한 날, 그 남자는 말 안 걸거든요. ㅎㅎ
 
짝사랑도 병이다
변종모 지음 / 가쎄(GASSE)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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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모를 거꾸로 읽고 있다.

어떤 작가를 거꾸로 읽으면 나쁜 점과 좋은 점이 있는데,

나쁜 점을 먼저 말하자면,

글이 아무래도 나중 것이 수려하고 많은 내용을 품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거꾸로 오를수록 글맛에서 버석거림이 느껴진다는 것.

그렇지만 좋은 점이라면,

글에서 느껴지는 맛보다는 순수하게 자기가 담고 싶은 것들을 가득 담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

 

이 책은 힐링 포토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아름답고 심금을 울리는 사진으로 가득하다.

최근에 나온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의 글들이

말랑하고 부드러운 사랑 이야기로 달착지근 들러붙는 글들로 가득하지만,

사진들은 거칠고 집중도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를 거쳐 '짝사랑도 병이다'로 거슬러 오르노라면,

그의 사진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눈에 확 들어온다.

 

부제가 'The blue love story'이고 '내가 사랑한 인도 나를 사랑한 이별'이지만,

인도 이야기도 착 감기는 말맛으로 살아나지 않고,

사랑 이야기도 절절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눈길을 사로잡는 히말라야와 인도 사람들의 굵은 눈망울이 가득하여 책을 읽기보다 보게 만든다.

 

세상에 외롭지 않은 것이 있는가?

일도,

사랑도,

생활도...(위로)

 

뭐, 이 정도로 버석거리는 글에서 위로를 받긴 어렵다.

어느 가족에게서 선물받은 깻잎 통조림 하나가 차라리 큰 위로를 전한다.

 

여행은 이렇다.

천원짜리 통조림 하나가 천만원보다 값지게 변한다.

여행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것 역시

지금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내는 것,

만들어 가는 것.

바로 곁에 있다는 것.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아는 법을 배우는 것.

늘 곁에 두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날마다 불만스러웠던 날들을 제조하며 살았던 나는

사소하고 작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작은 나의 마음을

손바닥보다 작은 통조림 하나가

야자수보다 높은 감동을 만들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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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 변종모 (A lie of yearning for nobody)
    from 512 2012-10-14 14:57 
    노련한 여행자의 솔직한 이야기.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한국에 돌아오면 제일 처음으로 읽고 싶던 책. 다른 몇 권의 책을 읽고 나서야 이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친구 집으로 향하는 전철 안에서 몇 장을 읽고, 오랜만에 만난 녀석들과 술을 한잔 마셨습니다. 목구멍까지 술이 차올라 찰랑거렸으니, 어쩜 술 한잔이라 하기엔 좀 과할 정도였을지도 모르겠군요. ...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시선 344
김선우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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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이제 마흔을 넘어가면서,

봄날은 간다~는 노래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난 아직도 창창한 봄이야, 뭐래?'하고 되쏜다. ㅋ

 

그 여자, 봄바람 났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 가더라 / 오늘도 꽃 편지 내던지며 /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유행가 가사)

 

김선우는 천상 여자고, 대지의 어머니의 심장을 가진 시인이다.

그가 마흔 넘어, 봄날은 간다~ 대신,

열띤 볼을 부비며 사랑을 노래한다.

이쁘다.

이뻐 죽겠다.

 

너에게 가는 길이다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무언가 되고 있는 중인 아침...

만약에 말이지 이 사랑 깨져 부스러기 하나 남지 않는다 해도 안녕 사랑에 빠진 자전거 타고 너에게 달려간 이 길을 기억할게

사랑에 빠져서 정말 좋았던 건 세상 모든 순간들이 무언가 되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

행복한 생성의 기억을 가진 우리의 어린 화음들아 안녕(사랑에 빠진 자전거 타고 너에게 가기, 부분)


능글맞게,

프로포즈도 아주 능수능란하게 할 줄 안다.

마흔 넘은 개띠 여자가,

차가운 기계를 싫어하는 여자가,

그 기계에서 막 빠져나온 뜨끈한 가래떡 들고 하는 프로포즈란...

 

그 애띤 사랑이,

정말 말랑하고 명랑해서 눈물겹다.

그가 말랑하고 명랑하게, 라고 말은하지만,

사랑이... 그렇게 명랑하기만 하랴마는,

그의 사랑이 끝까지 말랑하고 명랑하게 달려가기를 빌어 준다.

저기요........ 떡방앗간에서 우리 만날까요

차가운 기계에서 막 빠져나온 뜨끈한 가래떡 한 줄 들고

빼빼로 먹기하듯 양 끝에서 먹어들어가기 할까요

그러니까 우리, 한번쯤 만나도 좋은 때까지 말랑하고 명랑하게 한번 달려볼까요?(떡방앗간이 사라지지 않게 해 주세요)


존재론.

나의 존재가 세상을 가득 메운 인간의 존재를,
한 줄로 무너뜨린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아주 기뻐, 오늘...

제대로 사랑에 빠진 거 같잖은가?


시간은 항상 배가 고프지

너에게로 팔을 벌려 하루살이의 혀로 키스한다

‘안녕’이라고 인사해준 너라는 시집,

“안녕,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아주 기뻐 오늘”

백두 송이 나팔꽃이 핀 담장의 맨 끝에서

오늘의 시집 후기를 읽는다(그 시집, 나팔꽃 담장)


이 시집의 표제시에는,

독특하게 이탤릭체로 된 부분이 사이사이 끼어있다.

전체 시와 맥락이 이어지는 듯, 이질적이다.

그 부분만을 모아보면, 영락없는 연애편지. ㅋ

 

신을 만들 시간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우리는 다만 마음을 다해 당신이 되고자 합니다

사랑을 잃지 않겠습니다 그 길밖에

인생이란 것의 품위를 지켜갈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압니다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이탤릭체 부분 모음)


그래,

타자는 지옥이라는 세상에서,

우리가 서로의 신이라는 믿음으로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사랑이라면,

그래서 마음을 다해 당신이 되고자 하고,

사랑을 잃지 않겠다고 맹세한다면,

그것이 하나의 혁명이 될 수 있다.

사랑은,

모든 개체들의 우연한 마주침에서 연유한 하나의 신선한 혁명일지니...

 

쓸쓸하다,는 형용사

하지만 이 말은

틀림없는 마음의 움직임


쓸쓸하다,를 

동사로 여기는 부족을 찾아

평생을 유랑하는 시인들


유랑이 끝날 때

시인의 묘비가 하나씩 늘어난다 (쓸쓸하다, 전문)


시인의 가슴엔 늘 묘비가 하나쯤 서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묘비는 쓸어볼수록 쓸쓸한 빗돌일 것이고.

그 쓸쓸하다는 것은 정태적 형용사라기보다,

가슴아린, 아슴아슴해서 눈물을 핑~ 돌게 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동반하는 것이어서,

시인은 다시 유랑의 빗돌을 쓰다듬는다.

쓸쓸하게도...

 

시인이 하고 있는 사랑은 그러나,

쉽게 맺어질 것 같진 않아 아쉽다.

그 거리감,

그 적막함,

그 아득함...을 그는 '사람이 살지 않아서 좋았다'고 표현했으리라.

'나라고 할 것이 없어서 아주 기뻐'의 다른 한 짝이다.

가슴 뻐근한 아픔의 양쪽 다리가 아픈데,

그는 운명이란 말이 위로가 된단다.

 

운명이라는 말이 위로가 된다

이것은 처절하고 명랑한 연애 시집이다(시인의 말)


그래, 명랑한 연애 시집 속에

처절한 빗물이 흐르기도 한다.

그래도, 운명이란 말의 위로를 받아들일지,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해서 위로가 된다, 고 쓰고만 있는지...

 

어떤 사랑은, 사랑이되, 자신을 버리고는 지속되지 못한다.

아니 모든 사랑이 그런 것이라고,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은 그대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일이 아니라, 거꾸로 그대의 삶을 위해 나의 생명력을 북돋우는 일이어야 하는 것이다.(뒤표지, 이장욱의 글)


이장욱이 시집을 읽고,

사랑 이야기를

사랑에 얽힌 존재론을 펼친 이유도,

이런 독서 후기 때문일 게다.

 

이 시집에서 가장 철학적 완성도가 높은 절창은 [내꺼]다.

 

 젊은 여자 개그맨이 TV에서 연애시절 받은 편지를 읽는다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니꺼가]

 세 음절의 그 말을 힘주어 읽은 후 어깨를 편다 젊은 남자 가수가

 노래를 한다 밥을 먹다가 나는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멍해진다

 '내꺼 중에 최고'가 노래 제목이다 내꺼 중에 최고ㆍㆍㆍㆍㆍㆍ

 

 보채는 당신에게 나는 끝내 이 말을 해주지 않는다

[누구꺼? 당신꺼 내꺼]

 이 모든 소유격에 숨어 있는 마음의 그림자노동,

 그게 싫어, 라고 말하려다 관둔다 내가 좀더 현명하다며

[당신꺼]라고 편안히 말해줄 수도 있을 텐데

 여인을 업어 강 건네준 후 여인을 잊는 구도자의 자유자재처럼

 모두에게 속하고 어디에도 영원히 속할 수 없는

 말이야 천만번 못하겠는가 내 마음이 당신을 이리 사랑하는데

 그런데도 나는 [당신꺼]라고 말하지 않는다

 햇살을 곰곰 빗기면서 매일 다시 생각해도

 당신이 어떻게 내 것인가 햇살이 공기가 대지가 어떻게,

 내것이 아닌 당신을 나는 오 늘 도 다 만 사 랑 한 다ㆍㆍㆍㆍㆍㆍ([내꺼], 전문)

 

햇살이 따갑다.

당신의 머리칼을 곰곰 빗긴다.

그리고 생각한다.

당신의 머리칼 한 올,

내 것은 없다.

 

다만, 오 늘 도 당 신 을 사 랑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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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가지 행동 - 김형경 심리훈습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사람풍경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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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의 심리 에세이는 읽게 된다.

그러면서도 이 책들을 읽는 내 마음은 몹시 불편하다.

김형경을 읽기 싫다는 마음이 계속 일어난다.

왜일까?

 

내 마음 속에서 그를 밀어내는 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것의 가장 큰 지점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기댄 여러 가지 설명들에 대하여 나는 부정적이기 때문인데,

물론 정신분석의 훌륭한 점에 대하여 충분히 공감하는 영역도 있지만,

이제 어른인데, 지나치게 어린 시절의 상처만으로 문제를 확대해석하는 것은 아닌지,

어른이라면 어른의 언어로 삶을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의 불만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또,

마음이란 거울은,

자기를 비추어 볼 수 있는 유일한 매개가 되기 때문에 그를 읽지 않을 수 없다.

 

언제나 무언가를 비추려고 준비된 거울 하나가 있다.

내가 거기다 뭔가를 비춰보면, 거기 반사된 상이 맺힌다.

그 상이 망막에 비추이면 대뇌에서 알아챈다.

그런데, 그 거울이 깨끗하지 않다면,

그 거울에 금이 가 있거나, 거울이 평면이 아닌 굴절이 있는 것이라면,

비추일 때마다, 왜곡이 일어나고,

대뇌에서는 혼란이 생겨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걸 분석하고,

또 분석을 위해서 늘 거울을 관찰하고,

나는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 이른바 '훈습'인 모양.

 

훈습 기간을 보내면서 좋았던 점은,

외재화하는 문제 해결 방식을 없애간 것.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외부에 둘수록 상대에게 힘을 주고 자신은 무력한 상태로 머물게 된다는 것.

 

솔직히 새로울 것도 없다.

조고각하, 라고,

제 발 아래를 내려다 보라는 말이 있다.

제가 어디 서있는지,

문제의 원인과 해결은 자신에게서 시작하고 마친다는 가르침이다.

 

충탐해판,

충고, 탐색, 해석, 판단의 앞글자. 방어의 언어.

총고는 자기 생에서 실천해야 하는 덕목들을 남에게 투사하며,

탐색은 상대에게 존재할지도 모르는 위험 요소를 경계하는 일.

해석은 자기 생각과 가치관을 타인에게 덧씌어는 일,

판단은 제멋대로 남들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행위.

우리는 누구도 그렇게 할 권리가 없지만, 일상적으로 늘 그렇게 행동한다.

그 모든 행위의 배경에는 그렇게 해야만 자신이 안전하다는 불안감이 존재.

 

요말은 재미있다.

안 그래도 교사들에게 '상벌점제 실시'에 대한 연수를 해야하는데,

아이들에게 충탐해판하지 말고, 상점을 제발 많이 주라고 이야기할 계획이다.

교사들이 학생들을 비난하는 이유는, 불안감 때문인 거, 맞다. ^^

 

테메노스(융)를 갖도록 노력.

 

고대에 희생제의가 치러지던 신성한 공간.

개인의 내면에 만들어 가지는 심리적 공간.

 

성숙한 인간이라면,

자신의 테메노스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비밀의 화원'이 되었든, '비밀 상자'가 되었든,

나름의 생존 무기로 작용할 공간이 한 뼘 이상은 열려있어야,

그래야 성인이다.

 

예술가들이 무의식의 창고에 억압해둔 에로스/타나토스 욕구들을 승화시키는 이야기는 새로울 것도 없고,

 

인생은,

어떤 것이 아닌, 항상 어떤 것이 되는 기회.(빅터 프랭클)

 

삶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기회를 잡고 맞이하는 것이란 말은,

어른의 말이라 맘에 든다.

 

'서정주, 신부'의 콤플렉스를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다.

페미니즘적으로 분석할 수도 있겠고, 신화적으로 분석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나는 서정주의 '신부'를 '지나가 버린 사랑에 대한 회한'으로 읽는다.

 

한때, 나를 몹시 따랐던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난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할 생각이 없어 그에게 서운한 이별을 말한 일이 있다.

그 후로, 신부, 를 읽으면, 몹시 미안하다.

자기 중심적 사고에 휩싸여,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지 못하고,

내빼버린 행동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그렇게 마춤한 때를 놓쳐버리면,

오래오래 마음 아프게,

매운 재로 남을,

슬픈 노릇이기도 하다.

 

서정주, 신부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

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

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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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3-23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형경의 <사람풍경>을 흥미롭게 읽은 저로선 이 책도 끌리는군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대해선 글샘님의 의견에 동의해요. 성적으로만 해석한 것도 문제라고 보고요.

나를 몹시 따랐던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 그때 님은 열정이 없었던 거예요. 열정 없이는 연애도 결혼도
할 수 없는 일이니, 미안할 일이 아닌 듯해염.ㅋㅋ잘 모르겠지만, 제 생각엔 그래요.

글샘 2012-03-24 01:57   좋아요 0 | URL
저는 김형경 책을 읽으면, 계속 불편한 느낌이 남아요.
근데, 읽게 되죠. ^^ 프로이트 의존성이 높은 게 불편한 이유라고 지금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친구... 미안한 건 미안한거죠. 잘 모르겠지만...
서정주 시를 읽으면, 그런 감정이 살아난단 이야기였어요. ㅠㅜ 그저... 사노라면 그런 미안함이 남을 수도 있는 거죠.
 
독립연습 - 서른이 넘으면 자기 마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
황상민 지음 / 생각연구소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독립,

아이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어른들로부터 탈영토화하게 되고,

그걸 알고도 모르는 체 눈감아 주면서 어른이 되도록 도와주어야, 아이는 독립한 성인으로 자랄 수 있다.

 

그러나, 봄(sex)을 생각만 하고 있는 사춘기 아이들에게,

학교와 사회는 잔인할 정도로 '수도사'같은 삶을 강요한다.

자연스럽게 이성 친구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통하여 삶의 독립을 꿈꾸게 될 시기를,

군대 이상의 가혹한 질서 속에서 죽은 듯이 살아내게 되는 곳이 '학교'다.

 

학교를 졸업한다 해도, 한국인의 성 문화는 가히 엽기적이다.

자연스러운 이성 교제를 위한 공간으로서 독립된 공간을 꿈꾸는 나라 아이들과는 달리,

성인이 된 20대, 30대들도 부모들의 주거 공간에서 결혼하기 전까지 부자유한 삶을 산다.

한국의 도심에 그렇게 '모텔'이 많은 이유다.

 

부모에게서 자연스럽게 독립하지 못한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늘 부자유함을 느낀다.

가슴 가득 울화가 담겨있을 수도 있어서,

결혼 후에도 새로운 사랑을 찾아 방황하곤 한다.

슬픈 나라다.

 

독립은 가정에서, 학교에서 자연스럽게 가족, 친구 관계를 통하여 이루게 된다.

그런데, 한국은 결혼 후에도 가족은 족쇄로 기능한다.

부모가 재산이 많으면 더 독립하기 어려운 올가미로 작용하고, 재산이 없으면 부양의 책임으로 또 올가미를 쓴다.

친구, 동창, 직원 회식 등으로 아직도 유교적, 봉건적 '종법 사회의 가족 의식'이 모든 구조에 침투해 있어서,

한 잔 걸치고 나면, '형님~'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왕따가 되어버리곤 한다.

(근데, 저자의 가족관에는 좀 모순이 있다. 결혼하면 더 많은 가족이 생긴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데,

결혼하면 독립해야지, 더 많은 친지가 생기는 일은... 글쎄, 한국 사회에서 독립에 더 제한점을 두는 것 같은데...)

 

학습되지 못한 독립은 연습이라도 해야 한다.

 

이 책의 상담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 가장 힘있는 이야기는 이것이다.

 

과거의 상처를 찾아내 약을 바르고 치유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상처만 들여다보면서 '이것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고 징징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과거의 경험은 나를 키워온 수많은 것들의 일부분일 뿐.

상처 역시 우리가 살아온 날들이 남긴 아주 작은 흔적에 지나지 않는 것.(107)

 

심리학의 '프로이트'은 인간을 이해하는 한 기초가 되는 것이지,

어린 시절의 상처를 평생 안고 사는 것이 정상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스스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세상이 나를 떠났을 때 나를 찾아오는 사람.

 

이것을 가장 멋진 친구의 정의라고 한다.

누군가에게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줄 수 있는 독립된 마음이 그만큼 중요하리라.

 

누구에게나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똑똑한 사람이든 돈이 많은 사람이든 모든 걸 가진 사람은 없다.

또한 누구에게나 숨은 열등감이 있다.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꽁꽁 감추지만 나쁜 남자들은 그걸 용케도 알아낸다.

나쁜 남자들은 똑똑한 여자들의 그런 부분을 자극한다.

숨겨둔 열등감을 찾아내 아프도록 찌른다.

똑똑한 여자들은 자신이 숨겨둔 열등감, 부족한 부분을 알아챈 남자에게 이끌린다.

여태가지 그런 남자가 없었다는 게 이유다...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고 아무리 뜯어말려도 듣지 않는다.

이미 자기 자신이 똑똑한 여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153)

 

난 나쁜 남자인 걸까?

그런 게 잘 보이는데...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

있는 그대로의 나다.

나를 감추고 억누르며 살아온 지금까지의 나를 향해 과감히 '노'라고 외쳐야 한다.

 

아무튼,

청소년기부터 아이들을 독립하도록 도와주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학습되지 않은 독립이라면, 성장하고 나서도 연습해서 얻어야할 것이 독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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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2-03-22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는 중인데 왠지 뭔가 느낌이... 꼭 떫은 감을 꾸역꾸역 먹는 그런 떫은 느낌이나요...

글샘 2012-03-22 16:31   좋아요 0 | URL
지금 읽고 있는 마중물님의 고민과 방향이 달라서 그런 느낌 아닐까요?

저는 심리학자가 쓴 책에서, 프로이트 이론에 매달리면 바보다~ 이런 글 첨봐서 신선하던데요. ^^

2012-03-27 0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